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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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국인은 왜 조선족호칭을 싫어할까? 댓글:  조회:4821  추천:43  2008-02-05
한국인은 왜 조선족호칭을 싫어할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한국학자들과 조선족학자들이 한국에서 조선족호칭에 관한 주재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한국학자들은 조선족호칭을 부정하려 하고 조선족학자들은 조선족호칭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했고, 결국 아무런 결론이 없이 유야무야 하고 말았다. 요즘 들어 한국에서 가장 큰 신문인 조선일보가 또 조선족호칭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섰다. 필자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학자 및 언론인들이 조선족호칭에 시비를 걸거나 부정하려드는 태도가 옳지 않다고 본다. 먼저 한국인들의 주장요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조선족이란 호칭 자체가 중국이란 대국에서 소외의 이념에서 폄하의 의미로 붙여진 것이므로 못 마땅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이나 일본에 간 우리 겨레를 재미동포, 재일교포라 부르는 것처럼 조선족이라 하지 말고 중국동포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하나는 조선족이 왜 조선족인가는 본질적인 문제를 떠나 대국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출발하여 소외의 논리로 접근하려는 데서 기인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이란 명칭이 붙은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데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조선족의 유래를 간단히 살펴보자. 17세기 중반에 전체 중국을 장악하게 된 청 정부는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 지역을 자신들의 발상지라 여기고 봉금령을 내렸다가 19세기 들어 짜리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자 봉금령을 풀고 인구의 이주를 허락하고 개간을 촉진했다. 19세기 60년대부터 조선의 조정의 부패무능과 자연재해에 시달린 백성들이 희망의 땅인 속칭 만주 땅에 이주하기 시작했고, 일제시대에 일부는 살길을 찾아 일부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에 갔다. 지금의 연변 땅은 주로 산동반도의 한족이 동북에 진출과 조선인이 공동 개발한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이 19세기 60년대부터 1949년 10월 0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까지 동북 3성과 내몽골지역에 정착하여 개간한 땅이 조선반도의 두 배나 된다. 그런데 토지소유권이 문제였다. 중화민국정부가 그 어마어마한 땅의 토지소유권을 조선인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지소유권을 갖지 못하면 조선인은 안식처를 잃게 되고 조선반도로 쫓겨 갈지 모를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 생사존망의 문제를 공산당이 해결해주었다. 즉 조선인이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에 나선다면 전승 후 토지소유권을 주겠다는 약속이었고, 공산당은 정권을 잡게 되자 약속을 지켰고, 1952년 09월 03일에 조선족자치정부까지 수립케 했다. 이렇게 조선인은 정치상 공식적으로 다민족국가의 한 개 민족으로 등록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 되었고, 자체 민족 언어, 문자, 풍속습관 등을 지켜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족의 역사는 미국이나 일본에 이민 간 우리 겨레처럼 남이 닦아놓은 터전에 발을 들여놓은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스스로 삶의 터전을 개척하고 당당하게 공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나 일본에 간 우리 겨레들은 그 거주국에서 정치적으로 하나의 ‘族’으로 등록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학자와 언론인들은 중국에서 조선인이 하나의 ‘족’으로 등록된 것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족’은 가족, 친족, 부족, 민족 등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살아가는 집단공동체에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조선족’이란 ‘족’은 정치적으로 소외의 이념에서 유래되었다는 엉뚱한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체 민족인 한족도 자신들을 하나의 ‘족’으로 말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중국에서는 인적사항을 적는 모든 등기부에 반드시 민족을 밝히는 칸이 있는데 조선족을 포함한 55개 소수민족만 적는 것이 아니라 주체민족인 한족도 반드시 적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중국은 56개 다민족국가이고 정치적으로 ‘족’을 사용하는 것은 민족마다 자신들의 문화를 갖고 의미 있게 살아가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한국인은 복잡다단한 중국의 실정과 조선족의 유래를 살펴보지도 않고 피해의식으로 소외의 논리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 유명 00여교수는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중앙에서 00프로를 진행하면서 음악회에 조선족을 포함한 기타 소수민족을 참여시킨 것을 “중국정부가 소수민족을 가면으로 끌어안는 척하는 쇼를 부리고 있고, 여기에 시키는 서방질하는 조선족이 불쌍해 마음이 씁쓸하다.”고 했다. 참 어이가 없는 발언이다. 중국에서는 거국적인 행사에 반드시 소수민족을 참여시키고 있다. 이는 중앙정부가 다민족국가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정책(전략)이다. 중국실정을 모르고 남의 일에 이렇쿵 저렇쿵 하면서 중앙정부와 조선족사이를 이간질하는 듯 한 발언을 삼가기 바란다. 다음 조선족은 조선시대부터 이주했고, 중국에서 확실하게 하나의 ‘족’으로 등록하고 민족 집단공동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부르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는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중국동포라 불러도 무방하지만 왜 조선족호칭자체에 시비를 걸고 부정하려 하는지? 여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만약 조선족이 ‘韓族’으로 등록되고 ‘韓族’으로 불리운다면 한국인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한국학자와 언론인들은 조선족호칭을 없애고 한인, 한민족, 한국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춘향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국인들이 조선족호칭을 싫어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韓’이 아닌 ‘朝鮮’이 붙여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1992년 08월 24일 한중수교 이전에는 조선족들이 한국을 남조선이라 부르다가 현재는 한국, 한국인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인은 ‘조선’이란 개념을 싫어하다보니 조선족호칭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상대의 존재를 존중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면 될 것을 왜 문제 삼고 떠들고 있는지?
19    조선족의 근본문제는 ‘경(經)’이 사라진데 있다(김정룡) 댓글:  조회:4262  추천:54  2008-02-04
  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3.조선족의 근본문제는 ‘경(經)’이 사라진데 있다(김정룡)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족정체성문제가 열점화제로 불거진 지도 어언간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 동안 수많은 조선족문인학사들이 관심을 갖고 다각도로 연구 끝에 일부 좋은 견해들을 내놓았으나 문제의 본질을 떠나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헛다리짚기,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발표된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 유감으로 느껴진다.  필자는 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고 조선족의 근본문제는 ‘경(經)’이 사라진데 있다고 본다.  ‘경(經)’이란 실 사변과 줄기 경자가 합쳐진 글자로서 본래 날실을 뜻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천을 짤 때 먼저 내리 줄 즉 날실을 세워놓고 가로 줄 즉 들실을 끼워놓는다. 옛날 시골에서 구차할 때 초대(草袋: 벼 짚 가마니)를 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잘 알고 있겠지만, 먼저 틀에다 날줄을 세워놓고 벼 짚 한 오리씩 끼워 넣는다. 천을 짜거나 초대를 짤 때 그 날실을 세우는 것이 곧 ‘경(經)’이다.  이 날실에서 유래된 ‘경(經)’은 무수한 뜻을 갖고 있으나 대체로 기본, 규칙, 권위, 진리, 원칙, 원리를 의미한다.  인류가 야만시대로부터 문명시대에로 전환된 징표가 바로 ‘경(經)’의 수립이다.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도교 등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자체 교리교의를 갖고 있는데 그 교리교의가 담겨진 책을 ‘경전’이라 하며 ‘경전’으로 인간사회 윤리, 도덕, 질서 및 일상생활의 규범을 만든 것을 ‘경(經)’이라 한다.  우리 조선민족은 단군시대부터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사상이 ‘경(經)’으로 자리매김 되어왔으며, 기자의 홍범구주, 한4군(漢四郡)시기부터 유가와 도가가 도입되었고, 1600년 전 불교가 유입되어 고려 말까지 불교가 전반 사회 ‘경(經)’으로 되었다.  불교는 집단적 파워보다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고 고려시대는 불교일색이었던 탓으로 사회는 횡적인 패턴이었기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립은 곧 고려시대 불교로 인한 횡적사회패턴을 유교적인 수직사회패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조 500여년을 통해 유교를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뼈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받아들여 전반 사회 구서구석에 침투되어 유교가 강력한 ‘경(經)’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정치면에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문신독재(文臣獨裁)’, ‘유생권위(儒生權威)’,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분화’ 등등이고, 문화면에서 ‘배불존유(排佛尊儒)’, ‘선비숭상’, ‘주자학 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등등이고, 생활면에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키고, 가족 내에서 제사를 높이 받들고, 종가문화가 확실하게 정착되고, 가부장적문화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등등이다. 이 외에도 ‘남존여비’, ‘칠거지악’, ‘이혼불갗, ‘재혼불갗 등 결혼관, 정조관이 모두 조선조 500여년을 통해 철저하게 확립되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봉건사상’, ‘봉건습관’이 절대다수가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유교의 수립에 따라 확립된 것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150년 전부터 조선반도의 획일적인 유교의 ‘경(經)’을 갖고 중국에 가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살아오는 과정에 점차 중국문화를 흡수하면서 ‘이중문화’를 갖게 되었고, 또한 중국의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선족의 ‘경(經)’이 많이 변화되고 심지어 무너져가고 있는 단계에 처해 있는 것이 조선족의 현주소이다.  조선족이 한 때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꼽히게 되었던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자체 훌륭한 ‘경(經)’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조선족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이란 10년 동란 시기에 ‘경(經)’이 깨지기 시작해서 개혁개방이후 현재 ‘경(經)’이 박산 직전에 이르러 조선족사회가 크게 휘청거리고 있다.  문화혁명시기에 이른바 ‘파4구(破四舊)’운동으로 인하여 조선민족의 미풍양속으로 전해온 제사를 비롯한 전통풍속이 타파되었고, 스승과 제자는 한 전호 속의 전우라는 ‘미명’하에 학생이 선생에 대한 존경이 사라졌고, 노인에 대한 존경도 많이 사라졌으며, 노선투쟁에 뛰어들어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고 형제간에 반목하고 친척끼리 등을 돌리고, 기타 소수민족에 비해 조선족은 가장 혁명의 선두에 서서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아무튼 조선족은 ‘연변은 마레의 고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상이 지나치게 빨개 갖고 대국혁명의 선두에 서다보니 조선족사회가 쑥대밭이 될 지경으로 전통적인 ‘경(經)’이 박산나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의 후유증이 채 가셔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개혁개방을 맞이한 조선족은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우선 ‘문화혁명이란 호랑’이가 사라지자 본래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하는 조선족이 마치 고삐가 풀린 말처럼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력을 몰두하여 정신세계가 피폐해졌고, 농촌에서 한족들은 농한기에 싸리 광주리를 튼다든가 비를 짜는 등 쉬지 않고 일을 하여 돈을 버는 반면에 조선족은 그 기나긴 겨울철에 화토놀이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도시에서도 한족들이 조선족의 돈을 번다는 얘기가 있듯이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두 배되는 땅을 개간하던 근면의 정신이 오간데 없이 일하기 싫어하는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뭐니 뭐니 해도 조선족이 개혁개방을 맞아 전통적인 윤리도덕을 벗어나 모든 것을 돈으로 행세하고 돈으로 도배하려하고 돈으로 해결하려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양심과 체면과 도덕을 버리는 등 유교적인 것과 공산주의적인 것들로 이루어졌던 아름다운 ‘경(經)’이 소실되어 조선족사회는 ‘천박’한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예하면 청렴의 상징이었던 조선족‘선비(교원)’들은 학부모들로부터 돈이나 받아먹는 손가락질 당하는 대상이 되었고, 학부모들은 저마다 제 아이만을 위해 선생한테 돈을 주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가장 신성한 교단이 돈거래로 얼룩지게 되었다.  자식교육에 있어서 귀한 자식 한 매 더 때리라는 ‘회초리 교육’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주고 어처구니없게도 세배 돈을 천원, 만원씩 퍼주는 등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일본이 아무리 잘살아도 애들이 자전거나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되도록 걸어서 등교하게 한다. 이와 반대로 연길시 각 학교(특히 소학교) 정문 앞에는 등교와 하교시간이 되면 택시들이 줄을 늘여 서고 있다. 학생들이 택시 타고 학교를 다니는 현상만 본다면 연길시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여튼 현재 조선족의 자식교육은 여러 면으로 볼 때 ‘경(經)’이 없이 되는대로 자식을 키우고 있다.  그다음 조선족은 유교적인 ‘경(經)’으로 형성되었던 결혼관과 정조관은 돈을 위해서 다 박산나고 있는 중이다. 멀쩡하게 잘살던 부부가 일방이 한국에 가기 위해 이혼하고, 부부가 조금만 갈등이 생기면 한국에 가기위해 이혼을 서두르고, 처녀애들이든 아줌마들이든 돈을 위해서라면 혹은 한국에 갈수만 있다면 노인한테도 주저없이 옷을 벗는다.  더욱 한심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조선족은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결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남자 한 명이 조선족 여성 10여 명을 선 본다. 이럴 경우 한국인이 잘나고 조건이 훌륭하고 조선족여성들이 볼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다. 구매자(조선족 여성)는 줄을 섰는데 물건(한국인 남자)이 턱 없이 부족하고 또 구매자는 물건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사기만 하면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여성들은 한국인 남자한테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국 땅을 밟기 위해 ‘한국’과 결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진짜 결혼으로 온 여성들 중 국적신청 때문에 한국인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거나 정말 도무지 유지될 수없는 혼인생활도 국적 때문에 참고 견디고 있는 현상도 역시 조선족 여성은 한국인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한국’과 결혼한 증거라 말할 수 있다.     모두어 말해서 현재 조선족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여러 가지 추태들이 출연되고 있고 전반 조선족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데, 그 근본원인이 조선족사회가 전통적인 ‘경(經)’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적인 ‘경(經)’이 사라져가는 현상이 우리 조선족만의 일은 아니다. 서구에서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을 때 1900년에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포했고, 1919~1922년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발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동양에서 서구배우기에 앞장섰던 일본이 19세기 말에 ‘전통’이냐, ‘외제품’이냐를 놓고 피비린 다툼까지 있었다. 중국도 20세기 초 ‘전반서화(全盤西化)’바람이 불었고, 마레주의 도입과 더불어 문화혁명까지 겪고 난 후 전통문명이 단절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국은 광복 후 기독교가 급격히 확산되는 바람에 전통문명과 크게 마찰을 빚게 되었다. 더욱이 동양은 물질문명의 공세에 밀려 전통적인 가치관과 도덕관이 무너져가고 있는 추세이다. 허나 동양 삼국은 한바탕 ‘문명의 충돌’을 거치고 나서 모두 ‘제자리(전통을 살리는 것)’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고 있다.  문제는 우리 조선족은 본래 뿌리가 취약한 소수민족이란 신분으로 민족주체성을 상실해왔으며, ‘경(經)’이 취약한 조선족은 개혁개방을 맞게 되자 모든 것은 ‘돈을 위하여’로 변질되어 전반 조선족사회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나 한국은 어찌되었든 전통적인 ‘경(經)’을 회복할 수 있는 역사적인 파워를 갖고 있는데 비해, 우리조선족은 ‘경(經)’이 상실되면 회복시킬 능력과 파워를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현재 우리 조선족은 ‘경(經)’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목자를 잃은 양떼와도 같아 모래알처럼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조선족의 ‘경(經)’을 회복하고 바로 잡고 우수한 민족이란  타이틀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목전 조선족 사회 지성인들이 머리를 짜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18    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다(김정룡) 댓글:  조회:4537  추천:62  2008-02-04
