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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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나는 누구냐?(jin과 kim) 댓글:  조회:6100  추천:30  2010-07-16
JIN과 KIM 1990년대 초반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있었던 일이다.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삼일 묵고 마포소재 가든호텔에 옮기게 된다는 소식을 한국 업무거래처 분들에게 알렸다. 그 시절은 지금과 달리 한국도 통신이 발달해 있지 않아 매우 불편했다. 하여 한국 분들이 호텔카운터에 전화해서 나의 룸 번호를 체크하고 나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분들이 나의 성을 KIM라고 말하니 호텔 측에선 그런 손님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긴 나의 성은 한국식으로는 KIM이지만 나는 분명히 중국공민이기에 중국식으로 JIN이기 때문에 KIM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날 느닷없이 그때 일을 들먹이는 이유는 JIN과 KIM을 갖고 우리조선족이 흔히 안고 있는 문제, 나는 누구냐? 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풀이를 하기 위함이다. 조선족은 분명히 'JIN'이지 ‘KIM’이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조선족을 동족이란 차원에서 ‘KIM’으로 인식하고 만약 한국이 중국과 축구경기를 하는데 중국을 응원한다면 몹시 서운해 한다. 관건문제는 한국인은 조선족을 재미 혹은 재일교포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왜 ‘KIM’이 아닌 ‘JIN’이 되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재미 혹은 재일교포와 질적으로 다르다. 재미 혹은 재일교포는 이미 달리고 있는 그 나라 열차에 무임승차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슨 말이냐? 조선족은 만주시절부터 그 땅에 가서 토지를 개척하여 생계를 유지해왔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면서 항일도 하고 국민당과도 싸우고 신중국 건설에 피와 땀을 이바지해 왔고 귀중한 목숨까지 바쳐왔다. 또 이런 맥락으로 항미원조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중국사회주의건립과 건설에 직접 자신의 몫을 해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민권을 얻고 주인의식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재일교포의 경우 수십 년 열도에서 살았어도 국적은 여전히 한반도이기 때문에 거주국에 대한 애정이 조선족에 비해 발바닥에도 못 미친다. 그들은 거주국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어 만약 한국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할 경우 당연히 한국을 응원한다. 이 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서 40여 년 동안 냉전시대를 걸치면서 고국인 한국과의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이 조선족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애정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양모가 잘 길러준 아이한테 생모가 갑자기 나타나 “너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질문자가 상식이 없다고 비난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한국 사이 조선족의 문제는 이 사례와 같다고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이렇듯 ‘JIN’으로 무난하게 살아오던 조선족이 한국 문이 열리기 시작해서 ‘JIN’과 ‘KIM’ 사이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JIN’이냐? 아니면 ‘KIM’이냐? 예전에는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거의 백 프로 중국을 응원하던 데로부터 점차 한국을 응원하는 수가 늘어가는 추세였다. 요즘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중국을 응원할 수도 있고 한국을 응원할 수도 있다. 헌데 이것은 조선족의 개개인의 취향문제만은 아니다. 조선족이 한국을 응원하면 중국이 서운해 하고 중국을 응원하면 한국이 서운해 한다. 어찌되었든 한 인간이 자기 소속된 공동체에 애정을 갖고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인간은 행복하다. 그렇지 못한 인간은 불행하다. 지난겨울 중국에 갔을 때 연변라디오 <이 밤을 함께 합니다>를 청취한 적이 있다. 한 여인의 사연이다. 부부가 함께 한국에 와서 수년간 열심히 노력해 연길에 번듯한 아파트를 마련하고도 충분히 먹고 살만한 돈을 저금해놓았다. 천당 같던 가정생활이 남편의 잘못으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했다. 남편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귀가 벌쭉해 연변에 온 한국인 00사장한테 동업한다는 명목으로 있는 돈을 몽땅 사기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의 돈까지 빌려 밀어 넣어 빚 구렁에 빠지게 되었다. 한데도 남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졸부가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해 아내가 “나 어쩌면 좋아요?”라는 요지로 방송국에 사연을 신청했던 것이다. 청취자의 조언목소리가 울린다. “그 동무 아직도 과학발전관을 수립하지 못하고 ······” 나는 피씩 웃음이 나왔다. 한 개인이 사기당해도 과학발전관을 들먹이다니? 남아공월드컵이 막을 내렸다. 요즘 새삼스럽게 그 청취자의 조언목소리가 자꾸 나의 귀전을 맴돈다. 아울러 그 분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자신의 소속 공동체의 이념이든 사상이든 맘속으로 받들고 정신지주가 되어 그 흐름에 따라 희로애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 분에 비해 재한조선족의 경우 ‘JIN’도 아니고 ‘KIM’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남아공월드컵 때 한국이 16강 진출이냐, 탈락이냐를 결정짓는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새벽 3:30에 열렸다. 한국인은 밤잠을 자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고 함성을 질렀다. 8강 탈락이 결정되는 순간에는 선수와 함께 울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은 한국이 이기면 좋고 지면 기분이 좋지 않는 감정은 있으나 정작 한국인과 같은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울고 웃는 희로애락은 없었다. 조선족이 집결해 살고 있는 동네는 조용했고 한국인 속에 끼어 살고 있는 동네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물론 태극기를 보면 눈시울이 젖어나고 애국가를 들으면 가슴이 울먹거린다는 개별적인 열성한국사랑에 빠진 조선족을 빼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고 우리가 한족들처럼 진심으로 서운해 할까? 그렇다면 한국응원도 그저 흐지부지하고 중국응원도 내심으로 우러나는 감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냐? 는 것이다. ‘JIN’도 아니고 ‘KIM’도 아닌 어느 공동체에도 진심으로 귀속되지 못한 인간무리의 삶은 정말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참으로 불행하다. 마치 이젠 우리재한조선족의 삶도 어쩌면 돈벌이에만 신경을 도사리는 재일교포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재일교포는 한국응원이라는 정신적인 삶이 있지만 우리재한조선족은 그러한 정신적인 삶마저 없으니 그들에 비해 더 비참하다고 말해도 어폐가 없을 것이다.
25    중국단오절과 강릉단오제 댓글:  조회:4550  추천:22  2010-07-10
중국단오절과 강릉단오제 2005년 한국이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에 문화재로 등록신청을 했는데, 이에 대해 중국이 자기네 전통명절을 도둑질했다는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강릉단오제에 관해 살펴보기로 했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로 이 날은 원래 위대한 애국 시인 굴원(屈原)을 기리는 날이었다. 굴원(기원전 340~278년)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실현 할 수 없고, 멸망해 가는 초나라를 구할 수 없음을 슬퍼하다 5월 5일에 돌을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뛰어 들었다.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배를 저어가 굴원의 시체를 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매년 이 날이 되면 강에서 용주(龍舟)를 저으며 그를 추모하고 쌀을 담은 죽통을 강에 던져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민간에서는 단오절에 쭝즈(粽子:대나무 잎으로 찹쌀을 싸서 찐 음식) 먹고, 용주경기를 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중국은 굴원이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결한 일자가 음력 5월 5일인데서 단오절의 유래가 분명하지만 한반도의 단오절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반도의 단오절은 먼 옛날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행사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본래 한민족의 단오절은 농경문화와 관련된 제천의식에서 기원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영웅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유래가 깊은 전통 민속놀이인 강강술래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가장 유명한 강릉단오제도 임진왜란시기에 공이 큰 범일국사를 기리는 행사에서 기인되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진행하는 것으로 변모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강릉단오제는 부족국가였던 동예 때부터 오월제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고려 때부터 나타난다. 강릉지에 대관령의 승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산신제의 존재가 확인된다. 조선 초기 남효온의 기록에서는 음주가무를 곁들인 3일간의 산신제가 확인된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의 허균의 시문집인《성소부부고》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미 이 시기에 강릉단오제의 대대적인 축제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산신을 모셔와 기원제를 올리는 강릉단오제의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중기 허균의 기록에서이다. 임영지에 나타나 있는 단오제의 기록은 현재의 강릉단오제와 가장 유사하다. 강릉단오제는 설화적인 요소, 불교적인 요소, 유교적인 요소에 민중의 신앙적인 요소까지 포함된 적층문화로 발전되어 왔다. 1967년 1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는 김종군이다. 범일국사(泛日國師)가 죽어서 대관령 서낭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범일국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서낭당에서 차례로 제사를 지낸다. 강릉단오제에 관해 오청(吳晴)의《조선의 연중행사》,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44집 <부락제>, <강릉지> 등 문헌들에서 기술한바가 있지만 그 기원에 관해선 언급이 없다. 다만 대관령성황신과 산신에 대한 여러 전설이 있는데 그 성황신과 산신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조차 일치하지 않다. 강릉 현지인들은 대체로 국사성황은 범일국사이고 산신은 김유신이라고 믿고 있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천여 년 동안 숭배의 대상으로 되어왔지만 범일국사는 임진왜란시기의 사람이기에 기껏해야 400여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릉사람들이 성황신으로 모시는 까닭은 아마 그가 당지의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범일국사는 400여 년 전의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2천 년 전의 예수처럼 신비한 탄생설화와 기적이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마을의 한 처녀가 있어, 아침에 굴산사(屈山寺)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처녀가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으나 나중에 해가 떠 있는 바가지 물을 그대로 마셔버렸다. 그런 후 처녀는 몸에 이상을 느끼고 달이 차서 남아를 분만했다. 처녀가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은지라 마을 사람들의 지탄과 가족들의 꾸지람이 있었다. 그래서 산모는 그 아이를 뒷산에 있는 학바위 밑에 버렸다. 학바위는 마치 여러 바위를 포개놓은 동굴처럼 되어버렸다. 영아를 버린 산모는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이튿날 아침 일찍 모정을 못 이겨 아이를 버린 학바위를 찾아갔다. 영아인 까닭에 밤새 얼어 죽거나 산짐승이 물어갔을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어린 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으며 학을 비롯한 산짐승과 날짐승들도 서로 다투어 아이를 감싸 따습게 해주고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누구도 감탄치 않는 이가 없었으며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짐작을 하였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나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7세가 되니 비로소 입을 열고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 외조부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 경주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경주에 간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국사가 되어 돌아왔으며 중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국사는 학바위에서 지팡이를 던져 꽃인 곳에 사찰을 지었으니 심복사(尋福寺)라고 한다. 범일국사는 강릉에 살았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이 났다. 국사는 대관령에 올라 술법을 쓰니 산천초목이 모두 군세로 변하여 왜군이 감히 접근치 못하고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나라에 공이 많고 향토를 보호하는데 공이 큰 국사는 죽어 대관령성황신이 되었다. 국사의 이름을 범일국사라 부르는 까닭은 해가 떠 있는 바가지 물을 마시고 낳은 데서 지어진 것이다. 대관령성황당에는 대관령국사성황과 대관령국사여성황의 이위(二位)를 사(祠)하고 있으니 국사성황이 배위(配位)인 여국사성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정씨 가에는 나이 찬 딸이 있었다. 하루는 꿈에 대관령성황이 나타나 내가 이 집에 장가오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주인은 사람 아닌 성황을 사위 삼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어느 날 정씨가 딸이 노랑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어 곱게 단장하고 뒷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업고 달아났다. 소녀를 업고 간 호랑이는 산신이 보낸 사자로서 그 소녀를 모셔오라는 분부를 받고 왔던 것이다. 대관령국사성황은 소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딸은 잃은 정씨 가에서 큰 난리가 났으며 마을 사람의 말에 의해 호랑이가 물어간 것을 알았다. 가족들이 대관령성황당에 찾아가 보매 소녀는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혼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가족들은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우니 소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 혼배한 날이 4월 15일이다. 그래서 4월 15일에 대관령국사성황을 제사하고 모셔다가 여성황사에 두 분을 함께 제사하게 되었다. 강릉단오제는 이 두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대형행사이다. 강릉단오제의 특징은 참여자 수가 수만에 달할 정도로 많고 행사일이 근 50일이나 될 정도로 길고 무당이 많이 동원되어왔다. 민속행사 치고 참여자가 수만이고 행사기일이 50일이면 규모가 엄청 커 국제적으로도 대형행사에 속한다. 단오제의 일정을 대략 적으면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제수용 술을 빚는다. 4월 1일 초단오, 헌주와 무악 4월 8일 재단오 헌주와 무악 4월 14일 봉영(奉迎) 4월 15일 삼단오, 봉영, 대관령성황제 및 산신제 4월 27일 사단오, 무제 5월 1일 오단오, 괫대(花蓋), 관노가면극 5월 4일 육단오, 관노가면극, 무악, 농악, 그네뛰기, 씨름대회, 체육대회 5월 5일 칠단오, 동상 5월 6일 팔단오, 동상 5월 7일 소제(燒祭), 봉송 고대한반도에서 무릇 제사에 연관된 모든 행사에 무당이 관여치 않으면 되는 일이라곤 없었다. 강릉단오제는 더욱이 산신과 성황신을 제사하는 행사이므로 무속성(巫俗性)이 강해 제의 전체가 무당에 의해 거행된다. 무당은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를 사람에게 전한다. 강릉단오제에 관여한 무당은 크게는 국태안민과 강릉 내의 무재를 빌고, 작게는 신도 개개인의 제화초복을 빌어준다. 이렇듯 본래 농경문화에서 기인되었던 한반도의 단오절은 그 원 모습을 잃고 영웅을 제사하는 행사로 변모되었고 아울러 ‘節’보다 ‘祭'에 무게가 실려 있다.
