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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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베이징 쇼제"가 전파를 타기까지 댓글:  조회:11292  추천:31  2011-05-13
"베이징 쇼제"가 전파를 타기까지  주청룡 작곡가 정원수(왼쪽)와 필자   나는 원래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중국에 있을 때부터 , 등 작곡가 정원수가 창작한 노래만은 어쩐지 특별히 나를 매료시켜 이 노래의 창작자 정원수를 만나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었는데 지난 5월 2일 ‘한민족신문 창간 2주년 기념행사’에서 정원수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였다.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잠간 례의적인 말이 오간다음   원래부터 궁금하였던 ‘베이징쇼제’의 창작으로부터 가수 김월녀를 찾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묻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된 계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는 1993년1월 KBS “전국은 지금”이라는 프로로 한반도(조선반도) 전체의 환경보고 프로를 록화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와서 연길, 대련, 장춘, 할빈, 장백산을 둘러보며 방송프로를 구상하던 중 중국에 매료되여 1993년에 중국 대련에서 중한합자 회사 天天宮 (한국식당, 가라오케, 커피숍 등 )을 대련시 개발구 구청옆 발전공사빌딩 1층과 2층 전부를 임대해서 꾸렸다.   1년 뒤 조선의 김일성주석이 서거하여 한반도(조선반도)에 긴장상태에 들어갔을 때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께서 전쟁이 날지 모르니 빨리 돌아오라고 울며 독촉하는 바람에 그는 어머님의 의사를 존중하여 경영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귀국하게 되였다.   그때 함께 일하면서 정이 들었던 한 녀인과 갈라지게 되였는데 그 녀인은 너무도 갈라지기 아쉬운 심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공항까지 배웅하였다. 정원수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에 앉아서 대련시를 내려다 보는 그 순간, 아직도 공항에서 사라져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눈물로 자기를 그릴 그녀, 1년간 같이 사업하면서 인상 깊었던 추억들이 주마등마냥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러한 추억들은 작곡가로서의 그에게 창작의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자이젠바 다롄쇼제 / 오늘의 이별이 / 우리의 사랑에 / 시작일 수 있잖아 / 언제 다시 돌아온단 / 기약은 없지만 / 울지는 마라 / 워 아이 니 / 영원한 내 사랑 / 자이졘바 다롄쇼제 / 그의 흥분된 심정으로 가사와 선률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비행기가 한국으로 나는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다 완성되였다. 그는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중국말을 섞어 하는 것이 습관적이여서 가사에서도 그 습관이 표현 되였으며 멜로디에는 중국풍을 짙게 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였다.   본래 가사를 쓸 때에는 ‘다롄쇼제’였는데 가사전달에서 순통스럽지 못하여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인 수도 ‘베이징’이 좋을까 싶어 ‘베이징쇼제’로 고쳤다. 그런데 귀국하여 다사분주하게 보내다니 누구를 통해 음반을 취입할까 하는 이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그는 1996년12월,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한중 수교 4주년 기념공연 ‘友谊之夜’을 어렵게 성사시켰는데 그때 알게 된 중국 국제방송국 서창술 부장과 함께 국제방송과의 교류를 계속하면서 한국노래 음반들도 공급해주고 서창술 부장과의 인연을 계속 맺어오던 중 1997년에 그가 중앙민족가무단의 조선족 가수 김월녀를 소개 하였다. 그러나 김월녀가 계속 외국공연 중이라서 만나지 못하다가 1999년 정원수의 형격인 정우혁씨가 북경에 갔다가 서창술 부장이 김월녀를 만나게 해주면서 한국의 정원수에게 얘기해 달라고 하여 정우혁은 한국으로 정원수에게 전화하여 김월녀를 만났으니 곡을 보내달라고 하여 서울에서 북경아가씨악보를 팩스로 중앙민족가무단으로 보냈다. 김월녀가 불러본 즉 너무나 맘에 든다고 하여 정원수가 그녀를 서울로 초청하여 급하게 록음시키는데 그날따라 김월녀가 노래하는데 록음실의 스피커가 터져버렸다. 그 순간 정원수는 "이건 히트다, 좋은 징조다" 라고 예감하였다. 그후 록음을 끝내고 음반을 냈으며 그 당시 정원수는 한국에서 현철, 설운도, 남진, 심수봉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의 전국순회콘서트를 기획하여 김월녀를 함께 출연시키며 한국인들에게 김월녀를 알리고 KBS 열린음악회와 2001년 12 월 31일 밤, KBS의 “가는 해 오는 해”라는 프로에서 2002년 새해 재야의 종소리 타종후 0시 15분 KBS를 통해서 중국동포가수 김월녀의 가 차이나복을 곱게 차려 입은 40여명의 무용수와 함께 전파를 타고 고고성을 울렸다. 이 노래는 이렇게 세상에 태여나자 인차 무섭게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정원수는 곧바로 CD 200장을 둘러메고 북경으로 날아가 국제방송국 서창술 부장에게 전해주어 서창술은 중국 전역의 방송국과 심지어 평양중앙방송까지 전해주었으며 중국 전역에서 동시에 울려퍼지게 되였다. ‘베이징쇼제’가 이렇게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자 한국과 중국의 음악계와 대중속에 급속히 펴졌으며 대중속에서 히트곡으로 되였고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있는 세계 곡곡에서 널리 불려지는 애창곡이 되였다, 이로부터 정원수와 김월녀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를 타고 더욱 널리 퍼지게 되였다.      2010년 5월 10일 한국에서     한민족신문 2010년 5월 13일, 흑룡강신문 2010년 5월 27일     [주] 이 글은 최종 정원수가 심열하고 동의 한다음 투고 되였음      
59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 댓글:  조회:9693  추천:39  2011-05-13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께서 국무사업에 매우 분망히 보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대통령님께서 집정하시는 기간 중한관계가 더욱 돈독히 발전하리라고 믿으면서 이 편지를 올립니다, 저는 중국 연변에서 온 동포 주청룡입니다. 저는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지난해에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와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도 하고 일도 하면서 한국의 경제가 놀랍게 발전한 것을 보고 고국에 대한 경모의 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유감스러운 점이 있어서 아래의 이 글을 대통령님께 올려 일반 국민들을 비롯한 전반 한국사회가 우리 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여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로 돼 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한 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 합니다.   저의 오래 전부터의 소망이 조상이 누워계시는 고국 땅을 밟아 보았으면 하였는데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지난해에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오게 되였으며 또 조상의 묘소를 참배하여 오매에도 그리던 소원을 풀게 되였고 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도 하고 일도 하면서 한국생활을 체험 하여 보았습니다. 출입국 관리소, 취업교육장, 노동부 고용지원쎈터, 중국동포타운 등 국가기관, 사업소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고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1992년 중한수교 이래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 생활이 많이 펴여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있을 때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 일을 하면서 많은 멸시, 모욕, 학대를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하여 왔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저도 이번에 한국에 와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부리면서 노예처럼 여기고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가정에서는 가정부를 종으로 여기여 고용인들이 최저의 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습니다.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개의치 안습니다. 하지만 인격만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채소농장에 가 보면 동포들의 기숙사가 곧바로 채소하우스 안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동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 차이가 있으므로 하여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도구를 연장, 쇠줄을 반생이라고 하는데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연장이나 반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에 그 말을 알아 못 들으면 60세 이상의 고령동포들에게도 “반생도 몰라” 하며 반말을 써가며 욕하고 어떤 때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스러운 욕을 퍼붓고 있습니다. 표준말을 하는데 우리가 알아 못 들으면 욕해도 무방하겠지만 반생이란 한국국어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를 쓰면서도 우리가 알아 못 듣는다고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돈벌이 온 것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한국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주변인이라면서 아무런 정치권리도 인권도 없는 인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중국에서 모든 정치권리를 다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변에는 조선족인구가 전주 인구의 37.7%밖에 안되지만 나라에서는 연변을 조선족자치주로 정하고 민족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하여 중대한 회인 《당대표대회》와 《인민대표대회》도 조선말로 진행하고 학교에서도 조선족 언어. 문자로 교육을 받으며 거리의 모든 간판도 조선문자와 한자 두 가지 문자로 표시하는데 조선문자를 위에 한자를 아래에 놓고 있습니다. 산아제한정책에서도 대민족인 한족은 한 쌍의 부부가 아이 하나밖에 나을 수 없지만 우리 소수민족은 아이 둘씩 나을 수 있도록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민족이라 하여 소외를 당하였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 겨레의 고국에 와서 일부 고용주들에게서 아무런 인권도 없는 노예나 종살이 같은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중국에서 살길이 없어서 한국에 온 것으로 여깁니다. 한국에 와서 취업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서민들이지만(중국에서 국가공무원, 문화, 교육, 의료, 과학기술 등 분야에서 사업하다가 정령퇴직을 한 후 친척방문 또는 고령동포비자로 한국에 와서 취업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집도 100 여 평방미터 되는 아파트에서 고급 가정전기기기들을 갖추어 놓고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모두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싸기에 그에 따라 인건비가 높고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고 따라서 인건비가 낮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은 상대적인 이 차이를 이용하여 한국에서의 높은 인건비로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가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아 생활소비가 적게 들기에 한국에서 번 돈을 값있게 쓸 수 있으므로 모두 한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에서도 우리 동포들을 생각해 범위를 확대하여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는 중국과 구 소련지구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친척 없는 동포들에게도 무연고 방문취업제를 실시하였다고 봅니다. 우리 동포들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우리 동포들도 고국에 와서 열심히 일을 잘 하여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려 합니다. 하지만 일부 하류 계층의 고용주들이 동포들에 대하여 너무나도 멸시, 모욕하고 학대하여 한국에서 일하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게만 느껴집니다. 