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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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수필, 잡문, 신변잡기 댓글:  조회:8167  추천:0  2013-02-06
                          수필, 잡문, 신변잡기                                      최 균 선     우리의 수필이 “신변잡기”차원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이것은 일가견도 아닌 묵은 과제이자 중복질의이다. 지금 수필창작에는 두가지 경향이 있다. 수필은 신변잡기가 되여서는 안되기에 문학성을 주장하는데 보수적이라는 모자를 쓰기 쉽다. 반면 곧이 곧대로의 신변잡기야말로 문학의 본연을 찾는 진보적문학관이며 작가적능력이 미달 이더라도 쓰자고 마음 먹으면 곧 써지는 글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생활을 소재로 하지 않은 문학작품이 없다. 하다면 “신변잡기”에서 무엇이 문제시되는가? 수필을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형식의 글(엣센스사전)’ 이라고 해석한다해서 바로 잡문이나 다를배 없다는 사람들이 있고 잡문을 일정한 형식이 없이 되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해석을 맹종하여 잘못된 글이면 그저 잡문이라고 밀어부치는 사람도 있다. 수필의 소재, 그것은 가장 일반적인것이면서 그것을 보편적인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점에서 수필다운 수필이 되지 못하는것이다. 수필은 한가정의 생활보도가 아니며 정보전달이 목적인 설명문도 아니다. “숲속에 자지러지던 풀벌레도 잠잠하고 산마다에 단풍이 불타니 완연한 가을이로다” 라는식의 서술은 남들이 다 보는 풍경 이지만 나만의 체험, 련상, 사색속에 무엇인가 전개될 소지가 있다. 정감의 표출인 수필의 맛은 사실자체가 아니라 성찰, 사색에서 오기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개체로서의 나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주체를 “우리”라는 객체속에 융화시킬수 있는 보편성을 도모하는것을 문학에서의 의미화라 한다. “나”의 주관성은 자기 울타리를 뛰여나오지 못하고 자기도취에 빠져 감탄표를 찍을것이 아니라 공감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설명이 되겠다. 여기서 신변 잡기와 수필의 색채가 달라진다. 그만큼 수필은 선택된 체험과 감수에 력점을 둔다. 수필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소재로 쓰는 글이라면 다른 쟝르보다 더 치렬하게 인간의 공성문제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작가 자신의 삶의 체험이란 곧 더불어사는 삶의 현장도 포함되는것이지 단순히 내 가정에서의 내 삶의 체험만이 아니다. 인생잡사에서 선재하여 예술화하는것이 수필창작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다듬은 글이라도 그속에 정감적, 사상적, 철학적발견이 없다면 그것은 아기자기한 얘기로 서의 신변잡기에 머믈고 만다.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인것이 아니라 사회독자와의 정서적, 사상적대화이다. 대화에 공감성이 결여하면 대화가 흥미진진할수 없다. 자기 생활에서의 얼룩, 상처, 정과 한을 발효시켜 은근히 취하도록 정감미주를 만들어야 함께 마시려들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완벽한 삶이 불가능하다. 그 부족 한 부분을 사색으로 깨달으며 어려움, 아픔, 슬픔이 공유화되고 다른 이에게 흡수되 여 조금이라도 치유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수필을 쓰고 발표하는 취지가 아닐가? 수필 의 특징은 숨김없이 자기를 말한다는것보다 개체의 인격색채를 현연하는데 있다. 문예수필이란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생, 시대를 두고 고민하며 함께 울고웃게 되는 정감을 발굴한것이다. 무엇이든지 수필의 소재가 될수 있다는 말은 문학이란 창조적인 작업이기때문이다. 즉 묵은밥이라도 식혜를 만들어 모두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경지의 수필을 쓰는것이 작자의 창작목적이리라. 날아 다니는 모든 새는 조류이지만 조류에 속한것이라해서 다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다. 생활자체가 수필의 원천지이지만 곧 수필이 아니다. 수필에서 다양한 표현기법이나 개성적인 문체 등에 의해서 형성되는 심미적즐거 움이 허용되고 인위성을 배제할수는 없다. 그러나 간드러진 꾀꼬리소리가 곧 미묘한 선률인것은 아니며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산이 바로 풍경화인것은 아니다. 예술품이란 얻어진 소재를 가지고 작가가 자기의 정서, 그속에 녹아있는 제나름의 철학을 담아서 형상화하기때문이다. 문학화, 예술정감화는 형식에 유관된것이고 수필의 사회성, 보편적가치란 내용에 유관된것이다. 사회독자를 대상하면서 자기 모습만 들여다보는 자아봉페적인 수필이 나 자기 감상에 빠져있는 소녀적인 감상주의가 아닌 공감성의 안에서 함께 느끼고 사색하는 글이 보편가치가 있는 수필이 아닐가? 수필이 자기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글이므로 자기 정체성을 부각할수도 있다. 요는 내 이야기속에 나의 감수와 사색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공감시키는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표현뿐이라면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드는(闭门造车,出门合辙)격이 될수 있다. 그렇게 만든 수레에 앉아 “장안” 으로 들어가보아야 합당한지 알수 있으나 실망이 마중할수도 있으리라. 창작가치가 작자의 만족도에 좌우될수도 있지만 보다 요긴한것은 인생과 자연애 대한 관조에서 반짝이는 지혜와 사색에서 얻은 감오이다. 어느 쟝르보다 개성적인 수필에는 마음의 흐름이 그대로 흐르기에 인생관, 지식, 취미, 감정, 체험 등의 표술 이 정신호흡이 되는것이다. 그만큼 사회성,사상성, 지식성 등 수필의 본질적특징이 체 현되여야 한다, 그래야 신변잡기의 차원에서 맴돌지 않을수 있다. 수필의 글감에는 한계가 없지만 선택성은 있다. 내집 강아지가 새끼를 열마리나 낳았다는 이야기부터 사회제방면의 체험, 감수, 사색이 다 글감이 될수는 있으나 어 떤 유익한 주제발굴이 될수 없는것도 있다. 누구나 겪었거나 겪고있는 일상에서도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작업이 간거하다. 자아도취로 하여 자아실현과 공유성 사이에 너무 큰 편차가 생긴다면 그 수필은 독자를 잃을수밖에 없다.  수필이 비평적인 문학이 될수 있다는것은 사물, 사회현상, 인성의 구석구석을 볼 때 그저 동조, 감탄만이 아닌 역향사유에 따른 비평성이 담긴다는 말이다. 남들도 다 체험하는 사실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비다듬어 내놓는다 해도 거기서 거기일 경우가 많음을 자각하고 자기도취를 절제해야 한다. 도리는 간단하다. 다른 집의 김치독에서 꺼낸 김치라도 그냥 김치맛이지 생선맛이 날수는 없기때문이다. 수필문체에 수기도 넣고있지만 수필은 작자의 인격색채가 현시되는 문학작품이다. 그래서 수필을 쓰려고 많은 체험에서 선택하게 된다. 선택된 체험이란 어떤 주제를 담을수 있는 제재이다. 주제를 발굴하고 공감대를 이루어 독자들을 문학적경지에로 이끄는 사람이 “나”라는 출발점에서 흔히 곁길로 빠질수도 있다. 수필이 곧 잡문이 아닌것은 주지하는바이다. 취사선택에서 잡문은 비평의 예봉이 돌려질 대상이 명확하며 작은것에서 큰것을 보아내지만 수필은 잡문보다 유연하고 담박하며 보통 3류제재를 다루며 작은것에서 큰것을 발굴한다. 문체풍격상에서도 잡문의 필봉은 예리하고 풍자적이며 신랄하나 수필은 한적한 마음으로 자아정감을 다루기에 부드럽고 글쓰는 자세도 가히 “신사적”이라고 할수 있다. 언어구사에서도 잡문은 풍자수법을 많이 쓰는데 반하여 수필은 유모아적이지만 포용범위는 협애하다. 잡문은 철학성이 짙고 랭정하나 수필은 서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자유색채가 짙다. 수필과 잡문은 자매간이지만 꼭 닮은 쌍둥이자매는 아니다. 잡문은  의론성이 중요시되고 개성과 공성의 융합, 취미성에서 수필과 차이성을 보인다. 잡문은 인생, 사회를 대하여 그것의 의미를 짓씹으며 철리적감오를 찾아 인성의 심층적발굴을 지향하고 지혜와 계발성을 구비하며 인간의 령혼을 정화시키는데 작용 한다. 수필은 정서적의미가 오묘하고 인성향기가 풍기기에 독자의 정서세계에 유익한 보탬을 준다. 이 시점에서 잡문은 딱딱한 글이고 수필은 유연한 글이라고 할수 있다. 사전에 의하면 신변잡기란 수필이고 수필이란 신변잡기라는것이다. 잡기는 글자 그대로 자질구레한 일을 질서없이 기록함. 또는 그런 기록. 잡록(杂录) 잡필(杂笔). (에센스국어사전)이라는 해석대로 수필, 잡기, 잡문의 뜻은 모두 같다는 사람도 있다.“생각나는 대로”와 “질서없이”와 “되는대로”라는 말로 세가지 뜻이 상통하고 있기때문이라고 오독하였기에 몰리해가 선행한것이다.     홍매의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뜻한바가 있으 면 앞뒤의 차례를 챙길것도 없이 바로 기록하여 놓은것이기때문에 수필이라 일컫게 되였다.) 는 말에서 수필이란 신변잡기의 “잡기”의 뜻이며 “잡문”의 뜻은 “생각 나는대로”,“질서없이” “되는대로”인것이라고, “수필은 다름 아닌 잡문을 일컫는 말이 고, 잡문이란 문학화가 안된 글을 말하는것이고 이것이 신변잡기의 본질적인 뜻이다”라고 단언하는것은 지극히 학문적이 못되는 생각이다. 신변잡기가 수필에 들어있다 할진대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나는대로, 질서없이 되는대로 쓰는 글이기때문인가? 단순한 창작리념문제가 아니다. 수필은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기에 신변잡기일수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신변잡기식 수필에 썩 공감되지 않는 리유를 사색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문학화가 안된것도 있고 특히 “반짝!”하는 사상의 불티가 없기때문이다. 흔히 신변잡기식이 되는데는 무엇보다 작자의 자아도취가 지배적이기때문이다. 사회인으로서 아무 고민도, 아무 다툼도, 아무 불만도 없는 사람이 없듯이 그것이 반영되지 않는 글이란 없다. 기실 생활은 글에서 서술한것보다 더 풍부하지만 책 에서처럼 미만하기만한것은 아니다. 이태백이 놀던 달을 묘사해보아야 광한궁에 옥토끼가 방아찧는다는 고루한 이야 기 이상 더 나올것이 없다. 이처럼 글이 새로운 성찰, 비평정신이 없이 단순하 사실 의 엮음이라면 신변잡기에 머무를것이며 재간좋은 문자유희일뿐이다. 그러나 유희는 잠시 재미있을지라도 곧 끝나고 말것이다.   2012년 3월 4일             
251    (교육단론) 이중언어교육의 취지는 ? 댓글:  조회:7688  추천:0  2013-02-06
                    이중언어교육의 취지는?                                   최균선      우리 조선족기초교육개혁에서 주되게 추진되고있는 이중언어교육문제는 지성인들은 물론 온 민족사회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초미의 문제로 제기되고있다.  우리 민족의 이중언어교육의 취지로부터 일괄해 볼때 지금 너무  급진적으로 조처가 출범하고 많은 학교들에서 적극적인 모색을 하고  있는데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로 치닫고 있지나 않나? 우리 민 족의 기초교육이 혹시 곁길로 빠지지나 않나? 하는 우려를 가지지 않을수 없다.      일언이페지하고 이중언어교육문제는 민족교육행정에서 지극히 중요한 문제로서 그만큼 문제성이 복잡하고 해결책이 묘망해서 두부 모베듯 쉽게 결단나는 일이 아니다. 이 문제를 여하히 풀어나가는가 하는 문제는 곧 민족교육의 존재와 발전에만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민족군체의 생존에 비롯한 경제, 문화 등 제반 령역에서의 자주적인 발전에까지 소급되는 만년대계의 사활적문제인것이다.     기실 이중언어교육강화문제는 어제오늘에 제기된 문제가 아니며 더구나 어느 한두사람의 기발한 착상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새중국의 건립이래 조선민족교육에서 이중언어교육문제는 지 성적인 교육자들이 시종 관심해 왔고 전반 교육계에서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일관하게 탐구해온 세기적인 난제였다.     그 어떤 견지에서의 탐구와 모색이든간에 이중언어교육강화의  대전제는 어디까지나 본민족언어의 도외시가 아니였으며 계속발전과 번영이였다. 그만큼 이는 공화국의 헌법과 당의 민족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조목으로 제정되였다.      민족교육행정에서 민족언어교육의 선차성과 역할 및 그 의의는 략해두고, 언어학각도에서 볼 때 모국어와 제2언어의 습득은  많은 구별점이 있다. 반세기를 내려오면서 누가 어떻게 개혁하려했든간에 이 과학규률을 떠날수 없었으며 또  위반할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족학생들로 말하면 한어는 어디까지나 제2언어로서 본민족어와 비해 그 습득과정이 다르게 되여있기때문이다.     재래의 한어교재도 이점을 감안해서 충분한 연구를 거치고  편찬 사용해온것이다. 우리의 교육사가 증명하다싶이 부단히 실천경험을 총화하면서 보다 완미한 한어문교재를 편찬하기에 일심전력하였기에 수십년래 이중언어를 훌륭하게 장악한 고급인재들이 얼마나 많이 속출했는지 모른다. 이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것이다.          학생의 인식규률과 인지능력발전에서 볼 때 본민족언어는 우리 민족의 후대들의 지력개발과 자질제고에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서 그 어떤 언어도 미치지 못하는 기본동력이다. 한것은 본민족언어 환경에서 성장한 절대 다수의 어린이들에게는 더없이 친절하여 사 상감정상 깨뜨릴수 없는 공명대를 고유하고 있고 정신상 만족감을 느끼게 하며 학습흥취, 적극성이 보장되기때문이다.      선인들의 수십년의 줄기찬 연구와 탐색과정에서 도출된 통계수자가 이를 증명해냈다. 이를테면 소학교 1학 년때부터 자기 민족어가 아닌 한어로 공부한 아이들은 한족어린이들에 비해서 인식능력이 현저히 뒤처지고있음을 확증하였으며 기억력과 관찰력, 상상력과 사유면에서는 더구나 엄청난 차이를 나타 내고있다는것을 보여주 었다. 이렇듯 기초교육과정에서 본민족언어는 가장 좋은 인식수단이 고 기타 언어학습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기초일뿐만아니라 나아가서 본민족문화의 계승발전에도 불가결의 요건인것이다. 이점도 감히 부인할 사람이 없을줄 믿는다.     이중언어교육에서 한어교육에 대해 너무 편파적이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사람들의 사회심리를 해부하여 개괄한다면 한어에 대한 미신과 그에서 비롯된 자기 민족언어에 대한 허무주의와 비관정 서라고 할수 있다. 흔히 《한어가 조선어보다 더 쓸모가 많다.》거나 《한어를 모르면 중국에서 전도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무만 알고 수림은 보지 않으려는 사람과 다를배 없다.      세계화추세로 나가고 있는 현시대에 세계공민의 견지에서 장래를 구상할 때 2중언어로 만족할수 없다는것은 자명하다.  2중언어가 아 니라 다국어학습을 추광해야 할 시대이다. 한족학생들속에는 외국어 를  잘 장악하려고  자기 민족언어학습을 홀시하거나 포기하는 못난 이 학생이 없다. 유독 우리 조선족학생들가운데만 애시부터 한어를  잘 배운답시고 아예 민족어를 포기해버리는 근시안들이 많은데 그들의 조종자는 거개 부모들이다. 한어만 잘하면 만사대길이라고 생 각하는 부모들은 결과적으로 곰의 옥수수따기를 강요하는셈이다.     우리 조선족은 자고로 총명하고 구지욕이 강한 그만큼 부지런한  전통도 있기에 2중언어가 아니라 몇개 외국어도 능히 배워낼수 있는 선천적자질이 있다. 물론 라태자들이나 저능아들은 례외이지만… 말 하자면 2중언어에만 매달리지 말자는 말이다. 현시대엔 한어학습만 급선무인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어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조선어는 우리 조선족에게는 본민족어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하나의 엄연한 외국어로 되고있지 아니한가?