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2.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다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은 한 때 세상에서 가장 스케일이 크고 사이즈가 넓다고 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문화가 제일이고, 위생이 제일이고, 체육이 제일이고, 등등 가장 우수한 민족이란 아름다운 렛델을 달고 자랑스럽게 살아왔다.  이렇듯 자타로부터의 공인 속에 가슴 뿌듯이 살아오던 조선족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시댁’과 ‘본가의 가운데 입장(정판룡 교수의 논리)에서 방황하게 되자 “우리는 누구냐?”는 정체성논란이 일어 크게 몸살을 앓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는 조선족공동체해체라는 위기의식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최근 들어 어떤 학자 분들께서는 "조선족이 사느냐 죽느냐는 생존기로에 서있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조선족사회가 이토록 크게 흔들리게 된 원인은 농경문화중심으로 살아오던 조선족이 개혁개방의 물결에 따라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민족으로 탈바꿈 하게 되어 중국 내 대도시와 연해도시 및 해외진출 수가 급증하는 단향적인 인구유동 때문이라고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다.  조선족이 1세와 2세들이 피땀으로 가꾸어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유동이 인구감소, 교육위기, 이혼율상승, 자녀교육 등 일련의 부작용을 불러오고 있는 것만은 그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엄연한 조선족사회문제를 둘러싸고 혹자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지 말라고 호소하고, 혹자는 떠나는 것이 일시적이고 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도기 현상이므로 미래 조선족발전에 ‘폐(弊)’가 아니라 ‘이(利)’가 된다고,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좀 더 전개해서 말하면 무작정 고향을 떠나지 말라고 호소하는 분들은 물론 여러 가지 좋은 견해를 갖고 있겠으나, 주요하게 어릴 적부터 고중까지 순수 우리말, 우리문화로 교육받아야 민족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거꾸로 조선족이 몸이 어디에 가 있고, 무슨 언어와 문화로 교육을 받든지 간에 선진적인 것을 배우고 장끼를 부리고 살거나, 혹은 선진적인 것을 갖고 고향에 돌아간다면 미래 조선족사회는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필자는 이미 여러 잡지와 신문지상에 위 두 가지 주장 중 후자의 편에 서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가 있다. 나는 조선족의 최대비극은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유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빈곤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 한다.  한 민족의 문화는 곧 그 민족을 우수하게 만드는 관건적인 요소이다. 조선족이 한 때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았던 이유가 바로 조선족문화가 훌륭한 문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족문화가 우수했다고 하는 것은 폐쇄되었던 중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우수했던 것일 뿐, 결코 세계화시대에서도 우수한 문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아울러 조선족문화는 폐쇄된 언저리문화로서 현시대에 뒤떨어진 문화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족문화는 그 뿌리를 한반도에 두고 있음에도 옛날 조상들의 역사문화를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 적으며, 중국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중국역사문화를 잘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나 불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조선족문화는 일종 폐쇄된 언저리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폐쇄적인 언저리 문화를 아직도 우수한 문화라고 착각하고 고집한다면 조선족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 조선족지식인들이 어릴 적부터 고중까지 우리말 우리문화로 교육받아야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 인정받고 있는 유태인 중 걸출한 인물인 맑스, 막스·베버,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챠플린 등이 히브리어를 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유태인은 자민족의 언어와 문화는 중요치 않고 종교적으로 아이텐티를 보존하고 타민족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중앙 cctv8채널에서 방송하고 있는 <<엄마의 장국집>>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인 김인옥 씨는 조선족이 없는 통화시 광구에서 나서 자랐고 후에 장춘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조선 글, 조선말을 아예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필경 조선족이기 때문에 한반도역사에 관한 소설도 여러 편 써냈을 뿐만 아니라 오직 조선족이라야만 쓸 수 있는 조선족의 삶을 반영하는 드라마도 써냈다.  연변의 일부 조선족 지식인들의 주장대로라면 김인옥 씨는 조선글, 조선말을 전혀 몰라 이미 한족으로 동화된 조선족으로서 조선족정체성을 다 잃어버렸을 것이다. 허나  정반대로 김인옥 씨는 그 누구 못지않게 조선족정체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나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관건이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반드시 우리말, 우리문화로 교육받아야만 하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거나 대안은 아니라 본다. 솔직히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자라 연변대학이나 민족대학을 나온 조선족 졸업생들보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한족집거지에서 나고 자랐고 소학교는 조선족학교, 중학교부터 대학까지는 한족학교를 다녔으며 연변 밖의 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시야가 더 넓고 장악한 지식도 더 많으며, 또 조선족정체성에도 관심이 더 많은 현상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음은 조선족은 학교교육이나 사회 환경에 문제가 많으며 가정환경도 문제가 많다. 중국에서 살면서도 공자, 맹자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더러 명색이 조선 사람이지만 단군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러니 예수, 부처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일전에 조선족문단에서 중견작가로 꼽히는 00분마저 한국에서 글을 발표하면서 ‘사서오경’을 읽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정도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천박하다.  실제로 조선족 대다수는 학교 때 협소한 지식을 전수받고 어른이 된 후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지식에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책을 읽지 않고 있기에 술상에 앉거나 모이면 한다는 얘기가 ‘돈이요, 애인이요, 출국이요 ’등등 말뿐이다. 어른들이 이 꼴이면서도 애들한테는 공부하라고 한다. 이러한 ‘천박한’ 환경에서 보고 배우고 자라는 우리 조선족 후대들의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작년 겨울 연길에 갔을 때이다. 명색이 배웠다는 친구 여섯과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술상에서 오가는 말 전부가 ‘탸오펑(調風:남녀가 끼여 앉는 자리정돈)이요, 누구네는 마누라(혹은 남편)가 출국하고 없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좋겠다느니 마작을 놀아 돈을 얼마 잃었고 땄다느니, 어느 노래방 아가씨들이 예쁘더라는 등 잡소리  뿐이었다.  필자가 우리민족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고 있는 말의 유래에 관해 역사문화 이야기 형식으로 말했더니 모임이 끝날 무렵 좌중의 여성들은 “술 모임에 많이 참석해봤어도 오늘처럼 의미가 있는 장소는 처음이다. 연변사람들의 술 모임도 앞으로 이런 분위기로 바뀌어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는 것이었다.  조선족의 문화수준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이미 호랑이 담배피울 때 얘기다. 조선족 지식인들은 분발하여 세상만사 지식을 습득하고 후대들에게 전수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조선족 미래가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대만 여류작가 경요는 6세 때 이미 당송 300수 시를 외웠다고 한다. 요즘 중앙TV <백가강단>에 “논어를 말하다”는 프로로 ‘치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우단(于丹)은 어릴 적에 부모가 <<논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한족들은 어릴 적부터 역사문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다. 이와 반대로 우리 조선족은 역사문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고 유치원에서 구구단을 외우고 철자를 읽히면 마치 천재인양 떠들어 대고, 소학교부터는 매번의 성적표에만 ‘목숨’을 걸뿐이다. 때문에 조선족 작가들은 중국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중국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자기네끼리 쓰고 자기네끼리 읽고 자기네끼리 평론하고 자기네끼리 상을 주고 하면서 자기네끼리의 잔치로 끝나고 만다.  김인옥 씨가 중국에서 70후작가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어쩌면 조선 글, 조선말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성공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만약 그녀가 조선족집거지에서 나고 자라고, 우리글 우리말로 교육을 받았더라면 죽었다 깨도 오늘날의 김인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두어 말해서 조선족지성인들은 지금까지 조선족정체성에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얘기를 하고 있고, 또 현재까지 조선족이 문화수준이 높다고 자평할 뿐, 조선족의 최대비극이 바로 지식의 빈곤이라는 지적하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조선족이 중국에서도 인정받고 한국에서도 인정받고 나아가서 일본이나 구미대륙에서까지도 인정을 받으려면 세상 만방에 많이 뻗어나가야 하고, 따라서 세상 만사 지식을 많이 습득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렇게 결론짓고 싶다.  첫째 우리글, 우리문화만의 교육이 조선족정체성을 지켜내는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둘째 조선족문화는 폐쇄된 언저리문화로 세상을 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셋째 조선족사회가 바뀌려면 ‘우리 것’만 고집하지 말고 어릴 적부터 타민족의 역사문화를 배워야 한다.  넷째 조선족사회 최대 비극은 단향적인 인구유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식의 빈곤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7    “조선말이 중국어가 아닌가요?” 댓글:  조회:4338  추천:62  2008-01-21
“조선말이 중국어가 아닌가요?” -한국의 문화혁명에 대하여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12월 중순 어느 날 저녁 한국의 한 공직에 계시는 분이 한턱 쏜다고 해서 한국인 셋, 조선족 셋 여섯 명이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음식이 올라오기 전에 20대 후반의 한국 아가씨가 같은 또래 조선족처녀보고 “00씨는 한국말이 편해요? 중국말이 편해요?” 고 묻는다. 조선족처녀 왈 “가장 편한 말은 그래도 조선말이지요.” 이 말을 들은 한국 아가씨가 느닷없이 “조선말이 중국어가 아닌가요. 뭐 조선말이 따로 있어요?”라고 말해 좌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말이 조선말이고 중국어는 중국어이지 어떻게 조선말이 중국어입니까? 조선말은 단군고조선 아니 썩 전부터 동이(東夷)의 일부였던 한 부족이 쓰던 말이 고조선이란 ‘국가실체’에 의해 자리매김 되었고 부여, 고구려, 고려 등을 거쳐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고, 518년의 조선시대를 통해 오늘과 같은 모양새를 갖춘 민족 언어가 아니냐! 특히 조선말이란 개념은 고조선과 조선의 유구한 역사에 의해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이지요.” 조선말이 중국어라고 여기는 것은 한국 아가씨 한 개인의 무지문제가 아니라 나는 본다. 이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래, 특히 6.25를 거치고 나서 남과 북이 철천지원수가 됨에 따라 서로 韓과 朝鮮이란 나라, 민족, 언어, 문자 등 호칭사용을 부정하고 이남에서는 이북을 북한, 이북에서는 이남을 남조선으로만 부르게 만들었던 기성세대들의 잘못된 이념과 사상교육 때문에 빚어진 어린세대들의 무지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6.25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뺨치는 문화혁명운동을 추진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중국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권력투쟁에서 시작해서 ‘파사구(破四舊:낡은 사상, 낡은 풍속, 낡은 문화, 낡은 습관)’을 거국적으로 한바탕 떠들썩하게 크게 벌여 황하대륙이 쑥대밭이 되었으나 조상대대로 이어온 민족을 아우르는 ‘華’의 개념과 자부심만은 버리지 않았다. 1978년 잠자던 중국이 대외문호를 개방하자 해외에 흩어졌던 ‘華人, 華僑’들이 적극 발을 들여놓았고 특히 1989년 천안문동란으로 구미와 일본인의 대중국투자가 주춤할 때 그들이 주저 없이 많은 투자로 중국의 시장경제정착에 도움이 컸다. 현재까지 해외에 있는 중국계인은 자신을 ‘화인, 화교’라 하고 중국인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으며 아울러 ‘화인, 화교’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중국어라 하기보다 ‘華語’라 말한다. 중국어란 개념은 외국인의 입장에서 하는 말일뿐 중국에는 중국어란 말이 없다. 전체인구의 93%를 차지하는 주체민족인 한족이 쓰는 말을 유방의 한조에서 유래된 한어라 하고 일본과 한국처럼 국어란 말도 없다. 세상에서 국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뿐인데 일본인이 자신들의 언어가 중국과 조선반도와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지어낸 말을 한국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중국이란 국명은 중원을 천하의 중심이라 여기고 주나라 시기부터 있어왔으나 역사적으로 줄곧 사용되어왔던 것이 아니고 19세기부터 구미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CHINA’와 ‘CHINESE’를 주제로 연구하고 책을 펴냄에 따라, 또 청나라 후기 국민과 중화민국 국민들이 해외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중국, 중국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므로 200년 역사도 되나마나 하다. 그러므로 중국이 말하는 5,000년 역사란 곧 ‘華夏’의 역사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국가란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 같은 문화를 공유하면서 살아남은 집단체야말로 영원한 실체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중국인의 ‘華’에 해당되는 개념이 곧 ‘朝鮮’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해체되고 조선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국명, 예하면 대한민국 같은 국명을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조선’이란 개념은 버리지 말아야 역사를 지키는 도리일 것이다. 허나 한국의 현실을 보면 마치 한때 ‘동무’라는 말이 이북에서 쓰는 것이라고 해서 사용을 금지시켰던 것처럼 ‘조선’이란 표현에 굉장히 거부감을 갖고 이북을 북한, 해외겨레를 한인,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 문자를 한글 등 천편일률로 ‘韓’을 붙인다. 얼마 전 중국중앙조선말방송 조선족아나운서 박일천 씨가 우수상을 탄 사실을 한국에서 보도하면서 조선말방송을 한국어방송이라 임의로 고쳐 보도했다. 한국의 모든 언론매체와 출간물들에서 전부 이런 식으로 조선말을 한국어라 옮겨놓으니 대학을 나왔다는 20대 젊은이들이 세상의 우리 민족 언어는 ‘한국어’만 존재하고 다른 표현으로 없는 것으로 알고 조선말이 중국어 아닌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따져보면 한국어란 개념은 현재 38선 이남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일 뿐(1990년대 초반 연변대학조문학부를 졸업한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언어시험을 봤을 때 불합격을 맞은 사례가 많았는데 그 이유로서 한국 교수분들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족이 배운 것은 조선어이지 한국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체 이북과 해외동포들이 사용하는 말을 한국어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조선말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선’이란 표현은 우리민족역사를 아우르는 개념이 될 수 있으나 한국이란 표현은 우리민족역사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말이 중국어 아닌가?’라는 한국 20대 젊은이의 질문은 소위 단군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신세대들의 비극이라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 비극은 기성세대들의 잘못된 이념과 사상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현재 20대 젊은이들은 앞으로 남북통일의 주인공이 될 터인데 이북과의 교류에서 ‘韓’만 고집하고 ‘조선’이란 표현을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빤한 일이 아니겠는가?