여러 가지 역사적 원인으로 하여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이국 땅에서 생활을 하지만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우리 조선족은 모두 한 겨레의 핏줄로 이어진 동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정부의 배려 하에 우리 재외 동포들도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고국에 와서 일하는데 모든 일터에서 한 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일개 서민으로서 감히 대통령님께 편지를 올려 죄송스럽게 생각됩니다. 참고로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통령님의 옥체건강과 국무사업이 순리롭게 진행 되여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중국동포 주청룡 2008년 8월 1일 부록   아래에 중국동포들이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에서 갖은 멸시와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열거합니다. 1. 시화공단의 모 화학공업사의 플라스틱필름공장의 공장장이 금년 1월 30일 새벽 2시에술을마이고중국동포기숙사에뛰어들어아무런연고없이“너희들 중국 놈 새끼들 다 없애 치워야 한다.”하며 마구 욕설을 퍼부어 할 수 없이 그 공장을 떠난 일, 2. 포천시의 모 건축현장에서 오야지가 중국동포들에게 늘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욕설을 퍼붓고 한 동포가 안전벨트 사용에 대하여 합리 한 건의를 제기 하였는데도 그것을 불만과 반발로 여기고 늘 그를 욕하며 냉정하게 대하다가 나중에는 내 쫓은 일, 3. 화성시의 모 형광등공장의 생산과장이 중국동포에게서 검은 돈봉투를 받다가 다른 한 중국동포에게 발각되자 그 후부터는 그를 볼 때마다 그 돈봉투를 받은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위협적인 눈총으로 보면서 늘 생트집을 잡아 그를 마구 욕하여 나중에는 공포증까지 걸려 공장에서 쫓긴 일, 4. 중국동포까지 다하여 근로자가 7,8명 밖에 안 되는 가평의 모 두부공장의 사장이 중국동포가 그에게 전화를 하였다 하여 어찌 삯꾼이 감히 사장에게 전화를 거느냐 하며 욕설을 퍼부으니 그 동포가 말대꾸를 하자 삯전도 주지 않고 내 쫓으려다 한국의 언론매체에 공개를 하겠다고 하니 겁에 질려 삯전을 주고 내 쫓은 일, 5. 숙식을 해결한다 하여 상일동의 모 채소농장으로 일하러 갔는데 가보니 쌀만 대여 주고 그 외의 것은 자체로 해결하여야 하며 잠자리는 하우스 안이었다. “쌀만 대여 주고 하우스 안에서 자는 것도 숙식을 해결한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도 사람이지 않는가? 사람이 어찌 짐승의 자리보다 못 한데서 생활할 수 있는가?”고 하니 농장주는 “다른 교포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왜서 당신만은 그리 불만이 많은가? 못 하겠으면 가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은 일. 6. 서울시 서초구의 한 집에서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쓰는데 음식도 한자리에서 먹을 수 없고 과일 같은 것은 사와 껍질을 깎아 올려 바쳐도 저들끼리 않아 먹으면서도 하나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고 어른들이 마구 욕하고 천시하니 아이들도 어른들을 본받아 그 모양새로 마구 욕하여 종살이 같은 고용생활을 하는 일, 7. 정모, 황모 씨는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전라남도의 모 김 양식장으로 갔는데 일이 너무 고되고 월급이 낮아 빠져 나오려 하여도 바다 한가운데라 도망쳐 나올 수도 없는 처지라 X X 일에 취업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교육을 받고 다시 오겠다고 하니 주인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할 수 없이 배로 건네어 주어 일한 삯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도망하여 나온 일. 8. 중국 용정에서 온 박모씨(59세)는 모 건설현장에서 몇 달 일하고도 오야지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삯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금년 1월 순천시 모 돼지 농장에 가서 일하다 3월 16일, 돼지 축사가 불이 나자 불 끄려 들어 갔다가 불에 타 죽은 일. 이상의 사례들은 이번에 한국에 와서 제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가까운 친척,친구들이 직접 겪은 사실들입니다.   (2008년 9월 1일 동북아신문에 게재)
58    남북관계 정상화는 우리 민족의 공동한 념원 댓글:  조회:10343  추천:50  2011-05-13
남북관계 정상화는 우리 민족의 공동한 념원 청해   최근에 들어서 남북관계 경색으로 하여 개성공업단지와 금강산관광지역상주 한국측 인원과 차량 축출, 개성관광중단, 화물열차 운행중지, 한국측 인원 들의 개성과 금강산 등 지역 출입제한 등 조치들이 실시 되였다. 이는 우리민족이 바라는 념원이 아니다. 크지 않은 땅, 그리 많지 않은 인구를 가진 우리 민족이 응당 통일된 민족,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할 것이 일본의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결속의 산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된 두 개의 나라로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비록 반 파쇼전쟁의 승리로 결속되고 일본침략자를 우리 땅 에서 물리쳤지만 1945년 2월 소, 미, 영 3국의 정상들의 모인 소련의 얄따회의와 1945년12월《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에 관한 결정은 우리민족에게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 하고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조선(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단 된 가슴 아픈 결과를 가져 왔다. 우리 민족은 그 후 3년간의 가열처절한 6.25전쟁을 겪었고 정전 이후 반세기 동안 냉전상태에서 한민족끼리 서로 싸우는 불행한 일들이 있었다..   구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국제적인 냉전시대가 결속되고 남북관계도 김대중전대통령의방북에서체결한‘6.15남북공동선언’으로부터 냉전이 중지 되 였으며 이산가족상봉, 금강산, 개성관광개발, 개성공업단지 입주, 경의선, 동해선 철도개통 등 남북관계에서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으며 서로의 좋은 효과를 가져 왔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방북 ‘10.4남북공동선언’은 ‘6.15 공동선언’의 정신 을 재확인하고 ‘6.15 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켰다. 두 개의 ‘공동선언’은 서로 이해를 증진하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지며 통일을 갈망하는 우리민족의 공동한 념원이다. 한국과 조선 두 정부는 두 개의 ‘공동선언’을 남북관계 발전과 조선(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 하는 강령성 문서로 간주하여 왔다.   하지만 금년에 들어 한국 정부는 ‘잃어버린 10년’론을 제기하면서 두개의 ‘공동선언’을 보류하는 태도를 취하고 ‘무핵, 개방, 3000’의 대북 ‘실용’정책을 제기했다. 즉 조선의 핵문제 해결과 조선의 개방실시를 전제로 10년내에 조선의 인당 국민소득을 3000딸라에 도달하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대북 ‘실용’정책은 실지상 ‘포용 없는’ 비 현실적인 대북정책 으로서 조선이 제창하는 ‘자주’, ‘민족공조’, ‘화해협력’정책과 리념 상에서 서로 저촉되는바 이는 남북관계경색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되고 있다. 이러한 한류(寒流)로 하여 남북관계가 얼어 붙기 시작하였다.   남북관계경색의 다른 한가지 주요한 원인은 보도매체의 조선에 대한 비하적인 보도와 엄숙하지 못한 보도이다. 지난 여름 한시기 한국의 주요한 보도매체들에서는 김정일위원장의 건강이상설에대하여 련속되는보도를하였는데 근거있는 확실한긍정적인 보도를 하는것이아니라 동네집말을 하기 좋아 하는 아낙네들의 근거없는잡담처럼 근거가 확실하지 못한 허실상몽 (虛實相蒙)한 엄숙하지 못한 보도에 집착해 북측의 감정을 엄중히 손상시켰다. .   남북관계경색의 또 다른 한가지 주요한 원인은 한국 보수단체의 비방적인 대북전단살포이다.‘10.4선언’에는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 하지 않고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관계 문제들을 화해와 협력, 통일에 부합되게 해결해 나가기로 한 내용이 담겨 있다. 북측의 경고로 하여 정부에서도 대북전단 살포에 대하여 일정한 제지도 있었지만 민간보수단체는 이를 고집 하여 민간진보단체와의 충돌도 있었다. 이상의 원인으로 하여 현재 남북관계가 최악의 경색에 이르렀다. 이로 하여 직접적 피해를 보는 것은 그간 대북지원을 지속해온 남한의 민간단체들과 개성공단에 입주한 한국기업,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을 학수고대하던 남북양 측의 이산가족이다.   10년간의 이산가족 상봉은 육친의 만남, 육친의 정을 이어 놓았으나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상봉의 그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일루의 희망이 이산가족상봉의 중단으로 하여 생전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할 기약 없는 미래로 되여 또 다시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동일한 언어와 문화, 혈통을 지닌 한 민족끼리 서로 비방하며 대방의 감정 을 상하게 한다면 남북관계의 경색을 초래할 뿐 그 어떤 좋은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한다. 남북경색으로 하여 결국은 개성공단을 비롯한 북측에 파견 된 상주인원의 대폭 감축과 10년 동안 활발하게 추진 되였던 조 한 정부간 대화와 적십자회 교류, 경제 협력 및 육로 통행이 차단되었고, 남북경협협의사무소 등이 잠정 철페 되였고 분단 후 56년 만에 재 개통된 경의선 철도가 1년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운행을 멈추고, 금강산, 개성관광,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된 결과를 가져 왔으며 10년 동안 쌓아 올린 남북평화의 공든탑 을 무너뜨린 결과를 초래 하였다   물론 현재의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의 원인은 한국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북측의 대남 강경책 단행과 ‘통미봉남’의 극단적 대남정책도 남북관계 경색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된다.   한집안끼리 싸워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듯이 우리민족도 서로 싸우면 서로의 상처를 가져 올뿐 유익한 점이 없다. 우리민족과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일정한 타협도 필요하다고 본다.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대통령 집정시기에 서로의 타협으로하여 서로의 좋은 효과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남북경색을 풀어가는 해결방안은 오직 ‘6.15선언’과‘10.4선언’을 드팀 없이 리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선언’을 리행하여 상호신뢰, 상호 존중한다면 쌍방은 우리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치여 민족번영의 새 시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갈 수 있다. .   註解: 두 개의 ‘공동선언’에는 명확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이란 국호를 썼다. 이는 실지상 남북간의 정상들이 서로 대방 정부를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1991년 9월 17일 유엔에서도 두 개의 나라를 다 인정하고 유엔에 가입시켰다. 하여 필자는 본문에서 두 개의 ‘공동선언’과 유엔의 결정에 근거하여 ‘남한’, ‘북한’,‘남조선’, ‘북조선’등 명사를 쓰지 않고 ‘조선’, ‘한국’이란 국호를 썼다.   2008년 12월 20일 동북아신문에 실림
