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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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6 ]

16    <여름연가>(외3수) 리영해 댓글:  조회:120  추천:0  2023-03-07
저자: 리영해     여름 연가    玉光 / 리영해   해묵은 느티나무에 앉은 뻐꾹새 입에서 뜨거운 아침이 터져나온다   더운 낮, 매미소리는 너와 나의 유년으로 돌아가 나로 하여금  여름 편지를 쓰게 한다   글을 쓰는데  가슴이 왜 이리 뜨거워질가 가슴 뜨거운 건 여름 탓만이  아닌 것 같구나   내 작은 가슴을 키웠던 맨드라미 봉선화 접시꽃들 괜히 우리 연가를 훔쳐 듣고 검연쩍게 웃음을 던지며 여름 앓이를 하는가 보다     가을 동심       허수아비가 흔든 황금물결 일렁이는 동심의 애틴 얼굴들이 벼 익은 논두렁에서 소리친다 놀란 메뚜기 방아깨비 당차게 뛰고 긴 석양 길 고추잠자리 맴돈다   그런 시절이 이젠 꿈만 같다 지금 개울물 흐른 소리  지금 넓고 깊은 파란 가을  지금 노랗게 익은 벼들 도화지 위의 삶이 수채화로 변해버렸다   빛바랜 탐욕도 지나간 애증도 털어버리고 알알이 숨겨둔 정(情)을 꺼내며 가을 허수아비처럼 가을 동화처럼 살리라     가을 사랑   가을엔 지나가던 사랑이라도 어부의 그물에  물고기가 걸리듯 내 마음그믈에 덜컥 걸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여직 남국의 관문 밖에 못다한 노래를  주인 없는 문패처럼 걸어놓았습니다   태양과 별의 운명처럼 외로운 내 곁의 빈자리에 서러운 발걸음을 참아야 했습니다   이젠 숙성되여버린 세월의 짝 찾은 갈매기처럼 참그림자와 동행하며 황혼의 사랑은 함께 노을이여야 합니다     가을 편지   찬 이슬 내릴 때  마지막 한잎에 누군가의 그리움을 생각하며 한줄 두줄 끝까지 가을편지를 씁니다   엽서 받을 때의 마음으로 폰 열 때의 설렘으로 멀고 긴 회한을 넣고 애틋한 사연도 넣어  가을 여백에 사랑을 채워봅니다   마침표와 쉼표 아쉬운 짧은 여백도 다시 깊게 훑어보고 웅크린 봉투 봉인하여 가을 냄새에 실려 보냅니다                                        2022년《연변문학》제12기에서
15    <꽃> 외 3수 박금춘 댓글:  조회:99  추천:0  2023-03-07
외 3수 작자: 박금춘     꽃            박금춘   씨앗이 풀이 되는 동안 해살은 내리고 내렸다 풀이 꽃을 떠이는 동안 바람은 흐르고 흘렀다   구만리에 사랑이 충만할 때 황혼빛만 남아도 좋지 꽃이 폈잖아 꽃이 웃잖아     진달래                  박금춘   봄을 맞아 누가 가슴  활짝 열었나   봄향기 물씬 실은 봄바람 솔솔 불면   고향의 뒤동산은 가슴 열어버린 진달래투성이     또 한번                     박금춘   해살이 사랑이 될 때 또 한번 그대 사랑하고 싶다   바람이 감사가 될 때 또 한번 그대 사랑하고 싶다   꽃이 향기가 될 때 또 한번 그대 사랑하고 싶다   감사에 감사를                           박금춘   아침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면 아름이 벌게 두 팔 벌리고 그 해살 가득 안아본다 순간 해빛을 임신한 산모가 된다 하루가 차례지고 그 하루가 끝없이 열리면 사랑하는 사람과 축복을 나누고 감사한 마음과 감사를 나누며 저녁노을 필 때까지 행복하리라 나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인 것을   2022년《연변문학》12월호에서
14    <우리 어머니> 류영자 댓글:  조회:90  추천:0  2023-03-07
우리 어머니 류영자   “밥 빨리 줘.” 어머니가 자꾸 재촉한다. 주방에서 팽이처럼 돌아치던 나는  “알았어, 알았어. 좀만 기다려요.”라고 연신 대답하면서도 어머니 점심끼니까지 미리 준비해놓느라 하던 일을 멈추지 못한다.  서둘러 과일을 깎으면서 어머니 쪽을 훔쳐보았다. 기다리다 못해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초조한 눈길로 주방 쪽을 보고 있다.    매일 아침, 어머니가 나한테 건네는 첫마디가 밥을 달라는 것이다. 내가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아침시간이면 90세 고령의 어머니는 어김없이 칭얼거리며 밥재촉을 한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는 일이 탐탁치 않은듯 잔소리가 많던 어머니가 언제부터인가 아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음식 투정도 하고 영양제를 무져놓고도 약 사오라고 생떼를 부린다. 귀도 점점 멀어져서 명령조로 높고 짧게 말해야만 그나마 알아듣는다. 어머니는 기억력도 쇠퇴해지고 점점 고집스러워진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직장인인 나로서는 버겁고 힘들다. 그러나 지금까지 입원치료 한번 안하고 이 딸의 이름을 똑똑하게 기억해주는 어머니가 옆에 있어서 나는 비록 몸은 피곤하나 마음속으로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운신이 힘든 어머니는 바깥출입이 거의 없다. 하여 주말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하고 목욕을 시키고 맛집에 찾아가 어머니가 반기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나의 주말계획중에서 첫째 가는 일정으로 되였다. 어머니가 이젠 귀도 많이 어두워져서 예전처럼 내 얘기를 잘 들어줄 순 없어도 그냥 나를 쳐다보며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마냥 즐겁다.   어머니를 모시고 산책 삼아 외식하는 주말의 어느 날,  11시 쯤 되여 나는 마치 어린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가듯 어머니한테 옷 입히고 신발 신겨서 자가용차에 태웠다. 어머니가 반기는 우육면 먹으러 가려고 핸들을 잡았다.  가는 내내 어머니는 차창 밖으로 거리를 구경하며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식당 안에 들어서니 피크타임이라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벽 쪽 모퉁이 조용한 곳에 앉았다.  음식이 올라오자 어머니는 냉큼 닭다리 하나를 쥐더니 드시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치아로 련속 닭다리 두개를 뜯고 나니 어머니의 손이고 얼굴이고 앞치마까지 기름범벅이 되였다. 어머니는 기름진 손으로 우육면에서 소고기를 집어 나의 접시에 갖다 놓으려 하였다. 그러다 그만 떨구는 바람에 국물이 나의 옷에까지 마구 튀여 말이 아니였다.  외식할 때면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다. 어머니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나의 눈치를 본다.  이렇게 어머니의 약한 모습을 볼 때마다 한때는 남정네들 못지 않게 농촌에서 억세다고 소문 났던 우리 어머니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어 코등이 시큰해난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린근 향진에까지 이름이 날 정도로 손꼽히는 담배재배기술원이였다. 전 향 몇십명 되는 담배재배기술원중에 유일한 녀성이였던 어머니는 남성들 못지 않은 뚝심과 끈기로 담배농사를 지었다. 봄 모종부터 시작해서 입담배 건조까지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아 해마다 전 향에서 담배농사수입 일등이란 계관을 안아오군 하였다.  아버지가 대대당지부 서기직을 맡고 일하다가 동란시기 심한 박해를 받고 중한 페질환 환자로 집에 누워있었기에 아버지 병시중이며 집 안팎 모든 일은 오로지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했다.  심지어 어머니는 웬만한 남정네들도 혀를 두른다는 발구로 나무를 나르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학교 다니는 두 언니를 데리고 직접 나무를 하면서 억척스레 살아왔다. 그래서 내 인상 속의 어머니는 그 어떤 곤난에도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강인한 성격의 녀성이고 내가 제일 자부하는 훌륭한어머니였다.   집에서나 바깥에서나 억척스레 일해오던 어머니가 지금은 사고만 치는 어린아이로 변하다니... 착잡한 심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는 동안 어머니는 밥상 우가 범벅이 되든 말든 우육면만 드신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화도 나지만 그래도  90고령의 어머니가 9살 되는 개구쟁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보인다.   “천천히 잡숴, 체하겠수.”  나는 웃으면서 휴지를 뽑아쥐고 어머니의 입이며 손이며 그리고 음식물이 떨어진 식탁 우를 깨끗이 닦았다.  행여나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볼가봐 주위를 살피던 순간, 건너편 문어구에 앉은 회색 코트에 안경을 건 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흰머리를 정연하게 빗어 올린 그 할머니는 우리 옆집에 살던 교수할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교수할머니는 어렵게 오누이를 키웠는데 자식들 모두 공부를 출중하게 잘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을 졸업하였다. 아들은 미국류학을 갔다가 그 곳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딸은 상해 모 대기업 대표직에 있어 돈을 엄청 잘 번다고 들었다. 평소에 자식들이 자주 련락을 해온다고는 하나 설명절 때에 교수할머니가 늘 혼자서 쓸쓸히 보내는 모습이 많이 외로워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해서 딸이 불시로 찾아왔다. 딸은 부랴부랴 많은 책과 짐들을 처리하고 교수할머니를 양로원에 모셔가는 것이였다.  자그마한 트렁크를 들고 우리 집문을 두드리며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교수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보금자리를 떠나 자식 뜻에 따르는 그 할머니의 애절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수할머니생각을 하다 말고 다시 고개를 쳐들다가 맞은켠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 할머니는 얼른 눈길을 돌려 내 눈을 피했다. 저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발끝을 내려다보는 것이였다.  홀로 식당에 와서 점잖게 식사를 하면서 우리를 부럽게 바라보는 그 할머니의 정겨운 눈길이 점심식사 내내 나의 눈에 밟혀 마음을 아리게 했다. 남의 일이지만 남의 일 같지 않은 고독한 그 할머니를 보면서 참으로 안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의 휴대폰이 울리더니 외지에서 사업하는 딸애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 뭐하세요?” “응, 할머니하고 밖에서 우육면 먹는다.”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어머니를 애 먹이지 않아요?” “내가 사준 화장품 어때요?” “요즈음 비타민은 꼬박꼬박 잡숫고 있어요?” 딸애가 련주포 같은 물음을 쏟아낸다. 나는 기분 좋게 딸애의 아양을 다 받아주었다.  딸애는 “어머니, 오늘 점심값은 제가 보낼게요. 할머니하고 맛 있는 것 많이 드세요.”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늘 다정다감한 딸이다. 외지에서 제 사업하랴 바쁠 텐데 틈틈이 시간을 내서 전화로 곧잘 안부를 묻군 한다. 가끔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할머니 몫부터 시작하여 온 집 식구들의 선물을 가득 들고 와 어른들을 즐겁게 해준다. 이런 딸을 보고 직장동료며 친구들이 훌륭한 딸을 두었다고 엄지를 내민다. 아들 둘을 가진 둘째언니는 내가 효녀를 두어서 로년에 복 받을 거라며 부러워한다.  정말로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딸은 우리에게 지극정성이다. 남들 말대로 하면 나는 앞으로 어머니가 생활해온 것처럼 딸집에 가서 딸의 효성을 받으면서 만년을 근심걱정없이 행복하게 보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딸이 아무리 심청같은 효심을 가진 효녀라 해도 나는 딸한테 기대지 않고 사회를 위하여 유익한 일도 많이 하면서 만년의 생활을 펼쳐나갈 로후계획을 하고 있다.   머지않아 나도 어머니처럼 천천히 늙어가고 쇠잔해지며 주름투성이로 변해가겠지만 어머니처럼 세월의 등에 엎혀 세월따라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흘러가는 세월의 손목을 잡고 세월 앞에서 세월을 주름잡으며 세월과 더불어 건강하고 생기가득하고 세상에 기여하는 존재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엮어나갈 것이다. 여러가지 취미생활로 자기성찰을 부단히 하면서  어느 류행가 가사처럼 “늙어가는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나의 모습을 흐르는 세월과 함께 즐기면서 지켜볼 것이다. 만약 인생의 끝머리에 서게 되면 사회와 자식들한테 부담 끼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로후 생활방식을 고안해 사회와 함께 즐기고 행복을 만끽할수 있는 멋지고 참신한 노후생활방식을 창조해나갈 것이다. 정말 혼자 상상만해도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피여나는 스스로 설계한 로후생활계획이다.   “띵동” 하고 위챗으로 딸애의 문자가 날아왔다. 살짝 떨리는 손끝으로 딸이 보낸 붉은 봉투를 꼭 찍었다. 200원이라는 수자가 방긋 웃으며 사랑과 정이 넘치는듯 했다.  “집 가자.”  우육면 한그릇 굽을 낸 어머니가 집에 가자고 재촉하신다. “알았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딸이 보내준 돈으로 밥값을 계산하고 만족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따뜻한 이슬이 맺힌다. 어머니를 부축하여 조심조심 식당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금방 눈이 마주쳤던 할머니가 앉았던 밥상 쪽을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언제 떠나갔는지 없고 할머니가 잡숫다 만 국수 사발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져있었다.마치 할머니의 서글펐던 심정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사발에서는 모락모락 가느다란 김이 피여오르고있었다.  점점 식어가는 국수 사발을 보면서 나는 보다 많은 이 사회의 외로운 로인들이 사회와 가족들의 중시를 받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며 만년을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식당문을 나섰다.   식당문을 나서면서 나는 어머니의 손을 더욱 으스러지게 잡았다. 어린애가 되여버린 어머니가 나에게서 떨어질세라…    《연변녀성》 2020년 12월호에서
13    <이생은 미완성숙제> 김경희 댓글:  조회:83  추천:0  2023-03-07
인생은 미완성 숙제   김경희   인생살이 굽이굽이 아리랑 열두 고개, 집집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듯이 나도 살면서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 문제들에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인생 매단계마다에 의미를 부여하며 참으로 벅차고 억척스레 살아온 것 같다. 그렇게 내 인생의 끝없는 숙제를 완성하는 작업이 어느덧 습관처럼 굳어져버렸다.   ‘숙제’라고 하면 맨먼저 떠오르는 것이 학생시절의 숙제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숙제를 완성하지 못하면 선생님의 훈계와 부모님의 질책부터 걱정한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매단계마다, 인생의 매 고리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행하는 일을 다른 말로 숙제라고도 한다.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숙제는 그때그때 완성하는 습관을 들여야지 미루어 버릇하면 습관이 되여 무엇이나 다 미루게 되는 고질병이 생기게 된다.”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엄마가 어떻게 이런 명언을 남겼을가? 그 말이 우리 형제들에게 준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우리 여섯 형제는 어려서부터 숙제는 물론이고 무슨 일이나 미루지 않고 제때에 완성하는 습관에 길들여지다보니 가정이나 사회에서 남들보다 더 충실히 살고 이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자화자찬해본다. 나이 들면서 어쩌면 우리 인생도 끝나지 않은 숙제라는 생각에 늘 감개가 무량해진다. 인생에서의 숙제는 바로 자기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인생수업이다.     내 인생의 첫번째 숙제는 농촌에서의 간고한 생활을 이겨내고 오래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대학 꿈을 이루어내는 것이였다. 1969년, 나는 열일곱살 어린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곁을 떠나 농촌에 하향하여 집체호생활을 하게 되면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게 되였다.  집체호에 간 그 해 가을이였다. 우리는 강건너 산비탈에 있는 한전으로 조가을하러 가게 되였다. 내가 간 그 마을은 돈화시에서 약 60킬로메터 떨어진 시골인데 산비탈에 자리 잡은 밭에 가려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큰강을 건너야 했다. 당시 그 곳은 전기도 금방 들어온, 뻐스도 통하지 않는 아주 외진마을이였다. 큰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없었다. 우리는 10명밖에 싣지 못하는 쪽배로 강을 오고가면서 일하러 다녔고 휴일이면 종종 산을 누비며 산나물 캐러도 다녔다. 그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집체호 호장이 갈아준 낫을 쥐고 친하게 지내는 생산대 대장집 딸과 함께 먼저 배에 올랐다. 장난기가 심했던 우리 둘은 배에서도 히히닥거리면서 장난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배가 맞은켠에 거의 도착할 무렵 무슨 영문인지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휘청거렸다. 우리 둘은 “어어” 하다가 어쩔 새 없이 함께 물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물에 빠진 우리는 허우적거리면서도 본능적으로 살려고 서로 손을 꽉 움켜쥐고 누구도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다행히 남성사원들과 함께 배를 타다보니 그들이 잽싸게 아침의 찬 강물에 뛰여들어 우리를 구해주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제일 소중히 여기던 손목시계가 없어졌다. 그닥 비싸지도 않은 낡은 시계였음에도 어린 나이에 농촌에 하향한다고 할빈에 있는 큰형부가 보내준 선물이여서 소중하게 여겼다.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여 울었다. 온 마을에 손목시계라고는 나 혼자 가지고 있던 때였다.  옆에서 상심하여 우는 나를 측은하게 지켜보고 있던 부녀주임은 내 손을 꼭 잡고 “목숨을 살리고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금방 너희들을 구했을 때 둘이 꽉 끌어안고 한손에 쥔 낫 끝이 목에 대여있었어. 정말 천만다행이야.”라고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그 날 저녁에 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는 언니가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왔다. 나는 다시 설음이 북받쳐 언니를 붙잡고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목숨을 구했으면 되지. 그깟 시계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어.” 후에 언니가 알려줬는데 그 날 나는 온밤 잠꼬대를 하면서 시계를 찾았다고 했다. 내가 소리 칠 때마다 언니는 몇번이고 화뜰화뜰 놀라 바로 자지도 못하고 온밤 옆에서 뜬눈으로 밤 새우면서 울었다고 한다. 당시 전국적으로 대채를 따라배우는 열풍이 일어났는데 우리 생산대도 례외가 아니였다. 산비탈의 밭을 허물어 다락밭을 만드는 대공사가 벌어졌다. 매일 아침 종소리가 땡땡 울리면 우리는 눈을 집어뜯으며 일터로 나갔다. 한창 잠이 많고 공부할 나이에 우리는 일을 해야 했다.   그 날도 나는 우리 집체호의 친구와 함께 멜대로 흙을 나르게 되였다. 넘치게 담은 흙광주리를 메고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한발작 한발작 친구가 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그만 작은 돌멩이를 밟아 발목을 접지르며 가파른 산비탈에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가?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원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굽어보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뾰족한 돌멩이에 부딪쳐 다친 몸 구석구석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나 신음소리가 절로 나갔다. 그 날 밤, 나는 온 저녁 참기 어려운 고통이 몰려들어 앓음소리를 련발했다. 그후로 나는 일을 놓고 위생소에서 주사도 맞고 약도 복용하면서 상처를 치료했다.     그 때는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많고 많은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내며 용케도 버텨왔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나는 언젠가는 꼭 공부를 하고 싶었으며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잘 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을 이뤄야 할 목표로 삼았다.  힘든 체력로동으로 코피도 터지고 손바닥도 부르텄지만 나는 저녁이 되면 짬짬이 시간을 내여 책도 보았고 한어사전을 찾아가며 한어공부도 하고 일기도 빼놓지 않고 썼다. 또 고된 농촌생활을 체험하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 역경을 이겨내는 법,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법을 익혀갔다.    이렇게 나는 인생의 숙제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정성이 쌓이면 뭐가 이뤄지기 마련이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그렇게 노력한 보람으로 나는 끝내 연변재정무역학교에 입학하여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되였다.     내 인생의 두번째 숙제는 녀자의 숙명을 완성하는 것이였다. 1976년 재정무역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하니 벌써 내 나이 25살, 한창 시집 갈 나이였다. 부모님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나의 배우자감을 찾고 있었다.  나는 배움에 목 마른 사람인지라 학력을 배우자 선택에서의 첫번째 조건으로 꼽았다. 여기저기서 소개가 들어왔는데 그중 길림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는 대학생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사람은 째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인 데다가 아버지는 오래동안 와병하고 있어 로동력을 상실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식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당시 그 이는 대학에 다니면서 기초보장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말린 무우짠지만으로 끼니를 이어가며 어렵사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지식인이면서도 훈훈한 시골 사람들의 인심이 뼈속까지 배인 사람이였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지.’ 나는 그에게 시집 가기로 마음 먹었다. 대학 3년 동안 련애하면서 나는 물심량면으로 그 이를 지원해주었다. 그 당시 나의 로임이 37원이였는데 로임을 받자마자 15원을 뚝 떼내여 그에게 부쳐주었다.  그가 대학을 무난하게 졸업하자 우리는 식을 올렸다. 결혼할 때도 나는 사돈보기, 례단 등 여러가지 례법들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산 넘어 산이였다. 결혼후 신혼이 다 뭔지? 현실은 달콤한 꿀맛이 아니였다. 시아버지 병시중도 탈망살이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의 해마다 결혼하는 시동생, 시누이의 결혼준비까지 겹쳤다.  