16    중국인이 반지를 '戒子'라 부르는 유래 댓글:  조회:4016  추천:77  2008-01-15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22 중국인이 반지를 ‘戒子’라 부르는 유래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고대중국인은 여성의 생리는 이칠 십사에 시작해서 칠칠 사십구에 끝난다고 보고 여성이 50대에 들어서면 여자구실을 상실하게 된다고 인식했다. 아울러 고대중국인은 여성의 생리주기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주기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생리를 ‘월경’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월경은 생명과도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여성은 월경이 있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월경이 있어야 성욕이 생기고 성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월경이 여성을 여성답게 만든 동시에 또 여성은 월경이 있어 천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이에 따르는 금기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원시인은 현대인처럼 패드(생리대) 사용이 없어 생리가 오면 가랑이에 피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 했다. 원시인은 피를 보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하여 생리 중에 있는 여성을 밖에 다니지 못하게끔 감금했다. 서양에 가까운 중동발 기독교에서 생리 중에 있는 여성을 교회출입을 금지시킨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하나님이 피를 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생리에 대한 또 하나의 금기로서 생리 중에 있는 여성과 성생활을 삼가는 것이다. 고대원시인은 생리 중에 있는 여성과 교합하면 아이를 배는 확률이 높다고 인식하고 열심히 해댔다고 한다. 허나 인류가 문명시대에 진입한 이래 생리 중에 있는 여성과는 교합하지 않는 것이 상식으로 굳어져왔다. 일부 인류문화학자들은 일부일처제사회에서 생리 중에 있는 여성(부인)과의 교합을 금기시하는 ‘관습’이 축첩제와 기방출입 문화가 생겨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본문주제와 무관하므로 더 전개하지 않겠다. 아무튼 인류가 문명시대에 들어서 월경 중에 있는 여성과의 교합을 금기시하는 것만은 하나의 룰로 되어왔다. 그런데 보통 부부들은 여성이 생리가 오면 남편과 말할 수 있어 자연스레 교합이 금기될 수 있었으나 수천 명의 궁녀가 군집해 사는 궁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즉 궁녀들이 자신이 생리가 왔다고 대놓고 황제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개 궁녀가 하늘과 같은 존재인 황제에게 직접 대화할 수 없는 이유도 있겠고, 더욱이 여성들이 스스로 생리를 불결하게 여기고 아울러 불결한 생리를 감히 입으로 황제에게 폭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옛날 궁중 궁녀들이 생리가 오면 손가락에 은반지를 끼는 것으로 자신이 생리 중이라는 것을 황제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본래 여성이 반지를 끼는 것이 생리 중이기 때문에 교합을 할 수 없다는 금기의 뜻을 전달하는 메시지 도구였다. 고로 반지를 금기라는 의미의 ‘戒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반지가 금기의 뜻을 전달하는 메시지 도구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남녀와 연령을 불문하고 하나의 장식품으로 되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戒子’를 아무렇게나 마구 착용한다. 특히 조선족들은 이 면에 대해 아무런 상식도 고려하지 않고 되는 대로 ‘戒子’를 끼고 다닌다. 필자가 장춘에서 공부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한 조선족 여학생이 약지(藥指)에 반지를 끼고 다녔다. 한족남학생이 나보고 “저 여학생이 결혼했는가?”고 물었다. “NO”라고 하니, “그럼 왜 약지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가?”고 토를 다는 것이었다. 뜻인즉 한족들은 약지에 반지를 끼는 것이 곧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 언론매체에서 00여성단체의 00여성이 ‘올케’의 어원이 오빠의 계집에서 유래되었다 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이 호칭을 폐지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필자는 그 보도를 보고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대다수가 옛날부터 전해온 온 것이고 또 그 어원을 따져보고 현대인의 시각으로 불합리하다고 인식하고 폐지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 남을 언어가 별로 없게 되고 그 대안으로 새로운 명사를 지어낸다면 세상은 뒤주박죽이 될 것이다. 위에서 말한 ‘戒子’란 말도 폐지하고 다른 말로 예하면 ‘金環’, ‘銀環’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인사법도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인은 악수가 가장 흔한 인사법이다. 그런데 악수는 호전적인 서양인이 자신이 손에 살상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는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00여성의 주장에 따르면 악수란 인사법도 폐지해야 마땅하다. 지난밤에 중국고서를 읽다가 위 보도를 떠올리게 되어 오늘 낮에 ‘戒子’의 유래를 정리해보았다.
15    이명박 당선이 재한조선에게 득일까, 실일까? 댓글:  조회:8176  추천:71  2007-12-24
이명박 당선이 재한조선족에게 득일까, 실일까? -재한조선족 칼림니스트 김정룡 재한조선족이 비록 선거권은 없지만 한국 대선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마 지난 제16대 대통령선거 때부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에 따라 재한조선족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보수 대변자인 이회창 후보가 불법체류외국인을 1%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는데,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재한조선족이 무더기로 강제추방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선족들이 길거리에 나서 이회창을 반대하는 데모를 했고 동시에 직접 선거에 참여할 수 없어 간접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노무현을 찍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제16대 대선 결과는 조선족들의 바람대로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현시점에서 노무현정부에 대해 한국국민들은 냉혹할 정도로 점수를 낮게 매기고 있으나 어찌되었든 지난 5년 동안 노무현정부가 조선족에 대해선 너그러운 정책을 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족은 대체로 보수적인 한나라당을 달가와 하지 않았던 반면에 진보적인 열린우리당에 우호적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족들의 이러한 ‘입장’이 제17대 대선에 그대로 반영될까? 필자는 이것이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제17대 대선이 다가오기 전에 귀화한 조선족들에게 누구를 찍을 것이냐? 또 중국국적을 갖고 있는 재한조선족에게 만약 당신이 선거권이 있다면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가운데서 누구에게 투표할 것이냐는 ‘설문조사’를 해보았다. 결과는 20%가 정동영을 지지하고 나머지 75%는 이명박의 손을 들었으며 5%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희한한 것은 이회창을 옹호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판세’는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온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한국국민들이 지역대결, 이념대결, 세대갈등 등등이 희미해진 것과 같이 조선족들의 한국 대선을 바라보는 관념도 비슷했다. 즉 20%만이 대통합민주신당이 집권해야 조선족들에게 더 폭 넚은 너그러운 정책을 펼 것이고, 거꾸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불이익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75%는 가령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이만큼 열렸는데 설마 조선족에 대한 정책을 졸아 붙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고, 허나 이회창이 집권하면 반드시 조선족에게 불이익이 닥칠 것이라는 관념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족이 한나라당에 너그러운 생각은 결국 당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명박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에서 생겨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한나라당은 이명박 때문에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가령 이회창이 한나라당 후보였다면 조선족은 이번에도 죽어라 한나라당을 반대했을 것이다. 다행히 5년 전에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를 그만두었고 이번에는 이명박이라는 실용주의적이고 실력이 있는 후보의 출마로 조선족에게는 큰 희망으로 다가왔고 한나라당에 대한 편견도 많이 사라졌다. 조선족들은 왜 이명박을 좋아할까?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은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명박은 말보다 실력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거꾸로 정동영은 실력보다 말로만 재잘거린다. 이명박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분명한데 반해 정동영은 자신의 비전이 없이 이명박을 헐뜯고 올라가려는 전략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5년 전 아니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족 대다수가 정동영을 좋아했었는데 선거가 막판으로 다가올수록 그에 대한 인상이 점점 나빠졌고 이명박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둘째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조선족들의 일자리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다못해 대운하가 실행되면 수많은 조선족들이 일거리가 생기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경제가 좋아지면 조선족이 따라서 여러 분야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명박의 집권이 조선족에게 하나의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곧 홍콩문회보가 예측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을 가까이 하고 중국을 멀리하는 親美遠華’인데, 그렇게 되면 따라서 재한조선족에게도 ‘너그럽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다. 이는 한나라당에 대한 선입견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조선족에 대해 많은 너그러운 정책을 실시해왔는데 이를테면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의 합법화,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의 자진귀국지원정책 프로그램, 무연고동포시험제, 3년 만기 재입국자의 2년 연장 등등인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기존의 정책보다 마이너스 시킬 것이라는 우려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명박의 당선이 조선족에게 득보다 실이 더 크고 심지어 큰 악재라 볼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명박은 실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인물이기에 한중가교역할과 미래 남북통일의 가교역할 담당자인 ‘귀한 재부인 조선족’에 대해 노무현 정부보다 더욱 너그럽고 좋은 정책을 펼 것이라 생각한다. 이명박 당선이 조선족에게 실인 것이 아니라 득일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정부에 거는 기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말할 수 있다. 첫째 2008년 봄에 제3차 자진귀국지원정책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다.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거쳐 불법체류조선족이 대폭 줄어들어 현재 불법체류조선족인수를 3만 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2005년에 단순불법체류자를 구제했고, 2006년에는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결혼자를 구제대상에 포함시켰으나 조선족들이 정부정책에 반신반의했고, 중국 측에서 여권을 새로 내주지 않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해 주저하고 눌러 앉은 자가 많았는데 만약 제3차 자진귀국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호응하겠다는 자가 절대다수이다. 가령 2008년 봄에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불법체류조선족이 기본상 사라질 것이다. 둘째 한국정부에서 조선족에게 한국에 올 수 있는 문을 대폭 열어놓고는 조선족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재입국이든 처음 한국 땅을 밟든 간에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는데 3만원, 취업교육비 10만 7천원이다. 가령 한국정부의 정책에 따르면 고용계약까지 맺고 일을 시작할 때까지 모든 절차를 마치려면 2개월이 소요되며 이 기간 일을 하면 불법취업으로 간주하고 단속에 걸리면 100만원의 범칙금을 물어야 하고 2차로 잡히면 강제추방이다. 하여튼 1년에 한국법무부와 노동부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 수자이다. 얼핏 주먹구구로 따져보자. 재입국자와 초입국자 및 외국인등록증을 번잡하는 자를 합치면 5만이라 할 때 1인당 3만원이면 15억이고, 취업교육자가 3만이라 할 때 1인당 10만 7천이면 37억이고, 국민연금 사대보험 귀국보험 등을 합치면 얼마 될지 알 수 없다. 물론 국민연금을 돌려주고 귀국보험 40만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귀국한 자가 굉장히 많다. 또 불법취업으로 100만원의 벌금을 낸 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것도 역시 1년에 수억 원은 족히 될 것이다. 바라건대 이명박 정부는 재한조선족의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주고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여기서 거창하게 이중국적이 어쩌고저쩌고 거론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명박 당선자께 위에서 말한 ‘소박한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하고 싶을 뿐이다.