국내 많은 대학들에서 륙속 조선어과를 설치하고 조선어학습을 전문으로 하는 사립학교들도   도처에 개설되고있다는 현황에 대해 사색해 보아야 하지 않을가?        언어는 교제의 도구이다. 언어는 교제도구로서 자기 가치를 확보 하고있다. 그러나 본민족언어를 근근히 교제도구로 인식한다면 한참 잘못된 인식이다. 자기 민족언어는 하나의 특수한 가치ㅡ민족상징 의《가치》와 의의를 가지고있다는것을 모르고 있기때문이다.      현재 조선족의 2중언어교육의 강화를 위해 정부차원에서 교육행 정부문에서 조처를 대고있는데 이는 전방위적으로 볼 때 환영 할바이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동기가 꼭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는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지금 어떤 학교들에서 지정된 학과목의 수업시간에 꼭 한어와 조선어를 병용함으써 2 중언어교육강화를 시도하는데 실로 극단적이 아닐수 없다. 어떤 개념은 한어로 말하고 어떤 서술, 해석은 조선어로 말할 때 어린학생들의 인지규률에 맞겠는가?필자가 단언하건대 사유의 혼란만 조성하기 안성맞춤이다.      한어문교학도 한족교원을 초빙하여 교수하게 하는것을 시험하고 있는데 한족교원의 한어수준이 타민족한어교원보다 각방면에서 우월 할것은 불보듯 빤하다. 마치 아무리 고명한 영어교원이라 해도 순종 의 영국인이나 미국인교원을 따를수 없는 도리와 같다. 정녕 교수효 과만 추구하여 장차 한어문교수는 한족교원에게 전적으로 기탁할 타 산이라면 우리의 수많은 조선족한어교원이 할일은 무엇이고 연변대학 한어계, 기타 대학과 사범학교에서 배양되여 나올 한어교원들은 어디 로 가야 하는가?     누구의 말마따나 병구완이 급급하다고 아무 약이나 먹어서야 되겠는가?그리고 한어의 강화, 조선어의 정화를 제기하면서 조선어 교학시수를 줄이는데 감소가 곧 정화인가?홀시는 아닌가?한번 곰곰  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육개혁은 교육자체의 특점, 민족 교육의 특점, 현실성과 실효성, 공효등 여러 방면에서 전문가들의 깊은 연구가 있고 실행해야지 마른나무 꺾듯해서는 그 결과가 바람직 할리 없다.      2중언어교육강화를 출발점으로 한 교재개혁이나 아예 한족학교 어문교재를 가져다 사용하는 문제도 심중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왜 냐하면 교육, 교학, 교재는 세개의 완전히 부동한 술어로서 교재의 변 화가 곧 교육개혁의 전부가 아니기때문이다. 교재는 일종의 교학재료  도구에 해당할뿐이다. 한어교재가 교육개혁의 만능열쇠인가는 오직 실천만이 증명할수 있다. 직언하면 교재개혁이  만사대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두다리로 걷기마련이다. 국내를 활동무대로 할 때 한어와  본민족어는 지식의 쌍날개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서 한어만 잘하고 조선말은 감감부지인 졸업생들이 무용지물이 된 사실은 누구 나 알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유치원때부터 한어를 배운 학생이라도 아무데에 가든 무슨 항업을 하든 언어문자구사에서 한족학생을 초과 할리 만무하다. 비유해 말하면 절름발이 인재가 되고만것이다.      만약 조,한 두가지 언어구사에  다른 외국어 한두가지 더 장악한 다면 금상첨화일것인데 왜들 하나만 먹고 두개 세개를 먹을 궁리는 포기하는지 안타깝다. 지금 한어교육의 편리를 도모해서 민족련합학교를 출범시키려는 조처도 연구해볼 일이다. 한어를 더 잘 배워내기 위해 언어환경을 마 련한다는 취지일것이다. 가령 영어를 보다 잘 배우기 위해 조건이 허락한다면 조,영련합학교도 꾸릴것인가를 상상해 본다.  우리에게는 이미 민족련합학교를 꾸렸다가 마침내 다시 갈라서 단일학교로 꾸린 경험교훈이 있다. 강청의《조선어무용론》을 높이 받들어서 그랬던지는 모르되 아무튼 민족교육에서 일축해 버릴수 없 었던 당위성을 비롯해서 미처 예상치못했던 운영상의 이런저런 페단 들이 퇴각을 핍박했을것이다. 이 시점에서 민족련합학교 제기법은 조금도 창조적이 못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종의  퇴보가 아니라면 전철을 밟 는것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리유는 구구히 들지 않겠다.     사람은 고리를 맺을 때 언젠가는 자신이 풀어야 할 일도 념두에 두어야 한다. 교육, 교학은 엄밀한 과학사업이다. 과학사업은 어떤 행정수단이나 누구의 주관념원으로 발전하는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처나 정책시행은 후과에 대한 보완등을 충분히 예견하고 신중하게 판단, 제정해야 한다. 한때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교재개혁전문기구를  개설하여 교재개혁을 시도했지만 별로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이 나중 에 제풀에 흐지부지 해지고  말았는데 참조할 일이 아닌가 싶다.         진부한 민족관념도 발붙일 자리가 없지만 민족의 자주적발전에 대한 신념의 상실자도 당의 영명한 민족정책의 해살아래 설자리가 없다. 우리 민족의 후대들을 우리의  교육자들이 훌륭하게 배양해 낼 수 있다는 신심을 동력으로 한다면 2중언어교육의 무거운 수레를 우리가 소망하는 높은 산봉에 얼마든지 밀어올릴수 있을것이다.  어찌 하든간에2중언어교육의 취지는 자기 민족언어를 대전제로 한다는것을 잊지 말자!    
250    칼럼과 수필 댓글:  조회:9924  추천:0  2013-02-06
                           칼럼과 수필                                  최 균 선   위키 백과사전에서는(수필 또는 에세이는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 산문문학이다. 주제에 따라 일상 생활처럼 가벼운 주제를 다루는 경수필과 사회적문제 등의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중수필로 나뉜다. 특히 중수필에서 사회적이슈를 주제로 쓴것을 칼럼이라 한다.)라고 해석하고있다. 한편 신문, 잡지의 특별 기고. 또는 그 기고란. 주로 시사, 사회, 풍속 등에 관하여 짧게 평론하는것으로서 신문과 잡지들의 정해진 지면에 련재되거나 기고된 기사해설 등을 통털어 칼럼이라 부르고 그 필자를 칼럼니스트 또는 기고가라 하며 주로 론설위원이 쓰거나 사회의 저명인사가 쓰기도 한다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학사전에서 칼럼니스트 [columnist]란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칼럼을 쓰는 사람이 라고 했는데 어감에 민감한 사람은“따위” 라는 단어에 까칠한 느낌을 받을것이다.       수필은 유일하게 사실을 근간으로 하는 문학으로서 외연이 크기에 칼럼이 수필의 범주에 드나들 소지가 고유한다.수필이 일상에서의 미적가치를 정감적으로 발굴하고 정서적으로 표현하므로 일상성이 원천이 되고 칼럼은 사회생활에서의 이런저런 현상 에 대하여 리치를 따져가며 론평하는만큼 사회적편달이 취지로 될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칼럼과 수필의 완전히 동질의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칼럼은 정해진 형식이 없고 소재가 제한되여있지 않으므로 수필같아 보이는 칼럼 도, 연설문에 근사한 격앙된 문체도 칼럼이라는 통칭속에 들어가고 있는데 기사와는 달리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는만큼 수필성도 고유하기때문일것이다. 칼럼은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필자의 개성과 소신, 멋이 살아날수 있어 최근에는 점차 수필을 닮아가고있다. 칼럼은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숨긴채 다른 사람의 견해나 이야기를 통해 자신 의 목소리를 낼수 있다. 칼럼은 어떤 제약도 없어보이지만 고도의 형식미가 있으며 철학적사색을 바탕으로 해야 제격이다. 이 시점에서 수필과 칼럼이 혼동해 쓰이기도 하나 기실 꼭 같은것은 아니다.     첫째로, 칼럼, 특히 사회칼럼에는 수필의 바탕이 되는 진지하고 풍부한 정서가 개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서보다는 론리가 선행하게 되고 주관적감수보다는 객관 적론거에 치중하는것이 칼럼의 고유한 특징이기때문이다.     둘째로, 상징성과 구체성이다. 사회수필은 다루고자 하는 사회문제에 먼저 상징 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사회칼럼은 매우 구체적으로 또한 직설적 으로 설파한다. 사회수필에서 상징은 구체적인것을 오히려 추상화시킴으로써 주제의 전달에 큰 여운을 주게 되며 따라서 문예적인 효과도 제공하게 된다.     셋째로, 수필과 칼럼의 공통점은 문체와 표현에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사회칼럼 의 문체는 강경하고 설명적이다.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표현도 직설적이 될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수필의 문체는 유연하다. 강한 주관의식도 부드러운 어경으로 감싸고 설득시키려는 조급성보다는 은밀하게 공감성을 유도해낸다. 넷째로, 미적가치와 론거에서 구별된다. 수필이 일상에서의 미적가치를 추구하고 전달하려는데 반해 칼럼은 사회생활현상에 대해 리치를 따져 론평하는 주장이 있는 평론인만큼 사회성이 기조가 되고 대중적이고 사회적이며 론리적이라면 수필은 개성 적인 자아표현으로서 서정성이 생명이 된다. 칼럼은 지식적이고 시사성을 띠며 문체는 강건체이고 기조는 리론적인 반면에 수필은 체험적이고 생활적이며 형상적인 표술로서 미적이다. 칼럼에는 수식이 별로 필요없지만 수필에서는 비유와 수사가 가능한껏 동원된다. 정감을 공감시키려는 수필에서는 정서속에 녹아있는 철리성이 내비쳐야 감동적이다. 이것이 사회수필과 사회칼럼의 문장이 같을수 없는 리유이다. 칼럼은 론리적이고 수필은 형상적이다. 칼럼은 사실적이고 보고성적이나 수필은 예술상상력이 수요된다. 칼럼에 리성적이고 론리적인 언어가 많이 사용된다면 수필에 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언어가 다양하고 사용된다. 수필은 정감의 용솟음으로 이루어지기에 가슴으로 쓰는 글이다. 칼럼은 리성분석으로부터 착수하여 머리로 쓰는 글이기에 정보전달, 사상의 교류가 임무이다. 이처럼 칼럼과 수필은 서로의 상관성에도 불구하고 차이성을 갖고있다. 수필이 아니면 곧 칼럼일수 없듯이 누구나 칼럼을 쓸수는 있지만 쓴것이 모두 칼럼은 아니다. 지적인독자와의 대화에 발견이 있고 깊은 성찰이 담기지 못하면 칼럼으로선 미달이며 주체적사유와 철리, 지도성이 결여하면 칼럼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칼럼은 작자의 진심을 토로하는 지면일수는 있고 주관적인 진실을 강변하는 그런 경계에 있을수도 있겠으나 칼럼니스트라해도 전지전능은 아니기에 우선 겸허하고 근신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 자기의 박식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전을 들추어 해석 하며 지식을 총동원한듯한 느낌을 주는 글은 진실성을 잃게 된다. 칼럼에서 인생에 대한 각성과 통찰은 공감성을 구비하여야 한다. 요란한 문자는 사람을 놀래울수 있어도 감명을 줄수는 없다. 말하자면 세상과 자기를 련계시는것이 칼럼의 사명이 아니라 언어표현속에 담긴 내용에 대한 독자의 공감이 중요하다. 사회상의 온갖 부조리와 인간의 추태, 악습을 살펴보고 인간의 바람직한 양상, 삶의 의미를 추출해내는 랭철함도 구비해야 한다. 수필은 사적감정에서 출발하지만 칼럼은 공리성을 앞세우고 길을 떠난다. 개체성을 재단할 때 자성의 거울에 비춰봐야 한다. 훌륭한 칼럼을 쓰자면 지식이 연박하여 정치, 경제만이 아니라 문학, 철학, 사상, 력사 등 광범위한 독서를 통한 지식의 축적과 인생경륜이 있어야 하고 랭철한 판단 력과 서술력이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다루는 문제에 대한 주견이 뚜렷해야 하지만 주관이 독자의 인지규률을 역행하는 리론을 삼가하고 철학적사색, 어눌하지 않게 서 술이 순통해야 한다. 문제시되는 사안에 대해 확실히 알고 전후맥락, 흐름, 현재상태, 대안 등에 대해 머리속에 충분한 준비없이는 횡설수설이 되기십상이다.      독특한 투시력을 안받침해주는 필력이 있어야 한다. 칼럼은 사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갖추어야 함을 물론, 필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비유적이고 정서적인 문장이 되여야 한다. 따라서 칼럼의 어느 부분이 일화이고 어느 부분이 작자의 생각인지 분명하게 구분될수 있도록 기술하여야 한다.     여러가지 문체로 말할 때 두부모베듯이 가를수는 없으나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만필이나 현실생활과 사회현상에서 받은 각종 자질구레한 감수를 쓴 잡감을 다 칼럼에 넣어서는 안될줄 안다. 수필이 되다가만 글이 칼럼이 아니며 칼럼에 서정성을 가미한다해서 곧 수필글이 되는것도 아니다.     칼럼풍년시대, 번창하는만큼 보다 명실상부한 칼럼들을 많이 기대해 본다.                          2012년 1월 7 일 , (11월 25일 수정)
249    수필에 대한 잡감 댓글:  조회:7830  추천:0  2013-02-06
                                                 수필에 대한 잡감                                                             최 균 선       현대시점에서 수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수필의 개념과 성격에 대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글자 그대로《붓가는대로 쓰는 글》《무형식의 글》이라고도 하고 비전문 적인 글, 자기 성찰의 글, 자기 고백의 글, 중년세대의 글…등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모두 지난세기 30년대의 기원된 정의들이라는 평판이 힘을 얻고있다.     한국에서는 에세이라고도 하고《논픽션》이라는 외래어로 명명하기도 한다. 또《여가의 문학》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여가로 수필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실정에서는 엉성한 제기법이다. 수필은 절대 붓가는대로 쓰는 무질서한 글이 아니다. 홍매로부 터 기원된 수필ㅡ붓가는대로 쓴다를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나는대로 쓰는것으로 해석해도 어페이다.     중년녀인의 글이라는 수필가도 있지만 수필창작자들의 년령구조, 성별이 그것을 부정하고있다. 한국의 명수필가 피천득선생은 수필을《청자연적》에 비유하였는데 효용성에서 최고경지에 피워올린 꽃으로 생각한 까닭이라고 한다.그러나 모든 수필이 청자연적일수 없다. 마음을 간지르는 수필이라면 그럴듯도 싶지만 개연성은 청자연에 만 머물라는 법이 없다. 물은 형태가 없지만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수림속에 온갖새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수필도 각양각색 일수밖에 없다. 특히 생활체험속에 감수를 쓰는 글인만큼 영원히 개성적일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란다. 수필만이 삶의 문학인가? 모든 문학이 삶의 메아리이다. 수필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하고 그냥 락서일수도 있다는데 자신과의 대화임은 사실일세 뇌까림이 아니라 방백이다. 수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과 의미부여에서 그치면 일기차원이다. 자기 인생을 의미화하는 궁극적 목적은 독자와의 담화가 아닌가? 강렬한 정서성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글을 쓸것이다.     문학일반이 인생마당의 조명이라면 수필도 인생현장을 조명하고 탐구과제를 내주는 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의 전제로 보편적인 공감성을 내세운다. 물론 수필의 흡인력과 공감은 진실성에서 기원된다. 이 시점에서 비록 길지는 않은 글이지만 절대 여유로움을 가지고 쉽게, 가볍게 씌여질수 없다는 잠규칙이 세워진다. 수필창작을 하기전 인간수련을 하라는것도 수필은 그 사람의 인생비밀이 되기때문이다.     수필은 자기 생명의 향기를 피워올리거나 생명을 연소시키는것으로서 자기 자신 만큼의 글을 쓴다. 자기를 닮지 않은것을 낳는 동물이 없듯이 자기 고백의 글. 