여러모로 가해지는 경제압력은 새각시였던 나를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새각시로서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기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지라 단위 호조금관리를 하면서 그때그때 보리고개를 넘어갔다.     한번은 남편이 출장 갔다가 돈지갑을 잃어버려 현금 60원이 급히 필요하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행여 남편사업에 영향이 갈가 봐 급한 불부터 끄려고 호조금에서 60원을 돌렸다. 그런데 며칠후 시골에서 대리교원하던 막내시누이가 나를 찾아와 해쭉 웃으면서 오빠가 돈을 구해줘서 학교 교원들과 함께 북경 구경을 잘했다면서 나한테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 일로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다투게 되였다. 지금생각해보면 큰일이 아닌데도 그 때는 하도 어려운 살림에 그렇게 속히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앉았던 것 같다.  시간이 얼마간 지난 후에야 우리는 화해하고 몇가지 약속을 했다. 그후부터는 크고 작든 간에 집안일은 먼저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그 덕에 지금까지 무난하게 잘살아온 것 같다. 어느덧 우리가 결혼한 지 거의 40년이 되여간다. 귀여운 딸애도 낳고 자잘하고 사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푸근한 맏며느리 역할도 맡아왔다. 시누이, 시동생들도 맏며느리인 내 손으로 결혼식을 치러줬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환갑잔치도 남 못지 않게 차려드렸으며 두분이 병환에 계실 때도 지극정성으로 돌봐드리고 세상 뜰 때까지 마음 다해 모셨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흘러 직장에서 한자리하던 남편도 정년퇴직하였고 딸은 영국 유명 대학의 석사학위, 청화대학 석사학위를 따고 요즘 말로 잘 나가고 있다. 주위의 지인 분들이 나를 보고 성공한 녀자라고 말한다. 이제 내 앞에 차례진 인생 세번째 숙제는 보람 있는 후반생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건강부터 잘 챙겨야겠다. 건강해야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즐기고 공익사업에도 많이 참여하여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2003년부터 나는 연변신세기리더십쎈터 소장직을 맡으며 근 15년간 1,500여명의 학원생들을 수료시켰다. 62기까지 학원생들을 수료시키면서 나는 재능봉사와 배려심이 뼈속까지 배게 되였고 이제는 아예 내 체질로 되여버렸다. 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한 학원생들을 보면서 더없는 보람을 느끼고 가슴이 뿌듯해나면서 짜릿한 행복감에 전률한다. 이외에도 나는 여러가지 공익사업에 적극 참가하고 있다. 꽃망울대학교입학등록금지원, 연변대학 평생교육동문회 연구생 대학 장학금지원,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사랑으로 가는 길〉 불우이웃돕기 등에 저그마한 후원금이라도 꼭꼭 지원을 한다. 그리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 〈녀성세계〉프로그람, 연변인민방송국 여러가지 프로그람, 연길아리랑방송에도 나가 객좌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요즘 나에게는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내 나이 70에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책 한권을 출판하는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려고 독서량도 늘이고 자료들도 차근차근 준비하며 짬짬이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어느덧 문학아카데미에서 발표한 글이 이미 10여편 되였고 ‘애심녀성컵’ 응모작품으로《연변녀성》잡지에 발표된 글도 5편이나 된다. 이렇게 부지런히 더 발표하면 책 한권이 되는 것도 멀지 않다.   이만큼 살아보니 삶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것 같다. 여직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이제부터라도 길지 않은 인생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을가? 와인잔 기울이며 남편과의 데이트도 즐기고 려행도 많이 하면서 잔잔한 행복 속에 자잘한 것들에도 감동하며 쉼표 인생의 묘미를 찾아볼란다. 앞서 집체호 때 친구들 3.8절 모임에서 한 중학교 동창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전해들었다. 모두들 착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 저세상에 가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번 병마와의 시련을 겪었었다. 1997년 음력 8월 초열흘,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자궁의 혹을 떼내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 나는 눈앞이 캄캄하여 견결히 수술을 만류하고 보수치료를 받으려고 어린애마냥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 한창 내 인생의 전성기였던 40대 중반에 이런 청천벽력이 내리칠 줄이야! 의사선생이 수술을 받지 않으면 나중에 종양이 악성으로 전환될 확률이 90% 된다고 알려줘서야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살고 싶다는 욕구와 가족의 권고로 나는 수술받기로 결심 내렸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였고 악성 종양이 아니였다. 그번 고비를 넘기고 나는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였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려고 더욱 노력했던 것 같다. 한번은 ‘존엄을 지키는 죽음’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연에 참석한 적 있다. “60대에 들어서면 죽음에 대한 준비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는 강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너무 와닿았다. 얼마나 오래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제 남은 인생을 건강도 챙기면서 취미생활도 마음껏 즐기고 싶다. 봉사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살고 싶다.   앞만 보고 힘들게 달려온 내 인생,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 나다.   결과보다는 인생 숙제를 하나 하나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즐기다 보면 내 인생 퍼즐도 바야흐로 수려한 한폭의 그림으로 완성되여가겠지. 나는 미완성된 그림 앞에 서서 벌써 혼자 감동하고 있다.  인생을 즐기면서 숙제를 완수해나가는 과정에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을 나를 떠올려보니 눈시울이 뜨거워난다.     《연변녀성》2019년 8월호에서
12    <새해를 맞으며> 댓글:  조회:220  추천:13  2023-01-03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외부 리영해 회원님께서 2023년 새해를 맞으며 쓴 두수의 시와 그 외 2019년《시향만리》통권에 출간되였던 두수의 시를 올립니다.    여러분, 지난해 주신 많은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소망하시는 일 모두 이루어지는 도약의 한해가 되시길 바라면서 가정에 건강과 행운과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새해를 맞으며(외 3수)       迎 新 年        玉光/李永海   旭日東天宿務開 家家祝福望多財 民安國泰和人類 萬事亨通願志培   아침해가 동쪽 하늘  해묵은 안개 걷어내고 집집마다 복을 빌며  재물 넘쳐나기를 바라나니 인민이 편안하고  나라가 태평하고  인류가 평화로워 만사형통에 품은 뜻이  곱절로 이루어지길 기원하네                                                                2023년  1월 1일     새해 아침을 맞으며   아침해가 안개이불  들고 얼굴 내미니   마을마다 굴뚝에서  밥냄새를 올리네    처마밑 참새가  지난 밤 붙은 '복’을 쪼으니   마당개도 덩달아 꼬리를 젓는다네                                                       2023년 1월 1일     情  缘                                                                                          有緣千里能相会 无尽思量两眼泪。 往事悠悠似水流, 个中甘苦难回味。 天涯海角盼君归, 聚散悲欢如梦寐。 与子同行苦亦甜, 真情更比黄金贵。   인 연     멀고먼 천리길도 연분이 잇닿으면 고운 정 미운 마음 회포를 풀련마는 끝없는 그리움속에 두 눈굽만 뜨겁고...   흘러간 세월속에 묻혀진 단맛쓴맛 님계신 곳이라면 천애지각 멀지않네 만남이 이별을 낳는 꿈결같은 인생사   내님과 함께라면 고생도 낙이되어 둘이서 걷는 길이 지쳐도 달콤하네 황금이 귀중하다만 사랑에다 비기랴    2019년 《시향만리》 통권에 출간   리별의 꽃비                                      리영해   그 사랑 무정하게  내 곁을 떠났어도 추억은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꽃비로 내리는 눈물 그리움을 남기네   지나간 고운 추억 마음속에 간직하고  가슴으로 쉼없이 불러보는 이름이여  저 산기슭에 홀로 핀 향기로운 들국화   햇살과 비바람에 메아리 가득 싣고  인생을 달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네 세월이 장난이라면 운명 바꿔 만나리   2019년 《시향만리》 통권에 출간    
11    <직업생애에서의 마지막 렬차> 댓글:  조회:173  추천:15  2023-01-03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조선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당지부 최정옥위원님의 '애심녀성컵' 제8회 생활수기 공모 입선작품 를 올립니다.    직업생애에서의 마지막 렬차  최정옥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체호에서도, 대대위생소에서도, 농촌당지부에서도 일을 했었지만 진정 직업생애의 시점을 꼽으라면 대학을 졸업한 후 나라의 통일배치에 따라 중학교의 화학교원을 할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후 나는 조동으로 다른 업에 종사했다. 그럼에도 직업생애에 종지부를 찍을 때는 평생 종사했던 일에 유감없이 원만한 마침표를 찍으려 생각했다.   나는 2010년 4월에 정년퇴직하고 시름시름 앓음자랑을 하며 가끔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고 드문드문 내 전업과 련관된 일을 하는 회사에 불리워가 기술지도도 해주면서 보냈다. 그 해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는 아들의 대학입시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아들의 대학입시 뒤바라지를 끝내고 한숨 돌리려고 하던 차에 마침 한 광천수회사로부터 기술지도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매주 두세번씩 회사에 가 기술지도를 했다. 이듬해 3월, 연변금강산식품주식회사에서 품질관리공정사를 모집한다는 초빙광고를 보자 바람으로 나는 련락을 취했다. 그런데 초빙 년령을 35세 이하로 제한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나이 때문에 평생 종사했던 일도 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그 때 내 나이 58세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였다. 하지만 난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연길시수도집단에서 전시 시민들에게 안전하고 위생적인 물을 공급하자는 사명을 받들고 몇십년을 하루와 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열을 불태웠었다. 하지만 그처럼 끓어번지는 열정도 오랜 세월 앞에서 서서히 식어가 따분하게 느껴질 때 나는 ‘내부퇴직’을 결심했다. “최주임은 고급공정사인데 어째 내부퇴직하는가요?” 대학후배인 총경리가 물었다. “인젠 나 또래 동료들이 다 나가고 젊은이들만 남았는데 자리를 내줘야지. 그리고 나도 제2의 인생설계도가 있는데.”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는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여 인생을 보다 령롱하게 살고 싶었다.     내부 퇴직한 이튿날, 나는 내가 가고 싶은 회사에 면접 보러 다녔고 이내 출근하게 되였다. 1977년급 대학졸업생, 교수급 화학분석 고급공정사, 수십년간 쌓아올린 전업기술실력은 나의 리력서를 묵직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여 35세 이하 제한조건도 무색해지게 가는 곳마다 쉽사리 통과되였다. 다년간 고신기술개발구에 자리 잡은 공업회사들을 주름 잡으며 책임감과 열정으로 가는 곳마다 회사 령도의 한결같은 절찬을 받아왔던 나인지라 스스로 대단한 자신감과 자부감을 안고 면접에 응했던 것 같다.  이런 나인지라 스스럼없이 “년령이 문제라지만 회사에 얼마나 필요한지는 이제 지내보면 알게 될 겁니다.” 하고 당돌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럼 고려해보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가 이틀후 면접에 응하라는 통지가 왔다. 그 회사의 리주임은 나를 곧장 리사장실로 안내하였다. 나를 보던 리사장은 일순 흠칫하는 눈치였다. 어디서 이렇게 나이 든, 게다가 겨릅대처럼 바싹 마른 할머니가 문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속셈이 꿰뚫어보였다. 나는 속으로 ‘이제 좀 지나 나한테 정복되지 않으면 내 최씨성을 고치겠어.’라고 다짐하고 리사장이 가리키는 걸상에 다소곳이 앉았다. 내가 자신감 있게 자신의 기본정황과 관점을 청산류수 같이 피력하였더니 차차 리사장의 눈길이 달라졌다. 나에 대한 태도가 눈길로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변하더니 “우리 회사에 오셔서 수고해주세요.” 하면서 대뜸 면접에 통과시켰다. 그리고 즉시 리주임더러 나를 교외에 자리 잡은 생산현장에로 안내하게 하였다. 정작 공장에 가보니 공장과 실험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어수선하였다. 원래 하던 일군이 인계인수도 없이 떠났기에 령부터 시작해야 하겠으니 막연하기 그지없었다.  “잘 고려해보고 답복하겠으니 나한테 일단 10일간의 시간을 주세요.” 하고는 실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나이 쉰여덟에 신체도 허약한데 그런 작업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 전혀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쌓은 경험과 전업적 우세를 리용하여 그 면모를 개변시켜볼 수 있지 않을가?’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직업생애에서의 마지막 렬차를 타고 한번 도전해보자!” 불현듯 이런 오기가 분수처럼 뿜겨나오면서 나를 흥분시켰다. 이런 흥분이 생기면 무궁한 에너지가 샘 솟듯 하며 최선을 다하는 내가 아닌가! 나는 확신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보기 위해 남은 열정을 다하리라고 속다짐하였다. 마음의 방선을 허물자 돌파구가 생겼다. 그 즉시로 문건과 자료들을 정리수집하고 일일이 체크하며 방안을 구상하고 계획을 세우고 나니 일정한 파악이 있게 되였다. 긴박감을 안고 밤낮을 이어가며 품질관리수칙과 감정에 관계되는 국가표준과 기업표준 등 문건들을 열심히 탐독하였다. 된감기에 걸려 말도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도 밤낮없이 문건 속에 파묻혀 살았다.   10일 기한을 한주 더 연장하고 이 난제를 돌파해나가려고 전력을 다했다. 출근 날이 다가오니 위구심이 스멀스멀 엄습해왔다. ‘출근하여 어디로부터 어떻게 착수할 것인가?’ 실험실엔 여기저기 자료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어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실험실에 널려있는 물건과 자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유리의기들과 화학약품들을 전부 등록한 후 정연하게 진렬하였다. 반드시 해야 할 감정항목과 표준을 정하고 그에 따르는 조작절차를 명확히 하였다. 생산작업장을 찾아다니며 직접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시범을 보였고 작업장의 위생환경과 관리규칙 및 각 환절에서의 조작규범을 제정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불과 한달도 안되는 사이 실험실 검사항목을 제정하고 20여종에 달하는 원본기록표를 설계한 후 그대로 실시시켰다. 수십여종에 달하는 제품 품질을 점검하였으며 새롭게 조작 규정과 절차를 제정하고 존재하는 문제점을 찾아내 대책을 연구하여 리사장한테 회보하였다. 어느 날, 리사장은 일부러 공장에 내려와 나의 부서를 찾았다. “최공정사님, 여태껏 전문가들이 여러명이 왔었지만 종래로 이처럼 실질적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조사보고서를 써낸 적이 없었습니다. 최공정사님만 믿겠습니다.” 그 한달 동안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아꼈고 퇴근후에도 수두룩한 문건과 자료들을 보느라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어떤 때는 너무도 피곤하여 들고 간 자료를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쪽잠을 자군 했다. 한달 새에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낸 나를 보고 남편은 은근히 근심하면서도 “내가 리사장이라면 당신한테 몇배 되는 월급을 줘도 아깝지 않겠소.”라고 탄복했다. 아니나 다를가 원래 신체가 허약한 나는 겨우겨우 지탱하다가도 몰래 신음소리를 내군 했다. 온몸에 열이 나고 해나른해나며 삼복철 해볕에 시든 풀처럼 축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불과 몇개월 만에 품질관리 서류들을 정리한 후 체계를 세우고 순서대로 배렬하였다. 하여 관련 부문 령도들의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기업의 효률은 생명과 같기에 그 곳의 빠른 절주는 사람을 분발시키고 성장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내가 일인다역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안된다. 회사에서는 퇴근후에 회의를 소집하거나 PPT로 강연도 조직하였다. 나의 년령을 고려하여 령도측에서는 나에게 PPT를 강요하지 않았으나 젊은이들과 어깨 겯고 일할 바에는 뒤떨어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스스로 컴퓨터를 자습했다. 하여 젊은이들 못지 않게 컴퓨터로 업무를 숙련되게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이 또한 령도층의 높은 평가와 신임을 사게 되였다. 물론 시초에 적지 않은 애로도 있었다. 검사항목을 증가하다 나니 필요한 화학약품 품종도 증가되였는데 “무슨 화학약품을 그리 많이 사는가?” 하는 오해를 받을 때가 제일 난감했다. 나는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랭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전승하고 고험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리해를 받게 되였다.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료해한 후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해주었다. 하여 나는 보다 당당해지게 되였으며 나이의 제한을 넘어 젊은이들과 어깨 겯고 일하면서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연변신흥개발구에 자리 잡은 새 공장 실험실 설계도 하였다. 회사에 출근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치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가운데서 어언간 5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이 5년 동안 사회와 회사에 한몫을 감당했다는 데에 뿌듯하여 성취감과 행복감에 찬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면서 휴식일이 없을 정도로 팽이처럼 바삐 돌아쳤지만 마음은 항상 충실하였다. 한해 두해 쌓여만 가는 년륜으로 단숨에 모든 일을 다하고픈 심정이였다. 열정을 불태우며 일하는 지금 시간이 그렇게도 소중하고 보람차다. 오빠가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저녁이면 한밤중까지 병시중을 들고 출근하면서 몇달 동안이나 버티였다. 남편까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에도 계속 끓어넘치는 열정과 책임감으로 사업을 견지하였다. 리사장은 늘쌍 나의 정신년령이 40대에 상당하다며 본 기업에 절박하게수요되는 인재이니 움직일 수만 있다면 70세 될 때까지도 계속 일해달라고 입버릇처럼 외우군 했다. 내가 한창 출근할 때 북경의 외손녀를 보살펴주어야 했다. 부득불 내 사정을 리사장에게 알렸더니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생산용수의 품질안전을 담보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실험하고 물의 품질을 확보한 후에야 시름 놓고 떠났다. 딸애네 집에 가있으면서 보니 기약한 시간보다 더 있어야 할 상황이여서 나는 과감히 사직서를 냈다.  리사장은 아무때건 여건이 허락되면 돌아오는 걸 두 손 들어 환영한다며 아쉬움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정든 회사에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며 내 직업생애에서의 마지막 렬차를 타고 종착역에서 하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아쉬워하는 걸 보면 직업생애의 종착역에 도착했어도 조금의 유감도 없이 사람들의 꽃보라 배웅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다. 이제는 새로 다가올 황금빛 황혼렬차를 탈 기대에 어느덧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연변녀성》 2022년 제11호에서   수상소감   안녕하세요! 우선 제8회 애심녀성컵 수기공모 시상식과 《꿈이 있는 녀성은 늙지 않는다》출간식의 원만한 진행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녀성들에게 삶의 터전을 가꾸어간 인생을 글로 적어갈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해주신 전국녀성애심포럼과 저에게 분에 넘치는 상까지 선사해주신 남복실위원장님과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시합니다.  저는 남을 감동시키는 녀성강자도, 그렇다할만한 관리자도 아니고 평생 눈에 띄지 않는 한 모퉁이에서 흰 실험복을 입고 한 과학기술일군으로서 조용하고 잔잔하게 마음속의 신조를 지키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과 나라에서 전업일군으로 양성한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일편단심 충성스럽게 일해오면서 직업생애에 후회없는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석양을 맞이하려고 작심했습니다.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퇴직 후에도 연길고신개발구에서 60고개를 넘은 나이임에도 전업우세를 리용하여 충직하게 일하는 것으로 여열을 발휘하는 과정에 이제 막 늘어만가는 년륜으로 긴박감을 가지고 그 시간을 쪼개 쓰면서 보다 많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으로 나라에서 무상으로 양성한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일하니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직업생애의 마지막 렬차에서 홀가분하게 하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렬차에 환승한 후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책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저는 이제 막 고래희를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한 녀성으로서 지나온 삶을 더듬어가며 더 보람차고 충실한 여생을 걸어가렵니다.