24    한류의 문화기원 댓글:  조회:4376  추천:25  2010-07-05
한류의 문화기원 한반도는 일본과 함께 한자와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명권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은 신도라는 자체종교가 있고 따라서 일본인의 인간타입과 민족특징은 신도적이며 신도가 일본인의 영혼과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데 비해 한반도는 자체종교가 없는데 무엇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케 하였을까? 다시 말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해온 기본요소는 무엇이며 한반도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쳐왔을까? 이에 관해 한국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00년 전 세계적인 석학인 중국인 고홍명은 그의 저서 《중국인의 정신》을 통해 “한 문명이 그 문명을 안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케 하고 정신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내놓아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고홍명의 문명과 인간타입관계 이론에 대해 흥미를 갖고 한반도 공동체 인간타입의 형성기원 및 민족특징에 관해 살펴보기로 결심하고 지난 수년간 이에 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려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중국에서 문화혁명 때 불륜을 저지른 남녀에게 새끼줄 양 끝에 헌 신발을 달아놓고 그것을 목에 걸게 하고 대중비판을 하였다. 그런데 비판대회에서 한족들은 불륜을 저지른 남녀를 “따따오까아오퍼쎄!(打倒搞破靴:헌 신발을 건드린 자를 타도하자!)”고 외쳤고, 조선족은 “비람피우는 자들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그러니까 불륜이란 한 가지 같은 사실, 같은 포인트를 한족은 ‘헌 신발’로 표현하는데 비해 조선족은 ‘바람’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상의 차이가 곧 두 민족 간의 문화차이를 말해주는 좋은 증거이다. 그 후부터 필자는 우리 한민족이 일상생활에서 한족에 비해 ‘바람’이란 낱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말(네가 오는 바람에 내가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럴 경우 타민족은 바람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에도 ‘바람’이요, 무엇을 희망하는 뜻에도 ‘바람’으로 표현한다. 1980년대 이북사람들과 접촉해 보았는데 그들도 ‘바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1990년대부터 한국인을 접촉해보니 역시 만찬가지였고 특히 한국가요에 ‘바람’이란 어휘가 굉장히 많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의 말 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논리에 따르면 우리 한민족이 일상생활과 가요에 ‘바람’이란 낱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필시 역사적인 문화와 연관성이 있을 것이고,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언어표현은 과거역사문화의 관성에서 온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신라계통의 경상도사람들이 집권하고 경상도 천하를 이루게 되자 유행가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휘가 ‘바람’이라는, 이 한 마디라는 사실은 결코 단지 우연한 잠시적 유행현상으로만 간주할 수가 없다. 국제적으로 유행가요를 분석해보아도 바람이라는 단어는 특히 우리나라가요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을 무의식적으로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신앙의 메모리체계의 작동으로 보아야 하며 ‘바람’이야말로 잃어버린 우리자신의 ‘야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현상을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 즉 한 1500년 정도의 시간단위는 좀 거시적 혜안을 갖게 되면 몇 십 년 정도의 압축된 연속성의 체계로 간주할 수도 있고 해야 하는 것이다.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이나, 최치원의 난랑비서의 바람이나 화랑·미륵의 바람이나 《시경》의 바람이나 모두 한 가지 ‘바람’의 연속된 아키타입일 뿐이다. 한반도의 바람에 대한 고유토속신앙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바람이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신앙대상이었으며 아울러 우주의 본체로 인식되어온 인류 보편사적인 원시종교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오운역년기(五運歷年紀)》에 반고가 우주만물로 변화한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태초에 살았던 반고가 죽어서 우주만물로 변화하였다. 숨은 바람과 구름, 목소리는 우레, 왼쪽 눈은 해, 오른쪽 눈은 달, 사지오체는 사극과 오악, 혈액은 하천, 근맥은 지리, 근육은 전토(田土), 머리칼은 성신, 피부와 털은 초목, 치골은 금석, 정수는 주옥, 땀은 비와 못, 그리고 몸의 제충(諸蟲)이 바람에 감하여 인간이 되었다. 《회남자·정신훈(淮南子·精神訓)》에 음양이신이 인간과 충수(蟲獸)를 창조했다고 적혀 있다. 옛날 옛적에 하늘과 땅이 없었던 시절에 모든 물체가 모양이 없이 희미하고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두 신이 혼생해 있었는데 하늘을 살피고 땅을 다스렸다. 그 비어 있음이 끝을 알 수 없고 도도함이 그칠 줄 몰랐다. 이리하여 곧 음과 양으로 분별되고 갈라짐이 팔극이 되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어울리고, 만물이 모양을 갖게 되고, 혼탁한 기는 충수(蟲獸)가 되고 깨끗한 기는 인간이 되었다. 《성경》창세기편에 “여호와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어놓고 그 코 구멍에 입김을 불어넣었더니 사람이 된지라(2:7)”라는 구절이 있다. 입김이란 한국말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곧 숨이다. 그리스어로 숨을 ‘프뉴마(Pneuma)’라 하는데 ‘프뉴마’는 본래 바람을 뜻한다고 한다. 신약성서에 바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시니 나는 그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마태복음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불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발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5~8) 신화 연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령이란 바람의 고상한 표현이라 한다. 《이역지(異域志)》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여인국이 있는데 그 나라는 순수하게 음만 있는 곳이다. 여자들이 몸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고 홀딱 벗은 채 남풍을 맞으면 바람에 감하여 잉태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상 이야기들은 바람과 인간탄생설화에 관한 것들이다. 다음은 한국인 학자 손진태 씨의 바람과 인간의 영혼에 관한 언급을 살펴보자. 기혼설에 의하면 사람의 혼은 마치 숨과 같아서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혼은 육체의 소유주라고 한다. 즉 우리는 혼을 넋이라고 한다. 넋이란 말은 한국말로서는 무슨 뜻인지 해석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일본어의 주인, 소유주 등을 뜻하는 ‘主’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야쿠트(yakut) 사람들도 그들의 혼을 이츠츠(ichichi)라고 하며 이츠츠란 말은 소유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소유주인 넋이 몸에서 빠지면 사람은 죽는다고 하며 한편으로 ‘숨’이 없어지면 또한 죽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넋과 숨은 이명동물과 같이 생각되고 있다. 추상적인 것이 넋이면 구체적인 것은 ‘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적인 것이 넋이면 동적인 것은 숨이라 생각하여 양자가 전연 별물 같이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 일치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위 여러 문장을 통해 바람이 곧 기(氣)이며 기는 바람을 고상하게 표현한 낱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바람에 연관된 원시종교사상을 개괄해 ‘풍교’라 지칭하고 바람(기)을 우주의 본체라 인식하고 바람의 흐름에 ‘도(道)’가 있다는 이른바 풍류도를 발병하였으며, 이 풍류도는 한대(漢代)부터 하나의 고등종교인 도교로 승화되었다. 이른바 도교란 중국모계씨족사회에서 자발적인 여성숭배를 특징으로 하는 원시종교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고로한 무사(巫史)문화, 귀신숭배, 민속전통, 여러 방기술수(方技術手)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임과 아울러 도가의 황로지학을 기치와 이론지주로 하고 유불도의 음양, 신선제가학설 중의 수련사상, 쿵푸(工夫)경계, 신앙성분과 윤리관념을 포섭하여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구하고 장생하고 신선이 되며, 따라서 몸과 도의 합진(合眞)을 목적으로 신학화, 방술화한 다차원의 종교이다. 도교는 중국의학, 과학, 예술, 무술, 방중술, 수련, 장생술,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의 발견과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다. 임어당 선생은 그의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본질적으로는 도교를 받들어왔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풍류도가 신도로 변이되고 발전해왔다. 200년 전 사대국학자에 속하는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는《고사기》와《일본서기》를 연구하고 나서 “일본역사는 하→상에로 흐르는 한신과 충성 및 봉사의 구조로 흘러왔고, 이것이 곧 일본인의 신도의 기본정신이라고 말했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저서《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일본인의 하→상에로 흐르는 충성과 헌신과 봉사의 구조는 카미(神)의 길이며 바람의 길이다.”라고 지적했다. 한반도에서도 바람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삼국유사》에 신라불교를 서술함에 있어서 풍교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고유토착신앙 가운데서 풍교가 으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삼국유사》에 신라의 불교를 논하는 장절에서 ‘석씨풍교(釋氏風敎)’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곧 불교를 의미한다. 신라인들은 왜 불교를 그냥 불교라 하지 않고 ‘석씨풍교’라 했을까? 신라인들은 바람을 우주의 본체라 여기고 풍교신앙이 뿌리 깊었다. 따라서 모든 외래종교를 풍교의 일종일 뿐이라 여겼다고 볼 수 있다.《삼국유사》에 ‘예의풍교, 불류우상(禮儀風敎, 不類于常)’란 구절이 있는데, ‘禮儀風敎’는 곧 공자교 즉 유교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신라인들은 유교든 불교든 모두 풍교이며 다만 그 구분을 말하고자 ‘석씨풍교’ ‘예의풍교’라 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왕은 법흥왕(법은 불교, 흥은 발흥하고 흥기시킨다는 뜻으로서 불교를 발흥하고 흥기시킨 왕이란 의미)이며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그다음의 왕을 진흥왕이라 했다. 그런데 진흥왕은 천성이 풍류(風味)적이어서 젊고 예쁜 낭자를 원화로 삼고 국선으로 받들었으며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선행시켜야 한다(幇興國, 須先風月道)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진흥왕은 ‘석씨풍교’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있어서 재래의 전통 풍교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고유토착신앙인 풍교와 풍월도를 불교와 아주 조화롭게 접목시켜 화랑도를 흥기시켜 나라를 일으켰다. 화랑도는 신라인의 정신지주이자 넋이었다. 《삼국유사》에서 화랑도의 명부를 ‘풍류황권(風流黃券)’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를 풍류도의 산물이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화랑도가 풍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최치원은 화랑역사를 회고하면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일컬으며 그 뿌리는 선사(仙史)에 있다.”고 했다. 선사란 곧 풍교의 역사이며 그것을 또한 풍류도로 표현했다. 연세대 유동식 교수는《풍류도와 한국인의 종교사상》에서 “풍류도는 하나의 종교라 불수는 없지만 한국인의 신앙사상을 강력하게 지배해왔으며 아울러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멋’이다.”고 지적하였다. 필자는 한국인이 흔히 잘 사용하는 낱말 ‘맛’과 ‘판’ 및 ‘넋’도 역시 풍류도문화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는 저서《추한 한국인》에서 “멋이란 낱말은 중국어와 일본어에는 없고 유일하게 한국인만 사용하는 어휘이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그의 이 한마디 지적에서 큰 힌트를 얻었다. 즉 필자는 중한일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멋이란 낱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해보았으나 대충 의역은 될 수 있으나 완벽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멋이란 낱말이야말로 한민족의 민족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어휘이다.’ 이것이 곧 나의 결론이었다. 어떤 한국학자 분은 ‘멋’이 곧 ‘맛’이고 ‘맛’이 곧 ‘멋’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필자는 ‘맛’이란 낱말에 대해서 연구해본 결과 ‘멋’과 마찬가지로 역시 한민족만이 사용하는 특수용어라는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맛’에 해당되는 ‘아지(味)’, ‘워이따오(味道)’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말 맛의 뜻을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한다. 또 노래판, 춤판, 도박판, 놀음판, 술판, 오락판, 싸움판, 난장판, 개판, 심지어 X판을 포함해 한민족은 ‘판’이란 낱말을 풍부하고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판’을 경우에 따라 ‘場’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한민족이 말하는 ‘판’의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판을 깨다.’ ‘판이 깨지다.’ ‘판이 사라졌다.’ ‘판을 유지하다.’등등의 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쉽지 않다. 한국고전음악에 ‘판소리’라는 것이 있는데 최근 중국문학작품을 보면 ‘盤瑟里’라고 중국어로 옮겼는데 이는 음역에 따라 억지공사로 번역한 것일 뿐 한민족의 진정한 생활정서가 배어 있는 ‘판소리’ 의미가 아예 전달되지 않는다. ‘판소리’가 중국음악과 일본음악에 비해 독특한 한민족의 특성을 반영하는 민족음악이라 할 때 우리는 한민족이 얼마나 ‘판’의 문화를 중시해왔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저 ‘판’이란 무엇인가? ‘판’이란 낱말은 분명히 어떤 행위의 장을 의미하지만 중국어와 일본어에서 말하는 ‘場’과는 엄연하게 구분된다. 정확히 말해서 ‘판’은 바람이 몰고 오는 일종 유형무형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판의 문화’가 풍류도에서 유래되었음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멋’ ‘맛’ ‘판’이란 낱말이 바람문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며 이는 곧 한민족의 풍류도의 정수이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규정하는 말이 곧 ‘멋’이라고 지적했다. 이 말을 바꿔하면 ‘멋’은 곧 풍류도의 기본정신이며, 풍류도의 기본사상이며, 풍류도의 기본 넋이다. 풍류도가 고대한민족의 기본종교사상이었다면 넋은 곧 ‘멋’이며 ‘멋’은 곧 한민족의 넋이다. ‘멋’을 한민족의 넋이라 말하는 것은 한민족은 수천 년 동안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내성외왕이란 말은 본래 <장자>에서 유래되었다. 장자는 인간의 이상적 경지가 곧 내성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중국유교비평가들이 지적한바와 같이 중국인은 내성에 대한 추구에만 치중해왔을 뿐 외왕을 홀시해왔기 때문에 중국인은 외모가 초라해보이게 되었다. 중국인은 확실히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이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도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은 중국인에 비해 나으나 한국인에 비해 조금 떨어진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도 다지고 외왕도 장식해왔다. 세상에 완전완미한 사물이 없듯이 한민족의 내성외왕은 곧 내성보다 외왕 쪽에 무게를 더 두어왔다. 그래서 속보다 겉을 더 챙기는 관습이 지속되어왔다. 단군신화에서 홍익인간사상이란 고귀한 문구를 ‘멋’의 내성에 대한 추구라 이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확실히 기타 민족에 비해 매사에 사리가 밝다. 조선족이 사리가 밝은 것은 곧 홍익인간사상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조에 들어서 유교의 영향 때문에 ‘멋’은 외왕보다 내성 쪽에 기울려졌다. 당시 유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멋’보다 내심의 ‘인(仁)’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러저러하게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이 서로 엇바뀔 때가 있었으나 대체로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 추구가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들어왔다. 한민족의 외왕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한다면 한민족은 겉으로는 멍청이가 매우 적어 보인다. 이는 상대적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곧 실속 없이 겉만 꾸미는 내빈외화라 할 수 있겠으나 긍정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곧 한민족은 상향의식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의 이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의 추구가 한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정체성을 갖게 만든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한민족은 모든 사물을 ‘멋’을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민족은 일본인을 ‘쪽발’이라 부르고 중국인을 ‘때놈(汚垢)’이라 한다. 일본인은 중국인을 ‘지나인(支那人)’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그냥 ‘죠센징’이라 했다. 물론 ‘지나인’은 중국이 이미 늙었다고 얍잡아 보는 호칭이고 ‘죠센징’은 힘없고 가난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를 볼 때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해 비하하는 호칭에 비해 훨씬 신사적이다. 중국인은 일본인을 ‘작은 일본(小日本)’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까오리빵즈(高麗捧子:고려 몽둥이)’라 한다. ‘작은 일본’이란 곧 일본은 사람도 작고 땅도 작고 나라도 작고 인심도 야박하다는 등등의 뜻을 나타내는 호칭이며 조선인을 ‘까오리빵즈’라 하는 것은 아마 옛날에 고려인(고구려인)과 싸울 때 고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써 혼났던 모양인데 이로서 유래되었다. 아무튼 중국인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뉘앙스도 한민족에 비해 많이 점잖은 편이다.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호칭이 매우 신사적이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돌이켜야 할 것은 곧 한민족은 ‘멋’을 통해 타민족과의 특징의 구분을 부각시키려는 데서 비신사적인 호칭이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내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다름이’ 곧 ‘멋’에서 유래된 것이며, 아울러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든 주체성과 정체성이다.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어도 꿋꿋이 살아남게 된 가장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던 것이다. 중국이란 거대한 문화용광로 속에서도 조선족은 뚜렷한 교리교의가 있는 자체종교가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민족정체성을 잘 지켜온 것이 곧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크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강력한 종교를 갖고 있는 회족(회교도:무슬림)마저 한족과 통혼이 잘되고 있는데 비해 조선족은 한족과의 통혼이 매우 드물다. 한족은 조선족과의 통혼을 원하지만 조선족부모들이 만약 자식이 한족과 연애를 하면 망종으로 취급할 정도로 통혼을 반대한다. 그 주유 이유가 바로 ‘우리(조선족)는 당신(한족)들과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한민족의 고유한 ‘멋’ ‘맛’ ‘판’ ‘넋’ ‘얼’의 문화로서 이미 중국대륙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았다. 이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비록 한국 내에서는 이러저러하게 역사적으로 당파싸움도 유난히 많았고 지금도 역시 영남과 호남을 대변하는 당파싸움을 비롯한 사회 각 영역에서 갈등이 심각하게 드러나게 만들고 있다. 허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타민족과의 구분을 부각시켜 일치 단합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대한민국을 세상에 크게 홍보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예하면 1997년 말 IMF 직후에 전체 국민이 동원되어 장롱 속의 금붙이를 나라에 바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2002한일월드컵> 때에는 7백만의 붉은 악마가 세상을 또 한 번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필자는 그 힘이 곧 한국인의 특유한 ‘멋’과 ‘판’에서 온 신바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도 그 어떠한 문화도 <2002한일월드컵> 때에 한국인이 세상에 보여주었던 그러한 멋진 장관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세상은 그때 그 사건 때문에 크게 놀랐으며 대한민국을 크게 부러워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멋’을 이미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웠고 몸에 배였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힘의 표출은 나라가 가르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단군시대부터 ‘멋’에 대한 터득의 결과이며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우고 실천한 결과이며 한국인의 몸속에 깊이 배어 있는 신바람이 표출된 결과이다. 만약 외국인이 한국과 한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멋’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중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도교를, 일본인을 알려면 반드시 신도를 알아야하는 이치와 같다. 만약 일본문명을 독자적 문명으로 취급하는데 동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도리로 ‘멋’이란 독특한 문화도 역시 독자적 문명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멋’ ‘맛’ ‘판’ ‘넋’ ‘얼’ ‘신바람’이야말로 한류의 문화기원이다.
23    신바람과 한강기적 댓글:  조회:5312  추천:23  2010-07-03
