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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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한류의 문화기원(2) 댓글:  조회:6396  추천:1  2011-08-03
중국동포사회연구소 김정룡 소장은 한류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사문화시각으로《한류의 우와 열》, 《신바람과 한강기적》등 장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본지는 그의 한류문화에 관한 글《한류의 문화기원》을 3부로 나눠 연재한다.   한반도에서도 바람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삼국유사》에 신라불교를 서술함에 있어서 풍교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고유토착신앙 가운데서 풍교가 으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삼국유사》에 신라의 불교를 논하는 장절에서 ‘석씨풍교(釋氏風敎)’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곧 불교를 의미한다. 신라인들은 왜 불교를 그냥 불교라 하지 않고 ‘석씨풍교’라 했을까?   신라인들은 바람을 우주의 본체라 여기고 풍교신앙이 뿌리 깊었다. 따라서 모든 외래종교를 풍교의 일종일 뿐이라 여겼다고 볼 수 있다.《삼국유사》에 ‘예의풍교, 불류우상(禮儀風敎, 不類于常)’란 구절이 있는데, ‘禮儀風敎’는 곧 공자교 즉 유교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신라인들은 유교든 불교든 모두 풍교이며 다만 그 구분을 말하고자 ‘석씨풍교’ ‘예의풍교’라 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왕은 법흥왕(법은 불교, 흥은 발흥하고 흥기시킨다는 뜻으로서 불교를 발흥하고 흥기시킨 왕이란 의미)이며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그다음의 왕을 진흥왕이라 했다. 그런데 진흥왕은 천성이 풍류(風味)적이어서 젊고 예쁜 낭자를 원화로 삼고 국선으로 받들었으며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선행시켜야 한다(幇興國, 須先風月道)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진흥왕은 ‘석씨풍교’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있어서 재래의 전통 풍교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고유토착신앙인 풍교와 풍월도를 불교와 아주 조화롭게 접목시켜 화랑도를 흥기시켜 나라를 일으켰다. 화랑도는 신라인의 정신지주이자 넋이었다.   《삼국유사》에서 화랑도의 명부를 ‘풍류황권(風流黃券)’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를 풍류도의 산물이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화랑도가 풍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최치원은 화랑역사를 회고하면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일컬으며 그 뿌리는 선사(仙史)에 있다.”고 했다. 선사란 곧 풍교의 역사이며 그것을 또한 풍류도로 표현했다.   연세대 유동식 교수는《풍류도와 한국인의 종교사상》에서 “풍류도는 하나의 종교라 불수는 없지만 한국인의 신앙사상을 강력하게 지배해왔으며 아울러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멋’이다.”고 지적하였다.   필자는 한국인이 흔히 잘 사용하는 낱말 ‘맛’과 ‘판’ 및 ‘넋’도 역시 풍류도문화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는 저서《추한 한국인》에서 “멋이란 낱말은 중국어와 일본어에는 없고 유일하게 한국인만 사용하는 어휘이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그의 이 한마디 지적에서 큰 힌트를 얻었다. 즉 필자는 중한일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멋이란 낱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해보았으나 대충 의역은 될 수 있으나 완벽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멋이란 낱말이야말로 한민족의 민족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어휘이다.’ 이것이 곧 나의 결론이었다. 어떤 한국학자 분은 ‘멋’이 곧 ‘맛’이고 ‘맛’이 곧 ‘멋’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필자는 ‘맛’이란 낱말에 대해서 연구해본 결과 ‘멋’과 마찬가지로 역시 한민족만이 사용하는 특수용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맛’에 해당되는 ‘아지(味)’, ‘워이따오(味道)’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말 맛의 뜻을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한다.   또 노래판, 춤판, 도박판, 놀음판, 술판, 오락판, 싸움판, 난장판, 개판, 심지어 X판을 포함해 한민족은 ‘판’이란 낱말을 풍부하고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판’을 경우에 따라 ‘場’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한민족이 말하는 ‘판’의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판을 깨다.’ ‘판이 깨지다.’ ‘판이 사라졌다.’ ‘판을 유지하다.’등등의 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쉽지 않다.   한국고전음악에 ‘판소리’라는 것이 있는데 최근 중국문학작품을 보면 ‘盤瑟里’라고 중국어로 옮겼는데 이는 음역에 따라 억지공사로 번역한 것일 뿐 한민족의 진정한 생활정서가 배어 있는 ‘판소리’ 의미가 아예 전달되지 않는다. ‘판소리’가 중국음악과 일본음악에 비해 독특한 한민족의 특성을 반영하는 민족음악이라 할 때 우리는 한민족이 얼마나 ‘판’의 문화를 중시해왔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저 ‘판’이란 무엇인가? ‘판’이란 낱말은 분명히 어떤 행위의 장을 의미하지만 중국어와 일본어에서 말하는 ‘場’과는 엄연하게 구분된다. 정확히 말해서 ‘판’은 바람이 몰고 오는 일종 유형무형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판의 문화’가 풍류도에서 유래되었음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멋’ ‘맛’ ‘판’이란 낱말이 바람문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며 이는 곧 한민족의 풍류도의 정수이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규정하는 말이 곧 ‘멋’이라고 지적했다. 이 말을 바꿔하면 ‘멋’은 곧 풍류도의 기본정신이며, 풍류도의 기본사상이며, 풍류도의 기본 넋이다. 풍류도가 고대한민족의 기본종교사상이었다면 넋은 곧 ‘멋’이며 ‘멋’은 곧 한민족의 넋이다.   ‘멋’을 한민족의 넋이라 말하는 것은 한민족은 수천 년 동안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내성외왕이란 말은 본래 에서 유래되었다. 장자는 인간의 이상적 경지가 곧 내성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중국유교비평가들이 지적한바와 같이 중국인은 내성에 대한 추구에만 치중해왔을 뿐 외왕을 홀시해왔기 때문에 중국인은 외모가 초라해보이게 되었다. 중국인은 확실히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이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도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은 중국인에 비해 나으나 한국인에 비해 조금 떨어진다.  
24    한류의 문화기원(1) 댓글:  조회:6527  추천:1  2011-08-03
편집자 주:  중국동포사회연구소 김정룡 소장은 한류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사문화시각으로《한류의 우와 열》, 《신바람과 한강기적》등 장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본지는 그의 한류문화에 관한 글《한류의 문화기원》을 3부로 나눠 연재한다.     한반도는 일본과 함께 한자와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명권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은 신도라는 자체종교가 있고 따라서 일본인의 인간타입과 민족특징은 신도적이며 신도가 일본인의 영혼과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데 비해 한반도는 자체종교가 없는데 무엇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케 하였을까? 다시 말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해온 기본요소는 무엇이며 한반도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쳐왔을까? 이에 관해 한국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00년 전 세계적인 석학인 중국인 고홍명은 그의 저서 《중국인의 정신》을 통해 “한 문명이 그 문명을 안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케 하고 정신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내놓아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고홍명의 문명과 인간타입관계 이론에 대해 흥미를 갖고 한반도 공동체 인간타입의 형성기원 및 민족특징에 관해 살펴보기로 결심하고 지난 수년간 이에 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려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중국에서 문화혁명 때 불륜을 저지른 남녀에게 새끼줄 양 끝에 헌 신발을 달아놓고 그것을 목에 걸게 하고 대중비판을 하였다. 그런데 비판대회에서 한족들은 불륜을 저지른 남녀를 “따따오까아오퍼쎄!(打倒搞破靴:헌 신발을 건드린 자를 타도하자!)”고 외쳤고, 조선족은 “비람피우는 자들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그러니까 불륜이란 한 가지 같은 사실, 같은 포인트를 한족은 ‘헌 신발’로 표현하는데 비해 조선족은 ‘바람’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상의 차이가 곧 두 민족 간의 문화차이를 말해주는 좋은 증거이다.   그 후부터 필자는 우리민족이 일상생활에서 한족에 비해 ‘바람’이란 낱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말(네가 오는 바람에 내가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럴 경우 타민족은 바람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에도 ‘바람’이요, 무엇을 희망하는 뜻에도 ‘바람’으로 표현한다. 1980년대 이북사람들과 접촉해 보았는데 그들도 ‘바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1990년부터 한국인을 접촉해보니 역시 만찬가지였고 특히 한국가요에 ‘바람’이란 어휘가 굉장히 많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의 말 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논리에 따르면 우리 한민족이 일상생활과 가요에 ‘바람’이란 낱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필시 역사적인 문화와 연관성이 있을 것이고,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언어표현은 과거역사문화의 관성에서 온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신라계통의 경상도사람들이 집권하고 경상도 천하를 이루게 되자 유행가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휘가 ‘바람’이라는, 이 한 마디라는 사실은 결코 단지 우연한 잠시적 유행현상으로만 간주할 수가 없다. 국제적으로 유행가요를 분석해보아도 바람이라는 단어는 특히 우리나라가요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을 무의식적으로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신앙의 메모리체계의 작동으로 보아야 하며 ‘바람’이야말로 잃어버린 우리자신의 ‘야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현상을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 즉 한 1500년 정도의 시간단위는 좀 거시적 혜안을 갖게 되면 몇 십 년 정도의 압축된 연속성의 체계로 간주할 수도 있고 해야 하는 것이다.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이나, 최치원의 난랑비서의 바람이나 화랑·미륵의 바람이나《시경》의 바람이나 모두 한 가지 ‘바람’의 연속된 아키타입일 뿐이다.   중국에서는 바람에 연관된 원시종교사상을 개괄해 ‘풍교’라 지칭하고 바람(기)을 우주의 본체라 인식하고 바람의 흐름에 ‘도(道)’가 있다는 이른바 풍류도를 발명하였으며, 이 풍류도는 한대(漢代)부터 하나의 고등종교인 도교로 승화되었다. 이른바 도교란 중국모계씨족사회에서 자발적인 여성숭배를 특징으로 하는 원시종교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고로한 무사(巫史)문화, 귀신숭배, 민속전통, 여러 방기술수(方技術手)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임과 아울러 도가의 황로지학을 기치와 이론지주로 하고 유불도의 음양, 신선제가학설 중의 수련사상, 쿵푸(工夫)경계, 신앙성분과 윤리관념을 포섭하여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구하고 장생하고 신선이 되며, 따라서 몸과 도의 합진(合眞)을 목적으로 신학화, 방술화한 다차원의 종교이다.   도교는 중국의학, 과학, 예술, 무술, 방중술, 수련, 장생술,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의 발견과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다. 임어당 선생은 그의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본질적으로는 도교를 받들어왔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풍류도가 신도로 변이되고 발전해왔다. 200년 전 사대국학자에 속하는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는《고사기》와《일본서기》를 연구하고 나서 “일본역사는 하→상에로 흐르는 헌신과 충성 및 봉사의 구조로 흘러왔고, 이것이 곧 일본인의 신도의 기본정신이라고 말했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저서《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일본인의 하→상에로 흐르는 충성과 헌신과 봉사의 구조는 카미(神)의 길이며 바람의 길이다.”라고 지적했다.  