14    크리스마스는 왜 12월25일까? 댓글:  조회:7896  추천:66  2007-12-24
크리스마스가 왜 12월 25일까? -김정룡의 역사문화 이야기 크리스마스란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예수가 성인이므로 예수가 탄생한 12월 25일을 우리말로는 성탄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가 역사적 실존인물이냐 아니면 가공해낸 신화인물이냐는 논쟁이 2000년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왔으며 따라서 예수의 탄생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 (주장)이 있다. 즉 예수가 태어난 날이 12월 25일 이다. 아니다. ‘1월 6일’이다. 무슨 소리냐? 봄이 한창인 ‘3월’이다. 틀렸다. ‘4월’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려 오다가 중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의 탄생일이 12월 25일로 확정되어 왔다. 왜 예수의 탄생일이 최종적으로 12월 25일로 확정되었을까? 여기에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12월 22일이 동지(冬至)이지만 2000년 전에는 12월 25일이 동지였다. 그 이유는 2000년 동안 세차(歲差)에 의해 동지 날이 3일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의 탄생일을 일부러 동지 날로 꿰맞춰 놓은 연유로 인하여 성탄절이 12월 25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 전 서양은 동양처럼 24절기와 같은 세시풍속(歲時風俗)은 없었으나 하지(夏至)나 동지(冬至) 등 천문학적 개념은 있었다. 하지는 1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으며 양(陽)이 쇠하고 음(陰)이 성하기 시작하며, 동지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며 음이 쇠하고 양이 성하기 시작하는 날이다. 중국의‘성경’으로 불리우는 <<주역(周易)>>에 의하면 동지 날의 괘(卦)는 다음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위의 다섯 개 효(爻)는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음(실제로는 여자를 뜻하는 데서 유래되었음)을 뜻하고, 제일 밑의 여섯 번째 효(爻)는 쭉 뻗은 작대기 모양이 양 (실제로는 남자를 뜻하는 데서 유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지 날은 온통 음으로 차있는 천기(天氣)에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양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양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음산하고 세상에 광명과 희망을 가져다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탄생은 종교적으로 인간을 암흑세계로부터 광명의 세계에로 인도해주는 구세주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일을 위에서 말한 의미를 갖고 있는 동지 날로 확정짓게 되었던 것이다. 거꾸로 예수의 등장을 세상에 알린 세례 요한은 하지에 태어났고 늙은 어미 뱃속에서 나왔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우러러 보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요한은 매우 하찮은 존재요. 이제 내 뒤에 오는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위대해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감당할 자격도 없노라!” 과연 세례 요한은 예수의 도래를 세상에 알려놓고는 인츰 죽었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동지 날에 태어났고 처녀뱃속에서 나왔다. 과연 예수는 인류역사 이래 가장 큰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위인으로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본래 서양인의 가장 큰 명절이다. 하지만 19세기부터 기독고가 동양에 전파됨에 따라 지금은 동양에서도 서양인 못지않게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허나 동양인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상식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탄생일이 12월 25일로 확정된 유래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여기서 부연적으로 한 가지 더 설명하자면 지금 2007년이라고 하는 연대(年代 )가 곧 예수가 2007년 전에 세상에 태어난 데서 유래되었으며, 2007년 전을 기원전(AD)이라하고 그 뒤를 기원후 (BC)라고 하는 것도 역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생겨난 것이다. 동양에서는 본래 왕의 연호(年號)에 따라 연도(年度)를 불렀으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양식 연대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불과 100년 역사도 안 된다.
13    한국에 시집온 나어린 조선족처녀들의 비극 댓글:  조회:5249  추천:57  2007-12-13
한국에 시집온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의 비극 -재한조선족 칼럼니스트 김정룡 필자는 한국인과 조선족사이 국제결혼에 있어서 드러나는 문제점 가운데서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라 생각한다. 연길에서 온 김양(26세)은 4년 전(22세) 16세 연상인 한국인 박모와 결혼했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한 10일 만에 남편이 7세 여자애를 강간하여 징역3년 6개월 형을 판결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고 신혼초기부터 남편이 없는 시댁에서 80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편의 사랑도 부부생활도 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3년 넘게 사느라 우울증에 걸렸다. 하여 가끔 시어머니가 뭐라 하시면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말대꾸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출옥을 앞둔 1개월 전 어느 하루 이상 시누이와 시누이 남편이 그녀가 시어머님에게 말대꾸하는 것을 목격하고 올케가 못돼 먹었다고 나무라면서 한바탕 그녀를 두들겨 팼다. 본래 우울증이 심했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크게 얻어맞고 나니 정신이 완전히 이상해져 자립생활을 할 수가 없어 서울에 있는 고모가 데려왔고 치료해주었다. 남편이 출옥한 후 정신이 나간 그녀를 한 번 만나보고 다시는 연락을 끊었다. 그녀의 고모가 그녀를 대신해서 이혼소송을 제출했는데, 남자가 3년 6개월 수감생활을 보내다보니 돈이 없고 시어머니도 국가보조금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치료비 150만원 만 받고 이혼했다. 길림시에서 온 서양(25세)은 3년 전(22세) 18세 연상인 한국인 강모와 결혼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힘든데다 남편이 그녀가 친구와 만나는 것과 한국에 와 있는 친인척들과 왕래하는 것을 가로막고 심지어 명절 때 시댁식구들과의 접촉도 차단해 버려 그녀는 너무 고독하고 힘들어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그녀는 지난 01월 20일 위자료 600만원을 받고 협의이혼을 하기로 했지만 법정에서 두 부부가 말을 제대로 못해 이혼이 무산되었다. 현재 법원에 소송이혼을 제출해놓은 상태이다. 용정에서 온 장양(22세)은 지난 3월 16세 연상인 한국인 주모와 결혼했다. 당시 결혼당사자인 남자가 자기 앞의 말도 제대로 못해 남자의 부친이 아들을 데리고 중국에 가서 혼사를 성사시켰다. 그때 남자가 중국에 머물면서 여자와 호텔에서 3일 밤 묵었는데 성생활이 없었다고 한다. “남자가 성기능장애라는 의심을 해보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냥 젊잖아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녀는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후에도 남자는 성생활을 못하는 병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자는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마누라를 사랑해줄 줄도 모르고 남편의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불량남편’이다. 그 사이 그녀는 여러모로 노력을 하였으나 남편은 여전히 개변이 없이 그 꼬라지 그 꼬라지였다. 이 와중에 그녀는 친정부모를 한국에 초청해 H-2비자를 받아 본격적인 돈벌이에 들어갔고 더 남편한테 바랄 것 없어 1천만 원을 받고 협의이혼 했다. 훈춘에서 온 심양은 지난 5월에 20나이에 19세 연상인 한국인 이모와 결혼했다. 헌데 그녀는 한국에 온 이튿날 바로 가출했다.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마음에도 없는 남편이 싫다는데 기어코 ‘덮쳐’들어 무서워서 도망했다고 한다. 하느님 맙소서! 납치결혼도 아닌 제 눈으로 보고 왔는데 남편이 첫날밤에 강간도 아니고 정당한 ‘잠자리’를 하려는 것을 거절하는 신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열 받은 남편이 휴대폰 위치추정으로 그녀를 붙잡았고 1년 내에 3천만 원을 남자에게 물어준다는 각서와 여권을 저당 잡히고 풀려났다. 20살 나는 여자애가 어떻게 1년에 3천만 원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일본 땅에 가서 매음하면 모를까? 한국에서 몸을 팔아도 그 돈을 벌지 못한다. 그녀는 실로 18층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한국에 시집온 나 어린 조선족여성 중에 1~6개월 혹은 1년 사이 가출해 헤매는 수가 적지 않다. 한국에 시집오는 나 어린 여성들의 공통점은 한국인 배우자와의 연령 차이가 보통 10~20세이다. 이는 젊고 괜찮은 한국총각들이 중국여자를 데려올 리가 없고 당연히 이래저래 한국 내에서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불량품’들이 ‘중국산’에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필자가 보기엔 외모가 괜찮아 중국 내에서 천천히 훌륭한 신랑감을 만나 결혼할 수 있는 처녀들이 ‘불량품’인 한국인에게 시집와서는 지옥과도 같은 삶을 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부모들이 딸을 앞세워 잇따라 한국에 와서 한 몫 잡으려는 계산이 압도적일 것이다. 한국바람에 의해 “아들을 둔 집은 망하고 딸을 둔 집은 부자가 된다.”는 유행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시집온 처녀들 당사자와 그들의 부모들이 부자가 된 사례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나, 필자는 한국현지에서 조선족들의 이혼 사건을 접하면서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의 비극적인 가슴 아픈 사연을 많이 보았다. 돈이 뭔지? 옛날 사람들은 “개도 안 먹는 돈”이라 했지만 지금은 그 돈을 위해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이 자신의 가치를 망가뜨리고 결혼으로 도박하거나 정신병에도 걸리고 도망 다니고 벼라 별 비극이 다 벌어지고 있다. 한중동포신문(2007-12-12) 114호 김정룡
12    "출국확인서 갖고도 재입국 못할뻔 했어요." 댓글:  조회:5247  추천:54  2007-12-12
출국확인서 갖고도 재입국 못할 뻔 했어요. -최영금 구술, <김정룡의 상담 이야기> 2006년 4월 17일 한국법무부는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 실시 공고>를 발표했는데, 요지는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위장결혼자 등 불법입국자들이 자진귀국 의사를 밝히고 출국 시 공항과 항만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받고 귀국해서 1년 후에 재외공관(영사관)에 비자신청을 하면 재입국이 된다는 것이었다. 법무부의 이 정책은 재한조선족사회에 큰 혜택이었으며 복음이었으며 실제로 무려 3만에 달하는 조선족이 한국정부의 정책에 호응하여 귀국했고 그 중 절대다수는 별 탈이 없이 재입국했다. 허나 극소수이기는 하겠지만, 연길시 하남가 최영금(53세)씨는 당당하게 출국확인서를 갖고도 비자가 기각되어 지난 수 개 월 동안 뚠 눈으로 속 태우다가 겨우 우회곡절 끝에 12월 4일 재입국하는데 성공했다. 아래는 그녀의 코리안드림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 얽힌 사연이다. 최씨는 1999년 12월 01일 한국에 가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브로커에게 인민폐 9만원을 지불하고 이경숙이란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하고 허위부모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3년 7개월 체류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 2003년 한국정부에서 불법체류자를 합법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합법체류자로 당당하게 한국에서 살 수 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10월초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찾아갔는데 뜻밖에 허위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한 사실이 들통 나 감금되었고 최영금이란 신분을 확실하게 밝히고 진짜 이름으로 2003년 10월 15일 강제퇴거조치를 받고 중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중국에 돌아와 보니 물가가 많이 올랐고 아이의 생활비와 교육비도 만만찮게 들고 또 한국에 갈 때 타인으로부터 빌린 돈과 이자를 갚고 나니 별로 남은 것이 없어 여전히 살기가 막막했다. 하여 할 수 없이 또다시 한국에 갈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최영금이란 본명으로 강제퇴거조치를 받았고 동시에 입국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 갈 수 없어 2004년 08월 10일 브로커를 통해 인민폐10만원을 내고 최춘화란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하여 한국에 재입국하는데 성공했다. 두 번째로 한국에 입국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2003년도에 여권을 위조하여 체류하다가 강제퇴거조치를 받은 적이 있어 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2006년 04월 17일 한국정부에서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을 실시공고>를 발표하였는데 여권위변조자도 구제대상에 포함되어 실로 복음이었다. 한국정부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정부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자진귀국 하였다가 1년 후 재입국하여 당당한 합법체류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자진귀국을 위해 주한중국대사관에 가서 여행증을 발급받고 귀국비행기표도 끊어 갖고 2006년 07월경 군포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가 여권위변조에 대한 범죄사실을 자수하여 조사를 받았다. 2007년 08월 11일 수원지방검찰청으로부터 <불기소이유 통지>라는 처분결과를 받고 귀국준비에 서둘렀으며 2006년 08월 30일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받고 중국에 귀국했다. 출국확인서의 유의사항에 따르면 귀국한 일자부터 1년이 경과한 날부터 3개월 이내에 대한민국재외공관에 사증발급을 신청할 수 있다. 하여 지난 09월 19일 연길시 소재 서광여행사를 통해 주중심양영사관에 사증발급신청을 제출(접수번호 : 1878175)하였는데 뜻밖에도 기각(기각번호 : SEP272007)되었다. 기각이유를 물었더니 답복에 의하면 2003년 10월 15일 강제퇴거조치를 받을 때 출입국에서 제정해놓은 입국규제가 현재까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무부의 <2006. 4. 17.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 공고>에 의하면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등 공고발표 이전에 불법체류신분인 중국동포와 러시아동포는 모두 자진귀국 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1999년 12월 01일과 2004년 08월 10일 두 차례 여권을 위변조하여 한국에 입국하였다가 첫 번에는 강제퇴거조치를 받았고, 두 번째는 한국정부의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실시정책>에 호응하여 자진귀국하기로 결심하고 정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관련 수속절차를 착실히 밟았다. 그런데 정부정책에 호응하여 자진귀국하기 위해 한국경찰에 자수해서 조사를 받았고, 한국검찰청으로부터 불기소이유 통지라는 천분결과를 받고, 자진귀국 했으며, 특히 경찰조사 시 2003년 10월 15일 여권위변조로 강제퇴거조치를 받은 사실도 자수해서 조사 자료에 기재되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밟을 절차를 다 밟고 마지막에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받고 귀국했는데 이제 와서 2003년 10월 15일 강제퇴거가 문제되어 재입국사증발급을 기각하니 억울하다고 생각되었다. 한국정부에서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불법입국자를 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되며 그래서 적극적으로 정부정책에 호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저의 과거가 문제되어 재입국사증발급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최 씨는 행여나 하고 한국에 있는 조카한테 부탁해서 법무부 장관님 앞으로 편지를 쓰게 했더니 돌아온 답은 “그럴 수 없으니 다시 신청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다시 신청해 보았으나 여전히 기각되었다. ‘앞문’으로 재입국할 수 없으니 이번에는 지프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편법을 생각했다. 즉 허위로 한국에 있을 때 동거했던 한국인을 불러들여 심양영사관의 영사님과 면담을 하면 혹시 비자가 허락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만 수 백 만원을 쓰고라도 시도해보자. 결국 이 어처구니없는 편법도 주위의 만류에 의해 포기하고 나니 별 다를 뾰족한 수가 없어 속만 태웠다. 그래저래 시간은 10월이 다 지나가고 재입국은 물 건너간 것 같아 속이 재가 된다. 또 다시 타인의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하여 한국에 갈까? 이렇게 과거 범죄를 되풀이 할 궁리를 하고 있던 중, 한국에 있는 친구가 신화보사 김선생을 찾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와 최후의 희망을 안고 연락했다. 과연 11월 9일 김선생이 전화로 법무부 장관 명의로 입국규제를 풀었다는 소식이 왔다. 아울러 공문을 심양영사관에 팩스로 보냈고 원본은 나의 앞으로 보냈으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비자가 허락될 것이라 했다. 당시 분명히 확실한 답을 들었으나 꿈인지? 생인지? 어리둥절해났다. 너무 혼나고 나니 비자를 손에 쥐기 전에는 누구의 말도 믿기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선생이 시키는 대로 추진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우회곡절 끝에 지난 12월 4일 재입국에 성공했다. 늦게나마나 진통 끝에 비자가 나왔고 재입국에 성공했으니 한국정부에 감사하고 김선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이 지면을 통해 전하고 싶다. 끝으로 한국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가령 앞으로 제3차 자진귀국 프로그램을 실시하려면 법무부와 재외공관의 엇박자로 나처럼 우회곡절을 겪는 일이 발생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11    탱자가 된 조선족 이름 댓글:  조회:6494  추천:48  2007-11-15