57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않은 기쁨 댓글:  조회:9600  추천:43  2011-05-13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않은 기쁨 나는 3년 전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왔다.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등록하고 두 주일이 지나 받아 안은 것이 외국인 등록증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니 한국에 와서는 외국인으로 인정되어 외국인등록증을 받는 것은 이상할 것 없이 응당한 것으로 생각 되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몇 달간의 생활을 하여보니 내가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있는데 대하여 어딘가 서운한 감을 갖게 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 겨레들은 재외동포비자이지만 방문취업제로 온 중국과 구 소련의 우리 겨레들만 기타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같은 한 겨레에서도 차별시하는 감을 느끼게 되다. 어떤 사람들은 동포로 인정받고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지? H-2비자는 F-4비자에 비하여 출입국, 취업 등 방면에서도 일정한 제한을 받고 있었다. 능력이 있어도 사무직이나 기능직에 취업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중국에서 교원사업을 하였으므로 한국에 와서 어느 학원에 들어가서 중국어를 가르치려 하였는데 안 된다는 것이었다. F-4비자는 될 수 있지만 H-2비자는 단순노무에만 취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외동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할 수 없이 직업소개소에 찾아가서 인사를 올리고“나는 외국인인데 일자리를 찾으려고 찾아왔어요.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를 하여 주세요.”라고 하였다. 나를 접대한 분은 내가 찾아 온 사연을 다 듣고 나서 나에 대한 동정어린 마음으로 “분명히 중국동포인데 왜서 외국인이라고 하는가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도 고국에 와서 재외동포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분명히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으니 스스로 동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아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분도 정부의 동포정책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나에게 형광등조립회사란 좋은 일자리를 소개하여 주었다. 나는 그분의 우리 동포에 대한 포용과 동정심에 매우 고마웠다.  한국국적 외의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겨레들을 외국국적이므로 외국인이라 하여도 별로 개의치 않게 생각되지만 같은 우리 겨레로서 재외동포로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에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며 감정문제이다.   금년에 법무부에서는 H-2체류자격으로 있으며 취업신고를 하고 한 사업장에서 1년 이상 일한 자에게는 4월 26일부터 F-4자격으로 변경시켜 준다는 새로운 정책이 제정 되였다. 나도 이 조건에 부합되었기에 변경수속을 하였더니 F-4자격으로 변경되었다. 나는 변경된 체류자격증을 보고 또 보았다. 여권에는 재외동포비자가 확연히 찍혀있었다. 거소신고증에는 확연히 왹국국적동포라고 하였다.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안은 순간 나는 얼마나 감격되고 기뻤는지 모른다. 오매에도 그리던 재외동포비자였다. 인제야 고국에서 동포로 인정받고 스스로 동포라고 말할 수 있고 동포의 위치에 설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고국의 동포포용정책에 감사하였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여 고국을 건설에 나의 자그마나 한 힘이라도 더 보태어 보자는 결심도 들었다. 주청룡기자2010년 7월 10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56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열렬히 축하 한다 댓글:  조회:11406  추천:42  2011-05-13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열렬히 축하 한다 주청룡   금년 8월23일은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 6년간 《중국동포타운신문》은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 공존의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온 6년이였으며 중국동포들의 한국생활 에서의 길잡이자 가장 친근한 벗으로 지내 왔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법무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출입국정책, 동포들에 대한 안내문(조선족동포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미래에 대해서 올바르게 준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글), 동포들의 한국생활 수기, 등 중국동포들이 가장 관심 갖고 즐겨 읽는 문장들이 많이 실리기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며 가장 즐겨 읽는 신문으로 되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법무부에서 중국동포들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나올 때마다 신문에 새로운 정책을 싣고 그에 대한 해석을 가하며 또 직접 중국동포들의 모임을 갖고 동포들에게 상세하게 해석을 하여 주고 있다. 지난해 말 H-2-A동포들 이 3년 만기 되여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게 될 때에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을 못한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었는데 이때에 신문사는 이에 대한 해석을 신문에도 싣고 동포들에 대한 직접적인 모임을 갖고 상세한 해석을 하여 동포들이 안심하고 중국에 갔다가 다시 입국하게 하였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보도매체의 작용을 할뿐만 아니라 또 중국동포 사회를 위하여 실질적 일들을 많이 해 왔다. 2005년, 2006년 법무부 는 불법체류중인 중국동포를 위한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불법체 류중인 중국동포들이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면 합법체류로 한다는 정 책을 반포하였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안내상 담을 해주었으며 정부의 이런 정책이 나왔어도 불법체류자들이 정부의 정 책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면서 자진출국을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중국동 포타운신문》사는 신원담보를 서면서 불법체류자들을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여 합법체류자로 되게끔 설득하였으며 이로 하여 이 신문사에 등록하고 자진 출국한 사람은 2년에 무려 7천여 명이나 된다. 이 신문의 홍보를 통하여 자진 출국한 동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로 하여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중국동포들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되였다. 그때 불법체류자로 있다가 《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신원담보로 자진 출국하였 다가 재입국하여 인젠 합법체류로 있는 많은 사람들은 “중국동포타운신 문은 정말로 우리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이다. 만약 그때 중국동포타운 신문사의 신원담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불법체류자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문사의 <법률구조본부> 에서는 동포들이 일하고도 고용주한테서 임금을 받지 못한 문제, 일하다 상하여서도 산재보험을 받지 못하는 등 문제들을 해당부문을 찾아 해결하여주고 있으며 매주 일요일이면 무료로 컴퓨터교육 을 실시하여 컴맹이던 중국동포들도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게 하고 있다. 그리고 전문의(할빈대학의료원에서 30여년간 사업해온 김설송교수)를 배치하여 무료건강상담을 하여 중국동포들이 병 보이기 어려운 문제도 해결하여 주고 있다.   신문사는 중국동포밀집구역에 외국인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대비해 가리봉, 대림동 지구대와 련합해 외국인 자율방범대를 조직하여 범죄를 대폭 감소시키고 있다.   지난해에는 또 법무부, 로동부, 외교부 정책담당자가 참석한  ‘방문취업제 시행 1주년, 중국동포정책 새 정부에 바란다’란 공개 토론회 등 큰 행사를 조직하여 중국동포들의 리익을 대표하여 새 정부에 제기하기도 하였다.   지난해 말에는 KBS TV와 함께 고용주와 중국인 근로자 간담회도 조직하여 많은 사람들이 중국동포들의 리익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으며 금년에는 또 전국농업기술자협회를 협조하여 두 차례의 “재한중국동포농업교육”을 진행하여 중국동포들이 고향에 돌아가 새 농촌건설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학습의 기회도 마련하여 주었다.   이외에도 중국도포들을 위하여 취업소개, 고충상담, 출입국수속대행, 한국생활안내 관, 중국동포<사랑의모금함> 활동, 등등의 많은 일들을 하여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며 지역주민들과 동포들이 함께하는 설맞이, 추석맞이 등 한중문화대잔치를 개최 하여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과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뉴대(紐帶)작용을 하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열렬히 축하하면서 앞으로《중국동포 타운신문》이 한국사회와 동포사회를 화합공존의 사회로 만드는데서 더욱 큰 기여를 하며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 더욱 친근한 벗으로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2009년 8월 5일 중국동포타운신문 156호에 게재  
55    경복궁을 참관유람 하고서 댓글:  조회:11814  추천:18  2011-05-13
경복궁을 참관유람 하고서   한국에 와서 어느때부터 조선왕조의 궁전인 경복궁을 참관하고 싶었었는데 지난 일요일(9월 6일) 경복궁을 참관할수 있는 기획가 있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왕조 개국 4년째인 1395년에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처음으로 세운 으뜸 궁궐이다. “하늘이 내린 큰 복”이란 뜻으로 경복궁(景福宮)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경복궁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담장 둘레의 길이는 1,933m, 평균 높이는 5m, 두께는 2m이고 총면적은 343,888㎡였다. 담장의 사방에는 각각 대문 하나씩 있는데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이 있었다. 정문인 광화문은 지금 수건 중이어서 원래의 모습을 볼수 없어 좀 유감스러웠다. 광화문 안쪽은 넓은 광장이었는데 유람객들로 삼삼오오 흩어져 거닐고 있었다. 광장 북쪽으로는 거대한 고대건축물인 흥례문(興禮門)이 장엄한 모습을 보이었다.   흥례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었다. 흥례문으로 들어서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永濟橋)를 지나 근정문(謹政門), 근정전(勤政殿)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근정문은 정면 3칸, 측변 2칸의 중층(重層) 누문(樓門)으로서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우진각 지붕(네 개의 추녀마루가 기와로 쌓아 올린 지붕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건물로 세부 수법은 근정전과 큰 차이가 없다.     1. 근정전(勤政殿) 근정전은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하는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國家) 의식(儀式)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근정(勤政)이라는 이름은 천하(天下)의 일을 부지런하여 잘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근정전은 상하의 기단(基壇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의 월대(月臺, 궁전이나 누각 따위의 앞에 세워 놓은 섬돌.)를 갖추었고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欄干柱)에는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서 훌륭한 솜씨로 조각한 12지상(十二支像)을 비롯한 동물들을 배치하였었다. 근정전은 밖으로 보면 2층 건물이나 안에서 보면 층 구별이 없이 통층으로 되여 있었다.   2. 사정전 (思政殿) 사정전은 근정전 뒤에 있는 편전(便殿)으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던 건물로서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사정전은 왕이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국정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 다고 한다. 사정전 그 이름에는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사정전 좌우에 있는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온돌방을 갖추어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보조 편전인데 원래는 사정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사정전의 기능을 보조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복도가 없어졌다고 한다.   3.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사정전을 지나 뒤로 북쪽을 향해 가면 강녕전이였다. 강녕전은 경복궁 안에 있는 왕의 침전(寢殿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서 앞면 11칸, 옆면 5칸의 55칸 규모로 단층 팔작집이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하였다.  특히 뒤에 있는 왕비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를 양성하지 않음으로써 침전임을 상징했다. 교태전은 앞면 9칸, 옆면 4칸으로 모두36칸의 규모로 되여 있으며 왕비가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4. 흠경각(欽敬閣) 흠경각은 강녕전의 서쪽에 위치하여 있다. 흠경각에는 앙부일구(仰俯日晷),옥루기륜(玉漏機輪) 등의 시간 측정기 구 와 천문관측기구인 간의(簡儀)를 만들어 설치했었다.   앙부일구(仰釜日晷)는 해시계로서 솥 모양의 그릇 안쪽에 24절기를 나타내는 눈금을 새기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을 꽂아, 이 바늘의 그림자가가리키는 눈금에 따라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옥루기륜(玉漏機輪)은 물의 힘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시간과 하늘의 천체현상이 나타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물을 먹인 종이를 발라서 높이가 7자 되는 인조산을 만들었고, 그 속에 옥루(옥으로 만든 물시계)와 기계 바퀴를 설치했다. 