신바람과 한강기적 우리민족어에 신바람이란 낱말이 있다. 신바람을 중국어로 옮기면 신풍(神風)이고, 일본에서는 카미가제라하고 역시 한문으로 ‘神風’이라 적는다. 중국의 신풍과 일본의 카미가제는 신이 일으킨 바람이란 뜻인데 비해 한국어 신바람은 그 유래가 어떠하든 신의 바람이 아니라 개개인의 몸에 배인 활기찬 에너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의 신풍과 일본의 카미가제는 인간의 주체가 배제된 객화(客化)의 존재인데 비해 한국인의 신바람은 인간이 주체가 된 주화(主化)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말하는 신바람은 중국의 신풍과 일본의 카미가제와는 엄연히 다르다. 우리민족은 신나게 일 한다, 신나게 논다, 신나게 돌아다닌다는 등 신나다는 말을 흔히 잘 쓴다. 여기서 ‘신’은 중국이나 일본 혹은 중동과 유럽 및 기타 지역의 종교적인 ‘神’이 아니라 마음껏, 실컷, 하고 싶은 대로 활기찬 에너지로 즐긴다는 뜻이다. 바람은 원시 인류에게 있어서 우주의 제현상 중 가장 신비로운 존재였고 으뜸가는 신앙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에서는 바람을 우주의 본체라 인식하고 풍류도를 발전시켰고 한조(漢朝)에 이르러 도교로 승화시켰다. 일본에서는 풍류도가 신도로 변모하고 발전했다. 한반도는 삼천리금수강산이란 아름답고 멋진 자연과 맞물려 바람문화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더욱 발전했다. 특히 신라는 공자교인 유교를 ‘예의풍교(禮儀風敎)’, 불교를 ‘석씨풍교(釋氏風敎)’라 부를 만큼 세상의 모든 문명 혹은 종교를 풍교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로 바람에 대한 숭배의식이 강했다. 신라 제24대왕인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선행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특히 신라는 풍류도와 풍월도를 ‘멋’으로 승화시켰다. ‘멋’은 곧 신바람이고 신바람이 곧 ‘멋’이다. 신라는 이 ‘멋’과 신바람을 이용해 화랑도를 발전시켜 삼한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통일신라에 들어서 신라는 계속 ‘멋’과 신바람의 힘을 빌어 나라를 흥기시켰다. 일연의《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에 17만 6천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당시 대가족문화였던 점을 감안하면 한 호에 적어도 여섯 식구라 쳐도 경주는 1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경주에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 상인 뿐 아니라 저 멀고도 먼 서아시아 페르시아 상인들까지 넘나들었다는 기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주는 상업이 굉장히 발달한 도시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장보고는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바닷길을 넓혀 신라의 상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렇듯 멋지고 흥성흥성하게 활기에 넘치던 신라가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에 의해 무너져버렸다. 내적 요인으로는 제51대왕인 진성여왕이 자기 삼촌과 불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서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천년 가까이 김 씨가 나라를 통치해오던 것을 제53대부터 박 씨로 왕이 바뀌었고 제56대 왕이 다시 김 씨로 되돌아가는 내분을 심하게 겪었다. 외적 요인으로는 당제국의 동아시아 질서유지의 패턴 속에 약 200여 년 간 평화시대를 누리다가 10세기 초 당제국의 멸망이 동아시아국제형세를 혼란에 빠뜨렸고 한반도도 후삼국 혼전시대를 맞이하면서 천년 사직을 자랑하던 신라가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천년 사직의 역사를 지닌 신라의 패망은 곧 ‘멋’과 신바람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고 한민족이 한민족다운 풍격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계기를 불러오게 되었다. 서기 918년 왕건이 송악(개성)에 수도를 정하고 고려의 개국을 선포한 이후 한반도는 본래 신라문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것이 송나라문화에 도취되어 토착적인 풍격이 강했던 신라문화는 점차 찬밥신세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는 신라문화의 정수인 화랑이 한반도역사에 끼친 영향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랑은 일시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풍속, 학술을 지배하여왔고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하려든 판에 이를 반항 배척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자는 화랑이다. 송도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사건이 아주 연멸하여(사대주의파인 김부식집단이 국풍파인 묘청집단을 소탕한 이후 국풍이 소실되어가는 계기를 맞았음) 비록 직접적으로 그 감화를 받은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 화랑의 유풍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자는 화랑이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마찬가지인 우책이다. 고려 중기 ‘묘청의 란’이 진압된 이후 확실히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특징과 풍격을 잃고 송나라에 보조를 맞추려 애써왔고 고려 후기에는 몽골의 6차례나 되는 침략을 받아 한반도는 완전히 초토화로 쑥대밭이 되었으며 몽골의 부마국으로 왕실에서 점차 몽골식 풍습을 따르는 등 자체문명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고려는 한편으로 불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무기로 삼고 한반도는 불교천하로 되었다.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이 말하던 ‘석씨풍교’가 아니라 완전히 중국식 대승불교였다. 불교는 인간의 개개인의 수도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고려사회는 횡적 패턴이었다. 비록 자체민족의 고유정체성문화를 잃어가기 시작했으나 송도는 주변국과 멀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상인들까지 찾아오는 국제항으로 되었으며 무역과 상업이 흥성했다.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도입해 중국의 도자기를 능가하는 청자와 백제를 만들어 이름을 날렸다. 고려는 신라의 ‘멋’과 신바람의 유풍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아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문명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허나 한민족의 ‘멋’과 신바람의 힘은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의 건립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정도전을 위수로 하는 조선의 국가건설방향과 방침내용을 설계한 <경국대전>의 집필자들은 유생들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횡적 사회패턴을 유교적인 수직패턴으로 바꾸려고 유교경전을 바탕으로 <경국대전>을 지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명나라에 잘 보이려고 국호를 ‘조선’과 자신의 고향인 ‘회녕(會寧)’ 둘 중 하나를 골라 줄 것을 명에 요청했고 그 후부터 태자책봉마저 명나라의 윤허를 받는 등 사사건건 중원조정의 허락을 받고나서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자주권을 상실했다. 조선은 정치면에서 소중화로 자처하고 자금성의 정치 패턴을 한성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다만 중국에서는 임금을 황제라 부르고, 조선에서는 임금을 왕이라 부를 뿐이었다. 문화면에서 천년 역사를 갖고 있는 불교를 송두리 채 배척했다. 이것이 이른바 ‘존유배불(存儒排佛)’이다. 조선초기인 1446년 세종대왕이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 현상이 문화보급에 지대한 장애가 되고 있다고 보고 한글을 지어냈으나 유생들은 한글을 ‘개글(犬字)’이요, 아녀자들이나 배울 글이라 하면서 목숨 걸고 보급을 반대하고 저애했다. 당시 유생들의 반대에는 두 가지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하나는 어려운 한문을 유지함으로서 학문을 독점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일 한글을 보급하면 명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우려 때문이었다. 또 천성이 풍류적이었던 세종대왕은 음률가로 소문난 박연(朴堧)에게 수천 년 동안 흘러내려온 민속과 풍속을 채집하라고 명했다. 허나 유생들이 민속과 풍속은 ‘사풍(邪風)’이라 공격하면서 박연이 고생스레 채집해놓은 민속자료를 화롯불에 던져 없애버렸다. 이는 정말 통탄할 일이다. 중국의《시경》이 당시 주나라 민속과 풍속을 잘 반영했기에 오늘날까지도 중화민족의 민속과 풍속을 연구하는 역사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거꾸로 한국에는《시경》과 비슷한 역사자료가 전무해 민속과 풍속을 연구하는데 굉장한 애로가 존재하다. 또한 당시 유생들은 가령 누가 도서(道書)를 번역하려고 해도 이단이라 몰아붙였고 유교경전(주자학)외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취급하고 기타 모든 문화를 말살시켰다. 경제면에서는 중국의 유교사상과 정신에 의해 생겨난 사농공상의 계층분화를 받들어 선비는 지고무상의 존재이고 농업을 중시하고 공(工)과 상(商)을 매우 냉대하고 천시했다. 그래서 도공기술이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업화되지 못했고 장사하는 사람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회 가장 천한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사회풍토로 하여 한반도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해상 무역이 한파를 맞았다. 조선 후기에 보부상이 조금 설친 외에 한반도의 무역과 상업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사회면에서 전부 유교식 패턴으로 도배시켰다. 이를테면 인간과 인간 간의 대인관계는 전부 유교식 패턴에 따라야 했고, 가정문화는 전부 유교식을 따랐다. 고려 말기까지 여성들이 혼인자유, 이혼 자유 등 권리를 갖고 있어 남녀차별이 크지 않았다. 허나 조선조에 이르러 칠거지악, 삼종사덕 및 이혼불가, 재혼불가와 같은 계율을 받들어 부녀들을 가혹하게 압박했다. 필자는 정조 면에서 세상에서 이슬람지역을 빼고는 아마 조선이 가장 강구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유생들은 서낭당을 매음굴이라 공격했고 활동을 제한했다. 서낭당은 질병과 악귀를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이지만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염원으로 남녀가 성교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므로 서낭당에서의 남녀성교활동은 결코 매음행위가 아니라 그들은 신성한 의무를 행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유생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매음이라 공격했다. 이렇듯 조선은 500여 년의 단일유교 때문에 모든 면에서 위축되었고 한민족의 고유한 ‘멋’과 신바람은 전부 말살되었다. 결과는 나라가 힘을 잃었고 부실해져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떤 한 착실한 역사학자는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이렇듯 빈번한 외침으로 나라는 늘 쑥대밭이었고 백성들은 언제 ‘멋’을 부리고 신바람을 일으킬 겨를이 없었다. 1945년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냈고 해방을 맞았다. 이제부터 쨍하게 해 뜰 날만 있으리라는 기대에 마음이 부풀고 벅차 있었으나 그것도 아주 잠간이고 본의 아니게 3년간의 외세군정통치로 민심이 뒤죽박죽이었고,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3일까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나서 그야말로 아름답던 삼천리금수강산이 폐허로 되어버렸고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삼팔선을 그어 남북으로 분단된 후 1950년대 중반부터 남과 북이 복구건설에 돌입했다. 이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영도 하에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슬로건에 흥겨워 인민들이 신바람을 일으켜 구소련이 건국 초기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듯이 농촌과 도시를 전부 집단화(협동농장)한 사회주의체제가 빛을 발해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먹고사는 보릿고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니까 1970년대 중반까지 이북이 중국보다 더 잘살았을 뿐만 아니라 이남보다 훨씬 잘살았다. 그러다가 집단화한 사회주의체제의 한계로 하여 1980년대 초반부터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초반부터 식량난에 허덕이고 지금은 아프리카 빈곤 국가들과 비견될 정도로 기근이 심각하다. 애들이 먹지 못해 10살 아이가 대여섯 살 되어 보이고 학교 갈 어린이가 서너 살 되어 보인다. 기근이 심각하면 사회 전반 생활필수품도 말이 아니게 바닥이 나 있는 것이 인류사회 보편현상이다. 남한에서는 1950년대 중후반에 경제에 눈이 어두웠던 이승만 대통령이 복구건설보다 정치적인 것에 열을 올리다보니 이북에 비해 많이 처져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 이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박정희 장군이 한 번 경제를 일떠세워볼 욕망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경제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허나 욕망은 욕망일 뿐 경제를 일으킬 구체적인 방책이 서지 않았다. 국민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젊은이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공장도 세우고 나라기초시설도 다져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나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부자나라들에 동냥을 다녔으나 누구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비관실망에 빠져 있던 와중에 서독이 광산개발에 인력을 보내줄 것을 남한에 요청했고 간호사 모집도 곁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노무일군들의 노임을 담보로 서독으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차관 맡을 수 있었고, 그것으로 비료공장도 세우고 시멘트공장도 세우는 등 나라건설의 밑거름으로 활용했다. 경제가 춰서기 시작했다. 남한 경제는 아기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인다. 무역액이 1억불에 달하자 박대통령은 감격에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새마을운동을 일으켜보자.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行政里洞)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 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이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단순한 농가의 소득배가운동이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부터는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자조·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선진국대열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준 정부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 박정희의 철저한 조국근대화정신의 소산이며 새마을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한국의 한강기적창조의 초석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리지날 신라후예이다. 그는 신라의 ‘멋’과 신바람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풍류인물이다. 자신이 직접 새마을노래를 작사·작곡해 국민들에게 신바람을 불어넣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우리 모두 한마음 새 정신을 일깨워 화합 번영 통일의 새 나라를 만드세. 자랑스러운 내 나라 우리 힘으로 빛내리. 당시 새마을운동의 주역들은 오늘날 그때 그 시절의 감동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었고 신바람을 일으켜 주었어요. 그래서 밤잠을 자지 않고 일했지만 힘든 줄 몰랐어요. 희망이 보이니깐요. 정말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지요. 새마을운동은 한 마디로 신바람입니다. 신바람!” 한국인의 신바람으로 일궈낸 새마을운동은 단군 이래 가장 큰 천지개벽으로서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을 의미하는 ‘한강기적’을 불러왔다. 한강기적은 곧 신바람이다. 신바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남이 2·3백년을 거쳐 완성한 산업혁명을 불과 20년 사이에 일궈낼 수 있단 말인가! 한강기적은 곧 <88서울올림픽>개최를 가져올 수 있었고 <88서울올림픽>은 지구촌에 이름 없던 코리아를 세상만방에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남한이 자본주의 길을 잘못 선택해 법이 없이 사람이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먹을 수 있고 가난에 허덕이다 못해 도시 한 복판에도 굶어 죽은 시체가 버젓이 나뒹굴고 있다고 세뇌교육을 받은 필자를 포함해 공산권국가 국민들이 남한의 국제적 큰잔치인 올림픽개최소식을 접하고 믿지 못했다. TV생중계를 통해 개막식을 보고 나서 정말 ‘하기는 하네.’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또 하나의 국제적인 큰 행사인 1993년 대전국제엑스포를 열 수 있었고, <2002한일월드컵>이란 지구촌의 대축제를 열 수 있게 했고, 그때 있었던 붉은 악마의 사건은 그야말로 한국인의 신바람이 아낌없이 발휘된 결과물이었다. 대한민국이 4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선수들이 붉은 악마의 신바람의 힘을 빌어 더욱 신바람이 나 뛴 결과였다. 여기서 강조해 말할 것은 <88서울올림픽>과 <2002한일월드컵>이 비록 한국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기회는 되었으나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대변할 수 있는 자체브랜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구경 무엇이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대변할 수 있는 브랜드인가? 필자는 그것이 곧바로 새마을운동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새마을운동은 국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의 모델이 되어 지금까지 92개 나라 4천 명에 가까운 방문자가 한국에 와서 배워갔다고 한다. 단군 이래 한반도가 국제적인 큰 모델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 신바람으로 일궈낸 새마을운동이다.
22    신조선족 개념 문제없다 댓글:  조회:4367  추천:56  2010-06-22
신조선족 개념 문제없다 철학용어에 ‘방편적인 설법’이란 것이 있다. 요즘 새롭게 등장한 신조선족 개념도 방편적인 설법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보면 문제가 없다. 중국인은 중국 내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하고 해외한족을 화교·화인이라 부른다. 한반도의 경우 1949년 이전에 이주한 한족이 2만 여명, 최근 몇 년래 한국에 밀려든 한족이 20여 만 명인데 그들은 서로 방편적으로 舊華僑와 新華僑라 부른다. 중국인은 한족과 화교·화인 및 구화교와 신화교라는 호칭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다. 너그러운 중국이다. 인간의 심리는 지정학적인 영향을 받는다. 반도의 지리적인 속성이 인간을 속 좁게 만들었다. 韓이냐? 朝鮮이냐? 유치한 논쟁이다. 이북 축구국가대표팀이 브라질과의 경기 전날 외신기자회견이 있었다. 남측 기자가 “북한이 브라질과의 경기······?”라는 질문을 던졌다. 김정훈 감독이 뼈가 있는 어조로 “세상에 북한이란 나라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통역이 눈치 채고 북한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 했다.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외신기자들이 남측기자에게 “당신의 질문과 김정훈 감독의 대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고 물었다. 집안 망신을 당한 셈이다. 필자는 만약 이북기자가 허정무 감독에게 “남조선이 아르헨띠나와의 경기······?”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중국어 속담에 ‘家丑不要外揚’이란 말이 있다. 세상에 한반도를 제외하곤 국가와 민족호칭에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례가 없다. 한반도 내의 집안망신을 동네방네 소문 놓는다. 국제망신이다. 조선족의 입장에선 한이냐? 조선이냐? 는 논쟁 때문에 조선족의 새로운 흐름을 조명하는 신조선족 개념의 등장을 역시 한반도의 정치에 꿰맞춰 한국인이 가뜩이나 조선족이란 호칭을 못 마땅해 하는데 신조선족 개념 등장이 새로운 갈등을 조장할 소지가 있다는 논리와 주장은 어처구니없다. 신조선족 개념은 한반도의 정치다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조선족은 조선족이고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왜 우리조선족의 흐름을 조명하는데 하물며 한국인의 눈치를 살피고 의식해야 하는가? 다음 신조선족 개념의 등장은 조선족의 새로운 흐름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방편적인 설법일 뿐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과의 대립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아무도 집에 있는 조선족을 폄하하여 구조선족이라 부르지 않는다. 신조선족이 있으면 당연히 구조선족이 있지 않느냐? 는 철학적 사고방식은 문화혁명시기의 대립투쟁관념 교육의 잔재이다. 왜 굳이 문제를 복잡하게 인식하고 기어코 갈등의 시각으로 보려고 하는가? 새로운 흐름이 있으면 그에 따라 새로운 조명이 있기 마련이고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는 매우 정상적이다. 제발 문혁의 시각으로 문제를 분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21    혼외련 법으로 다스린다? 댓글:  조회:3957  추천:38  2010-06-16
혼외련을 법으로 다스린다? 우리는 사회생활 어떤 현상을 연구할 때 그런 사회현상이 생겨난 근원에 대해 연구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대안을 제기해야지 메마른 사상과 이념으로 접근하면 한낱 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혼외련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혼외련을 덮어놓고 사회악이기 때문에 마땅히 법적제재조치로 혼외련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주장은 프랑스의 오엔, 쎙씨몬, 프리에 등 공상사회주의자들보다 더 공상적이다. 연변대학 강순화 연구원이 혼외련문제를 너무 고상한 도덕윤리 이론으로 접근하고 허공에 붕 뜬 아름다운 천국을 꿈꾸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이의가 있다. 가. 애정→혼인→가정에 대한 이의 모계사회부터 부계사회 및 오늘에 이르는 5만년의 인류사에서 애정→혼인→가정이란 등식은 겨우 최근 3·4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아울러 애정→혼인→가정이란 등식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남자는 야생동물, 여자는 畜巢동물》의 저자는 “현시대의 일부일처제 혼인이란 결국 남자의 嫖娼과 여자의 매음을 합법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현실사회를 보면 애정이 우선이 아니라 여자는 용모로, 남자는 돈으로 결혼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인 룰로 자리매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고로 남자는 돈이 없으면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런 현실에서 애정을 운운하는 것은 사치이다. 애정을 바탕으로 이뤄졌던 가정도 가령 가장인 남자가 돈을 벌지 못하거나 적게 벌면 파탄 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유지하는 기본 요소가 애정이 아니라 돈으로 되어버린 것이 현실사회이다. 현재 중국인(한족)과 한국인 사이 10여 만 건에 이르는 국제결혼을 보면 애정을 아예 운운할 것 없이 이뤄지는 것이 절대다수이다. 그래도 법적으로 가정이다. 물론 그러한 결혼이 불행한 건 더 말할 것 없지만 어찌되었든 돈 때문이라는 것이 일차적 현상이다. 눈을 좀 더 멀리 돌려 보면 중동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일부 이슬람권은 아직도 일부다처제이다. 한 남자가 네 명의 처를 둘 수 있는 혼인이 과연 남녀애정을 바탕으로 이룬 가정일까? 이 지구상에는 현실적으로 애정이 결여된 혼인으로 이뤄지는 가정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해도 어폐가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의 결론을 말하자면 가정이란 애정을 토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그럴 수도 있지만) 주로 남녀 간의 성적욕구를 합법적으로 충족하고 사회경제세포의 역할을 한다. 나. 혼외련은 무조건 악인가? 요즘 중국뉴스에 한 지방세무국 여국장이 숱한 상급 남자들과 잠자리하기 위해 엉덩이미용에만 50만원 및 얼굴과 젖가슴을 갈아엎는데 모두 합쳐 500여 만 원을 탕진했다는 것, 한 지방 과장급 공무원이 800명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 목표였는데 600명을 넘기고 그만 들통 나 낭패 보았다는 것, 00당 간부가 정부를 100여 명을 두고 그 중 우두머리를 골라 관리하게 했다는 등 사건들이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이런 당 간부들은 모두 인민의 혈세를 착취하여 혼외련에 빠진 자들이기에 벼락 맞아 마땅하다. 이에 비해 일반백성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존투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혼외련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으니 우린 덮어놓고 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중국00교수가 “중국이 2020년이면 고령 홀아비(35세 이상)가 4,500여 명이 될 것이고 정부에서 마땅히 공창을 세워 그들의 성적욕구를 충족시켜야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그들은 성적욕구 때문에 적당히 혼외련이 없으면 납치, 강간 등 범죄를 일을 킬 소지가 충분하다. 그들의 혼외련을 무조건 악으로 보아야할 것인가? 강순화 연구원은 우리 조선족사회의 출국바람 때문에 벌어지는 혼외련도 무조건 악의 현상으로 접근하는데 이의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출국한지 수년이 되는 시골 젊은 여성이 동네 장가 못간 홀아비와 혼외련을 한다면, 한국에 와서 갖은 맘고생을 하다못해 죽고 싶을 절망에 이르렀을 때 동창생이나 한 마을에서 같이 자라던 남자친구가 나타나 안식처가 되어준다면, 등등의 사례를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많다. 특히 현장노가다 일을 하는 남자들은 일자체가 고단한 건 물론이고 한국인한테 당하는 임금체불, 인간무시 등 심적으로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래서 술을 마시게 되고 그 뒤엔 하다못해 노래방이라도 가서 아가씨를 찾아 한바탕 풀어버리는 현상이 있다. 그렇지 않고 쌓이고 쌓이면 병이 나기 십상이다. 필자는 4년 전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국바람(연변여성 2006. 3)>에서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이 변해가는 것이 정상이란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재한조선족사회에 만연된 임시부부 현상인 혼외련을 정당하다거나 제창하는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연구하자는 것이다. 다. 혼외련이 없으면 건전한 사회인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동독의 부유층이 떼를 지어 서독에 찾은 곳이 곧 매음이 이뤄지는 각종 유흥업소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회주의는 성을 너무 압제한 탓에 사회가 침체에 빠졌다는 것이고 자본주의는 성을 너무 지나치게 상품화한 탓에 사회가 방종과 방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외련이 없는 사회도 문제이고 혼외련이 너무 범람하는 사회도 여전히 문제라는 결론이다. 우리조선족사회를 말하자면 개혁개방 전에는 혼외련 현상이 극히 드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족가정이 다 화목했던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살던 시골에 남편이 술만 마시고 남편 구실을 못해도 아내는 그냥 참고 살아야 했는데 그 여자의 일생이 과연 행복했을까? 딸만 줄줄이 낳았다는 죄로 남편은 빼놓은 낫자루처럼 아무 일도 안 하고 술주정만 부리며 괴롭히고 아내가 주부이자 남편노릇까지 해가면서 가정을 억지로 유지한 것이 과연 애정이 있었을까? 여자들이 자아인생을 포기하고 오로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노예처럼 살아갔을 뿐이다. 거꾸로 이웃 한족마을에선 성을 압제했던 그 시기에도 기혼 남녀끼리는 물론이고 처녀가 유부남, 총각이 아주머니와, 심지어 친인척끼리의 혼외련이 만연하다 못해 온 동네가 서로 너트워크처럼 얽히고설킨 바람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단 한 건의 이혼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정도로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발언일지 몰라도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한족마을여성들이 조선족마을여성들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 혼외련을 법으로 다스린다? 강순화 연구원은 혼외련이 위법이므로 법으로 제재하고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의가 있다. 혼외련 중 국가에서 허가하지 않은 업소에서 음성적 성매매가 이뤄질 경우 법으로 다스린다. 한국의 경우 300만 원 이상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중국은 5,000원 이상의 벌금을 문다. 이를 제외한 혼외련은 법과 관계없이 도덕적 범주에 속한다. 한국에 간통죄라는 것이 있는데 피해자가 고소할 경우만 입건되고 또 가령 남녀가 호텔에 들어가는 것만 목격하여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오로지 남녀가 알몸으로 뒹구는 현장을 사진 찍든지, 아니면 경찰을 불러 그 현장을 덮쳤을 때에만 간통죄가 성립된다. 그런데 간통죄란 유교를 뼈에 절도록 받아들인 한국에만 있는 법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혼외련은 개개인의 사생활일 뿐 국가에서 공권력으로 개입하여 법으로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혼외련을 법이 간섭한다면 지금의 10배에 달하는 법원을 새로 세워야 할 것이다. 과거 중국과 한반도는 사회 불량한 현상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하고 해결하는 조치를 법치가 아닌 예치로 다스려왔다. 혼외련도 예치의 범주에 속하지 결코 법치의 범주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강순화 연구원은 문명시대라면 혼외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한 이의이다. 강순화 연구원이 말하는 문명시대의 기준이 무엇인지? 필자는 인간역사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혼외련은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본다. 아무리 그 어떤 법을 제정하여 다스린다 해도 근절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술·담배가 해로운 것인 줄 알면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혼외련도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사회가 종말을 맞지 않는 한 영원히 사라질 수가 없다. 어느 명인이 한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외워보자. “아름다운 천국을 꿈꾸는 것보다 재미있는 지옥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실리적이고 행복하다.” 앞으로 중국에서 공창을 세울지 말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아무튼 강순화 연구원의 메마른 이론 접근보다 위에서 말한 중국교수의 연구 및 대안제기가 훨씬 우리 피부에 와 닿는다.