탱자가 된 조선족 이름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朴光石’이 왜 ‘피아오광스’인가? 150년 지킨 이름 인정 못한다니··· 중국에는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가 있다. 현재 조선족 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이상한 ‘탱자’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중국 지명과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서 중국어발음을 따른다. 이 때문에 조선족이고 밀양 박씨인 ‘박광석(朴光石)’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라고 표기한다. 조선족의 중국 신분증은 위에 우리글로 ‘박광석’, 그 아래 한자로 ‘朴光石’이라 적혀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선 ‘박광석’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박광석’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이유는 ‘박광석’을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으로 보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박광석’이란 자체 고유이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조선족은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조선족은 먼 옛날 고국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을 애써 지켜 왔지만, 정작 고국에 와선 그‘이름’을 인정받지 못한다니 참 기가 막힌다. 한국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이름만 아니라, 한국에 시집 온 조선족들의 이름도 이상하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 시집오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한국 호적에 오르게 된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李花子는 중국에서 ‘리화자’로 불리고, 한국에선‘이화자’라 부른다. 그런데 호적에는 ‘리후아지’로 기재된다. 한국이 조선족 자체 고유이름을 탱자식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우리글, 우리말을 지켜온 조선족에 대한 무시, 나아가 모독이다. 한국인이 진정 조선족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먼저 조선족이 지켜온 자체 고유이름을 존중하고, 이상하고 엉뚱하게 표기하는 일을 당장 중단하기 바란다. *아래의 문장은 위 글의 원문입니다. 탱자가 된 조선족이름 중국에는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가 있다. 현재 조선족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이상한 ‘탱자’로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참으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지난 10월 31일 경기도 고양시는 중국 옌지시와 우호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2006년 10월 피아오광스 옌지교육국장이 고양시를 방문하여 고양시장 접견 시 양 도시 우호교류를 제안했다. ······” 이는 수일 전 한국00신문기사의 한 대목이다. 현재 한국은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서 중국어발음을 따르고 있다. 위 문장에서 ‘옌지’는 延吉, ‘피아오광스’는 朴光石의 중국어발음을 따른 것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한국인이 중국지명과 인명 중국어발음표기법에 대해선 논하지 않고 조선족이름표기법에 관해서만 소견을 말하려 한다. 朴光石은 조선족이고 분명히 우리말, 우리글로 ‘박광석’이다. ‘박광석’이란 이름은 한반도의 고유이름을 따른 것이고, 현재 반도사람들이 본을 갖고 있는 것처럼 조선족인 ‘박광석’도 밀양 박이라는 본을 갖고 있다. ‘박광석’과 마찬가지로 중국 내 조선족은 중국에서 미국거주인의 ‘린다 김’ ‘골든 창’ 등 미국식을 따르거나, 러시아의 고려인처럼 ‘안드레’ ‘알렉산드’라 부르거나 혹은 일본국적을 가지려고 ‘야마다’ ‘나카무라’ 등 창씨개명을 하지도 않는다. 조선족은 위에 우리글로 ‘박광석’이고 아래에 한자로 ‘朴光石’라 적힌 신분증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이상하게 우리말, 우리글로 표기할 수 있는 ‘박광석’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한다. 한국인이 ‘박광석’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박광석’을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족이 자체고유이름인 ‘박광석’이란 표현을 갖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이 먼 옛날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아온 자체고유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인 고국에 오면 그 ‘이름’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박광석’이 이상한 ‘피아오광스’로 불리우고 있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한국인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이름만 이상한 표기법을 쓸 뿐 만 아니라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들의 이름도 역시 이상하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 시집오면 한국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한국 호적에 올라 반은 한국인이고 반은 ‘중국인’이 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조선족은 분명히 자체고유이름이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또 한국호적에 오르면 반은 한국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적등본에 이상하게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李花子는 중국에서는 ‘리화자’이고 한국에서는 ‘이화자’라 부른다. 두음법칙에 의해 일부 성 ‘리’가 ‘이’로, 이름자 ‘룡’이 ‘용’으로 발음되는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으나 ‘리화자’도 아니고 ‘이화자’도 아닌 ‘리후아지’로 호적등본에 기재된다. 만약 ‘리후아지’로 등록된 사람이 한국 내 서류에 ‘리화자’나 ‘이화자’로 하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李花子가 이혼소송을 제기할 때 원고의 이름을 ‘리화자’나 ‘이화자’로 쓰면 안 되고 반드시 ‘리후아지’로 써야 한다. 왜냐하면 호적등본에 등록된 이름과 일치해야 되기 때문이다. ‘리후아지’는 ‘李花子’를 중국어발음에 따라 옮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국어발음을 따르겠으면 ‘리후아지’가 아니라 ‘리화즈’로 옮겨야 하는데 중국어발음을 모르고 멍청하게 나름대로 옮겨 엉뚱한 발음으로 표기되고 있으니 참으로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조선족들의 이름이 귤이 아닌 탱자가 되어버리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朴光石’도 ‘피아오광스’가 아니라 ‘퍄오꽝스’로 옮겨야 한다. 한국인은 이런 엉뚱한 식으로 중국지명과 인명을 나름대로 옮겨놓아 누가 보아도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이런 엉뚱한 발음으로 중국인과 대화하면 아예 알아듣지 못한다. 중국의 지명과 인명 그리고 조선족자체고유이름마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옮김 법으로 나름대로 표기하고 있어 읽기도 불편하고 듣기도 거북스럽고 적잖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대체 이런 엉뚱한 발상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또 누구를 위해 만들어냈는지? 李花子의 한국남편이 자기 아내를 부를 때 ‘리후아지’라 할까? 천만에! 한국인은 조선족이 갖고 있는 고유이름을 부르지 절대 이상하고 보기에도 그렇고 듣기에도 메스꺼운 ‘탱자 식’ 발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호적등본에 ‘피아오광스’, ‘리후아지’로 표기하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는 것이다. 한국인이 조선족자체고유이름을 탱자 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우리글, 우리말을 지켜온 조선족에 대한 무시 내지 모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진정 조선족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려면 말로만 하지 말고 우선 먼저 조선족이 지켜온 자체고유이름을 존중하고 이상하고 엉뚱한 표기법을 버리기를 바란다. * 본문은 조선일보 2007년 11월 15일 A33면에 '조선족 이름 표기'제하에 요약되여 발표되였습니다.
10    막판까지 말썽 많은 무연고방취제 댓글:  조회:5124  추천:81  2007-11-05
막판까지 말썽 많은 무연고방취제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1년 동안 조선족사회 가장 큰 화제로서 아마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는 한국정부가 조선족사회에 베푼 혜택인 만큼 처음부터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한다는 취지하에 추진되어왔다. 시행 초반에 시험을 치게 하느냐, 마느냐? 는 시비가 많았지만 결국 시험을 치르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도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조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청도 인터넷으로, 추첨도 인터넷으로, 합격자발표도 인터넷으로 추진되었으니 한국정부입장에서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조선족의 입장에서 보면 무연고동포도 한국에 가서 취업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음이었으나 한국 땅을 밟기까지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톡톡히 대가를 치른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합격자들이 마지막 관문인 비자발급에 관해서 한국정부재외공관의 투명성을 크게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합격자가 가장 많이 집결된 관할 공관인 주중심양영사관이 합격자들의 비자발급은 개인접수를 거부하고 대행여행사를 지정하여 접수를 받는다고 한다. 헌데 요즘 대행업체로 지정받은 연변00여행사는 고객들에게 비자발급요금 640원에 대행수수료 260원 해서 900원을 내면 1년이 걸릴지 언제 될지 모르니, 5,000원을 내면 1개월 이내에 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 혼란과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중 각 한국영사관에서 합격자들의 서류가 구비되고 비자발급비 640원을 내면 5일 이내에 비자를 발급해준다고 한다. 5,000원 얘기는 해당 여행사가 임의로 결정하고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고객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다. 즉 과거 영사관의 비리관행을 미루어 보고 여행사가 영사관을 끼고 짜고 치는 고스톱일 것이라 본다는 것이다. 5,000원의 행방이 어떠하든지 무연고동포들 가운데 80% 이상이 컴맹이어서 그 중 신청 시에 100~500원을 내고 남을 통해 신청하는데 성공했고, 1,000~5000원을 팔고 한국어학습을 했고, 시험 보는데 여비와 숙식비 1,000~2000원을 썼고, 비자발급에 5,000원, 신체 검사비 300원, 비행기 값 2,600원을 합치면 많이 쓴 자는 20,000원을 넘게 팔아야만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시험신청비 200원, 여권신청비, 200원, 비자신청비 900원, 신체검사비 300원, 비행기표값 2,000원 도합 3,600원, 의외의 경비를 합쳐도 4,000원이면 족하다. 그런데도 20,000원을 넘게 팔았으니, 이는 애초 한국정부가 브로커를 통해 거액의 돈을 쓰고 불법 입국하는 것을 막고, 재외공관의 비리를 막고, 조선족사회 형평성을 감안하여 돈을 아주 적게 들이고 골고루 고국에 방문하여 취업시켜려는 공정성과 투명성의 취지와는 조금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막판의 비자발급에 있어서 혼란과 불안이 재외공관에 의혹을 갖게 만든 것을 빼고는 대다수는 조선족사회 내 자체로 조성된 문제이다. 즉 시험교육사기, 여권발급사기, 2~3만원이면 시험을 보지 않고 ‘뒷문’으로 한국행을 이루게 한다는 사기행각, 수험장배치문제로 혼란과 불안이 조성되고 경제적인 부담이 커진 것 등등은 한국 측과는 무관하게 중국과 조선족 자체의 문제이다. 2007년 무연고동포방취제는 처음으로 실행된 프로그램으로서 막판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럭저럭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고 60%의 성공이었다고 점수를 매길만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9    중국 달 탐사와 달속 여신-상아 댓글:  조회:5978  추천:99  2007-10-25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중국 달 탐사와 달속 여신-상아(嫦娥奔月)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24일 중국에서 발사한 달 탐사 우주선의 이름을 상아(嫦娥)1호라 지은 데는 심오한 역사적인 유래가 있다. 고대원시인은 전쟁, 자연재해, 의술결핍 등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생존율이 50% 미만이었다고 한다. 우리조상들은 머리 좋게 불가항력적인 객관적인 요소와 무리하게 싸운 것이 아니라 아이를 많이 낳는, 즉 생식력을 높이는 것으로서 부족의 생존을 도모했으며 이로서 생식숭배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 중국학자 趙國華 선생이 중국문화는 생식숭배를 핵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내용으로 <<생식숭배문화사상>>이란 책을 출간한 후 중국의 대다수 학자들이 그의 이 관점이 동의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는 여기서 본 주제와 관련하여 생식숭배문화의 초기형성과정을 살펴보자. 고대원시인류의 생식숭배는 일차적으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 부위, 즉 ‘여음’을 숭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허나 일정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음’은 근근이 신체의 한 개 부위에 국한되어 있어 ‘여음’만의 숭배는 다산을 기원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여음’과 닮은 자연물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곳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외형상(두 마리 잉어를 포개놓으면 ‘여음’과 신통하다)에서 ‘여음’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한 번 알을 쓸면 수백, 수천마리의 새끼를 생산한다. 따라서 원시인류는 물고기에게 열심히 제사를 지내고 기도하면 물고기의 놀라운 생식신력이 인간의 몸(여성)에 전이되어 다산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을 ‘漁祭’라 하며 ‘어제’는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고대 귀부인이 타는 가마를 ‘漁軒’, 연애편지를 ‘漁信’, 보름달밤의 등불을 ‘漁燈’, 음력설을 맞아 문 어구에 붙이는 “年年有餘”란 주련이 본래 “年年有漁”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가정집에 걸어놓는 오동통한 남자애가 큰 잉어를 안고 있는 그림도 풍요다산을 비는 의미가 있다. 원시인류는 이렇게 ‘여음’을 숭배하던 데로부터 점차 여성이 임신하면 배가 불어나고 해산하면 배가 줄어드는 현상이 개구리와 비슷하고 아울러 개구리는 하루아침 봄비를 맞아 수천 개의 올챙이를 생산하는 것에 매혹되고 다산의 숭배대상으로 되었다. 중국신화에 인간을 창조했다는 여신의 이름이 여와(女娲)인데, 娲란 글자는 여와에게만 전문 쓰는 것이고 실제로 娲는 본래 蝸이다. 그러므로 여와는 개구리의 화신이다. 고대중국인은 이렇듯 개구리에 대한 숭배사상이 강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대원시인은 생식숭배의식을 거대한 우주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는데 하늘도 개구리와 같은 속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전체 하늘은 개구리의 배와 같고 개구리 배의 반점은 밤하늘의 별과 같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현상이 개구리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임신기에 배가 불어나고 해산하면 배가 줄어드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참으로 교묘한 것은 여성의 생리 주기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주기와 똑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성의 생리를 ‘달거리’ ‘월경’ ‘월수’ 등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달의 주기와 여성의 생리주기가 똑 같다면 필시 달 속에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신을 개구리로 확정하게 되었다. 즉 본래 개구리는 고대음으로 ‘첨여(幨蜍)’이고 이것이 점차 ‘창어(嫦娥)’로 바뀌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달 속에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 있고, 그 신을 상아라 부르고, 상아는 개구리의 화신이다. 개구리의 화신인 달 속의 상아는 두 말할 것 없이 여성성 신이며 후대에 내려오면서 상아는 미녀를 상징하여 ‘미녀상아’란 말이 생겨났고 여성의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진시황제를 독살했다는 여인의 이름이 곧 상아이다. 그녀가 하도 예쁘게 생겨 진시황이 파격적으로 연 3일 밤을 데리고 잠을 잤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독살 당했던 것이다. 달은 원시인이든 현대인이든 모두 신비한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원시인은 달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신비한 존재로 인식했고, 현대인은 신비한 존재를 과학적으로 밝혀보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모든 것을 역사와 단절시킬 수는 없다. 중국이 달 탐사 우주선의 이름을 상아라 지은 것은 수천 전에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가 달 속에 달려갔다(嫦娥奔月)는 전설이 있고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드디어 달 속의 상아를 만나러 간다는 뜻 깊은 의미가 있다. 중국의 유구한 민간전설과 ‘상아1호’에 담긴 오랜 숙원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이 글을 간단히 끝낸다.