자기 성찰의 글이라는 수필에서는 자신을 그려내지 않을수 없다. 수필작자는 독자와 인격 적으로 만나서 생각하는바를 고백하는것이지 체험담을 늘여놓는것이 아니다.    수필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서정화하는 동시에 객관화해야 한다. 작가의 개인적 정서나 체험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확보해야 하기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하기보다 공유화해야 한다. 시가 주관정감으로 감동을 주는 문학이라면 수필은 개체 적정감을 객관화하여 감동을 시도하게 된다. 자기의 체험을 소개하기보다 분석하고 제시해야 한다. 수필은 이야기자체가 아니기에 분석적이고 해설적이야 한다.     수필글은 진실함에서 살아나고 분식에서 죽는다. 그만큼 수필글에 기발한 착상이란 있을수 없다. 수필을 무형식의 글이라지만 구성이 홀시되는것이 아니다. 정감의 론리성은 수필구조의 기본요구이다. 수필은 재치있는 글솜씨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쌀로 밥짓는 솜씨가 아니라 향기로운 술을 빚어내는 작업에 해당한 글재간이다. 새로운 감각, 짙은 흥미성, 정서적 감염. 평화로운 기분, 유익한 지식성, 느끼하지 않은 교훈성. 삶에 대한 재인식, 생활에 대한 애착감, 교묘하게 심어주는 지혜의 불씨…등 가치발견과 의미부여로부터 받아안은 인생공부가 되는데서 산생된다.     한편의 수필에서 내가 미처 체험하지 못한 미지의 생활정경이 그려지면 호기심이 당긴다. 풍부한 상상력은 흡인하고 작자의 독특한 안목과 발견, 해석은 경탄을 불러 오고 유모아와 해학이 넘치는 수필에는 즐거움이 묻어나오며 선구적인 통찰력과 예리 한 비판성은 통쾌감을 선물한다.자기과시나 설교, 훈계가 아니라 그저 설복당하는 멋이 좋다. 이렇듯 수필의 효용성은 개인체험이지만 권유하지도 않고서도 공유화되고 사회적인식의 재확장이 되는데서 잘 체현된다.     일상의 체험이지만 나는 왜 못느꼈을가 개탄하게 되는 때에 감각의 새로움, 지적인 흥미, 정서적공감, 진선미를 무상으로 제공받으면서 좋은 수필이라고 값을 매기게 되는것이다. 하다면 좋은 수필의 구체적조건은 무엇인가? 수필은 체험의 과정과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는데 흥미없다. 체험한 사실과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만의 느낌과 해석의 부여가 중요하다.     기록문은 기록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치있지만 수필은 문학인만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예술가치가 창출되여야 한다. 수필은 체험에서 인기된 인생의 의미를 비쳐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그것이 바로 수필이 노리는 형상화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 거울속에서 예술적향수를 느끼면서 자성하게 된다. 수필은 인생미학을 창출하는 문학이므로 수기와도 다르다. 비록 개체생명이지만 그런만큼 독자에게 중요한것은 작자의 생활경력이나 체험의 전말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발산되는 인격력량이다.     누구나 겪을수 있는 체험의 서술은 진부하다. 어떤 모양으로 빚든 그리고 비틀고 늘구든, 굽든 찌든 밀가루의 기본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밀가루음식을 먹는것은 감각문제이지 무슨 발견의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체험이라도 그속에서 참신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해야만 좋은 수필로 될수 있다. 같은 모래를 일면서도 금싸라기를 찾아내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수필도 그렇게 써야 한다.     체험한 그대로 느낀 그대로 토로하는 수필이여야지 무병신음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비롯한 다른 쟝르는 예술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수필은 인생경지에 이르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것과 문학창작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것이다. 독일의 현대파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쓰고있다.《보이는것은 보이지 않는것에 접촉되여 있다. /들리는것은 들리지 않는것에 접촉되여있다./생각되는것은 생각되지 않는것에 접촉되여있다.》고.     본다는것은 단순한 목적일수 있지만 생각하는것은 무목적일수 없다. 본다는것은 촉동, 관찰, 발견, 사색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기이다. 작자는 체험의 내용 과 느낌을 전달하지만 독자들은 내용보다 느낌, 의미의 부여에 흥미롭다. 작자에게는 소중한 체험이여서 드러내고 싶겠지만 자기를 너무 의식하는 자기도취이기 십상이다.    수필은 자기를 의식하고 쓰기보다 독자를 의식하고 써야 한다. 독자는  작자의 신변잡사에는 별로 흥미없다. 그리하여 수필에서 가장 재치있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독자에게 고백해야 할것과 혼자 간직해야 할것을 분별하는것이다. 그냥 체험이 소중하게 느껴져 기록이나 수기단계에서 끝나면 독자는 별 볼일이 없게 된다.     무엇을 고백해야 독자들이 솔깃할것인가? 바로 주제 ㅡ사상인것이다. 자기 삶에 별다른 철학관념이 없는 사람은 돼지의 포식과 소크라테스의 고뇌에서 선택을 수요하지 않는다. 체험담에서 인생경험은 나올지 모르나 그에 그치면 인생철학이 나오지 못한다. 축적된 지식이 철학을 낳는것도 아니다. 체험은 부어넣은 주전자물처럼 바닥이 드러나지만 느낌과 사색은 샘물처럼 그냥 솟아나온다.     행동하기전에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행동이 끝난뒤에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인생철리를 도출해 낼것이다. 그것은 원인에서 결과를 얻은 사색의 열매이다. 철학은 사색에서 얻어진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생고란 무어냐 하는 사색의 저 끝에 철학이 묻어나올수 있다.     생활이 철학을 낳는다. 철학은 생활의 부산물이다. 부산물이면서 결과적으로는 근원과 근간과 뿌리가 되여서 인간의 생활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정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철학사상, 생각의 뿌리는 독자들의 생활의 옥토에서만 깊이 뻗어간다. 수필을 나무로 비유해 말할 때 표현의 꽃은 예술이요 사색의 뿌리는 철학이다.     주제란 무엇이냐? 흔히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이다. 그 의도는 대부분 철학적과제와 련결되여있다. 주제가 곧 철학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주제를 있게 하는 바탕에 철학이 있다. 그래서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사색의 글인 수필의 주제에 한계가 그어진다. 어떤 주제 또는 철학을 형상으로 바꾸어놓는것이 수필창작이다. 철학이 없는 예술은 씨앗이 없는 과일과 같다. 수필에도 사상이 있느냐? 철학이 곧 사상이 아니냐?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어디에서 왔는가? 동일한 사람의 많은 수필이 한결같이 동일한 문제로 엮어지는 리유는 내면의 사상테두리안에서 나오지 못하기때문이다. 보통 경수필보다는 중수필에 사상이 더 짙게 표현된다. 까닭은 중수필이 생활 주변의 감성적인 이야기보다 자연과 인생에 철학적이고 객관적인 과제에 몰두하기때문이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것이 문학이다. 일단 사상이 생기면 견해와 주장을 피력하려 한다. 동일한 어떤 사태에 부딪쳤을 때 철학 또는 사상을 가진 사람과 사상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인생에 대한 감수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신의 삶 자체만을 문제삼을 때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것을 인정할 수 없다. 생명운동과 그 표현 보다 더 심각한 주제가 있는가?     철학사상이라고 말하듯이 량자는 아들과 어머니 같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생명력을 가진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것일 때 사상과 감정의 관계는 파도와 그 밑에 심해와도 같다. 파도는 끊임없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그 파도는 심해에서 인기된것이다. 격랑이 일어날 때는 심해에도 동요가 온다. 사상은 만고불변이 될수 없다. 인생을 흔들만한 큰 사건에서 사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사상과 감정을 부침 (浮沈)의 차이에서 구별하지만 나타날 때는 마음이라는 하나가 된다.     중국의학계에서 쟁론되고있는 심주신명(心主神明)설과 신주심명(神主心明)설을 결합하여 말한다면 마음안에 사상도 있고 감정도 있다. 많이 움직이는 부분을 감정 이라 하고 적게 움직이는 부분을 철학 또는 사상이라 할뿐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 비교해보자.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가지와 잎에 있다. 이때 뿌리가 사상이라면 가지는 철학이 되고 잎은 감정이 될수도 있다.     제각기 다른 그날그날을 개체성이라 할수 있다. 개체성이란 그래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개체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개별성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동일한 것이 흐른다. 개체적생활은 나름대로의 원인, 과정, 결과에서 모두 다르게 엮어진다. 그러나 그 바닥에 공유되는것이 있다. 보편성은 어떤 인간, 어떤 사건에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개체성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저변에 보편성이라는 분모로 련결이 된다. 서양사람들의 에세이의 원뜻은 도전이다. 도전해야만 새로운것을 얻을수가 있고 거기에서 변화된 모습을 찾을수 있다는것이다.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고 경험이나 체험을 사실대로만 적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지만 실천에서는 그냥 그렇게 진행되고있다. 수필은 시대, 사회, 인생에 대한 도전이 되여야 한다.                                                        2008년 3 월 10 일
248    수필에서 문체의 변이 댓글:  조회:8695  추천:0  2013-02-06
                                    수필문체의 변이                                           최 균 선        90년대 문학의 본연에로의 회귀론이 고창되다가 사인화창작 경향이 성행했다. 그리고 급기야 일종 창작풍조로 되였고 우리 민족문단에도 만연되였다. 사인화창작경향을 제창하거나 실천하는 작자들은 모두 자아표현의 진실성을 중시하고 실천한다. 그러나 자아표현이란 일종 환각으로서 진정으로 표현되는것은 근근히 하나의 의식형태화한 “공공인(公公人)”에 불과하다. 자아본신은 이미 의식형태화된 모종 화어(話語)의 구성물로서 문학으로 말할 때 진실한 자아란 줄곧 거울속에 꽃이나 물속에 달과 같아서 볼수는 있어도 눈섭사이에 잡아둘수는 없다.     사인화창작결실은 소설이나 기타 쟝르에서도 과시되고 있지만 특히 자아고백 문학이라는 수필창작에서 돌출하게 나타나고있다. 그래서 그런지 당전 문단정경을 보면 개인수필의 전성기라고 할수 있다. 그야말로 수필마당은 하나의 커다란 “련병장”을 련상시킨다. 천군만마가 모여든 이 “련병장”은 성세호대하며 바다를 건너는 여덟신선이 각자 신통력을 과시하듯 수필창작자마다 나름대로 특장을 충분히 발휘하고있다. 따라서 평론계의 눈길도 모아지면서 분분히 자기의 수필관점을 피력하고있는데 이는 문단 열점으로 되고있다. 이것은 좋은 현상이기도 하지만 너무 떠들썩한 소음과 붐비는 창작자들속에서 문제도 로출되고있다. 가장 돌출한 문제는 수필이란  간단하며 나름대로 쓰면 된다는 리해와 그에서 비롯된 창작실태이다. 오늘 많은 수필들에는 음양 실조되여있고 정신을 황홀하게 하는것 같으면서도 따지고보면 수필문체에 고정주소가 없는 느낌이 든다.     사인화의 경향으로 나가고있는 수필창작에서 우선 제기되고있는 문제는 “자유”와  “약속력”간의 모순이다. 혹자는 수필의 핵은 “수의 (隨意)성”이라고 하며 심지어 “ 무엇이 생각나면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쓰고싶으면 어떻게 쓴다.”는 정도에 이르렀다. “예술수필”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면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미문”을 내놓고 기타것은 진정한 산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주장대로 한다면 수필은 산만성을 불러오게 되고 허탈에 빠지게 되며 뼈대가 없게 되며 수필정신이 결여하게 된다. 후자의 관점대로 한다면 수필로 하여금 갈수록 자아봉페에로 나가게 되고 기개과 활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수필독자상실을 자초하게 된다. 기실 자유가 없는 수필은 멍에밑에 나귀와 같게 되고 칼도마우에 고기덩이와 다를배 없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는 수필의 자유를 쓰고싶은대로 쓴다는것으로 리해하는것이다. 가령 자유수필을 쓴다고해서 아무 문장구성법도 없이 일계렬의 감각을 라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철리성이라거나 의의, 주제사상을 외면하고 정서와 기분외에 다른것은 관계할것 없다고 한다면 수필정신은 지레 도망치고 말것이다.    가령 재래의 언어규범을 무시해버린 상관없는 단어들의 퇴적이 된다거나 현실생활을 반영한다는것이 단순히 자기의 심령의 진실을 토로하는것이 된다면 수필은 어떤 모양일가? 설사 어떤 계기를 틀어쥐고 자기의 감정을 조작해 내여 오묘한 정서 세계를 그리고있듯이 수식한다거나 남이 다 체험하고있고 알고있는 인생일사를 짐짓 감동적이기나 하듯이 지리멸렬하게 라렬한다거나 제자랑 비슷한 어떤 경력을 지지 콜콜하게 서술한다면 수필의 매력이 나올수 있을것인가?     수필창작에서 자유란 무엇을 쓰는가가 포괄될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어떻게 쓰는가하는것이다. 자유적수필이란 산간에 구름과 같고 계곡의 류수와 같으며 혹은 화간에 노니는 나비와 같고 창망한 하늘에 날아예는 수리개와 같다. 수필은 정치경제, 사상과 문화, 도덕 등 외재적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자신의 속박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의 자유는 결코 제멋대로 하는것이 아니다. 한것은 이 세상에 완전한 자유란 없기때문이다. 수필창작은 어디까지나 모종 면에서의 제약을 받을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제약이란 곧 상식이고 공덕 등 자연법칙들을 말한다. 수필에서의 상식이란 정신의 응결을 의미하며 공덕이란 진실함을 의미한다. 수필은 비록 자아를 쓰는것이라지만 허위적인 조작과 가식은 금물이다.     수필은 사람의 정감을 쓰고 사실을 쓰고 어떤 인생도리를 쓰는 등 삼라만상을 포섭하지만 천지간의 법칙을 벗어날수는 없다. 제약이 없는 수필의 자유창작은 필경 반면에로 나갈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어떤 문화수필은 자유에 대한 리해가 깊지 못하고 제약성을 모르고있기에 한갈래 혼탁한 흐름을 이루놓아 대뜸 싫증을 준다.     기실 산곡간에 구름이라든가 류수, 나비, 창공에 수리개의 자유도 필경 제약성을 고유하고있는것이다. 자유의 실중은 수필창작에서 실중(失重)의 근원이다. 수필문체의 대소에 대해 변증법적으로 리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대수필”은 반드시 작은것을 보아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한낱 이불거죽이 되고 만다. “소수필”은 큰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물안의 개구리가 될것이다. 