금으로 만든 탄환만한 크기의 태양에 다섯 빛깔의 구름이 둘러싸고 산허리 위를 지나가게 했다. 이 태양의 입출이 시각이나 절기가 모두 실제와 같았다. 또 네 옥녀(玉女)와 방위를 가리키는 사신(四神)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으며, 다른 인형이 때를 맞추어 종·북이나 징을 치도록 만들었다.   이외에도 세자가 거처하였던 동궁(東宮), 선정왕후가 거처하였던 자경전 (慈慶殿),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후궁영역인 흥복전(興福殿), 연못가운데 있는 향원정(香遠亭),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였던 집옥재(集玉齋), 제례의 공간으로 사용됐던 태원전(泰元殿), 경사가 있을 때 왕이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절들을 접대하던 경회루(慶會樓) 등 330 여채의 건물들을 들어 있었다. 경복궁내의 모든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하여 전부 불에 타 훼손되었던 것을 1868년부터 시작하여 복원을 했으며 아직도 복원 중이라고 한다.   경복궁 참관유람하면서 500년 조선왕조의 궁전을 직접 참관한데 대하여 기쁘기도 하였지만 일본침략자들의 만행에 대하여 분노를 가라 앉힐 수도 없었다.   중국에 있을 때 여러 번 북경 고궁을 참관하였는지라  경복궁을 참관하면서 자연히 북경고궁과 비교하게 되였다. 경복궁은 북경고궁(면적은 72만㎡, 담장높이는 10m, 800채의 건물과 9999개의 방)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다고는 하지만 국가의식을 거행 하는 곳, 정사를 처리하는 곳, 일상생활을 하는 곳 등의 건물 구조와 배치가 대체적으로 비슷하였다. 전체적인 건물구조들을 보면 중국의 고대 건축물구조와 비슷했는데 중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경복궁을 다 참관하고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나 오게 되면 청와대를 정면으로 볼수 있었다. 경복궁을 참관유람하면서 많은 력사적인 고대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것도 좋았지만  청와대 정문에서는 현대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것도 왕궁과 현시대의 대통령부라는 시대적인 상대적 비교가 있어 그것도 별다른 의미였다   주청룡      2009년9월9일 동북아신문에 게재  
54    김대중대통령 추도사 댓글:  조회:9670  추천:33  2011-05-13
  김대중대통령 추도사 《중국동포타운신문》사 김대중대통령 추도식에서 한 추도사   오늘 우리는 매우 비통한 심정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에 접한 우리 중국동포들은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비통을 느낍니다.   대통령님께서는 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여 나 청년시절부터 민주주의를 꿈꾸었고 그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하셨으며 그 분투과정에는 랍치, 사형 등 다섯 번의 죽음의 고비와 6년 수감 생활, 10년간의 연금, 망명을 한 파란만장한 인생의 곡절을 겪어 왔으며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오뚝이정신으로 네 번 도전하여 끝내는 대통령보좌에까지 올랐습니다. 하여 대통령님께서는 '인동초[忍冬草]'라는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대통령님의 일생은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해 온 일생이였습니다. 만약 대통령님의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아직까지 인권자유, 민주화가 없는 독재정권의 나라로 있거나 오늘의 민주주의가 이보다 더 긴 시일이 걸려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길을 개척하셨으며 집정기간에는 한국경제를 빠른 시일 내에 IMF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이로 하여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님의 공적을 영원히 있지 않을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남북의 화해와 남북통일을 위해 크나큰 기여를 하시였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2차세계대전의 결속의 산물로 우리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가슴 아픈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로 하여 반세기 동안 서로 적대시하는 랭전상태에 있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응당 통일된 민족,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할 우리 민족이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고 랭전상태에 있는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시고 2000년 6월 북을 방문하시여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하고 남북의 50년의 랭전상태를 종말지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하시고 두 정상이 손을 잡고 높이 쳐드는 장면은 온 세계에 알리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의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이 감격적인 장면을 보는 순간 우리 중국동포들도 같이 기뻐하고 같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방북하실 때 김정일 위원장과 력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6.15공동선언을 채택하시여 남북의 화해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 하여 금강산 관광, 리산가족의 상봉, 개성공단의 입주와 개성관광, 남북적십회 교류, 경제 협력 및 육로 통행이 진행되였고 56년 만에 경의선 철도가 재 개통된 아주 거족적인 성과를 가져 왔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지난 2000년 일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와 남북화해 협력에 노력한 업적을 평가 받아 우리민족으로 첫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대통령님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때에도 우리 중국동포들은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기뻐하고 대통령님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하여 축하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민족의 자랑이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대한민국의 거목이시고 우리민족의 새별 이였습니다. 대통령님의 서거로 하여 대한민국의 거목이 쓰러지고 우리민족의 새별이 사라졌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집정기간과 퇴임후에도 관용과 포용으로 자신과 대립되는 정적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드넓은 포부와 인격을 가지였습니다. 이는 대통령님의 인간수양과 대통령님의 리더십을 보여 주셨습니다. 때문에 대통령님의 서거를 슬퍼하고 추모하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고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으며 남북이 따로 없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중국인민의 오랜 벗이며 생전에 중한 관계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셨습니다. 중국 정부와 인민들도 이를 잊지 않을것입니다. 중한관계의 발전으로 하여 특히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더 없는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기업의 중국연해도시의 진출로 하여 중국의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취직하고 있으며 방문취업제 등 중국동포들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고국에 온 중국동포들은 30만 명을 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동포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대통령님과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우리 중국동포들은 고국에 와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사화와 동포사회를 서로 어울리는 화합, 공존의 사회로 되게끔 노력하며 대통령님과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려 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안심하시고 편한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가십시오.         주청룡 2009년 8월 23일 2009년 8월 25일 중국동타운신문 157호,  2009년 8월 28일동북아신문에 게재
53    서울에서의 동창모임 댓글:  조회:9051  추천:42  2011-05-13
서울에서의 동창모임 3월 28일 서울에서 중국동포들의 동창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 제10중학교(지금의 룡정시 덕신중학교) 1967년 졸업생들이였다. 이들은 모두 본직사업에서 정령퇴직을 하고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나와 일도 하고 고국의 명승고적들도 유람하면서 몇 년간 한국생활을 해보려고 한국에 나왔던 것이다.  이번 모임은 당년의 반장이었던 김광석씨가 발기하여 고국에서의 동창모임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 40년 전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교통, 통신이 아주 불편한 때라 통신주소도 없이 그저 갈라지고 말았다. 이들은 졸업한 후 갈라져 각자가 서로 다른 사업터에서 일하였는데 그래도 연변지구에서 사업한 동창들은 몇 번씩은 만난적이 있지만 어떤 동창들은 통신주소도 없이 몇천리 떨어져 사업하다 나니 졸업한 후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와서 동창모임으로 하여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다. 그어간 한두 번씩 만난 동창들이 서로 인사를 시키니 그렇지 인사를 시키지 안으면 누가 누구인지 알수 없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이팔청춘의 꽃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갈라진 것이 인젠 모두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할머니로 되여 처음으로 만났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장장 42년만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에서였다. 만약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이 없었다면 한평생 만나지도 못할 동창모임이었다.   동창모임은 정말 뜻 깊었다. 추억의 노래를 부르면서 잊지 못할 40여년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사랑속에서 즐겁게 공부하던 이야기,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이야기, 40년 전의 우리의 선생님들 인젠 칠팔십 고령의 할아버지로, 또 저세상으로 가신 선생님들도 많으시리라 하며 그 시절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되 새겨 보았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며 하나 둘씩 동학들의 이름도 불러 보았고 자기들의 사업에서 거둔 알찬 성과도 이야기하며 하루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그러면서 이들 외에도 한국으로 나온 동창들이 더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서로 서로 수소문하여 다음 번에는 더 많은 동창들이 모여 즐겁게 보내자고 약속하였다.   주청룡 기자 2009년 4월 10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52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BM우드 댓글:  조회:7787  추천:46  2011-05-13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BM우드   BM우드는 한족을 포함한 중국 근로자를 9명을 고용하는 20여명의 회사직원을 갖고 있는 가구생산 회사이다. 이 회사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하였는데 처음에 외국인을 채용하여 쓸 때에 한국인과 외국들 사이에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많은 애로를 겪었다. 하여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언어장애로 하여 서로 오해를 가져 분기가 쌓이어 가면서 나중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서로 손찌검까지 하는 싸움도 있었다. 