23    동포관리 전담부처 설립이 필요하다 댓글:  조회:6177  추천:7  2011-07-02
법무부는 10년 이상 불법체류와 10년 미만 불체 중 인도적사유가 있어 구제받은 동포들(55~63세)에게 H-2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가 ‘이들은 국내 체류 5년 이상 자’라는 이유로 취업 교육대상에서 제외하고 취업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는 기사가 본지 200호에 발표된 이후 동포사회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동포관련 여러 신문과 한국연합뉴스 등 묵직한 언론들이 잇따라 법무부와 노동부의 불협화음으로 동포들만 피해보고 있는 사실을 꼬집었다. 지난 10년 동안 재한중국동포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힘을 기울인 동북아신문은 6월 15일자로 는 글을 머리기사로 다뤘다. 여러 언론의 기사요지를 귀납하여 말하자면 법무부는 중국동포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비해 고용노동부는 중국조선족을 재외동포로 보지 않고 순수 외국인인력으로 취급하는데서 이번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고용노동부는 법무부가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존심 싸움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중국동포정책을 놓고 법무부와 고용노동부가 엇박자를 치고 있고 고용노동부는 법무부에 강력한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같은 ‘용마루’를 쓰고 사는 법무부와 고용노동부의 엇박자로 인해 고충을 겪고 있는 동포들의 사례를 통해 한국정부의 동포관리부실문제가 야기되는 원인을 지적하고자 한다. 중국은 중앙정부인 국무원산하에 해외화교 및 귀환화교를 전담 관리하는 화교사무실(챠오판:僑辦이라 간칭 함)이란 정부부처가 있고 그 직속기구로서 각 성 및 현·시급까지 하나의 위·판·국(委辦局) 부서로 설치되어 있다. 1960년대 말기 이북이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아 3만 명이 넘는 재조화교(在朝華僑)가 조국에 밀려왔는데 중앙정부화교사무실의 지시에 의해 각 현·시급 화교사무실에서 발 빠르게 적극 조치를 취해 전부 안치했다. 이들 화교후대들은 현재까지도 취업에서 우대를 받고 대학입시에서 20점이나 가산점수를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해외화교가 중국에 관광 오면 비행기티켓요금과 호텔숙박요금 및 여행사의 종합서비스요금을 10% 할인하라는 중앙정부의 지시가 있었다. 해외화교가 조국에 투자할 경우 세제혜택을 주는 등 여러모로 화교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한국은 4,800만 명 인구에 해외동포가 70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비례가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에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없다. 재외동포재단은 비정부기구로서 동포정책제정과 국내체류관리는 할 수 없다. 이런 일을 법무부가 하고 있는데 법무부도 관리전담부처가 아니어서 고용노동부가 심기가 불편하면 태클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이미 재한동포관리문제가 대두되고 외국인 백만 명 시대에 접어들자 이민청설립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이민청이 설립된다면 재한동포와 외국인관리는 수월해질 수 있으나 해외동포관리는 여전히 손을 뻗힐 수 없을 것이며 이민청은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아니어서 700만 명의 재외동포를 아우르는 기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도 중국의 화교사무실에 해당하는 동포관리전담부처를 설립하여 재외동포정책을 제정하고 재한동포관리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설립된다면 할 일이 많고도 많을 것이다. 중국심천라호부두에서 홍콩을 건너가는데 입국심사대에 전문귀향통로를 설치하여 홍콩시민이 대륙에 나들이하는 것을 관리하고 있다. 인천공항은 국제선에 내국인과 외국인의 통로가 있고 동포는 외국인에 속한다. 하루에 수백 명 나들이 하는 조선족과 재외동포들에게 귀향통로를 따로 설치해준다면 그들은 대한민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고국의 정을 듬뿍 느끼게 될 것이다. 돈의 투자가 필요 없이 머리만 조금 쓰면 쉽게 해결할 일이지만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없는 탓에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큰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22    아리랑의 수난 댓글:  조회:10326  추천:7  2011-07-01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대표적 민요이다. 아리랑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흔히 아리랑을 고개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아리랑은 고개이름이 아니라 가슴이 아리다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쓰리랑은 가슴이 쓰리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아리랑 쓰리랑은 가슴이 아리고 쓰리다는 말이다. 왜 아리고 쓰리다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 되었을까?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몇 번이 모자라는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 너무나도 빈번하게 외침을 받다 보니 항상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심리로 인해 늘 불안한 삶을 살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무사한가?’가 우리민족의 인사말이 되어왔다. 중국인이 ‘밥을 먹었느냐?’가 인사말이 된 것에 비하면 참으로 우리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조 518년을 통해 양반과 상놈의 문화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몹시 고달파졌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민족을 한(恨)의 민족으로 만들었다. 일제치하 시대인 1930·40년대 만들어진 가요 절대다수가 가사가 슬프고 멜로디가 느린 것이 특징이며, 이는 곧 우리민족의 한 많은 정서를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수많은 노래 중에서 우리민족의 비참한 역사 및 이로 인해 한의 민족이 된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가요가 바로 아리랑이다. 이런 맥락에 의해 한국에는 아리랑가요 대표적인 정선아리랑 외에 진도아리랑, 홀로아리랑, 울산아리랑 등 수십 가지가 있다. 해외에 이주한 우리민족도 ‘전통아리랑’ 정서를 갖고 있었고 타향에서 정착하는 과정에 또 수많은 한이 싸이게 되었다. 이를테면 해외동포 700만 명 중 고국전통문화를 가장 잘 보존해온 조선족은 만주이주 초창기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하느라 고생과 고통이 가슴을 짓눌러 왔으며 한의 역사가 계속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 한의 정서가 담긴 아리랑을 비롯한 전통가요를 부르며 고달픈 맘을 달래 오곤 하였다. 신중국 건립 후 소수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하라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의해 조선족은 전통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고 새로운 민족정서를 반영하는 가요도 많이 창작하게 되었다. 아울러 전통 민요를 조선족의 실생활을 토대로 새로운 연변아리랑을 창작해냈다. 중국56개 민족 중 조선족은 가장 능가선무(能歌善舞)한 민족으로 소문나 있다. 따라서 조선족의 농악무는 2009년 이미 중국무형문화재에 등록이 되었고 제3차 중국무형문화재등록에 조선족 씨름, 회혼례, 가야금, 판소리와 함께 연변아리랑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 6월 21일 길림신문을 비롯한 언론이 이 소식을 보도하자 이튿날인 6월 22일 한국의 지상파방송 3사와 조·중·동을 포함해 수많은 언론들이 떠들었다. 그런데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에 “중국이 아리랑을 약탈했다”는 주장이 있어 중국정부와 조선족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아리랑은 한국만의 자산이 아니라 전체 백의민족의 공동소유이다. 쉽게 말해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소유할 자격이 있다. 조선족의 경우 거주국의 공민으로서 자신들의 문화가 국가무형문화재에 등록되는 것은 영광이며 고국인 한국은 이를 마땅히 지지하야 할 입장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 언론이 왜 약탈을 들먹이며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수천 년 동안 외침을 받아온 피해의식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전체 백의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아리랑이 한국 언론에 의해 또 한 번 수난당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21    천년고도경주의 아쉬움 댓글:  조회:6274  추천:21  2011-06-16
천년고도경주의 아쉬움     관광은 유쾌하고 재미있고 소득이 있어야한다. 이를 논하는 기준은 각자 나름대로 주관의 느낌에 달려 있으나 객관적으로 식(食), 주(住), 행(行), 유(遊), 구(購), 오(娛) 등 여섯 가지 요소를 갖고 평가한다.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있듯이 관광의 첫 번째 요소는 식(食:먹는 것)이다. 관광에 있어서 식은 당지전통음식을 먹어보는 것이 필수 코스이다. 필자는 며칠 전 중국손님 한 분을 모시고 2박3일로 천년고도경주에 다녀왔다. 첫날 저녁 19:30 경주에 도착해 마침 만찬을 먹을 시간 때였다. 경주시 고속터미널 부근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밥 먹으러 거리에 나섰다. 전주비빔밥, 춘천닭갈비, 수원왕갈비 하는 식으로 경주의 지방특색음식을 이리보고 저리 살펴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늦은 시간인데도 천마여행사사무실이 불이 켜져 있어 방문하여 직원에게 물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경주는 특색음식이 없다고 말한다. 이튿날 가이드한테 물으니 대답은 여전히 없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타지에서 친구들이 경주에 오면 뭘 대접해야 하는 것이 걱정거리란다. 욕은 듣는 자가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필자가 천년고도에 지방을 대표하는 음식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하니 가이드는 가볍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주(住)는 어느 도시를 가나 고급호텔부터 시작해 민박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레벨로 갖춰져 있어 고객이 수요에 따라 고르면 그만이기 때문에 현대관광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행(行)도 어디를 가나 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고 교통수단이 잘 구비되어 있어 문제가 없다. 다만 관광코스시간안배만 잘하면 행에 불편이 없다. 관광에 있어서 유(遊)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유(遊)는 구경이다. 경(景)은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으로 나눈다. 자연경관은 말 그대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해준 자연경치이고 인문경관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건축물 혹은 고물이다. 자연경관은 나름대로 특이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인문경관은 역사문화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관광객의 눈길을 끌어야 한다. 중국의 계림산수나 운남의 시쐉빤나(西双版納)가 자연경관이고 만리장성과 자금성 및 서안의 병마용과 비림 등은 인문경관에 속한다. 한국의 경우 제주도가 자연경관이고 천년고도의 경주는 인문경관이다. 중국 서안에 가면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도중 도시성벽이 한눈에 안겨와 고도라는 느낌이 확 안겨온다. 병마용과 진시황능묘, 비림, 화청지 등 관광지를 유람하면 진시황이 떠오르고, 당태종이 보이는 듯하고, 양귀비를 상상하게 된다.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구경하면 2천 년 전 진시황의 스케일이 떠오르고 자금성을 돌아보면 명·청역사가 회억된다. 리차드·닉슨이 1972년 북경을 방문했을 때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보고 “중화민족의 깊이와 넓이를 알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고도라면 역사적인 숨결이 살아 있어야 한다. 유럽에 가도 신전이나 궁전이 바로 고도를 증명하며 아울러 그 민족의 역사를 증명한다. 경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웠고 935년 제56대 경순왕이 왕건에게 종묘와 사직을 바칠 때까지 8년이 부족한 천년의 고도이다. 물리적인 역사는 분명하지만 오늘날 관광객이 그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유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마총, 첨성대, 안압지, 김유신장군묘, 분황사, 국립박물관, 불국사, 석굴암 등이 경주의 관광코스인데 다 구경하고 나서 천년의 고도가 살아 숨 쉬는 것을 피부로 확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황룡사가 살아 있다면, 만약 옛 신라궁궐이 잔존해 있다면 그나마 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약소민족으로서 천 번에 이르는 외침에 의해 고대문물이 회손 되고 약탈당하는 뼈아픈 역사를 겪어왔다. 경주도 이와 같은 역사맥락에 의해 천년고도가 숨이 끊겼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구(購)도 관광내용 중 중요한 요소이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먹고 나면 없어지기 때문에 남는 것이 없다. 관광하여 물리적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특산품이나 기념품을 구입하여 보존하거나 타인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현대관광은 코스요금을 줄이고 고객의 쇼핑으로 이익을 남기는 장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중국관광은 고객쇼핑이 지나쳐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어찌되었든 이에 의존해 외화를 척척 벌어들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관광은 서울명동에서 화장품과 의류쇼핑이 잘되고 있는 외에 기타 구(購)가 활성화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관광의 경우 구(購)가 말이 아니게 죽어 있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경주시내에 경주빵가게가 백여 개가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거리마다에 물론이고 관광지마다 경주빵가게가 다닥다닥하게 줄지어 있다. 이것이 경주관광에 있어서 유일한 쇼핑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빵이 경주의 대표브랜드인 것은 좋지만 먹고 나면 사라져 버려 기념으로 남길 수가 없다. 천년고도로서 옛날 신라를 알리는 특산품이나 기념품이 없다는 것은 정말 유감이다. 오(娛)는 오락이다. 태국에 가면 전통태국무술을 볼 수 있고 트렌스젠더(人妖)의 문예공연을 관람할 수 있고 여성생식기기공표현을 관광코스로 지정하여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중국에 가면 서커스를 보고 발안마를 받는 코스도 있는데 이는 관광에 있어서 오락이다. 오락코스를 만드는 것은 고객의 호주머니 돈을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손님이 즐거우면 돈 파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천년고도의 경주는 오락이 전무하여 관광이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1993년 필자가 태국관광을 다녀왔다. 사실 태국은 자연경관이나 인문경관이 별로다. 그런데도 5박6일 관광코스를 만들고 식·주·행·유·구·오가 유기적으로 잘 구비되어 손님을 즐겁게 한다. 경주는 천년고도이고 태국에 비해 볼거리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구·오 등 관광의 주요 삼대요소가 부실해 국제관광객 유치를 활발하게 진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중국동포타운신문 201호
20    차이나타운이 조선족에게 미친 영향 댓글:  조회:6534  추천:25  2011-06-16