훌륭한 수필은 대해나 심산속에 묻힌 보물이나 한송이 꽃이 하나의 세계가 되거나 한알의 모래알이 팔소매속에 작은 세계가 되게 하여야 한다. .     다음은 수필에서의 진실성과 허구성문제가 나서고있다. 시, 소설, 희곡 등 문체에서는 허구가 자체의 특성이라고 할수 있다. 수필창작에서 진실성과 허구성은 쟁론이 많은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은 진실성을 전제로 하기에 진실한 생활, 진실한 감정이 표현 되여야 하며 인물도 진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진실하지 못한 수필은 수필이 아니라는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국면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것은 표면적인 현실생활이 다가 진실하다고 보증 할수 없으며 수필은 어디까지나 예술이므로 현실의 국한성을 초월하여 예술적처리를 할수 있으며 허구로 창조할수 있다는것이다.     시비야 어떻든간에 수필창작은 현실에 발붙여야 하고 현실과 민간속에 뿌리박고 민초인생의 고난과 불행을 반영하면서 그들의 심령의 대변인이 되여야 한다. 진, 선, 미는 수필마당에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꽃이 되여야 한다. 만약 한편의 수필에 이런것들이 선천적으로 결여되여있다면 그 수필은 글장난에 머믈고말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진실성을 편면적으로, 천박하게 리해한다면 역시 수필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말것이다. 진실이란 틀에 박힌것도 아니고 불가침범의 법규도 아니기에 허구성의 참여가 불가피한것이다. 진실성과 허구성은 음과 양, 오른손과 왼손 과의 관계와 같으며 영원히 분리되여있으면서도 통일성을 이루는 차길과 같다. 이처럼 수필에서 허허실실은 용허범위내에 두개의 존재이다.     현재 가짜수필이 적지 않다. 제재도 허위적이고 인물도 가짜이며 표달방식과 언어도 가짜이다. 물론 어떤것은 진실한 인물을 쓰고있지만 심령의 감동이 없기에 독특한 개성과 견해가 부재하여 거짓된것이라는 혐의를 벗어날수 없다. 또 어떤 거짓된 수필은 깊은 사색이 없이 씌여졌기에 인생과 생명의 진실과 본질을 반영하지 못하고 그저 보기에 그럴듯한 빈둥지로 되고말았다.     목각예술작품과 속사에서 “실”은 때로 “허”에 의거하게 되며 중국문인들의 그림에서 “무”는 곧 “유”의 일부분이다. 가령 퉁소가 나무막대로 되여있어 속이 비지 않고 규격적인 구멍이 없다면 퉁소라고 할수 없거니와 미묘한 선률을 뽑아내지 못할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진실한 실체속에 빈마음이 남아있기에 대해같은 흉금속에 희로애락이 넘쳐나는법이 없이 평형을 유지할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아래쪽에 있을수록 갈래갈래 내물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있게 되는것이다. 수필창작에서도 반드시 진실과 허공이 용납되여야 한다. 이속에는 내용과 형식등 방면이 포섭된다.     문학은 자기 본연에로 돌아와야 한다고 대성질호하면서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필은 응당 정치, 도덕 등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활화, 인성화된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그로부터 수필은 그 자신의것으로 자족하면서 자아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시와 마찬가지로 수필은 “문학산책”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수필은 “로인문체”라고 한다. 이런 수필창작 관은 유모아, 한적함의 소요, 심령의 변연화상태를 보여주고있다. 반대로 현재 수필들은 갈수록 현시대를 탈리하여 무료와 자질구레한 일상에로 기울어지고있으며 화조월석이나 새나 벌레, 강아지와 고양이따위를 다루는데 그야말로 수필의 자살이라고 질타하고있다.     이런 수필들에는 시대의 숨결을 들을수 없을뿐만아니라 인간생명의 약동감도 느낄수 없다. 물론 수필이 시대의 주선률이 될수는 없는바 이는 문체자체의 특성으로부터 결정된것이다. 이 시점에서 수필을 “변연문체” 혹은 “업여문체”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 작가적자세로 수필을 일반 문장으로, 혹은 수필을 정론문이나 신문글로 쓰려한다면 기필코 좋은 수필을 써낼수 없다. 만약 수필이 너무 이른바의 중심에 너무 접근하거나 아예 하나로 융화되여진다면 수필의 본성을 잃고말것이다. 하기에 로련한 수필가라면 시대와 너무 거리를 두지 않고 변연인의 시점에서 변연의 신분으로 변연심리상태에서 수필을 쓰고있다.     그러므로 맹종하지 않으며 초조해해하지 않으며 공리에 구애되지 않고 류사성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청고한 심리상태에서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터득하면서 인류 사회의 도리와 심령을 파헤친다. 그러나 이런 창작심리상태는 결코 수필이 시대상에 등을 돌리고 자기의 상아탑속에서 문은 닫아걸고 수레를 만드는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처럼 무병신음하거나 제멋에겨워 뇌까리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취가 있고 재치있는 수필은 직접 시대를 반영하지 않지만 시대의 밝고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으며 시대의 맥박을 무시하지 않는다. 진정 훌륭한 수필은 시대를 포용하면서 시대를 초월한다. 또 시대를 초월하려면 심령의 빛으로 생활적인 시대를 조명해야 한다. 이런 립장에서 말한다면 변연상태에 있기를 원하는 수필가는 반드시 시대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해야 하며 인류심령의 건전한 발전의 제고접에서 자연과 인생을 쓰면서 “자아”중심을 체현해야 한다. 옛날 장자의 산문은 그 시대의 변연에 처해있었지만 그 시대를 무시하지 않고 아울러 “자아”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강렬한 심령의 빛을 반사하였다. 그의 이런 심령의 빛은 일체 어두운면을 투시하 였으며 인생, 생명과 인성의 심처까지 조명해보였다.    한편 만약 수필이 시대의 메가폰으로 된다면 그 수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대의 버림을 받을것이다. 시대와 민중의 광대한 배경이 없다면 수필은 온실속에 꽃처럼 비바람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져버릴것이 자명하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시대라는 이 크낙한 환경속에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여야 하는바 시대의 파동과 민중의 숨결로 호흡하면서 세계를 바라보고 인생의 꽃이 피고지는 경상에 울고 웃어야 한다.     수필자체로 말하면 그는 정신의 섬광으로서 안광은 거대한 횃불이 되여 인생현장을, 심령세계의 구석구석을 비춰보일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망망한 우주 공간을 가득채우고도 지구촌을 비춰주는 하늘의 빛처럼 생활의 지구를 비춰보여야 한다. 태양은 우주의 변두리에 있지만 누리를 비추지 않는가?     수필창작에서의 변증원리는 찬연함과 담담함의 관계속에서도 체현된다. 한면으로는 변화무궁하여 마치 봄날처럼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다른 한면으로는 담담한 숲같고 무색무미의 맑은 물과 같다. 따라서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은 “비확정성”과 “창조성”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 어떤 모식으로 굳어져 버린다면 곧 메말라버리거나 죽어버릴것이다. 개인이거나 류파거나 조류라거나 할것없이 모두 같은 결과를 낳을것이다.     수필은 단일한 정태적생명현상이 아니며 또한 단일한 동태적생명현상만이 아니라 호상 전화하고 호상 보충해주는 변증적통일관계에 놓여있다. 더 부언한다면 수필은 물과 같아서 고정된 모양이 없는바 어떤 그릇에 담기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한다. 사발에 담긴물은 사발모형으로 존재하고 병에 담기면 병의 모양으로 있게 된다. 자유로이 흐르는 강물도 긴 흐름상태이지만 추우면 얼어붙고 따스해지면 녹아내려 흘러간다. 나중에 바다에 흘러들어 창해일속이 되여지면 바다의 모양을 같게 된다. 이렇듯 변화속에서만 생동할수 있는 수필이다.                                    2005 년 7 월  5 일                              
247    언어생활에서의 가치취향과 자아 댓글:  조회:7612  추천:0  2013-02-06
                          언어생활에서의 가치취향과 자아                                            최 균 선       인류의 일정한 사회적생활의 표현인 문화가 민족문화로서 창조되고 계승되여 발전해나갈진대 문화의 온갖 민족형식과 창조수단들가운데서 언어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언어와 언어행위는 사회적인것, 개인적인것, 본질적인것과 부차적 또는 우연적 인것으로 구분되는데 사회성이 특별히 강조되고있다. 왜냐하면 구조체계로서의 언어 와 언어행위의 현실적존재이며 그 실현으로서의 언어생활은 력사적으로 물려받아 내려오는 언어를 매개로 한 사유와 관념의 형성 및 그것의 교류과정과 결과의 총체로서 곧 사회적활동이 되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생활과정에 사람들의 언어의식, 언어관습이 형성되는데 매개 인의 심리기질이나 가치관념의 취향에 따라 언어수단의 리용상에서 불균등 현상도 생성된다. 이것이 보편화되고 일종의 체계로 굳어지면 곧 사회언어 사실로 실존한다.     따라서 사회언어현상의 생성에는 사회자체발전이 끼치는 영향, 의식과 사유의 변화발전이 끼치는 영향, 의식과 사유의 변화발전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 등이 작용한다. 이리하여 특정된 언어환경속에서 살아야 하는 제민족들의 앞에는 민족어의 생존과 계승, 발전에 직접 관련되는 일련의 난제들 이 첨예하게 제기된다.     중국대지에 살고있는 우리 조선족들의 언어생활도 례외가 아니다. 어떤 정형은 사회상의 비정상적인 현상과 흡사한바 근거리적공리주의에서 자기 민족어를 도외시 하면서 백프로 한어화를 추구한다거나 한국풍의 외래어차용열 등 열점이 많아지고 있다. 사회상에 열점이 많다는것은 흥분점이 많아졌다는 설명이 되고 사유가 활약되고 창조의식이 발랄해졌다는 표징이 될지는 모르겠으되 민족어생활에서의 인격주체의 일종 상실이 아닐가 우려 하는바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이란 도덕의미상에서의 인격이 아니라 생리, 체질 이외의 특징인 민족적인 자질, 그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민족어를 근근히 사회집단내 사람들사이의 접촉과 교제의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관점과 민족 어를 전방위적인 민족문화건설의 대물림보배로 간직하는가 하는 두 관점 사이에서 현연되는 민족인으로서의 주체적자아인격이다. 한것은 주체적 자아의 완성은 도덕, 가치관, 추구의 경향성, 교제기교, 지식결구, 수준으 로 구성되는 하나의 계통이기때문이다.     언어생활ㅡ하면 매우 광범위한 령역이 소급되므로 본 론문에서는 주로 외래어 차용에 대해 천박한 견해를 피력해보려 한다. 기술의 인입, 타문화의 인입은 사람들의 사유방식, 행위궤적, 정감 활동 등 방면에 심각한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교제방식을 추구하게 되는것은 불가피적이다. 그러나 습관된 언어환경과 전통관념에서 오는 각종 제약성, 개성기질, 지구문화 심리 의 견제력 등 제반인소와 조건을 고려함이 없이 무엇을 보면 무엇을 본따보려 하는 본체상실의 그런 언어의식, 언어가치관, 언어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언어가 개체성 의 전달매개 물인것만은 기성사실이나 언어활동은 하나의 사회결약식의 부호계통 인만큼 개인이외의것인 일종 사회제도로 된다는 이 점이 곧 리론근거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우리의 서사어생활에 날로 외래어차용 경향이 농후해 지는데 언어생활에서의 새 발굴, 새 창조가 기도되고 또 그리함으로써 전부의 지혜가 발휘되여 일종의 승화가 약속된다기보다 우리 조선족문화의 개성특징, 자체의 건전한 발전에 유해무익하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례를 들어보자. 많이 팔리는 책을 《베스트셀리》로, 문단등장을 《데뷔》로, 이성친구와의 밀회를 《데이트》로, 옆얼굴을 《프로필》로, 려행사의 안내자를 《가이드》로, 물건사기, 장보기를 《쇼핑》으로, 검은 색, 흑색을 《블랙》으로, 복장설계사, 도안자를 《디자이너》로, 류행, 양식을 《패션》으로 쓰는 등등… 우리 말에 합당한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부득부득 생경한 외래어를 차용하는데는 아무리해도 납득이 안간다.     상술한바와 같이 임의의 차용어들은 일반 독자들은 놀래울지 알수 없으나 기실 《외래어사전》이나 한권 갖추고 면무식이나 한 사람이면 얼마든지 멋을 부려볼수 있다. 례는 얼마든지 들수 있다. 이를테면 백화 상점을《데파아트》로, 련애편지를 《러브레터》로, 마음, 기억력을 《마인드》로, 년장자, 선배를《시니어》로, 던지다를 《드로우하다》로 쓴다 하자. 그런들 어떻단 말인가? 영어단어를 많이 장악했단것인가? 개혁정신이 빼여났다는건가?…     인간의 언어적전달과 표현을 최고도로 수행하려는 의욕과 그것을 위한 심리적, 육체적노력을 최소한도로 한정해보려는 경제성의 결합 등 심리가 기대되는바이고 또 우리 말 표현속에 보다 적절한 말이 없을 때 외래어를 음차해쓴 선례가 많은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차용은 언어가 늘 자기 기능을 원만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보나 단어체계발전의 견지에서 보나 합목적이였고 허용범위내의 가치취향이였다.     이를테면 전문기술용어, 학술용어, 기계화학명사 등을 제외하고라도 외래어중에 필수적인 단어들을 꼭 수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대중언어를 통해 검증되고 파악된것 이여야 완전하고 생명력이 있다. 례하여 우리가 잘 알고있는《세멘트—영어》, 《브란 데— 영어》,《악센트—영어》,《론리—영어》《발레무—영어》,《슈제트—프랑스어》등 많고많지만 상기한 그런 한국 식의 외래어차용과는 구별되는것이다.    각이한 언어의식과 관습, 가치취향이 공존하는 이상 외래어차용에 각별한 열성 자들이 있을법도 하지만 신문이나 통속독물같은데서 생뚱같이 외래어를 섞어쓴다면 언어의 통신적기능장애만 조성할뿐이요 어찌보면 《흉내를 내는건가? 허장성세를 하는구나》하는 역심리가 앞선다. 혹자는 언어형식의 단순화발전, 내지는 수구적태도 역시 자아에 대한 부정이 아니냐고 반기를 들수도 있지만 여기서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언어는 인류의 사유결구, 사유방식, 사유모식의 내재적제약성을 받는 다는것은 주지하는바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것은 관념으로서 우리들이 모종의 언어사용을 접수할 때 부지불식간에 그런 언어와 련계된 사유모식을 운용하게 되는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명기할것이 있다. 즉 일종의 사유관념이 우리의 두뇌속에 충격해들어올 때 그것이 마치 접수된것처럼 되지만 만약 사유 모식이 상응한 변혁을 가져오지 못했다면 새로운 관념의 접수라는것은 결국 피상적이고 허위적인것이 될뿐이며 전통적사유모식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빌려온 관념을 질식시켜버리고 만다. 가령 시험성적인 개별적 외래어차용일지라도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언어의 내재형식은 어음과 개념의 매개물로서 민족에 따라 다른바 매 언어, 지어는 하찮은 방언 한마디에도 그 지방 인민의 개성이 나타나고 민족심리특징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쏘쉬르는 언어현상을 곧잘 서양장기에 비유하였 는데 나무로 만든 장기쪽이든 상아로 만든 장기쪽이든 그것은 경기자체 에는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만일 장기쪽의 수를 더하거나 덜어낸다면 그것은 즉시에 경기체계규칙—이 장기의 《문법체계》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여기서 알수 있는바 장기에서 중요한것은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재료나 모양인것이 아니라 경기규칙에 따른 매 장기쪽의 기능가치인것이다. 