이런 정황을 노(老)회장이 알고 회사의 관리자들에게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갈이 다름으로 하여 문화적 차이도 있고 또 언어가 다름으로 하여 의사소통이 잘 안되지만 그들은 모두 우리 회사에서 근무를 하는 것만큼 서로에게 담겨 있는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여 닫힌 마음을 열고 그들을 우리 한집사람처럼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부터는 회사 관리자들이 노회장의 말씀을 받들고 회사직원들에게 외국인들과의 관계에서 엄격한 요구를 제기하였으며 노회장께서는 중국 한족들과 대화는 안되지만 중문으로는 교류는 되는지라 한족들과 중문을 써 가면서 의사소통을 하여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고 닫힌 마음을 열자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양해를 해주니 언어 장애로 하여 서로의 의사를 잘 못 이해를 할 때도 있었지만 서로 웃고 지내었다.   지금은 다른 외국인은 쓰지 않고 중국의 한족과 조선족근로자들을 쓰고 있는데 한족들은 몇 년간의 생산실천 속에서 현장에서의 생산용어들을 다 장악하였고 어떤 복잡한 말들은 중국의 조선족들이 통역을 하기에 언어장애로 하여 크게 곤란을 받고 있지 않다.   BM우드와 이웃으로 있는 한 회사에는 60세의 한 중국인 고령동포가 있었는데 그 회사는 불경기 상태라 외국인을 쓰던 것을 내여 보내게 되였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만 고령동포들은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BM우드의 회사의 규정에 의하면 나이 많은 사람을 채용하지 않기로 되여 있다. 하지만 윤도현 사장은 이 고령동포의 취직이 곤란한 사정을 감안하여 회사의 규정을 타파하고 이 고령동포를 BM우드에 취직시켰으며 고용지원 센터와 출입국관리소에 취업신고까지 하였다. 이 회사의 김정배 차장은 중국인 근로자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려 언제나 웃음으로 대하며 새로 온 직원이 있으면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고 잘못한 것이 있어도 언제 한번 짜증을 내지 않고 친절히 대하였으며 무거운 짐은 자기가 골라 메였다. 박종열 차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 새로 온 그 고령동포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그 고령동포는 어떤 일에서나 젊은이들에 비해 못했다. 그렇지만 언제 한번 짜증을 내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으며 늘 그에게 웃음으로 대하였디.   관리자들이 중국인들을 한집사람처럼 대하자 아래 회사전체 직원들도 친형제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휴식시간이면 한자리에 모여 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회사에 가지고 와서 서로 같이 나누어 먹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하여 중국근로자들은 참으로 이국 땅에서 동포다운 따사로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주청룡 기자 2009년 3월 25일 한민족신문
51    고국에서의 동창모임 댓글:  조회:8883  추천:38  2011-05-13
고국에서의 동창모임   2월 22일 가리봉동에서 중국동포들의 동창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 제10중학교(지금의 룡정시 덕신중학교) 1968년 졸업생들이였다. 이날 모임에는 우인순, 오순희 서해금 청해 네 사람이였는데 이들은 1968년 연길현 제10중학교를 졸업하고 갈라진 것이 장장 40년도 넘는 41년만의 만남이였다. 그것도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에서였다. 만약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이 없었다면 한평생 만나지도 못할 동창모임이였다. 40년전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교통, 통신이 아주 불편한 때라 통신주소를 남길수 없어 그저 갈라지고 말았다. 이들은 졸업한 후 서로 갈라져 각자가 서로 다른 사업터에서 일하다나니 어떤이들은 혹시 한두번은 만난적은 있었지만 청해와 우인순, 서해금이와 오순희, 오순희와 우인순이는 장장 41년 만의 첫 만남이였다. 그어간 한두 번씩 만난 동창들이 서로 인사를 시키니 그렇지 인사를 시키지 안으면 누가 누구인지 알수 없었다. 동창모임은 정말 뜻 깊었다. 추억의 노래를 부르면서 잊지 못할 40년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사랑속에서 즐겁게 공부하던 이야기,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이야기, 40년 전의 우리의 선생님들 인젠 칠팔십 고령의 할아버지로, 또 저세상으로 가신 선생님들도 많으시리라 하며 그 시절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되 새겨 보았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며 하나 둘씩 동학들의 이름도 불러 보았고 자기들의 사업에서 거둔 알찬 성과도 이야기하며 하루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그러면서 이들 외에도 한국으로 나온 동창들이 더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서로 서로 수소문하여 다음 번에는 더 많은 동창들이 한데 모여 고국에서의 동창회를 구성하기로 하였으며 통신련락은 010-8226-9466에 하기로 하였다.   청해 2009년 3월 10일 146호에 게재
50    한국에서의 중국동포들의 3.8절 기념모임 댓글:  조회:8027  추천:39  2011-05-13
한국에서의 중국동포들의 3.8절 기념모임                                                             청해 3월 8일 의정부에서 중국동포들의 동창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제10중학교(지금의 룡정시덕신중학교) 1967년 졸업생들이었다. 이들이 이날을 동창모임으로 택한 것은 마침 일요일이자 3.8국제 노동부녀 절이어서 동창모임에서 3.8절 기념활동도 겸하여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념모임은 당년의 반장이었던 김광석씨의 사회로 진행 되였는데 3.8절의 유래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 유래를 보면 1909년 3월 8일 미국의 섬유 여성노동자 15,000여명이 뉴욕에서 근무 시간 단축, 임금 향상, 투표권, 아동공사용 금지 등을 요구 하는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이것이 미국과 세계 각국 여성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았다. 한편 이듬해인 1910년 8월에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국제 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독일의 로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의 제의하에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킨 3월 8일을  국제부녀절로 정하였고 유엔에서는 1975년에 매년3월 8일을 국제부녀 절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중국에서는 1949년12월,중앙인민 정부 정무원에서 매년 3월 8일을 부녀절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 이번 기념모임의 의의와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감에 따라 지금은 3.8부녀절 기념활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데 한국에 와 일하는 우리 동포들도 고국건설에 한 목을 담당하고 있으며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우리 동포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데 있다고 하면서 여성근로자들에게 명절의 축하를 표시하고 한국에서도 1985 년부터 서서히 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진행 되였는데 지금은 그 기념 행사가 더 중시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그들은 또 추억의 노래를 부르면서 잊지 못할 40여년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사랑속에서 즐겁게 공부하던 이야기,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이야기, 40년 전의 우리의 선생님들 인젠 칠팔십 고령의 할아버지로, 또 저세상으로 가신 선생님들도 많으시리라 하며 그 시절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되 새겨 보았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며 하나 둘씩 동학들의 이름도 불러 보았고 자기들의 사업에서 거둔 알찬 성과도 이야기하며 하루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이날 모임에는 당년 이팔청춘의 꽃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갈라진 것이 인젠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할머니로 되여 처음으로 만난 이들도 있었다. 장장 42년만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에서였다. 만약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이 없었다면 한평생 만나지도 못할 기념모임이였다.   주청룡기자 2009년 3월 12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49    중국 사람들에게는‘중국산식품’이 ‘신토불이’이다 댓글:  조회:8295  추천:36  2011-05-13
중국 사람들에게는‘중국산식품’이 ‘신토불이’이다 ― “중국산과 신토불이”를 보고   필자는 본 신문에 실린 김범송 박사의 “중국산과 신토불이”를 보고 아주 동감을 느끼면서 이 글은 아주 현실적으로서 실제적으로 평론한 글이라고 생각되면서 나도 한마디 나의 견해를 말하여 보자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사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한국산이지만 지금 한국의 시장들을 돌아보면 식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중국산 상품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산을 신토불이라고 하면서 선호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중국산을 대량으로 수입해 들이면서 중국산=싸구려=저질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마땅치 못한 것이다 수요량이 없는 물건을 가득 들여 올 장사꾼은 없을 것이다. 한국시장에 중국산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그만큼 중국산에 대한 수요량이 많고 중국산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김박사가 제기한 것처럼 한국 언론은 ‘중국은 형편없는 환경에서 식품을 비위생적으로 만든다.’는 식의 보도를 일관하면서‘중국산은 무조건 저질·비위생적’이란 인상을 준다면 그것을 사먹는 서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중국산을 비하적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것으로 된다. 중국산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들이면서 언론매체와 일부 한국인들이 ‘중국산’에 대하여 저질이라고 비하하는 것도 중국인들이 반한 감정이 생긴 원인의 하나이라고 본다. 값이 싸다 하여 다 저질인 것은 아니다. 한국도시의 거리를 돌아보면 ‘中國食品商店’ 이란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사람들을 대상한 상점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상점과 시장을 돌면서 중국산을 많이 사먹는다. 이것 역시 한국 사람들이 신토불이를 선호하는 것처럼 중국 사람들은 중국산이 입에 맞기에 중국산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런 중국산을 일부 한국 사람들은 저질이라고 비하 하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는 한국산보다 더 구미에 맞고 우질적으로 느껴지며 중국산이 곧바로 ‘신토불이’이다. 물론 중국산 식품에 멜라민 함량이 표준을 초과한 것과 같은 것은 중국산 식품의 대표적이 가짜 식품이다. 이는 불법분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가짜 식품이지 저질식품이 아니다. 이것으로 중국산 전체를 대체하면 안 된다. 필자는 시장을 돌다가 어떤 고객이 “국산이요, 국산이요.”하며 소리치는 상가를 지나면서 “중국산을 놓고 국산이라고 한다.”라고 비꼬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그것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전에도 어떤 장사꾼들은 중국산을 한국산으로 둔갑하여 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지금 한국 사람들의 인식에는 한국산=우질, 중국산=저질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필자는 중국을 다녀온 한국의 여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국의 돼지고기 맛과 한국의 돼지고기 맛을 비교하면 어떤 가고 물으면 그들 모두가 그래도 중국의 돼지고기 맛이 퍽 낫다고 말한다. 소고기도 그렇다. 한우고기보다 연변소고기가 맛이 퍽 낫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범송박사가 제기한 것처럼 현재 한국인들이 소위 ‘신토불이’를 고집하면서 우리농업을 살리려는 애국사상은 비난할 바가 못 되지만, 무턱대고 ‘국산이 최고다.’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 법칙으로 보면 소비자들의 수요에 따라 시장을 개발하기 마련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조선(한국에서 말하는 북한)과 거래를 하면서 많은 의복들을 조선에 가지고 간다. 그런데 장사꾼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모두 저가, 저급 의복인 것이다. 한것은(그 까닭은) 값이 비싸고 질 좋은 의복은 조선의 서민층에서 살수 없고 값싼 것을 요구하기에 중국 사람들이 입지 않는 전문 조선을 대상한 원가가 낮고 저급품 의류공장이 생기게 되였다. 한국으로 들어온 중국산품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서민층의 소비수준에 맞게 수입해 들인 것이기에 원가가 낮은 저급 산품이 많이 들어 왔다고 본다. 원가가 높고 우질적인 상품을 들여온다면 서민층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김범송박사가 제기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21세기는 국제화 시대로서 모든 국제무역과 교역은 WTO룰(rule)이 지배하는 경쟁시대이므로 국제화시대에 걸 맞는 경쟁의식과 열린 마음가짐이필요하며 한국의 신토불이로 명 브랜드를 창출하는 한편 서민층의 생활수요로 중국산품들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실정에서 이런 것을 비하하기보다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2009년 1월 21일<<한민족신문>> 2월 14일 <<흑룡강신문>>에 게재  