8    한국에 '화교'는 있어도 '조선족'은 없다. 댓글:  조회:5367  추천:86  2007-10-22
한국에 ‘화교’는 있어도 ‘조선족’은 없다. -재한조선족연구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수는 2만 명이고 한족이 11만 명이며 조선족의 수는 26만 명이다. 그러니까 화교와 한족을 합쳐봐야 조선족 수의 반밖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분명한 객관적인 수치를 두고 ‘한국에 화교는 있어도 조선족이 없다’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황당한 소리라고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 아래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한국의 화교들은 자신들을 ‘舊僑’라 하고 개혁개방 이후 한국에 온 한족을 ‘新僑’라 부르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화교들은 무릇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한국에 온 사람들의 민족을 불문하고, 쉽게 말해서 조선족까지도 ‘新僑’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잠시 논외로 하고 우리는 화교들의 넓은 가슴과 그들의 포옹력에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화교협회를 이끌고 있는 韓晟昊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어의’를 맡았었고, 1992년 중한수교에 다리 역할을 했던 분이며 중국에 가면 후주석의 접견을 받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필자는 그가 주최하는 장소에 두 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의 넓은 의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지난 8월 19일에 있었던 ‘중국 각 성 동향회성립 축하’모임에서 그는 “2020년에 가면 지구촌에 유동하게 될 중국인(56개 민족 포함)이 5억 명에 이를 것이니 세계는 우리 것이다.”라고 했다. 두 번째는 지난 9월 초 산동성화교사무실을 주최로 성 정부 일행이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오늘 모임에 7개 민족이 모였는데 앞으로 한국 땅에서 56개 민족이 다 모이는 날을 기대한다.”고 발언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족이고 만족이고 조선족이고 하는 민족구분이나 차별의식이 없이 무릇 중국에서 온 사람은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華’이며 한 집안 식구라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넓은 가슴으로 포옹력과 친화력을 갖고 있기에 한국의 화교들 은 그의 주위에 똘똘 뭉쳐 있고, 그가 지지하고 후원하는 한문판<<신화보>>의 책임자가 조선족(조명권, 화교연의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와 <<신화보사>>가 주최하는 모임에 많게는 300명, 적게는 70~80명의 참석자 중 조선족이 70%를 차지한다. 이에 비해 현재 26만에 달하는 재한조선족은 자체의 조직도 없고, 자체의 언론도 없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아래와 같은 이유를 살펴보았다. 첫째 우리 재한조선족 내부의 문제 가. 단합심 부족 우리 재한조선족은 단합이 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지역과 지역 간의 출신에 따라 서로 물고 뜯고(<연변내기와 연변사람>, <우리동포들끼리 서로 헐뜯지 맙시다.>를 참조)하고 귀한동포연합회는 설립 초기부터 내홍이 심했다. 이에 비해 재한 화교와 한족사회에서 출생 연고를 갖고 서로 헐뜯는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며 조직에 큰 내홍이 있다는 소리를 덜어보지 못했다. 나. 인재가 없다. 26만에 달하는 재한조선족 중에 인재가 없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으나, 실제로 재한조선족을 리드할 인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목자가 없는 양떼와도 같다는 것이다. 혹자는 재한조선족은 역사가 짧아 자체 조직이나 언론을 갖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 재일조선족사회에 눈을 돌려 보라. 그들도 우리와 시간이 비슷하지만 모두 자체 조직을 갖고 있으며 구심점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재미조선족은 3만여 명이며 자체협회를 구성하고 내부조직이 탄탄하며 각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어 조선족의 안식처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에는 대학교수인 조선족이 회장을 맡은 중국조선족연구회가 있는데 국제적인 학술대회를 주최하고 해외에서 초빙한 참석자 수십 명의 왕복비행기표, 숙식을 책임질 정도로 빵빵하게 잘나가고 있다. 둘째 한국 측의 문제 옛날 속담에 소경(맹인)이 넘어지면 막대 탓을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문제를 한국 측에 돌린다면 억지를 부리는 듯한 감이 없지 않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1990년대에 연변대학 졸업생을 비롯한 조선족이 한국에 석 박사 유학 오자 면 언어시험을 봐야했는데 한국대학들에서는 한국어수준이 조선족의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한족들은 수천 년 동안 어쩌다 처음으로 ‘한국’을 알아주고(역사적인 맥락에서 하는 말) 유학까지 오니 귀엽게 봐주고 패스시킨 반면 조선족에게는 혹독할 정도로 엄했다. 그 이유는 조선족이 아무리 연변대학 ‘우리말학부’를 졸업해도 배운 것이 조선어이지 한국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우상열의 <韓流는 漢流더라.>를 참조). 그 언어가 그 언어이고 다 같은 조상들에게서 배운 말이건만 두음법칙이 다르고 문법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민족보다 못하게 대하는 한국학교당국에 조선족유학생들은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 한국 측으로부터 이러한 차별적인 냉대를 받았던 조선족이 유학생활을 마치면 한국에 남을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어 중국에 돌아가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는 조선족이 대학교수 혹은 기타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사회에서 교환교수를 맡은 조선족은 있어도 뿌리를 내리고 활약하는 유명한 조선족교수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기타 분야도 마찬가지다. 모두어 말하자면 한국은 비록 동족이고 고국이지만 조선족이 빛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이것을 재한조선족사회에 인재가 없는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자치주정부의 문제 전체 조선족인구의 13%가 현재 한국에 살고 있고, 연변경제가 돌아가고 있는 데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벌어가는 돈이 크게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치주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재한조선족사회를 중시하고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재정 돈으로 후원해서 자체 조직도 만들어주고 언론매체도 만들어주고 재한조선족연구회도 만들어야 한다. 혹자는 왜 굳이 자체조직, 자체언론매체, 자체연구회가 필요하냐고 물을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해답은 이렇다. 재한조선족사회의 흐름을 살펴보면 과거 교회나 일부 민간단체들이 조선족 을 대변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어 정부에서 중국동포에 대한 정책이 많이 완화되고 개선되었으나 그들 단체의 보스들이 모두 한국인이어서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폐단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진정 조선족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등 심리를 모르고 일방 적으로 밀어붙이거나 신문을 만들어도 조선족들의 심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없는 것도 사실이다. 2003년 00교회가 추진했던 국적회복파동 때문에 5천 명을 위하려다 200만의 조선족 입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실례가 한국인이 조선족을 모른다는 증거이리라. 조선족이 아무리 한국생활이 10여년 되어도 한국과 한국인을 제대로 모르는데 하물며 중국생활도 해보지 못한 한국인이 조선족을 대상해서 일하고 있으니 그들이 조선족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는 것이다.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조선족을 대상하는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조선족에 대해서 구경 무엇을 알고 있는가는 것이다. 조선족의 코리안드림이 어언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의 나이가 20세이면 성인이다. 그 동안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을 법도 하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유소년기에 처해 있고 변한 것이 별로 없다. 혹시 양적인 변화는 있었을지 몰라도 질적인 변화가 없었다는 의미다. 조선족의 일은 조선족이 나서 해야 하고 또 그럴 시기가 왔다고 나는 본다. 또한 재한조선족은 앞으로 중국조선족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주력군이며, 아울러 주력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소질을 제대로 갖추게 하려면 재한조선족사회에 필요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인이 할 수 없다. 오직 자치주정부가 나서서 재한조선족사회와 손을 잡고 추진해 나아가야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 화교사회(한족을 포함한)는 리더가 있고 자체조직과 자체언론이 있어 구심점이 있는데 비해, 우리재한조선족사회는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아 한국에 조선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7    투화(套話)의 유래 댓글:  조회:4842  추천:65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1투화(套話)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수일 전 나는 친구와 함께 서울 모 대학의 00학술시상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수상자로 한국인과 조선족 학자 각각 1명씩 당선되었고, 그 분들은 수상소감을 발표했다. 그런데 한국 분은 원고 준비도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섞어가며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 분은 원고를 들고 역시 중국식으로 ‘투화(套話)’만을 말했으며 좀 지나친 비유이긴 하나 얼굴에 웃음 끼가 전혀 없이 마치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비쳐져 아주 자연스럽지 못하고 딱딱하게 보였다.  시상식이 끝난 후 나와 친분이 있는 한국 분이 나에게 “중국에서는 수상소감을 저런 식으로 말하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글쎄요.”라는 말로 얼버무려 넘겼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수상자인 조선족 분은 원고도 준비하지 말고 중국식 ‘투화’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자기 것을 지켜가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며,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 왕래(교류) 이야기 등등을 말했더라면 훨씬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또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의 친화감도 생기고···이런 식으로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국문인들은 대체로 조선족들의 작품을 재미없다고 평가한다. 진짜로 작품이 재미가 없어 이런 결론이 나왔을까? 나는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의 어색하고 딱딱한 이미지(조선족의 어투는 한국인에 비해 딱딱하고 투박하다.)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참고로 중국‘투화’의 유래에 대해 간단히 말해보려 한다.  중국문화는 예의를 매우 중시하는 문화이다. 예의는 일정한 형식과 격식을 필요로 한다. 100년 전 미국선교사 아더·스미스는 저서<<중국인의 소질>>에서 “낫 놓고 기윽(ㄱ) 자도 모르는 중국농부가정의 예의는 그 형식과 격식이 유럽의 궁중예의를 초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실리적이지만 공중장소에선 형식과 격식을 갖춰야만 체면이 선다고 인식해왔다. 중국인이 공중장소에서 시끌벌쩍하게 떠드는 습관도 체면문화와 희극문화에서 유래되었다. 즉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체면이 서는 것이라 생각해왔다는 뜻이다.  아더·스미스는 “중국인의 유일한 오락인 희극이 시작되기 전에 사회자나 어떤 보스가 나타나 ‘투화’를 지나치게 늘여놓아 막을 열기도 전에 관객들을 짜증나고 지쳐 도망가게 만드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인은 사람마다 희극적인 본능을 갖고 있는데 희극은 불필요한 형식과 격식을 요구하며 따라서 중국인은 말할 때 ‘투화’를 좋아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인이 본래 역사적으로 ‘투화’에 능숙한데다가 문화대혁명 때 이념과 사상에 충성하면서 ‘투화’는 필수로 되어버렸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족속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살아온 조선족도 ‘투화’에 물들어 버렸다.  시대는 날마다 변화되어가고 있다. ‘투화’가 우리 실생활과 동떨어진 불필요한 것이라면 우리조선족은 이젠 과감하게 버리고 인간의 본연으로 돌아가 ‘사람 냄새얘기’를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 아닐까?