생경한 한국식 차용 어(영어단어)가 상아로 만든《장기쪽》이라 해도 이와 마찬가지 도리이다.     단어의 부단한 생성, 발전, 사멸과 인입의 과정에 그것들이 하나하나의 개별적인것으로부터 시작되여 점차적으로 전반 언어체계에 영향을 끼치자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것이고 한편 우리 말의 생명력, 견인성으로 말미암아, 특히는 언어자체의 특성, 나아가서는 인민대중에 의해 고유한 형태부들이 단어체계속에서 튼튼히 보존될것 이므로 공연한 로파심을 가질것도 없겠으나 우리 말의 순결성확보와 독자제군의 열독심리, 작품의 가시도(可视度)를 명랑하게 하려면 그래도 비실용적이고 비실혜 적인 언어유희식의 문풍을 배격하자는 주장이다.    사실 외래어빌려쓰기를 했거나 모조어를 씀으로써 우리 말의 어휘구성을 교란하고 외래어투성이 잡탕말을 생성시킨 한국의 언어실태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붉은등을 켜준것이지 결코 무슨 좌표계나 귀감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입말이든 글말이든 민족어생활권내에 사는 모든 민족인, 특히는 언어문자방면에서 모범을 보여줘야 할 여러 문필가들은 다음 세가지 원칙을 다시 한번 명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고유한 우리 말을 적극적으로 알차게 살려씀으로써 단어체계 의 민족적 특성을 높이 발양시키는 자주적원칙이다.     둘째로, 단어체계의 발전은 현대사회발전추세에 맞게 부단히 추진시키되 지구문화권내의 대등성을 확보하는 현대성원칙이다.    셋째로, 자주적인 기개를 지니고 경제문화교류를 통해 들어오는 외래어를 녹여서 자기의 어휘분야를 풍부히 하는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수용원칙이다.    이 세개 원칙은 에누리없어야 한다. 언어인즉 겨레의 정서와 사유와 감정까지 제약하며 물질문화의 창조도 언어속에 실려있는 민족혼의 힘에 받들려오지 않는가!     우리 말과 우리 글의 옳바른 운용이야말로 우리 겨레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품어주고 키워주는 문화의 영원한 록지가 아니며 세계 민족지림에 떳떳이 내세워줄 튼튼한 발판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저마다 자기 민족어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감을 안고 민족문화발전의 계주봉을 세세대대로 외착없이 물려주는 숭고한 력사적사명을 참답게 수행해야 한다.                                                         중국조선어문 1995년4월
246    문학언어의 공능풍격 댓글:  조회:7670  추천:1  2013-02-06
                          문학언어공능의 풍격문제                                                                                             최 균 선           무릇 어떠한 종류의 예술부호이든지 주요공능은 감정정보전달에 있는바 일컬어 예술부호—문학언어는 실제상 자체공능의 최적화된 변형체라 말할수 있다. 문학어는 사물에 대한 지시나 지식의 주입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관을 자극하여 무언가 깨우쳐주고 그리하여 보편적인 진실한 감동을 확대시켜주는 엄격히 선정된 언어들이다. 례하여 어감에 민감한 독자들은《밤》이라 하면 단순히 낮의 반대인 시각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며《전원》하면 그저 곡식이나 채소를 심는 밭으로만 터득하지 않는다.     그리고 《봄비》가 해당 언어환경속에서 봄날의 비물로만 되지 않듯이《신록》에서 희망과 대자연의 조화를 련상하게 되고《락엽》에서 자연의 무상함과 비애 등 감정을 갖게 된다. 이렇듯 문학어들은 그 실용성을 초월한 어떤 생활적풍경까지 련상시키는바 독자들의 언어접수도식에서 문화소양의 루적을 기초로 하여 건립되는 상대적으로 온정된 련계기제를 고유한다. 우리는 이것을 암시, 혹은 상징이라고 하는데 문학언어공능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예술에서 반복은 죽음이라고 한다. 하여 재래로 문학가들은 일반적어휘조합으로 자기 작품을 구사하는것을 원치않고 가능한껏 창조성적으로 새조합을 시도하면서 고심참담하게 문학을 경영해왔다. 그렇다고 하여 수의적인 독립적언어체계의 건립이 가능한것은 아니다. 례로 문학작품에서《도끼》는 역시《도끼》였지《끼도》로 될수 는 없었으며《아버지》는《아부지》로 통하나《지아버》로 될수 없는것처럼 말이다.     작가들이 일정한 교제효익의 목적밑에 유의적으로 선택하는 상응한 언어수단 즉 참신한 표달방식의 계통질을 문학언어의 공능풍격이라 하는데 곧 문학작품의 문체풍격을 의미한다. 이는 작가개인이 언어의 구체응용상 그 개성특점에 따라 채용하는 방식, 수단의 응집과는 또 다른 동체이질의것이다. 문학언어공능풍격에는 언어흐름 마당에서 체현되는 모종의 어조, 어투와 언어의 뜻마당에서 산생되는 암시, 상징 등 네개 요소가 포괄된다. 먼저 어조, 어투에 대해 말해보자.     소설창작의 경우 표현전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스토리나 인물형상륜곽이 정해진 다음에는 어조를 결정해야 한다. 문학적대화의 전략에서 어조의 기본은 작품에 관통될 작가의 정감기조로서 작가-화자를 개성적으로 만들어줄뿐만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과 정서와 욕망, 또는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문학장치로도 되기때문 이다. 어조는 화자의 정서상태를 나타내는 기능만 지닌것은 아니다. 같은 제재를 이 야기해도 작가에 따라 각기 다른 어조로 말하고 그로 인해서 작품의 특질이 달라진다 는 점에서 작자의 개성을 체현하는 문학장치라고도 할수 있다.     그만큼 어조는 작가의 창작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바 그 실질은 분위기조성, 내지는 자기정감표현형식으로서 짙은 주관성을 띠고있어 창작주체의 개성특질이 집중 적으로 표현된다. 위렌(R.Wiren)은 시의 어조를 (내적형식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서 (제재, 청중, 때로는 화자 자신에 대한 태도)라고 정의하고있다. 뚜르게네브도 이에 대해《중요한것은 생동하면서도 특수한 작가 개인소유의 음조이다. 이런 음조는 다른 사람의 후두에서는 절대 울려나올수 없다》라고 론술한바 있다.     물론 문학적대화에서 화자의 어조는 실제 작가의 어조가 그대로 반영되는것은 아니다. 실제적작가는 작품속에 화자로 현연되고 화제, 독자의 상호관계와 에 설정되는 부동한 상황 및 분위기에 따라 선택, 설정된다고 볼수 있다. 따라서 어조의 결정에서 화자와 관계되는 요소로는 우선 작가의 인생관 내지는 세계관이 앞서게 된다. 그러나 문학적대화는 인물의 내면세계를 직접 설명하기보다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점은 소월시를 살펴봐도 알수 있다. 그의 전체 시작품에서 느껴지는 어조는 다분히 수동적이고 체념적이다. 그리고 녀성화자보다 남성화자가 다소 저항적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수 있다. 소월시인의 전체 어조가 이처럼 체념적인것은 일제 의 강폭한 압제적현실에 저항해보았자 자아의 외곡을 초래한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가치관이 재현된 결과라고 할수 있다.     어투는 어조와 같이 문학언어공능풍격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어구들의 횡적련계로 구성되는 언어의 흐름마당에서의 다른 일종의 표현이다. 어조가 객체에 대한 창작 주체의 정감평가에서 기원되여 개체성이 생활소재에 대한 파악 내지 표현이라면 어투는 창작대상에 대한 형상적서술로서 흔히 생활소재자체가 창작주체에의 반작 용이라 할수 있다.     언어의 흐름마당에서 언어절주의 본질은 우리들 자신의 내심운동의 률동인바 일종 명확한 어투는 독특한 표현효과를 약속하고있다. 즉 언어의 흐름마당이든 언어  의 뜻마당이든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생명요소로서의 언어에는 감정적특질이 고유되 여있다는것이다. 이로 보아 문학작품에서 언어가 공능변형을 통해 보통언어로부터 예술부호로 전환될뿐임을 알수 있다.     보통 풍격이라 하면 구체작가의 작품방면의 풍격이 거론되지만 문학언어일반의 공능풍격의 변이에 대해서 의론되지 않고있다. 문학창작에서 방법열, 기법열, 형식열 에 뒤이어 최근년간에 문학언어공능풍격의 변화가 어떤 징표를 보이고있는데 연구와 토론이 요청되고있다.     흔히 평론계에서 중국조선족문학어는 어딘가 메마르고 딱딱하다고들 말하는데 비교학각도에서 모종의 약점일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예술부호 그 자체에 선천적인 치명적약점이 있는것이 아니라 언어구사의 창조성, 령활성, 조합기교 및 기능에 있다고 말해야 공정할것이다. 주지하다싶이 언어자체에는 개방성과 탄성이 고유되여있지만 그것은 일정한 언어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작가로서의 최서해의 창작적개성은 피끓는 열정이며 힘찬 기백이다. 열정과 기백을 돋구어낸데 바로 최서해의 독창적인 풍격이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혈기가 아니며 단순한 감정적인것이거나 육체적인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구자적인 사상적 지향과 정신세계에 의하여 격발된 열혈작가로서의 전투적기백이며 곧 그의 풍격이다.     지금도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작품속에서 세차게 고동치는  힘찬 박동에 사로잡히게 되며 그의 정서에 휩싸이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그의 작품세계에는 랭담과 관조가 없으며 무맥함과 완만성이 없다. 어느 작품에서나 힘과 열정이 있고 강한 박진력이 있다. 그의 대표작《탈출기》에서의 결말은 평온한 그속에 절절한 호소와 비애에 찬 부르짖음이 은은히 메아리치고있음을 누구나 절감했을것이다.     조명희의 단편소들을 다 읽고 마지막 페지를 덮으면서 받는 느낌은 후더운 정서이다. 진하고 강렬한 정서, 이것이 조명희의 창작개성이며 풍격의 주요한 면모이다. 그의 강렬한 정서는 그의 작가정신의 발현이자 문학언어구사에서 발현된 공능 풍격이다. 물론 소설에서 묘사자나 설화자로서의 작가의 면모가 어느 작가, 어느 작품에서나 나서는것은 사실이나 포석의 소설에는 작가의 얼굴이 특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소설《락동강》의 어조는 유유한것 같지만 기저에서 무겁고 비장한 감응이 고패치고있다.      라도향의 단편소설들을 재음미해보면 그 소박성속에 사실상 강하게 안겨지는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섬세성이다. 그것은 소박하나 불쌍한 주인공들의 미세한 면모와 단순하며 정연한 구상과 상세한 심리묘사, 가는 언어문장 등의 풍격으로 하여 보장된 형상의 섬세성이다. 주로 평범한 세태생활속에서 소재를 선택하고있는것이 작가의 창작적개성, 풍격이나 보다 중요한것은 그 평범한 생활자료속에서 사회적, 시대적의 의를 탐색하고 그것을 자기식의 어조, 어투로 전달하는 문학언어공능풍격의 체현에서 작가의 특색이 고유하게 된것이다. 그의 대표작《벙어리 삼룡이》나《행랑자식》이나《지형근》에서 작가는 마치 세밀한 언어문체로 섬세한 형상적화폭을 창조한 풍격이 독특한 작가였다. 이렇듯 최서해소설의 언어공능풍격과 리기영소설의 언어공능 풍격이 다르며 조명희와 라도향의 소설언어공능풍격이 구별되는것도 무엇을 썼는가에 있기도 하겠지만 보다는 어떻게 언어구사를 하는가에서도 구별되고 있는것이다.      최근년간 우리 중국조선민족문학언어에서 한국문학언어풍격을 모방,답습하는 경향성이 짙어가다가 이미 하나의 풍조로까지 되였는데 기실 이것은 맹목성에서 온 자아상실의 표현이라 말하고싶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문학예술기호 자체에 개발과 창조의 공간이 없는것이 아니라 작가마다의 언어소양을 비롯한 언어구사의 령활한 창조성, 기교의 모색에 달렸으며 그로서 체현되는 창작개성에 달렸다. 반항의 작가인 최서해가 함북도방언으로《탈출기》같은 명작을 써내지 않았던가?     하기에 성숙한 작가라면 우리 말 표현수법들이 비유, 의인, 상징, 암시, 풍자, 해학, 등이 모두에게 공유된것이라도 자기식으로 다양하게 선택, 운용하여 새록새록 새로운 언어환경을 창조해냄으로써 그속에서 남과 구별되는 자기의 창작풍격을 형성 할수 있는것이다. 또 그로써 그 작가의 인격과 작가적가치가 자리매김하게 된다.     문학작품은 어디까지나 글을 보며 감수, 감탄하게 되지만 한개 민족문화경험은 점차적으로 침투될수 있을뿐 무더기로 옮겨다 이식시킬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사용하는 문학언어와 동질의 예술부호이지만 한국문학언어공능풍격이 조선의것과도 색다르듯이 우리의 문학언어공능풍격도 중국대륙에 사는 독립적인 중국조선족의 제반 특징이 나름대로 진실하게 체현되여야 우리 문학이노라고 떳떳이 말할수 있을것이다.        문학어조합기교, 정감성부여, 형상어의 탐색과 창출 등 면에서의 유익하고 합목적인것은 적극 배워서 자신의것으로 내화하면서 창조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것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으리라. 그러나 문학어에서 심각한것은 무엇보다 사유모식이다. 왜냐하면 이 사유모식뒤에는 인간의 관념이 서있기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특수한 력사적문화배경과 혈연적뉴대를 가지고 발육성장한 중국 조선족문학에서 조선, 한국과의 선천적공통성을 배제할수는 없지만 한편 부동한 지역, 문화환경이 부동한 문학현상을 창출하기 마련이므로 자기 특색이 주류가 되여야 하고 또 그 주체성을  영원히 확보해 나가야 할것은 두말할것 없다. 언어는 그속에 들어가는 일체 사람들의 주체적위치의 상징질서를 설정하며 이로써 언어는 그만큼 우리들이 생존하는 자신의 유일한 세계로 되여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문학창작을 진행함에서도 자기가 생활하는 주위세계에서 취재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파악의 기초우에서 예술적재현을 실현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부호계통으로서 개성적사유를 표달하는 창작과정에 문학어의 상규질서를 어떻게 파괴하고 어떻게 새로운 조합을 시도한다해도 결과적으로 사유모식의 사회적제약성을 벗어날수 없다. 우리는 다 같은 단군님의 후손이지만 이미 중국조선족으로 부상된 이상 우리의 사유모식이 형성되여 있다는 현실을 부정해버릴수 없다고 본다.     주지하다싶이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대지에 뿌리박고 개화결실한 자립적문학으로서 중국조선족인민들의 인생마당에서의 추구와 희f로애락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문학이다. 바로 그러기때문에 창작의 기본수단이 동질의것이라도 부동한 정치리념, 부동한 경제생활권, 부동한 지역적문화습관속에서 부동한 가치관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특정된 생활면모가 반영될수밖에 없는것이다. 여기서 조선, 한국 문학과 다른 우리 문학의 특성이 규명되기도 한다.     문학작품에서 세계본체에 대한 작가들 호상간의 사유모식의 차이성이 곧 창작개성이 되여지고 구성 등 면에서 창작풍격이 체현되는것도 사실이지만 주로는 예술내 용과 언어공능풍격에서 보다 돌출히 나타난다. 같은 한어로 창작되고 중국문학권에 들긴 하지만 중국대륙문학, 대만문학, 향항문학이라는 엄연히 구별되는 문학현상으로 고착되여있는것도 바로 이때문이 아니겠는가?     풍격은 곧 문풍을 의미한다. 문풍은 또 실제상 그 사람의 사상풍격과 그것의 작품에서의 표현으로서 특정된 사회환경, 시대의 산물이다. 즉 정치, 경제, 문화의 연혁이 문풍의 변화를 결정한다. 따라서 한 작가의 작품의 풍격, 지방특색의 형성은 환경기분과 취재문제만인것이 아니며 더구나 간단한 지리학상의 향토개념과의 등호를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언어의 공능풍격은 우선 특정된 인문환경속에서의 문화심리의 자연적표출로서 되돌아와 독자들을 감복시키는것을 그 심미가치척도로 삼는다.     언어를 존재의 뜰이라 비유한다. 이런 기점에서 범민족문화권이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형성되게 하였고 서로 침투하고 영향주는 물질적바탕이 있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국조선민족이 일찍 월강민, 망향민으로 있을 때까지는 그 뿌리를 유구 한 조선문학에 두었고 그후 조선문학, 한국문학으로 갈래가 뻗을 때 우리 중국대륙에도 중국조선족문학이 새롭게 뿌리내리고 개화하여 전자들과 또 구별되고 그 독립성을 생명으로 한 문학권이 구축되였으며 그로부터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이 규정되 였다. 마치 영국문학, 미국문학이 동일한 영어문자로 창작됨에도 불구하고 별개로 구별되고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 대륙적인 풍토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중국조선민족으로서 자기문학의 제반 특징이 꽃향기처럼 만방해야 우리 문학의 생존리유가 서게 된다. 문학언어의 생신한 조합기교, 정감표달방식, 형상성창조 등 면에서 유익한 섭취는 왈가왈부할것없이 필요하지만 자기를 잃으면서까지 닮아가려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의 문학이 자기나름의 모습으로 산처럼 문학지림에 우뚝 솟으려면 매개 작가들마다 자기가 처한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활동중에서 그 내재적기질을 굳혀야 하며 주체성확립에 립각하여 자기 특색을 띤 창작궤도를 구축해야 중국조선민족의 문학이라고 내세울수있으며 문학의 망망대해속에서 생존권이 확보되고 그속에서 부끄럼없이 살아남을수 있다. 우리의 문학언어공능풍격이 한국문학언어공능풍격에 업히울수록 상대적으로 우리 민족문학의 독립성은 상실되고 중국조선족작가로서의 자기 개성을 스스로 잃고말뿐이라는것을 명기하자.                                                               2005 년 5 월