20    바보는 의논한다 댓글:  조회:4397  추천:35  2010-06-09
“바보는 의논한다.” 청말 유명학자 공자진은 “성인은 말이 없고 현자는 말하고 바보는 의논한다.”는 명구를 남겼다. 성인은 말이 없이 몸소 실천행위를 보이는 사람들이고 현자는 성인들의 실천행위를 말로서 인간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이다. 세계적으로 예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를 사대 성인으로 혹은 노자까지 보태 오대 성인으로 평가하지만 필자는 공자를 성인보다 현자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공자는 ‘述而不作’, 즉 나는 선인들의 말씀을 되풀이 했을 뿐 스스로 지어낸 것이 없다는 겸손을 보인 것이 그의 인간성으로 평가받았고 따라서 후세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자는 성인보다 현자에 가깝다는 뜻이다. 《추한 중국인》의 저자 백양은 “중국역사에서 두 번의 문화흥성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춘추시대와 성당시기였다.”고 지적했다. 춘추시대는 사람마다 정치적인 속박이 없이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 피력할 수 있었다. 맹자 같은 사람은 왕과의 독대에서 왕을 마음껏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모가지가 날아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가가 급상승되었다. 또 그 시기는 이 나라 사람이 저 나라 재상이 되기도 하고 학문이 뛰어나고 판단력이 좋고 인간성이 좋으면 ‘국적’과 관계없이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면서 왕의 책사도 해먹을 수 있었다. 요즘처럼 누가 자신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무슨 문장을 썼다고 몽둥이를 마구 흔들어대고 죽이지 못해 안달을 떠는 유치한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얼마나 좋은 시대였는가? 성당 시기는 중국역사에서 유불도가 아주 조화롭게 공존한 시대였으며 그래서 중국문화가 크게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참 부러운 시대였다. 북송에 이르러 오랑캐한테 수모를 당하자 남송시기 주희가 나서서 신유학을 정리했고 그 영향에 의해 거의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중국은 문화침체기에 빠져들었고 ‘바보’들이 설치게 되었다. 정치가 도를 넘어 무게를 가지면 그에 따라 가장 빨리 희생양이 되는 것이 곧바로 문인들이다. 문인이 생존을 위해 ‘바보’로 전락되어 양심을 버리고 정권의 하수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명대의 유학자인 이탁오는 전통적인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한 왕양명의 분파인 급진적인 태주학파(泰州學派)였다. 금욕주의·신분차별을 강요하는 예교(禮敎)를 부정했다. 결국 그는 반(反)유교적인 내용을 설교하여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전제시대는 ‘바보’가 되지 않고 올바른 사람이 되면 이탁오와 같은 비운을 맞기 마련이다. 문혁 시기는 장춘교와 요문원이 대표적인 ‘바보’사례로 되었다. 그들은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남을 의논하는 것을 장끼로 자신의 출세 길을 걸으려 하였다. 문혁은 우리조선족사회에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숱한 ‘바보’를 키워냈고 그 ‘바보’들이 같은 조선족을 죽이는데 앞장섰다. 유감스러운 것은 문혁이 지난지도 30년하고도 다섯 해를 맞이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조선족사회에 여전히 그 잔재현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자면 현시대에도 반당반국가분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부차원에서 판단하고 처리할 일이지 우리조선족사회지성인들이 나서서 같은 조선족누구누구를 ‘고깔모자’를 씌워 매장하려고 들어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금 글 쓰는 조선족문인들이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인식과 판단을 갖고 임해야 할 것이다. ‘바보’가 어떤 의논을 펼치든지 일절 대응하지 않는 것이 첫째이다. 이 면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몇몇 산재지구의 조선족문인을 높게 평가한다. 왜냐? 그들은 누가 어떤 ‘고깔모자’를 씌우려 들던 일절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얼굴이 가려워 같이 대응하노라면 서로 이전투구 식으로 체면을 구기게 되고 더욱이 승자와 패자가 없는 가치가 없는 싸움으로 정력만 소모하기 마련이다. 전에 내가 말했다시피 그럴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삼국유사를 한 폐이지 더 읽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한국 김훈 전직 작가는 “내가 글을 썼으면 독자들이 읽으면 그만이지 왜 내가 글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하는가?”고 주장한다. 최인호 작가는 “작품은 마치 요리와 같은데 독자들이 맛있게 먹든지 아니면 맛이 없다고 먹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요리를 만든 주방장을 불러내 소금을 얼마 넣었냐? 설탕을 더 많이 넣지 그랬어. 하는 식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고 말했다. 독자들이 나의 문장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어떤 의견을 갖고 댓글을 달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지 결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작자는 그런 것에 일일이 이해시키려고 애쓴다든가 그런 뜻이 아닌데 어떠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논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다. 할 일이 많고도 많은데 하필 그런 것에 신경을 쓰겠는가! 그렇게 얼굴이 가려우면 글을 아예 쓰지 말든가! 두 번째는 글 쓰는 문인은 웬만해선 남의 글에 댓글을 달지 않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쓸데없이 ‘바보’가 될 필요가 없다. 물론 이것은 나 개인적인 생각이며 나는 여태껏 남의 글에 댓글을 달아본 적이 없다. 개별적인 문인이 댓글을 달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이냐고 나오면 나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댓글 문화는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합리적인 토론보다 작자와 독자들 사이 혹은 문인과 문인 사이 잘못하면 서로 인신비방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충분하기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의 주장은 스케일이 돼 먹은 문인이라면 타인의 관점에 대해 댓글이 아닌 또 하나의 문장으로 대응하되 절대 인신비방은 회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경에 계시는 유명인사가 나와 어떤 관점을 갖고 서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학문적인 토론이 오갔을 뿐 피차간에 인신비방이 없었기에 며칠 전에 한국에서 만나 술 한 잔 나누고 대여섯 시간동안 이런저런 세상사에 관해 진지하게 말을 나눴다. 산재지역에 계시는 학자나 문인들은 한국에 오시면 나와 만나 술도 나누고 가치가 있는 말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글로에서 여태까지 조호길 학자의 글(조선 사람이 냉수를 마시고 중국인이 더운 물을 마시는데 대한 글)만큼 가치가 있는 문장을 읽어 본 적이 없다. 산재지구의 학자나 문인들은 되도록 ‘생산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데 비해 연변학자나 문인들은(물론 소수이지만) 아직도 특정인을 상대로 남을 의논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현시대는 관점과 사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적이 따로 없다. 만약 적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의 판단에 맡겨야지 우리끼리 죽이려고 드는 것은 올바른 태도와 행위가 아닐 것이다. 많지도 않는 조선족사회식구가 서로 적이 아닌 친구가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19    중국에 철학이 있었는가? 댓글:  조회:4041  추천:22  2010-06-06
중국에 ‘철학’이 있었는가? 고대 중국엔 ‘哲’ ‘哲人’ ‘哲王’이란 낱말은 있었어도 ‘철학’이란 어휘는 없었다. 철학이란 어휘는 19세기 60년대 西周라는 일본인이 philosophia를 한자어 哲學으로 번역한데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을 중국과 한반도에서 옮겨다가 사용해왔다. 우리가 논의하려는 초점은 중국역사에 과연 서양인의 이원론적인 개념으로 인식하는 ‘philosophia’, 그러한 철학이 있었는가는 것이다. 우선 서양철학을 보면 모든 사물을 이원론으로 나누고 대립과 투쟁의 패턴으로 인식해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늘과 땅, 남과 여, 현상과 본체, 존재와 가치, 가시세계와 가사세계, 정신과 물질, 유물론과 유심론 등등을 대립되는 모순체로 보고 오직 투쟁적인 방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서양철학의 핵심이다. 이와 반대로 중국문화는 음과 양, 하늘과 땅, 남과 여, 현상과 본체, 정신과 물질 등등은 조화와 화해의 존재라 보는 일원론적인 패턴으로 인식해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경 중국학자들이 서양의 산물인 철학이란 신개념을 도입하여 중국역사를 해부하기 시작했고 고대 중국에도 철학이 있었다는 결론을 얻고 이른바 ‘주역’ ‘도가’, ‘유가’, ‘법가’, ‘묵가’, ‘명가’, ‘음양’ 등등을 중국철학으로 규정하고 ‘정리’하였다. ‘주역’은 우주만물법칙에 관한 해부서이며 인류역사에서 가장 앞선 ‘과학서’이다. 헌데 공자가 만년에 “십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주역의 해석을 완성할 수 있을 텐데.”라는 유감을 말했듯이 주역의 특징은 난해하다는 것이다. 현학이 주목받던 위진남북조시기 18세 천재소년 왕필이 주역을 해석해냄으로서 사회적으로 큰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수당시기부터 시작된 중국과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조선의 과거급제시험에 어김없이 주역이 포함되었고 당시에는 주역을 하나의 과학으로 인식했다. 도가는 노자철학을 근간으로 하는데 도덕경의 첫머리에 “道可道非常道(도를 도라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아리까리한 말로 시작되어 있다. 도가의 핵심주장은 ‘무위자연론’이다. 현재 중국인 70%정도 사람들의 좌우명이 곧 ‘지족상락’인데 이는 도가 ‘무위자연론’에서 유래된 세계관이다. ‘지족상락’이란 현 상태에 만족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족’은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허영심을 버리고 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상락’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했어도 마음의 바란스를 잃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유가는 인의예지신을 근간으로 군자의 도를 추구하고 인간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법가는 말 그대로 법치주의를 제창한 학파이며 진제국의 천하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가는 교묘한 궤변론(詭辯論)으로 유명하다. 명가의 논리는 지나친 점도 있으나 논리학 발달에 공헌한 논리학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묵가는 서양종교와 비슷하게 ‘겸애’사상을 주장한 학파이다. 음양사상은 중국인이 우주만물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세계관이다. 자아~, 만약 이상의 중국고대 여러 다종다양한 사상과 세계관을 굳이 철학이란 개념으로 인식한다면 나름대로 모두 크게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며 중국철학의 가장 기본 특징은 모든 사물을 조화와 화해로 보는 일원론이다. 문제는 현대중국이 중국고유사상과 세계관을 하나의 고유철학체계로 인식한 것이라 아니라 기어코 억지춘향 식으로 서양의 이원론 철학 관념으로 두들겨 맞춰놓고 법치주의를 제창한 법가 외의 모든 철학은 전부 유심론 범주로 분류하고 난도질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중국이 건립된 후 과거 잘살았던 지주, 부농, 자본가, 지식인들은 모두 유심론자에 속하므로 타도의 대상으로 분류하고 타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와 농민들은 비록 손발이 거칠고 심지어 발에 소똥이 묻어 있어도 그들이야말로 완벽한 유물론자들이기 때문에 혁명의 주력군이고 그들을 발동하여 유심론자들을 때려 엎어야 만이 혁명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사구(四舊:낡은 사상, 낡은 풍속, 낡은 전통, 낡은 문화)’는 전부 유심론범주에 속하므로 철저하게 때려 부셔야 한다는 것이다. ‘낡은 것을 보내지 않으면 새 것이 올 수 없다.’는 미명하에 낡은 서적과 문화재를 전부 태워버리고 부셔버렸다. 유심론자는 폭력으로 개조시키고 만약 옛것을 고집하거나 개조의 표현이 좋지 못할 경우 때려죽여도 좋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맑스의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을 중국실제에 결합시켜 농민을 투쟁의 선봉군으로 앞세웠다. 그리하여 모택동군대는 주력이 농민군이었으며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다.”는 전략으로 중국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여기까지는 그의 전략이 성공적이었다. 허나 모택동이 정권을 쥐고 나서도 계급투쟁을 극대화시켜 황하대륙을 온통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모택동의 주요 실책이 바로 정치를 극대화시키고 경제를 극소화시킴으로서 중국인민이 또 과거와 같은 가난에 허덕이게 된 것이다. 물론 모택동이 경제를 중시한 적이 있지만 열정만 있었을 뿐 책략이 없어 대약진을 벌렸으나 오히려 3천만이 굶어죽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이것도 모택동이 지나치게 유물론을 숭상했던 결과이다. 맑스 철학에 대립통일이란 개념이 있으나 현대 중국은 대립만 부각시키고 통일이 없었던 것이 최대비극이다. 개혁개방이후 모택동의 계급투쟁철학이 종말을 고하고 경제에로 눈을 돌리고 또 유심론과 유물론의 대립투쟁철학을 버리고 공자, 노자를 되살림으로 하여 중국이 전통문화를 회복하고 진정한 중화민족으로 세상에 다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전통에 있어서 일원론이 중국인의 체질에 배어왔기 때문에 이원론의 철학은 중국을 파괴하는 역할을 할 뿐 득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만약 중국에 철학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사물을 조화와 화해로 보는 일원론의 철학일 뿐, 서양의 대립과 투쟁으로 인식되어온 이원론의 철학은 없었다.