10    <가족의 또 다른 이름-사랑> 댓글:  조회:195  추천:2  2022-12-17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애숭이 처녀시절, 나에게는 아이들의 훌륭한 계몽교사로 되리라는 포부가 있었다.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던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행이 닥쳐왔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쓰러져버린 것이다. 후사를 각오하라는 의사의 말에 우리 가족은 지옥을 헤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생이 수술을 받은 지 한참 지나 나는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 한편을 보게 되였다.   “오늘 나는 아들애의 생명을 건 대수술—골수이식수술에 앞서 부모로서의 담보싸인을 하여야 했다. 허나 위험 확률이 성공 확률보다 더 높다는 의사의 말에 손이 떨려 좀체로 서명할 수가 없었다. 13살 난 아들녀석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이제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어린 것이 모진 수술을 받아야 한다니…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얼마나 좋을가. 어쩌면 영원한 리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예감에 억장이 무너지고 있을 때 쯤, 아들애는 수술실에 옮겨졌고 흐릿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당시의 정경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동생을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으로 대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의사와 간호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바삐 드나들었다.  “아니, 혹시?” 가슴을 조이며 몇번이고 붙잡고 물었는데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대여섯시간을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데 한 간호사가 나오더니 눈물을 쏟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상태가 위독해져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 어린 것이 글쎄 “우리 가족들이 속상해할 테니 절대 알리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절히 한마디를 남겼다는 것이다. 생명이 경각에 이른 순간에조차 응석 대신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는 어른스럽고 착한 애가 세상에 몇이나 될가? 아버지의 일기는 계속되였다.   “죽어가는 자식의 가냘픈 모습을 보며 아버지로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저주롭기 그지없다. 부모로서 치료비마저 지불할 수 없어 여태 수술을 미루어오다가 상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술을 받게 하였으니… 이 엄청난 빚을 가난한 농민인 내가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 수술후의 영양보충은 또 어떻게 시킨단 말인가?  아, 혼란스럽다! 아들아, 제발 살아서 나와다오…”   눈물로 얼룩진 아버지의 일기를 읽노라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시상식에서 상장을 받아안고 (오른쪽 두번째)   처음으로 백혈병 진단서를 받아쥔 날 가족의 처참한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초들초들 말라버린 입술로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는 불쌍한 동생, 너무나 갑작스러운 타격에 심장병이 발작하여 인사불성이 된 어머니, 떨리는 두 손으로 의사를 부여잡고 무작정 자신의 피를 빼서라도 어린 자식을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던 년로한 아버지, 이토록 처참한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던 22살 난 나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고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절망을 헤쳐나가리라 이를 악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사경을 헤매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생과 막대한 경제난으로 휘청거리는 부모님은 절망에 빠져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가족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을가? 이런 고민으로 애간장을 태우던 어느 날, 동생이 조금 차도를 보이자 나는 동생의 손을 이끌고 부모님에게 편지 한통을 썼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우리 부모님께: 존경하는 아버지, 어머니! 항상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점 부끄럼 없이 깨끗하게 사시는 두분의 미더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자식들은 자호감을 느낍니다. 자라나면서 그 누구보다 훌륭한 성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장과 영예를 따내며 남들의 부러움을 살 때마다 이토록 예쁘게 낳아주시고 옳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우리 부모님이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비록 평범하게 살아왔음에도 분명 가난한 삶이 아니라 풍요롭고 성공한 삶이였다고 우리는 긍정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자식농사를 잘한 것이 영원하고 진정한 것이니까요!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 즉 정직하게 살며 례의를 지키고 남에게 베풀 줄 아는 훌륭한 도덕품성을 가르쳐주셨으니 그것이 곧 삶의 지혜이자 유력한 무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금전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자책도, 비관도, 한탄도 마십시오. 아들이 비록 지금은 병마의 시달림을 받고 있더라도 사회에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떳떳하고 행복한 마음의 부자입니까? 우리 둘은 이제 다시 태여나도 아무런 주저 없이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딸로 태여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힘과 마음을 합쳐 고통을 딛고 일어서 행복한 가족의 미담을 엮어봅시다! 아들딸, 올림.”   이 편지를 받은 이후로 부모님은 많이 달라졌다. 더는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자식이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으려는 우리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그런 부모님들의 로고를 조금이나마 리해하고 함께 감당하고 싶어하는 우리 자식들의 작으면서도 큰 효성의 마음, 서로가 아픔을 감싸주고 보듬어주고 힘이 되여주려고 모지름을 쓰는 우리 식구들의 끈끈한 가족애가 하늘을 울렸던지 그 무서운 병마도 동생을 우리 곁에서 앗아가지 못했다. 오래동안 투병생활을 이어가면서 수없는 고통과 번뇌를 감내해야 했음에도 우리 네식구는 오직 사랑의 힘으로 이 크나큰 시련을 이겨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엄숙하게 나에게 당부하였다. “사위도 자식이라는데 난 네가 든든한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다!” 동생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속을 태워온 부모님의 의사를 내가 어찌 거역할가. 나는 냉큼 맞선을 보았다.    그이와 나는 지인의 소개로 어느 조용한 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얼굴을 들어 남자를 얼핏 본 순간 나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앉은키는 큰데 겨릅대처럼 말랐고 게다가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뭐야? 남편이 될 사람이 이렇게 비실비실하면 싫은데. 게다가 시력도 나쁘네. 그리고 선 보러 오는 남자가 단추도 잠그지 않고 나오다니. 상대방에 대한 례의도 없는 사람이네.’ 이렇게 속으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입을 열고 한다는 첫마디가 “저, 죄송한 대로 솔직한 말씀 한마디 드려도 될가요? 저는 화장을 한 녀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자연미가 더 좋지 않습니까?”라는 것이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워낙 얼굴화장에 신경을 쓰는 편인 데다 선을 보는 날인지라 분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두껍게 발랐으니…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자기도 안스러웠던지 그 남자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음식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요? 전 돼지고기를 좋아합니다. 하루 세때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나는 말고기든 당나귀고기든 심지어 기름개구리까지 다 먹어도 유독 돼지고기만은 안 먹는다. 아니, 안 먹는 정도가 아니라 돼지고기가 들어갔다 싶으면 국물만 봐도 코를 싸쥐고 밀어놓는다.  새초롬해 앉아있는 나의 표정을 눈치 챘는지 남자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바로 작별인사를 청했다. 얼씨구나 잘됐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마음에 들면 전화번호라도 물어볼 텐데 왜 아무 말 없이 그냥 보내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만날 의향이 없다는 거지? 재수 없네!’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찜찜하게 끝날 바에는 차라리 내가 속시원히 튕겨주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그럭저럭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남자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련락을 보내왔다. ‘그럼 그렇겠지, 내가 누군데, 너 오늘 녀자한테 거절당하는 맛 좀 봐라!’ 나는 쾌재를 부르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남자는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만나고 싶었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는커녕 도리여  “소개해주신 분이 하도 다시 만나보고 결정 지으라고 권고하셔서…”라며 말끝을 흐리우는 것이였다. ‘그러니까 뭐야? 자기는 정리하기로 생각이 다돼있었는데 남의 낯을 봐서 하는수없이 다시 나왔다는 거 아니야? 이 남자 웃기네! 난 뭐 좋아 나온 줄 아나? 그래, 오늘 어디 한번 당해봐라.’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하자니 소개시켜준 분의 체면도 있고 해서 렬악한 우리 친정집 가정배경을 실토정하면 십중팔구 저절로 물러나 줄행랑을 놓을 것이라 믿고 입을 열었다. “한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저에게는 열살 어린 동생이 있는데 백혈병진단을 받고 골수이식수술을 금방 받은 터라 집에서 엄청난 빚을 졌고 심지어 우린 집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보살핌을 받으며 삶을 유지해야 하니까 큰딸인 제가 모든 부담을 도맡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반응을 살펴보았더니 원래는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던 남자의 실눈이 화등잔 만해지더니 목석이 되는 것이였다. ‘그래, 놀랄 만도 하겠지. 이제 정신을 차리면 핑게를 대가면서 거절을 하려고 식은땀을 빼겠지. 더구나 권세 있는 부모 슬하에서 가문의 유일한 대학생으로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난 귀공자라니 나 같은 최악의 조건을 가진 녀자를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을 거야! 호박 쓰고 돼지굴에 들어갈 머저리가 어데 있을라구.’ 어쩌면 나조차도 스스로 이 밉살스러운 남자의 립장을 리해할 것 같은 엉뚱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을 때 쯤, 그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꺼냈다. “사업을 잘하려고 무척 애 쓰고 아주 락천적인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헌데 어린 나이에 그토록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도 사업에 의연히 열중하는 그런 강한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명랑하여 행복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제가 혹시 사정을 모르고 얘기중에 아픈 곳을 건드렸다면 량해를 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에게 그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면 먼저 친구 사이로라도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진심으로 돕고 싶습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뜻밖의 다정한 말에 내 마음은 옴짝달싹 못하고 그 남자에게 사로잡혔다. 나의 가장 아픈, 가장 여린 곳을 이 사람이 감싸주려고 하지 않는가? 용기를 내여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얼마나 진지한지, 꽁꽁 얼었던 내 마음이 삽시에 녹아버렸다. 훌륭한 남자에 근접하는 멋진 이 남자!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새롭게 다가오는 이 남자! 안경을 써서 쳐다보기도 싫었던 그 한쌍의 실눈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저렇게 되였겠다는 리해심으로 바뀌였고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꾀죄죄하던 모습도 대뜸 가식이 없고 대범한 스타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이든 스스럼없이 말하여 언어예술이 아쉽다고 보이던 것조차 솔직하고 털털하여 남자답고 멋 있어보였다. 이러니 어떻게 이 사람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있으랴! 나 스스로도 자신의 돌변에 당황할 정도였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리의 련애는 짝이 기운다는 뭇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장애를 딛고 더욱더 무르익어갔다. 마침내 결혼까지 하게 되였고 결혼후에도 남편이 련애시절의 낙언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잘 지켜주어 내내 고맙기만 하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남편은 가난한 우리 집 살림 때문에 장모가 잡아주는 씨암탉 한번 맛 본 적 없이 만날 김치에 시래기국 신세를 면치 못했고 변변한 대접 한번 받아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남편은 불평 한마디 없이 자기 월급에서 아껴쓰며 모은 돈을 달마다 처가에 생활비로 보태주었다. 그런 남편이 마냥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 한동안 남편이 며칠 련속 늦게 귀가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런 남편이 야속해났다. 동생이 주기적으로 외지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시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막중한 비용을 미처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일피일 치료날자를 미루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나는 동생의 병이 악화될가 봐 송곳방석에 앉은듯 불안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힘이 되여주지는 못할망정 저녁마다 어깨가 축 처져서 늦게 돌아오는 것이였다. 자연스레 나의 울분은 애꿎은 남편한테로 돌아갔다. ‘애당초 아예 돈 많은 남자나 찾아 시집 갔더라면 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손등이 다르고 손바닥이 다르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거구나.’ 불쌍한 동생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내 신세가 가증스러워나며 생활에마저 권태를 느끼게 되였다. 나는 반찬도 대충 있는 것으로 때우고 지어 남편의 빨래마저 제때에 해주지 않았다. 그것으로 남편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7시가 다되여서야 남편이 빙그레 웃으며 집문에 들어서더니 밥부터 찾는 것이였다. “흥, 내 속에서는 피눈물이 흐르는데 당신은 웃음이 나와요? 정말 너무해요. 여직껏 저녁도 안 드시고 뭘 하다 온 거예요? 남은 밥은 밖에서 식사하는 줄 알고 다 버렸어요.” 나는 매몰차게 내뱉고 찬바람을 휙 일구며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나의 사나운 기세에 억눌렸는지 남편은 식사도 못한 채 거실 쏘파에서 밤을 보냈다. 그런데 이튿날, 어머니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얘야, 어제 사위가 여기에 다녀왔네라. 글쎄 사처에서 돈을 꾸어다가 갖다주며 처남 병치료를 떠나라고 재촉하더구나. 네가 기다린다고 언몸을 녹이지도 못한 채 저녁도 마다하고 선자리로 돌아갔다. 원 미안해서…”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밀려오는 자책감에 이어 사랑의 난류가 가슴에 스르르 와닿았다. 나는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 무작정 남편 단위로 달려갔다.  그런데 나를 더욱 궁지에, 아니, 감동의 도가니에 빠뜨리는 일이 또 있을 줄이야! 길에서 남편과 친한 동료 분을 만났는데 “며칠전에 자원적으로 의무헌혈을 했으니 요즘 많이 피곤하고 힘들 거요. 단위에서 영양보충하라고 돈 좀 보태주었으니 닭알이라도 사서 대접해주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네? 헌혈이요?”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아니 그럼, 피를 뽑아서 허약해진 몸으로 돈을 꾸러 사처로 뛰여다녔단 말인가! 더구나 영양보충하라는 돈까지 모조리 우리 집에 가져다주고…’ 아! 내가 이토록 너그럽고 속 깊은 남편에게 앙탈을 부리며 야속하게 굴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을가? 후회, 감동, 속죄의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말을 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여러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나는 하얀 백지에 큼직하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라는 글을 쓰고 접어서 모자처럼 만들어 머리에 썼다. 그리고 문가에 정중하게 서서 식당 웨이터처럼 남편을 기다렸다.  익숙한 발걸음소리와 함께 문을 떼고 들어선 남편이 광대 같이 꾸민 나를 보더니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를 와락 껴안아주었다.그 한없이 넓은 어깨로 내 얼굴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그 이한테서 사람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음을 페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울어서 눈물, 코물로 범벅이 된 나에게 남편은 “이런 멋진 모자를 만들 수 있는 총명한 녀자는 아마 당신밖에 없을 걸, 정말 보기 좋구만.”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렇게 변덕 많고 엉뚱한 안해와 살면서도 마냥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편, 그런 미더운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분은 분명 하늘이 나에게 특별히 내려준 내 인생의 수호천사일 거야!’ 어느덧 동생이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해온 지도 20년이 다돼온다. 그 긴 세월을 우리 가족은 부모자식간의 조건 없는 사랑과 남편과 안해 사이의 애틋한 부부 사랑, 훈훈한 가족애로 병마와 싸워 경이로운 하루하루를 맞아오고 있다.  비록 의학적으로 백혈병에 한해 완전히 낫는다는 확진을 못하기에 우리는 아직도 동생의 백혈병이 재발할가 봐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제 더는 백혈병을 두려워하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끈끈한 가족애가 있으니까!   그래서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수상소감 최보라 (최미화, 연길)      13살 난 어린동생이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받고 온 가족이 좌절과 고통에 빠졌을 때 내 인생에 ‘수호천사’처럼 등장하여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 무던한 남편의 사랑과 자식의 병간호로 심신이 지친 부모님들께 자식으로서 용기와 힘을 실어드리고저 했던 우리 남매의 소박한 효도의 마음이 불치병도 이겨내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이 소중한 것이 바로 가족간의 끈끈한 사랑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시련도 견뎌낼수 있는 강력한 정신적무기가 아닐가싶습니다.  지금 이 시각도 가족의 아픔으로 고통을 겪고있을 환자 가족들에게 조그마한 힘이 되고저 썼던 저의 글이 전국애심녀성포럼 ‘애심녀성컵’ 제5회 생활수기 응모에서 가작상에 당선되여 빛을 보게 되여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앞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할수 있는 글을 많이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변녀성》 2019년 10월호에서
9    <비석> 댓글:  조회:172  추천:5  2022-12-11
'애심녀성컵' 제6회 생활수기 응모 수상 입선작품 비    석 김정애         내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친정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안고 울면서 시작한 결혼생활이였음에도 나는 친정부모 못지 않은 시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다.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큰 버팀목이 되여주신 시부모님께 고마웠던 일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바로 비석에 얽힌 이야기이다.       친정아버지의 3년제까지 지내고 나는 “녀자는 시집 오면 시집 산소를 다니는 게 우선이여야 한다.”는 시아버님의 말씀 대로 10년간 시집 산소만 다니고 친정아버지 산소는 오빠와 올케가 돌보았다.      생전에 락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다가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가 너무 마음 아프다면서 오빠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빠짐없이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군 했다. 언젠가 외지에 출장을 갔을 때에도 오빠는 일부러 짬을 내서 아버지 산소에 찾아오는 정성을 보였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그렇게 정성을 다 쏟던 오빠가 몇해전에 갑자기 지병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아버지 산소는 출가외인인 내가 돌보게 되였다.     그 해 추석이여서 산소에 찾아갔는데 할아버지, 큰아버지 묘지와 나란히 있는 아버지의 묘지에만 비석이 세워지지 않은 걸 보고 나는 내심 서운해나서 사촌오빠한테 비석을 세울 의향을 비추었다. 그러자 그 날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올케가 나에게 다른 말을 꺼냈다.     “옛날부터 녀자는 출가외인이라는 말도 있잖소? 시집 산소도 있는데 해마다 친정 산소를 다니면 시댁 눈치도 보일 텐데 차라리 아버지 묘지를 평으로 잡고 더 다니지 않는 게 어떨가 싶소. 다 정애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요.”     올케가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은 알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은 한없이 슬퍼졌다. 이렇게 아버지를 잊어야 한단 말인가? 소리없이 화장실에서 설음을 달래려 했으나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내 마음속 거룩한 존재나 다름없는 친정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친정아버지는 17살에 참군하여 몇차례 전쟁에 참가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10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부모님들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하여 아버지는 한평생 부모님들의 마지막길을 지켜드리지 못한 설음을 안고 살았고 나중에 죽거든 부모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였다.     결혼하고 10년 동안 엄마는 불임으로 엄청 고생하였는데 가까운 친척들은 아버지한테 리혼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한 인생이다. 애를 못 낳는다고 갈라서는 법이 어디 있냐?”면서 오히려 친척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제대후 아버지는 줄곧 공안부문에서 사업하였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훌륭한 형사경찰이였다.          1980년대초에 연변을 들썽한 총기살인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범인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으셨던 아버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범인을 나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여 2등공을 기입받기도 했다. 지금처럼 통신설비가 편리하지 않을 때라 아버지가 며칠째 소식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식구들이 매일 조마조마하게 보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뒤늦게 자식을 본 아버지는 우리한테 매 한번 대지 않고 끔찍이 사랑해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시집 가는 것을 끝내 못 보고 돌아갔다. 그래서인지 살아오면서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공부는 잘하는 애와 비기고 생활은 못한 애와 비겨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내 귀가에 쟁쟁하다. 생활에서는 근검하고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던 아버지의 간곡한 가르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친정아버지의 산소문제가 거론되고나서 며칠후 남편이 조용히 나한테 얘기를 꺼냈다. 사실 내 고민을 진작에 알아차린 남편이 며칠전부터 시아버님과 함께 여기저기 비석을 파는 집들을 돌아보면서 내 마음에 들 것 같은 비석을 몇개 골라놓고 가격까지 흥정하고 왔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내가 시간이 될 때 함께 가서 비석을 정하고 돌아오는 중양절에 비석을 세우면 무난하다고 하니 그 날로 잡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이럴 수가…)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처사에 너무 고마워 목이 꺽 메는 것 같았다.     다음날, 우리 부부는 시아버님과 함께 가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비석을 하나 골라놓고 중양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연변의 10월은 쌀쌀한데 나는 그 날 비만 오지 말았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비가 오면 비석 세우는 일도 어렵거니와 더구나 행사에 참가한 분들이 추위로 고생하는 것이 미안해서였다.    남편이 외지에서 사업하다보니 모든 준비는 시아버님이 자진하여 도맡았다. 세멘트, 벽돌, 모래 등 필요한 재료는 물론, 추운 날 마른 땅을 파기 힘들가 봐 곡괭이, 장갑까지 자상히 마련하였다.       더욱 감격스러운 건 비석을 세우는 날 세멘트가 완전히 굳지 않으면 제사상을 받는 례의절차를 밟기 어렵다고 미리 시고모부와 함께 추운 초겨울 날 밖에서 세멘트와 모래를 섞어서 얇은 비석받침대를 만들어놓았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세멘트가 제대로 굳어가는지 걱정되여 매일같이 살펴보았다. 허리를 구부정하고 비석받침대에 정성스레 물을 뿌리던 시아버님의 모습을 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중양절 날, 우리의 바람 대로 간밤에 내린 보슬비 덕에 땅은 너무 메마르지 않았고 날씨는 해까지 쨍하게 날 정도로 유난히 개이여 걱정보다 춥지 않았다. 남편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고 시아버님의 선두 지휘하에 시동생, 시고모부, 친정어머니와 녀동생 내외 그리고 사촌오빠와 언니 등 일행 10여명이 함께 했다. 그야말로 사돈이 함께 모인 장소였다.        오빠가 전에 가져다 놓은 150근 되는 돌 받침대를 그냥 두고 그 우에 시아버님이 직접 만든 돌받침대를 세멘트로 고정해놓고 맨우에 새 비석을 세웠다. 옆면은 전부 세멘트로 매질을 했지만 정면은 그냥 벽돌 사이사이에만 세멘트를 발랐다. 그렇게 세운 비석에 오빠의 정성, 시아버님의 정성 그리고 우리 딸, 사위들의 정성이 한눈에 다 보여졌다…     나는 신생아중환자실 관리를 책임진 의사이다보니 이른아침에 출근하여 첫번째로 하는 일이 환자회진이다. 청명이나 추석날도 례외가 아니다. 제사상에 올릴 찹쌀기름떡과 두부구이는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성의라 말씀하시는 시어머님은 세 아이를 키우면서 병원일에 바쁜 이 며느리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항상 내 몫까지 챙겨주군 한다.     추석에 무성히 자란 옥수수밭길을 오르다 보면 눈에 안겨오는 9월의 풍경이 가슴 설레이도록 아름답다. 매번 경건한 마음으로 친정아버지 산소에 다녀올 때면 친정아버지를 추억하고, 시부모님들의 사랑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된다.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우리 친정부모를 기리는 범상치 않은 중양절 행사가 올해도 우리를 기다린다. 돌아가신 두 사돈어르신들을 어떻게 합장하면 좋을가 하고 시아버님은 지금부터 여러모로 또 고민하고 계신다. 너무나 존경스러운 시아버님이시다.     올해 '3.8'절 날, 시부모님의 결혼 50주년 기념 식사자리에서 시어머님은 “사람을 귀해하는 가문에 시집 가면 행복하다.” 던 친정부모님의 권고 대로 이 가문에 시집 와서 후회 없는 금혼을 맞이하게 되였다고 감개무량해하였다.      올해는 시부모님이 금혼을 맞는 해이자 우리 부부가 은혼을 맞는 특별한 해이다. 이 기회를 빌어 존경하는 시부모님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앞으로 친정부모님 못지 않은 시부모님들을 더 잘 공경하리라 생각하면서 우리 부부도 이런 부모가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8    <꽃은 사랑 속에서 핀다> 댓글:  조회:225  추천:6  2022-12-08