245    창작심리와 흔상심리의 충돌 댓글:  조회:8210  추천:0  2013-02-06
                   창작심리와 흔상심리의 충돌                             1. 시대와 독자   산업사회, 내지는 상품경제시대, 사람들의 문화가치관념의 변화와 더불어《랭각 문학》현상은 엄숙문학의 진동시대를 력사의 한페지로 밀어버렸다. 독자군도 랭각 되였다. 보다 실효성을 추구하는 독자들은 력사와 현실적인 내용을 다룬 실용적 문장들에 쏠리고 소일형, 오락형의 일반 독자들은 자극성, 희극성, 신비성이 짙은 통속독물을 추구하게 되였다. 이런 문화의 곤혹속에서 명백해진것은《현시대는 독자 가 문학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라는 결론뿐이다. 문학의 이런 불황기에 더구나 변연문학으로 된것은 시문학이다. 물론 인류정감이 사멸되지 않는 한 서정의 락토요 백화원인 시문학이 절멸될리 만무하지만 시는 점점 생존공간이 축소되고 있다는 현실을 그저 간파해버릴수는 없게 되였다. 문학장르들 사이에 원래 우렬의 구별이 없건만 어찌하여 불공평한 랭대를 받고 있는가? 필자는 시애호가로서 제나름의 사색을 달려보지 않을수 없다.                                   2. 시는 왜 쓰냐?   시는 왜 쓰냐? 하는 물음자체가 무의미하지만도 독자군들속에는 오해를 가지고 있는 현황을 숨길수 없을것이다. 주지하다싶이 시는《자아실현》의 일종 수단이면서 도 사회적창조활동으로서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느냐? 하는 물음의 해답이 그속에 담겨 있다. 말하자면 시인들이 시를 통해 자기의 사상감정을 표달하는 목적은 시를 개방하 여 독자들의 심령속에 자기와 똑같은 정감, 지혜를 심어주려는데 있음이 자명하다 는것이다. 례를 하나 들어보자.                                 《단풍잎》                                   사백 작   바람이 발뒤꿈치에 단풍잎을 던져왔다. 오, 가을이구나. 록색의 생명에도 더운 피가 끓고있었음을 서리를 맞은 후에야 나는 알았다.   이처럼 훌륭한 시들을 읊고 나면 일종의 감미로운 정서에 푹 잠기게 되고 지혜의 향도자를 만난듯 모종의 깨우침도 받게 되는바 인생살이에서 한가지 향수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와 반대로 한번 읽고 나서 이런 시는 누굴 위해 썼나? 하는 곤혹부터 앞서는 시들이 많다. 그래서 독자들속에 《시시한것이 시》라는 불량 한 영향을 가심화하는 장본인이 되고있다. 시인(작가)과 독자는 기하학상에서의 직선으로 련계된 두점이고 사회학적으로 는 망망한 인해속에 서로를 흡인하는 진실된 마음이다. 창작심리기제로 말하면 문학 작품은 창작주체의《내분비물》이고 비자각적인《정신수출》로서 결과적으로 사회 대중에의《공헌》이 되여진다. 그러되 선결조건으로는 시인(작가)의《정신수출》 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선의적인 묵결하에서의 가치실현이다. 환언한다면 오직 열독 활동만이 모든 문학작품을 죽은 언어재료속에서 건져내여 현실적인 예술생명을 부여 해준다는것이다. 이렇듯 모든 문학창조활동은 세계와 인간존재사이에 진행되는 부가적련계로서 이런 새 령역의 개척은 유익하고 실용적인것을 제공하여 주면서 정신세계를 넓혀주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심령의 새로운 체험을 쌓게 되며 나아가서 인간본연의 발전을 촉진한다. 이는 시만이 아니라 모든 문학예술의 숙명적인 사명이다. 그러나 가령 순 수 자신만을 위하고 타인의 정감각도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시라면 작자가 자사 적인 그만큼 독자도 그 시에 대해 자사자리적일수밖에 없다. 시창작은 가장 개성화되고 개인적재질이 뛰여나야 해낼수 있는 창조사업으로서 일반인과는 달리 일상생활속에서 신선하고도 특이한 예술적감지와 미학적사고를 요구 하며 생활에 대한 시인 자신의 심령세계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언어전달방식으로, 예술수법으로 표현할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시는 독자대중의 공통한 정서와 정감 세계에 보편적의의가 있는 미학적개괄, 독특한 미학창조가 되여야 하는 동시에 독자 들의 공명, 통감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미적자극물이 되여야 한다. 비록 시인이 자아를 해방할수록 그 시작품은 더욱 풍부한 자아를 낳고 또 시인이 자아의 충분한 로출과 석방상태가 되는것이 가장 리상적인 창작사유상태라지만 감각 이 곧 서정이 아닌것처럼 시인의 사인감정 일반이 곧 예술정감인것은 아니다. 오직 예술적감각만이 서정의 초월이 될수 있을진대 시인의 순수 자연정감과 예술정감에는 자연상태와 승화사이에 그것처럼 구별이 있어야 할것이다. 《한수의 시작품이 독자의 상상과 정감에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문자조합이라면 더는 예술로서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루나챠르쓰끼의 말은 현대 시창작에서도 금언으로 되고있다.전통적시학관이든 서방의 당대접수미학의 관점으로 보든 내적인 허무와 외적인 몽롱과 세기말적인 비애, 고독한 기분에 잠겨 있는 시들을 드문히 접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인자신에 대한 학대만이 아니라 독자들에 대한 무책임한 학대라고 말하고싶다.                         3. 시가 랭대받아야 하는가?   이 역시 공연한 물음일수 있다. 괴테는 일찍《누가 만약 시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는 곧 야만이다.》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시는 력사보다 더 철학 적의미가 풍부하고 더 높은것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은 인류가 예술적으로 세계와 인생을 파악하는 창조활동이다. 따라서 문학예술활동에서 시야말로 인류가 자기의 사상을 표달하는 최고의 형식이 된다. 문학의 시조(始祖)로서의 시, 감각, 지혜의 총아로서의 시, 아름다운 절주의 창조로서의 시를 누가 부인하랴만 독자들은 어이 하여 괴테의 대성질호에 동조하지 않을가? 최근 《령점집단》에서 북경, 광주 등 5대도 에서 열독심리조사를 했는데 시가 제일 마지막이였다고 한다.(1997년 《잡문보》) 문화경험을 기초로 진행되는 자유적선택과정으로서의 문학교류에서 흔상심리 문제는 접수미학에 속하는 복잡한 학술문제로서 어떤 층차에서 문학이《독자문학》 으로 되여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한두마디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우에서도 언급 했지만 문학예술교류는 어디까지나 선택적결약이므로 시문학이 랭대받는 원인을 작자 와 독자 량자에게서 다 찾아야 하겠지만 우선은 창작주체이자 미적자극물의 제공자인 시창작자에게서 찾아야 할것이다. 정보론과 미학론에서 확인되다싶이 한부의 예술작품은 유의적으로 조성된 독창성 과 그에 대한 리해성 사이에 변증관계가 고유되여있어 시인의 심리상태와 특수한 사유방식은 독자 일반의 심리상태, 사유모식과 충돌되였다. 이런 열독심리현상은 어느 시대에서나 불가피적이였는바 시라는 이 상록수는 늘 독자들의 몰리해와 트집, 지어는 도전과 거부심리의 풍운조화속에서 성장되여 왔다. 하다면 현대 우리 시대의 독자들은 어떤 시작품들에 더구나 거부감, 랭대심리를 가지게 되는가? 필자의 나름대로 판단해 본다. 례하여 시인자신도 아리숭한 개념과 잡다한 감각의 표현에 집념한 위현대파시, 인위적인 부호위기에서 조성된《난해시》, 분명 명석한 두뇌로 사유했으련만 의도적으로 그 의미를 짜증나도록 몽롱하게 표현한 시, 시인의 감성모호판단에서 기인되여 정감의 사인성이 극치에 달함으로써 독자 공감대 사이에 락차를 형성한“귀족적”인 시, 사상, 리념을 감각으로 전화시키려 시도했지만 선천적정감실조를 가지고 난 따분한 시, 순수 자아표현만 앞세우다보니 말세적인 애탄, 병없는 신음이 된 세태시, 부평같이 뿌리없는 리념의 전달에 급급 하여 시적의경을 물각해 버린 시, 감동과 감화에서 기인된 심장의 세찬 고동으로가 아니라 책상머리에서 고안해낸것 같은 창백한 철리시, 독자들이 기대하는 현실적이고 실혜적인 감각제공을 찾아보기 힘든 자아발설뿐인 시, 그리고 시가 시로 되여지는 외형이면서도 생명이 되여지는 운률미(외재률이든 상관없이) 임의대로 행을 나눈 극히 산문화된 시… 등등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속에 포함되기도 하겠지만 리성이 배제되여버리고 순간적감각의 표현, 몽환경과 하의식상태의 표현, 환상과 감각의 표현을 중시하는 상징파 시를 표방한 시들이다. 원래 비리성적환각과 직각은 애매하고 모호한것으로서 거기에 몽롱 한 함축미마저 나름대로 쓰기에 이른바 《몽롱시》라 명명된 시들도 많이 나왔다. 상징파적주지시에서 주지는 우주—인생에 대한 오묘한 철학적탐구와 암시를 기초로 하고있지만 감정은 랭정하며 암시적철리성은 흔히 현학적냄새가 다분하여 자칫 독자들을 오리무중에 빠뜨릴수 있다. 이 모든것은 분명“현대파시”의 결함이건만 그것을 절대적미학요구로 신봉하면 서《시에서 보배로운것은 그 뜻을 알아맞추는데 있으며》《시는 수수께끼가 되여야 한다》는 극단에까지 치달아오른 시인들도 있었으니 특정된 문화환경에 오래 습관 되여 온 독자들이 반응이 무디고 각이하게 랭담할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시는 오직 감각과 정서를 느낄수 있을뿐이며 그것이 시인들이 소망하는 예술적 효과라는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현실속에“자아”자체만의 표현이 아닌 예술 개성의 표현인 시가 환영을 받을수 있다는것이다. 사실 모시인의 인간적현실 개성의 표현은 그리 매력적이 못된다. 시인이 곧 시가 아니듯이 독자들이 감탄하게 되는것은 시인의 심미리상, 예술개성이다.《자기를 자신에게만 집중시키지 말고 세계를 자기 에게 집중시켜야 시인다운 시인이 될수 있다》는 고리끼의 말의 제시적이다. 물론 현대의 시일반에 대한 독자들의 보편적인 랭대심리를 단순히 전통수법에 대한 포기이냐? 현대수법에 대한 절대적미신이냐? 하는 표현형식여부에 귀결시킬수 는 없다. 그리고 시인의 내향적감수의 표달이냐? 외향적발설이냐? 하는것으로 우렬을 론단하는것도 타당하지 않다. 시는 초현실적인 표준으로 흔상대상을 판단할지라도 리해가 전제로 되여야만 효용이 있다. 리해불가능에는 예술적흔상이란 존재할 리유가 없기때문이다. 황차 리해자체가 필연적으로 어떤 미적쾌감을 부여하는것도 아님에랴! 모두어 말해서 시인이 전률하는 심령으로 감지하고 체험하고 진솔하게 표백한 시가 되지 못했을 때 시가 사회와 동고동락하면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구비하 지 못하고 순수 자아의 울타리안에서의 뇌까림이 될 때 시의 운명은 비참한것이다.                                    4. 시의 포옹력은?   《단떼를 알려면 자기를 단떼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크로체는 말 했다. 하지만 참된 시인은 지음(知音)을 못만났다고 한탄하기전에 자기가 쓴것이 독자들의 기대와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는가를 가늠해 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마음의 설레임이 시를 낳는다. 또 가장 아름다운 감동적인 언어로 그림같은 예술 경지를 창조하는것이 시이다. 그래서 시는 읽는다기보다 읊으며 흔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서적으로 읊고싶어지는 시보다 고심히 연구하고 해석해야 할 시들이 더 많아졌다. 우리의 시문학은 어디서부터 길을 헛갈렸는가? 지난 한시기 너무 익어 서 씹을 맛이 없는 투명한 시. 그 이미지가 걸에 발가져서 음미할 여지가 없는 직설 시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알둥말둥한 수수께끼도 시장이 없을것은 분명하다. 구호식송가시대는 지나갔다. 시의 력사는 반드시 새롭게 씌여져야 했다. 하여 80년대말기부터 《현대파시풍》이 수용되면서 시어의 형식과 풍격의 다양화방면에서 일정한 진전을 가져왔고 성과도 쌓은것은 사실이다. 시인의 대외우주의 객관적묘사를 집어던지고 내우주의 심오한 표현에 집중되는것이 시창작의 일대 풍조로 되였다. 이는 일대 진보이다. 그런데 그와중에 시가 개방된듯이 보이나 실상은 외계와 절연된 정서에 빠져있는 시작품들도 많이 나왔다. 이런 시들은 끝없이 우주의《수수께끼》를 제기하여 독자들을 소외시켜버렸다. 시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채 너무나 심대한 대가를 지불했음을 각성했을 때 결국 일종 기로에서 헤매다가 겨우 빠져 나왔는데 얼마 안지나서 다른 기로에서 방황한셈이다. 어떤 류형의 시이든 형식과 결구는 일정한 약속기제하에서의 문자조합으로 되여 야 하고 이런 조합은 어디까지나 가시도(可視度)를 전제로 감지의 공간과 공간 변화를 구성해야 한다는 창작작풍은 버리지 말아야 했다.시인은 수출자이면서도 흔상자로서 자기 감지의 표현을 되돌아와 감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류파의 시인 이든 타인의 각도에서 주관적이고 개체적인 심령심처의 은밀한것들을 정리,조절 하 여 표출시켜야 하며 독자의 상상이 미칠수 있도록 아량을 가지고 창작에 림해야 바람직하다. 기실 서방의 의상파시인들도 자기의 순간적감각에 대해 매우 엄숙한 태도를 가지고 시의 무의식속에 우연적이고 수기적(随机的)이며 은페적인 난해한것 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것을 삼가하였고 기괴한 시일지라도 독자들의 리해와 공명에 인위적장애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결약만은 준수하였다. 취미가 곧 생활론리는 아니지만 다같이 상상의 내용을 제약하고 규획하는바 모든 문학창작에서 자아초월을 기도할지라도 벗어날수 없는 약속기제이자 계약이기도 하다. 상징시, 혹은 극히 은유적인 시일지라도 교묘하게 숨겨진것이 명확한 이미지를 어떤 유익한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는것을 독자들이 심령으로 알아차릴수 있다면 그런 시적경지를 마다할 시독자는 거의 없을것이다.《시는 지력으로나 철학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로신)》 예술활동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것은 정감자체이다. 그래서 누군가 예술 가의 사인정감은 예술적정감의 대적이라고 말했다. 정감의 사인성의 배제에서 중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리성인소의 침투이다. 즉 시인은 자각적이든 비자각 적이든 순수의 개체경험의 수출과정에 상응한 정화, 공성화, 리성화 등 시화작업을 앞세워야 한다는것이다. 이에 대해 레르몬또브가 정당하게 천술했다.