48    전철 안 게시판의 구인카드를 심중이 대하자 댓글:  조회:7899  추천:37  2011-05-13
전철 안 게시판의 구인카드를 심중이 대하자   방문취업제로 하여 해마다 중국의 조선족들이 몇만 명씩 한국으로 나오고 있다. 이들이 처음 한국땅을 디디어서 가장 조급한 것이 구직이다. 일자리를 얻어야 거처도 정하고 빈 몸으로 온 것이 일하여 돈을 벌어야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낯선 땅을 디디어 어디에 가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하여 전철을 타고 직업소개소를 찾아 다닌다. 그러다 보면 전철 안 게시판에 붙은 구인카드가 눈에 띄운다. 구인카드를 보면 대부분 ‘직원모집’, ‘사원모집’, ‘급구’ 등으로 적혀 있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포들에게는 그저 보고 지날 일이 아니다. 하여 그것을 뽑아 들고 보면 보편적으로 ‘내근직’, ‘사무직’, 대상: 35세~65세, 교포가능, 시간: 8시~5시, 월수입 120만~200만원으로 되여 있다. 이런 내용을 보면 힘도 들이지 않는 마음에 드는 일자리이다. 특히 일자리를 얻기 힘든 고령동포들에게는 이 이상 더 좋은 일이 없다. 하여 카드에 적힌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면 사무실이 아무 아무 곳이니 찾아 와서 면담하라는 것이다. 이런 구인카드의 공통점이라면 전화번호와 연계인의 이름(이름 대부분은 가명)이 있을 뿐 주소가 없다. 하여 전화에서 찾아 오라는 곳으로 가서 보면 마중 나온 사람은 있는데 대부분은 회사의 간판이 없다. 아래에 이런 구인카드를 보고 일자리를 찾은 몇 사람의 사례를 들어 보자.   사례1: 길림에서 온 정씨는 구인카드에 따라 찾아가니 모 정수기 판매회사였다. 면접은 본부장이 하였는데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원래 모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있었는지라 사실 그대로 말하니 참 좋다며 며칠 동안 회사의 업무에 대하여 학습하고 학습성적이 좋으면 사무실에 앉히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회사에서 중국 광주에 대리 판매처를 앉히는데 중국말을 잘 하는 사람을 거기에 파견하는데 잘하면 거기에 파견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중국에서 공무원 사업을 한 경력이 있는지라 모든 것이 자신이 있었다. 하여 이튿날부터 ‘실무학습’에 참가하였다. 일주일간의 ‘실무학습’을 하고 시험을 쳤는데 순조롭게 통과 되였다. 정씨는 몹시 기뻤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관이 면접할 때 말이 없던 이 회사의 200만 원짜리 정수기 한 대를 사든지 팔든지 해야 이 회사의 정식사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그것을 사자니 돈이 아깝고 그만두자니 광주는 둘째로 치고 그 사무실 자리가 아까웠다. 하여 우유부단해 있자 본부장과 국장(본부장 위에 국장)이 앞으로 사무실에서 사업하다가 중국 광주대리 판매처에 주요 책임자로 파견하겠는데 이 좋은 직업을 그 200만원 때문에 버리겠는가 하는 끈질긴 설득에 200만원을 주고 정수기 한대를 샀다. 그런데 며칠 가도 사무실에는 앉히지 않고 이일 저일 창고정리 등 잡일만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본부장과 물어 보니 한달 기한을 주며 한달 내에 정수기 열대를 다 팔면 사무실에 앉히고 다 팔지 못하면 파는 수량에 따라 돈을 계산하여 준다는 것이었다. 기가 딱 막힌 일이었다. 이미 산 그 한대도 그저 안고 있는데 산 설고 물 선 이국 땅에 와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어디에 가 한달 기간에 10대나 처리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 사무실자리가 욕심나서 한달 동안 사처로 뛰어 다녔지만 그 안고 있는 한대도 처리 못하고 그만 두었다. 결국은 200만원을 허망 떼인 셈이다. 독신으로 고정거처 없이 제한 몸 건사하기 바쁜 신세에 그 큰 정수기를 어디로 들고 다닌단 말인가?    사례2: 흑룡강성에서 온 김씨는 구인카드에 따라 찾아가니 금은장신구 회사였다. 이 회사도 사람을 끌어 당기는 수법이 [사례2]의 수법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먼저 ‘실무학습’을 거친 다음 낮은 가격으로 회사의 금은장신구들을 사서 시장 격으로 팔라는 것이었다. 김씨는 이미 ‘실무학습’을 걸쳤는지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여 200만 원어치의 금은장신구들을 샀다. 그것을 가지고 시장에 나와 ‘실무학습’ 할 때 말한 가격대로 팔려 하니 하나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지나도 안 팔리니 회사에서 내온 본전에 팔려고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김씨는 지금도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본인도 모르고 있다. 그도 결국은 200만원을 떼인 셈이다.   사례3: 연변에서 온 이씨도 그런 구인카드에 따라 찾아가니 그것은 투자회사라고 하였다. 한꺼번에 500만원 투자하면 매달 이자가 50만원씩 저금통장에 입금되며 한 사람을 가입시키면 또 50만원 상금, 과연 해볼만한 일이었다. 어마 안 가서 본전을 다 뽑고 부자가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자기도 500만원 투자하고 친척, 친우들을 끌어 들였다. 처음 두 달은 이자와 상금이 저금통장에 어김없이 입금되던 것이 세 번째 달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전화를 거니 전화가 안 통하고 회사를 찾아가니 문은 자물쇠를 잠근 채로 있었다. 그도, 친척, 친구도 따 돈을 떼우고 말았다.   이상의 사례들로부터 보면 전철 안의 구인카드를 그렇게 쉽게 믿을 것이 아니다. 동포들이 일자리 찾기에 너무 급해 하지 말고 모든 구인광고에 대하여 심중이 대하기를 바란다.  주청룡기자 2008년 12월 19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47    보도매체의 언론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댓글:  조회:7980  추천:34  2011-05-13
보도매체의 언론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4월27일 서울 북경올림픽성화봉송과 재한조선족유학생들의 현명한 안내문”을 보고서 청해 4월27일 북경올림픽성화가 서울에서 봉송되였다. 하지만 그 성화봉송 이 순리롭지는 않았다.  필자는 북경올림픽성화가 4월27일에 서울에서 봉송된다는 소식을 들 었지만 현지행사에는 참가하지 않았는데 보도매체를 통하여 서울봉송행사에 서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뉴스를 보면서 참으로 유감을 느끼면서 어리둥절 하였다. 그후 한국의 일부 언론들은 중국유학생들 의 폭력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의 보도가 며칠 연속되였다 어쩌면 북경올림픽 성화가 서울을 지나는데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가 있을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리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폭력행위는 어떻게되여 일어 났는가? 그 본질은 무었인가?   이런 언론보도만 들어서는 도무지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알수 없었다. 하여 필자는 현지 행서에 참가한 여러사람들과 조사를 해보고 인터넷에서도 많은 자료를 찾아 보는 가운데서 중국류학생들이 올림픽 성화봉송을 저지시키려는 중국 티베트(西藏)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 평화연 대’, ‘탈북인권단체총연합회’ 등으로 조성된 한국 시민단체와 충돌이 발생하 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한국시민단체가 북경올림픽성화봉송을 저지하려는 것은 무었을 의미 하 는가? 단순히 반중국행위로만 볼수 없다. 올림픽대회는 전세계적인 대축제 인데 한국시민단체가 하필이면 이런 행사때에 떠들면서 북경올림픽성화봉송 을 저지시키려는것은 올림픽성화를 안전하게 봉송하려는 한국정부의 의도 와 배치되고 올림픽운동을 관심하는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념원과도 배치되 는 행위가 아닌가? 올림픽개막을 100여 일을 앞둔 이때 북경올림픽개최를 반대하면 올림픽운동을 하지 말아야 한단말인가? 만약 한다면 어디에서 한 단말인가? 실질은 전세계적 행사로 되고 있는 올림픽개최를 교란하는 행위 로 밖에 볼수 없다. 중국유학생들의 강력한 애국심은 그 어떤 장애로 하여 올림픽성화가 꺼 지지 않고 순리롭게 서울에서 봉송되도록 하려는데서였다. 만약 한국시민단 체의 올림픽성화저지 행동이 없었더라면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가 있었겠 는가? 중국유학생들의 행위는 리해할만 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한국시 민단체와의 충돌에서 자제력을 잃고 폭력행위로 번져져 결국은 중국유학생 들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었다는 점은 꼭 지적할 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많 은 자료를 찾아보면서 4월27일 그 폭력행위의 사실의 진상을 파악한 후 일부 언론들이 편파보도를 하지 않았느냐는 의문과 질문이 있었다. 무엇때문 에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를 규탄하는데만 치중하고 한국시민단체의 올림 픽성화봉송저지행위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는가? 하여 보도 매체의 언론 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글을 쓰려는 생각을 굴리던차에《중국동포타운신문》 제126호에 실린 본지 김용필 편집국장의 “4월27일 서울 북경올림픽성화 봉송과 재한조선족유학생들의 현명한 안내문”을 보고 이런 기사야말로 그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아주 객관적로 평가하였다는데서 아주 동감이 되 여 나도 한마디 나의 견해를 말하여 보자는 용기와 충동을 느끼여 필을 들 게 되였다. 김용필 편집국장의 글을 보면 4월25일,재한조선족류학생네트워 크(KCN)인터넷사이트에 게재된 안내문에는 KCN은 성화봉송시 공식적행사 조직을 하지 않는다는것,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고 현장질서를 준수할것, 일 부사람들의 올림픽저지시위도 예상되는데 과격한 대처행위를 자제할것, 행사 마감 후 쓰레기를 남기지 말것 등의 내용들이 있은것을 보아 사전에 조직적 인 활동이 없었다는것을 설명한다. 만약 ‘안내문대로’ 하였더라면 과격한 폭 력행위를 피면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보도매체들은 사전에 미리 폭력행위를 조직한것으로 편파 보도를 하고있었다. 《중국동포타운산문》김용필 편집국장이 시사저널 ‘가리봉중국동포타운’ 보 도에 해명과 정정보도를 요구한것도 편파보도 때문이 아닌가? 언제나 보도 매체의 언론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2008.5.20 제127호에 게재  
46    언론인, 지성인들의 만남의 장 댓글:  조회:8368  추천:10  2011-05-13
언론인, 지성인들의 만남의 장                                     청  해 12월 3일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니 ‘중국동 포 送舊迎新의 밤’ 행사에 참석하여 달라는 《동북아신문》사의 이동렬 편집국장의 초청장이 날아와 있었다. 초청장을 받고 나는 몹시 기뻤다. 이 행사에는 많은 언론인들이 모이는 장소이므로 내가 평시에 즐겨 읽고 만나 보고 싶던 칼럼 칼럼니스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김범송 박사의 칼럼을 즐겨 읽었고 전번에는 인터넷으로 “‘조선(한)반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호칭은 무엇인가요?”란 물음을 제기 하였는데 나 같은 면목도 모르는 하찮은 사람의 문의에 대하여 그렇게 시간이 바쁘면서도 메일을 받은 즉시로 정성껏 회답을 준데 대하여 이번 기회에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7일 저녁 회식 장에 도착하니 이미 면목을 아는 언론인들이 여럿이 와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김범송 박사가 안 왔는가 고 물으니 누구도 못 보았다고 하였다. “혹시 다른 사유가 있어서 오늘 이 좌석에 참가하지 못하는 거나 아닐까?” 하는 데서 나는 몹시 서운하였다. 얼마 후   40대 초반의 한 분이 와서 주위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나와 그분이 서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나의 옆에 앉았던 여호길선생이 나보고 “저분을 모르는가?”고 하였다. 내가 “모르겠는데?” 하자 그가 인사를 시키었는데 그가 바로 내가 오매에도 그리고 만나보고 싶던 김범송 박사였다. 서로 인터넷으로 문답이 오가고 그것이 《동북아신문》에 실리기까지 하였지만 면목부지(面目不知)이던 것이 직접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만 하였다. 그도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나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김범송 박사가 나에게 한 분을 소개하였는데 흑룡강신문 연변지사 윤운걸 사장이었다. 세상일이란 참 묘할 때도 있었다. 윤운걸 사장 역시 면목부지이지만 내가 그에게 신세를 많이 져 한번 꼭 만나 보았으면 하던 분이다. 나의‘조선족공동체’에 대한 글들을 다른 신문에서는 민감한 민족문제여서 감히 실지 못하지만 윤사장께서는 우리 조선족들의 미래에 대한 방향성적인 좋은 글이라며 《흑룡강신문》에 실어 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어느 때 기회가 있으면 꼭 만나 보았으면 하였는데 오늘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 땅에서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천만 뜻밖이었다. 그도 나를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김범송박사와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그는 래일 있게 되는 연변취재 길에 교통사고로 순직한 연합뉴스 선양특파원 조계창 기자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오늘 중국에서 비행기편으로 한국으로 왔다가 오늘 이 행사에 참석하였던 것이었다. ‘送舊迎新의 밤’은 참말로 뜻 깊은 밤이었다. 《동북아신문》이 금년 일년 걸어 온 일들을 회고하는 모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론인, 지성인들의 만남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날 모임에는 연합뉴스 영문팀 곽승지 팀장, 연변대학 인문사회과학학원 강용범 원장, 중국사회과학원의 정신철 교수, 조선족후원회 이상규 회장, 재한유학생네트워크 대표들도 참석하여 축사를 올리였는데 나는 이런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고국에서 뜻 깊은 송구영신의 밤을 보낸데 대하여 무한한 긍지를 느끼었으며 앞으로 더 좋은 글들을 써서 《동북아신문》에 올려야 하겠다는 결심도 나왔다.     2008년 12월 10일 동북아신문에 게재