18    생식숭배와 거녀이야기 댓글:  조회:5616  추천:29  2010-06-05
생식숭배와 거녀 이야기 한반도에는 지금까지 전해온 거녀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바, 이것은 한반도 역사문화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사료라 생각된다. 한반도의 거녀 이야기가 문헌으로 처음 기재된 것은《삼국유사》이다. 사비(泗沘:백마강) 남쪽 해중에 여인의 시체가 있었는데 신장이 73척, 족장(足長) 6척, 음장이 3척이었다. 혹은 신장이 18척이라고도 한다. 이 거녀담은 백제의 패망을 알리는 메시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문대할망>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지금까지도 널리 전해지고 있는 거녀의 주인공은 단연 제주선문대할망이다. 그녀에 대한 전설을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옛날 제주도에 선문대 할망이란 노파가 살았다. 이 할망은 키가 얼마나 크던지 하늘에 치솟아서 아득히 머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노파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베고 누우면 두 발은 성산포 앞바다까지 닿아서 발로 물장난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서귀포 법환리(法還里) 앞바다에 바위로 된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커다란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는데 노파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남쪽으로 발을 뻗었을 때 잘못하여 두 엄지발가락이 닿아서 생긴 구멍이라고 한다. 선문대할망은 키가 큰 만큼 식사양도 컸으니 밥을 짓는데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구좌면 송당리에 있는 큰 바위가 세 개 있는데 할망이 밥을 지을 때 솥받침대로 사용했던 돌이라 하며 세화에서 목장으로 가는 도중에 언덕 셋이 있는바 이것 역시 노파가 밥을 지을 때 솥을 올려놓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안덕면에 있는 산방산(山房山)은 소금강이라고 할 만큼 경치가 좋다. 395미터나 되는 이 산은 노파가 한라산의 한쪽 부리를 뽑아 집어던진 것이라고 하며 산부리가 뽑혀 웅덩이 진 곳이 바로 백록담(白鹿潭)이라 한다. 한림에 있는 산의 하나는 노파가 신고 다니던 나막신에 묻었던 흙이 떨어져 굳은 것이라고 하니 이와 같은 오름이 여러 곳에 있다고 한다. 키가 큰 노파는 육지와 왕래할 적에는 신발을 벗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목포 쪽을 향해 건넜다고 하는데 바다의 가장 깊은 곳도 무릎 아래밖에 닿지 않았다고 하니 크기가 짐작이 된다. 이처럼 키가 크고 힘이 센 노파에게 큰 고민이 있었으니 옷을 제대로 지어 입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키가 너무 크고 보니 천이 많이 소용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섬사람들과 의논을 한 결과 노파는 제주도에서 육지까지 이르는 다리를 놓아주기로 하고 그 대신 노파에게 섬사람들이 속옷을 한 벌 지어주기로 했다. 노파의 속옷 한 벌 만들려면 명주 백 통이 필요했으나 섬에 있는 명주를 모두 모아보니 99통밖에 모아지지 않아 속옷 한쪽 가랑이가 짧게 되었다. 노파는 소원의 속옷이 만족한 것이 되지 못하자 화가 나서 육지와 다리 놓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섬사람들이 육지와의 자유왕래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노파가 다리를 놓으려고 하던 자리가 조천면에 남아 있으며 근처 암석에 남아 있는 큰 웅덩이는 그때 노파의 발자취라고 전한다. 노파가 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제주팔경의 하나인 용연에 들어갔으나 물이 겨우 발등을 묻힐 정도였으며 한라산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갔던바 얼마나 깊던지 그처럼 키 큰 선문대할망도 빠져죽고 말았다고 한다. <장신대력지녀> 이능화의《조선무속고》에 보면 한반도 무속인 중에 거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간의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 우암천사에 법우스님이 있었는데 도행이 깊었다. 어느 하루 방에 한가히 기거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간에 비가 내리지 않고 홍수가 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천왕봉 꼭대기에 올랐는데 한 장신대력지녀가 스스로 말하기를, 저희는 성모천왕인데 하늘에서 벌을 받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고 당신과 인연을 맺고 싶어 수술(水術)을 부렸습지요. 이렇게 그들은 수술을 중매로 부부가 되었고 가옥을 짓고 살면서 팔녀를 낳아 자손이 많이 번식했고 그들에게 무술(巫術)을 가르쳤다. <해남의 마귀함씨> 마귀함씨에 관한 전설이 선문대할망의 이야기처럼 상세하고 구체적인 것이 많이 없는 것이 유감이나, 그녀는 한발자국에 백리 오백 리는 문제없이 거닐 수 있었다고 하며 목포에서 완도까지 세 발자국이면 된다고 하니 거녀임에는 틀림없다. <강화도의 마귀할머니> 강화도의 마귀할머니는 고인돌 전설로 유명하다. 옛날 한반도에는 너무나 많은 명현이 있었으므로 중국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명현이 나지 않도록 애를 썼다. 명현이 나는 까닭인즉 살펴보니 산맥이 활기 있고 땅기가 왕성한데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키 크고 힘이 센 마귀할머니를 보내 땅기를 죽이게 하려고 고인돌을 가져다 놓으므로 맥을 끊게 했다. 강화도 서단에 있는 외포리란 곳에서 지금의 고인돌을 마귀할머니가 운반했다고 한다. 고인돌 윗돌은 머리에 이고 기둥돌은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약 배 미터 지점에 있는 큰 돌은 다리사이에 끼고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외포리 앞을 지나올 때 속옷이 조금 젖었다고 하며 이곳이 제일 깊은 곳이라 한다. 고인돌의 크기는 50명이 되는 사람이 올라가도 끄떡없다고 한다. <축성녀> 한 과부가 두 남매를 데리고 사는데 아들은 말을 타고 서울에 다녀오게 하고 딸에게는 뒷산에 석성을 쌓으라고 명하였다. 딸은 앞치마를 두르고 산 아래에 있는 강변에 가서 큰 돌을 담아다가 성을 쌓았다. 성을 거의 다 쌓고 마지막 석문만 하면 완성할 무렵 어머니의 계책에 따라 딸이 지고 아들이 이 경쟁에서 이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딸의 신장을 비롯해 어느 만큼의 크기의 여인으로 밝힌 것은 없지만 여하튼 앞치마에 돌을 주어다가 성을 쌓을 정도이니 굉장한 거녀임에는 틀림없다. 한반도에는 왜 거녀담이 많고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을까? 필자는 이것이 곧 한반도의 모계사회잔재의 영향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한반도에서도 생식숭배문화가 발달해 있었다는 증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삼천년 전 주나라시기부터 부계사회 확립이 시작되었고 일본은 AD5세기경까지 모계사회였다고 한다. 그럼 한반도는 언제부터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행하게 되었을까? 필자는 그 시기를 박혁거세의 신라건국, 주몽의 고구려건국, 온조의 백제건국이었던 기원 전후로 본다. 하지만 제주도는 지금까지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인이 많은 삼다도로 유명하다는 삼다 중에 다녀가 의미하는 것은 제주도 모계사회는 그 시기를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육지보다 썩 후에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육지인 백제에서 서기 661년 백제가 멸망하는 메시지로 거녀의 시체를 들먹인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여성숭배의식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한반도의 여러 거녀담을 통해 한반도도 중국처럼 생식숭배사상이 뿌리 깊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991년 중국학자 조국화 선생은 그의 저서《생식숭배문화사상》이란 글을 통해 “중국문화는 생식숭배문화사상을 핵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 후 중국학계에서 대다수가 그의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웃나라인 한반도에서도 고대에 생식숭배문화사상이 뿌리 깊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 한국학자들은 이 면에 관해 연구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며 이렇게 되면 한반도의 고대문화본질이 무엇이었느냐? 는 것을 캐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은 전통문화라 말하는 유불도 연구와 서양학에만 열을 올리다 보니 자국의 고대문화본질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참으로 유감이라 생각한다. 위의 여러 가지 거녀담 외에 한반도에서 생식숭배문화를 엿볼 수 있는 증거들이 많다. 《삼국유사》에 경덕왕의 옥경이 팔촌(八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제22대 지철노왕(智哲老王)의 음장이 일척오촌(一尺五寸)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황제의 옥경이 일척이촌(一尺二寸)인 진규(鎭圭)보다 삼촌(三寸)이나 더 크다.《삼국유사》는 지철노왕의 음장크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왕의 음장이 일척오촌이나 되어 배우자를 얻기 어려워 사자를 삼도에 보내 구하게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러 본즉 개 두 마리가 큰 북 만큼의 똥 덩어리 양 끝을 물고 다투는지라 촌인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하기를 이곳 상공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수풀 속에 숨어서 눈 것이라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보니 여자의 신장이 칠척오촌(七尺五寸)이었다. 사실을 고하니 왕이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궁중에 맞아들여 왕후를 삼으니 여러 신하가 모두 하례하였다. 왕의 음장이 실제로 일척오촌이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에서 왕이란 양력이 강하여 후대번식의 전범이여야 한다는 생식숭배문화사상의 맥락에서 꾸며진 것이며 그만큼 옥경의 크기에 걸맞을 여인도 음문이 커야 하는데 위 이야기에서 우회적으로 큰북만한 똥 덩어리로 음문이 크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중국의《시경》에는 남녀사랑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굉장히 많은바 이것은 곧 당시 문화 본질을 정확히 그려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마땅하다. 《삼국유사》에 왕의 음장이 엄청 크다든지 노골적으로 백마강의 여시체의 음장이 삼척(三尺)이라 했고 또 김현감호와 같은 사랑이야기라든가 선덕여왕의 예지삼사 중 여근곡 이야기는 모두 그 시대의 문화 본질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생식숭배문화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7    남북통일은 천국의 이야기 댓글:  조회:4843  추천:53  2010-05-31
남북통일은 천국의 이야기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은 현대사에서 동서이념과 사상의 대립구도였던 지구상의 판도를 바꿔놓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 뒤를 이어 구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종교문명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졌다. 중국은 1990년 북경아세아게임을 계기로 구미에서 의구심(1989년 천안문 사태)을 갖고 대중투자에 주춤할 때 화상자본이 대거 대륙에 흘러들었다. 1992년 등소평의 ‘南巡講話’가 시장경제정착, 대외개방 확대, 외자유치에 크게 기여하였고 중국을 중심으로 중화권이 뭉치는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시기 굳게 닫혀 있던 ‘중한 문’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빠금히 열렸고 1990년 북경아세아게임 때 한국인관광객 수만 명이 중국을 찾았고 만여 명에 이르는 수가 백두산구경을 다녀왔다. 중한관계가 본격적인 발걸음을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당시 한국인은 중한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남북관계변화와 직결시켜 인식하고 있었다. “참 세월이 많이 좋아졌어요. 이렇게 빨리 백두산구경하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추세대로 간다면 십년 안에 납북통일이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네요.” 한국 00교수 분이 백두산정상에서 필자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1980년대 말기부터 1990년대 초반에 있은 지구촌의 획기적인 변화를 지켜보던 하버드대 샤무엘·헌팅턴 교수는 미래사회변화를 예측하는《문명의 충돌》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세상은 냉전시기 사상과 이념의 대결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람마다 ‘나는 누구냐?’는 질문을 갖게 되고 따라서 지구촌은 문명에 따라 이합집산이 가속화될 것이다.”, “이슬람권이 성장세를 보일 것이고 동아세아는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나로 뭉쳐 거대한 세력으로 역사무대에 새롭게 등장할 것이고 분열되었던 동족은 통일을 이룰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그의 관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문명에 따라 뭉칠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장세를 보이는 이슬람권, 거대한 중화권을 중심으로 주변국이 뭉치는 유교문명이 주춤세를 보이는 기독교권과 갈등을 빚게 되고 급기야 전쟁도 있을 것이란 예측이다. 필자는 헌팅턴 교수의 두 가지 관점에서 같은 문명끼리 뭉치고 동족끼리 통일한다는 것엔 동의하나 문명의 충돌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 허나 이는 본문의 주제와 상관없기에 더 논의를 전개하지 않겠다. 헌팅턴 교수의 첫째 관점을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면 초록은 동색이요, 오리가 오리무리를 따르기 마련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1990년대 말까지 싱가폴, 홍콩, 마카오 등 중화권형성에 성공하였다. 다만 대만문제가 골칫거리였는데 2000년대 들어 현재까지 대륙이 바라던 ‘삼통(우편·통신, 무역, 상호왕래)’이 해결되어가고 있어 이미 절반 통일이 이뤄진 셈이다. 헌팅턴의 예측과 맞아떨어지는 좋은 사례이다. 또 일본의 점차 친중 노선과 한국의 지난 십년 정권의 친중 노선을 통해 유교문화권이 새롭게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도 그의 예측과 맞물렸다.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위에서 말했던 그 교수 분의 ‘예언’대로 십년 안에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을 통해 남북 간의 화해무드가 감돌았다. 적대관계를 ‘동반자관계’로 변화시킬 만큼 특기할만한 사건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국 언론매체들에서 앞으로 짧으면 10년, 길어서 20년이면 남북통일이 될 것으로 예측하는 보도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반쪽’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민정부의 바통을 이어받아 국가수반으로 분단사상 처음으로 삼팔선 땅을 밟았다. 남북 간의 역사에 크게 한 폐이지를 장식하였고 남북화해무드가 한층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되였다. 참여정부의 노력에 의해 남북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 분위기였다. 이렇듯 남북통일이 눈앞에 보일듯하던 분위기가 정권교체 초기부터 깨지고 멀어져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냉전시기를 연상케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적대관계 사태에 이르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도 20년이 지났다. 옛날 사람들은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법한 동안 유독 한반도만 냉전시기 사상과 이념대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추세를 거스르는 행태이다. 세상은 모두 가재는 게 편으로 가고 있는데 유독 한반도만 초록끼리 동색이 되지 못하고 흑백으로 되어 적대관계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참 안타깝다. 작금의 남북관계가 언제나 풀릴 것인가? 지금으로선 답이 보이지 않는다. 통일은 아예 천국의 이야기로 되어버렸다. 현재 일본과 중국은 외교상 이북을 ‘조선’, 이남을 ‘한국’이라 부른다. 앞으로 50년 더 이대로 나아간다면 ‘조선’은 조선, ‘한국’은 한국으로 되고 말 가능성이 충분하다. 왜냐? 이별의 시간이 백년이 되면 서로의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차이가 좁힐 수 없이 격차가 커지고 진짜 남남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산가족 생존자들이 있어 동족유대성이 강하지만 앞으로 반세기 더 지나면 동족유대성이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앞으로 20년 내지 길어서 30년 안에 통일이 되지 못하면 영원히 두 동강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사실 남북이 적대관계가 해소되더라도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기는 너무 멀리 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격차일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정치적인 통일이 아니더라도 대륙과 대만처럼 '삼통'만이라도 이뤄진다면 여러모로 갈등이 해소되고 점차 하나로 되어가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허나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삼통'마저도 앞으로 10년? 20년? 신만 알 노릇이다.
16    공자와 마음의 문명 댓글:  조회:4288  추천:23  2010-05-28
공자가 중화민족에 대한 기여(貢獻)는 마음의 문명을 심어준 것이다. 《중국인의 정신》의 저자 고홍명은 인간타입과 문명의 본질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들이 어떤 문명을 평가하는데 있어 최종적으로 물어야 할 문제는 거대한 도시나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 또는 넓고 평탄한 도로 등을 건설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름답고 편리한 농기구나 정밀하고 실용적인 도구, 기구, 용기 등을 충분히 제조할 수 있는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대학의 설립이나 예술작품의 창조와 과학의 발명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문명을 평가할 경우 우리는 어떤 타입의 남성과 여성을 양성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사실 한 문명이 빚어낸 인간 유형은 그 문명의 본질과 개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문명의 영혼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에 처한 남녀가 사용한 언어도 그들의 본질과 개성 그리고 영혼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문명에 대한 개념이 복잡하나 여기서 말하는 문명은 종교이다. 철학, 과학, 예술, 문학 등이 종교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종교야말로 문명의 총체적인 개념이라 볼 수 있다. 특히 한 민족과 한 지역의 인간들의 타입을 결정짓는 요소는 종교이다. 이를테면 유태인, 서구인,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의 타입을 결정지은 요소는 각각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와 도교이다. 그런데 유교와 도교 외의 다른 세계적인 종교들은 처음부터 종교로 출발한 경우가 많은데 비해 유교와 도교는 처음에는 하나의 학설로 출발했다가 3~400년이란 긴 시간을 거친 후 비로서 종교로 자리매김 되었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는 본래 서구인의 머리에 박힌 초자연적인 신에 열광하는 그러한 종교개념이 없었다. 왜냐하면 유교와 도교가 종교역할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그럼 유교란 도대체 무엇이며 공자는 중화민족에 무엇을 기여했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유교를 일명 예교라고도 하는데 공자가 유교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자 이전에 유(儒)가 이미 있었다. 그것은 요, 순, 탕, 문, 무, 주공을 계보로 내려온 유이다. 헌데 주공까지의 유는 법규, 제도, 풍속, 문화 등 제방면에서 너무도 딱딱해서 두뇌로만 받아들여 삶을 영위하는 종교였다. 쉽게 말해서 중국인의 마음과 영혼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였다. 이리하여 춘추시대에 이르러 중국인은 낡은 두뇌의 문명을 지킬 것과 새로운 맘의 문명을 갈망하는 양자택일의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서주가 무너지고 천하가 혼란을 겪으면서 제자백가가 탄생하는 시기였다. 당시 노자는 기존의 문명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버리라고 호소했다. 이와 반대로 공자는 기존의 문명을 버리지 말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문명을 재건하자고 호소했다. 공자의 이러한 태도를 두고 후세 사람들이 그를 복고주의자라고 몰아붙였는데, 이는 공자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공자는 주공의 혼인이란 가정을 나라와 연관시켜 국과 가가 합쳐진 개념인 ‘국가’의 관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예와 의를 겸비하게하고, 조상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제사제도를 완벽하게 함과 동시에 이를 천자에 대한 충성에 이르게 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고, 인의예지신이 겸비된 인간이 되는 군자의 도를 제시했으며, 대의명분을 지켜 사회질서에 따를 것을 호소함과 아울러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량시민이 되기를 호소했다. 공자는 또 군자의 도는 부부생활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부부, 부모자식, 형제, 친척, 친구, 나아가서 모든 사회구성원은 맘(정:情)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호소했다. 공자는 이러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으로 중국인의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 따라서 중국인의 인간타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곧 ‘온화함’이다. 고홍명은 저서《중국인의 정신》에서 중국인의 ‘온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한 중국인은 간혹 거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저속하지는 않다. 간혹 못생긴 느낌이 없진 않지만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추하지는 않다. 간혹 덤벙거려 비속함이 없진 않지만 방자하거나 오만하지는 않다. 간혹 무딘 면이 없진 않지만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간혹 성격이 원만하고 영리한 면이 없진 않지만 남을 해칠 정도로 사악하지는 않다. 진정한 중국인의 마음이나 품행에 나타나는 결점이나 흠집을 굳이 말한다 해도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점은 없다. 중국의 구식학교에서 성가신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설령 그 사람이 사회의 최하위 계층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공자가 중국인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키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기 때문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헌데 세계에서 공자처럼 수없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반복한 성인이 없다. 처음으로 진시황에게 죽었다가, 한나라 때 경학통치가 확립됨에 따라 공자가 최고권좌에 올랐고, 수당시기에 불교의 흥기에 의해 공자는 찬밥신세로 되었다가, 남송의 주희에 의해 다시 부활했고, 청나라의 이탁오(李卓吾)에게 공격을 받았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는 유교는 사람을 잡아먹는 물건이라고 벼락 맞았고, 문화혁명기간에는 공자가 철저히 타도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부터 공자가 되살아나기 시작해서 현재는 공자가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한때 딱딱했던 두뇌의 문명이 중국인의 적성에 맞지 않아 마음의 문명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5    생식문화로 보는 단군신화 댓글:  조회:4213  추천:49  2010-05-19