꽃은 사랑 속에서 핀다 류영자                                                                                                      올해 1월의 어느날, 아빠트 지하주차장에 내려갔던 나는 어느 구석에서 누가 방치한 화분 두개를 발견했다. 화분주인은  키울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라는 식으로 곱다라니 놓아두었다.      먼지를 살짝 뒤집어 쓴 화분은 수분이 부족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꽃줄기를 만져보니 아직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꽃에 대한 욕심보다 스러져가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 나를 충동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화분 두개를 껴안았다.     버려진 화분은 그렇게 우리집에 오게 되였다. 잎이 마르기 시작한 화분에 물을 듬뿍 준후 조심스레 그늘진 곳에 놓았다.      그 때 전화가 걸려왔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오는 연변성주체육구락부(이하 “성주구락부”로 략칭함)의 설화였다. 성주구락부는 우리 민족체육 운동을  올림픽수준으로 올리기 위하여 세워진 민영기업단체이며 2012년부터 해마다 30여명 고아들을 양육하고 60여명의 특수곤난학생들을 면비로 훈련시키고 있다.     나는 우리 집에 꽃화분을 가져온 이야기를 설화한테 상세히 들려주었다. 설화도 불쌍한 꽃이 보고 싶다며 반색했다. 살 가망이 없어보이던 꽃을 정성스레 가꾸었더니 사흘째 되는 날부터 시들었던 줄기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화분들과 어울려 힘찬 생명을 과시했다. 나는 매일같이 싱싱하게 살아나는 꽃의 모습을 폰으로 찍어 설화한테 보냈다. 설화도 기분이 좋아 화분의 이야기를 성주구락부 동학들에게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그 후로 꽃의 안부를 물어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우연하게 주어온 화분 두개가 나와 성주구락부 애들의 공동관심사로 되여 우리들의 마음을 뭉치게 했다. 비록 마음에 상처를 받고 어렵게 성장하고 있는 애들이지만 사랑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이제 따스한 봄이 오면 이 두개의 화분을 그애들한테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 애들은 이젠 내 생활의 한 부분이 되였고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 한지도 어언 6년 세월이 흘렀다.     1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수십년 동안 나는  내가 맡은 사업에만 열중하고 몰입했다. 그러다 보니 직장밖에 눈길을 돌릴 사이가 없었다. 그렇게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제한된 삶을 살다가 2016년부터 여가를 타서 사회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애심공익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2년전에 설화를 만난 것도 성주구락부 아이들을 위해 조직한 가을철 애심공익활동에서였다.     그 날, 우리는 성주구락부의 20여명 아이들을 버스에 태우고 야외에 나가 들놀이를 했다. 신나게 뛰노는 애들속에서 한 녀자아이의 그늘 진 얼굴이 문득 내 눈에 잡혔다. 다들 즐겁게 노는데 그애만은 홀로 한쪽 구석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발끝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간혹 고개를 들어 하늘의 흰 구름을 쳐다보면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군 했다. 그런 소녀에게 말 못할 무슨 사연이 있는 같아 나는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조용히 그애한테 다가가 일부러 이름과 집 사정같은 것들을 물어보면서 말을 걸었다.     그 애이름은 설화(가명)였다. 엄마는 병으로 하늘나라에 갔고 밤낮 술로 세월을 보내던 아빠는 설화를 고모집에 맡기고 남방에 돈벌러 간후 여직 감감무소식이였다. 아빠의 말을 하는  설화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갈쌍갈쌍 고였다.  어린 나이에 고모네 집에 얹혀 살면서 돌아가신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고 소식이 없는 아빠가 얼마나 그리울가? 나는 그애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의외로 설화의 손은 차가웠다.     성주구락부에는 설화처럼 불우한 아이들이 많았다.  태여나자부터 부모의 버림을 받은 아이,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 한 쪽 부모 먼저 돌아가는 바람에 어렵게 자란 아이,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다가 할머니가 양로원에 가면서 마지못해 오게 된 어린 친구들도 있었다. 들 놀이가 신나서  모두들 웃고 떠들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것 같지만 애들 가슴 한 구석에는 각자 이름할수 없는 상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오후 활동이 끝나자 아이들은 다시 버스에 앉아 성주구락부에  돌아가게 되였다. 아이들은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그새 정들었는지 설화는 떨어지기 싫어 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런 설화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겁고 쓸쓸해졌다. 물론 성주구락부에서 어려운 재정곤난을 극복하면서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사회 여러 분야의 더욱 많은 사랑의 손길이 필요했다.   2       설화가 집체활동에 잘 참가하고는 있는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지? 설화를 만난후 나의 눈앞에는 슬픔에 잠긴 설화의 눈빛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하였다. 보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사랑과 나눔” 의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원래 계획을 앞당겨 아이들의 선물을 가지고 성주구락부에 찾아 갔다. 물론 제일 보고 싶은 애는 설화였다.     성주구락부 리설봉관장님은 대문밖에 까지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차에서 선물꾸러미들을 내린후 훈련장으로 향했다.  20여 명의 아이들이 흰 운동복을 입고 교련원의 엄격한 지도하에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설화의 모습이 인츰 눈에 안겨왔다.  키가 제일 작은 설화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유도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여 있었다.  우리들의 눈길이 모두 어린 설화에게 쏠리자 리관장님은 설화는 의지가 아주 강한 아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설화가 성주구락부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관장님이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파지를 줏고 있는 설화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그날 차를 몰고 시가지에 가서 채소를 사오다가 길가의 쓰레기통안에서 뭔가 언뜰언뜰 하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하도 이상해 차를 세우고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그때 쓰레기통안에 들어가 파지를 찾던 설화는  인기척에 놀라 아주 날렵하게 밖으로 훌쩍 뛰여 나왔다. 리관장님은 직업적 본능으로  설화의 날렵한 동작에서 남다른 운동기질을 발견하였다.      학교갈 나이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에게 말못할 사연이 있을 줄 알고 리관장님은 설화의 신상을 알아 보았다.  설화는 한창 학교 다닐 나이에 공부를 못하고 파지나 페품을 주어 팔아 고모네 생활에 보태고 있었다. 리관장님은 그런 사연을 알고 차마 그냥 스쳐지날 수 없었다. 운영경비와 각종 경색의 훈련비용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면서도 그 즉시로 설화고모와 련계를 취한후 설화를 성주구락부에 무료로 입학시켰다. 설화는 이렇게 성주구락부의 꼬맹이 운동선수로 되였던 것이다. 설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리관장님은 운동하느라 숨을 할딱거리는 설화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면서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설화는 어린 나이에 때이르게 마음에 아픈 상처를 받아서 아이들과 어울리기 힘들어 하고 주눅이 들때가 많습니다. 그 원인으로 지금 설화는 제대로 운동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리관장님의 하신 말을 거듭 되새겨 보았다.  설화를 비롯한 성주구락부 아이들에게는 더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이 수요되였다. 나는 아이들 립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면서 부모같은 마음으로 그 애들 마음 깊숙한 곳에 은페되여 있는 남 모르는 아픔을 조금씩 치유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3     지난 해 봄에 퇴직한 나는 성주구락부 아이들의 여름방학과외보도를 맡게 되였다. 자원봉사하러 온 대학생들과 함께 여름방학기간 아이들의 숙제를 검사하고 앞으로 배울 내용들을 예습시켰다. 성주구락부의 아이들은 대부분 사회나 ,부모, 친인으로부터 소외받은 아이들이기에 공부에 대해 자신감이 약하고 평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어 관리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나는 아이들과 많이 소통하면서 사랑으로 그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로 하였다.     봉사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사 먹이면 간편하고 좋았지만 이러면 애들의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안되였다.  30도 넘는 무더운 삼복철에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직접 점심밥을 새로 지어 먹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시장에 가서 신선한 과일들을 사서 중간 휴식시간에 나누어주군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집밥 같은 따뜻한 밥과 반찬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우리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며 고맙다는 인사말도 건네기 시작했다.     자원봉사가 지속되던 어느날 아침, 교실에 들어선 설화가 살그머니 나의 손에 복숭아 여러 개를 쥐여 주었다. 저녁에 성주구락부에서 간식으로 나누어준 과일을 먹지 않고 보관하였다가 나한테 갖고 온 것이란다. 평소에 말이 적고 무뚝뚝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설화의 가슴에도 봄날과 같은 따스함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설화의 책가방 안에서 책과 부대끼여 몹시 상한 복숭아를 맛나게 몽땅 먹었다. 설화의 정성을 생각해서였다. 자기가 준 복숭아를 맛나게 먹는 내 모습을 보면서 설화는 행복하게 웃었다. 한알 한알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나의 마음도 사랑을 받는 행복으로 달콤하였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고 또 누구에게서 사랑받 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 고 하지 않았던가!     설화와 아이들과 서로 정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자 나와 거리감을 두던 아이들도 내 곁에서 맴돌기 시작하면서 생활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선생님을 도와 앞다투어 교실청소도 하고 작은 음식도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 시작하였다. 바로 사랑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애들이 앞으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수 있고 사람들과 정을 나눌수 있는 기초로 되는 것이였다.     세상에 마음을 바로잡는 일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아이들이 옳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긍정적인 행동을 할수 있고 자비감에서 벗어날수 있는것이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여나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애들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일을 나의 애심공정의 중요한 일환으로 하기로 하였다. 스포츠 꿈나무들과 함께   4       오래동안 설화와 성주구락부의 아이들과 접촉하면서 나는 그애들에게 아무리 사랑을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는 것 같았다. 사랑이란 원래 샘처럼 퍼내면 퍼낸만큼 다시 고이는 것이여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많은 것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 때문에 안타까웠고 다음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만 싶어졌다.     새해를 맞아, 우리 “사랑과 나눔” 의 동아리 회원들은 물만두와 김치 등 푸짐한 음식과 애들이 입을 옷가지들을 차에 싣고 부푼 마음 안고 성주구락부로 찾아갔다. 제일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역시 아이들이 훈련하고 있는 훈련장이였다.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는 아이들 속에서 왜소한 설화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설화는 훈련에 집중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훈련장에 들어 온것도 몰랐다. 자기보다 한 뼘이나 더 큰 남자아이를 상대로 훈련하고 있었다. 한창 기회를 엿보던 설화는 용감히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남자 아이는 슬쩍 몸을 피하면서 중심을 잃은 설화를 쓸어뜨렸다. 설화는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이번에도 남자아이에게 뒤치기로 제압당하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련속 두번이나 지게 된 설화는 상대를 이기지 못한 안타까움에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한달음에 훈련장으로 달려가 설화를 일으켜 세웠다.     “설화야 , 괜찮아? 참으로  대단해! 넌 소학교부고 상대는 한급 높은 초중부야.”     “이제 요령을 더 많이 장악하고 열심히 훈련하면 다음에 선생님이 설화를 보러 올 때는 꼭 이길 수 있을 거야! 설화는 해낼수 있어! ”     문뜩 앞에 나타난 나를 쳐다보던 설화는 나의 팔을 붙잡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설화는 성격이 강하지만 이처럼 자제력을 잃고 눈물을 흘리면서 정서적 파동이 심하였다.      설화 뿐만 아니라 성주구락부의 다른 아이들도 훈련장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평소 생활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판이했다.금방까지만 하여도 얌전하게 눈을 내리 깔고 우물쭈물 하던 아이들이 훈련장에서는 사자와 같은 용맹을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아이는 평소 훈련장에서는 성적이 우수하지만 정식 경기에 참가하면 주눅이 들어 꼼짝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애심활동을 단순히 고운 옷이나 맛있는 음식을 갖다주는 것으로  끝내는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억누르는 고독과 외로움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운명의 그늘에서 애들을 완전히 해탈시킬수 있는 것은 물론 사랑과 관심이였다. 허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남들과 똑 같은 대바른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였다. 나에게는 애심공정의 새로운 목표가 생기였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와 함께 애심릴레이 활동 전개   5       올해 음력설이 지나 신종코로나가 예고없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연길도 정태관리에 들어가게 되였다. 설화와 아이들을 못 본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여갔다.음력설이 지나서 보러오마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이들한테 갖다주려고 했던 화분은 우리 집 창가에서 봄을 맞이하여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귀여운 꽃망울은 마치도 설화의 발가우리한 얼굴 같았다. 설화를 생각하니 성주구락부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척 걱정스러워졌다.     리관장님과 통화를 해보니 아이들은 비좁은 숙소에 격리되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많이 불안해 하고 인터넷 온라인 수업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대로 계속 방치해 두면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를 잃고 학습성적이 많이 떨어질게 불보듯 뻔했다. 그보다도 정서저락으로 아이들의 운동열정도 식어질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달려갈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 끝에 그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교류하기로 했다.  리관장님은 대뜸 찬성하였다.     우리는 첫 단계로 위챗그룹방 (微信群)을  다. 잠간사이에  22명의 성주구락부 아이들을 위주로 한 위챗방이 꾸려졌다. 하나 하나 위챗방에 가입해 들어오는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보는 나의 가슴에는 기쁨의 물결이 일렁이였다.     나는 위챗방 이름을 “해피 독서클럽” (이하 ‘독서 클럽’ 으로 략칭함)이라고 짓고 아이들에게 독서클럽의 취지를 설명하고 아이들한테 이제부터 나를 “서경선생님”이라고 부르라 했다.  “서경”(书敬)은 한어로 책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우리도 앞으로 책을 사랑하고 독서를 많이 하자고 약속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 나도 독서클럽에 이쁜 이모티콘을 올리면서 기쁜 마음을 전하였다. 고중을 다닐 때 인민교사로 되는 것이 꿈이였는데 나는 드디여 위챗방 독서클럽에서 아이들로부터 “서경선생님” 이라 불리우게 되였다.     위챗방 독서클럽을 세운후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글을 올려야 하고 어떤 글을 읽어주면 좋을가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20여 명 되는 아이들은 년령대가 서로 달랐다. 소학생도 있고 초중생도 있었다. 학년 별로 어울리는 글을 편집해서 올려야 했다. 정태관리를 하는 동안 서점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집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가운데서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들을 골랐다. 나는 고르고 고른끝에《채근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세계명언집》,《사랑의 시간들》... 등 여라문권의 책을 손에 쥐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날마다 소학교와 초중부를 나누어 마음의 힐링이 되는 좋은 글들을 검색하고 타자하고 편집하여 독서클럽에 올렸다.     아이들은 그룹방규칙을 엄격히 지키면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열심히 올린 글들을 읽었다. 간혹가다 지정된 시간에 글을 올리지 않으면 “띵똥”하고 이모티콘 표정을 올려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독서열정이 올라간 것이다. 사랑을 희구하는 아이들에게 길 도우미마냥 올바른 길을 가리켜 주고 그 여린 마음들을 보듬어 주는 것이 오래 전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였다.  더우기 정태관리를 받는 아이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줄 수 있고 힘이 되여줄 수 있다는 기쁨으로 글을 올릴 때마다 나의 마음은 마치 사춘기 소녀로 되돌아간 듯 뿌듯하였다.     독서클럽 윗채방이 설립된후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갑갑한 생활속에서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많이 활달해졌다. 그리고 자비감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학습성적도 점차 제고되기 시작하였다. 비뚤어진 생각을 옳바른 생각으로 고쳐나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독서클럽은 드디여 아이들 모두가 마음의 힐링을 얻는 아늑한 보금자리로, 쉼터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해피독서클럽' 학생들에게 휴대폰 촬영기술을 가르치는 연변병원 정대식교수   6       온화한 봄바람 따라 2022년 4월 10일부터 연길시의 정태관리가 완전히 해제되고 사회 각 계층이 전면복직되였다. 그동안 신종코로나로 몸은 묶여 있었지만 성주구락부애들을 위한 나의 애심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여러개 민간애심단체에서 나와 손을 잡았다. 나는 새로 만난 민간애심단체와 함께 독서클럽 아이들을 보러 성주구락부를 찾았다. 차에는 아이들한테 줄 선물들로 그득하였다. 그 중에는 나와 아이들의 공동 관심사로 되였던 화분 두개도 들어있었다.      아이들이 한창 운동련습하는 시간이라 우리 일행은 리관장님의 인도하에 곧바로 훈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훈련장에는 정식 체육경기장처럼 전에 없던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우렁찬 구령속에서 운동훈련에 열정을 보이는 아이들은 예전보다 더 침착해 보였고 동작이 더욱  날파로워 보였다. 아이들은 올해 하반년에 열리게 될 길림성18기운동경기, 길림성소수민족운동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운동항목에 도전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리관장님이 제정한 운동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 그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아이들의 완강한 운동정신에서 성주구락부의 아름다운 미래가 보였다.     설화도 제일 중심위치에서 열심히 유도훈련을 하고 있었다. 몇달사이에 키가 한뼘이나 더 컸고 강인한 눈빛에서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허리를 약간 굽히고 상대를 노려보면서 “모로 돌리기” 기술전략으로 대방을 제압하고도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방어자세로 재 공격을 시도하였다. 운동실력과 요령에 능숙한 설화앞에서 설화를 련속 두번이나 이겼던 상대는 이미 기가 많이 꺾이였다. 선생님의 짤막한 책망에 눈물을 흘리고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던 설화가 아니였다.      패기와 용감성으로 넘치는 설화를 보면서 리관장님은 “설화는 승벽심이 강한데다가 인젠 참고 견디는 인내심도 많이 제고되였습니다.  장차 훌륭한 유도선수로 성장할수 있는 싹수가 보입니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운동훈련이 끝난 후, 우리는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제 자리에 앉아서 간단한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회에서 아이들은 서경선생님께서 독서클럽에 올리는 내용들은 참신하고 배울점이 많으며 읽을수록 자신감이 생긴다고 하였다. 서경선생님의 랑송을 더 많이 올렸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제출하였다.     얼굴이 상기되여 앞다투어 발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학습이나 랑송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날마다 향상하는 아이들앞에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의 멋진 모습으로 나서고 싶었다.   '해피독서클럽' 학생들과의 좌담회   7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깊은 책임의식을 느꼈다. 아이들이 매일 강도가 높은 체육훈련을 견지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학습태도와 생활태도, 정서안정 그리고 리상을 향한 확고한 신념을 올바르게 해야 하였다. 한그루의 나무가 숲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사막에서는 생명의 오아시스같은 존재로 된다. 나는 독서클럽이 아이들의 마음의 안식처이자 성장의 오아시스로 만들기 위하여 더욱 정성을 깃들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설화도  시간을 짜내서 열심히 나를 도와주었다. 독서활동에도 제일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토론에도 맨 앞장에 섰다. 학습성적도 눈에 띄게 올라갔다.     어느 날, 설화가 갑자기 나한테 문자를 보내왔다.     “서경선생님, 저도 앞으로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될래요!”     “내가 어떤 사람이지?”     “아는 것이 많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내주는 천사 같은 분이지요!”     설화는 문자와 함께 행복하게 웃는 하트  모양의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그 걸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 나면서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우리 모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설화와 같은 불우한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고 곡진한 사랑을 준다면 그 애들도 장차 이 사회를 따뜻함으로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여나 사랑의 빛과 열을 전해주지 않겠는가!     약동하는 푸름의 계절과 함께 요지음은 매일 기쁜소식들이 들려온다. 여러 애심단체에서 성주구락부 아이들한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였다는 소식이다. “ 시내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이 사랑의 나눔과 섬김들이 모여 조화롭고 평화로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심은 작은 꽃 씨앗들이 사랑 속에서 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며 환한 미소로 세상만방에 어여쁘게 피여날 것이다.       애심단체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애심공익활동에 참가한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사회를 밝게 만드는 선의의 행동은 나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퇴직하여 직장을 떠나면서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아 많이 허무하고 서운했었다. 그런데 설화와 같은 불우한 애들을 도와주면서 작은 베품과 사랑의 나눔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누리며 나의 두번째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열렸다.     퇴직 후에 내가 만난 세상은 참으로 넓고 할일도 많고 마음먹기에 따라 새로운 삶이 시작될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애심공익활동 그 공동체속에서 바른 인성을 배웠고 자아가치를 실현하며 행복을 느꼈다.     “좋은 사람의 삶은 사소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진 친절과 사랑의 행동들로 대부분 채워진다” 는 선인들의 말씀이 있다. 내가 성주구락부 아이들한테 쏟은 미약한 사랑은 자랑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해온 그 일들이 또 다른 사랑의 꽃씨가 되여  아직 눈이  녹지 못한 음지에서 새롭게  피여나기를 바랄 뿐이다.  리설봉 관장과 작품을 토론하며