《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일반적인것… 인류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성격 속에는 인류가 살고있는 그만큼 일반적인것들이 들어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탄속에서 모두가 자기의 내용을 알아차리며 그의 령혼속에서 모두가 자기것을 느끼며 그속에서 시인뿐만아니라 인간—인류적인 자기를 보게 된다.》 아주 지당한바 정감의 사인성에 자족하면서 스스로를 가두고 시의 모종 진리 에로의 향도적사명을 완수하는데 손색이 있는 시들을 용납할 시장은 갈수록 좁아 질뿐이다.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훌륭한 시인은 유미주의, 신비성, 섬세성보다 자신의 심령의 대상화의 효응에서만 눈부시게 현연되였던것이다. 리백이 자기의 시고를 마을의 무식한 로파에게 읽어주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때지난 전고일지라도 대중적 시인이라면 언어의 유희에 도취되지 말고 대상의 심오한 본질을 생활적이고 예술적인, 그러면서도 현학적이 아니게 전달해야만 시의 사회적효익이 기대 될것이다. 통감의 운용도 주관화의 효과만 고유되여 있는것이 아니라 사물의 미적본질과 객관화의 효과에 더 접근하고 있다는것을 부인하지 말자. 시인이 페쇄된 자족공간을 개방하고 시예술의 공통한 공간을 제공해주어야만 진정 예술정체성에 대한 초월이 이루어진다.《감촉할수 있는 형상으로 흐리마리하고 아리숭한 곁비유를 없애라. 진실성이 미의 덩어리로 엉키고 무게있는 단단한 체질을 가지게 함으로써 시의 생명력을 과시하라(애청)》                                        5. 맺은 말   시평에서도 고기눈알을 진주라고 말하는식으로 자기 상상의 힘과 오성(悟性)으 로 시인이 그려놓은 륜곽에 리념을 보충하고 시에 담긴 뜻을 확대, 심화함으로써 재창작이 되지 않게 근신해야 한다. 그리고 평론자가 서정적인것을 지력적인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시에 력도, 심도를 부여하고있는 실례를 가끔씩 볼수 있는데 심히 삼가 할바이다.선천적으로 진실한 감정이 류실되였고 력사, 사회정신이 류실된 시, 튼튼히 발붙인 현실적정감이 결핍한 시, 대중의 희노애락과 동조하는면에서 인위적인 골짜 기를 파놓은 시는 보다 많은 독자들을 흡인할 매력이 없다.《수요가 없으면 생산이 없는것처럼 소비가 곧 수요를 산생시키는것이다.(맑스)》참으로 지혜적인 정서로 독자들의 심금을 틀어잡고 미의 경지에로 향도해야 한다. 1997년12월 20일- 2012년 12월 12일 수정
244    충동후의 랭정과 반성 댓글:  조회:8536  추천:0  2013-02-06
                                  작자설명   아래에 졸문은 20여년전에 쓴것으로서 어찌보면 묵어도 되게 오래 묵은 “된장” 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오랜 화제라해서 곧 낡은 화제라할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에도 진행형의 화제일경우에는 더구나 그렇다. 꿈은 깨였으나 정서는 그냥 남아 있다는 말처럼 새 시기문학의 충동뒤의 여파는 의연히 진행중이지만 진행 결과에 대한 단계적인 반성은 심화되지 못하고 또 20년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보통 30년(1978년부터 2008년)간의 문학을 “중국의 새 시기문학”이라 칭하는데 문학사연구에서 아주 의미로운 수자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의 시간계산이 아니 라 하나의 개수(概数) 즉 어림수라 할수 있다. 문학의 새봄을 맞아 깨여나서부터 번 영에 이르고 탐색으로부터 곤혹에 이르기까지 굽이도 많고 기구한 려정을 걸어왔다. 문학사적서사에서의 시간좌표는 부동한 자리매김 방법이 있는바 력사적단계만으 로 나누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새 시기문학은 의연히 진행중의 발전단계에 처해있 고 상대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개방성을 자체의 특점으로 하고있는데 말하자면 서방 문학 내지는 세계문학을 향하여 개방하고 새 시기문학자체의 개방성을 체현하고있다.   한마디로 새 시기문학의 개방성은 정체성특징으로 되고있으며 현대성관념과 문학 성서사도 모두 개방성특점을 가지고있다. 새 시기문학은 다각도적으로 총화할수 있으 나 일종 “속성(速成)”문학으로서 몇백년의 세월속에서 이룩된 서방의 문학성과 중국 문학의 기특한 “잡교” 의 산물이라고 개괄되고있다. 사실 30동안 “우량종”도 더러 나오긴 했지만 문학의 “잡교” 혹은 “접목”은 아직도 시험중이요 보다 주렁질 결실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이 시점에서 랭정한 반성이 다시 요청되는것이다.     새시기 30년간의 중국문학속에 우리 민족문학의 새 려정과 변화, 성과, 미흡한 점 등에 대하여 회고하고 반성함에서 무엇보다 주요하게 문학사조의 인입과 수용 자세를 선색으로 문학창작, 문학리론, 문화비평 등을 한꼬챙이에 꿰여들어야 할것 이다. 새 시기의 주요한 문학사조와 문학혁신운동을 넓은 사회문화배경속에서 빗질 하고 금을 내는것은 복잡하고 거창한 작업이다.     돌이키면 비교적 중요한 문학사조, 문학운동과 문학쟁론을 비롯하여 상처문학, 반성문학, 문학의 자주성, 몽롱시, “현대파” 쟁론, 뿌리찾기문학, 실험문학, 신사실주 의소설, 건달(痞子)문학,“인문정신”등에 대한 대토론중에서 이른바 도덕리상주의, 신생대문학, 사인화창작, 육체창작, 80후창작, 현환문학 등등에 대한 심입된 분석을 거쳐 성과를 긍정하고 오도되여 빚어진 시행착오들을 금긋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문학현상에 대한 평가에는 문학자체에 침적기가 수요되고 독자계의 열독과 평가에서도 역시 시간적“거리”와 더욱 넓은 참조시야가 수요되였기때문에 재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어경에서 졸문이 새 시기, 우리의 민문학의 충동뒤의 반 성에서 일정하게 유조한 실마리가 되지 않을가 거듭 반성해 보는바이다. 이 몇년래 중국문단에는 “문학의 타락 혹은 바야흐로 소실되는 문학”이라는 론조 가 류행되였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론조에 맹종하고있고 심지어 소수의 전업 작가들도 문학에 대한 원유의 신념이 흔들리였다. 본문은 새 시기, 30년의 문학발전 에서 전10년을 재고찰하려는 시점에서 창졸하게 집필하였던 학습체득과 나름대로의 소견이기에 오늘도 일정한 참조가치를 가진다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다.       2008년 9월 20일     충동후의 랭정과 반성       최 균 선   1   력사는 인간을 희롱하기 일쑤이다. 장장 10년, 전대미문의 황당한 문화대토벌에 쑥밭이 되여버렸던 중국의 문예계에 마침내 새봄이 도래하였다. 그러나 한시기 원기 를 회복하지 못하고 진통기에 처한 문학계에는 일종 문화기갈이 만연되였다. 바로 이 무렵, 오래동안 봉페되여 있던 문화교류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열풍마냥 서방 문화사조가 중국의 대륙에 맹렬히 충격해들어왔다. 이 특정된 력사시기에 좌적문예사조의 비리에 억압되였던 심령들이, 메마르고 뒤틀렸던 령혼들이 심사숙고와 리성사유를 거치기도전에 구미문화의 세찬 충격속에 휘말려들었다. 문학계에《변법》이 일어났다. 감응반응은 용속사회학에 대한 역반심리 를 극치에 달하게 하였으며《선각자》들을 충동의 절정에로 떠밀어올렸다. 이러한 충격파는 산해관을 넘어 연변문단도 진동시켰다. 그리하여 니체의 초인간 철학, 싸르트의 실존주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피아제의 발생인식론, 마슬로의 신인본주의, 서방 신맑스주의 등등 생경하고 유혹적인 술어들이 류행되였으며 창작계, 평론계에 현대 의식열, 방법열, 표현기교열이 비등하였다. 자아의식의 각성, 개인가치추구, 생명의의의 탐색속에 서방의식에 대한 모호, 흡인, 선망이《선각문학》의 기본정서로 되였다. 전통적사실주의문학에의 충격과 침투는 부단한 갱신의 욕망과 심화를 자극하면서 우리 민족문단에 개방주의체계를 수립할 조짐을 보였다. 특히 의식의 흐름, 비정절화, 무성격소설…등으로 인간의 고유한 잠재 의식, 몽롱의식 등 비리성성분을 파헤치거나 생활을 다시각, 다각도, 다층차, 다측면 으로 반영하려 시도한 시, 소설들이 선을 보였다. 인간의 심리상태를 립체화하려한 이런 소설들에서 과거, 현재, 미래, 환상, 현실, 몽환경이 자유련상을 교차시키면서 시공계선의 돌파도 시도되였다. 이런 표층적인 다원화의 번영에는 뿌리를 박지못한 급진적작가들의 내심의 아픔이 스며있었고 찾음 을 앞세운 배회심리와 초조가 엿보였지만 그러한 현대주의수법의 인입은 어디까지나 타방의 기성성과에 대한 선택이였고 모색을 위한 실험이였을뿐 창조는 아니였다.    새 시기,10년문학은 한마디로 일종 “속성(速成)”문학으로서 몇백년이란 오랜 세월속에서 이룩된 서방의 문학성과와 중국문학의 기특한 “잡교” 열의 산물이라고 말할수 있다. 서로 충돌하는 이런 문화인소들은 자연히 우리 민족문학의 령지에도 침투되였으나 호경기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본위문화와 외래 문화간에 어느것이 주류적문화이고 차요적문화인가라는 쟁론이 가심화되였다. 풍향이 바뀌자 문단은 랭각되였으며《랭각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랭각 되였다. 작가들은 침묵하고 문단은 사색에 잠겼다. 문학저조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가지 사정도 있겠지만 몇년래 인간실체에 대한 발굴과 자아표현열에 빠져 문학은 자체의 귀중한 가치를 매몰해버렸기때문이라고 말할수 있다. 어페일지 모르겠지만 현대주의를 새시기문학의 미래, 주류라고 확신하던 일부 문예리론가들도 어리둥절 해져 판단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자기변명 비슷이 새시기10년간의 문학을《다원화 문학》이라고 개괄하고있다. 원래 열점이 많다는것은 흥분점이 많고 사상이 활약되고 갱신의식이 강하다는 설명이 되기도 하겠으나 일면 개성의 포기, 주차의 불분명성, 자기 기점의 상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충동자체가 사상은 아니였던것이다. 정서도 문제의 반영일뿐 문제의 해결이 아니였다. 력사와 시대는 외래의것을 우상으로 맹종한 문학으로 하여금 충동후의 랭정을 회복하고 반성을 진행할것을 촉구하고있다. 묻노니, 우리에게 절박히 수요되는것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불필요한것은 무엇이였던가? 철학사고? 리론체계성? 현대의식? 세계적안광? 남은것은 민족집체무의식과 맹목성이 낳은 실락감이 아닐런지…우리의 문학은 어데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것인가?   2   한시기 대대적으로 《현대예술관념》을 수립할것을 제창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아표현》과 《개성》에 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개성을 론한 창작방법을 놓고 보면 흔히 서구라파의 현대파작품을 거울로 삼고있다. 현대주의냐? 현대파냐? 구미문학 사가들이 사용한 의미를 보면 《현대파》는 《현대주의자》로서 본세기초에 출현한 일종 신흥문학경향인바 일찍《현대주의》라는 명칭으로 류전되였다. 지금 우리 문단에서 애용하는 현대파가 19세기 프랑스상징파시가로부터 목전 구미에 류행되는 황당파, 흑색유모아, 그리고 암시적으로 말하여 사실주의창작방법이 아닌 이외의 모든것을 가리키는것이다. 그런데 불가사이한것은 현대파를 새로운 창작 방법으로, 좌표계로 추대하는 사람들이 그 창작방법은 긍정하면서도 그것의 철학 기초(사상성)는 부정하였다는것이다. 그러고보면 해석이 저마끔이라 아니할수 없다. 일찍 30년대에 중국의 문단에도 현대주의가 한시기 고창되다가 령락해버렸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다시 열을 올리였는데 결국은 자기 중복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보는 서방세계는 쌍망원경으로 본 세계이다. 리론도 작품도 모두 제2, 제3의 도경을 거친 간접리해에서만 가능했다. 현대주의작품창작에서도 그것의 외재표현형식 방법에만 매료되여 아리숭한 이미 지, 무질서한 시공간, 종잡을수 없는 의식의흐름, 신비한 상징 등을 그대로 옮겨놓음 으로써 귀족화의 상이탑을 세우려 하였다. 하여 평론계에서 돌파, 성과작이라고 할 때 독자들은《너는 너대로 칭찬하고 나는 내 재미대로 읽는다》는 비정상적인 문학현상을 낳았다. 서방현대파문학의 산생은 시대의 선진과학문화의 발전, 생활절주의 가속화 에 의하여 인간의 심리, 사유활동이 복잡화된 결과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것이 산생된 시대적배경, 상응한 문화적조건을 잘 고려했어야 했다. 어떻게 실제에 운용할것인가? 하는것은 여하히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로서 우선 그것의 가행성과 효익을 전제로 하고 그것의 정신을 배울것인가? 형식을 답습할것 인가를 확정하여야 한다. 창조의식, 신선한 감각 그리고 새로운 창작방법이 꼭 현대 주의에서 온다고 할수는 없다. 기실 전통적수법에서 의식의흐름수법이 사용되였다.   3   현대소설이라면 현대의식을 떠올리게 된다. 현대의식이란 대관절 무엇인가? 흔히 들 변혁의식, 경쟁의식, 자주의식, 반역의식, 우환의식, 항쟁의식, 지구의식, 우주의식 등등으로 조목을 나누어 그 의미를 한정하는데 무근거한것은 아니지만 고립적으로 놓고보면 역시 요령부득이다. 왜냐하면 고대중국의 굴원의 작품에도 강렬한 항쟁 의식이 침투되여 있었고 두보의 한생과 그 작품에 우환의식이 깔려있었으며 조설근 의《홍루몽》에도 반역의식이 맥맥하기때문이다. 로신의 소설, 곽말약의 시에 담긴 의식은 무엇인가! 홍명희, 최서해의 작품들에 담긴 의식은 이류에 해당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현대파》라고 부르지 않는다. 결국은 번다하고 새로운 명목일뿐 현시대의 특유의 변이를 체현한것이 아니다. 변이란 공인하다싶이 응당 의식의 주체와 대상간의 호상련계속에서 표현되여 나와야 한다. 이 주체는 곧 현대화의 물질문명건설의 서렬에 들어서기 시작한 중국 사람(조선민족)들이며 그 대상은 우리 앞에 놓인 부단한 변화속의 현실—물질세계 이다. 만약 주체와 대상중 어느 하나가 적응성이 결여된다면 현대의식의 소위 각성은 리념화, 공식화로 되고말것이다. 따라서 현대의식의 주도는 마땅히 중국인민, 나아 가서는 전인류의 근본리익과 념원을 체현하는 력사적과정으로서 합법칙적이고도 규률적인 발전법칙이 있는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우리 민족의 현대의식을 담은 현대문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방현대문학과 엄연히 질적으로 다를수밖에 없다. 설사 비슷한 점이 있게 되더라도 근근히 표면적일것이다. 우리도 초월이 갈구되여야 한다. 그렇더라도 중국 대지와 서방세계의 부동한 인문환경 및 문화배경, 부동한 예술정신 등등에서 기인 되는 창작상의 기본차이를 무시하지 못할것이다. 현대주의가 현대주의로 되는것은 단순히 표현방법, 창작기법, 형식에서 결정되 는게 아니라 인민의 생활과 의식실태, 문화관념에 의존한다. 일종의 문예사상이 일정 한 시대, 일정한 국토내에서 주류로 되느냐 마느냐는 문예사조 자신의 념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환경의 제약성에서 좌우지된다. 우리의 문학은 아직도 생활을 진실하게 인식하고 진실하게 현실을 재조하는 사명을 거부할 리유가 없는바 력사적사명감에 상응한 창작사상, 창작심리, 창작방법 만이 문학을 구할수 있다. 황당한 현실은 존재하지만 황당한 창작사유란 있을수 없다. 인간학으로서의 문학이 생활에 대한 그 어떤 주관의식의 리념화에서가 아니라 생활 자체에 대한 진실한 파악을 하고 핍진하게 표현한다면 그 속에 작가의 개성이 있게 될것이며 민족문학도 흥기할것이다. 즉 현대의식으로 생활의 본질을 파악하고 시대 상을 부각할때야만이 우리의 문학이 스스로 현대주의문학이 될수 있다는것이다.   4   선택은 일종의 자유이다. 동시에 일종의 한정이기도 하다. 발전적안광으로 본다면 곤혹과 방황은 새로운 선택의 시작을 의미한다. 새로운 선택의 기점은 우리의 문학을 새로운 실천령역에로 떠밀어줄것이다. 반역의 시대인《5.4》시기에 중국문학은 서구라파의 비판적사실주의를 받아들였고 건국후에는 쏘련의 사회주의사실주의를 도입하여 중국문학의 발전을 도모했다. 현재 우리 민족문학의 참조계는 어디에 있는가? 문학의 현대화는 시대발전의 필연적 추세이다. 하지만《현대파》로서는 우리 문학의 상록수를 무성하게 할수 없다는것이 실천에서 증명되였다. 사실은 언제나 웅변보다 나은법이다. 표현방식이 좀 괴이하다 해서 현대적인것일수 없다. 가령 형식, 표현기교와 수법에서 서방화하는것이 곧 현대 화라면 그 특징은 마치 형식에만 고유한것으로 착각되고 오도되기 십상이다. 