생식숭배문화로 보는 단군신화 단군신화에 환웅이 풍백 운사 우사를 거느리고 태백산정에 내려왔다는 대목이 있다. 여태껏 한국의 수많은 학자들이 단군신화의 연구에 매달렸으나 이 풍백 운사 우사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가. 왜 구름과 비에는 ‘사(師)’를 붙인데 비해 바람에는 ‘백(伯)’을 붙였는가는 것이고 나. 풍백 운사 우사의 기록이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산물인가? 아니면 한민족의 고유한 원시종교신앙에서 비롯된 산물인가는 것이요 다. 풍백 운사 우사가 천부인 3개를 뜻하느냐 마느냐는 것이고 라. 거의 모든 단군신화 연구학자들이 풍백 운사 우사를 농경문화의 연관성만 지적했을 뿐 생식숭배문화와의 연관성에 관해선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다는 것이다. 《주례·천관편》에 바람·구름·비에 관한 내용이 많은 것을 미루어 보아 주대에 이르러 바람·구름·비를 관장하는 전문 관직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왜 구름과 비에는 ‘사(師)’를 붙인데 비해 바람에는 ‘백(伯)’을 붙였을까? ‘사’는 군대의 한 개 직급을 지칭하는 말인데 대개 3천의 군대를 이끄는 장수를 사장이라 부른다. ‘사’는 또 ‘이끌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대표적 사례로서 기독교에서 설교를 담당하는 자를 ‘목사(牧師)’라 부른다는 것이다. 목사는 본래 양떼를 인솔하는 양치기꾼을 뜻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어찌되었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구름과 비를 관장하는 자에 ‘사’를 붙이고 바람을 관장하는 자에 ‘백’을 붙인 것이다. ‘백(伯)’은 ‘백(白)’에서 유래되었으며 또 ‘백(伯)’은 ‘패(覇)’와 같은 글자이다. 이에 관해선《설문》에 해석되어 있다. ‘패’는 모든 것을 독점하다, 제패하다, 관장하다, 지배하다, 주재하다 등등의 뜻으로 쓰인다. 구름과 비에 ‘사’를 붙이고 바람에 ‘패’를 붙인 것은 고대사회에서 구름이 생기고 또 구름이 비를 내리게 하는 근원은 바람에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사회에 있어서 세상만물의 움직임은 전부 바람이 조화를 부린 결과라 보고 바람은 우주의 본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주대에 이르러 바람을 구체화하고 또 바람을 고상하게 표현한 ‘기(氣)’란 개념이 전반사회에 뿌리내리면서 동양에서는 모든 사물을 ‘기’의 현상으로 풀이하려고 애썼다. 중국에서는 ‘도(道)’를 우주의 본체라 인식했는데, ‘도’는 곧 ‘기’라고 해석한다. ‘기’는 곧 바람이며 바람이 곧 ‘기’이다. 그러므로 풍백을 단순히 고대사회에 있었던 하나의 관직에 불과했던 것으로만 보지 말고 세상만물을 주재하고 인간사회의 만사를 주재하는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존재로 인식해야 마땅할 것이다. 풍백 운사 우사라는 개념이 도교에 많이 등장하는 것만은 사실이나 그렇다 해서 임동권 선생처럼 “단군신화 가운데서 삼위태백, 풍백 운사 우사를 거느린다든가, 천부인을 갖고 왔다는 것은 도교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오류라 생각한다. 만약 임동권 선생처럼 한국의 적지 않은 학자들의 이 면에 대한 관점에 따라 한민족의 역사, 종교, 문화를 풀이한다면 그 뿌리는 전부 중국에 귀속될 것이다. 예하면 중국도교경전에 신선이란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등장하고 또 도교가 추구하는 최고 경지가 바로 득도성선이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신선도가 도교에서 유래된 것일까? 아니다! 신선도는 본래 동이족사회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지 결코 중원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황제(黃帝)가 중원의 패자로 있을 때 동쪽을 유람하였는데 “화서국(華胥國)이 신선국이다.”라는《헌원본기(軒轅本紀)》의 기록이 말해주듯이 신선도는 동이족사회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동이족사회에 이미 신선도가 널리 유전되어 있었다면 동이족사회에 이미 바람숭배신앙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동이족이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 당연히 구름과 비의 산생근원이 필연적으로 바람과 그 어떠한 내재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풍백 운사 우사의 언급이 결코 도교의 영향을 받아 비롯된 것이라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마땅히 한민족의 고유 신앙에서 비롯된 산물이라 인식해야 한다. 다음 천부인 세 개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느냐의 문제인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최남선의 무구(巫具)인 신경(神境)·신모(神帽)·신검(神劍)이란 설, 장덕순의 신·대자연·인간의 삼계를 말한다는 설, 유동식의 하늘·땅·저승을 지배하는 신기(神器)라는 설 등등이 많다. 이외의 많은 학자들이 풍백 운사 우사가 곧 천부인 3개를 의미한다고 결론짓는다. 필자는 도교문헌을 살펴본 결과 천부인 3개가 곧 풍백 운사 우사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현재까지의 단군신화의 분석에 대한 글들을 일별해 본 결과 풍백 운사 우사는 고대사회의 관직 혹은 신직이었다고만 언급했으며 또 그 관직 혹은 신직이 농경문화의 필수적인 요소였다는 결론뿐이다. 이는 매우 편협적인 분석이며 인식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대한민족의 역사는 산식숭배문화(産食崇拜文化)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식숭배문화도 있었고 또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산식숭배문화보다 생식숭배문화가 비중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지식인들, 특히 한국학자들은 생식숭배문화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하며 또 이 면에 대한 지식도 매우 결핍하다. 그리하여 고대한민족의 정신적 문화를 분석함에 있어서 거의 대다수가 산식숭배문화로만 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녀의 유래를 살펴보면 생식숭배문화가 고대사회에서 얼마나 비중이 컸는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인의 의식속의 성녀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교양적이고, ‘남자를 모르고’, 세속풍진(風塵)에 물젖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깨끗한 여성이다. 허나 현대인이 성녀의 유래를 알게 되면 이러한 성녀의 이미지가 많이 다운(삭감)될 뿐만 아니라 놀라 자빠질 수도 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쳐들어갔을 때, 이미 그곳 토착민(土着民)들은 바알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로 불리는 농사를 지어먹을만한 가나안땅이 있다. 그런데 그곳은 사막에 둘러싸여 내내 가뭄이 심하다. 가뭄이 심하면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바알신앙을 갖게 되었다. 즉 남정네들은 바알림, 아낙네들은 바알롵을 상징하고 교회에 모여 열심히 성교를 한다. 왜 그랬을까? 남자의 정자는 비를, 여자의 몸은 밭을 상징하고 열심히 또 많이 성교를 하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농경에 의해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보다 더 성스러운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성교행위는 성사(聖事) 중의 으뜸으로 꼽히는 성사였다.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항시 교회에서 대기하면서 장정들이 찾아오면 열심히 성교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한다. 물론 아무런 금전거래도 없었으며 성교를 더 많이 하는 여성이 성녀중의 성녀로 인정받았다. 성녀란 이렇게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은 조선시대까지도 성황당에서 풍년을 빌기 위해 남녀가 모여서 성교행위를 감행했다. 현재 개별 학자들은 옛날 성황당은 매음굴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문화에 대한 왜곡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매음행위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성스러운 일을 수행한다고 믿었었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吳天明)은 “일본의 농촌에서는 지금도 모내기가 끝나면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논두렁 위에서 청년남녀들이 성교를 행한다.”고 말했다. 중국《속현괴록(續玄怪彔)》에 <연주부인(延州婦人)>이란 제목으로 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옛적에 연주에 한 부녀가 있었다. 그녀는 살결이 희고 자태가 매우 고왔으며 스물네댓 되는 나이에 홀로 도시를 떠돌며 살았다. 어린 소년들이 그녀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그녀와 잠자리를 요구하면 그녀는 스스럼없이 받아주면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수년 후에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술잔치를 벌리고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녀가 집(가족)이 없었으므로 길 왼편에 묻었다. 구정 즈음에 홀연히 한 오랑캐 스님이 서역(西域)에서 와 묘지를 보더니 방석을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예를 올리고 향을 피우면서 수일 동안 찬탄을 올리며 떠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의아해 스님에게 물었다. “이 여자는 음탕해서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았으며, 이 여자가 의지가지 할 데가 없는지라 여기에 묻었는데 왜 스님께서는 경이롭게 대하시는 겁니까?” 스님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 여자는 대단한 성인이올시다. 자비를 베풀어 세속지욕을 마다하지 않고 잠재웠으며, 이 여자의 쇄골이 보살처럼 순연(順緣)을 다 하였기에 성인이라 부를만하지요. 믿지 못하겠으면 열어서 검증해 보시지요.” 사람들이 그 즉시로 묘를 파헤쳐보니 과연 전신의 뼈가 쇠사슬 모양으로 얽혀 있었으므로 스님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경이롭게 여기어 제단(齎)을 설치하고 탑을 세웠다. 19세기 철학 거장인 헤겔은《미학》에서 “인도인은 거의 모든 사회생활에 있어서 ‘성’을 떠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한마디 지적을 통해 인도인의 생식숭배의식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 수 있다. 고대사회 인류에게 있어서 생식숭배문화는 보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반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학자 조국화 선생은 <<생식숭배문화사상>>이란 저서를 통해 "중국문화는 생식숭배를 핵심으로 형성되었다."고 지적했다. 지금 중국학계에서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고대문화도 생식숭배문화의 각도로 해부해야 하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민족의 문화 본질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언어 중 남녀의 교합을 가리켜 운우지정을 나눈다는 말이 있다. 필자는 이 말이 그냥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고 또 그냥 무의식중에 중국인의 표현법은 빌려 쓰는 것도 아니라 본다. 이 말은 곧 고대한민족의 생식숭배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원시 인류(특히 동양인)는 인체구조가 자연의 구조체계와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자연현상을 인체의 원리와 연관해 풀이했다. 이 과정에서 음양사상이 발달하게 되었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구름은 양이고 비는 음이다. 따라서 구름은 남자를 상징하고 비는 여자를 상징한다. 운우지정을 나눈다는 말은 곧 자연의 원리를 인간사회에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식적으로 구름이 비를 생기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구름과 비가 직접 남자와 여자의 교합과 같은 그러한 교합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름은 어떻게 비를 생산하는가를 살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6 청도군 산천조(山川條)에 바람·구름·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오산, 군의 남쪽 2 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동쪽에 한 골짜기가 있어 고사동이라 하는데 하늘에서 장차 바람이나 비가 오고 구름이 골짜기 밖으로 나오면 바람이 불며 크게 울면 그날로 효험이 있다. 이은봉 선생은 이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골짜기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등이 신성한 곳이어서 대개는 용과 뱀과 같은 음기의 신체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골짜기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구름의 출입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대인은 구름이 만들어지는 것도 산이요, 구름이 배회하다 다시 들어가는 곳도 산이라 믿었다. 구름이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오고 밖으로 나오면 바람이 분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를 끈다. 환웅이 태백산정에서 풍백 운사 우사를 거느리고 있는 신앙형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골짜기는 산과의 관계에 있어서 음양의 관계이다. 즉 산이 양이라면 골짜기는 음이다. 따라서 고대한민족의 신앙의식에 있어서 골짜기는 곧 구멍을 뜻하며 그 골짜기로 이루어진 구멍은 생식의 구멍이다. 샘물이 골짜기에서 발원되는 것은 인간이 엄마의 ‘구멍’에서 태어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며 동일한 구조이다. 고대한민족은 이 골짜기 생식원리에 의해 마을을 골짜기에 형성시켰는데 그것이 곧 방곡이다. ‘곡(谷)’은 골짜기란 뜻도 있고 곡식을 의미한다. 이로서 우리는 곡식의 생산은 곧 대지의 ‘구멍’과 연관이 있으며 또 그것은 인간의 생식원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방곡문화는 한민족의 이제문화의 뿌리이자 한민족의 고대문화의 주체였다. 다시 말하자면 한민족의 문화는 곧 골짜기 문화이며 골짜기 문화는 결국 생식문화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구름이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남자가 여자의 ‘구멍’에 들어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구조이다. 남자가 여자의 ‘구멍’에 들어가면 후대번식이 되듯이 구름이 골짜기 안에 들어가면 비가 생산된다. 그리고 구름이 골짜기 밖으로 나오면 바람이 분다고 한 것은, 구름이 짙으면 바람이 이는 현상에서 비롯된 판단일 뿐이며 방편적인 설법일 뿐이지 결코 구름이 바람을 생기게 하는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구름이 생기고 비가 내리는 것은 모두 바람이 역할한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말해 구름과 비를 생기게 만든 본체는 곧 바람이다. 끝으로 지적할 것은 풍백 운사 우사는 결코 단지 농경에 관한 관직 혹은 신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운사는 남성사회 어떤 일들을 관장하고 우사는 여성사회를 관장하고 풍백은 그 모든 일들을 통 털어 관장하는 최고의 관직 혹은 신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름과 비에는 ‘사’를 붙인데 비해 바람에는 ‘백’을 붙였을 것이다. 복희씨가 인류에게 남긴 공적 중 ‘가취제(嫁娶制)’라는 것이 있는데 복희가 곧 남과 여를 맺어주는 ‘매신’이었다. 고대사회에서 ‘매신’은 하늘과 땅의 조화를 관장하고 만물의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신중에 으뜸으로 꼽히는 신이었다. 우리는 지고신이였던 복희가 곧 풍백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복희 어미인 화서씨는 풍산지역에서 살았다고 해서 성이 ‘風氏’이고 아들인 복희가 어미의 성을 따라 역시 ‘풍씨’이다. 흥미로운 것은《설문》에 의하면 화서씨란 ‘華’와 복희란 ‘伏’은 모두 바람 ‘風’과 동일하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단군신화의 풍백 운사 우사를 이해하고 풀이한다면 고대한민족의 문화 본질과 정체성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1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댓글:  조회:4961  추천:40  2010-05-12
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출국인들 글 싣는 순서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연변여성(2010.5)’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남자든 여자든 처음 가족과 이별하고 고향을 등지고 외국에 갈 때는 모두 한결같이 돈을 벌어와 여유롭고 화목하게 살려는 꿈을 안고 떠난다. 허나 정작 외국생활이 오래다보면 변해가기 마련이다. 특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에는 줄기차게 전화를 하고 돈도 보내주다가 1~2년이 지남에 따라 기별도 뜸해지고 송금하지 않는 사례가 허다하고 처음에는 자식이 사무치게 그립고 남편 혹은 아내 생각이 나지만 점차 고비를 넘기고 나면 자신을 챙기는 데만 신경을 쓰고 살아간다. 거기다 20-40대 사이 사람들은 성적욕구 때문에 혹은 외로움 때문에 한국에서 임시부부를 맺고 살아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래서 남편을 버리는 아내와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이 흔하게 생겨나고 있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더군다나 고향에 돌아가기를 꺼려하고 있다. 흑룡강성 라북의 맹모 여인(45세)은 남편이 8년 전 한국에 와서 불법체류하다 보니 고향에 가지 못해 아내와 8년 동안 이산가족으로 지내왔다. 맹모 여인은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8년 동안 정조를 고스란히 지키다가 올해 1월초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 찾아왔다. 남편이 집이 없다 하기에 언니 집에 머물게 되였다. 남편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간혹 아내를 찾아오면 잠자리가 아주 어색해 부부 같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젊은 여자와 동거하고 있어 아내를 멀리하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할 수없이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귀국하였다. 왕청의 김씨(56세)는 아들애가 14살인 1997년 7월 아내가 한국에 출국하였고 그동안 김씨가 아버지이자 엄마 구실을 하면서 아들애를 대학까지 보냈다. 허나 아내는 한국에 온지 3년이 되던 해부터 아들애의 학비와 생활비만 보내고 남편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다른 조선족남자와 붙어살고 있다고 한다. 김씨가 지난해에 한국에 와서 아내를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헛물켜고 말았다. 부부사이가 갈등이 생기고 있을뿐더러 자식과도 멀어져가고 있고 심지어 자식을 버리고 연락을 끊고 살아가는 부모들도 더러 있다. 또 일부 엄마들은 어김없이 자식한테 돈을 보내주고 하다가 집에 가서 아들애가 훌쩍 커버리고 엄마와 감정이 없고 공부는 뒷전이고 보내준 돈을 흥청망청 탕진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아예 곁에서 보지 않는 것이 약이라 하면서 서둘러 한국에 온다. 또한 일부 어린이들은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엄마와의 상봉이 너무 기뻐 엄마가 좀 오래 머물렀으면 하지만 엄마는 고향의 체류가 불편하다면서 서둘러 한국에 온다. 그렇게 서두르는 엄마가 자식은 이해되지 않는다. 벌만큼 벌었을 텐데 왜 출국하지 못해 안달일까? 정말 자식을 위해서일까 하는 의문이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난 조선족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유동상황이 심각해 조선족공동체의 붕괴가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경제가 많이 상승하면 한국에 온 조선족이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젠 단순한 경제차원을 넘어 여러모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조선족은 고향에 돌아가기가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글을 맺으며 1. 원문과 수정문 원문에 연길의 정부직속공공기관과 한국정부직속공공기관의 민원수금문제에 관한 대비를 비롯해 기타 일부가 있었는데 수정을 통해 삭제되었다. 조글로에 올리면서 필자의 원문이 아닌 수정문을 존중해 실었다. 2. 재한조선족 통계수치문제 혹자는 한국법무부 사이트나 연변공안국에 문의하면 정확한 통계수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그런 통계수치를 믿지 않는다. 왜냐? 한국법무부의 통계수치는 단지 공항과 항만을 통해 정상출입국한 자들의 수치만 있을 뿐 밀입국자들의 통계는 없다. 통계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대략 추산으로 만여 명이라 하고 2만에서 3만에 달할 것이란 추측도 있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이 밀입국자들을 빼놓고 말해야 하는가? 쉽게 말해서 그들을 재한조선족에서 제외시켜야 한단 말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또 한국에 정상입국한 자들 중 일부는 미국이나 일본에 밀입국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때문에 관방의 통계는 그때그때 정부차원의 행위일 뿐 전반적인 정확한 통계일 수가 없다. 하여 글 쓰는 사람들은 대략 40만 명이란 모호한 표현을 쓰는 것이다.
13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 댓글:  조회:4801  추천:33  2010-05-11
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출국인들 글 싣는 순서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연변여성(2010.5)’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재한조선족은 왜 단순한 돈벌이를 넘어 소박한 삶에서 즐기는 삶을 보내면서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에서 10년 정도 체류한 조선족은 물론이고 3년쯤 머물던 사람이 고향에 돌아가면 마땅히 할 일이 없고 가령 일자리를 찾아도 소득에 비해 소비지출이 더 많은 것이 문제일뿐만아니라 고향생활에 적응하는데 여러모로 불편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안착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경제수입과 소비지출 문제 연변의 경우 음식점, 공장, 일반사무직, 가정부 등 직업에 종사하면 받는 월급이 천원(인민폐) 정도이다. 연길에서 생활하려면 난방비, 가스요금, 전기요금, 물세, 위생비 지출 및 먹고 사는 데만 매달 천원이 넘게 든다. 게다가 연변은 부조바람이 얼마나 성행하는지 매달 평균 수백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여기에 자식공부비용까지 합치면 매달 평균 2,500~3000원이 있어야 한다. 특히 연길시의 경우 물가가 하늘을 치솟아 오르고 있어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가리봉 연길미식성 주방장의 말에 의하면 지난 설에 중국에 있는 어머님이 친척들을 30명 집에 불러 모아 설을 쇠였는데 음식 장만에 쓴 비용만 2,000원이 들었다고 한다. 2,000원이면 보통시민의 두 달 월급이다. 두 달 월급수입을 설을 쇠는데 밀어 넣고 나면 나머지 생활이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2,000원이면 한화로 35만원이 된다. 한국에서 만약 30명이 집에 모여 음식을 해먹을 경우 35만원이면 먹고도 남는다. 한국과 중국의 수입격차를 따지고 또 양쪽 실제지출물가를 따져보면 연길의 경우 서울보다 다섯 배 이상 비싸다는 계산이 나온다. 쉽게 말해서 한국에서 한 달 벌어 용돈 남기고 중국에 생활비를 보내주고도 적금이 가능한데 비해 중국에서 한 달 벌어 적금은 고사하고 단순히 먹고 살기도 힘들다는 계산이다. 간단한 실례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조선족이 집을 맡아 소박한 살림이 가능할 정도의 가장집물과 전기기구를 사는데 한 달 월급이면 족하다. 이에 비해 연길의 경우 한 달 월급을 갖고 살림도구를 갖춘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실제사정이 이렇다보니 누가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겠는가? 기후문제 한국은 삼면이 바다를 끼고 있고 위도가 삼팔선 이남이여서 온대대륙성기후와 온대해양성기후가 혼합해있으며 중국 동북삼성에 비해 따스한 편이며 산이 많고 물이 좋고 공기가 맑아 사람 살기가 참 좋은 곳이다. 이 때문에 한국에 체류하다가 연길에 가면 특히 겨울철에 고향에 가면 흔히 감기몸살과 비슷한 증상으로 시달리게 된다. 필자는 한국에서 감기 한번 앓지 않았는데 이 몇 년래 겨울철에 고향에 가면 번번이 “홍역”을 치른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 대다수가 기후 때문에 나와 비슷한 증상에 시달린다고 한다. 연길에서 온 강씨(39세)는 전립선염이 심해 젊은 나이에 마누라와 잠자리조차 하기 힘들었는데 10년 전 한국에 와서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병이 나아 성생활이 무난한 건 물론 건설현장에서 고된 일을 하는데도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한다. 오상에서 온 심모 여인(29세)은 중국에 있을 때 젊은 나이에 쩍하면 폐렴에 시달려 고생했는데 한국에 온 후로 공기 좋고 물이 맑아서인지 병을 모르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한다.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문제 한국에서 다년간 머물다가 고향에 가서 도심의 큰길을 건너려면 신호등이 있는 데로 가서 기다리기 마련이다. 한국 생활 질서가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도가 당지사람들한테는 바보로 보인다. 왜냐? 중국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큰길을 가로질러 건너기 때문이다. 2009년 8월초 필자가 한국인 3명과 함께 단체관광팀에 합류해 장백산에 간적이 있다. 등산입구에 이르니 수백 명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이드가 관광객을 모아놓고 새치기로 짚차를 타야 하기에 눈치 있게 서두르라고 말한다. 우리 일행 넷이 단체가운데서 가장 먼저 정상에 올라갔다. 천지를 보고 사진을 대충 찍고 서둘러 줄을 서 기다려 산 아래로 내려와 보니 우리 단체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딴에는 여유를 갖고 쉬면서 기다렸는데 반시간이 넘어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한테 전화했더니 모두 폭포를 구경하고 온천욕 쪽으로 움직이는 중이라 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없으니 폭포와 온천욕 가운데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우리를 빼고 나머지 38명이 모두 정상에서 줄을 서지 않고 용케도 스스로 알아서 새치기로 짚차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렇게 사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득을 보는데 반해 한국생활이 몸에 배여 정도를 지키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것이 어쩌면 중국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성수기 때 장백산을 찾는 관광객이 매일 적게는 3000명이고 많게는 5000명이라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치기를 잘 시키는 가이드가 우수한 가이드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사회치안문제 한국에서 가끔 연쇄살인사건, 납치사건, 절도사건, 소매치기사건 등등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사회의 치안질서는 매우 좋은 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은 치안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별로 없이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살던 조선족이 고향에 가면 치안문제로 피해를 입거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지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연길에서 온 백모 여인(40세)은 지난 설에 고향에 갔다가 공공버스에서 가방을 칼로 찢기고 5,000원을 절도 당했다. 연길시에는 아직도 공공버스에 절도범들이 쏠락거리고 있다. 한국에서 편히 다니던 습관이 있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탓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불찰로 빚어진 일이기는 하나 한국에 비해 너무 치안이 안 좋아 다시는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에는 연변처럼 상고머리하고 눈을 희번득거리며 괜히 사람을 째려보고 걸고들면서 싸움을 거는 젊은이가 아예 없다. 거리에 나서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도, 공공장소에 가도 마음이 편하다. 이에 비하면 고향은 아직도 불안한 요소가 적지 않다. 환경문제 연길시의 경우 도시건설이 자고 깨면 변화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겉보기에는 참으로 가관이다. 허나 도시기능시스템이거나 호화로운 건물 뒤에 숨겨진 꼴불견들이 문명사회와 거리가 멀었구나 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연길시의 건물수준은 여느 선진국보다 전혀 손색이 없고 한국의 중소도시에 비하면 오히려 더 낫다는 느낌이다. 허나 건물 안에 들어가 보면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와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를 찌르고 여기저기 담배꽁초와 휴지 및 과일껍질이 널려있다. 자질문제 한국에서 6년간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던 허씨는 돈을 벌었으나 허리를 다쳐 더는 일을 할 수가 없어 귀국하여 연길시 북산가에 비디오대여가게를 꾸렸다. 깔끔한 환경을 마련하려고 비싼 돈을 들여 바닥에 장판을 깔았는데 고객들이 장판에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꺼버려 구멍이 수두룩하다. 금연이라 써 붙여도 전혀 관계치 않고 담배를 피운다고 한다. 고객들한테 뭐라 하면 이 집에 다시는 안 온다고 을러멘다고 한다. 필자가 지난 11월 말경 심양에서 연길행 열차를 탔는데 밤중에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소리가 마치 싸움이나 하는 것처럼 어찌나 높던지 잠마저 말짱 깨고 말았다. 새벽이 되여 또 다른 손님이 역시 자기 아내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이렇듯 고향에서는 열차든 버스든 음식점이든 모든 공공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든다. 이것도 중국의 하나의 문화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한국에서 아무리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도 모두 조용한 분위기에 적응된 조선족은 고향의 시끌벅적한 환경에 불편을 느끼기 마련이다. 서비스 품질문제 고향의 은행, 우체국, 정부공공기관 등의 서비스 질이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져있다. 아직도 공무원들이 마치 자기네한테 뭘 빌러 간 것처럼 고객을 쌀쌀하게 대하고 고객을 앞에 두고 자기네끼리 이말 저말 한담을 하기가 일쑤이다. 전기요금, 물세, 도시가스요금을 수금하는 직원들의 서비스 질은 더 말할 것 없이 차하다. 필자가 작년 10월 초경 연길에 갔을 때 공항변방검사대에 이르니 한 “멋쟁이아주머니”가 줄 뒤 부분에 서 있다가 검사원에게 손짓을 하니 검사원이 뛰어 와 여권을 갖고 가 맨 앞으로 내보냈다. 또 카운터외의 검사원들은 혹시 면목이 있는 사람이 없나 하고 목을 빼들고 살피다가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무실에 데리고 들어가 새치기로 통과시키기도 한다. 한국공항에서는 이러한 사례를 목격할 수가 없다. 공항에서 이런 불미스런 일을 목격하고 기분이 언짢은데다 택시를 타면 부르는 것이 값이고 택시도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기사가 이어폰으로 마누라 아니면 친구에게 한바탕 큰소리로 요란하게 떠들어댄다. 한국택시는 깨끗할 뿐만 아니라 기사들은 휴대폰이 울리면 낮은 소리로 한두 마디 요점만 말하고 운전 중이라 끊는다고 하고는 운전에만 집중한다. 인간의 몸에는 관성과 리듬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국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이 고향에 가면 관성과 리듬이 깨지게 되여 적응에 애를 먹기 마련이다. 그래서 단순한 돈벌이를 넘어 웬만하면 한국에서 계속 정착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최종적인 답은 한국이 살기 편한데 비해 고향이 살기 불편하다는 것이다.