7    <나는 '온더웨이'> 댓글:  조회:165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연변대학병원 소아과에서 어린이들의 심신건강을 위해 밤낮없이 사업하시면서도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관리문제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더한층 높게 다루기 위해 라는 위챗계정을 운영하고 또 정기적으로 공익강좌로 사회인을 향한 건강교육보급활동을 활발히 벌리고 있는 김정애회원님의 '애심녀성컵' 제7회 전국 조선족녀성 생활수기공모 은상수상작품을 싣습니다. 나는 '온더웨이'           김정애      얼마 전 고중에 다니는 둘째 딸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기말에 있게 될 학부형회의에서 가정교육에 관한 내용으로 강연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우리 애는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하는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반급에서 학습성적이 중등선밖에 있었던 아이의 엄마로서 자신이 없다는듯이 말을 흘리는데 담임선생님이 “아닙니다. 지금은 학습성적이 남들보다 뛰여나지 않지만 정이 참 많은 아이여서 과임선생님들 모두 이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할겁니다.”  하고 둘째 딸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며 요즘 들어 아이들과 학부형들사이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공부는 물론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애들이 적지 않다면서 재삼 강연요청을 했다. 사실 나도 사춘기아이를 둔 부모로서 평소에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할지 여러모로 고민에 빠질 때가 많았기에 학부형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리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역중심병원의 소아과의사로서 학교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여 “아이들의 심리건강과 부모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병원의 의사로 있으면서 보고 듣고 경험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며 우리 주변의 아이들과 부모들사이의 문제가 홀시할 수 없는 사회적문제로 되고있음을 실감했다. 어느날 문진에서 야근을 서던 날에 생긴 일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60이 훌쩍 넘어보이는 할머니가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을 새도 없이 걱정어린 표정으로 손녀를 데리고 진찰실에 들어섰다. 손녀가 며칠째 머리가 아프다며 잠을 못 이뤄 너무 힘들어한다고 호소했다. 키가 160센치메터를 훌쩍 넘는 미끈한 체격, 예쁘장한 얼굴,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칭찬할만한 외모였지만 눈빛만은 정기가 없었다. 진찰을 해보니 감염으로 인한 증상은 아니였다. 혹시 심리요소로 인한건 아닌지 하는 의문에 가정문제를 캐묻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친부모들은 애가 한돌이 되기전에 아이를 외할머니한테 맡기고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났는데 지금까지 10여년동안 외국에서 불법체류하다보니 한번도 중국에 돌아온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는 부모와 한번도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도, 손을 만져본 적도 없이 그냥 화상채팅으로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이 아이는 부모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의 성격 형성의 제일 관건적 시기인 유아시기를 부모와 함께 생활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모의 손을 잡아본 기억조차 없을 애를 바라보면서 나는 “너 참 너무 불쌍하구나”하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키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 아이의 두손을 꼭 잡아주었다. “리나야(가명)!” 하고 조용히 이름을 불렀더니 갑자기 그 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샘솟더니 이어서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려 옷섶을 적시고있었다.  (가여운 이 애를 어쩌면 좋을가…)  부모가 곁에 없는 아이를 지금까지 키워오시느라 고생하셨을 그 외할머니 또한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리나야 , 너 참 이쁘게 잘 컸구나, 외할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겠지만 니가 이렇게 잘 자라줘서 할머니도 고생한 보람이 있으시네…외할머니도 인젠 년세가 계시니 리나가 강해져야 돼요. 중학생이 되였으니깐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야지.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고 할머니를 도와 설겆이도 하고…이런것 다 할수 있을거지?...네가 다니는 중학교에 내 친구가 담임으로 계셔.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갈수 있게 연락해줄게…” 리나는 내 손에 두손을 맡기고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날 나는 목이 꺽 메는듯한 울컥함을 가까스로 참았다. 출국붐으로 인가가 눈에 띄게 줄어든 우리 연변, 우리 주변에 이런 아이들이 리나 하나뿐이 아니다. 시댁 친척 한 분도 소학교 1학년에 다니는 딸애를 남편한테 맡기고 일본에 돈벌이를 갔다가 아이가 대학입시를 앞둔 때에야 집에 돌아오게 되였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출국길이  딸애한테는 이루다 말할수 없는 유감을 남겼다.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다니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다"고 말하는 딸 아이의 말에 우리 아이들이 사실 부모한테 바라는것이 많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작은 욕구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우리 부모들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일가?  그 친척은 엄마로서의 직책을 다 하지 못한 자책감에 대학입시시험장을 나오는 딸애한테 시험 잘 봤냐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고,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만 살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아이의 성장단계에서 유년기는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이다. 이 관건적인 시기에 아이들이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되면 평생에 걸쳐 그 아픔을 치유하면서 산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뭘 잃고 살아가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출국붐이 일어난지 거의 30년이 돼온다. 그때의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이제 엄마, 아빠로 될 나이가 되였다. 가족의 사랑을 부족하게 받고 자란 젊은 세대 부모들이 과연 옳바른 부모사랑을 차세대에 전할수 있을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2020년 초, 느닷없이 들이닥친 코로나전염병으로 어른들은 물론 마음껏 밖에서 뛰놀던 아이들도 집안에 발이 묶였고 '손씻기'와 '마스크착용'이 생활의 한부분으로 되다보니 병원을 찾는 아이들이 현저히 적어졌다.  예전 같으면 앓는 애들과 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소아과문진 청사안이 한적할 정도로 썰렁해졌다. 그렇다면 코로나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건강해진 것일가? 지난해 겨울의 어느날, 중학생 2명이 한밤중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2명 다 12살 나이의 소녀였는데 모두 자살시도목적으로 약을 과다복용한 것이 입원 원인이였다.  한 아이는 이미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물복용중 엄마와의 말다툼끝에 치료제로 먹고있던 우울증약을 과다복용했고 다른 한 아이는 부모가 리혼을 한뒤 친아버지와 계모 슬하에서 살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와의 마찰이 심해 아예 할아버지집에 얹혀살던중 음악공부를 하려는 자신의 꿈을 리해해 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죽겠다며 아스피린을 과다복용한 것이 위출혈이 생겨 입원하게 되였다. 얼핏 보아도 예술분야에 특유한 재질을 갖춘 예쁘장한 외모와 상반되게 두 손목에는 놀랍게도 자해를 몇번이고 반복했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왜 바보같은 선택을 했을가? 자신의 뚜렷한 꿈이 있는 아이들과 그것을 리해할수 없는 부모들사이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결국 아이들이 극단적선택을 한 것이였다. 눈에 띄게 늘어나는 아이들의 심리건강문제를 보면서 나는 석사연구생들을 거느리고 조사설문지를 작성해 최근  6년간 약물중독으로 우리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에 대해 더 상세한 조사를 해보았다.  조사를 통해 본 결과 약물중독으로 입원한 환자수가 해마다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처음 몇년간은 유아들이 식별능력이 약해 오용으로 인한 약물중독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12살에서 16살미만의 사춘기 아이들이 자살시도로 약물을 과다복용하는 경우가 급격히 많아지는 수자 보고가 나왔다. 사고발생 원인을 따져보면 부모와의 다툼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청소년시기는 심리적인 면에서 자신의 개성을 살리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인데 대학입시제도하에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다보니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힘들것이 뻔하다. 게다가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영향으로 부모들이 직장이나 가정생활에서 여러모로 불편을 겪으면서 심경이 편치 않은 와중에 눈에 거슬리는 아이들의 어떤 말이나 행동들이 부모자식간의 모순을 유발시키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내가 전공하는 소아과학은 태아시기부터 사춘기 아이들의 건강을 보장하고 삶의 질 향상을 주요목적으로 하는 림상학과이다. 소아과학의 사명은 의대생을 위한 인재양성 뿐만아니라 사회를 위한 봉사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이의 건강은 임신전준비부터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병원과 연변대학의학원 지도부의 지지하에 지역의료건강중심발전을 위한 목적하에 2019년에 연변의학학회 주산기(围产期)의학분회를 설립하고 지난해에는 연변대학의학원에 주산기신생아의학연구중심을 설립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연변지역 아이들의 건강과 발달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외에 다방면의 소질을 갖춘 대학생양성을 주요목적으로  , , ,  등 효와 건강을 중심으로 주산기분야와 연관된 다 방면의 주제를 다룬 (走进围产医学)와 (生命的诞生与成长)이라는 대학생수업과목을 새로 만들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미래의 부모이다. 하여 의학전업생여부를 막론하고 이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더 많은 대학생들이 앞으로 건강한 심신으로 훌륭한 부모역할을 할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의미가 있어 학교와 학생들의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한편 글쓰기를 즐겼던 나는 올해 초에 이라는 개인위챗계정을 만들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좋은 글들을 골라 계정에 올려 지인들과 공유하였었는데 후에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관리문제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더 한층 높게 다뤄야 될 필요성을 느껴 위챗계정의 로고를 진달래꽃으로 바꾸고 계정이름을  (金达莱母婴医学园地,Jindalai Maternal and Infant Clinic)라고 고쳤다.    그리고 “6. 1”절을 계기로 몇몇 의대생을 거느리고 관련 분야의 교수님들과 함께 정식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아직은 금방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 서툴지만 국가에서 얼마전 발표한 ‘세 아이’출산정책의 봄바람을 타고 의 건설이 연변은 물론 국내 나아가 세계무대에서 큰 비전을 가져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엄마살롱(妈妈沙龙)”이라는 사회인을 향한 건강교육 보급활동은 임신과 출산을 준비하는 녀성과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으로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부딪치는 부모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데 중요한 취지를 두고있어 그 사회적효과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쭉 돌이켜보며 강연준비를 마친후 담임선생과의 약속대로 36도를 넘는 찌는듯한 삼복의 무더위를 무릅쓰고 학부모들이 모인 강단에 섰다.   사춘기란 의학적으로 어떤 특성을 갖고있고 지금의 아이들이 학업의 압력과 부모와의 의견소통의 불만족으로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고 외자녀를 둔 부모들이 아이들의 성적에만 집착하지 말고 학교와 가정이 합심해서 아이들이 건전한 마음가짐으로 일상을 보낼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력점을 두고 우리 아이들을 효를 알고 효를 실행할줄 하는 장래의 인간다운 '사람'으로 키워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특히 대학입시를 2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낼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시점에서 어떻게 아이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질 것인가에 강연 포인트를 두었다. 예상외로 학부모들이 너무나도 공감을 많이 해줬다. 적지 않은 학부모들은 사춘기 아이때문에 고민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니라면서 '엄마살롱' 수업을 언제 개설하냐고 문의하며 너도나도 위챗추가를 요청했다. 담임선생은 학부형들은 물론 자신도 강연을 듣고 소득이 크다고 하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후 아이들의 심리건강문제로 고민하고있는 교사들과 학부모들을 위해 폭넓은 봉사활동을 개시하기로 하고 또 계획을 잡았다. 앞으로 연변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강의진을 만들어 아이들의 심리건강을 어떻게 정확히 체크하고, 심리적으로 애로를 겪고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대응할지,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의 주제로 강연활동을 정기적으로 진행하려고 관련 교수님들과도 합의를 보았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도 박사공부시절에 둘째딸을 낳아 키우다보니 어쩔수 없이 전탁보모를 쓰게 되였는데 그 뒤로 애가 오래동안 ‘손가락 빨기’를 멈추지 않아 엄마로서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한 탓이라고 많이 자책을 했었다.  게다가 유치원 때 한족반과 조선족반을 넘나들며 전반(转班)을 반복하는 통에 소학교에 입학해서 공부성적이 학급에서 늘 마지막순위에 머물러있었다. 스스로도 표준을 낮춘 모양인지 남들은 100점을 맞지 못해 아쉬워하는 평소시험에도 79점을 맞고 집에 돌아와서는 “딱 1점이 모자랐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해서 우리 부부를 실망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늘 상장을 받아 안고 집에 와서 여러 사람들의 칭찬만 받는 언니한테 뒤질세라 "나도 상장이 있다"며 자기 이름이 적혀있는 호구부를 불쑥 들고 나와 식구들한테 자랑스레 보여주던 둘째 딸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너도 잘 해보려는 마음이 있는 애구나. 그래 너의 우수한 점을 많이 발견하고 성장시켜야겠구나...) 그 뒤로 나는 둘째 딸애의 성장을 위해 학교선생님들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고 가정교육에 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놀음에 탐하던 애가 소학교 고급학년때부터 공부에 열정을 보이더니 서서히 학습성적도 오르기 시작했고 롱구나 무용에도 장끼를 보였다. 중학교에 올라가 상해에 수학려행을 다녀온 뒤에는 또 "장래 상해복단대학에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기도 했다. 자녀교육에서 부모의 본보기가 중요한 역할을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항상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사업하는 모습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가정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육아를 경험하면서 아이들이 성장과정에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우리가 너무 이르게 아이들한테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락인을 찍어놓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감을 갖고 밝고 향상하는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할지를 더 많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세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소아과중환자실 관리를 맡아보는 힘든 의사 직업에다 또 대학생과 연구생 양성을 겸직한 교사로 있다보니 그야말로 밤낮이 따로 없고 주말이 따로 없이(“白加黑,5+2”) 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얼마전 유명한 영화배우 마이리(马伊琍)가 더우인(抖音)에서 “녀성으로서 사업과 가정을 다 잘 경영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뒤에는 꼭 누군가의 희생이 뒤받침 되여 있을것이다.”고 하는 말에 크게 공감을 했다. 결혼해서 26년, 돌이켜보니 남편과 시할머니, 그리고 시부모님이 든든한 후원군이 되여 집안일을 항상 넘치게 해주신 덕분에 내가 시름놓고 사업을 할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늘 고마운 마음이다. 칠십이 넘으신 시아버님은 지금도 자가용차를 운전하시면서 애들의 등퇴교와 학원에 다니는 일을 도와주시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는 시어머님이 손군들한테 맛나는 피자를 직접 만들어먹인다고 식자료와 피자가마를 무겁게 들고 집문에 들어서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가끔은 원망도 없질 않지만 그래도 힘들때마다 등을 밀어주는 남편 또한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하다. 중층간부경선을 앞두고 늦둥이가 위챗에 음성메세지로 "엄마 힘내. 성공하길 바래" 라고 하던 젖내나던 말은 지금도 귀가에 메아리친다. 나는 “아이는 생명의 연장선이고 학생은 학술의 연장선(孩子是生命的延续,学生是学术的延续)”이며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우선 훌륭한 스승이 되여야 한다.”고 하시던 박사공부시절의 은사 길림대학병원 소아과 로계영교수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있다. 건강을 회복하고 병원을 나서는 아이와 그 가족들의 뒤모습을 보면서, 배움과 실천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퐁퐁 뛰며 기뻐해하는 우리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더우기 평생을 연변의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사업발전에 진력해온 국내호리(护理)계의 거목이신 연변대학 호리학원 리춘옥교수, 심리상담전문가 류혜선교수 등 인생의 등대와 같은 우수한 선배님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육체건강과 정신건강을 담당하고있는 의사와 교사라는 성스러운 직업을 겸비한 자신이 참 행복한 인생을 살고있다는 생각을 수 없이 해본다.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내 아이들과 우리 학생들, 그리고 우리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을 위하는 사업에 올인하며 살고 싶다. 열심히 일하면서 즐기는 매일의 순간, 순간들이 내가 나서 자라고 지금까지 일하면서 살고 있는 이 곳, 연변의 건설과 발전에 적은 힘이나마 기여할수 있는 값진 인생가치를 만들어 가는 길이라 자부한다.  나는 영원히 "온 더 웨이(on the way)(永远在路上) !"   《연변녀성》 2021년 10월호에서   수상소감   평소에 글쓰기를 좋아했던 리유로 공모에 응한지 올해로 3년째다. 그동안 겪어왔던 일들을 글로 적어 우리 아이들이나 학생들 교육 소재로 되게 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였는데 이번에 의외로 이렇게 은상까지 받게 되니 너무 황송하다. 전국애심녀성포럼 여러 심사위원선생님들과 관련인사들에게 고마운 심경은 내가 맡은바 일들을 잘 해나가는 것으로 보답하려 한다. 대학시절, 연변대학병원 소아과에서 실습을 하면서 어린이건강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여 소아과학공부를 시작한지 어제 같은데 어언 27년 세월이 흘렀다. 아이 하나만 낳게 하던 국가계획출산정책에 변화가 생기면서 우리의 생활환경과 사회적 영향으로 고위험군임신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생아진료를 맡고있는 의사로 경험했던 몇가지 잊혀지지 않는 사례를 통해 아이들의 건강문제는 태여날 때부터가 아니라 임신전부터 관리가 따라가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서 최근 몇년간 의료보건학 및 호리학 분야의 교수분들과 손잡고 연변의 주산기의학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지난해부터 코로나가 온 세상을 쓰나미처럼 휩쓸면서 소아과학분야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감염으로 앓는 환아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대신 심리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아이들, 특히 청소년 심리건강이 가정과 학교 및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였다. 그래서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을  도모하는 주산기의학발전사업을 녀성과 청소년의 건강을 위한 사업으로 폭을 넓히고 그에 맞춰 각 분야 교수님들과 함께   위챗계정을 꾸리고 대학교에 와 이라는 수업과정도 새로 만들었다. 초창기라 힘든 일도 많았지만 교수님들의 사심없는 헌신속에서 그리고 사회와 학교의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으로 부딪친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주산기의학교연실이 설립된 뒤를 이어 연변대학에 녀성과 청소년들의 건강 촉진을 위한 기금이 마련되고 대학생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실습기지가 세워지기까지에 물심량면으로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은 학교와 사회 및 기업단체들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항상 큰 뒤심이 되여주신 시댁 식구들과 말없이 나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리해해주는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이 기회를 빌어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순간  한국의 이슬아 일간 작가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살면서 너무 아름다운 일들을 겪거나 너무 감탄스러운 상대를 만나고나면 그 순간을 그냥 흘러 보내기는 너무 아쉽다거나 혹은 나 혼자서만 알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 누구한테나 모두 정확히 기억하고 오래동안 보존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된다. 소중한, 잊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말로 하면 바로 휘발되지만  글로 쓰면 그 이야기의 수명이 길어진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글쓰기의 아름다운 작업 중의 하나라고 한다. 나는 앞으로 20년간 일기쓰기를 견지해 온 바탕을 밑거름으로 비록 작가가 아니지만 내가 지금 올인하고 있는 교사와 의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면서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유심히 다시 보아가며 그 속에서 얻는 작은 감동들을 솔직하게 글로 적어 아름다운 우리 이 세상에 전하리라 다짐하는 걸로 수상 소감을 마치려 한다.