차이나타운이 조선족에게 미친 영향     평일 저녁 22:00부터 23:00사이 서울 지하철7호선 남구로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가 많은데 십중팔구는 조선족(지금은 한족도 일부포함)이며 다수가 여성이다. 이들은 강남지역을 비롯해 서울 여러 곳의 음식점에서 퇴근하여 귀가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풍경은 대림역, 가산디지털단지역(가리봉역), 구로역, 독산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주말이면 가리봉시장 골목과 대림 중앙시장 거리는 자정시간까지 조선족들로 욱실거리고 있다. 여기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다. 조선족이 집결해 사는 곳엔 조선족을 상대로 발행하는 무료 신문(20종 신문이 있음)이 많이 배포되어 있고, 행정사사무실, 여행사 및 조선족을 상대로 하는 교회와 여러 단체들이 즐비하게 많다. 그리하여 이곳에 사는 조선족은 새로운 정부동포정책을 비롯해 출입국관련정보를 빨리 알 수 있고, 고충이 있으면 해당 업체를 쉽게 찾을 수 있고, 하다못해 외국인등록증연장수속이 편리하고, 비행기티켓을 구하기가 아주 편리한 이점이 많다. 한편 조선족 집거지에 사는 분들은 한국문화에 적응이 어렵고 소질제고에 문제가 많이 존재하고 있는 폐단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에 수년간 살다가 고향에 가면 우스운 일에 부딪칠 경우가 있다. 도시에서 길을 건널 때 한국생활에 적응되어 횡단보도를 살펴 찾아가면 당지사람들은 바보로 본다. 중국에서는 굳이 횡단보도가 있는 곳에 갈 필요가 없이 그냥 무단횡단하거나 가령 횡단보도라 할지라도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일이 한국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가리봉시장 골목에 조선족이 많이 모이는데 타지방에서 이곳에 오는 조선족은 삼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지키고 있으면 맞은편에서 마중 나온 사람이 기다리지 말고 빨리 건너라고 소리친다. 실제로 이곳 사람들은 빨간불이 켜져도 무시하고 건너고 있기 때문에 신호등은 있으나마나다. 부부가 함께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삼거리근처에서 10여 년 동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은 처음엔 못마땅해 제지하다가 나중에 자기 자신도 물들어 무의식적으로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근 수년간 일부 한국 언론이 흑사파의 개념도 모르고 조선족 집거지를 마치 범죄의 소굴로 모는 듯한 기사를 발표했다. 이에 필자도 반박기사를 쓴 적이 있다. 물론 일부 한국 언론의 기사들이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한편으로 살펴보면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에 범죄행위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2010년 서울구로경찰서에 신고 된 조선족이 저지른 형사사건만 76건이며 9할 이상이 폭행사건이다. 사건발생 단서를 살펴보니 절대다수가 음주에서 비롯되었다. 술을 마시면서 타인이 자기를 본다고 시비를 걸고 때리고, 옆 상에서 떠든다고 싸우고, 어깨를 부딪쳤다고 패는 등 하여튼 싸움거리가 되지 않는 걸 갖고 폭행사건을 저지른다. 이 외에 택시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주먹을 쓰고,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 사소한 일로 자존심 다툼을 하다 나중에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행각을 벌인다. 사건의 8할 이상이 조선족이 자기네끼리 싸운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이 하도 시끄러워 일부 사람들은 집거지를 떠나 조선족이 드물거나 아예 없는 곳, 즉 한국인 속에 이사 가는 경우도 있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같은 한국 땅에서 살고 있으나 비집거지의 조선족은 한국어를 빨리 배우고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하고 있는 반면에 집거지 조선족은 때를 벗지 못해 소질이 확연한 차이가 난다.   중국동포타운신문 201호
19    백청강의 효과 댓글:  조회:6577  추천:35  2011-06-06
백청강의 효과     지난 5월 27일 저녁 22시 한국고려대화정체육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한국MBC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그랜드파이널이 이태권이란 한국청년과 백청강이란 중국인(연변조선족)젊은이의 대결로 펼쳐졌다. 사실 결승전이 있기 전에 수많은 재한조선족이 백청강이 결승전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우승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 시청자투표가 70%나 차지하는데 관건시각에 한국인이 역시 한국청년 이태권에게 몰표를 줄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허나 사회자가 백청강이 우승자라는 발표가 쏟아지자 이런 유치한 생각은 정말 기우여서 멋쩍게 느껴졌다. 그날 시청자투표수는 68만이었다. 멘토 점수 3할이고 시청자투표가 7할인 점을 감안하고 실제 이태권이 백청강보다 멘토점수가 0.65를 앞선 것을 계산하면 백청강이 우승할 수 있은 것은 시청자투표가 적어도 40만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재한조선족 시청자투표수가 많게 잡아 3~5만이 된다고 치자 그래도 나머지 많은 수가 한국인이 투표한 것이 아닌가! 한국사회는 우리한테 편견 없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옹졸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반성해볼 사건이다. 물론 한국인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과 조선족이 한국인을 멀게 생각하는 벽이 백청강의 효과로 하루아침에 전부 해소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으리라 짐작되어 매우 고무적이다. 중국인은 이명박 대통령을 몰라도 장나라는 알고 있다. 한국인은 조선족 지도자를 모르고 있어도 백청강을 알고 있다. 중국에서 한류를 알리는데 장나라가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면 한국에서 조선족의 존재를 알리는데 백청강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젊은 층 다수는 조선족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다가 이번 한국 MBC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 프로그램에 조선족 백청강의 출현을 통해 많이 알게 되었고 그가 우승하는 바람에 더욱 많은 한국인이 조선족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또 하나의 백청강의 효과이다. 지난 20년의 코리안드림은 실로 상처투성이다. 부부이혼으로 가족이 해체되고 양부모가 신변에 없거나 혹은 편부모자녀가 나쁜 길을 걷는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백청강의 부모도 코리안드림의 바람에 뛰어들어 아버지는 한국에 온지 10여 년이 되었고 어머니는 얼마 전에 한국에서 수년간 체류한 적이 있다. 양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성장한 백청강은 여느 아이들처럼 나쁜 길을 걷지 않고 꿈을 키웠고 그 꿈을 위대한 인간승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백청강이 우승하는 그 자리에 그의 부모가 나란히 지켜보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백청강의 가족이야말로 진정 코리안드림의 성공케이스며 수많은 조선족가정이 따라 배워야할 본보기다. 다 아시다시피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3D업종에 종사하고 있고 음식점, 간병,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설령 중국에서 교직에 있었거나 언론에 몸담았던 엘리트들도 한국에 와서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역시 막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결과는 한국사회가 조선족을 배타하는 현상에 의해 초래된 것도 있거니와 조선족자체가 새로운 노력이 없이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하는데서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족도 이젠 한국에서 노력만 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백청강의 효과에 의해 생겨났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특히 한국에 진출한 젊은 조선족청년들이 꿈을 가지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조선족청년 백청강이 한국에서 200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하리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허나 그의 꿈이 실현되었고 그의 성공이 현실로 나타났다. 조선족젊은이들은 백청강을 따라 배워 꿈을 갖자. 꿈이 생기면 반드시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자. 중국동포타운신문 200호
18    차이나타운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댓글:  조회:6158  추천:45  2011-06-02
차이나타운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실례되는 말이 되겠지만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다. 그 일례로 차이나타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동남아와 미국의 차이나타운은 그렇다 치고 속이 좁은 일본마저도 차이나타운이 흥성하고 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이 차이나타운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만 명이 넘는 한국의 화교는 다수가 산동반도 출신이며 그들은 광복 이후 한국과 한국인으로부터 정치적·경제적으로 제한을 받았고 인격적 질시와 무시를 받으며 살아와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인접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따스한 안식처가 없이 불편하게 지내왔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특히 중한수교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많아짐에 따라 인천에서 차이나타운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조선족이 집결해 사는 가리봉, 대림, 안산원곡동 등 차이나타운에 비해 시간적으로 늦게 형성되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중한교류의 필요에 따라 인위적인 계획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면 기타 차이나타운은 조선족이 한국에서 생존의 몸부림에 의해 계획 없이 자연스레 이뤄진 것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 두 부류의 차이나타운이 세워진 배경이 다르다 보니 한국인이 바라보는 눈길도 자연히 다르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중국전통문화를 복합적으로 한국에 전파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에 한국인은 불편 없이 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타 차이나타운은 중국음식문화가 한국에 전파하는 역할이 조금 있을 뿐 기타 역할이 미비하고 오히려 조선족(현재는 적지 않은 한족들이 섞여 살고 있음)이 한국인에 비춰진 이미지가 나쁜 효과를 초래하고 있어 부작용이 크다. 가리봉동을 예로 들면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한 조선족이 값싼 방을 구하려고 이곳에 찾아오고 그들 절대다수는 불법체류였다. 첫 시작부터 한국인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불법체류 무리였다. 이곳 조선족은 한국 땅에서 출발부터가 불안해 자기네끼리 모이면 술을 잘 마시고 떠들고 싸우고 폭행하고 심지어 살인사건도 종종 일으켰다. 2000년대 중반까지 이곳 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하루건너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한국인의 인상속의 가리봉은 조선족의 범죄자들이 살고 있는 온상으로 비쳐졌다. 물론 다수 조선족은 이곳에서 점잖게 살아가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에 의해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봉동의 원주민들은 공돌이·공순이들이 비어놓고 떠난 쪽방을 조선족들이 메워주어 감지덕지였다. 조선족을 상대로 식품가게를 운영하거나 노래방 등 유흥업소 업주들은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이와 반면에 한국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상인들은 조선족이 가게를 찾아오면 중국에서의 복잡하게 떠들고 싸우는 문화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반감을 갖게 되었고 그에 적응하지 못하여 나중엔 가게를 그만두고 타지역에 이사 가는 폐단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가리봉시장 골목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한국인 상인이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가리봉시장 골목에 24시 운영하는 한식점이 있다. 아침 6시에 조선족 2명이 가게에 와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점심이 지날 때까지 마시고 있었다. 얼핏 술병을 세어 보니 대여섯 병이 되어 보인다. 술에 취하자 떠들어 시끄럽다. 주인이 그만 마시고 자리를 뜨라고 권하자 시비가 붙었다. ‘내가 나의 돈으로 먹는데 당신(주인)이 뭔데 가라마라.’는 배짱이다. 주인이 경찰을 불렀다. 경찰이 사건의 전후과정을 들어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중국인(한국인은 조선족을 중국인이라 함)이 시끄럽다고 불평부리면 이곳에서 장사할 생각을 접는 것이 좋다.”
17    김문학과 김관웅의 수준차이(1) 댓글:  조회:8975  추천:13  2010-10-06
김문학과 김관웅의 수준차이(1) 2개월 전의 일이다. 필자가 연변대 인문학분야 모교수와 한국 유명대 정치외교학 교수 셋이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식사 도중 어찌하다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화제가 돌았다. 일본인의 국민성을 파헤친 권위 저작으로는 미국여류문화인류학자 루스·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모교수는 이 책에 대해 금시초문이고 ‘토론’에 한마디 끼지도 못했다. 나는 매우 의아했다. 인문학 교수이면 세상의 학문적 흐름은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읽은 책을 반드시 당신도 읽어야 한다는 도리는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학자라면 특히 인문학분야의 교수라면 적어도 흐름은 알고 있어야 하고 그래야 타인과의 대화도 충분히 이뤄질 수가 있지 않을까? 연변문화인들은 흔히 자신을 ‘夜郞自大’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학문적인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그 문화인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중국에 갈 때면 연길직행을 한 적이 한두 번밖에 되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거개 심양이나 장춘으로 에돌아간다. 그 이유는 연길서점에서는 내가 원하는 책들을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심양이나 장춘 서점을 들러 책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연길서점의 도서량은 심양이나 장춘 서점의 몇 십분의 일이나 되나마나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화인들의 독서에 문제가 생기지 아닐 수 없다. 다음 필자가 전에도 지적하였듯이 연변의 사회환경분위기로 볼 때 책 읽는 기풍이 매우 결핍되어 있고 연변은 중앙직속이라는 풍자처럼 너무 사상이 경직된 환경문제도 심각하다. 아직도 필자가 종교에 관한 글을 쓰면 혹자는 나를 ‘마레주의를 반대하고 종교를 선양한다.’고 비판하는 등 한심한 관점과 인식들은 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본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연변문화인들이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학문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산재지역에 계시는 조선족문화인들과 대화해보면 연변문화인들보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 넓지만 문혁교육잔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고 역시 한족학자들보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데 좀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혹자는 필자를 김문학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심지어 나의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았나고 의심한다. 솔직히 나는 그의 친일언행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친일언행들이 정말 高行健이 <나만의 성경>(필자는 한국에서 홍콩에서 출간한 한문판을 읽었다.)을 지어 노벨상을 받았지만 반화분자라는 사실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중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문화인처럼 김문학도 중국정부가 찍어놓은 친일매국분자라면 말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중국정부가 문제 삼지 않는 문화인에 대해 일부 안티김문학파들에 동조하여 나의 소신을 팔아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흑백논리에 물젖어 친일이 아니면 반일이란 이분법으로 모든 문제를 보는 시야가 매우 안타깝다. 제삼의 관점과 견해 및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존재형태를 말살하려하고 넌 김문학을 두둔하면 무조건 같은 친일족속이란 타매질이 역겨워난다. 현시대는 다문화사회이다. 다문화란 여러 가지 인종문화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부동한 문화형식과 내용 및 여러 가지 부동한 견해도 공존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한 문화인에 대해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나의 성향에 맞으면 친할 수 있다. 내가 김문학과 친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그의 학문적 시야가 나와 비슷한 점이 많고 내가 읽었던 책과 그가 읽었던 책들이 비슷한 것들이 많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고 축복이다. 더욱이 나는 이 몇 년래 김문학만큼 나와 학문적 대화의 상대가 되는 문화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말이 샌 것 같다. 본론을 말하자면 김관웅 교수도 필경 지역 환경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인 수준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전의 작품들도 그렇거니와 요즘 그의 작품을 보면 독특한 자신의 관점과 학문적인 새로운 맛이 없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방식 똑 같은 문풍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를테면 요즘 김관웅 교수의 <일제의 중국침략과 김문학의 왜곡>의 제목으로 쓰고 있는 시리즈를 보면 먼저 교과서 식의 나열을 늘여놓고 다음 정의를 외치고 그다음 김문학에 대한 온통 고깔모자를 동원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글을 올리는 사이트를 공격하고 연변유관기관을 걸고넘어지는 작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학문적인 서술이나 독특한 견해가 없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수준에 똑 같은 문풍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께서 김문학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으나 그의 어떤 작품 이를테면 <신 추한 일본인>은 그래도 일본인국민성 평가에 있어서 기존의 권위로 인정받아왔던 미국여류문화인류학자의 <국화와 칼>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일본인국민성을 파헤치는 창의성이 돋보인다. 학자와 학자 간의 비교수준은 그렇다 치고 솔직히 김교수의 이런 글들은 아무 타이틀도 없는 나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는 문장에 비해 창의성, 학술성, 서술성 및 내용의 깊이와 넓이가 아예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다.