1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댓글:  조회:4588  추천:51  2010-05-10
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출국인들 글 싣는 순서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연변여성(2010.5)’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관내에 진출하거나 해외에 나간 조선족(유학생을 제외함)의 일차적 목적은 돈벌이이다. 그들은 외지 혹은 해외에서 몇 년간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오순도순 유족하게 살아보려는 꿈을 안고 가족과 이별하고 고향을 등지고 낯설고 물 선 곳으로 떠났다. 하지만 조선족인구유동이 생겨난 지 20여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살펴보면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몇 년간 돈을 벌어 연길시 신흥소학교부근에 설렁탕집을 꾸려 부자가 된 장씨 부부, 한국에서 번 돈으로 화룡시에서 양돈업을 크게 벌려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박모 여인과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극소수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 왔다가 고향에 돌아간 조선족은 나이가 많아 일을 할 수 없거나 본래 고향에서 막노동을 해보지 않다가 한국에서 수년간 건설현장에서 강도 높은 막노동을 하여 병이 생겨 더는 일을 할 수 없어 돌아간 자, 공직에 복직하려고 돌아간 자, 불법체류 혹은 형사 범죄로 하여 강제송환 된 자들을 제외하고 특별한 이유가 없이 속병이 없고 사지가 멀쩡한 조선족이 자진으로 고향에 돌아간 사례는 매우 드물며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 일에 지쳐 피곤하다고 돌아갔다가는 얼마 안 지나 또 재입국하려고 모지름을 쓴다. 불법체류 혹은 형사 범죄로 강제송환당한 자들도 입국규제 5년을 기다리거나 그 시간을 참지 못해 신분증을 위조해 또다시 한국행에 나서고 있다. 연길시 공원가의 한 다방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는 최모 여인(38세)은 6년 전 한국에서 3년간 체류하다가 불법단속에 걸려 강제송환 되였다. 지난 2009년 11월말 필자가 만났을 때 그녀는 “지난 8월에 5년 입국규제가 풀렸고 한국국적을 딴 언니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왜 남들처럼 이름을 바꿔 재입국에 서두르지 않고 5년을 기다렸는가고 물었더니 그녀는 “머리를 바꾸면 또 불법이라 언제 단속에 걸릴지 모를 일이고 그렇게 속이 두근거리면서 불안하게 보낼 거면 차라리 인내성 있게 5년을 기다렸다가 당당한 신분으로 한국에 체류하려고요.”라고 대답했다. 용정시 남씨(46세)는 1995년 밀입국으로 한국에 왔다가 1997년 6월 검거되어 강제송환 되였고 이름을 바꿔 가짜공무비자로 1999년 2월 간신히 재입국했는데 2001년 7월에 재차 단속에 걸려 쫓겨나자 2003년 8월 또 이름을 바꿔 세 번째로 한국에 입국하여 현재까지 버티고 있다. 조선족은 왜 이토록 코리안드림에 열광하고 또 한국에 오면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불과 3년 전까지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들에서 조선족이 한국행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하게 돈벌이를 위해서라고 보았다. 그래서 합법화시키면서 3년에서 2년 더 연장해주었고 5년이면 돈을 벌어 중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추정해서 5년 방문취업제도를 마련하였다. 물론 조선족도 처음에는 한국에서 몇 년간 열심히 돈을 벌어갖고 고향에 돌아가 살겠다는 생각과 타산으로 한국에 왔다. 그런데 최근 3년 동안의 재한조선족의 동태를 살펴보면 한국체류가 단순한 돈벌이목적을 넘어 한국에서 계속 정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 근거로서 5년 이상(2005년과 2006년에 있은 동포자진귀국지원프로그램에 의해 혜택을 받은 조선족은 다수가 한국경력이 10년이 됨.) 한국에서 체류한 조선족은 다수가 중국의 대련, 청도, 연길 등지에 아파트를 구입해놓고 한국에서 본래 가리봉, 대림, 안산, 건국대입구 등 지역의 쪽방을 찾아 소박한 살림을 하던 데로부터 2~3년 사이 전세로 이동하고 월세라 해도 보증금 수천만 원(한화)에 월 20만원(한화)을 웃도는 쾌적한 집을 구해 여유롭게 지내고 있다. 일자리도 되도록 월급이 높은 직장을 선택하고 매달 4일씩 휴무가 있어야 하는 직장을 고르고 있으며 과거에는 휴일이 아까워 파출부로 뛰면서 열심히 쉬지 않고 일을 하였으나 현재는 휴일이면 친구도 만나고 쇼핑도 하고 심지어 등산도 하고 헬스클럽에도 다니면서 여유롭게 살아가길 원하고 있다. 합법체류자들만 이런 여유로운 삶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10년 이상 불법체류 당사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도문시의 이모 여인(51세)은 1996년 6월에 한국에 왔으니 올해로 만 14년, 한국에서 불법체류하고 있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녀는 불법체류신분이면서도 강남에 5천만 원(한화) 보증금에 월세 25만원(한화)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가장집물도 구전하게 갖춰놓고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단속을 피하는 요령이 생겨 잡혀갈 걱정이 없고 또 기왕 한국에서 살 바엔 즐기고 살면서 뻗칠 때까지 뻗치는 것이고 잡히지만 않는다면 중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제3차 동포자진귀국지원프로그램이 있으면 갔다 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비자신청기간이 1년이면 너무 길어 갈 생각이 없고 6개월 이내면 고려해보겠다.”고 대답하였다. 사실 1년 비자신청기간에 중국에서 먹고 놀고 소비하는 돈이 적어도 천만 원(한화)이고 1년 동안 벌지 못한 것까지 따지면 앞뒤로 2천만 원(한화)을 손해 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거기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고 마작에 손을 대면 얼마를 까먹을지 모른다. 이런 주먹구구 때문에 2006년에 있은 “제2차 동포자진귀국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은 불법체류자들이 많았다. 이모 여인이 바로 그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대다수 조선족은 과거에는 과일을 사먹어도 인민폐와의 환율을 따지고 중국물가에 비하면서 손을 주춤하던 데로부터 최근에는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쩍하면 친척모임, 동창모임, 고향모임 등 여러 모임을 갖고 먹고 마시고 노래방까지 가서 마음껏 즐기고 있다. 실제로 대다수 재한조선족은 고향에 비해 현재 한국에 와있는 친척이나 동창들이 훨씬 더 많아 모임이 잦다. 또 방문취업제도에 의해 왕래가 자유로워짐에 따라 명절이면 중국에 가서 보내다가 오던 데로부터 지난 설에는 거꾸로 중국에 있는 자식들이 한국에 설 쇠러 오는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훈춘에서 온 원씨 부부는 설에 고향에 다녀오려고 항공티켓을 문의했더니 성수기라 왕복항공료가 1인당 100만원(한화) 가까이 되고 친인척들한테 줄 선물, 용돈, 명절소비까지 따져보니 적어도 500~600만원(한화)이 깨져야 하기에 아예 딸애를 한국에 오게 하여 설을 보내니 경제적이고 딸애가 한국구경을 하게 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 셈이라 매우 흡족해하고 있다.
1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댓글:  조회:5375  추천:61  2010-05-10
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출국인들 글 싣는 순서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연변여성(2010.5)’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현재 조선족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해 남아프리카나 브라질에까지 세계 각국에 진출해있다. 정확한 통계수자는 없지만 한국에만 40만 명, 미국과 일본에 각각 5만여 명, 기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라까지 합치면 대략 60여만 명의 조선족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만이 조금 안 되는 조선족이 60여만 명이나 해외에 진출했으니 이는 실로 굉장한 수치이다. 또 청도에만 1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니 중국 관내에 널려있는 조선족을 합치면 어림잡아 40여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내 조선족인구류동특징을 살펴보면 본래 주로 농경민으로 살아오던 조선족이 개혁개방을 맞아 상업민으로 전락한 것이며 따라서 조선족의 인구 대유동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 곧바로 한국이다. 청도의 실례를 보면 개혁개방 전에는 3,000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인관광객이 늘면서 조선족이 여행업에 따른 음식점과 유흥업소를 운영하게 되였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기업이 청도에 많이 진출함에 따라 조선족이 급속히 모여들었다. 한국기업이 많이 생기면 회사 내 여러 부서에 언어가 통하는 조선족의 일자리가 많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따라서 한국인학교가 생겨나게 되여 조선족의 일자리가 늘어나게 되였다. 10여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생활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는데 필요한 여러 업종에 역시 조선족이 많이 종사하고 있어 현재 10여만 명에 이르는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유동 중에 있는 조선족들의 운명은 각이하다. 필자의 사촌형은 리비아에 진출해 3년, 조선 금강산에서 현대 관광버스기사로 3년 있으면서 조금 모았다. 그 돈을 광서 북해 다단계판매에 다 밀어 넣는 바람에 쫄딱 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딸애가 서안교통대학을 졸업하고 광주 도요타회사에 근무하여 번 돈으로 아빠에게 42인승 버스를 사주었기에 청도 한국인학교에서 한국아이들의 등교와 퇴교를 책임지고 학교경비까지 맡아 8,000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 또 형수가 학교 구내식당에 근무하면서 부부 노임을 합치면 만원이 넘어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만약 한국인의 중국진출이 없었다면 사촌형부부는 재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필자의 친구인 곽씨는 사진작가였는데 1990년대 초반에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일찍 눈을 떠 연길에서 초창기에 노래방을 꾸려 번 돈을 갖고 1990년대 중반에 청도에 진출해 현재는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대형 음식점과 유흥업소를 꾸려 한다하는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대련, 위해, 연태, 상해, 북경, 천진, 광주 등 여러 도시들에서도 청도의 상황과 비슷하게 수만 명에 이르는 조선족이 한국기업, 한국인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고향에서 농민출신과 도시 밑바닥에 있는 사람 혹은 잘 나가지 못하거나 관내진출이 어렵고 또 관내진출에서 실패를 맛보았거나 아무튼 이래저래 돈벌이가 신통치 않은 조선족들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대량으로 코리안드림에 나서게 되였다. 그때 한국에 온 조선족은 공무, 상무, 관광, 투자, 친척방문, 위장결혼, 밀입국, 여권 위조, 변조 등 수단으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절대다수가 불법체류에 속했다. 하도 불법체류자가 급증하여 한국법무부에서 2002년과 2003년에 합법화시켜주었고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게 되여 신분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뒤 노무현정부가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동포자진귀국정책을 실시해 불법체류자를 대량 사면하였다. 당시 재입국을 둘러싸고 3년 체류를 허락하였다가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시일 내에는 입국 시 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다 한국에서의 소비, 중국내 가족의 생활비를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으므로 2년을 더 연장해주면 불법체류하지 않고 돈을 벌어 고향에 갈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부에 청원하여 2007년 3월 4일부터 5년 비자 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되었다. 동시에 한국어시험을 거쳐 5년 비자 방문취업제도를 병행하면서 무연고조선족들도 선후로 코리안드림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였고 이래저래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이 4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10    연변사람, 안쪽 사람 뭐가 다를까? 댓글:  조회:5141  추천:57  2010-04-27
연변사람, 안쪽 사람 뭐가 다를까? 글 제목부터 민감하다. 혹자는 김정룡이란 인간은 왜 바람 잦을 날 없이 민감한 문제들만 들 쑤시냐? 고 공격할 것이다. 각오가 되어 있다. 맞아 죽을 것을. 필자가 2006년 3월부터 연변조선족이 반성하자는 내용의 글 7편을 ‘연변여성’에 시리즈로 싣고 이삼년이 지난 후 사이버공간에 올렸더니 영광스럽게 두 번째 김문학이란 타이틀을 얻을 뻔했다. 아마 연변에서 이 글을 보고나면 또 나한테 몽둥이세례를 힘차게 갈겨 댈 것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인간은 자신이 나고 자란 환경에서만 맴돌면 인간세상이 다 그저 그렇거니 하고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장점만 내세우려하고 단점은 감추려 든다. 가령 누가 장점을 말해주면 좋다고 바지가 벗겨지는 줄 모르지만 일단 단점을 들추면 심한 알레르기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문제라는 것이다. 필자가 20년 전 연변일중 졸업반을 맡았을 때 성적이 하에 속하는 제자들에게 ‘공원다리나 건너려고 연변일중에 왔냐? 中專도 좋고 大專도 좋으니 되도록 안쪽 더 나아가서 산해관을 넘고 황하 장강을 건너라’고 교육시켰다. 중국조선족사회를 크게 두 가지 공동체로 나눠 볼 수 있다. 연변사람들이 연변을 제외한 나머지 산재지역의 조선족을 흔히 안쪽 사람으로 부른다. 즉 연변사람, 안쪽 사람. 선조들의 출신을 따져보면 연변사람은 주로 함경도이고, 장백현은 황해도와 평안도, 길림성 내 교하 서란 반석 매하구 및 남만 즉 요녕성 일대에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이고, 흑룡강성은 주로 경상도가 많다. 한반도의 지형을 보면 이남이 벌이 많고 경작지가 많은데 비해 이북은 산이 많고 경작지가 적다. 특히 함경도가 경작지가 적고 땅이 메마르고 척박하다. 1875년에 우리 조상들이 장백현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가 시작되었다는 역사자료가 있지만 초창기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은,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 특히 함경도 출신이 지금의 연변 땅에 많이 이주했다. 그 이유로서 여러 가지겠으나 함경도의 자연조건과 큰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생존해온 사람들은 자연스레 인심이 박하기 마련이다. 마치 일본인처럼 말이다. 무슨 말이냐?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살아온 함경도 사람들이 본래 인심이 박한데다 또 산이 많고 개간할 땅이 적은 연변 땅에 와서 삶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인심이 박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입에 풀칠이 어려운데 언제 인심을 베풀 여유가 있느냐? 말이다. 1977년에서 1978년에로 넘어가는 겨울 필자가 연길현 태양공사에 간 적이 있다. 그때 태양에서 목단강에 이사 간 청년이 놀러와 하는 얘기가 안쪽 사람들은 이쪽을 ‘연변깍쟁이’라 욕한다는 것이다. 당시 필자는 다 같은 조선 사람인데 왜 그러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장장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즉 연변사람이 깍쟁이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이 인간의 삶을 그렇게 살아가게끔 만들었다는 결론이다. 거꾸로 반도에서 상대적으로 자연조건이 여유로웠던 경상도출신이 또 중국에서 가장 크고 넓은 동북평원에 정착하여 땅을 많이 개간할 수 있어 연변사람에 비해 생활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변에서는 옹기종기 널려 있는 논을 알뜰살뜰 가꿔야 생존이 가능하므로 인간의 마음도 세심하고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흑룡강 사람들은 드넓은 벌판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여유가 있고 논도 그다지 알뜰하게 가꾸지 않고, 자세하게 말하자면 볏모내기를 연변처럼 알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논에다 볍씨를 이리저리 확 뿌리는 산종농사를 하다 보니 성격도 따라서 시원시원하게 형성되어 왔을 것이고 인심도 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인심이 박해지면 자연스레 잔머리를 굴리게 되어있다. 즉 자신의 그 어떤 단점을 감추려고 입이 앞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안쪽 사람들은 연변사람을 입만 반지르르하게 여물었다고 흉을 본다. 하여튼 연변사람의 이런저런 단점 때문에 다른 안쪽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흑룡강성 조선족은 연변사람과 혼사하면 일단 30점을 깎고 들어간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함경도출신인 연변사람들이 인심이 박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어려운 환경에서 삶을 개척하다 보니 생존력이 강한 장점이 있다. 이북에서 일등 신붓감으로 생존력이 강한 함경도 여성을 꼽듯이 연변여성들도 음식을 잘하고 바느질 잘하고 집 잘 거두고 남편을 잘 받들고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가는 장점이 있다. 이는 흑룡강성 조선족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 연변은 오래동안 안쪽 사람들한테 민족문화의 중심지로 동경을 받아왔다. 또한 연변사람을 이러컹저러쿵 흉 보던 안쪽 사람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아이들 교육 때문에 연길에 집 사고 이사간다. 노인들도 노년에 그래도 조선족이 모여 있는 곳에 살고 싶어 연변에 이사가는 것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자식이 있는 노인들도 노후를 생각해서 미리 위생이 깨끗한 연변의 여러 양로원을 돌아보고 있다. 연변사람이 자연생활환경이 어렵다 보니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겠으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정치에 붙어 살아가려는 경향이 심한 것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연변은 지리적 우세와 인구비례를 따져 조선족자치로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과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을 받들어 전반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면에서 중심역할을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자치주를 순수 민족발전에 기여하는 데 이용해 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자기네끼리 죽고 죽이는 못된 짓을 많이 해온 것은 정말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문화대혁명시기 필자의 부친이 주자파로 비판투쟁 받게 되었는데 한족들은 좌우지간 아무런 말이 없는데 같은 조선족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난리다. 양반처럼 어진 부친을 꼬투리 잡을 것이 없으니 어떤 집들에선 자기네 아들이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것마저 나의 아버지 탓이라고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또 어떤 자들은 빈농인 우리가문을 부농으로 만들려고 애쓴다든가 하여튼 실로 어처구니없이 대국혁명에 앞장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못된 짓거리를 많이 남겼다. 아마 그 시기 연변조선족사회의 상황이 거의 다 그러했을 것이다. 연변사람들이 대국혁명에 앞장서는 유전자가 강한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현재 한국에서 조선족의 삶과 상관없이 대한민국정치와 언론에 향해 마구 필을 흔드는 사람들을 보면 연변출신들이 많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지난 지 30년도 넘었건만 지금도 연변은 그 바람이 여전히 쌩쌩 불어치고 있는 것은 정말 유감이다. 환언하자면 안쪽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을 잊고 새로운 시기에 새롭게 발 맞춰 살아가려 하는데 비해 연변은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변사람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자신들(소수사람)을 조선족사회를 지켜내는 최후보루의 투사로 여기고 한국어가 어떻고 조선어가 어떻고 하면서 밖에 나간 사람들을 깔아뭉개려고 애쓰면서 결국에 가서는 자신들도 그 길을 걷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흑룡강성 친구들과 대화해 보면 연변사람을 가장 못 마땅해 하는 것이 곧 “우리 흑룡강에서는 타민족과 싸우면 모를 사람들도 지나다가 돌을 집어 들고 돕는데 당신네 연변은 조선족이 타민족한테 얻어터져도 숱한 사람이 구경만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 맡는 사실이다. 무시무시한 얘기를 걷어치우고 삶에 대한 화제로 넘어가자. 한국에서 생활해 보면 연변사람들이 여러모로 생존력이 강한 장점이 있으나 안쪽 사람들에 비해 마음씀씀이가 각박한 것은 사실이다. 오래전에 필자가 <연변내기와 연변사람>이란 글에서 지적했듯이 연변사람들이 현재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글에서 몇 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연변사람은 함경도사투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안쪽 사람에 비해 한국인들에게 일단 점수를 깎이고 있는 것도 부인 못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또 흑룡강성을 비롯해 안쪽 사람들은 이남에 선조의 고향이 많아 어릴 적부터 남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해온 이유로 한국에 대해 뭔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고 실제 이 땅에 온 이후에도 적응이 빠르고 쉬웠던 것이다. 이에 비해 연변사람은 선조고향이 주로 함경도이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해 아는 것이 없어 적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전에는 그냥 막연하게 ‘남조선’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주정착시기에 안쪽 사람들은 황금벼파도를 바라보며 가슴이 뿌듯해 ‘쾌지나 칭칭나네’ 노래를 불렀고, 토비와 왜놈의 수탈을 막으려고 아낙내들이 보초를 서면서 이순신장군이 의병술로 이용했듯이 ‘강강술래’놀이도 했고, 또 평소에 각설이 타령 같은 노래도 불러왔는데 이런 노래들의 본산지가 바로 경상도와 전라도이다. 해방 후에도 안쪽 사람들은 정치 그늘의 속박(문화대혁명시기를 빼고)이 없이 늘 고향을 그리며 살아왔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후손들한테 들려주었다. 이에 비해 연변사람들은 단순히 이북과의 그 어떤 막연한 감정만 갖고 있었을 뿐 이남에 대해선 제로 상태였다.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안쪽 사람은 단점이 없는가? 필자는 연변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단점에 대한 지적은 회피하고 싶다.