6    <사부곡> 댓글:  조회:144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5기 '계림문화상' 공모에서 은상에 당선되였던 홍보부 류영자 회원의 글 을 올립니다. 은 금년 1월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장고TV' 계정에 원로 아나운서 서방흥교수님의 랑독과 함께 올랐었고 4월 7일에는 에 기재되였습니다.   사부곡 류영자      세월이 류수와 같다고 했던가. 어느새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40년의 세월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 사이 강산도 몇번 변했건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만 간다.    1982년 12월 11일, 그 날 아침부터 날씨는 음침하여 당금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만 같았다. 새벽녘에 아버지가 아주 또렷한 모습으로 학교 기숙사문을 열고 나의 침대가로 살며시 다가와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였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였다. 너무나도 이상한 꿈인지라 나는 이번 주 일요일에는 아버지 뵈러 꼭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흐리터분한 기분으로 학교에 갔다.    마음이 하도 심란하여 첫 두 시간에는 시간집중이 되지 않아 간신히 견뎌냈고 중간체조시간에는 밖에 나가 체조를 겨우 두어번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교실로 돌아왔다. 새벽에 꿈속에 다녀간 아버지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좌불안석하는 사이 세번째 시간이 되였고 어문선생님이 한창 강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 다급하게 교실문을 두드렸다. 선생님이 잠간 복도에 나가 두런두런 누구하고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다급하게 들어오며 정색해서 첫줄에 앉은 나한테 빨리 나가보라고 고개 짓을 했다. 학생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등에 업고 황망히 복도에 나가보니 담임선생님이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급히 나의 두 손을 꼭 잡더니 무거운 어조로 금방 전화가 왔는데 오늘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였다. 청천벽력!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이런 비보를 듣고 보니 나는 목구멍에서 갑자기 뜨거운 것이 울컥하면서 저도 모르게 오열하고 말았다. 마치 시계의 초침이 그 순간에서 멈추면서 눈앞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지되는 것만 같았다.    전번 주에 집에 갔을 때 나하고 조곤조곤 이야기도 잘하던 아버지가 어쩜 아무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극도의 비통으로 머리는 텅 빈 것 같았지만 마음은 한시바삐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고향집까지는 거리가 20여리 되는데 집으로 가는 석현행 뻐스는 매일 오전 7시와 오후 4시에 딱 두번만 있다 보니 오후 4시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일각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나는 비장한 결심으로 그 자리에서 신끈을 졸라매고 선생님의 부름소리를 뒤로 한 채 아버지이름을 부르며 학교대문 쪽으로 뛰여갔다. 눈물이 앞을 가려 몽롱해진 시야 속에서 나는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쏜살같이 고향 가는 방향으로 달음박질하였다. 하늘에서는 이미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모진 세월, 풍파를 겪어온 아버지이다. 일찍 아버지는 할아버지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 가야하강반의 하룡성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삼형제 중의 맏이였던지라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학업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농사일, 나무하는 일, 집안일을 가리지 않고 도맡았다. 농촌일로 다져온 아버지는 1950년대 후반에 강 너머 토성리촌으로 이사 와서 생산대 대장으로부터 민병련장, 치보위원, 주임 등 중임을 맡고 열심히 사업해왔다. 1964년부터는 대대당지부서기 직무를 떠맡고 농민들을 이끌고 수많은 일들을 하였고 상급으로부터 받은 상장만 해도 한 궤짝에 가득 찼다. 그 시기에 상장이 증거로 연루될까 봐 모두 태워버려서 지금은 한장도 없어 안타깝지만 아버지가 해놓은 많은 일들은 산이 지켜보았고 들판에 오롯이 새겨졌다. 줄곧 당지부서기 공작을 맡은 아버지는 한점 흐트러짐 없는 정직한 분이였고 개인의 사욕이 없이 집체와 마을사람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했다. 아버지의 훈도하에 나는 일찍부터 항상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뚜렷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였다. 아버지는 나의 마음속 우상이였고 계몽선생님이였으며 든든한 마음의 기둥이였다.    도문기차역을 지나고 도문다리를 건너서 석현 행 국도에 올라서니 다니는 차량들은 거의 없었다. 한기가 뼈속까지 스며들었지만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돋아났고 입가에는 새하얀 입김이 서리서리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으로 피어올랐다.    국도로 한참 달리니 저 앞에 향양촌이 보였다. 향양촌을 지나 앞 산굽이를 에돌면 수남촌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 산굽이를 따라 올라가면 일망무제한 논밭이 펼쳐진다.    옛날 수남촌은 산간지대여서 한전이 많고 수전이 적었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조이 탈곡이 끝나면 햇좁쌀을 이고 산 너머 린근 동네에 가서 한근에 웃돈을 10여전씩 더 주고 입쌀을 바꿔오군 하였다. 입쌀이 귀한 당지 사정에 비추어 아버지는 마을의 끌끌한 청장년들을 이끌고 수전개간에 나섰다. 물도랑을 내고 낮은 지세에 물방아를 세워서 산과 산 사이의 물을 옮겨오는 데 성공하였다. 아버지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논두렁 길을 넘나들었다. 동이 트면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오듯, 자고새고 하는 일이 지겹지도 않은 지 아버지는 우직하게 논밭에서 일만 수걱수걱 하였다. 저녁식사를 끝내기 바쁘게 맥진한 아버지는 푹 꼬꾸라져서 꿈나라에 들어가지만 날이 밝으면 논밭으로 나가는 일벌레가 따로 없었다.    아버지의 신근한 로동으로 근 천무가량 되는 한전은 옥답수전으로 되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이 이밥을 먹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수남촌의 입쌀은 소문도 자자하였고 수남촌은 부근에서 소문이 자자한 부유촌으로 되여 린근이 한족들마저 이사 오고 싶어하는 마을로 탈바꿈했다. 한전을 수전으로 만든 수남촌의 일화는 왕청현정부의 표창도 받았다.    헐떡거리며 향양촌 산굽이에 도착하여 그 논밭들을 내려다보노라니 억척스럽게 일하던 아버지 모습이 아른거린다.    드디어 수남촌 대대마을에 들어섰다. 나의 얼굴은 얼어서 벌겋게 부어있었고 하얀 성에가 낀 머리에서는 흰 김이 모락모락 피여올랐다. 마치 북극에서 사는 유목민을 방불케 하는 나의 모습에 촌에서 맞띠운 사람마다 의아한 눈길로 흠칫하며 쳐다보았다.    “저 애가 도문시1중에 다니는 류하준 막내딸이요. 오늘 새벽 로서기께서 운명하셨다더니 저렇게 어린 나이에 차도 타지 않고 달려서 왔네...”    “어휴, 저 아이를 어쩌지…”    간혹 가다 뒤에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주고받는 말들이 귀가에 들렸다.    합작사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수남촌 학교에 도착한다. 나는 소학교 5년과 초중 3년을 수남촌학교에서 다녔다. 내가 태어난 해에 ‘문화대혁명’이 폭발하면서 아버지의 박해 장면을 목격한 할머니는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끌려다니면서 투쟁을 받다보니 오빠와 언니들이 나를 업고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번갈아가며 빌어먹였단다. 내가 젖도 제대로 못 먹고 불쌍하게 자랐다고 항상 일이 바쁘셔서 자식들을 돌볼 사이가 없었던 아버지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유독 나에 대한 사랑만은 극진하였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쇠잔한 몸으로 쿨룩쿨룩 기침하면서 아침마다 나를 등에 업고 5리 길을 걸어 학교대문까지 데려다주군 하였다. 아버지는 독서를 무척이나 좋아하였는데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마다 나에게 책 속의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은 선량하고 정직해야 하며 남을 많이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인생도리를 깨닫게 되였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등에 업혀서 아버지의 심장박동소리와 웅글진 목소리를 들으며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동년을 보냈다. 인젠 다시는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울음이 왈칵 터졌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애틋한 마음으로 수남촌학교를 지나 아버지가 나를 업고 다니던 토성리촌으로 가는 길에 올라섰다.    매번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아버지사랑을 떠올리며 꼭 마치 아버지 등에 업혀서 가는 것 같은 정다운 기분을 느끼며 걷던 길이였는데 오늘 따라 발밑에서 밟히는 모래소리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허볐다. 원래 이 길은 평탄한 모래길이 아니라 길 량옆에 버드나무들이 빼곡히 늘어선 오솔길이였다. 산사태로 골물이 터지는 날이면 모래와 돌들로 뒤덮여 오솔길마저 없어질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촌민들이 오르내리는 교통 편리를 위하여 6,000메터나 되는 제방을 건설하고 또 제방을 따라 넓은 모래 길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키 넘는 버드나무숲을 제거하고 기름진 한전을 개간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어깨에 지게를 메고 촌민들을 이끌고 일궈낸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며 오직 촌민들을 위하여 살아온 아버지 생각에 또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숨이 턱에 닿아 목에서 겨불내가 확확 났지만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서 다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계속 앞으로 달렸다. 저 앞 모래길 왼쪽에 자그마한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조금 올라가면 동골과 서골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두개 있다. 서골의 소나무 숲이 울창한 목도고개를 넘으면 산 너머 송림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아버지는 일찍 이 산을 넘나들며 향정부로 회의를 다녔다. 회의를 끝내고 돌아올 때면 보통 날이 어슴푸레 어두워져서 산속에서 갖가지 짐승이 출몰하군 했다. 어떤 날에는 범까지 만날 때도 있어서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남겨준 렵총을 갖고 다니면서 헛방으로 총소리를 내여 짐승들을 쫓으며 산을 타고 밤길을 누볐다.    회의에 갔다 온 이튿날이면 피곤도 마다하고 곧바로 회의를 소집하여 상급의 주요문건정신들을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이렇듯 열심히 공작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불시에 생뚱같이 ‘당권패’라는 루명으로 고깔모자를 쓰고 돌림시위행진에 끌려 다니게 되었다.    고된 매질과 가혹한 형벌로 아버지는 갈비뼈가 두대나 부러지고 엄중한 폐질환을 얻고 말았다. 정정하던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몽둥이 매질을 맞으며 투쟁 받는 아버지를 보시고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집안팍 일을 도맡아하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우사에 갇혀있다 보니 장래에 의사가 꿈이였던 큰언니는 눈물을 삼키며 학교를 중퇴하고 집안의 일을 도맡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어지러운 세월의 파도 속에 우리 가족이 당한 피해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강인한 아버지는 그 긴 지난한 시간을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다.    1977년 도문시당위원회에서 4명으로 구성된 공작조를 파견하여 2년간 아버지의 문제를 철저히 조사하여 아버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 학교운동장에서 큰 대회를 소집하고 평판을 받던 날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만치에 마을 어구를 지키고 있는 늙은 비술나무도 알리라! 아버지가 얼마나 당에 충성하고 얼마나 당과 인민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땀벌창, 눈물범벅이 된 나를 늙은 비술나무는 따뜻한 아버지 품처럼 맞이해주었다. 아버지는 이 비술나무 아래에서 사원대회를 소집하였고 이 비술나무 아래에서 간부들을 모아놓고 농민들의 정황을 상세히 료해하기도 하였다. 주말마다 막차 뻐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이 비술나무 밑에서 손채양하면서 기다리던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얼어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다시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장장 20리 길을 나는 달음박질쳤고 숨이 턱에 닿아서 헐떡이며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길가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붉게 상기된 나를 보고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우리 집 앞에는 찌프차 두대가 서있었고 문상 온 조문객들로 웅성거렸다. 먼발치에서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허둥지둥 맨발 바람으로 급히 달려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한주 사이에 몰라보게 초췌해지고 폴싹 늙어버린 어머니, 이마의 주름은 더 깊어지고 헐렁한 흰옷을 입은 가녀린 몸은 슬픔으로 중심을 잃고 휘청이였다.    어머니를 부축하며 웃방에 올라가니 그토록 강경하던 아버지는 흰 천을 덮은 채 고요히 누워있었고 옆에는 정장을 입은 몇몇 간부들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 침대머리에 조용히 앉으며 나지막하게 아버지를 불렀다. 한번, 두번…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고 어머니의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 때에야 나는 침통하게 실감했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고 아버지의 따뜻한 잔등에 다시는 기댈 수 없고 주말마다 집으로 오는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저 세상에 가는 그날까지 자신의 생활은 없었다. 오직 집체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다.    아버지가 떠나던 날 억장이 무너졌고 나의 하늘도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나는 생활이 궁핍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중을 졸업하고 중등전문학교에 붙었고 우수졸업생으로 정부부문에 배치 받아 성심성의껏 일했다. 가끔 힘든 일에 부딪칠 때면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어떤 난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인생에 남겨준 정신적 재부는 영원히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등대가 되여 나의 삶의 길을 고스란히 비추어주고 있다.     가끔 고향마을을 다녀올 때면 더우기 여름철 벼꽃향기가 그윽한 수전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마을의 척박한 땅을 억척같이 일궈 옥토로 바꾼 순박한 농사꾼 아버지, 어쩌면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 권세를 내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면 오늘 이처럼 애틋하게 기억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5    <퇴직후의 당비를 바치면서> 댓글:  조회:146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건당 101주년을 맞으며 연변대학 화학학부를 졸업하고 재직기간 30여편의 기술론문을 관련 간행물에 발표하여 수차 국가급, 성, 주, 시급 영예를 따냈으며 일찍 1998년에는 과학기술일군으로 《중국조선족인물록》에 수록되였던 최정옥회원님의 글을 올립니다.    퇴직후의 당비를 바치면서 최정옥    새해에 접어들자마자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시내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개발구 정부청사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밖을 내다보면서 나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스무살 꽃나이에 당기 앞에서 정중하게 입당선서를 하던 순간부터 마음속에‘당원'이라는 두글자를 아로새겨 그 이름에 손색이 없도록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면서 살아온 나날들이 어느덧 추억이 되여 그 흔적들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당비를 바치는 일은 항상 념두에 두고 있었다.        출근할 때는 바로바로 바칠 수 있었기에 별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였지만 퇴직한 뒤로 혹시라도 빠뜨리거나 늦춰질가봐 당비를 바치는 일을 력서에 꼭꼭 표기해 두었다. 퇴직을 하고 나서도 뭔가 남은 아쉬움을 달래려고 나는 개발구에 있는 한 과일즙회사에서 출근하게 되였다. 민영기업에서 당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나의 조직관계도 이쪽으로 옮겨오게 되였다. 그렇게 나는 15년동안 개발구에 있는 정부 청사를 찾아가 당비를 납부하군 했다.    돈을 바치는 일에 뭘 그렇게 적극적이냐며 시큰둥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나는 당비도 제때에 바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당원이라고 자부할 수 있느냐며 따끔하게 충고하군 했다.    어린시절 책과 영화를 통해 혁명영웅들과 로공산당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도 이제 어른이 되면 꼭 입당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굳히게 되였다.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취지를 안 후로부터‘오보호’거나 렬군속집에 가서 물을 길어주고 땔나무를 마련해 주었는가 하면 밥도 지어주군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일찍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학교에서 단지부서기직을 맡아 내꿈을 펼칠 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얼마 후 나는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바쳤다. 입당을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하도 많아 마음을 죄이는 날들이 길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에서 나의 입당을 비준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였다. 꼭 마치 온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이였다. 당기 앞에서 선서를 하며 명실상부한 당원이 되기에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입당을 하고 나서 나는 선후로 대대단총지서기, 민병련부련장, 당지부 선전위원 등 직무를 력임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모교 중학교교장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교원을 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해왔다. 내가 대대당지부에서 선전워원 사업을 하고 있던 무렵이였다. 큰 유혹이였음에도 내가 선택한 당사업을 위해 마음을 접기로 했다.    1976년에는 로농병학원으로 추천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대대심사에서 통과되고 나서 “이렇게 다 떠나면 농촌의 당사업은 누가 앞으로 밀고 나가겠소?”라는 지부서기의 말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마음을 접게 되였다. 다행이 그 이듬해에 대학입시가 회복되여 응시했는데 합격되였다. 이번에는 지부서기도 적극 밀어준 덕분에 행운스럽게 대학꿈을 이루게 되였다.    요즘은 외지로 나가는 일이 잦다보니 당비를 제때에 바치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있지만 고향에 돌아오기 바쁘게 당비를 바치러 달려간다. 오눌도 이렇게 맵짠 추위를 무릅쓰고 뻐스에 몸을 실은 나의 마음 속에서는 벌써부터 봄바람이 불고 있다.    2021년 《로년세계》 제4기에서
4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길 아니여라> 댓글:  조회:147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등 중한시문학축제, 시랑송대회, 랑송회, 예지아컵 시랑송경연 등 다양한 시랑송대회를 수차례 기획하고 조직하면서 우리말 시사랑과 보급에 혼신을 다 바치고 계시는 연변시랑송협회 송미자회장님의 2021년 '애심녀성컵' 제7회 생활수기 은상수상작품을 올립니다.   아이들에게 꿈을     아이들에게 언어문화의 꿈을 심어주겠다는 일념으로 뛰여온 세월이 아니였던가? “요즘 애들은 우리때와 완전 달라요. 한어를 얼마나 잘 하는지 한족애들과 구분이 안돼요.”    나는 진작부터 언어학원을 꾸리고 싶었던 차에 우리말 동화구연 교실을 차리는 것으로 첫 단추를 끼웠다. 홍보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집집이 찾아다니며 우리말로 이야기를 해주고 동화구연을 배워주기도 하였다.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도 같이 수업에 참가하여 덤으로 배우라고 권고하였다. 본딴말들로 재치 있게 표현한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체험할 수 있었다. 리듬과 률동에 맞춰 우리말 동시도 읊어주었더니 재미 있다면서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쩌면 우리말의 감화력에 어깨가 으쓱해나는 순간이였다. ‘아’ 발음부터 다시 배워주고 교정해주어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였다. 혀를 펴고 “아”하는 소리로부터 혀를 령활하게 굴리는 훈련을 많이 시켰다. 권설음으로 “개구리, 오리, 꾀꼬리”하던 애들이 점차 혀를 펴고 자연스럽고 류창한 우리말발음으로 바꾸어갔다. 생각밖으로 입술발음을 못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오면 우선 발음부터 점검하였다.  언어학에 대한 새로운 공부와 아이들의 개성에 맞는 끝없는 관찰과 탐구가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호흡으로 더듬증을 교정하여 성공하였고 몇초도 진정 못하던 자페증아이도 동화구연을 할라치면 눈빛이 변하면서 몇분간씩 나와 눈을 맞추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률동동시 읊기와 동화구연은 아이들에게 정서와 구사력에 순발력을 키워주는 아주 매력적인 말놀이였다. 2014년말, 송구영신을 계기로 ‘조선말사랑’ 장끼자랑을 펼치였는데 수십명의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학부모들과 함께 모여왔다. 무대에서 나비처럼 팔랑팔랑 뛰여다니며 표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학부모들도 무척 흐뭇해하며 이런 무대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급기야 학생들의 방명록을 뒤져보니 그 학부모는 다름아닌 룡하수력수리발전유한회사의 리금숙 경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리경리가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러면서 3천원을 더 내놓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후원하겠다고까 약속했다. 실로 나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2019년에 연변독서절 계렬행사중의 하나로 들어가면서 ‘룡하컵’은 길림성독서절 브랜드행사로 떠오르게 되였다. 협회가 설립되여서부터 우리 아이들이 펼친 우리말 장끼무대는 14차례나 된다. 이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업과 정부와 출판사와 민간단체가 함께 손잡고 연출하는 우리 언어의 플랫폼이 있기에 멋진 언어문화의 환경을 만들어 갈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 무대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이런 문화행사가 잦은 연변에서 살고 싶어요.” 우리말 랑독, 랑송, 이야기 무대에 오르고 싶어 몇번씩 차를 갈아타면서까지 연길로 찾아오는 산재지구 어린이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였다.  첫 경연 때 연길, 룡정, 도문에서 온 60여명 학생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전국 각지 수백명 학생들이 호응하는 규모로 성장하였다. 우리 민족 학교와 가정들에서 중시하는 데다가 각종 위문공연이며 장끼자랑 무대에서 우리말 구연과 시랑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서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일여덟살 되는 아이들이 윤동주의 동시를 비롯한 여러가지 동시 10여수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읊자 장내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정말 보람 있네요. 사명감으로 하는 사업을 어찌 돈으로 가치를 매기겠습니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언어문화의 꿈을 심어주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심금을 울리는 리금숙경리의 말에 나는 내가 선택한 일이 얼마나 뜻 깊고 보람찬 일인지를 다시 깨달았다.       시랑송의 감화력     내가 시랑송을 고집하는 까닭은 모어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였다. 내 부모에 대한 존경이고 자존감때문이였다. 우리말 아나운서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념원때문이였고 외유내강의 조선족녀성으로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기대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말로 된 책을 밥 먹듯이 읽으며 자랐고 그만큼 우리말공부에 있어서는 천재라고 자부할 정도로 잘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경비와 무대가 부족한 우리 협회는 설립해인 2013년에 김부식선생님의 도움으로 글로리카페에서 첫 랑송모임을 가졌다. 시인, 작가, 랑송애호가들이 함께 한 랑송회는 커피향처럼 감미로웠다. 참가자들마다 시와 함께 하는 새로운 문화생활이 너무 우아하고 기품이 있어 좋다고들 입을 모았다. 그때로부터 연변시랑송협회는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부터 나는 ‘자랑스러운 내 고향 알기’ 문학캠프를 조직하여 우리 력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한편 시랑송모임도 겸하여 운영하였다. “그때의 그 매력적인 랑송을 잊을수 없습니다. 보는 순간, 그토록 랑송을 좋아하시던 조선어문선생인 저의 아버지를 다시 떠올렸고 나도 같이 하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죠. 그래서 쭉 해왔는데 지금도 랑송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에서 참 잘한 일이죠. ” 그는 늘 “저에게 시랑송은 주업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시랑송에서 받는 에너지가 제 삶의 활력소로 되여줍니다.”라고 하였다. 교단에서 수십년간 수많은 문학인들과 랑송인들을 양성해낸 김동식선생님, 86세의 고령에도 시를 암송하고 젊은이들과 겨루어 금상까지 수상한 김형자선생님, 그들은 조상들의 얼이 스민 언어를 아름다운 예술적 형식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주고 있다. 그들의 경력과 랑송사랑은 나에게 시랑송문화가 얼마나 절실하고 필요했는지를 다시 한번 깨우쳐주고있다. 시랑송문화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기 시작한 전환점은 2016년 연태에서 있은 전국애심녀성포럼 워크숍에서였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연변녀성발전촉진회 회원들의 시랑송을 준비해가지고 참가하였다. 3일간의 워크숍을 통해 나는 아이가 어른이 된 기분이였다.    우리가 준비한 합송 〈혼의 노래〉가 장내에 울려퍼질 때 몇백명 녀성들이 같이 열광하던 감동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살아가는 녀성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랑송이였다. 한번의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나선 리령 예술위원장의 무용이 퍼포먼스로 멋진 하모니를 이루면서 랑송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나도 굽은 나무 되리라 나도 못난 나무 되리라 지지리 못난 나무가 되여 고향의 선산 푸르게 하리라   당시 우리 합송이 주최측으로부터 특별상을 받으면서 시랑송문화의 가능성을 내다보게 되였다. 그때 받은 에너지가 나에게 멈출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작용하였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를 계기로 나는 시랑송으로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광동성조선족녀성협회 전명숙회장은 연변시랑송협회에 가입하여 우리가 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경제적인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전경숙의장은 솔선수범하여 선수로 나섰으며 “시랑송문화도 우리 언어문화의 정수”라면서 격변기에 처한 우리 언어문화를 살리기에 힘을 합치자고 호소하였다. 2020년,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사태로 온 세상이 마비된듯한 지루한 시간들이 지속되였다. 그 지루한 시간들속에 지친 령혼들을 보듬어 준것이 시랑송문화가 아니였을가고 자부한다. 시인들은 힘들고 지친 령혼들을 다독일 수 있는 시를 끊임없이 창작해 보내왔고 전국 각지에 있는 시랑송애호가들은 앞 다투어 그 시들을 읊어나갔다. 협회의 홍승현부장이 부지런히 음악을 제작해주었기에 모든 작업은 일사천리로 거침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낯선 삶의 방식을 터득하면서 배려와 격려와 관심의 씨앗을 가슴마다에 뿌려준 2020년의 봄은 비록 불안하고 우울하였지만 시랑송이 있어 그나마 견뎌낼수 있었다고 많은 이들이 인정해준다. 오프라인 랑송강좌도 온라인 모드로 바꿨다. 처음의 음성강의로는 효과가 그닥잖아 영상강의로 바꾸었더니 전국 각지로부터 많은 젊은 랑송애호가들이 몰려왔다. 몇번의 강의를 듣고 나서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는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기뻤다. “시랑송강의가 있는 화요일이 무척 기다려지네요. 갈증에 목 말라있던 제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입니다.”    슬프게 이 시를 읊조렸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어찌 혼자서 걸어온 길이라 하랴? 얼마나 많은 나와 같은 이들이 갈망하면서 함께 하여왔던가? 또 얼마나 많은,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회 각계 인사들이 응원해주고 힘을 보태여주고 있는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니였음을 이제야 진정 알았다. 내물이 모여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하나하나의 작은 실천이 모이면 우리는 외유내강의 자질을 갖춘 막강한 군체로 거듭 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해본다. 《연변녀성》 2021년 10월호에서