16    연길에 조선족이 있는가? (김정룡) 댓글:  조회:7326  추천:32  2010-07-28
연길에 조선족이 있는가? 김정룡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으로 보인다. 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에 조선족이 없으면 어디에 조선족이 있겠는가? 하지만 한 사회를 랭철하게 실상과 허상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이런 황당한 질문도 할수 있다는것이다. 현재 연길에는 분명히 20여만에 달하는 조선족이 살고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를 허상적인 존재라 생각한다. 왜냐? 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집단은 그들의 기본생존바탕인 민생기반이란 실상이 보장되어야 장기적으로 생존할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연길시 조선족의 민생기반은 구경 어떤 형편일가? 개혁개방직후 연길은 중국 다른 도시에 비해 빠르게 눈을 떠 택시시장이 매우 활성화 되였는데 택시기사 절대다수가 조선족이였다. 1990년대중후반에 이르러 연길시 택시수가 인구비례로 따지면 전국에서 으뜸이고 기사 역시 조선족 택시기사가 다수였다. 헌데 지금은 연길에서 조선족 택시기사를 만나기가 가물에 콩나듯 말라들어 한족일색으로 되여가고있는 형편이다. 1980년대초반부터 시작된 연길시 로천매대와 서시장, 후에 들어선 지하국제무역청사 매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조선족 일색이였 다. 하지만 점차 한족들한테 밀려 지금은 조선족이 줄어들고 한족이 우세를 점하고있다. 1990년대초중반까지 연길시 거리마다 골목마다 조선족 녀성들이 꾸린 파마점과 리발점이 다닥다닥 줄지어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당지 혹은 관내에서 연길에 진출한 한족 젊은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연길시 골목마다에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품가게가 줄지어 있었고 시민들이 퇴근시간에 직장동료 혹은 친구와 함께 마른 명태를 쪽쪽 찢어 호프를 마시면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장소였다. 현재는 그 가게들이 다 사라지고 한족들이 운영하는 슈퍼가게가 들어서있다. 연길에 안마방을 처음 오픈한것은 한국에 몇년 체류했던 조선족녀성이다. 장사가 잘 되니 너도나도 뛰여들어 인구비례를 따지면 안마방이 중국에서 으뜸으로 늘어났고 대다수가 조선족이 꾸린것이였다. 헌데 지금은 안마방도 점차 한족들에게 넘어가고있다. 공원시장 북쪽 길옆에 안마방이 줄지어 있는데 원래 조선족이 운영하던것을 한족이 단번에 주변의 안마방가게 셋이나 사들였다. 아직도 그나마 조선족음식점이 많이 남아있지만 홀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아가씨들 절대다수가 한족녀성들이다. 조선족이 한족들한테 밀리다 못해 지금은 한족처녀가 조선족된장을 팔기에 이르렀다.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있다는 뜻이다. 연길시호텔은 1990년대중반까지 직원 80%가 조선족이였다. 그 후 연길시정부가 개인한테 매각하면서 주인이 한족으로 바뀌자 조선족직원이 거의 다 밀려났다. 지금 연길시 많은 공기업 혹은 집체기업이 연길시호텔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있어 조선족들이 일자리를 많이 잃어가고있다. 연길시 조선족이 한족한테 밀린 측면도 있지만 스스로 밀리게끔 처사해온것도 사실이다. 관내진출과 해외진출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혹자는 조선족이 외국에 많이 진출해 돈을 많이 벌어 한족보다 잘 살지 않느냐고 말할것이다. 필자는 이에 매우 회의적이다. 조선족이 외국에 나가 번 돈으로 연길에 아파트를 구입한 사례는 굉장히 많다. 허나 그들은 연길에서 살아갈수 있는 민생기반이 없어 공중루각처럼 내용이 텅 비여있는 불안요소를 안고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민생기반이 허물어져 가고있는 조선족은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아 앞으로 스스로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다는것이다. 연변주도 좋고 연변시도 좋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실상을 잃어가는 판국에 허상에만 매달려 있으니 무슨 의미가 있는가?    
15    연변사람 우월의식? 댓글:  조회:7223  추천:46  2010-06-25
연변사람 우월의식? 3년 전에 필자가 ‘연변내기와 연변사람’이란 글을 발표해 10여 개 조선족 관련 사이트와 카페에서 한바탕 떠들썩하게 논쟁이 일었다. 지난 4월 말 ‘연변사람, 안쪽사람 뭐가 다를까?’ 때문에 역시 찬반양론이 시끌벅적했다. 아울러 어떤 독자들이 필자를 왜 이따위 시끄런 글 갖지 않는 글을 쓰는가? 이의를 갖고 있다. 누가 뭐라 하던 내가 이런 글을 쓰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필자는 연변출신이고 연변에서 40여 년 살면서 연변사람이란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수많은 지식인을 포함한 연변사람들이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에서 꽤 이름 있는 00한국음식점에 연변지식인 몇 명이 찾아 식사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서빙아가씨 보고 물었다. “중국교포 같은데 어디서 왔어요?” 아가씨 답, “하얼빈이요.” 연변사람 왈, “허허, 후진 동네에서 왔구먼.” 아가씨가 격분해 왈, “저도 연변에서 5년간 살아보았는데 한집 건너 사기꾼이데요.” 손님과 아가씨 사이 더 이상 말이 오가지 않았다. 사실 그 아가씨(연변대학 졸업생임)가 후에 필자보고 배웠다는 연변사람들이 안쪽사람을 깔보아 너무 괘씸해 그런 식으로 대응했다고 말했다. 독자들은 이 에피소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변은 지리적으로 조선반도와 가까이 있어 과거 한 시기 민족적인 차원에서 안쪽사람에 비해 우월의식이 있었던 건만 사실이다. 헌데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아직도 묵은 터에서 이밥 먹던 생각으로 연변사람의 우월의식을 갖고 안쪽사람을 무시하고 깔보고 있는가? 거꾸로 40여만이 살고 있는 고국한국에서 연변출신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연변에서 책상머리에 앉아 국록을 타먹고 사는 분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연변출신들이 밖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심지어 한국에서 취직할 때 면접 시 자신을 연변출신이란 것을 감추고 안쪽에서 왔다고 속여야 하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필자가 한국에서 살면서 안쪽친구들이 일정 시간 경과 후 “당신은 연변사람이 아니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뜻인즉 연변사람이면 당연히 이런저런 몹쓸 단점이 있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데 그럴 때면 기분이 더럽다 못해 말이 아니다. 가뜩이나 한국에서 안쪽사람들이 연변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심한 판국에 연변지식인이 한국에 와서 안쪽사람보고 쓸데없는 소리나 남기고 간다면 갈등조장에 부채질이나 하는 꼴밖에 더 무엇이 있겠는가?
14    조글로가 개인사이트인가? 댓글:  조회:5994  추천:32  2010-06-11
  조글로가 개인사이트인가?  필자가 어저께 <바보는 의논한다.>는 글을 올려놓고 이렇게 분수를 모르고 한 번 바보가 되어보자.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공인이다. 공인이라면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며 반드시 독자들한테 책임지는 도덕을 지켜야 한다.  이거 뭐 아이들의 장난도 아니고 같은 글을 올렸다 지우고 또 올리고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서너 번씩이나 너무 어이가 없다. 올리든지, 지우든지 작자의 자유이고 이것은 민주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민주화도 사회적으로 지켜야 룰이 있다.  최선생이 글을 올렸다 지운 이유를 남쪽 기자들을 대상으로 쓴 글인데 마땅히 보아야 할 사람들이 보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이 보아서 지웠다고 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조글로사이트를 남쪽기자들이 몇이나 보겠는가를 몰랐을까? 그렇게 이유를 말해놓고 독자가 올리라고 해 다시 올렸다(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럼 다시 올렸다고 해서 남쪽 기자들이 떼거지로 보는가? 그러므로 이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남은 이유는 빤하다. 리플 때문이다. 독자들의 리플이 악성댓글이라면 관리자님께서 알아서 지울 것인데 뭐가 그렇게도 얼굴이 가려워 스스로 지우는가? 지웠으면 지웠지 왜 올리고 지우고 또 올리고를 반복하는가? 정말 웬만한 아이큐로 이해하기 어렵다.  최선생은 남을 비판할 줄 알았지 남의 비판을 받아들일 도량이 없는 것 같다. 진정한 도량이 있는 문인이라면 누가 뭐라 하던 제 갈 길을 간다.  필자는 가끔 맞아죽을 각오로 글을 쓴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누가 뭐라 하던 내가 갈 길을 가겠다는 뜻이고 아무리 태풍이 몰아쳐도 내가 쓴 글에 대해선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이다. 독자가 리플을 단다고 해서 지우고 또 올리고를 반복하면 체면이 다 구겨진다. 무슨 얼굴로 앞으로 글을 올린단 말인가?  최선생은 그래도 글도 많이 쓰는 분이고 또 일정한 독자층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면 곤란할 것 같아 굳이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최선생은 정말 반성이 있기를 두 손 모아 빈다. 그리고 앞으로 제발 독자들과 시비를 따지지 말고 논쟁을 하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글쎄 오뉴월에 오이를 거꾸로 먹는 것도 제맘인데 네가 뭔데 충고고 나발이냐?고 말하면 나는 할말이 없다.  최선생은 그래도 연변의 중견문인이고 좋은 글도 많이 쓰셨는데 앞으로 좋은 모습으로 항상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13    누가 김문학을 뜨게 했나? (김정룡) 댓글:  조회:6977  추천:64  2010-05-07
누가 김문학을 뜨게 했나?                                김정룡 재한 칼럼니스트지난 5월 6일 김문학 선생의 글 한 편이 조글로에 올랐고 하루 만에 클릭 수가 600을 넘었다. 이는 가히 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글로의 독자층이 주로 연변의 지식인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김문학 선생이 왜 이토록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찾고 싶다. 우선 그의 작품성의 가치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김문학 선생은 10여 년래 50여권의 책을 써낸 다산문인이고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혹자는 그를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써 일본인한테 인기가 좋다고 말하는데 필자는 이런 주장은 매우 유치하다고 본다. 왜냐? 일본인은 우리처럼 경직된 사상과 이념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작품성을 평가하는 것이 우리처럼 편협하지 않다. 가령 일본을 찬양하는 글이라 해서 무게가 없어도 좋아하는 그런 유치한 일본인이 아니다. 고대 중국에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왔고, 조선조에 유명한 유학자들이 많았으나, 근대부터는 동양에서 학문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이다. 미쯔지 교수의 <中國隔意佛敎論>, 쿠로즈미 교수의 <교차역문화와 종착역문화특징과 차이 이론>은 입이 저절로 벌어지게 만든다. 학자들의 수준이 높다보니 독자들도 따라서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 일본이다. 학문분야만큼은 일본이 한국이 우습게 보는 쪽발이 아니고 중국이 우습게 여기는 ‘小日本’이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 인기를 끌자면 작품성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저 막연하게 그를 일본극우세력의 뒷돈을 받고 글을 썼느니, 그래서 친일분자니 어쩌니 하는 식의 굿판을 이젠 걷어치워야 한다. 계속 이런 식으로 그를 매도하면 우리만 유치해지고 마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김문학 선생이 일본사회에서는 그렇다 치고 왜 조선족사회에서 인기가 높을까? 다른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한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학자가 바로 도올·김용옥 선생이다. 그는 40여권의 저작을 펴냈고 128회 TV강의를 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도올 선생의 사회 기여가 어려운 학문을 재미있게 대중화시킨 것이라 본다. 무슨 말이냐? 한국은 뿌리 깊은 양반문화가 소수 지식인이 학문을 독점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가령 독일에 가서 칸트를 배운 지식인은 자신만 칸트를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은 칸트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식이었다. 특히 한국의 유학자들은 지식을 대중화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이런 살벌한 사회풍토에서 도올 선생이 자유분방한 표현방식으로 책을 지었고 마치 코미디처럼 재미있게 강의를 진행하여 인기드라마에 버금가는 시청률을 끌었다. 도올 선생이 인기 연예인처럼 뜨자 수많은 학자와 기자 및 사회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이 그를 부동한 방식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반대파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구단인 바둑선수가 왜 단수에 오르나마나한 자들을 상대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침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반대하고 공격하는 자가 많을수록 그의 인기가 떨어지는 반비례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정비례로 수직상승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기독교가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 그가 <기독교성서이해>와 <요한복음강해>란 두 권의 책을 발표하자 기독교계가 난리 났다. “그럼 당신네 대표를 한 분 내세워 TV공개토론을 하자.” 그는 이런 배짱으로 대응했다. 답은 뻔하다. 기독교계에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역중천이 책을 많이 팔아 원고료를 천문학 수자로 챙기고 TV강의로 뜨게 되자 반대파들이 나서 죽이려 했지만 그는 죽지 않고 점점 더 인기가 높아가고 있다. 논어강의를 한 우단도 마찬가지다. 북경대학을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반대에 나섰으나 그녀의 인기는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주가를 높여주는 효과만 보았다. 학자들이 뜨는 데는 이와 같은 공통의 패턴이 있다. 