6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습니다. 댓글:  조회:5124  추천:64  2007-10-15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습니다. -김정룡의 史論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다고 말하면 상당한 어폐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역사문화이야기는 신문에 연재로 실린 글이고, 신문 특성상 편폭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방대한 말들을 매우 함축성 있게 줄여 써야 하므로 어떤 구절은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공자를 유교의 교주라고 하는데 사실 이 관점도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맞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유교는 종교의 의미로서 한나라 때 경학통치가 수립됨에 따라 본래 하나의 학파였던 유가가 하나의 종교인 유교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교의 전신은 유가라는 얘기이지요. 유가의 창시자가 공자인듯하나 공자는 “술이불작(述而不作)”, 즉 나는 선인들의 것을 종합해서 말했을 뿐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말한 선인은 멀리는 요임금이고 가깝게는 주공이었습니다. 삼황오제는 한나라 때부터 나타난 전설이고 공자시대에는 요임금이 가장 최초의 조상이라 인식했으며 요임금은 훌륭한 성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화의 뿌리가 요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아울러 요임금의 문화적인 주축이 ‘儒’라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주공이 지은 <<周禮>>는 요임금 시대부터 夏商에 걸쳐 흘러온 맥락에 의해 창작된 것이고, 아울러 주공의 이념과 사상이 3천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왔습니다. 주공의 이념과 사상이 곧바로 ‘儒’였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堯-周公-孔子-孟子 및 자신에 이르는 하나의 도통을 세우려고 애썼던 것을 보면 한나라 때부터 종교로 자리매김 되었던 유교의 뿌리가 요임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夏商周시기에 “유교”가 있었다는 표현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도교도 한나라 때부터 하나의 학파였던 도가가 하나의 종교인 도교로 전환되었습니다. 한나라 시기 학자들은 도가의 뿌리는 黃帝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황제와 노자를 한데 묶어 ‘黃老之學’이라 명명했습니다. 임어당은 “중국인은 본능적으로 도가를 받들고 문화적으로 유가를 숭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인간은 문화보다 본능이 우선이라 할 때 중국인의 본능을 지배해온 ‘道’는 ‘儒’보다 많이 앞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외학자들은 한결같이 “중국문화는 先秦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선진시기가 바로 夏商周를 의미하며 중국문화의 주축이 바로 ‘儒’와 ‘道’였다고 본다면 “하상주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다.”는 저의 표현이 틀린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의 글 <<이판사판이란 말의 유래>>를 관심 있게 읽으시고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해주신 연암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5    "조선족은 단군의 후예, 한국인은 고종의 후손?" 댓글:  조회:5308  추천:54  2007-10-15
“조선족은 단군의 후예, 한국인은 고종의 후손?” -<<한국인은 왜 ‘조선족’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갖는가?>>에 대한 반론 김정룡의 시론 지난 10월 9일 나의 글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는 한글일까? 조선글일까?>>이 발표되자, 많은 조선족 관련 사이트에서 게재했고, 워낙 민감한 화두여서 네티즌들 간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네티즌들은 조선족과 한국인으로 뚜렷하게 두 개 파로 서로 첨예하게 맞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들의 논쟁은 논쟁이라 하기보다 싸움으로 번지고 있어 안타깝다. 논쟁의 요지를 살펴보면 조선족들은 조선,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란 표현을 옹호하는 입장이고, 거꾸로 한국인들은 조선족들의 입장을 반대하고 기어코 한국, 한국인, 한인, 한국어, 한글 표현이 맞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한국인은 ‘조선족’이란 호칭마저 부정하려고 들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 유감이다. 여기서 한국인들의 주장을 전개해서 말하자면, 첫째 조선이란 국호는 치욕이라는 것이다. 조선은 이성계가 명나라로부터 얻은 국호이기 때문에 치욕의 역사로서 부정해야 마땅하고 또 그래서 고종이 조선을 버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둘째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근거로 모든 우리 겨레는 무조건 韓의 표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거의 100%에 달하는 한국인들은 韓의 표현의 당위성을 대한제국이란 존재와 그 후 일부 조직, 일부 단체, 일부 서류에서 간간히 나타난 韓을 들먹이면서 우리 겨레를 통 털어 韓으로 표현해야 옳다는 주장이다. 한 한국인네티즌이 조선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인용한 문장의 일부를 발췌한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이전, '大韓帝國'이란 나라가 분명, 한국인과 재중동포 역사 속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순수 한족이나 일본인이 어떻게 호칭을 하든지, '大韓帝國' 後孫(現 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들 스스로가 자신과 자신의 동질의 집단을 호칭할 때, '조선족'이나 '조선인'이라 부른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정확히 호칭을 한다면 '韓國人'이며 약칭해서 '韓人'이라 불러야 옳다. 한반도에 근대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에 분명 대한제국이었므로 그때부터 호칭을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윗 문장에서 現 조선족들은 또 다른 주장과 반론을 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단순 명료하게 예를 들자면, '大韓帝國' 後孫(現 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 들 스스로가 자신을 '조선족'이나 '조선인(조센징)'이라 부른다는 것은 '한족'들이 '현 조선족'에게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의미와 똑같을 뿐이다. 그것은 자기 조상을 욕보이는 짓일 뿐이다. '大韓帝國' 後孫(現 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 들은 스스로 '대한인'. '한인', '한국인'이라 불러야 함이 옳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조선'이나 '조선족'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갖는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現 중국동포들이 이런 역사적 전후 사유를 살펴 보지도 않고 , 단군 조선과 중세 조선왕조까지 연관시켜 현 조선(북한)이란 국호만 집착하는 자가당착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착각과 이상한 유추까지 하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에 '조선'이란 왕조가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존재하였는데, '族'은 '國家' 보다 하위 개념이고 중국정부가 명명해준 '조선족'이란 명칭을 선뜻 받아 들일 수 있는 한국인은 아마 드물 것이다. 1949년 모택동이 쟝제스하고 벌인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의 후예를 흡수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명명한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1945년 해방 이후, 北이 '대한민국'란 국호을 쓰고 南이 '조선'이란 국호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지금의 '조선족' 은 '한국족'이란 호칭을 쓰고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중국에 남아있던 '韓人'들이 '朝鮮族'이란 호칭으로 명명된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더욱, '단군조선' 과 '중세조선' 이라는 민족 역사의 큰 물줄기를 저 머나먼 아프리카 초원의 부족같은 뉘앙스로 만들어버렸으니, 한국인 입장에서는 '조선족'이란 호칭이 썩 달가워 할리 없으며 몰상식하게 보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조선족'이란 호칭은 '조선(北)'의 호칭을 가져다가 명명한 정치적 명사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現 '중국동포' 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 연유는 '중국동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大韓帝國’ 後孫(現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 들은 스스로 '韓人’, '韓國人’이라 호칭해야 옳다. (독자/이해불가 연변통보 2007-08-05) 윗 문장은 정치적 입장으로 보나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나 학문적인 견지에서 보나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친 소리로 들려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한 푼도 없다. 실로 한국인은 대한제국에 광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이런 꽉 막힌 한국인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만 조선족이란 호칭의 유래를 한번 명확히 알려 주고 싶다. 현재 조선족은 19세기 중반부터 연변을 발판으로 동3성에 자리 잡게 되었다. 본래 연변은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상지라고 여기고 17세기 중반부터 200동안 봉금령을 내렸다가 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하여 땅을 개척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19세기중반부터 조선인의 이주와 관내 한족의 이주를 허락했다. 그때 만주 땅에 간 조선인은 현재 조선족의 1세이다. 당시는 대한제국이란 존재도 없었고 한국, 한국인, 한인이란 표현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조선반도로부터 만주 땅에 이주해간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조선인이라 칭하고 무리를 지어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생활을 해왔다. 그 후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는데 그들도 역시 자신들을 조선인이라 생각했을 뿐 한인이란 표현에 익숙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소수 운동가를 제외한 대다수는 머리에 한이란 개념이 없었다. 모택동 시대에 들어 조선족이라 칭하게 된 것은 우리민족공동체가 조선시대(대한제국이전)부터 이주해왔고 또 중국인은 우리를 조선인이라 여긴데서 민족호칭을 조선족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래된 조선족을 그 무슨 미친 소리 같이 대한제국의 후손이기에 마땅히 한인, 韓족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주장이다. 더욱이 조선족이 조선족이라 하는 것이 조상을 욕보이는 짓이라 매도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인은 대한제국의 존재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朝鮮을 부정하고 韓을 주장하는 것은 조상을 욕보이는 행위가 아닌가? 그래서 일부 조선족네티즌들은 “조선족은 단군의 후예이고, 한국인은 고종의 후손?”이란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족이 왜 한국 땅에서 시기와 냉대를 받을까? 단순히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보다 한국인의 내면인식 속에 ‘조선족’이란 호칭을 거부하고 따라서 조선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이 말로는 조선족이 동족이고 뭐고 하지만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의 조선족은 韓이 붙지 않은 자기네와 다른 이방인일 뿐이다. 현재 한국인들의 이런 사고방식(韓만을 고집하고 朝鮮을 부정하는 사상)을 갖고 남북통일을 말하기는 너무 요원해 보인다. 앞으로 남북이 통일하려면 남과 북의 정치가들과 학자 및 사회 원로들이 모여 국호, 민족호칭 등을 반드시 논의해야 하는데 현재 한국인들의 꽉 막힌 사고방식을 갖고 논의에 임한다면 통일은 고사하고 서로 적대감만 늘어갈 것이다. 한국인은 분단을 말할 때 쩍하면 외세를 들먹인다. 다 아시다시피 외세의 영향은 줄어가고 있으나, 거꾸로 한국인의 범민족적인 트인 사고방식이 매우 경직되어가고 있다. 조선족이란 호칭 하나를 수용 못하면서 남북통일을 말한다? 참으로 더 할 말이 없다.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조선이란 표현이 역사가 유구하고 한이란 존재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민족도 조선과 한이란 표현에 서로 거부감내지 적대감을 갖지 말고 중국인이 華와 漢의 표현을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조선과 한의 표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통일이 된다면 국호와 민족호칭을 ‘고려’로 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김일성 주석이 ‘고려연방’을 제안했고, 또 어차피 영어권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에서 KOREA로 부르고 있는 마당에, 고려라는 호칭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4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는 조선글일까? 한글일까? 댓글:  조회:6756  추천:88  2007-10-09
김정룡의 시론 한국에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한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4년 집현전에 유생을 모아 만들도록 지시했고 2년 후인 1446년에 완성되었으며 훈민정음이라 칭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훈민정음이 현재 조선글, 한글 두 가지로 불리고 있는데 이북에서는 한글이란 표현을 수용하지 않고 이남에서는 조선글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며, 아울러 이남과 이북이 서로의 표현에 대해 거부감 내지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적인 요소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서 이남에서는 문자도 한국, 한민족, 한인, 한국어 등의 표현에 따라 한글이라 하고 이북에서는 조선,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등의 표현에 따라 문자를 조선글이라 한다. 만약 세종대왕이 살아 계신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저 타민족의 상황을 살펴보자. 중국 인구 93%를 차지하는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며, 외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중국어를 중국 내에서는 한어, 중국인이 쓰는 문자는 한자라 하는데 한족, 한어, 한자 등 개념은 유방이 세운 한조(漢朝)에 의해 유래되었다. 한족의 전신은 화하족(華夏族)인데, 화하족은 화의 제족과 하의 제족이 합쳐진 총칭으로서 통일된 민족 개념이 아니었다. 서한시기 경학통치의 확립에 따라 사회가 대통합을 이루면서 본래 2만 여개의 성씨가 점차 470여 개의 성씨로 줄어들었다. 성씨가 줄어든 것은 많은 민족과 부족이 유실되고 문화가 통합되고 풍속습관이 통합되고 언어와 문자도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따라서 언어, 문자, 문화, 의학 등 여러 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국토도 전례 없이 넓어졌다. 한조는 이러한 대통합을 바탕으로 왕망이 정권을 탈취했던 시간을 빼면 서한과 동한이 400여 년의 통치를 지속했다. 한족, 한어, 한자 등의 개념은 바로 한조의 이러한 대통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번영과 발전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비록 기원 220년에 한조가 멸망을 고했으나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중국 내의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하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계 사람을 화인(거주국의 국적을 소유한 자), 화교(거주국의 국적이 없는 자)라 부르며 한족들이 대외에 자민족을 자랑스럽게 말할 때 화하민족이라 한다. 화(華)는 한족과 화인, 화교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며 ‘국제 화상대회’라는 회칭이 바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일본은 자민족을 야마토(大和)민족이라 한다.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우리민족은 민족호칭이 유태인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는 아마 유태인과 우리민족이 모두 대재 다난했던 수난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반도 남쪽에서는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라 하고 북쪽에서는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외에 흩어진 사람들은 거주국에 따라 민족호칭도 다르고 복잡하다. 만약 민족, 언어, 문자에 대한 남쪽에서 쓰는 호칭과 북쪽에서 사용하는 호칭을 서로 수용하고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실제로는 서로 상대가 사용하는 호칭에 대해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조선족은 비록 중국 내에서는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라 말하지만 한국인을 만나면 조선민족, 조선어, 조선글 등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하고 북조선인을 만나면 한민족, 한국어, 한글이라는 표현을 조심해야 하는 이중성격으로 살아가는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서 남북의 이 면에 대한 갈등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朝鮮)과 한(韓)의 유래를 살펴보기로 하자. 