3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 댓글:  조회:127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문학창작과 랑송가로 아름다운 황혼을 멋지게 수놓아가고 있는 교육부 최영숙 회원님의 전국 애심녀성수기응모 은상 수상작품을 올립니다.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 최영숙    얼마 전 “엄마가 많이 심해졌소. 이젠 며칠 버틸 것 같지 못하오.” 라는 막내 녀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는 연길시광영원 특별간호실에 급히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계모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을 찡그린 채 침대에 누워계셨다.  “엄마, 엄마…” 내가 다급하게 몇번을 불러서야 겨우 눈을 뜬 계모는 뭔가 어렴풋이 보이는지 눈을 껌뻑이며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큰딸이 바쁠 텐데 왔구만…” 안깐힘을 다해 웃몸을 약간 일으키더니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계모, 그러더니 이내 내 두손을 꼭 잡아서 당신 가슴에 갖다 대고 놓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이야기보따리를 쉬임없이 풀어놓으련만 두눈을 꼭 감은 채 가쁜 숨만 몰아쉰다. 세살 때 전염병으로 어머니를 여읜 계모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고모들 집을 떠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열다섯살에 고모의 중매로 시집을 가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두 아이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전쟁에 참가했던 남편마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계모는 결국 자식 둘이 딸린 우리 아버지한테 재가하여 자식 셋을 낳고 시부모를 모시며 평생 동안 숱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처럼 큰 불행을 겪고도 계모는 완강한 의력과 불요불굴의 강인한 집념으로 남자들과 어깨나란히 일하면서 석현진, 도문시, 나아가 우리 주 모범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주인민대표대회 대표까지 되였다. 어디 그 뿐이랴. '문화대혁명' 후기에 부녀로서 농촌창고보관원일을 너무 잘하여 그 사적이 《연변일보》에 실리고 참관단이 우리 마을을 여러번 방문하기도 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비록 평생을 농촌에 뿌리 박고 살았지만 계모가 걸어온 파란만장한 인생길은 허구에 의해 씌여진 그 어느 드라마보다 더 굴곡적이고 감동적이였던 것 같다. 두눈을 꼭 감은 채 꼼짝 않고 누워계시는 계모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이제 오래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나며 저도 모르게 나와 계모 사이에 있었던 슬프고 기뻤던 일들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1964년 겨울방학의 어느 날, 나는 오빠를 따라 처음으로 연길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문시 수남대대 토성리에 있는 외가집으로 놀러 가게 되였다. 바로 그 때 나는 한집에서 살고 있는 아름답고 능력 있는 공산당원 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라 계모라는 엄청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나의 눈치보기 생활이 시작되였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달리 계모는 전처 자식인 오빠와 나를 자기가 낳은 세 자식 못지 않게 지극정성으로 대해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내 마음의 탕개를 늦출 수가 없었고 의심과 경계로 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열세살이 되던 해에 큰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래마을에 살던 옥주라는 친구가 부모 따라 연길로 가게 되자 우리 몇몇 친구들은 연길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영원한 기념으로 남기자고 약속했다. 다섯살 때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사진을 찍은 뒤로 쭉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없었던 터라 연길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니 너무나 신난 나머지 친구들과 약속한 날부터 마음이 너무 설레여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연길 가서 사진을 찍겠다는 말을 꺼내려니 망설여졌다.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게 하나 없는 형편에 아홉식구가 배를 곯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어찌 감히 그런 사치를 누리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닷새 동안 끙끙 속을 앓으면서 이궁리저궁리 해보았지만 합당한 리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더 말하지 않으면 안될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말을 빙빙 돌려 연길에 가도 되겠는가고 계모한테 슬쩍 여쭈었는데 글쎄 단칼에 거절을 당할 줄이야. 어정쩡해 서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왜 갑자기 연길에 가려느냐고 물었다. 내가 실토정했더니 아버지는 생각 밖으로 넉냥짜리 길림성 량표 한장에 돈 50전까지 쥐여주면서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계모가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챙겨줍소.”라고 말하는 바람에 “내가 저 애한테 돈 한번 못 주냐?” 하고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며 아침밥상을 뒤엎었고 삽시에 집안 분위기가 팽팽해지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다른 애들은 모두 연길로 떠났지만 나만 홀로 남아 온 오전 웃방에서 웃옷을 뒤집어쓰고 왕왕 소리내여 슬프게 울었다. 할머니가 내 잔등을 어루쓸며 울지 말라고 다독였지만 서러운 마음은 쉽사리 가셔지지 않았다. ‘계모는 어디까지나 계모구나. 절대로 전처 자식을 친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구나.’ 하는 고까운 생각이 내 머리속을 꽉 메웠다. 사실 그 날 계모도 일하러 나가지 않고 정주간에 조용히 누워 흐느꼈다는 사실을 썩 후에야 알았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집에서 입을 꼭 다물고 벙어리처럼 지냈다. 계모가 예전보다 더 다정하게 불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대꾸했다.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어서 밖에서 숙제를 하고 책을 보면서 시간을 질질 끌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별의별 장난을 다하면서 신나게 놀기만 하고 늘 할머니를 도와 하던 일들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말없이 지켜보던 계모가 나를 불렀다. “영숙아, 그 날 일은 미안하다. 그런데 너도 잘 알잖니, 우리 집 형편이 너희들 공책 사주기에도 변변치 않다는 걸… 그런데 종래로 애들한테 관심 없던 너네 아버지가 사진 찍으러 가겠다는 너한테 오십전이란 큰돈을 주니 나도 모르게 말이 이상하게 튀여나가드라…” “내가… 얼마나… 그 사진 찍고 싶었는데…”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또다시 내 볼을 적셨고 꺽꺽거리며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니 맘 모르는 게 아니야. 그 날 그토록 서럽게 우는 널 보면서 조금만 참았던 걸 하고 많이 후회했어. 그런데 영숙아, 하나만 알아다오. 절대로 내가 후에미여서,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앞으로 내가 잘할 테니 지나간 일은 잊어주렴. 할머니도 저렇게 고생을 하는데 큰딸인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 뒤로 계모는 과연 약속 대로 매사에 신중을 기울였다. 몇년이 지나 나도 고중을 졸업하고 운 좋게 대대에서 꾸린 소학교에 교원으로 초빙받아 교단에 올라서게 되였다. 1976년 늦가을, 계모는 친척방문차 조선에 있는 큰어머니 댁에 다녀오게 되였다. 돌아오면서 들고 온 물건 속에는 마른명태와 낙지가 잔뜩 들어있은외 데트론이라는 검정색 바지감이 끼워있었다. 까만 데트론천은 ‘디췌량’천보다 퍽 무게 있고 고급스러워보이는 옷감이였다. 그런데 그런 고급천을 계모가 나에게 건네주면서 학교 옆 양복점에 가서 바지를 해입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뜻밖이여서 의아한 눈길로 계모를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이젠 선생님이 되여 매일 교단에 올라야 하는데 지금 입고 있는 바지가 볼품없다면서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해있는 나한테 마구 밀어주었다. 내가 데트론바지를 입고 나서자 보는 친구들마다 “너 정말 좋은 바지 입었네.”, “야, 축 내리 서는 바지 입으니 정말 멋 있다!”라고 말하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주어 한동안 어깨가 으쓱해서 다녔다. 한달 후에야 나는 그 데트론천은 당시 조선에서도 흔하지 않은 고급천으로서 계모의 언니가 동생한테 큰맘 먹고 준 것이라는 사실을 귀동냥으로 얻어듣게 되였다. 사진사건으로 계모에 대해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던 무렵 바지감까지 선물로 받고 나니 고마움이 움터올랐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려는 소중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음에도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글로 써서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아홉살에 좁쌀 한 마대에 팔려갔다가 열여섯살에는 본댁이 아이 못 낳는 집에 첩으로 팔려갔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를 씨받이로 사갔던 중년부부가 전염병으로 돌아가고 23살 꽃나이에 생과부가 된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한테 재가해서 아버지를 비롯한 전처 자식 넷을 친자식처럼 키웠으니 그 기구한 운명을 담은 이야기를 꼭 써내고 싶었다. 나는 내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 젖도 못 먹고 자라온 비운을 가졌더라도 누구보다 멋지게 살고 싶었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자면 꼭 작가가 되여야 하고 작가가 되려면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 가서 전문지식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속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가 회복되지 않았던 때라 대학에 가려면 추천을 받아야 하고 추천을 받자면 또 무조건 농촌에서 표현이 좋아야 했을 뿐더러 련애도 절대 해서는 안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에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래마을에 하향을 왔던 지식청년이 어느 하루 길을 가는 나를 가로막고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펼쳐보니 고백편지였던 터라 갈기갈기 찢어 흐르는 도랑물에 던져버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글쎄 우리 친척집에 찾아가서 제발 둘 사이를 성사시켜달라고 청을 드는 바람에 소문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후에 사실의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 나는 분하기 짝이 없었고 속까지 바질바질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남들이 알면 대학에 추천받는 데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고 부모님 귀에 소문이 들어가면 죽게 혼날 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래서 내가 사실의 전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마침 아래마을에서 영화를 돌리게 되자 다른 식구들은 영화 보러 나갔다. 모두들 자리 비운 틈을 타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앉혀놓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꼭 대학에 가야 하기에 농촌에서 절대 련애 같은 걸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래마을의 한 지식청년이 자꾸 날 따라다닙니다. 어떤 소문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들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며 비자루를 거머쥐더니 나한테 달려들었다. “네 년이 어떻게 설치구 다녔기에 벌써 남자가 따라다녀?” 비자루가 내 어깨에 떨어지려는 순간 눈치 빠른 계모가 얼른 막아나섰다. “이거 봅소, 이재 들으니 야 잘못한 게 하나두 없구만 왜 이럼두?” “자고로 녀자들이 처신 잘하면 남자들이 얼씬도 못하우.” “이재 같이 들었재쿠 뭠두. 쟤는 련애할 생각도 없는데 그 남자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다 하잼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않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씩씩거리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믿고 말하면 잘 듣고 일깨우든지 혼내든지 해야지 세마디 안짝에 비깡대부터 쥐면 어쩜두?” “니 말 알아들었으니까 빨리 영화구경이나 가자.” 계모는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나를 떠밀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숨이 활 나왔다. 계모 덕분에 아버지한테 얻어터질 번한 곤경에서 벗어났다. 다시 생각해봐도 무턱대고 화부터 내는 친아버지보다 사리가 밝고 아량 깊은 계모가 훨씬 좋고 고마웠다. 이윽고 어둑스레한 밤길을 걸으며 계모가 물었다. “영숙아, 너 방금 말한 대로 꼭 대학에 갈 거지?” “네.” “그래, 세상에 노력해서 안되는 일이 없네라. 꼭 대학에 가거라. 내 너를 믿는다.” 어쩐지 계모의 “믿는다”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면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운이 좋게도 사범전문대학에 붙었다. 비록 내가 그렇게 원하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는 아니였지만 좋아하는 교원사업을 그냥 할 수 있다는 리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거기다 사범학교에 가서 한학급의 총명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였다. 결혼식을 한달 앞둔 어느 날, 칼바람이 쌩쌩 불어치는 엄동설한에 약혼자가 장춘으로 출장 가게 되여 나는 배웅하러 함께 역전으로 나갔다. 4선 뻐스에서 내리니 눈보라가 어찌나 세게 몰아치는지 코끝이 단통 얼어들고 눈도 바로 뜰 수 없었다. ‘이럴 때 마스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약혼자와 함께 손 잡고 대합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멀리에서 검은색 솜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빙빙 두른 키가 자그마한 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오가는 행인들을 가로막고 서서 뭐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왼손에 새하얀 마스크를 가득 들고 오른손으로 마스크를 가리키며 무엇이라 설명중인 것 같았다. 추위 속에 땔감을 보낸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감탄하며 약혼자 손을 잡아끌고 앞으로 바싹 다가가 물었다. “커우쪼 이거 둬챈?(마스크 하나에 얼마예요?)” 그 당시 연길에서 물건 파는 사람 대부분이 한족들이였고 또 우리 연변에 사는 사람들은 한족인지 조선족인지 분간이 안되면 먼저 한어로 묻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마스크 하나에 얼맘두?” 이번에는 약혼자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마스크를 팔던 녀인이 홱 돌아서더니 반대방향으로 휑하니 걸어갔다. 녀인의 어이없는 행동에 화가 난 나는 따라가서 마스크를 와락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마스크들이 와르르 땅에 떨어졌다. “왜 마스크를 사겠다는데 달아남두?” 하지만 뒤늦게야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굳어졌다가 땅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동무 왜 이러우?” 뒤따라온 약혼자가 나를 잽싸게 안아 일으키면서 마스크를 팔던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아이, 어머이 아닙니까?” 하고 소리쳤다. 나는 땅에 떨어진 마스크를 하나 주어 놀란 기색이 력력한 약혼자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동무, 기차시간이 다되였는데 빨리 가세요.” 약혼자가 떠나고 나는 땅에 떨어진 마스크들을 몽땅 주어들고 계모의 팔을 붙잡고 역전 가까이에 있는 친척집에 들어갔다. 추워서 부들부들 떠는 계모를 얼른 가마목에 앉혀놓고 “엄마, 이 추운 겨울에 엄마가 왜 마스크 장사를 함두?” 하고 심문하듯 따졌다. “니 엄마가 니 결혼식 례단준비에 보태겠다고 이 엄동설한에 이렇게 마스크를 판다. 벌써 한 보름 됐다.” 입 빠른 친척집 큰어머니가 계모 대신 대답했다. “엄마, 결혼식 때문에 아무 걱정 말라구 여러번 말했잼두.” “야, 아무리 그래두 그렇지. 니 말처럼 아무 것도 안해가지고 가면 연길 시내 시집에서 당연히 널 업신여길 게 아니겠니. 그리고 우리 가문을 얼마나 비웃겠니. 어른들도 계시는 집안이란 게 법이 없이 빈손으로 시집 보냈다고 말이다.” “엄마, 지금 어디 옛날처럼 법을 따질 땜두. 몇년 전에 사촌언니는 호미 두개 사들고 시집 가도 너무 잘살고 있고 고모사촌오빠는 대장함에 모주석책을 넣고 장가 가도 지금 다 잘살잼두? 아버지, 엄마는 농촌에서 나를 대학에 보낸 것만 해두 대단하니까 이렇게 준비하느라 고생하지 맙소. 내 정말 아무 것도 안해가지고 시집 가겠으꾸마.” “그럼 니 평생 기 못 편다.” “엄마, 내 기 죽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쓸데없는 근심걱정하지 말고 래일 당장 집에 갑소. 그런데 마스크를 판다는 사람이 왜 마스크를 끼지 않고 이렇게 얼굴을 빨갛게 얼굼두?” “마스크를 끼고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더라. 그래서 하나라도 더 팔려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계모를 와락 그러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렀다. ‘내가 뭐라고? 내가 엄마한테 뭘 잘했다고…’ 부처님이 아닌 이상 계모도 실수할 때 있고 잘못할 때 있는 것이 정상인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거의 십년 동안이나 계모의 진심을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꼭 닫은 채 살아온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였다. 나의 성화를 못이기겠는지 계모는 가져온 마스크만 다 팔면 이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와 약속했다. 출장 갔던 약혼자가 돌아오자 나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동무, 미안하지만 결혼식 때 아무 례단도 준비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당연히 괜찮지. 정말 잘 생각했소. 요 며칠 마스크를 팔던 장모님 모습이 내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잊혀지지 않았소. 계모라서 심리부담이 더 큰가 보오. 우리 부모님한테는 내가 잘 말해놓을게.” 내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계모는 기어이 약간의 례단을 갖추어놓았다. 결혼식날, 큰절을 올리고 떠나는 나의 두손을 붙잡고 계모는 눈물이 글썽해 말씀하였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나쁜 기억은 본가집에 싹 다 묻어두고 오늘부터 시댁에서 새 출발 하거라. 절대로 기 죽지 말고 떳떳하게 잘살거라.” 결혼하고 자식 둘 낳아 키우면서 매번 계모의 도움으로 인생 고비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모는 년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계속 모시고 살았고 시집 간 내 걱정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내가 난산으로 둘째를 낳고 모진 고생을 할 때에도 계모는 그 바쁜 벼씨 붓는 일을 제쳐놓고 달려와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시중 들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온 집 식구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할아버지 시중을 들고 계시는 할머니를 우리 집에 보내 애기를 돌보게 했다. 비록 계모는 이 세상 무수한 엄마들처럼 자식을 품에 꼭 끌어안고 다독이며 속삭일 줄은 몰랐어도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굳세게 모든 역경을 헤쳐나가며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하고 뭐든지 척척 해내는 계모의 모습을 보면서 커왔던지라 나도 언제 어디서나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뚝심으로 기 죽지 않고 당당하고 지혜롭게 내 삶에 도전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모성애를 잃었다고 한탄하던 내가 뒤늦게나마 계모의 사랑을 넘쳐나게 받으면서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성애를 느끼게 되여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래서 그 고마운 마음을 필 끝에 담아 이렇게 글로나마 표달하고저 한다. 이 글이 생사의 고비에서 몸부림치는 계모의 생전에 이 딸이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변녀성》 2018년 제10호에서  