45    우리는 하나 댓글:  조회:9312  추천:11  2011-05-13
우리는 하나 —2008 외국인 근로자 함께하는 한마음 축제   노동부(장관 이영희)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사장 유재섭) 주최로 지난 9월 28일 안산시 호수공원에서 ‘2008 외국인근로자와 함께하는 한마음 축제’가 열렸다.   이날 축제일정에는《외국국적동포 한국취업생활 수기 현상공모》입선자 수 상식도 있어 나에게 이 축제에 참가하라는 통지가 왔기에 나도 그날 그 축 제에 참석하게 되였다.   ‘우리는 하나 (We are One, 我们是一体)’라는 주제로 열린 ‘2008 외국인근 로자와 함께하는 한마음축제’에는 네팔, 베트남,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방글 라데시, 몽골, 중국, 중앙아시아(CIS), 재외동포,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12 개국 공동체들을 비롯해 총 5천 여명의 외국인 근로자와 고용주가 참여했다,   이날 행사는 총 3부로 진행되였는데 제1부 ‘한마음’에는 12개국 부스가 오픈되었고 방글라데시, 중국, 스리랑카 등의 국가별공연이 진행되었으며. 2부 ‘열림’에서는 국가별 대표단이 입장하였다. 고용허가제 체결일 순서에 따라 각기 자기나라의 국기를 들고 입장하였는데 다른 나라의 대표단이 국기를 들고 입장할 때에는 의례적으로 박수를 치는데 그치였지만 나의 조국 중화인민공화국대표단이 오성붉은기를 들고 입장하는 순간, 자제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받아주어 고국에 와서 일하며 돈을 벌기에 한국정부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조국이 사랑스럽고 조국이 그리웠다.   각국 대표단의 입장에 이어 노동부 이영희장관의 개회선언 등 축제 개회식이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전통문화예술공연단 ‘들소리’가 한국전통예술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어지는 3부 ‘어울림’에서는 방송인 김미화 씨의 사회로 인순이씨의 미니콘서트가 화려한 막을 올리고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의 국가별공연 2부가 진행되어 다채로운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외국국적동포 한국취업 생활 수기 현상공모》입선자 수상식이 있어 나도 무대에 올라 수상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다. 무대에 올라 수상하는 순간 나도 중국의 일개 서민으로서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와서 이런 국제적 무대에 오를 수 있은데 대하여 긍지와 자호감을 느끼였다.         주변행사로는 12개국의 공동체들이 고유의 전통 놀이와 춤, 전통음식을 선 보이는 40여개의 부스로 구성된 다문화 일일장터가 열려 참가자들이 특색 있는 다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VANK)의 부스가 차려져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외국인근로자들에게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는 홍보행사가 눈에 띄었다. 그 밖에도 외국인근로자들과 고용주 및 결혼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생활에 필 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외국인관련 정보박람회’, 인력공단과 노동부의 ‘무료 노동상담부스’가 열려 임금체불, 출입국 체류 등에 대한 상담, 한국국제보건 의료재단의 ‘사랑의 의료클리닉’이 있었다. 나도 이 기회에 신체 검사를 하였 는데 모든 것이 정상이였다. 건강이 근본며 건강이 첫째라 모든 것이 정상이 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는 한국인과 아시아 여러 개 나라의 근로자들이 함께 만나는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서로 확인하며, 서로에게 담겨 있는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여 닫힌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는 화합의 자리로 되였으며 출신국가와 언어, 피부색, 문화 등은 다르지만 이번 축제의 주제와 같이 ‘우리는 하나’로 화합과 공존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2008년 10월 10일 중국동포타운신문 136호 6면에게재
44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에게 경의를 드린다 댓글:  조회:8394  추천:11  2011-05-13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에게 경의를 드린다 청     해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시행으로 하여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는 37만명을 넘어섰다. 따라서 중국동포 밀집지역이 생겨나 동포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절대 다수의 중국동포들은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자기의 신근한 노동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비법적인 수단으로 위장영업을 하면서 퇴폐업소를 꾸리거나 그런 퇴폐업소로 드나들면서 흉기를 들고 폭력행위까지 감행하여 당지 지역주민들의 안전에도 위협을 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비해 영등포구 대림동 지구대, 구로구 가리봉 지구대에서는 중국동포 자율방범대를 결성하고 발대의식을 치른 후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인 가리봉과 대림동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우리 동포사회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꾸는데 참으로 감사한 일이며 아주 적절한 조치라고 본다.   자율방범대원들은 중국동포의 거리를 평온의 거리, 안전한 거리로 되게 하기 위하여 매일 10시간 이상의 고된 일을 마치고 밤이면 휴식시간도 마다하고 순라를 하고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고상한 사람들이며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나는 중국동포의 일원으로서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께 경의를 드리며 충심으로 되는 사의를 표시한다.   “불법행위”와 “자율방범대” 서로 대립되는 용어이다. 무엇 때문에 같은 동포로서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목적으로 고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판이한 대치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가? 만약 중국동포들의 불법행위가 없다면 중국동포 자율방범대가 결성될 필요가 있는가?   방문취업제의 시행은 우리 중국동포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최대의 관심이며 배려라고 생각한다. 하다면 우리 동포들은 어떻게 한국정부의 이런 관심과 배려에 보답해야 하는가?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모두 자각적인 준법의식을 갖고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무슨 경제적으로나 집단적인 모임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고 더욱 실질적인 것이며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 하는 것이고 한국정부의 관심과 배려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로 우리 동포사회를 가꾸어 간다면 한국사회는 우리를 더욱 포옹해 줄 것이고 지역 주민들과도 더욱 잘 어울려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서로 어울린 조화로운 사회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지 않고 불법행위를 저질러 동포사회를 어지럽히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우리를 보내 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준 한국정부에 모두 미안하게 될 것이다.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을 우리는 인간쓰레기로밖에 볼 수 없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려놓는다.》는 속담과 같이 이런 인간쓰레기들로 하여 우리 동포사회의 이미지는 엄중한 손상을 받고 있다. 우리 모두 자각적인 준법의식을 갖고 자율방범의 ‘빗자루’를 들고 이런 인간쓰레기들을 깨끗이 쓸어버려 중국동포의 거리를 깨끗한 거리, 안전한 거리로 만들어 전반 동포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며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 통합하는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 가자.    2008년 11월 7일 동북아신문,  2008년 11월 9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43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댓글:  조회:9362  추천:11  2011-05-13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ㅡ본지 129호에 실린 “세상사람들 다 형제가 아닙니까?”란 기사를 읽고서   나는 본지 129호에 실린 “세상사람들 다 형제가 아닙니까?”란 기사를 읽고 다시 림민호 교장선생님을 머리에 떠 올리게 되였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나의 모교 교장선생님이시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이는 이미 문화대혁명가운데서 박해를 받아 세상을 뜬 뒤여서 비 록 그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나의 모교 제1임 부교장(당시 연변대학 교장으로는 자치주 주장 주덕해동지가 겸임하였는데 학교의 일상 사무는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주관하시였다.)이시고 연변대학을 창립하는데 서 탁월한 기여를 하신 분이시고 중국 조선족의 제1대 걸출한 교육가라는 데서 그이를 매우 사모를 한다. 그러기에 림민호 교장선생님에 대한 자료들 을 즐겨 읽었다. 오늘 그이를 사모하면서 내가 본 자료와 선배님들에게서 들어 온 이야기들을 간략하여 이 글에 올린다. 1.   항일구국운동의 선구자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1904년 1월 3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의 한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 이듬해에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이주하였으 며 후에 화룡현 동성촌 고성툰으로 옮겨갔다. 1919년 룡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에서 그이는 비록1`5세의 소년이였지만 그와 그의 친구 둘이서 천주교 례배당 종루에 올라가3.13반일운동시작의 종소리를 울렸으며 이때로부터 민족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 놓으셨다.   그이는 1920년 3월 룡정동흥중학교(지금의 룡정3중)에 입학하여1923 년 4월에 졸업하고 화룡현 동성촌 룡천동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이 듬해 2월 명을 받고 화룡현 투도구에 가서 "동아일보"투도구지국 기자와 상 점주인의 신분으로 지하사업을 하셨다. 1928년 9월 중순, 조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하였 으며 1932년 5월 동 방대학교에서의 4년간 학습생활을 끝마치고 9월 조선 함흥, 흥남 지역으로 파견되여 지하사업을 하다가 3월 28일 흥남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여 6년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였으며 감옥에 서 감옥당국과 맞서 싸웠기에 1년 연기되여 7년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1940년 출옥한 그이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1942년초, 돈화에 서 일자리를 찾았다. 1945년 일제가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여 광복을 맞이한 후 돈화현 부현장으로 사업을 하였으며 1946년 10월 "연변일보" 전신인 "길림일보" 조선문판의 총편집으로 임명되였다. 2.   중국 조선족의 제1대 걸출한 교육가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용한 항일투사였을 뿐만아니라 또 연변대학창립 에도 탁월한 기여를 하신 분이시다. 1948년초, 당시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있던 림춘추와 함께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석하시여 연변에 민족대학을 꾸릴것을 제기하였으며 그해12월에 연변대학주비위원회가 성립되였는데 주 비위원회 주임으로는 림춘추, 부주임으로는 림민호가 임명되였으며 구체사 업은 림민호가 맡아 하도록 하였다. 