9    한국이 간자체를 거부하는 이유 댓글:  조회:5390  추천:54  2010-04-25
한국이 간자체를 거부하는 이유 1992년 8월 24일 중한수교 이후 양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인이 중국의 간자체 때문에 많은 불편을 겪고 있고 한국 내 간자체도입에 대한 시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이 왜 간자체를 거부하고 있을까? 내적·외적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내적 이유로서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의 한문은 중국한자를 그대로 베껴 옮겨온 것이 아니라 2천년 동안 수많은 자체 한자를 만들어 왔으며(한국 집문당 출판사에서 출간한 관련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한자 어휘가 70%를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에서의 사용의미와 다른 것들이 굉장히 많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간자체가 한자의 의미를 상징하는 상형문자와 회의문자의 뜻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흔히 사랑 ‘愛’를 예로 든다. 몇 년 전 필자는 대만00신문기자와 약자와 정자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기자 왈, “소탕이 아무리 좋다지만 소금이 빠진 국물을 상상해보라. 어쩐지 약자는 소금이 없는 소탕을 먹는 기분이다.” 여기서 이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한국인도 약자에 대해 정서적으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익과 좌익 개념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오른 손으로 밥 먹고 글쓰고 하면서 굳어진 관성에 의해 일상생활을 영위해 오던 것을 갑자기 왼손으로 바꾸면 습관적으로 정서적으로 매우 큰 불편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이미 한국인의 습관과 정서에 배인 정자를 버리고 약자를 도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외적 이유로는 현재 약자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싱가폴뿐인데 간화체(間化體) 본산지인 중국마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중화민국 초기 陸費逵, 錢玄同 등 유명 인사들이 번체자가 근대화실현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한자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움직임에 의해 신문화운동시기 노신이 처음으로 문언문을 타파하고 백화문으로《아큐정전》을 지어냈다. 신중국 들어 1956년에《사기》를 비롯한 二十五史의 문장부호를 완성하는 동시기에 간화체 방안을 마련했고 1964년에 총표를 발표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간화체가 실시된 45년이 지난 2009년 봄 북경에서 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 때 이미 물밑에서 논쟁이 많았던 間·繁 문제를 정협 위원인 潘慶林이 정식으로 ‘앞으로 10년 안에 간화체를 버리고 전통번체자를 회복하자’는 건의를 수면 위로 제안했다. 한 달이 되기 바쁘게 4월 8일 중국사회과학원 인문사철학부 산하 언어연구소의 주최로 간·번 문제를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중국사회과학원이 나선다는 것은 간·번 문제가 그만큼 의미 있고 가치가 크다는 증거이다. 물론 간·번 문제가 너무 복잡한 사안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한 번의 포럼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서 장기적인 논쟁을 거쳐 해결될 사건이므로 현재 계속 논의 중에 있는 상황이다. 간화체 본산지인 중국마저 번체자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마당에 만약 한국이 가볍게 간화체를 도입했다간 또 다시 번체자로 돌아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벌어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대만도 현재 간·번 문제에 있어서 대륙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자체약자를 만들어 사용해오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간·번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일본도 중국의 간자체를 도입하라.”고 발언하는 사람들은 뭘 좀 알고나 입을 열었으면 좋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이 간자체를 거부하는 데는 내적·외적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 쑤어놓은 팥죽에 왜 곰방술을 들지 않느냐고 가볍게 떠들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8    한자논란과 만주논란 댓글:  조회:4737  추천:62  2010-04-24
한자논란과 만주논란 수년 전에 비해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이 글 쓰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며 이는 조선족사회발전과 변화에 좋은 일이다. 따라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니 반한국적 내용을 담은 글을 제외하고 어떤 글도 쓸 수 있다(지면이 아닌 사이버공간을 이용하는 것을 뜻함). 하지만 우리 스스로 앉을 자리 설 자리를 봐 가며 글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정치는 아무나 하나?> 이는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의 발언이고 필자는 이에 공감한다. 다시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한국에서 글을 쓰되 조선족의 이익에 관련된 내용이거나 기타 삶의 체험 혹은 그 어떤 분야의 지식을 담은 글을 쓰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 조선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한국정부거나 언론 나아가서 한국정치에 향해 감 놔라 밤 놔라는 식의 글들은 조금 도에 맞지 않은 것 같다. 왜냐? 조선족은 필경 중국공민이지 한국인이 아니다. 개별적인 조선족이 고국에 대한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오는 글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신분증이 있는 자기 나라에 대한 정치와 언론엔 끽 소리 한마디 못하면서 신분증이 없는 대한민국에 쓴 소리 한다면 스스로 앉을 자리 설 자리 모르는 족속으로 속보이게 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전제가 하나 있다. 만약 한국에서 석·박사 공부하는 유학생이 한국정치와 언론에 관심 있게 연구하고 그러한 글들을 논문으로 쓴다면 별개의 사항이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얘기해보자. 한국 언론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추측보도를 석 달 열흘 하던 삼년 십 개월 떠들던 우리 조선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언론이 신용을 잃어도 한국국민에게 잃는 것이지 결코 우리 조선족한테 해가 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음 중국경제가 급상승함에 따라 한국 내에서 중국어 배우는 열풍이 불고 있는데 현재 일본어를 제체고 제이 외국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따라서 오랫동안 찬밥신세였던 한문도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한문은 여전히 옛날 번체자를 그대로 배우고 쓰고 있다. 한국의 한문은 대략 2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문본산지인 중국에 없는 한자와 한자 어휘를 많이 만들어왔다. 예를 들어 한국의 한문에 ‘褓負商’이란 것이 있는데 ‘褓負’는 중국어에 없다. ‘易地思之’란 한국의 한자 어휘는 중국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野壇法席’ ‘理判事判’은 우리 일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어 왔으나 중국에서는 단지 불교용어일 뿐이다. 때문에 한국의 한문을 단순하게 중국 것을 베껴 옮겨다 사용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큰 오류이다. 현재 한국이 간자체 아닌 번체자를 고집하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많다. 전통한문이 번거롭고 복잡하니 간자체를 도입할 것이냐? 아니면 어렵더라도 전통이 오랜 번체자를 고집할 것이냐? 이는 한국교육부와 학계에서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지 결코 우리 조선족이 나설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만약 연변대학 혹은 중앙민족대학의 조선족 권위 교수 분께서 학술적으로 이 문제를 다룬다면 별개의 사항일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한테 간자체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국에 대한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오는 발상인지? 아니면 자기네들이 번체자를 모르겠으니 이렇게 건의하는 것인지?(한국 분들은 이렇게 여기고 코웃음 짓고 있다.)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서울대학 석·박사 유학생을 비롯한 40여 만 명에 이르는 재한조선족이 번체자로 <삼국유사> 원문을 읽을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그다음 요즘 이른바 ‘만주논란’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지명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부행정에 의해 개칭된 사례가 많다. 만약 정부행정의 결정에 의해 법적으로 개칭된 지명이라면 현재 명칭을 존중하는 것이 십분 옳은 일이다. 하지만 외국인의 경우 타국의 어떤 지명은 법적 개칭이 무시되고 그냥 습관적으로 정서적으로 옛날 명칭을 그대로 부르는 사례가 허다하다. 본 글 주제로 되는 ‘만주’를 말하자면 일제 때 우리선조들에게 있어서 만주는 땅을 개간하여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는 희망과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칠 수 있는 희망의 땅이었다. 1945년 만주가 해방될 당시 조선인이 무려 210만 명이었으며 지금의 동북삼성과 내몽골일대에서 개간한 땅이 한반도 두 배나 된다. 조국이 광복을 맞자 절반을 넘는 110만 명이 만주를 떠나 고향에 돌아갔고 그들은 다수가 양반가문이 아니면 지식인이었다. 그 땅에 남은 조선인은 다수가 고향에 돌아가면 엉덩이를 붙일 땅이 없고 입에 풀칠하기 힘든 농부들이었다. 고향에 돌아간 110만 명의 조선인이 만주시절에 그 땅에서 애환과 희열을 묻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만주는 우리선조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역사의 한 폐지로 남아 있다. 그런 고로 해방 후 중국이 만주를 없애고 동복삼성으로 행정적으로 개칭했지만 현재 한국인은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정서적으로 ‘만주’라 부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물론 냉전시기 40여 년 동안 중한교류가 막혀 있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현재 한국인이 그 어떤 정치목적으로 간도나 독도와 같은 차원에서 만주를 여긴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렇더라도 극히 소수자들의 소행일 것이고 다수는 그냥 습관적으로 정서적으로 만주라 부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조선족이 굳이 한국인한테 만주를 없애고 우리와 같이 동북삼성으로 불러주시오 하는 요구는 조금 억지가 아닐까? 10년 전에 중국 코미디 프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이 있었다. 중국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옛날 황금이 많이 났던 곳이라는 뜻으로 ‘舊金山’이라 부른다. 근데 개혁개방 후 한 중국인이 미국에 다녀왔는데 친구들이 “너 舊金山에 다녀왔는가?” 물으니 그자가 먼 산을 쳐다보며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다가 “아! 그 샌프란시스코 말이지?” 하면서 거들먹거린다. 뜻인즉 ‘舊金山’이라 부르면 매우 촌스럽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금도 샌프란시스코를 영어발음을 따르지 않고 ‘舊金山’이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 습관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렇게 불러왔기 때문이다. ‘舊金山’과 ‘만주’는 물론 별개의 사항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약 중국이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제일로 된다면 그때 가서 한국인이 만주라는 명칭을 촌스럽게 여기고 굳이 우리 조선족의 권유가 없이도 동북삼성이라 자연스레 부르게 되지 않을까?
7    중국문명의 특색은 박소하고 실질적이다 댓글:  조회:4335  추천:25  2010-04-16
중국문명의 특색은 박소하고 실질적이다.      당대 유명한 철학자인 당군의(唐君毅) 선생은 중국문명의 특색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중화민족의 생명은 원래 소박하며 실질적이며 화려하지 않다. 그러므로 희랍민족이 처음부터 아름답고 화려하고 처량하고 요염한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고, 또 유태민족이 계속 나라를 잃고 유랑하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 끝도 끝도 없는 들판, 바람에 휩쓸리는 풀밭 위에 소양떼가 보이는” 그러한 땅 위에서 구세주와 천국의 내림(來臨)을 기다리는 것과도 다르고, 또 토착민을 정복하고 인도문화를 창조한 아리안민족이  백성의 질고를 알지 못하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일을 중시했던 것과도 다르다. 고대중화민족의 생명은 대저 먼저 물과 흙을 다스리고 산과 못을 갈라내어 지상의 노동자로서 또 대지의 아들로서 자기를 먼저 인식하였다. 그런 후에 종족을 모으고 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전설 중의 복희, 선농, 황제(黃帝) 등과 같은 성왕들은 민생일용의 기물을 발명한 사람들일 뿐이다. ‘哲’이란 한 글자는 성왕이 사회정치의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먼저 쓰였고 그래서 철왕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 중국철학의 지혜는 중국의 고대인들이 ‘군체생활의 존재’에 대한 책임부담 하에서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삼가는 정감 속에서 하나 둘씩 생기하여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철학사상은 희랍철학사상이 식민지의 실제 사회정치(노예계급)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 철인들이 우러러 보고 굽어보는 기운이 가볍고 영묘하여 다자다채한 것과도 다르고, 또 인도의 베다경이나 우파니샤드의 사상이 원래 제사를 주도하는 승려들이 눈을 감고 명상하는 그윽하고 깊은 현원(玄遠)한 경지에서 생겨나 여몽여취한 것과도 다르고, 또한 유태민족사상이 그 민족의 선지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반성하고 저주하며 오는 것을 희구하고 근심하는 생각의 굴림 속에서 생겨나 여원여모(如怨如慕)한 것과도 다르다. 그러나 이 중화민족의 철학지혜는 이 민족의 사회정치문화가 총체적으로 같이 움직여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산물이라 가히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니, 그 생각의 미치는 바는 항상 그 행동의 미치는 범위내에서 한발자욱 한발자욱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소박하며 실질적이며 화려하지 않는 생명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탄생한 것이며 “해와 달의 빛남이 매일 매일 계속되는 것과 서로 빛나 비치는 철학지혜인 것이다.”     츠우 자이 박사는 “중국의 철학은 물론 예술이나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제적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매우 단순·소박하여 인간진실의 정곡을 꿰뚫는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적이다. 다시말해서 중국문명의 특유한 성격이다.”고 지적했다.  중국인의 인식 속에 상제라는 개념은 있지만 유태인의 여호와처럼 질투하고 분노하고 나만 섬기라고 공갈하고 협박하는 신이 아니라 그저 그냥 아득한 존재일 뿐이며, 중국인은 메시아나 구세주에 나의 운명을 거는 종교사상이 없다.  공자는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 而遠之).”고 했다. 뜻인즉 이 인간세상의 너머에 신이 아득히 존재한다고 믿지 말고 현실에 안주하라는 것이다. 중국인은 공자의 말씀을 잘 들어서인지 하여튼 현실성이 강하고 실리주의를 따진다.  중국인은 ‘신’이란 믿으면 있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은 미신을 많이 믿으면서도 각종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액막이로 토방법을 많이 사용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니 따라 할 뿐이지 누가 효과가 있고 없고를 아느냐!”고 말한다.  아무튼 중국인은 신, 천국, 내세, 구세주 등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이 ‘나만 믿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다.  막스·베버가 <<프로탄스테드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발전한 것은 신의 소망에 따라 미래에 투자하는 프로탄스테드의 윤리에 의한 것이고,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유교의 현실주의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중국인은 이 세상 너머에 대한 동경이 없이 돈이 있으면 주색에 탕진해버리다 보니 미래에 대한 투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막스·베버의 이 논리에 대해 많은 찬반논란이 있었다. 필자는 막스·베버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으면서도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를 한두 마디로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중국문명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다뤄야 만이 정확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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