2    <아버지라는 울바자> 댓글:  조회:143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찍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소년아동프로 전직 사회를 담당했었고 연변가무단 화극부 배우로 활약하면서 해마다 음력설야회 소품으로 대중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했던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차세대 교육담당 최미화 부회장의 '애심녀성컵' 제6회 생활수기 응모 수상작품을 올립니다.   아버지라는 울바자      최미화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울바자를 친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높든 낮든 단단하든 허술하든 울타리를 치고 모든 것을 보호해주는 의미의 존재一울바자! 나에게도 그런 울바자 같은 존재의 아버지가 계신다. 나의 아버지는 성격이 불같고 호랑이 같이 엄한 분이다. 철 없던 사춘기시절, 귀한 자식 매로 키운다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 리 만무했던 나는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욕을 얻어맞은 날이면 일기책에 "커서 복수할 사람 1위" 에 아버지이름을 써넣으면서 종종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군 하였다. 한번은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남장을 하기 즐기는 녀자애가 “미화야, 학교 가자!” 라고 웨치면서 불쑥 우리 집에 들어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버지의 넉가래 같은 손이 날아와 내 귀쌈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영문도 모른 채 얼얼하게 얻어맞은 나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계집애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애비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벌써부터 사내녀석들이 집에 들락거려?” 이미 얻어맞아 귀의 달팽이관이 파열 직전에 이른 마당에 해석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아예 등교를 포기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곡소리를 내면서 꼬박 하루 동안 드러누워있었다. 엄마한테서 친구가 녀자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버지는 화가 누그러들었고 ‘과실죄’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내 머리맡에 동전을 한뼘 높이로 쌓아놓았다. 엄마의 조해와 금전의 힘으로 그번 ‘사건’은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합의’가 되였다. 또 한번은 우리 집앞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저녁에 남자애들이 녀자애네 집앞에서 휘파람을 불면 녀자애더러 나오라는 신호이고 그럴 때 나가면 십중팔구 사랑고백을 받는다는 것을 주어들은 적이 있는지라 나는 도대체 어떤 녀석이 나한테 호감이 있는지 궁금해서 살짝 들뜬 마음으로 엉덩이를 들었다. 그 순간, 바람이 휙 불더니 아버지가 어느새 번개같이 뛰여나가 집앞에 무져놓은 장작 가운데서 제일 굵은 몽둥이를 찾아들고 호통쳤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어디서 얼쩡거려? 죽고 싶어?” 아버지의 불호령에 남자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 이후로 우리 동네 남학생들은 등교길에 거쳐야 할 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을 빙 에둘러 다른 길로 학교를 다녔다.  그 사건 이후로 대머리인 아버지한테는 ‘고르바쵸브’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르바쵸브’가 떴다 하면 마음 약한 남자애들은 대낮에 길거리에 나온 쥐새끼마냥 갈팡질팡했다. 그토록 엄한 아버지 밑에서 죽은듯이 얌전히 살다가 한번은 목숨을 내걸고 아버지 허락도 없이 영화구경을 간 적이 있다. 남들이 다 다니는 영화관에 왜 나만 못 가는가 하는 오기로 간덩이가 부어서 들어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실지 무서워 집 주위에서 머뭇거리는데 인기척이 들리길래 얼른 몸을 숨겼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가 황소숨을 몰아쉬며 동네를 참빗질하듯이 샅샅이 훑고 그 뒤로 엄마가 울면서 따라다녔다. 밖에서 둬시간 숨어있자니 춥고 배고픈지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발로 집에 들어갔다. '고르바쵸브'가 구들 한복판에 앉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강술을 마시고 계셨다. “영화구경 했슴다. 죽여주쇼.” 는 털썩 무릎부터 꿇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핀을 꽂은 채로 머리를 맞으면 아플 것 같아 머리핀을 빼면서 말했다. 죄행이 엄중하여 손길이 아닌 발길이 날아올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으니 고맙다. 쉬거라.” 라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였다. 평소에 맞을 때에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던 내가 아버지의 그 말에 오히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데 대한 안도의 눈물이였는지 모르겠다. “불량배들한테 랍치라도 당했을가 봐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른다.” 내 걱정으로 아버지가 십년은 감수했을 거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이 딸이 불량배들이 랍치해갈 만큼 이쁜 얼굴이 아닌데요.’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후에 내 또래 녀자애들이 저녁에 늦게까지 놀러 다니다가 건달들한테 잡혀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그 날 아버지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 아니였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였다. '고르바쵸브' 아버지의 엄한 교육과 매는 귀한 아들에게도 례외는 아니였다. 손녀만 줄줄이 9명이나 되는 최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여난 남동생은 가문에서 ‘황태자’로 받들렸으나 잘못을 저지르면 여전히 아버지의 엄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생이 사춘기시절 호기심에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켰다. 아버지는 대뜸 소가죽 혁띠를 빼들고 사정없이 동생을 후려쳤다. 말리고 싶었으나 괜히 그 불똥이 나한테 튈가 봐 나는 옆에서 비렬하게 구경만 하였다. 아무튼 그 때 크게 혼나서였는지 동생은 평생 담배와 인연을 끊고 산다.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 만도 할 텐데 나는 늘 아버지 말씀에 토를 달거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여 매를 벌군 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자기 딸임에도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으랴. “내 장담컨대 너 그 따위 성격과 말 대답질에 손 안 올라갈 남자 없다. 너 앞으로 남편한테 매 맞고 살지 않으면 내가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 “걱정 마세요. 부처님처럼 성격 좋고 착한 순둥이를 만나서 맞는게 아니라 내가 때리면서 살테니, 아버지 손바닥에 지진 장맛 꼭 봅시다요!” “너를 안 때리고 살만치 참을성 있는 놈 있으면, 내가 사위한테 매일 절을 하겠다.” 이것이 우리 집에서 삼시 세끼 식사 다음으로 주로 나누는 대화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자 아버지는 남자는 같은 남자가 봐야 안다면서 남자가 생기면 애비한테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는 둬번 만나본 남자를 아버지 앞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맞혔다. 긴장한 마음으로 평가를 기다리는데  “니 임자 맞는 거 같더라. 거절당하지 않도록 잘해보거라. 에헴.”라고 하더니 아버지만의 특유한 헛기침을 하며 뒤짐을 지고 쥉쥉 걸어갔다.  행여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떡하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잘해보라고 하니 그 날부터 나는 ‘퇴짜’를 안 맞으려고 온갖 아양과 내숭을 다  떨어 끝내는 남자친구를 내 편으로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앉은 자리에서 기름개구리를 10마리씩 거뜬히 먹어치우면서도 “어우~ 그 징그러운 기름개구리를 무서워서 여자가 어떻게 먹어요?” 라고 하며 손사래를 쳤고 주량이 웬만한 남자보다 세면서도 “술곁에만 갔다와도 취해요! 아직 술 못배워서~” 라고 하면서 한손으로 입을 조심스레 막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그럭저럭 2년이라는 련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는데 신랑이 어찌나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려있는지 민망하여  “넘 좋아하니 바보스러워요. 자제하세요!”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별소릴 다하오. 내 결혼에 주인공인 내가 좋아하지 않고 누가 좋아하겠소?” 라며 발걸음도 가볍게 씨엉씨엉 례식장으로 걸어들어갔다.  부모님에게 큰절을 올리자 덕담을 해주라고 사회자가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남들보다 잘해주지 못해서…” 라고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한채 끝내 사회자한테 마이크를 도로 넘겨준다. 동네 크고작은 행사에서 사회를 도맡아할 정도로 언변이 뛰여난 아버지가 정작 이 딸의 결혼식에서 말을 잇지 못하다니!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내 동생이 13살에 갑자기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병석에 누워 힘든 투병생활을 하게 되였다. “남산 호랑이는 총소리에 늙고 부모는 자식의 앓음소리에 늙는다.”고 아버지는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어마어마한 빚을 진 상태라 친정에서는 시집 가는 나에게 옷 한벌, 이불 한채, 지어 숟가락 하나 사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와 신랑의 월급은 손에 들어오기 바쁘게 동생의 치료비에 꼬박꼬박 보태졌고 우리의 신혼생활은 빚을 안고 시작되였다. 그런 딸자식을 바라보며 안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가 어찌 편한 덕담을 할수 있었으랴?!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아들을 살리려고 딸을 고생시킨 것이 가슴 아파 결혼식을 앞두고 아버지가 매일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나중에 동네 분들한테서 전해들어서야 알게 되였다. 최선을 다해 자식에게 무엇이든 최고로 잘해주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딸자식을 둔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죽고 못살아 한 결혼이라지만 입안의 혀도 깨물 때가 있다고 우리 부부도 가끔 다툴 때가 있었다.  한번은 남편과 다투고 집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아버지의 ‘동정표’를 얻으려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오서방이요, 날 괴롭혀요. 어찌된 일인가 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내 말을 가로챘다. “시끄럽다. 안 봐도 비디오다. 니 잘못이 뻔해! 내 물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우리 집에서는 불량품 반납이 안된다. 페품으로 처리할 테니 알아서 해라!”  헉! 알심들여 준비한 내 씨나리오가 무산되는 순간, 너무 허무했다.  울면서 하소연하여 모든 죄와 잘못을 오서방한테 덮어씌우며 눈물연기까지 곁들이면  아버지가 “귀한 내새끼 눈에서 눈물을 빼? 그놈 혼내야겠다. 앞서거라!” 하면서 맨발로 달려나와 전치 8주 나올 정도로 속시원히 두들겨 패주는걸로 극본이 탄탄하게 구성되여 있었는데, 그리고 후속작으로는 오서방이 아버지네집에 날 데리러 와서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빌면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척하며 집에 자연스레 컴백하는것으로 원만한 에필로그까지 다 짜놓았는데 대사도 채 하지 못한채 오디션에서 처참하게 탈락을 하다니… 합작을 안해주시는 아버지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그 이후로 내 인생사전에서 ‘가출’이라는 단어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야 이 두 남자사이에 나를 두고  엄청난  뒤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사위한테 딸을 허락하는 대신 해마다 신문, 잡지 등을 주문하는 비용을 사위가 부담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즉 아버지는 딸을 팔아 문학에 투자하였고 남편은 사람에 투자한 셈이다.       그러고보니 삶도 역시 주식과 비슷한것 같다. 신문이나 잡지 주문은 1년에 몇백원이면 해결되지만, 남편은 선견지명이 있어 ‘투자’를 제대로 한 덕분에 아버지와의 ‘불평등조약’ 체결로 리익을 톡톡히 본 것이다.  461원의 월급으로 남편한테 시집왔던 나는 비교적 강한 경쟁력과 돈벌이 재주로 나날이 주가가 치솟고 증권그라프에서 별다른 하락세 없이 줄곧 상승선을 긋고 있으며 그 보답으로 가끔 남편에게 통큰 선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우리집 판사님의 현명한 안목을 칭찬하며 “이래서 사람은 역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신다. 10년전, 아버지 환갑잔치에 어쩌다 가족들이 노래방에 가게 되였고 그 날 아버지의 노래도 들어보았다. 아버지의 십팔번은〈남자라는 리유로〉라는 노래였다.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여, 소리 내여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리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아버지의 온갖 애환과 삶의 무게를 담은 가사를 한마디씩 소화하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져 나도 몰래 가슴이 짠해났다. 아버지는 한때 당뇨병합병증으로 썩어가는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보름간 아버지를 간병해드린 적이 있는데 말이 간병이지 아버지는 나더러 아무 것도 못하게 하였다. 상처가 흉하다고 날 손도 못 대게 하고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새벽이면 먼저 일어나 밥까지 다해놓고 나를 깨웠다. 몇달 후 아버지네 집에 들렸더니 객실 한복판에 아버지가 직접 쓴 문구가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좋아지고 있다!” 글자마다, 마디마디 가슴을 파고들었다. 수면제 없이는 잠 못 이루던 아버지가 인생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라며 삶의 치렬한 현장에서 자신과 사투를 벌인 가슴 아픈 흔적이였다. 젊었을 적에는 벽을 뚫고 나갈 정도로 기백이 넘치던 아버지가 년세가 들면서 차츰 연약해져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릿할 때가 많다.  한번은 밖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갈라졌는데 한참 길을 가다가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내 뒤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더니 연신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발걸음을 떼시는데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려서 마음이 한없이 서글펐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갈라진 후 인차 걸음을 옮기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혹시 뒤돌아서 당신의 절뚝거리는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될가 봐 그게 싫었던 것이였다. 요즘은 통화할 때마다 “고맙다” 는 말과 “미안하다” 는 말만 곱씹는 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맙고 미안한지 그저 안스럽기만 하다.  건강한 몸, 남부럽지 않은 말재주, 웬만한 글솜씨, 활발한 교제능력, 락천적인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심지어 주량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아버지를 신통히 쏙 빼닮았으니 이토록 위대하고 찬란한 유산을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송구해하시는 아버지… 사실 ‘고르바쵸브’의 패기가 점점 사라져가게 아버지의 기를 죽이는 데는 내가 한몫을 했었다.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늙은이는 추억에 산다고 아버지가 술상에만 마주앉으면 “옛날에 내가…” 하고 서두를 떼는데 그 때마다 나는 대뜸  “네, 알 만합니다. 개산툰 산의 범은 다 아버지가 때려잡으셨죠? 그래서 지금 산에 호랑이가 멸종되고 고양이만 남은 거 맞죠?”라고 중둥무이해버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 한다하는 깡패두목 아무개 말이야, 나만 보면 형님, 형님 하고 그랬다!”라고 하시면  “아버지 나이가 한참 이상이니 그래 형님이라 하지 동생이라 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까밝혀놓아 아버지가 괜히 게면쩍어 입을 쩝쩝 다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철없이 놀아 뒤늦은 후회가 갈마든다. 요새는 가끔 아버지한테 데이트를 신청하여 함께 등산하고는 아버지가 즐기는 회집에 들린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나 죽거든 절대 울지 말라. 세상에 너 만큼한 딸 없다. 현대 심청이야.”라고 하며 엄지를 내미신다. 사람들은 흔히 아버지의 사랑을 바다와 산에 비한다. 그만큼 깊고 무게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든든한 울바자에 비하고 싶다. 아버지의 울바자 같이 소박한 사랑은 변함없이 나를 지켜주신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연변녀성》 2020년 12월호에서
1    <나와 로라스케트장의 인연> 댓글:  조회:144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양한 취미생활로 아름다운 황혼을 빛내가는 김경희녀사님의 '애심녀성컵' 제4회 생활수기 응모 수상작품 가작상 수상작품 을 올립니다.  나와 로라스케트장의 인연                                            김경희     25년 전, 개혁개방의 거세찬 물결을 타고 나는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체육관 실내에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게 되였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잠시 그만두고 모험을 강행하며 상업계에 몸을 훌쩍 던져버렸다. 어벌이 크게 안정된 직장마저 뿌리치고 로라스케트장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한국에 가서 쇼핑을 빼놓으면 서운하다기에 하루는 롯데백화점을 찾게 되였고 지하에 설치된 로라스케트장에서 음악에 몸을 맡기고 신나게 로라스케트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번쩍 뜬 기분이였고 신선한 충격이였다. ‘우리 고장에서도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 당시만 해도 연변에는 아이들이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돈도 돈이였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고향 아이들에게도 건전하고 추억이 될 만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한달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가 나는 결국 로라스케트장을 오픈하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남편과 합의 속에 이뤄진 용단이였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단시일내에 어디 가서 그 많은 돈을 얻어온단 말인가? 며칠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나는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나의 사업구상을 털어놓았다. 듣자마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뒤로 빠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오죽 고민을 많이 했을가 하며 무조건 믿는다면서 장농 속에 깊숙이 보관해두었던 돈을 싹싹 털어주는 고마운 이도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렇게 모아진 돈도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그래도 사업을 하기엔 태부족이였다. 나머지 부족한 15만원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되였다. 1993년도에 15만원이면 고급 아빠트 두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거금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 사업을 벌려본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남들한테서 퍼그나 꾸고도 겁나는 게 없이 은행대출까지 받았는지 모르겠다. 돈이 모아지자 나는 그 숱한 현찰을 들고 미리 봐두었던 복건성 하문에 있는 한 대만기업을 찾아 떠났다. 요즘에는 휴대폰만 있으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 가서도 마음대로 금융거래를 가질 수 있지만 그 때는 예상도 못할 사치였다. 나는 돈을 빨간 돈가방에 넣고 두겹, 세겹으로 허리춤에 찼다. 행여 나쁜 사람들의 눈에 띄워 큰 변을 당할가 봐 일부러 십년 전 궤 밑에 보관해두었던 엄마 옷을 찾아입고 화장기도 없이 머리도 부수수한 채로 집을 나섰다. 거울을 비춰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적어도 돈이 있는 사람 같게는 안 보였다. 한푼이라도 아끼느라 침대렬차는 생각도 않고 일반석렬차에서 꼬박 사흘밤을 지새웠다. 잠자는 동안에 행여 털릴가 봐 전전긍긍하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아닌게 아니라 군복외투 같은 걸 걸친 한 무리 도적떼들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려객들을 골라가며 호주머니를 들추어 푼돈을 챙기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업일군들은 뭐 하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잠들지 않은 려객들도 더러 있었지만 자기한테 화가 떨어질가 봐 그자들이 대놓고 절도하는 데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나는 몰려오는 잠과 사투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사흘낮 사흘밤을 버텼다. 녀자 혼자서 렬차에 몸을 실은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현금까지 묵직하게 차고 있었으니 참으로 소름 끼치게 아찔하고 무시무시한 시련이였다. 그렇게 내내 마음을 졸이면서 사흘 만에 목적지인 하문에 도착했다. 로라스케트 신발 100컬레를 구입하면서 10여만원의 현찰을 지불하고 나니 볼록했던 배가 홀쪽하게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긴장했던 마음의 탕개도 풀리였다. 당시 무슨 용기로 녀자 혼자서 겁도 없이 십여만원을 몸에 지니고 한어도 변변히 못하면서 생전 가보지도 못한 그 먼곳까지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물류회사를 통해 구매한 신발들을 부치자마자 곧장 돌아와서는 체육관에 여러가지 필요한 설비들을 설치하고 또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체크하느라 밤낮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 때는 말 그대로 일에 대한 열정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런데 로라스케트신발을 부친 지 20여일이 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택배회사에 확인하면 물건이 어디 쯤에 도착했는지 바로 알 수 있으련만 당시로서는 그런 여건이 안되였다. 미리 정해놓은 개업날자(5월 28일)가 눈앞에 다가오고 청첩도 다 돌렸는데 26일까지도 제일 중요한 로라스케트신발이 감감무소식이니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갔다. 도착하는 시간을 미처 꼼꼼히 체크하지도 않고 마음만 들떠 개업날자를 미리 정해놓았으니 모든 게 내 과실이였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어데 있겠는가?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데 27일 오후에 오매에도 그리던 물건이 장춘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받게 되였다. 우리는 서로 전화를 바꿔가며 급한 사정을 루루이 얘기했다. 운송료를 곱으로 더 줄 테니 밤 사이에 꼭 도착하게 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하고 사정하였다. 딱한 사정을 헤아려 물류회사에서 밤샘작업까지 해가면서 돌아친 덕에 드디여 이튿날 새벽 2시까지 물건이 모두 이르게 되였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1993년 5월 28일 오전 9시 58분에 드디여 ‘금마로라스케트장’을 개업하였다. 시누이, 올케, 언니, 시골에 있던 조카들까지 모두 우리 로라스케스장에 취직하게 되였다. 나는 일약 가문의 직업해결사로 떠올랐다.   연변에서 최초였을 만큼 주변의 걱정과 달리 수입이 짭짤하였다. 나는 우선 은행대출부터 갚았고 친척들한테서 꿨던 돈들도 리자까지 푼푼히 얹어주며 하나둘 갚아나갔다. 신발도 400컬레 더 늘여 스케트장 규모를 넓혀가는 동시에 경영에 더 신경을 기울여가며 사업을 확장해갔다. 고생 끝에 락이 온다고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앉아서 지켜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던중 예상치도 못했던 시련이 닥쳐왔다. 로라스케트라는 운동이 워낙에 생소한 데다가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큰 히트를 치는 바람에 깡패들이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괴롭혔다. 무리를 지어 우르르 입장해서는 표를 사기는커녕 직원들까지 협박하면서 란리를 피웠다. 어느 날에는 서로 다른 지방의 깡패들끼리 무리싸움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정말이지 핍진한 무협드라마가 울고 갈 만치 아짜아짜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여기저기서 돈 냄새를 맡고 심지어 낯선 사람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로반, 돈 좀 꿔주오.”, “로반, 협찬 좀 해주오.” 하며 귀찮게 굴었다. 그 무렵에 관리업체에서까지 찾아와 규정에 어긋나는 부분을 짚어가며 피대를 세우니 정말이지 애들처럼 엉엉 울고 싶은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성실하게 맡은 바 사업을 이끌어가려고 한 것 뿐인데 이상한 류언비어들까지 도니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모든 걸 그대로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 인생과 내 가족의 신용을 걸고 시작한 첫 스타트를 그렇게 무의미하게 접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움직여나갔다. 머리를 짜던 끝에 그래도 해당 부문에 문제를 반영하고 함께 치안 관리와 대책을 강구하는 게 가장 적합한 대안이겠다는 판단에 해당 구역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에서 적시적으로 나서 도와주었다. 매일 두명의 민경을 파견하여 영업장소를 지켜주었다. 연길시보안회사에서도 5명의 보안인원을 보내주었다. 그 뒤로 로라스케트장은 서서히 질서가 잡혀지기 시작하였다. 온갖 비바람에 풍상고초를 겪고 점차적으로 치안도 안정되고 운영도 잘되면서 기업으로서의 전성기를 한껏 누리게 되였다.     로라스케트장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낮에는 중소학교 학생들의 체육시간으로 탈바꿈되였고 밤에는 가족과 련인들의 힐링장소로 되였다. 황홀한 불빛이 명멸하는 로라스케트장에서 쌍쌍의 련인들은 손에 손 잡고 은은한 노래소리에 맞추어 예술과 스포츠의 미묘한 조화를 한껏 즐겼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로라스케트장에서 생일이벤트를 즐기는 장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웃고 떠들며 행복을 만긱하는 화면들이 한장 또 한장의 사진이 되여 추억의 앨범을 채워갔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행운스러운 사람인 것 같다. 그 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모든 일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였고 딸애도 남부럽지 않게 영국 명문대학에 류학을 보낼 수 있게 되였다. 뱅글뱅글 로라스케트 바퀴가 돌고도는 것처럼 내 인생의 수레바퀴도 멈출 줄을 몰랐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흘러 어느덧 25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25년이 지난 오늘 그제날 로라스케트장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도망 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지난날의 시련도 이젠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추억으로 가슴 속 어디엔가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다. 로라스케트장과 함께 했던 나의 청춘, 나의 꿈은 땅속깊이 뻗어나간 그루터기마냥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나의 40대를 고스란히 바쳐온 로라스케트장. 가끔씩 그 때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내 삶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연변녀성》 2018년 제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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