즉 반대파가 목소리를 높일수록 그들의 주가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아가는 정비례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김문학 선생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연변에서 수많은 반대파가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는 죽지 않고 오히려 인기가 높아가는 현상이 초래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2006년도에 처음 조선족사회를 비평하는 일인자로 여겼는데 그때 알고 보니 김문학이란 양반이 이미 수년 전에 조선족사회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든 뒤였다. 서울에 와 쑤셔 박혀 동서고금의 이런저런 지식을 탐독하느라 조선족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연변촌놈’이 되고 만 것이었다. “김문학이란 양반이 친일매국분자여서 중국에 못 와요.” 이것이 내가 당시 연변의 여러 양반들한테서 들은 얘기다. 해외에서 어떻게 잘나가던 만약 고향에 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다. 문혁 때 같으면 어쩔 수 없다지만 지금 개방된 시대에 이런 비극이 있다니? “참 안 됐네. 그래도 그 양반이 조선족이라면 고향에 몹시 와 보고 싶을 텐데.” 나의 생각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지속적으로 중국에 나들면서 책도 펴내고 중국 최고 학부인 청화대학에서 버젓이 강연을 하고 있단다. 연변에서 떠도는 여론과 상반대로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버젓이 살아 있고 역시 거주국인 일본은 물론이고 거대한 중국을 상대로 잘나가고 있다. 본론을 얘기하자면 아마 그의 <조선족대개조론>이 연변지식인사회의 반발을 크게 사 벼라 별 수식어가 다 붙은 것 같다. 그의 작품성을 떠나 하도 연변에서 크게 떠들어대니 필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김문학이란 도대체 어떤 양반이지? 알고 싶어진다. 스스로 관심이 간다는 얘기다. 그래서 본래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남의 말만 듣지 말고 제 눈으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요즘 다행히 우연하게 한 사이트에서 그의 <조선족대개조론>을 읽어보게 되었다. 좀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연변에 앉아서 읽으면 반발이 심할 부분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지만 나처럼 해외에서 10여년을 산 사람의 눈에는 별로 친일매국분자로 몰아 부칠 정도의 글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어찌되었든 김문학 선생은 연변의 수많은 반대파에 의해 주가가 높아진 것만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김문학 선생은 연변지식인사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한국 서울에서
12    연변문화메카론 재고 (김정룡) 댓글:  조회:5778  추천:59  2010-05-07
연변문화메카론 재고                                        김정룡 재한 칼럼니스트연변 하면 조선족의 대명사로 되어왔듯이 지난 반세기동안 전반중국조선족사회문화메카로 자리매김 되어온 것은 추호의 의논의 여지가 없다. 연변이 전반조선족사회문화메카로 기여해온 것은 주로 대학, 신문, 방송국, 출판사, 잡지사 등의 역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시점에서 볼 때 반세기동안 기여해온 이들 여러 분야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연변문화메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우리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대학이 글로벌시대에 발맞추고 있는가는 것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대학학생들의 의식수준이 대도시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파보다 못하다.” 이는 필자의 외설이 아니라 00대학총장의 발언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의식수준이 형편없이 낮은 것이 학생자체의 문제인가? 너무나도 불 보듯 빤한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복합적인 요인을 다 꼬집을 수는 없기에 대학 자체문제만 짚고 넘어가자. 수년 전에 필자가 우리 대학 00교수 분과 여러 가지 사관에 대한 주제로 대여섯 시간이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말로 실망이었다. 그 분의 논리와 주장은 전부 문혁 때의 교육 틀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다(필자의 봉건사회논의와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는 장편의 글이 이를 배경으로 쓴 것이다). 그 분을 통해 우리 대학교수분들의 의식수준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물론 젊은 교수 분들이 분명히 배가 잘못 길을 가고 있음을 빤히 알면서도 기득권이 두려워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냥 따라서 노를 같은 방향으로 저어 나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여기서 일일이 우리 대학교수 분들의 폐단을 구체적인 실례를 다 들지 않아도 이젠 사회적으로 알 것은 다 알고 있다. 대학이 이럴진대 연변의 기타 분야의 지식인사회는 더 말치 않아도 가히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연변지식인사회는 우리대학을 비롯해 기타 분야에 민족대학 혹은 여러 대학졸업생들이 양념처럼 끼어 있고 주로 연변대학출신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들은 연변문화메카의 구축에 지대한 기여를 해온 동시에 끔찍하게도 하나의 불가침의 신성한 ‘성역’을 구축해왔다. 성역은 비판대상이 될 수도 없고 비판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비위를 거스른 자들을 마구 ‘구운 통닭’으로 만들어 버린다. 좀 더 유연하게 말하자면 연변지식인사회는 자신들을 ‘井水’로 여기고 연변 밖의 조선족사회를 ‘河水’로 인식하고 쩍하면 ‘하수’인 주제들이 감히 ‘정수’를 논하다니! 이런 식이다. 혹은 ‘하수’가 ‘정수’보다 이름 날리면 절대 가만두지 못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들을 ‘정수’로 여기는 연변문인들이 ‘하수’보다 더 혼탁을 짓을 하고 어떤 문인들의 글과 그들이 타인의 문장에 댓글을 다는 사고방식과 의식수준을 보면 정말 유치하다. 일본근대문학 거장 芥川龍之介의《羅生門》에 “만약 이 지구상의 수억 명 인간이 모두 괴물로 변한다면 그 다음날부터 괴물들 사이 생존경쟁이 일어나겠지!”란 명구가 있다. 전쟁, 기근, 태풍, 지진 등 피해로 굶어죽게 생긴 인간들이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에고이즘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지난 세월동안 하도 많은 정치운동들을 통해 인간을 괴물로 만들었다. 유감스런 것은 아직도 괴물몽둥이가 연변에서만 유효하게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필자가 연변지식인사회의 ‘지’와 ‘식’에 대한 문제를 들먹거렸다고 연변문인들이 발끈했는데 당신들이 나의 글에 앞서 권위 있는 총장님의 따끔한 지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혹자는 예전부터 나를 반세기 넘게 조선족사회우수인재배양에 기여해온 우리 대학을 부정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누차 공격해왔다. 솔직히 나는 우리 대학의 사회기여를 부정해본 적이 없다. 다만 우리 대학교수분들의 세상만사지식이 결핍하다는 지적을 했을 뿐이다. 생각나는 김에 한 마디 더해 보자. 우리 대학은 솔직히 중국 대학들에서 다 고르고 나머지가 붙는 곳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대학 00교수 분이 어느 포럼에서 “좋은 대학에 간 나머지를 받아 교육시키는 현실이 과연 조선족우수인재를 배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는 발언을 하셨다. 2006년 가을 재한조선족유학생모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복단대학출신 여학생이 한국에 박사공부를 온 것을 기존유학생들이 의아해 한다. 뜻인즉 한국은 적당히 연변대학 혹은 그와 비슷한 레벨의 출신들이 오는 곳이란 의미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연변대학출신들이 밖에 나오면 스스로 많은 한계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공원다리문제제기는 이렇다. 필자가 1980년대 초반에 성위 간부자제한테서 리차드·닉슨의《미래 영수들에게》란 내부 판으로 된 책을 비롯해 연변에서 접할 수 없는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또 그때 이미 일본어능력시험이 중국대륙에서 있었는데 연변은 기회가 없었다. 종종의 이유로 연변을 벗어나 대도시에 가면 기회가 많다는 의미에서 한 발언이다. 신문분야를 말하자면 길림신문과 흑룡강신문이 연변일보다 많이 활성화되고 있고 현재 40여 만의 조선족을 감안해 흑룡강신문이 한국에 진출해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곧 시대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현명한 처사이다. 필자가 한국에서 알아본데 의하면 산재지구에서 온 조선족 대략 35세를 기준하여 그들은 10년 전에 다수가 연변여성과 청년생활을 읽었다고 한다. 현재 40여 만 명의 재한조선족 가운데서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본래 연변여성과 청년생활의 독자였다. 그렇다면 독자층의 대량 이동에 따라 우리 잡지도 그에 발맞춰 해외에 진출해야만 연변문화메카가 계속 이어져 갈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어디 가든, 잡지 부수가 줄어들든 무슨 상관이냐? 왜 그까짓 것에 신경을 써? 안일하게 벌어먹고 살면 그만이지! 이 추세대로 나아간다면 한때 전반조선족문화생활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던 우리잡지들이 퇴화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연변문화메카를 계속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방송에 대해 한마디 해보자. 개혁개방 전에는 연변방송이 명실공이 문화메카의 역할을 해왔다. 문제는 개혁개방 이후 방송이 많이 흔들리고 있고 자체 길을 모색하는데 숨 가빠지게 되었다. 특히 한국 문이 열림에 따라 더욱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잘 나가던 한 여 아나운서가 한국어를 흉내 내며 이상하게 혀를 감아 쳐 시청자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더니 인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례가 있었다. 한국에서 유학공부를 하던 연변방송국 아나운서 말에 의하면 연변방송이 본래 이북언어를 기준으로 하던 것을 현재 한국어를 기준으로 진행한단다. 물론 과도기에 나타나는 폐단이겠으나 아나운서들과 MC들의 어투가 조선말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어정쩡한 언어로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연변 TV와 라디오 아나운서들은 어투도 문제이지만 존경어사용에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현재까지 연변라디오 최명옥 아나운서가 합격된 아나운서로서는 최고라고 생각되며 남녀를 포함해 명실공이 합격된 아나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개그맨 출신 MC들의 어투와 존경어는 도대체 조선반도 어느 지역 혹은 중국 내 어느 조선족 곳의 말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전혀 엉뚱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프로그램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현재 다수의 프로그램이 한국식을 모방하고 흉내 내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식으로 방송을 진행할 거면 차라리 한국방송을 시청하고 말지 굳이 우리 방송을 보고 들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한국식이 우리보다 선진적이므로 따라 배울 것은 따라 배우되 뭔가 우리 조선족 특색을 살려나가면서 자체의 길을 모색해야만 진정 우리 방송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오직 그렇게 해야만 장기 생존의 길이 될 것이다. 연변방송은 TV와 라디오의 광고가 이상하게 십중팔구는 병원과 약 광고이다. 타 지역 사람들 눈에 연변은 이상하게 환자들만 모인 곳이란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물론 연변 자체 내의 산품이 부족하여 그러하겠지만 라디오의 경우 길게는 25분 동안이나 약 광고를 진행하니 입맛이 다 떨어지고 만다.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호소하면서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곧 사상해방이다. 연변은 중앙 직속이란 별명을 갖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우리 대학을 비롯해 연변 제반 지식인사회는 사상이 매우 후진적이고 따라서 의식이 새로운 형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폐단을 안고 있다. 연변이 진정 문화메카를 지켜내려면 사상을 해방하고 의식혁명을 단행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 서울에서
11    두부 한 모 12원? 댓글:  조회:6053  추천:36  2009-08-19
며칠 전에 백두산에 다녀왔는데 17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에 비해 시설이 많이 개선되었고 관광객도 많이 늘어 하루 평균 3,000여명이 된다고 한다. 요 몇 년 사이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 내원을 보면 17년 전에는 주로 한국인관광객이 많았으나 지금은 중국 내(관내 사람 80% 좌우) 손님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중국인도 경제성장에 따라 소비관념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필자는 관내 관광객단체에 끼워 백두산에 갔는데 가이드가 한족이었다. 17년 전 연변에는 가이드가 조선족 일색이었는데 한족가이드를 만나게 되어 기분이 미묘했다.가이드가 비록 한족이지만 관내 관광객을 상대로 연변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90%이상의 내용이 조선족에 관한 것들이어서 필자의 마음이 뿌듯했지만 가이드의 해설 중 유머적인 어느 한 대목을 듣고서 기분이 착잡해났다. 가이드 왈, 연길시는 생산도시가 아니라 소비도시라는 것, 시민소비물가가 전국에서도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 그런데 연길시 소비물가급상승이 조선족 때문이라는 것, 조선족이 한국 등 해외에 노무로 진출해서 몇 년 간 벌어 와서 와장창 소비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밖으로 나간다는 것, 이 때문에 연변 경제가 그들의 외화벌이에 의해 지탱하고 있는 점은 좋은 것이나 반면에 물가가 엄청 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이드가 조선족소비관념을 말하는 대목에서 좌중에 향해 당신네 지방에서는 두부 한 모에 얼마인가고 물으니 대체적으로 1원씩이라는 대답이었고 가이드는 연길에서는 두부 한 모에 12원이라 말한다. 관광객 모두와 필자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실 조선족두부는 모가 커 2원인데 이는 합리적이지만 2원짜리 두부 한 모 사려고 택시를 타는데 왕복 10원 해서 두부 한 모에 12원이고 이것이 곧바로 조선족 소비관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길시의 소비물가 급상승이 확실히 조선족들의 어처구니없는 과소비 풍조 때문이고 연길시에 사는 한족들은 이 때문에 조선족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지 않을까?