전설에 의하면 4천 년 전, 즉 중국의 요(堯)와 동시대에 단군이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기자(箕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해서 기자조선(현재 한국의 일부학자들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이라 불렀고 기원 전 3세기에 조선이 중국의 연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부여, 예맥,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로 흘러오다가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명나라의 지시에 의해 국호를 조선이라 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1948년 10월 이북에서 김일성이 세운 정권이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서 국호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 했다. 韓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아리수(阿利水:한강의 고칭) 이남에 마한, 진한, 변한이란 이른바 삼한이 있었다. 그 후 삼한이 각각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 변한은 가야로 바뀌어 韓이란 호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2천년 동안 우리 일상 삶 속에 韓文化는 간간히 명맥을 이어왔는데, 한복(韓服)이란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1887년 일본이 조선을 청나라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내려는 수단으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도록 종용했다. 제국이란 본래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대외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의미가 있으나 당시 대한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그러한 힘이 근본 없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 후 1948년 9월 이남에서 이승만이 먼저 단독 정부를 세우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했다. 자아! 문제는 남북이 분단 이후 서로 자신들이 역사를 계승한 전통국가라 주장하고 상대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동시에 민족, 언어, 문자 등 호칭마저 상대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또 서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북에서는 조선이란 호칭이 단군조선과 조선조 500년을 합치면 2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유래가 깊을 뿐만 아니라 정통이라 주장하고 따라서 민족은 조선민족, 언어는 조선어, 문자는 조선글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종대왕이 문자를 발명해 냈다면 세종대왕은 분명히 조선시대의 임금이었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면 마땅히 조선글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자가 어떻게 한글이라 말할 수 있는가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재 한국의 주장은 이렇다. 한국은 대한제국의 연속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국가이다. 한편으로 이남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한, 진한, 변한의 후예라고 여기고 있는데서 韓의 표현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韓의 표현을 선호하고 朝鮮의 표현을 기피하고 있는데서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가 생겨나고 있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朝鮮의 표현이 이북과의 정치적인 대립의 측면, 이를테면 이북국호 ‘조선’을 인정할 경우 이북이 고조선과 조선을 계승한 정통국가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꺼리는 외에, 힘없고 못살던 “죠센징”을 상징하기에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간지로 가장 유명한 신문의 명칭이 <<조선일보>>이고 조선간장, 조선된장, 조선옥돌 등 표현은 이중성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닌가? 한국인이 만약 남북 간의 정치적인 대립에 의해 朝鮮이란 표현을 꺼려한다면 다소나마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않고 朝鮮이란 표현이 힘없고 못살던 “죠센징”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부한다면 이는 불효자식이다. 왜냐하면 조상이 잘살았던 못살았던 힘이 있었던 없었던 우리 조상이다. 한국인이 우리도 5천년 역사를 지닌 민족이라 말하는데 이는 절대 韓에서 온 것이 아니라 朝鮮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국인이 좋은 것은 韓이고 궂은 것은 朝鮮이란 인식은 참으로 이중성의 문제가 아닌가?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한국인이 우리민족을 총칭하여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 등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폐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북의 2천만과 중국조선족, 러사아고려인, 일본조총련 등 많은 사람들이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원인도 정치적인 요소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 중국조선족은 엄연히 민족 명칭이 조선족이고 언어와 문자도 두음법칙을 보나 문법을 보나 분명히 조선민족, 조선인, 조선어, 조선글이지 결코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 아니다. 1995년에 연변대학 역사학부 전춘원 교수가 <<早期東北亞文化圈的朝鮮>>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1999년 한국 집문당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할 때 제목을 <<한민족이 동북아문화권에서의 역할>>로 고쳤다. 즉 조선을 한민족으로 바꿔놓았다. 이 외에도 조선족이거나 이북에서 신문, 잡지, 책에서의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 등 표현이 한국에 옮겨질 경우 한국인은 임의로 韓으로 고친다. 이는 분명히 한국인의 옳지 못한 처사이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첫째 한국인은 마땅히 조선족과 이북의 표현을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둘째 한국인이 조선민족, 조선인, 조선어, 조선글 등의 표현을 거부하는 것은 조상을 부인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5일 서울에서 제1회 세계한인의 날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다. 한국인은 남북 및 해외 겨레를 모두 한인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비현실적이다. 만약 제2회, 제3회 우리 겨레에 관한 행사를 이북에서 개최한다면 한인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중국연변에서 개최해도 똑 같은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예전의 분단국들은 국호가 우리처럼 혼란스럽지 않았다. 이를테면 동서독일, 남북베트남 등이 그것이고 독일은 분단 중에 게르만민족이란 호칭을 서로 사용했고 서로 국호, 민족, 문자에 대한 호칭에 거부감이나 적대감이 없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이 국호, 민족, 언어, 문자에 대한 호칭에 서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는 민족은 없다. 참으로 비극이다. 남북이 통일하려면 정치적인 통일에 앞서 민족호칭, 언어호칭, 문자호칭 등이 먼저 통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글이냐, 한글이냐? 세종대왕이 죽은지가 500년이 넘었으니 그를 중재자로 모실 수도 없고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3    '연변내기'와 연변사람 댓글:  조회:5052  추천:90  2007-10-06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2.'연변내기'와 연변사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북한에서는 함경도 처녀들이 일등 신붓감으로 꼽히고 있다. 그 이유는 함경도여성들이 생활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변사람은 대다수가 함경도 출신이다. 그래서 연변여성들은 타 지역 조선족여성들에 비해 생활력이 강하다. 연변남자들도 이해력이 빠르고 진취심이 강한 등 우수한 면이 많다.  허나 문화혁명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 내 타 지역 조선족들은 연변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갖고 있는데 연변사람을 ‘연변내기’라고 부르고 있다.  필자는 연변에서 40여년을 살면서 들어보지 못했던 연변사람에 대한 다른 호칭인 연변내기라는 말을 한국에 와서 배웠다. 그런데 처음에는 연변내기라는 말이 단지 연변출신이라는 뜻인 줄로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연변출신사람을 비방하는 뉘앙스를 풍긴 낱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재한 조선족사회의 연변을 제외한 흑용강성을 비롯한 기타출신 조선족들이 연변출신의 사람들에 대해 나쁜 평가를 할 때 연변사람이라 하지 않고 연변내기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그럼 연변내기란 어떤 유형의 대명사인가? 진실하지 못하고 허위적이며, 약고 꾀바르고 사기 치기를 좋아하며, 남의 등을 쳐 먹고 한탕 치기를 일삼는, 그리고 이중성격이 있고 남을 물어먹기 좋아하며 아부를 잘하는 등등인데 하여튼 몹쓸 인간이라는 것이다. 구체 예를 들어보면,  가) 파출부사무실에 가면 연변내기들이 자기를 먼저 보내달라고 사무원에게 가만히 뒷돈을 찔러준다. 이리하여 아침 8시에 도착한 기타 조선족들은 기다리고 있으나 9시에 도착한 연변내기는 일을 배당받는다. 기타 조선족들도 일을 가려면 할 수 없이 뒷돈을 준다. 이렇게 되어 결국 한국 사람들의 배만 채워준다.  나) 건설현장에서 단가가 맞지 않을 경우 대다수 기타 출신 조선족들은 거절하나 연변내기들은 남몰래 슬그머니 주인을 찾아 일을 맡는다. 결국 연변내기들에 의해 노가다 단가를 떨어뜨린다.  다) 한국 내 조선족끼리 임시부부를 맺고 사는 사례가 많은데, 연변여자들은 대다수가 돈을 바라고 남자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에 비해 기타조선족여자들은 상대가 마음에 들면 돈을 따지지 않고 진심으로 대해준다고 한다.  라) 연변내기들은 일을 하는 중 다른 직장에서 돈을 더 준다고 하면 주인과 아무 말도 없이 월급을 탄 이튿날로 그만둔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주인들이 준비가 없다보니 자리가 비고 갑자기 사람을 구하느라 애먹는다.  마) 한국 사람에게 아부하려고 2002한일월드컵 때 한국이 16강에 오르니 너무 기뻐서 밥상 위에 올라가 춤을 추었다느니, 3개월 동안 일을 하지 않고 월드컵에만 열중했다느니 당치도 않은 얘기들을 한다는 것이다. 일본 놈이 다시 쳐들어오면 일등 한간감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바) 한국주인들마저 연변사람을 고용하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필자는 연변내기들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많이 들었다. “왜 재수 없이 하필이면 연변에서 태어났나?”, “너 왜 연변내기처럼 거짓말을 하나?”, “연변사람이라면 상종도 하지 않겠다.” 등등이다. 그렇다면 연변내기들이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이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연변은 흑용강성에 비해 땅이 적어 먹고 사는데 풍족치 못해 인심이 박해진 것이고 둘째, 연변은 정치적으로 위의 눈치를 살피고 살다보니 사람들이 이중성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고, 셋째 연변사람들이 타 지역 조선족에 비해 단합심이 약한 것, 아니 약한 정도가 아니라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모인 곳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연변사람과 연변내기를 갈라 보아달라는 것이다. 개별적인 연변내기의 폐단을 갖고 마치 전체 연변사람들이 다그러한 것처럼 매도하는 현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인들이 연변출신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결코 연변사람을 다 격어 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일부 타 지역 조선족들이 한국인 앞에서 일부러 연변조선족을 팔아먹는 수단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또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켜려고 한 결과라 생각된다.  며칠 전 필자는 한국 분과 흑용강 출신 조선족여성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인인 한국인 총각에게 조선족여성을 소개해줄데 관한 화제가 나오자 흑용강 조선족 분이 하는 말이 “연변처녀는 쓸게 없으니 안 된다!”고 소리 높이는 것이었다. 그날 그 장소에서 솔직히 필자는 그 분을 한바탕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와 같은 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 따지고 보면 그들은 ‘연변내기’보다 더 야비한 ‘00내기들’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속담이 있듯이 연변사람들이 과거를 뒤돌아보며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한편 왜서 조선족들은 모국 땅에 와서조차 서로를 헐뜯는지 참으로 가슴 아프다.  
2    동생과 혼인신고하고 형과 살다 신세 망친 여자 댓글:  조회:4791  추천:62  2007-10-04
동생과 혼인신고하고 형과 살다 신세 망친 여자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일부 조선족여성들이 한국 땅을 밟으려고 국제결혼을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그 방법도 가지각색이여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딸, 오누이, 형부와 처제가 위장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으며 동생과 혼인신고를 하고 형과 사는 사례도 있다. 길림시에서 온 장모 여인(28세)은 3년 전에 한국에 왔는데, 당시 한국인 박모가 중국에 가서 그녀와 선을 보고 혼인약속을 했지만 신용불량자라 재산담보를 제출할 수가 없어 혼인신고를 못하고, 박모의 동생이 형을 대신해 장모 여인과 결혼수속을 하고 그녀를 한국에 데려왔다. 박모는 장모 여인과 살면서 신근한 노력으로 빚을 갚았고, 자영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그녀는 일을 하지 않고도 본가식구들을 돌볼 수 있었고, 용돈도 푸짐하게 쓰고 차도 끌고 다닐 정도로 한국에 시집온 여성들 치고는 비교적 여유 있게 보냈다. 2년이 넘어 귀화허가신청까지 제출했다. 그녀를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부러워했다. 허나 쨍하게 떠 있던 해는 사라지고 갑자기 흐리고 광풍이 불더니 우박이 쏟아져 농사를 망치듯 그녀는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장모 여인의 여동생이 2년 전에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왔는데 남편 강모의 심한 폭력으로 이혼소송을 제출했다. 강모는 박모와 동서간이자 친구사이여서 박모와 장모여인의 위장혼인신고사실 내막을 알고 있었다. 강모는 법원으로부터 패소판결을 선고받게 되자 보복으로 박모와 장모여인의 위장혼인신고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신고했으니 박모와 장모여인은 경찰조사에서 오리발을 내밀 수가 없어 인정했다. 결국 박모와 장모여인은 법원으로부터 각각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출입국에서 그녀에게 출국명령을 내렸다. 위장결혼사실이 밝혀졌으니 동생과의 혼인을 해소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법상 동생과 이혼수속을 하고 형과 다시 혼인신고를 못한다. 또 중국에 가지 않고 다른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더라도 체류변경이 되지 않는다. 결과는 하나, 그녀는 오로지 중국에 돌아가는 것. 조선족여성들이 코리안드림을 이루려고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단 한국땅을 밟으면 만사 OK라는 장밋빛 환상을 품고 오지만, 한국에 온 후 이런저런 일이 터져 뒷감당을 할 수 없어 신세를 망치는 자가 매우 많다.
1    국적취득기회를 놓친 이혼여성들 댓글:  조회:4815  추천:57  2007-09-28
국적취득기회를 놓친 이혼여성들김정룡 재한칼럼니스트최근 몇 년 사이 한국정부는 조선족에 대해 여러모로 우대정책을 많이 실시해왔으며 따라서 조선족은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일부는 국적 혹은 영주권을 부여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 일례로서 2005년 9월 15일 이전에는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여성들이 한국인 배우자와 이혼할 경우 어느 쪽의 귀책사유(잘못)를 불문하고 무작정 본국에 돌아가야 했으나 그 후부터는 한국인 배우자의 귀책사유로 인해 이혼한다는 판결을 선고받으면 귀화허가신청 혹은 영주권허가신청을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한국정부의 우대정책을 모르고 있는 조선족결혼여성들이 많을뿐더러 설사 알고 있더라도 한국인 배우자와 이혼 시 의지가 약해 분명히 유리한 조건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국적 혹은 영주권 취득기회를 놓치고 마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례 1. 구럭도 잃고 게도 잃어 불법체류로 전락한 여성 용정시에서 온 김모 여인(28세)은 2005년 3월 처녀로 한국인 장모와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왔는데, 남편의 심한 폭력에 견디지 못해 지난 3월경 이혼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증거로서 상처 사진과 병원진단서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받은 고통의 대가로 위자료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다. 법적소송을 당한 남편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와 협의이혼을 하자고 제안했다. 만약 협의이혼을 하게 되면 그녀는 한국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때문에 끝까지 싸워 이겨야만 한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협의이혼하고 또 다른 한국인과 재혼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을 택하는 조선족여성들은 법적으로 싸워 이길 확률이 낮은 경우이다. 가령 승소의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 협의이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김모 여인의 경우 승소할 확률이 90%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K한국남자와 재혼할 타산이었고 또 K남자는 그녀의 이혼이 아무렇게나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과 협의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K남자와 얼마간 지내보니 맘에 들지 않아 재혼이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지금 국적취득기회도 놓치고 재혼도 깨지고 구럭도 잃고 게도 잃어 현재 불법체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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