그이는 학교의 성질을 문과, 리공과, 의과 농과를 망라한 종합성 민족대학으로 규정하였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전국 각지에서 조선족 지식인들을 물색하여 손수 초빙장을 써서 그들에게 보내여 교원문제를 해결 하였는데 가장 큰 곤난은 경비문제였다. 그때는 국내전쟁이 한창인 때여서 동북인민정부거나 길림성 정부에 손을 내밀 형편이 못되여 조선족 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 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으며 유지인사들을 동북 각지에 파견하여 조선족들에게서 의연금과 물자를 지원 받기로 하였다. 결과 동북 각지 조선족들이 쌀과 돈, 그리고 학교에 수요되 는 많은 물품들을 무상으로 지원하였다. 초창기 학생이였던 선배님들의 말에 의하면 교실이 없어 공업학교를 빌어 쓰다가 1950년대초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올 때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 둥산이였으며 불에 타버린 일본관동군 병영이 벽체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교장선생님은 친히 교직원과 학생들을 이끌고 불에 타 버 린 병영을 수리하여 교실로 쓰고 새로운 사무청사와 실험실을 설계하여 짓 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조선민족대학의 창립과 발 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시고 피타는 노력을 기울려 오시였으며 당의 교육방 침을 관철집행하고 근검하게 학교를 꾸려 특색있는 민족대학의 교풍을 수립 하고 교육과 교수개혁을 진행하여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하여 그이는 1950년 10월, 동북조선족을 대표하여 국경1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하시여 모주석과 주덕의 접견을 받았다. 3. 불행한 인생  1966년에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 혁명"에서 수많은 좋은 간부들을 박해를 받았다. 림민호 교장선생님도 례외가 아니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얼마되지 않아 홍위병들에게“변절자”,"주자파"(자본주 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로 몰리워 박해를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록 초급중학 교 학생이였지만 연변대학을 창립하시고 15년 넘어 그 학교를 운영하시느라 로심초사하신 분이 그 학교 학생들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정말 리해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항일구국운동을 위하여 영용히 분투하시고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하여 오신 분이 어떻게 변절자, 주자파로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겼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받아 1970년7월 14일 66세 의 아까운 나이에 원한을 풀지 못한 채 불행히 서거하셨다. 4. 시대의 공정한 평가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사망한 뒤 8년이 지난 1978년 7월 14일 중공연변주위에서는 결정을 내려 그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 주고 명예를 회복하여 주었으며 추도회와 유해이장식을 거행하였다. 그의 골회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일부분이 연변 대학정원에 뿌려졌고 나머지는 화룡현 동성향 고성촌 뒤산 림씨묘지에 안장 되였다.    1989년 연변대학창립 40돌에 즈음하여 연변대학에서는 대학교정에 림 민호 교장선생님의 반신석상을 세웠다가 연변대학창립 55주년이며 교장선 생님의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석상을 동상으로 바꾸어 그의 업적을 기 리고있다. 나는 연변대학에 갈때마다 꼭꼭 교장선생님의 동상 앞에 가서 정중히 허리굽혀 세번 절을 하여 교장선생님에 대한 사모의 정을 표시하군 한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우리 민족교육사업에 기여하신 그 업적 길이길이 후 세에 전하여 지리라!  《중국동포타운신문》2008.7.5 제130호에 게재
42    중국동포들의 길잡이《중국동포타운신문》 댓글:  조회:8996  추천:14  2011-05-13
중국동포들의 길잡이《중국동포타운신문》   주철룡   금년 8월23일은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5주년을 맞는 날이다. 그리 길다 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이 5년간 《중국동포타운신문》은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 공존의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온 5년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이 5년간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중국동포들의 한국생활 에서 의 길잡이자 가장 친근한 벗으로 보내 왔다.  나는 원래 신문애독자인지라 한국에 와서 처음《중국동포타운신문》을 보았을 때 한국에 우리 동포들을 위한 이런 좋은 신문이 있구나 하며 너무 기뻐 그 즉시로 신문사를 찾아가서 직접 김용필 편집국장님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지금 중국동포들이 이 신문을 즐겨 보는 이유는 신문에 법무부의 중국 동포들에 대한 출입국정책, 동포들에 대한 안내문(조선족동포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미래에 대해서 올바르게 준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글), 동포들의 한국생활 수기, 등 중국동포들이 가장 관심 갖고 즐겨 읽는 문장들이 많이 실리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나의 한국에서의 문화생활에서 가장 주요한 자리 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신문이 매 한 호가 나오면 1면부터 12면까지 하 나의 기사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읽곤 하며 한편 정기적으로 원고를 써서 귀 신문에 투고를 하면 매 호의 신문마다에 내가 쓴 칼럼, 기행문, 생활수기 등 기사들이 한편씩 실리군 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보도매체의 작용을 할뿐만 아니라 또 중국동포 사회를 위하여 실질적 일들을 많이 해 왔다고 본다. 2005년, 2006년 법무부 는 불법체류중인 중국동포를 위한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불법체 류중인 중국동포들이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면 합법체류로 한다는 정 책을 반포하였다.《중국동포타운신문》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안내상 담을 해주었으며 정부의 이런 정책이 나왔어도 불법체류자들이 정부의 정 책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면서 자진출국을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중국동 포타운신문》신문사는 법적 담보를 서면서 불법체류자들을 자진 출국하였다 가 재입국하여 합법체류자로 되게끔 설득하였으며 이로 하여 이 신문사에 등록하고 자진출국한 사람은 2년에 무려 7천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신문의 홍보를 통하여 자진 출국한 동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로 하여 《중 국동포타운신문》은 중국동포들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되였다. 그때 불법체류 자로 있다가 《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법적담보로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 국하여 인젠 합법체류로 있는 나의 한 친척은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정 말로 우리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이다. 만약 그때 중국동포타운신문사 의 법적담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불법체류자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 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중국동포타운센터 법률구조본부> 에서는 동포들이 일하고도 고용주한테서 임금을 받지 못한 문제. 일하다 상하여서도 산재보험을 받지 못하는 등 문제들을 해당부문을 찾아 해결하여주고 있으며 이외에도 중국도포들을 위하여 취업소개, 고충상담, 출입국수속대행, 한국생활안내관, 컴퓨터무료교육. 중국동포<사랑의모금함> 활동, 등등의 많은 일들을 하여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며 지역주민들과 동포들이 함께하는 설맞이, 추석맞이 등 한중문화대잔치를 개최 하여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과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뉴대(紐帶)작용을 하고 있다. 앞 으로《중국동포타운신문》이 한국사회와 동포사회를 화합공존의 사회로 만 드는 데서 더욱 큰 기여를 하며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 더욱 친근한 벗 으로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8년 8월 31일 일요일   (중국동포타운신문134호에 게재)
41    중국동포들이 보는 직업소개소 댓글:  조회:8670  추천:17  2011-05-13
중국동포들이 보는 직업소개소   지금 많은 중국동포들이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한국에 들어 와서 취업을 하고 있는데 직업소개소의 역할을 부인할수 없다.       원칙적으로 직업소개소에서 동포들의 직업을 소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중국동포들이 직업소개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할바는 못되지만  원칙을 지키기보다 원치을 어기고 동포포들의 일자리를 해결하여주는 직업소개소가 교포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다. 많은 중국동포들이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일자리를 해결하였기에 대부분 직업소개소에 대 하여 긍정적인 평가였고 일부분 직업소개소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인것이다.      긍정적인면:    1. 대부분의 전철역 근처에 모두 직업소개소가 있기에 중국교포 구직자에게 아주 편리 하다. 2.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서는 정규적 회사만 알선하여 주고 정규적 회사는 고령구직자들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고령 구직자들은 고용지원세터를 통하여 일자리를 해결할 수 없지만 직업소개소는 정규적 회사외에도 전국 각지의 어떻한 일자리도 다 소개를 하여 주기에 고령구직자들은 구직의 유일한 희망을 직업소개소에 두고 있다. 3. 많은 직업소개소에서는 구인자와 구직자사이에서 중개역할을 잘 하여 구인자와 구직자의 호평을 받고 있다.   부정적인면: 1.    직업소개소에서 말한 조건과 노동현장의 조건이 일치하자 않다. 일부 직업소개소에서는 아주 좋은 말로 소개를 하여 어떤 사람들은 소개소에서 소개한 조건만하면 가서 일할만 하다고 생각하고 현장에 가보면 소개소에서 말한것처럼 그렇게 좋은 조건이 아니였다. 소개소에서 소개한것보다 노동시간이 한두시간 더 길거나 노동강도가 더 세고 구인자는 분명히 숙식은 해결하지만 이부자리는 자체로 해결 하여야 한다고 말 하였는데 직업소개소에서는 이런것을 구직자에게 말 하지않았고 농장을 소개할 때 숙식을 해결한다고 갔지만 가보면 쌀만 대여주고 그외의것은 자체로 해결하여야 하며 잠자리는 하우스안이였다. 사람이 어찌 짐승의 자리보다 못한데서 잘수있겠는가? 쌀만대여주고 하우스 안에서 자는것도 숙식을 해결한다고 할수 있겠는가?    직업소개소에서는 구인자와 구직자사이의 중개작용을 통하여 돈벌이를 하는것만큼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구인자의 의사를 똑똑히 구직자에게 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차비를 헛팔고 돌아 오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는 안들지만 이미 온바하고는 일하여보자는 것이였다. 직업소개소에서도 바로 구직자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한것이였다 2.    직업소개비를 돌려 주지 않는다, 현장에 가서 며칠 일하다 보면 소개소에서 소개를 한것보다 차이가 너무 많아 돌아 오려고 일한 노동공가를 달라고 하면 구인측에서 우리는 이미 직업소개소에 소개비를 냈기에 노동공가를 줄수 없다하고 직업소개소에 와서 직업소개비를 돌려 달라면 우리가 보낼때에는 거기 조건이 어떠어떠하다고 상세히 다 말하였는데 이제와서 왜 이러는가며 소개비를 돌려 주지 않는 직업소개소가 있다. 이렇게되면 구직자는 차비를 헛팔고 노동공가도 못 받고 직업소개비도 허망 떼우고 만다. 하여 이들은 직업소개소를 사기치기군들이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평가보다 긍정적인 평가 우세: 총적으로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이 더 많기에 많은 중국동포들이 직업소개소를 찾아 다니며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중국동포들의 취업에서 직업소개소의 역할을 부인할수 없는것만큼 국가에서도 합법적으로 직업소개소를 동포들을 위한 직업소개소가 되게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중국동포 주청룡 2008년 2월 20일《중국동포타운신문》제121호 2면에 게재 2008년3월30일《길림신문》에 전재 2008년7월28일《동북아신문》에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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