10    나와 나의 아버지 누가 더 행복할까? 댓글:  조회:5897  추천:55  2009-01-28
나와 나의 아버지 누가 더 행복할까?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사람들은 흔히 사회는 발전하고, 역사는 전진하고, 현재는 과거보다 낫고, 오늘이 어제보다 좋고, 미래는 오늘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공식’ 대로라면 나는 나의 아버지보다 더 행복하고 나의 딸은 나보다 행복해야 한다. 참말로 그럴까?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17년 10월 18일(음력) 함경도 명천군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3개월 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등에 엎여 만주로 오게 되었다. 그 때 용정현 동불사 요구촌에 자리잡은 것이 장장 77년을 그 고장에서 살아왔다. 나의 아버지는 14세에 장가가서 우리 8남매를 낳았고, 나는 막내였다. 우리 집은 전통유교가문으로서 남존여비사상이 뿌리 깊었다. 어머니는 맛난 음식이 생기면 아버지를 공대했고, 매년 봄이면 개를 잡아 엿을 대려 아버지를 공대했고, 평상시에도 미숫가루를 떨구지 않았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내가 대여섯 살 때부터 남자들의 밥상에 끼웠고 밥식기를 따로 챙겨 받았으며 내가 밥을 먹고 나면 누나들이 양치물을 떠다 바쳤다. 아버지는 토지개혁에 앞장서 공산당원에 가입했고 민정, 당지부서기를 역임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야학을 다녀 대충 글을 때웠다. 하여 민정을 맡으면서 나보다 10세 전후의 온 동네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지부서기를 맡으면서 26명의 공산당원을 배양하여 <<연변일보>>에 실리기까지 했다. 공산당사업에 충실해서 문화혁명 전에 주덕해와 함께 사진까지 찍었다. 문화혁명 기간에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투쟁 받고 매를 맞아 한 때 정신이 이상해졌다가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정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토록 심한 풍파를 겪고 나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따져볼 생각도 해보지 않고 오로지 공산당사업에 충실했다. 무식이 유식보다 덜 머리가 아프고 행복하다는 말이 진리인 것 같다. 아버지는 인품이 좋고 싫은 소리를 모르고, 누구네 부부가 말썽이 생기면 화해시켜주고 하면서 덕을 많이 쌓아 온 동네에서 ‘양반대접’을 받아왔다. 70이 넘어 노동력을 상실하고 가끔 몸이 편치 않으면 동네 사람들이 돈 5원을 들고 오는 사람, 닭 한 마리, 혹은 차입쌀을 몇 근 들고 문병을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당시 도시사람들이 관직에 높이 계시는 분들에게 아부로 본첨을 하는 것보다 나의 아버지한테 드리는 동네사람들의 정성은 참으로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깊게 받았다. 아버지는 가문의 좌장이어서 매년 생일이 되면 수십 명의 친인척과 동네사람과 먼데서 온 친히 배양 받았던 후계자손님들까지 합치면 100여 명이 넘게 모여 큰 잔치를 벌렸다. 아버지가 77세 되던 해에 내가 연길에 모셔와 살다가 79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5년 뒤에 돌아가셨다. 물론 추도식도 굉장하게 치뤘다. 아버지는 태어나서 3개월 만에 만주에 온 후 돌아가실 때까지 서쪽으로 가장 먼 곳은 돈화, 동쪽으로 도문, 동북쪽으로 왕청에 가보았다. 물론 일생 동안 침대기차를 타보지 못했고, 비행기는 구경도 못했다. 아버지가 장가가서 1942년 나의 둘째 형을 낳았을 때, 우리 집 식구는 17명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이래저래 분가하다보니 아버지 어머니에 우리 형제들만 살게 되었으나 역시 식구가 많았다. 나를 포함해 현대 사람들은 우리부모세대들은 조롱조롱 그 많은 식구들을 눕혀놓고 섹스를 어떻게 했을까는 것이 궁금하다. 물론 어떻게라도 섹스를 많이 했기 때문에 물렁 여덟 형제나 낳지 않았는가? 더욱이 우리부모세대들은 절대다수가 오로지 ‘한 구멍, 한 작대기’만 파고, 바라보고 살아왔다. 나는 연변일중 교사로 있을 때까지 오로지 사업과 가정밖에 몰랐다. 그러다가 1990년 5월 당시 하해(下海)바람의 물결을 타고 철밥통을 버리고 ‘상업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여행사가이드를 하면서 한국 관광객을 모시고 가라오케나 나이트 가서 아가씨들을 만나면 불쌍하다고 돈을 주면서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매우 천진했다. 그러다가 중국의 연해도시와 내지 관광도시를 돌아다녔고, 동남아를 비롯해 한국 등 외국나들이를 하면서부터 차차 순진했던 내가 ‘부화타락’하기 시작했다. 나는 적어도 나의 아버지가 향수 못했던 비행기도 지구를 몇 바퀴 돌 정도로 뻔질나게 타보았고,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도 많이 묵어보고, 산해진미도 많이 먹어보고, ‘여러 구멍’도 파보았다. 거기다 한 때 자가용까지 몰고 다니면서 세상을 주름잡았다. 맨발의사도 해보고, 소학교 선생도 해보고, 연변1중 교원도 해보고, 기업법인대표도 해보고 정부관원도 해보았다. 이 세상의 향수란 향수는 거의 다 해보았다. 그런데 그 ‘호화로운 향수’ 속에서도 늘 마음은 공허하고 허전했다. 나는 늘 나에게 “네가 대학시험을 7년을 봐서 성공한 것이 기껏해야 잘 먹고 잘 놀기 위해서였던가?” 만약 나의 딸애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는 일생 동안 뭘 해놓았는가?”고 묻는다면 “응 그래 한때 잘 먹고 잘 놀았다.”는 대답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100여 편의 글을 발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곧바로 한때 잘 먹고 잘 놀았던 시절이 아니라, 애를 금방 낳고 열심히 출근하여 사업에 몰두하고, 집이 차려져 열심히 가꾸고, 올해는 녹음기를 사놓고, 내년에는 자동세탁기를 사고하면서 열심히 사업을 하고 가정을 위해 열심히 신경을 썼던 시절이다. 그다음 행복한 것은 돈을 떠나 내가 지금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사는 것이다. 나의 지금까지 생애는 겉으로는 나의 아버지에 비해 훨씬 호화롭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모든 면에서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삶이 아버지에 비해 너무 공허하고 너무 허무하다. 앞으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걱정이 크다. 적어도 나의 아버지는 나와 형제들의 노력에 의해 마감까지 참 행복하게 보내다 돌아가셨다. 이에 비해 내가 늙으면 나의 딸에게 기댈 수 있는 보장이 없다. 아울러 나의 아버지세대는 죽으면 자식들이 적어도 청명과 추석에 아버지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흙을 올리고 술을 부으면서 제사를 올린다. 허나 내가 죽으면 이러한 전통을 나의 하나밖에 없는 딸애에게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나의 답은 나의 일생이 결코 나의 아버지보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세상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변해버려 전통적인 ‘경(經)’ 이 깨져 사회가 혼란스럽고, 가정윤리가 바닥났고, 사람마다 자기만의 편함을 추구하고, 부질없는 경쟁만 부추기고 해서 현대사회는 사람이 살기가 참으로 피곤하다. 중국어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세상의 기풍이 못해가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아, 오늘이 과거보다 못하구나!(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나는 늘 이 격언으로 나와 나의 아버지 삶을 비추어본다.
9    봉사(奉仕)와 복무(服務)는 어떻게 다른가? 댓글:  조회:6887  추천:60  2008-11-19
봉사(奉仕)와 복무(服務)는 어떻게 다른가?  중국과 북한에서는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심부름군’을 복무원, 복무원동지라고 하며, 상하계급과 관계없이 A가 B한테 무엇을 해주거나 헌신하는 것을 복무라 한다.  이 중국과 북한의 복무에 해당되는 개념을 한국에서는 봉사라 한다. 봉사는 일본의 한자어에서 유래되었으나 중국어족보에는 없는 말이고 일본인이 자체로 지어낸 어휘이다. 그렇다면 복무와 봉사는 어떻게 다를까?  복무는 상하계급적인 구분이나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봉사는 본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시중을 드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며, 이는 일본인의 신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200년 전, 일본사대국학자에 속하는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연구한 결과 “신도는 아래에서 위에로 흐르는 ‘카미(神)의 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와 같은 신도의 정신과 연관해서 “중국인과 조선인은 미개해서 ‘인’이 필요하나 일본인은 소질이 좋아서 ‘인’이 필요 없고 ‘충’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망발이긴 하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일본학자가 자기네 신도를 이해하는 입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즉 일본의 종교, 정치, 문화,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에서 상에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카미의 길이다.  고대 일본정치는 천황과 쇼오군의 이중통치구조였다. 천황은 쇼오군을 임명하고 쇼오군은 천황일가를 보호하는 동시에 지상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하지만 쇼오군은 자신이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행위를 통치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천황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라 간주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다른 나라 정치와 다른 점이며, 이것이 곧 일본인의 신도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봉건사회는 실제적으로 중국 주나라 봉건제와 유럽의 중세기 장원영주봉건제 및 일본의 장원영주봉건제 등 세 곳에만 봉건제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중국과 유럽의 봉건제는 왕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통해 점령한 이민족 혹은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친인척과 수하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제후 혹은 영주로 봉하면서 생겨난 것인데, 반해 일본의 봉건제는 최하층민들이 개척한 땅을 층층이 올리 ‘주군’에게 헌납한데서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장원영주봉건제마저 일본의 고유한 아래로부터 위에로 올리 흐르는 구조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아랫사람은 반드시 주군에게 맹세를 다짐하고 봉사한다. 설사 주군이 주군답지 못해도 신하가 주군을 떠나는 법이 없이 자신들이 해야 할 봉사의무를 완벽하게 한다. 신하들이 주군에게 철저한 봉사를 이행하기 때문에 주군들은 주군자격이 있게 처사하기에 백배의 노력을 기울인다. 일본인은 어떻게 아래로부터 위에로 올리 봉사하는 신도적인 개념이 형성되었을까? 일본은 예로부터 땅이 척박하고 메말라 농사를 지어먹을 만한 땅이 극히 적었다. 거기다 지진과 태풍의 피해가 자주 발생해서 생존이 매우 어려웠다. 극히 한정된 진(津)과 포(浦)의 변두리에서 경작지를 일구고 농사를 짓다보니, 또한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못하여 가령 단합하지 않고선 너도나도 살아남을 수가 없으므로 모두들 유능한 보스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는 정신이 뿌리 깊게 머리에 박히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이러한 아래로부터 위에로의 봉사개념이 일제 36년을 거쳐 우리민족에게 전달되었고 아직도 무분별하게 봉사라는 말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8    한국에서 보는 연변의 의미와 가치(김정룡) 댓글:  조회:6925  추천:90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 한국에서 보는 연변의 의미와 가치김정룡 한국 신화보사 기자      오늘 모임의 주제는《중국 조선족에게 연변의 의미와 가치》인데, 현재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가 긴밀히 얽혀 있는 상황을 감안하여《한국에서 보는 연변의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이 제목을 선택하게 되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연변하면 조선족을 떠올리고, 조선족하면 연변을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연변은 조선족의 대명사’이다.   ‘연변이 조선족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은 고국인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인들의 인상 속에 한국에 온 조선족은 연변에서 온 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이런 각인이 있어 흑룡강성, 요녕성, 내몽골 등 산재지구에서 한국에 온 조선족도 자기네 고향을 말하면 한국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대답의 편리를 위해 그냥 연변에서 왔다고 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연변은 조선족의 대명사’인만큼 조선족인재도 많고, 민족을 대변하는 브랜드도 많다.  한국 내 중국동포타운으로 알려진 가리봉일대 음식점, 노래방, 호프, 미용실 등 자영업을 하고 있는 조선족 경영자들의 대다수가 연변출신이다. 따라서 연변을 대변하는 브랜드인 진달래냉면, 연변냉면, 초두부, 모두부, 콩장, 순대, 개고기 등이 인기가 높다. 이 면에서 볼 때 산재지구에서 한국에 온 조선족은 연변출신에 비해 자체 브랜드가 없고 경영자도 많지 못하다. 우스운 얘기지만 흑룡강성 아성시(조선족 5만명)에서 온 한 40대 후반 조선족이 초두부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이는 산재지구가 필경 조선족전통음식문화에 대해 요해가 부족하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상기조선족 특유의 브랜드를 한국 내에서 활발하게 경영함으로서 이국타향에서 당지 한식에 적응되지 않은 재한조선족에게 고향음식을 먹으며 살 수 있고, 음식문화도 풍부해져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또한 한국인들도 중국음식을 찾는 수가 늘어나고 있고, 동대문에서 조선족이 운영하는 양고기뀀점에 오는 고객 중 한국 사람이 많다는 뉴스가 보도된바도 있고, 나도 한겨레신문 기자를 따라 처음으로 대림역 근처에 있는 풍무뀀점에 가보기도 했다. 풍무뀀점 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용납좌석이 80석인데 보통 목,금,토에 만원이며 한국인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중국음식점, 조선족특색음식점, 양고기뀀점을 찾는 한국인은 주로 중국생활경험이 있거나 조선족과 결혼한 한국인배우자, 혹은 젊은 한국청년들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연변출신 조선족들이 언론부문에 근무하거나 사무실에 종사하는 수가 산재지구에서 온 조선족들보다 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국어판 신화보사는 사장이 도문 출신 조선족이고 직원 전체가 조선족이다. 한국 내 대기원신문, 看中國 등 간행물이 있으나 법륜공을 대변하는 신문이거나 혹은 정규화 된 신문이 아니다. 사실 연변 출신 조선족이 해외에서 정규화한 중국어판 신문을 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노화교 2만여 명과 재한 한족 12만 명이 자기네 말 신문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재한 연변출신조선족들이 이러한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 또한 치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재한조선족은 단합이 되지 않아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다. 즉 재한조선족을 대변하는 정규화한 단체가 없고 리더가 없다. 이 면에 관해 이유를 과거 저희가 이미 글로 발표했기 때문에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연변출신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 정도를 말하자면 취직 면접 볼 때 한국인 사장들도 연변출신 조선족을 꺼리고 있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연변출신들이 자신의 고향을 속이고 흑룡강성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예전에는 산재지구에서 온 사람들도 연변에서 왔다고 대답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연변출신이 사실을 말하면 창피하다고 속이는 이런 불미스런 일이 생긴 원인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연변출신조선족들이 한국 내에서 너무 약게 놀고,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있고, 둘째 특히 흑룡강성 조선족들이 예로부터 연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편견이 한국에 와서도 똑 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흑룡강성 조선족들이 연변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드는 사례가 허다하고 심지어 연변에 와서 살고 있는 흑룡강성 출신 조선족들도 실제로 한국인 앞에서 연변사람을 헐뜯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한국 생활에서 흑룡강성 조선족이 연변사람을 헐뜯는 사례를 직접 목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연변은 흑룡강성에 비해 경작지가 적어 인심이 박하고 정치 배경에 의해 사람들이 약아빠진 것만은 사실이고 대다수가 생존력이 강하고 머리가 빨리 돌지만 반면에 너무 계산적인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는 연변출신 조선족들이 반드시 고쳐야 할 단점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판단하건대 연변출신 조선족들이 한국 내 나쁜 이미지는 흑룡강성출신 조선족들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여튼 연변사람을 헐뜯고 다니는 데서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일이 어떤 계기로 어떻게 발생했던지 연변출신 조선족은 자신의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인간이 타향에서 자신의 고향을 속이고 산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다.     다음 한국 언론인과 개별 교수님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연변일보보다 흑룡강신문이나 길림신문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첫째 흑룡강신문과 길림신문이 연변일보보다 한국에 관한 보도거나 재한조선족의 흐름을 싣는 글이 많고, 둘째 흑룡강신문과 길림신문이 연변일보다 한국에 와서 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길림신문은 조선족코리안드림에서 발생한 희노애락을 담은 글을 80여편 실었고, 그것을《넘어야 할 산, 그것은 삶의 희망》이란 책을 만들어 출간했고, 중한수교1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했고, 재한조선족활동에 관한 인물탐방을 발표했다. 나는 연변일보가 흑룡강신문과 길림신문에 비해 어떤 제약성을 갖고 있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흑룡강신문이나 길림신문이 활발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조선족 수부에 있고, 조선족을 대변하는 연변일보가 활발하지 못한 점이 참 유감이다.    문학지도 연변 내 것보다 장백산잡지가 더 선호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산재지구에서 조선족문화가 활발하게 전개 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나 지나친 얘기이기도 하고 당치도 않는 말이 되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문화중심 이동론이 거론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다음 연변은 조선족을 대변하는 곳이고 따라서 기타 소수민족보다 문화, 체육 등 여러 방면에서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고, 이로 하여 조선족의 위상도 많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는 과거 묵은 터에서 이밥 먹던 얘기고, 현시점에서 보면 조선족의 문화는 세계화시대에 적응하는데 거리가 있다고 본다.     조선반도는 역사적으로 줄곧 변방문화였고, 이 변방문화를 전수받은 우리 후대들 역시 언저리문화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특히 10년 동란을 거치고 나서 우리 연변문화수준은 많이 파괴되었다.     인류사회는 주류와 비주류 문화가 있고 따라서 문화범식이 생겨났고, 비주류는 주류문화범식을 쫓아왔다. 서구는 고대그리스, 로마문화가 있었지만 AD4세기 이후부터 중동발 유태인문화로 문화범식이 바뀌었다. 유태인문화와 고대 플라톤철학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기독교문화가 2천년 동안 서구문화범식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이로 파생된 칼·맑스의 철학이, 중국이 말하자면 수천 년 동안 자체 문화범식을 갖고 있었고, 전체 동아세아에 문화범식을 수출하던 중국에 20세기를 거쳐 수입되면서 문화범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었다. 중국대가족의 일원인 조선족도 중국 새로운 문화범식을 그대로 따랐다. 결과 조선족은 자체 문화를 상실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졌고, 지금도 조선족은 문혁 때 전수받았던 문화범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변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낡은 문화범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고수한다면 우리의 앞날은 밝지 못할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이 우리보다 앞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주로 새로운 문화범식을 받아들인 것이 관건요소로 작용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 것을 지키는 전제에서 하루빨리 새로운 문화범식에 적응해야 하고 이것이 우리 조선족의 생존의 길일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연변대학 50대 중반 교수, 중국 내 여러 신문과 잡지사 편집과 기자분들이 정년퇴직 전에 한국에 온 수가 꽤나 되고, 그들도 한국에서 자신이 중국에서 배우고 다루어왔던 밑천을 활용하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아 좌절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 주요 이유는 새로운 사회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문화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연변이란 울타리 문화를 그대로 갖고 한국사회에서 활동하기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연변에서 많은 글을 써왔지만 그 수준이 한국사회에 맞지 않기 때문에 좌절이 더욱 심하다. 우리가 고국인 한국사회에 진출해서 자신의 장끼를 발휘하려면 이제부터라도 이 방면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 따른 이념문제, 언어문제, 사상문제 등 제반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연변의 사회풍기문제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상해나 심천에 가서 음식점, 노래방을 운영하는 조선족들의 말에 의하면 연변처럼 환보부문, 위생부문, 공상 세무부문, 심지어 경찰까지 자주 드나들면서 시끄럽게 구는 일이 매우 적어 편하게 영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연변을 떠난 사람들 중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으나 연변은 반드시 이 면에서 개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변을 떠나 코리안드림에 성공하여 돈을 번 사람들이 현재 대련, 청도, 북경, 남방도시에 집을 사놓고, 영업을 하는 수가 적지 않는데 역시 연변의 이러한 사회풍기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한국에서 자영업을 해본 사람들은 외부간섭이 아주 적어 편하게 운영하다 연변환경에서 자영업을 하자면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 아니고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느라 영업취미를 잃게 된다고 한다. 이 부류 사람들은 한국에서 영업을 그만두면 연변에 돌아갈 생각을 포기하고 중국 내 연해도시에 진출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돈을 번 연변출신들이 연변에 돌아와 자영업을 할 경우 외국인투자자에게 세금혜택 주는 것처럼 여러 정책상 혜택을 주어 될 수 있는 한 연변에 돌아오도록 그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조치라 생각한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인지상정이다. 고향이 매력이 있다면 굳이 타향에 진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 나가 있는 연변출신과 산재지구조선족들이 연변에 돌아오게끔 매력을 갖추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연변은 조선족의 대명사이다. 연변이 살아야 조선족이 살 수 있고, 연변이 사라지면 조선족의 존재의미가 상실될 정도로 조선족에게 있어서 연변의 의미와 가치가 중요하다 하겠다.                                                       2008.10.2 서울에서                            
7    모어의 유래와 조선어논쟁에 대하여 댓글:  조회:6274  추천:95  2008-09-16
母語의 유래와 조선어 논쟁에 대하여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1997년 여름 필자 일행 셋이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우리말로 너스레를 떨었더니, 기사가 “당신네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고 물었다.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요.”라고 했더니, 그는 연변오동축구팀을 들먹이며 반갑다는 표정이었는데, “당신네 母語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모국어란 말은 근세유럽에서 중세기 유일한 문자였던 라틴어가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과 다른 언문불일치현상에서 유래된 것이며, 영어로는 ‘마더 팅(mother tongue)’ 즉 ‘엄마의 혀’라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국어란 본래 ‘엄마의 혀’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태어나서 언어를 국가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혀를 통해 배운다는 사실, 고로 ‘엄마의 혀’를 ‘모국어’가 아니라 ‘모어’로 표현함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도올·김용옥, 저, <<여자란 무엇인가?>> 서문 참조). 일본과 한국에서 ‘모국어’라 하고 중국인은 ‘모어’라 하는데, 이는 일본과 한국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그늘 하(특히 한문의 영향으로 빚어진 언문불일치 현상)에 흘러오다가 중국을 앞지르기 시작해서 자기네를 중국과의 차별화를 내세우기 위해 ‘국’이란 용어에 무게를 두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네 말을 유일하게 ‘국어’라 표현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뿐인 것이 좋은 증거이다. 남한의 갑돌이, 북조선의 갑순이, 연변의 김정룡이 같은 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국가로부터 배운 언어가 아니라 각기 자기 엄마의 혀를 통해 배운 것이므로 모국어가 아닌 모어라 함이 십분 정확하다. 그런데 우리가 순수하게 엄마의 혀로부터 배운 언어는 세계 정치, 경제형세의 변화에 따라 싫든 좋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변화하게 마련이다. 쉽게 말하자면 힘이 약한 군체는 여러모로 힘이 센 집단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며 언어도 예외일 수가 없다. 조선족은 이주민으로서 조선반도에서 엄마의 혀로부터 배운 언어를 유대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지만 필경 약소집단이기에 부단히 대륙언어인 한어와 본가인 반도언어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의 본가는 남북이 쪼개져 있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매우 이질적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모어도 매우 혼란을 겪고 있다. 현 시점에서 조선족의 언어는 개혁개방 전보다 많이 변화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변화해야만 민족이 생존할 수 있다는데 대해선 의논의 여지가 없는듯하다. 문제는 엄마로부터 배운 조선어를 계속 살리는 전제하에서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조선족문인학사들이 나름대로 견해를 피력하고 있고, 더 뜨거운 논쟁을 위해 나의 생각도 말해보려 한다. 첫째 조선어를 한국어로 바꿔야한다는 주장에 대하여이 주장을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은 류연산 교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류연산 교수의 이 주장은 시기상조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현재 재한 조선족이 30만이 넘고 이미 한국에 장기체류하다 돌아간 수가 10만~20만이 될 거고, 단기비자로 한국에 왕래하는 조선족 수를 합치면 어마어마한 조선족이 직접적으로 한국어의 영향을 받고 있고, 중국 내 조선족 가정들에서 한국위성을 시청하고 있고, 한국도서의 유입으로 한국어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해방이후 하나의 체계를 갖춘 조선어를 한국어로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비현실적이다. 조선어와 한국어는 비록 같은 민족어이지만 A에서 B로 바꾸자면 이에 따르는 경제적 지출도 문제이거니와 더욱 관건 문제는 인재이다.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전부 한국인을 불러들여 교단에 세울 수는 없고, 현재 조선족교사들에게 아무리 한국어 훈련을 시켜도 그들은 죽었다 깨도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다. 류 교수는 연변대학을 제외한 다른 대학에서는 조선어 아닌 한국어과를 설치하고 있는 것을 이유로 드는데, 그들 대학에서 가령 교재는 한국 것을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하더라도 강의를 전부 한국 교수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와 유학했거나 국내 조선어전공 졸업자들인 조선족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를 완벽한 한국어라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인을 접촉하는 일을 해왔고 한국에서 독서를 많이 해 한국식으로 글을 쓰는 데는 문제없다. 하지만 말은 아직도 조선족 티를 벗지 못하고 있어 강의한다면 한국어도 아니고 조선어도 아닌 밥도 죽도 아닌 언어로 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 여러 대학 한국어과 조선족 강의자들이 가르치는 언어는 나는 한국어도 아니고 조선어도 아닌 그냥 우리민족의 모어일 뿐이라 나는 본다. 대학이 이럴진대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조선어를 한국어로 바꾼다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이라는 결론이다. 둘째 한국어수용반대 주장에 대하여세월의 변화에 따라 언어도 부단히 변화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사실이다. 현재 조선어논쟁에 있어서 일부 조선족 지식인들은 한국어 수용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들의 주장 중에 한국어는 잡탕언어로서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한국어가 잡탕언어라는 견해에 공감한다. 우리민족의 모어는 한어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와 어휘 중 70%이상이 한자단어이고 일본인처럼 한자에 대한 훈독이 없고 음독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은 음독마저 ‘리’를 ‘이’, ‘라’를 ‘나’, ‘류’를 ‘유’라 발음하는 두음법칙인지 뭔지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실제로 이 때문에 ‘柳’, ‘李’, ‘羅’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법정소송사태까지 있었다. 한국인은 이상하게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하고, 외래어 사용에도 내적으로 시비가 없는 것이 아닐 정도로 한국어가 많은 논란을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잡탕언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일본어도 平假名와 한자를 섞어 쓰고 片假名으로 외래어를 표기하고 일상생활에서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잡탕언어이지만 일본은 세계 두 번째로 꼽히는 선진국이고, 한국도 잡탕언어이지만 중진국으로 발전했고, 현재 우리조선족사회는 특히 경제적으로 한국에 매달려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르듯 언어도 역시 선진적인 곳에서 후진적인 데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조선족의 언어도 알게 모르게 한국식으로 많이 변화해가고 있다. 한국어가 잡탕언어라 해서 배격하고 싶어 배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언어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놈의 언어인 미국식영어(영국인의 입장에서 하는 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세계 공용어로 된 것이 아니고, 옛날 장안 사람들의 눈에 촌놈의 언어로 인식되었던 燕京말이 표준화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한국어가 비록 많은 폐단을 안고 있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용하고 있고 앞으로도 수용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일부 지식인들의 고집처럼 조선어어문조례를 들먹이고, 서사규범을 내세우고, 조선족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어수용을 극단적으로 반대한다면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 서사규범은 문법 중심을 의미하는데, 문법이란 것은 우리민족 역사에서 끽해야 반세기밖에 되지 않으며, 입시기준을 위해 강조되는 것이고 실생활에서는 아무런 역할이 없다. 다시 말해서 문법을 알아도 그렇고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나의 경우 시골소학교 3학년 때 문화혁명이 일어났고 초중부터 한족반을 다녀 조선어를 매우 엉터리로 배워 문법을 모르고 서사규범이 뭔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말로 글 쓰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일본인 谷岐潤一郞은 그의 저서 <<문장독본 >> 서문을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이 반드시 명문은 아니다. 그러므로 문법에 갇히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가 존재하고 출판물이 존재하는 한 문법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규범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것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이다. 조선족사회가 한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고, 한국어로 의사소통할 일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조선어문조례나 낡은 서사규범에만 매달리지 말고 한국어를 수용해야 한다. 나는 흑룡강신문이 이 면에서 잘하고 있다고 본다. 즉 한국어를 수용하는 동시에 외래어에 해석을 달아주는 등 조치는 비교적 현명한 처사라 생각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모어를 살리는 동시에 한국어를 적절하게 단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한다.
6    中혐한증은 韓의 부메랑 효과 댓글:  조회:6837  추천:112  2008-09-03
<論과爭>中 혐한증은 韓의 부메랑 효과   김정룡 kzl0917@naver.com   지난 일요일 동네 책가게에 갔는데 <<삼족오>>란 책이 눈에 들어와 습관적으로 서문을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따라서 나로 하여금 왜 중국인이 한국인을 싫어하는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떠올리게 했다. <<삼족오>>의 저자 임영기 씨는 자신을 격조 높은 작가라 자평하고는 중국인을 ‘장쾌(짱개)’라 욕하고, 되도록 오줌을 중국 쪽에 향해 누고, 침을 중국 쪽에 향해 뱉는다는 저질스런 말을 했다. 나는 직업적으로 재한한족들을 많이 접촉해 한국인이 직장에서 한족을 ‘때놈, 짱개’라 욕한다는 것을 심심찮게 들어 알고 있지만 한국 지성인이 책에서 노골적으로 이런 욕을 하리라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너무 경솔한 처사다. 만약 중국인이 책에서 한국인을 ‘까오리빵즈(高麗棒子)’라 욕한다면 한국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소위 대한민국의 얼굴인 방송사 아나운서와 기자들이 중국과 중국인을 논할 때 너무 경솔하게 언행을 내뱉는 사례는 허다하다. 2004아테네올림픽 때 여자양궁개인전에서 한국이 1점차로 중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건 사실을 MBC가 보도하면서 “보시오, 그래도 고구려가 중국 것입니까? 한국 것입니까?”고 아나운서가 흥분하며 말했다. 이 아나운서의 논리대로라면 양궁의 승패에 따라 고구려가 한국 것이 되었다가 중국 것이 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아닌 게 아니라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양궁이 한국을 이겼으니깐 뭐라고 해야 할까? 자못 궁금하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앞둔 며칠 전에 중국 전 국가 주석 강택민이 장백산에 놀러갔는데, KBS는 “강택민이 백두산에 간 것은 동복공정을 노골화하는 행위다.”고 보도했다. 등소평이 장백산에 가서 일출을 보려고 다섯 번 등산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장백산에 갔던 등소평도 동북공정 때문이었을까? 자국의 관광지를 자국지도자가 유람 가는 사실을 두고 외국인의 입장에서 가볍게 떠드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언론들은 중국산 비하에 꾸준하게 열을 올려 왔다. 국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하는 보도라 짐작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재한조선족들의 한결 같은 반응이다. 문제는 재한한족과 조선족도 따라서 ‘값 싼 중국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은 돈 벌기 좋은 나라, 하지만 한국인은 싫다.” 현재 재한한족과 조선족 수를 합치면 4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들이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한 사실이 중국에 있는 가족, 친인척, 친구들에게 전해진다면 수백만에 이르는 중국인이 혐한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다음 한국인은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떠들고 있지만 사실 한국인의 역사왜곡수준이 중국과 일본을 뺨칠 정도로 도가 심각하다. 임영기 씨는 그의 <<삼족오>> 서문에서 “한국으로부터 문화와 숱한 문명을 가르침 받기 전의 중국은 원시시대 야만족이나 다름없었다. 저 유명한 치우천황이나 중국인이 존경해마지 않는 복희씨, 신농씨, 그리고 중국에서 불신으로 추앙받는 염제가 한국의 환인이 중국에 보내어 교화토록 한 역사적 사실이 이미 정설로 되어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뿌리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이듯이 삼족오의 뿌리가 하나이며 그것은 한국이다.”고 썼다. 이 주장대로라면 한국이 동아세아 문명의 뿌리이고 따라서 고대4대문명국에서 중국을 빼고 한국으로 바꿔야 마땅하다. 중국에서는 이미 삼족오가 원고하인(遠古夏人)의 창조품이라는 역사고증을 마쳤고, <<생식숭배문화사상>>의 저자 조국화(趙國華) 선생은 “삼족오가 나타나기 전의 이족오는 모계시대 여성태양신을 상징하고, 까마귀가 다리 세 개인 것은 그 중 하나는 남근을 상징하며 이는 모계시대로부터 부계시대로 이행한 역사과정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삼족오에 대한 해석은 이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일봉 씨, 임영기 씨를 비롯해 보편적으로 삼족오를 천부인 세 개에 꿰맞추고, 고구려 신라 백제에 짝짓기 하는 등 주관 억측으로 해석하며, 시간적으로 겨우 고구려벽화에 나타난 삼족의 뿌리를 중국이 아닌 한국이라고 우겨댄다. 이일봉 씨는 그의 <<환단고기>>에서 “전체 아세아 땅은 한국인의 것이었고, 전체 아세아인은 한국인의 후대이고, 도교는 한국인이 지어낸 것을 중국이 수입해 발전시켰다.”는 등 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들을 잔뜩 늘여놓았다. 2002한일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홍색이 한국인의 조상인 치우에서 비롯되었다고 김지하를 비롯한 지성인들이 주장하고 있다. 중국인은 치우를 戰神으로 추앙하고 있고, 묘도 있고 민간인이 관리하고 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이 치우를 자기네 조상이라는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사람(공자는 노나라 사람이었고, 노나라는 동이족의 후손들이 살았고, 한국인도 동이족의 후예이기 때문에, 고로 공자는 한국인이라는 주장이다. 아리스토델레스의 삼단논법에 근사한 결론처럼 보이나 어처구니없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다. 한국인이 동이족의 후예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동이족의 후예는 수백 갈래로 나뉘었기 때문에 공자와 한국인을 연결시키는 것은 아무런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이라는 여론이 떠들썩하다가 결국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공자가 한국사람이라는 주장에 이어 한때 한문도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한문은 은나라 때 만들어졌고, 은나라는 동이족이 지배했고, 한국인의 선조는 동이족이고, 고로 한문은 한국인이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요즘 한국00교수가 중국인이 개국아버지로 받드는 손중산을 한국인혈통이라 발언해 시끄럽다. 이 외에도 한국인의 역사왜곡사실이 수두룩하며 중국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석자 얼음이 하루아침에 얼소냐!는 속담이 있듯이 중국인의 혐한감정은 하루 이틀에 생겨난 일이 아니다. 오스트리아(오지리) 황태자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피살된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폭발의 도화선이 되었듯이 SBS의 베이징올림픽개막식리허설 도둑촬영방송사건은 중국인이 혐한감정을 폭발하는 도화선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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