이 몇년래 서방현대주의문예사상의 충격과 문단에 나타난 문학현상을 두고 사실 주의가 더는 나갈데 없게 되였고 전통적사실주의의 전형리론과 창작방법은 사명을 다하였다는 경향이 성했는데 결론이 너무 급급했던것 같다. 고리끼가 말했듯이 문학 은 개인의 일이 아니다. 현재 진정 《현대파》를 알고 읽고 즐겨읽으며 공명하는 독자 가 얼마나 될가! 물론 오늘에 이르러 흰 안료와 검은 안료만으로 그림을 그려서는 안된다는것을 우리 모두 알고있다. 그러나 현대파를 찬양하든 반대하든 표현, 형식면에 립각하여 혁신이냐? 돌파냐? 하지 말아야 한다. 서방현대파문학은 일련의 우점과 함께 자기의 치명적인 약점도 실천에서 드러내였다. 반리성주의라든가 문학의 사상의의와 미학 가치를 도외시하고 실락감, 불재감에 빠진 원시적성욕, 광란적심리표현 등은 사회 경향성과 심미심리와는 근저로부터 탈절된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자률의식과 지구적 타률의식의 반복적인 충격파가 다원적이고 아롱진 문학세계를 펼치는 필연적추세에 직면하여 인민작가로 서의 자세를 바로잡고 사상의 견실성, 명랑성을 확보하는것은 매개 작가들앞에 놓인 새로운 과제이다.   5   목전 우리 문학이 새로운 진통기에 처해있다는것은 자타가 공인하는바이다. 따라 서 작가군의 위기감도 자족한 서방현대파작가들의 고독과 허무한 자아실락감에서 나온 그런 위기감과는 질적으로 다른것이다. 당면 우리의 문학이 직면한 준엄한 문제 는 순수성의 추구, 자아표현의 부자유, 형식과 기교의 파악미달에 있는것이 아니며 문학위기는 한시기 광범위한 접촉면을 개척, 확보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존공간을 축소시킨데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 10년문학을 반성할 때 우선 전통문학이 현대문학에로 전화하는 내재적기재를 찾지 못하였고 서방예술경험을 자신의 창작경험으로 융화시킬《촉매제》를 마련하지 못하였음을 자인해야 한다. 자유의 문학은 자기를 잃는 망연자실의 문학이 아니며 무가치한 자아표출의 문학이 아니며 더구나 신조류모방문학이 아니다. 우리 민족문학의 혁신과 발전도상의 장애가 사실주의창작방법에 있다고 모자를 씌우는것은 편파적이며 불가사의한 론리다. 아직 우린 방법상 사실주의를 충분히 창조리용하지 못했을뿐이다. 생활에 대한 진실한 묘사는 문학창작의 필수조건이며 법칙이기도 하다. 작가가 만약 이 법칙의 요구를 기피한다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수 없다. 고골리나 똘스또이같은 대가들마저 자신의 허위적신념에만 의거하고 생활에 대한 진실한 묘사를 거부했을 때 빈약한 형상을 창조했던 사실이 기록되여 있다. 예술창작의 시각을 인간의 일반 리념으로부터 인간의 심층의식에로 심입시킬 필 요성은 의심할바 없다. 혹자는 인간의 성격과 내심세계의 심미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다각도적인 투시 등이 현대주의수법에서만 가능하다고 고집할수 있는데 그것은 무리 다. 주지하는바 사실주의는 문학의 복잡다단한 발전과정에 구체적으로 형성된 력사 산물로서 발전하는 자기의 속성을 상실한것이다. 우리의 작가들은 사실주의를 문자 그대로 잘만 리용한다면 다양하고 유익하고 가능한 모든 수법들을 무한히 발견, 리용할수 있다는것을 확신해야 한다. 사실주의 문학의 정수는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섭취리용할것을 기다리고있다.“위현대파”는 우리 여기서는 부평초의 운명을 면할수 없다고 단언하고싶다.   1991년 3월  
243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댓글:  조회:9210  추천:0  2013-02-05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최 균 선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왜 배고픈 고생하며 살아야 했을가? 아무런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가 제자였던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글을 내놓아서야 후세에 위대한 철학자로 세상에 알려지였다. 그대신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자기의 철학사상의 현답을 전하고 지적해주어 존경을 받았으니. 당시 집권자들에게 눈에 가시로 되여 추방과 죽음사이에 놓이게 된것은 세인들이 아는 사실이다.     크세노폰의 《좌담회》라는 책에 의하면 소크라테스가 활발하고 술을 좋아했을뿐 아니라 녀색을 좋아했고 녀자들도 적절한 교육만 받으면 체력적인 면을 빼고는 남자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녀성옹호론자였다. 그런데 운명의 안배였던가? 그의 안해 크산티베는 공자의 처, 잔 웨슬리의 처와 함께 세계 3대악처로 락인찍혀있다. 공자가 성인이 되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가 된것은 악처와 살았기때문이였을가? 물론 위대한 남편들은 가장으로서는 거의 미달이였을게다.     소크라테스가 살림도 돌보지 않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지껄이는것에 크산티베가 늘 불만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은 경제에 무능력한 남편에게 가혹한 욕을 퍼부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더구나 화나서 밖에서 물통을 들고와 그의 머리위에다 쏟아부었다. 그 장면이 오늘까지 명화로 남아있다.     소크라테스는 화도 내지 않고 "허허, 천둥이 치더니 드디어 소나기가 쏟아지는군"라고 말했다던가, 사람들은 이 위대한 학자가 하필이면 그런 악처에게 시달리며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고 수군거렸다. 마침내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하필 그렇게 악한 녀자를 부인으로 데리고 사십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한 기수는 가장 성질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라오. 그런 말을 잘 훈련시켜서 탈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말이라도 다 잘 탈수가 있기때문이오. 나역시 성질나쁜 아내를 잘 달랠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잘 달랠수 있을것이 아니겠소."    참으로 대철학자 소크라테스만 할수 있는 명창이였다. 현대의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무능하여 한 가정을 운영하지 못하는 남편에게는 성모마리아도 배겨내지 못할것이라고 리해를 달려볼수도 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즉흥적이였지만 또 아이러니컬하다고 해야 하겠다.    "선생님, 결혼은 해야 옳은것입니까? 안해야 옳은것입니까?소크라테스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결혼하시오. 좋은 안해를 얻으면 행복할것이고 나쁜 안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터이니…" 이역시 우문에 현답이라 하겠다.     죤 슈트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이기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가 되라고 했다. 경제동물로 살기보다는 생각하는 사람, 인생을 보람있게 가꾸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일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의 본질적차이는 무엇일가? 그것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나는 왜 배고픈가?”하고 자문하며 고민하는데에 있을가?” 아니, 고민하는것을 잊는 순간, 현실에 배가 부른 순간 우리는 돼지가 되여버리는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그 다음은 무뇌충이 되여 오로지 생물학적, 육체적만족에만 빠져 정신적, 지적, 령적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상태에 자족할것이고…     우리는 왜 힘들어도 그냥 살아갈가? 인간은 생각할줄 아는 동물이기에 위대한 존재요, 보다 보람찰 인생, 결과적으로 보다 살기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령장동물이다. 현대 지성인이라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살면서 생각하는 사람이여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성찰없는 생활은 살 가치가 없다”고 가르치였다.    한 사람이 만약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파산선고라고 하지 않는가? 비록 사회구조가 인간을 생각하는 로보트로 만들고 있지만 스스로 “배부름”에 자족하며 향락을 추구하고있다. 물론 인간은 너무 배고파도고통스럽다. 반대로 너무 배불러도 개운하지 못할것이다. 절충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배부른 돼지만으로도 살수 없거니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로만으로도 살수 없는데는…     만약 누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겠는가? 배부른 돼지로 살겠는가?”하는 우문을 던진다면 “허, 이왕이면 배부른 소크라테스로 사는게 리상적이지 않을가요?”하고 반문할수 있다. 이는 재치있는 유모아이다. 그러나 사색할라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대명사이고 철학은 본질의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는것이며 배고플만큼 생활이 곤궁한것은 찾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갈망과 깨달음에 대한 열정과 목마름이라고 생각하면 괴리일가?     소크라테스에게는 비고픈 삶 그자체가 삶의 의미이고 인생교실이며 분발의 동력이기에 보다 배부름에로의 지양만이 아닌 체험과 깨달음으로서 인간, 인생, 사회에의 탐구가 더 극성스러워지고 학문적으로 더 접근하게 된것이 아니겠는가, 배부른 돼지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나 삶의 의미 등 안개같이 몽롱한것보다는 생활의 편리와 자족의 틀을 마스고 성공을 추구하는 보람있는 삶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겠는가?     먹고 잘줄밖에 모르는 돼지라는 일차적인 본능에 매달리는 대명사로 대조시켰지만 어쩌면 배부른 돼지라기보다 배가 부르기기만 바라는 돼지라고 해야 사개맞을듯싶고 그들은 소크라테스만큼 나름대로의 고민과 사고와 갈등이 있을법도 하다고 생각 해주어야 객관적일것이다. 같은 생명들로서 량자의 차이를 찾아낸다면 본능을 전제로 하되 고민하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지적인 인간으로서 목적달성의 차이가 있을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철학의 명제만이 아니다.     인간은 소망ㅡ리상이라는 차표를 지니고 욕망이라는 대형렬차에 올라 자족의 중간역도 지나쳐 가고 또 가다보면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이르고만다. 생명은 모두 존재의 안전감과 생명력의 충족을 갈구하며 인간은 가외로 행복감이라는 감각적추구 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냐? 배부른 돼지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삶의 질적인 향상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 선택, 양상의 문제가 되는게다.     인간사회의 실속을 뒤집어보면 도처에 선택의 기회마저 상실당한 수많은 “소크라테스”들과 먹어도 먹어도 불평, 불만족을 꿀꿀거리는 배부른 “돼지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주소이다. “소크라테스”들의 삶의 철학이 무시당하고 제약받을수록 세상은 더욱 불공평해지고 잡음이 그치지 아니하고 패륜, 범죄가 기승부린다. 고급주택도 수십백채씩 챙기고 돈도 수백천만원을 후무리고 떵떵거리는 사람들은 잠시는 행복의 외투를 입고 강자의 행세를 하지만 결과는 거개 돼지처럼 “우리”속에 갇힌다. 그러구 보면 지능적으로 매우 차한 “배부른 돼지들”이라는것이 실증된다.     어느 시대, 어떤 나라에든 배고픈 소크라테스들이 더 많고 소수의 “배부른 돼지” 들을 부러워하며 살게 되여있다. 사회분위기와 제도의 결구, 특히 욕망의 늪에서 딩구는 “돼지”들에 의해 포식과 기아의 갈등이 더 날카로워지고있다. 배부른 돼지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수도 없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배고파보지 못한 이상 절실하게 체험할수 없고 터득할수도 없기때문이다.    물론 마냥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는 “소크라테스”로 살수는 없지만 모두가 껄껄거리며 트림하는 배부른 “돼지”로 될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배부르기에만 목숨을 걸지 말고 지성적인 인간의 삶과 사회가치에 대해 심사숙고해봐야 할것이다. 다함께 배불러서 무랍없이 마주웃으며 살수 있는 사회라야 조화로운 사회라 할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무어냐?”하고 물을 때 “나는 그냥 배고픈 돼지이지”라고 대답할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역시 서글프고 안쓰럽고 명랑하지 못할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금덩이의 노예로 살다가 금덩이에 죽음당하는 그런 인생도 욕심내지 않는다.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프랑스에 금을 모으는것만을 생의 보람으로 느끼며 사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모을줄만 알았지 값있게 사용할줄은 몰랐다. 어느 날 그 사람이 행방불명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나섰으나 찾을길이 없었다. 나중에 수사기관에서 급기야 금고를 마스고보니 금고안에 갇혀 죽어있었다…     아무튼 본질의 대상이 생명 즉 삶의 양태이고 삶과 직결된 전제라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된다는것은 배가 고파보아야 인생의 진의미를 사색하게 되고 분발하여 배를 불리려는 의욕이 생기게 된다는 철리를 말한다. 배부르게 먹으며 산다는것은 인간의 원초적욕망이고 최저의 행복임은 사실이지만 육체가 형성되고 유지되는것은 군살이 아니라 굵고 강단있는 골격이다. 어느 나라국민의 인생자세도 마찬가지이다.     배부른것으로 문명의 척도를 재일양이면 그는 분명 배불리고 백주에 쿨쿨거리는 돼지에 다름이 아니니 배부르면 능사이고 만사대길인것도 아니다. 사람에게 귀중한것은 인간존엄이다. 돼지에겐 존엄이란게 없다. 만포식후이면 자연좇아 식곤증이 방문하고 자족이 베개를 베워주며 권태가 잠꼬대를 하기십상이다. 배고픈 사람들이 우선 먹거리를 찾는것은 사실이나 두뇌는 더 활약적이고 랭철할것이다.    좀 탈절된 얘기지만 특정된 한 국가에서 우주개발의 첨단기술을 만방에 현시하였을 때 동족으로서 “흥, 세끼 때마다 죽물도 제대로 못먹는 주제에 과학기술은 무얼, 우주쓰레기나 보태는걸”하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 말속에 사촌이 기와집 지으니 배를 앓는 증세를 배제할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행위는 무엇인지 생각할 지능도 상실하고 망발하기때문이다. 사유방식이 그정도밖에 안된다면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내핵이 무엇인지 죽었다 살아나도 모를것이다.                             2013년 2월 2 일
242    좀 말려주쇼 댓글:  조회:8675  추천:2  2013-02-05
                                                   속담에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랬는데 아이때는 심술통이 비틀어진 큰애들이 재미삼아 제아래 애들을 충동질해서 싸움을 붙일때가 종종 있었더랬다. “너 저애를 이길만하니? 저애가 널 이긴다카더라. 뒤에서 네흉을 보더라, 그래도 너 가만있으면 머저리지, 한번 붙어보라…” 하는식으로 싸움을 붙여놓고는 구경하다가 정작 저들이 두둔하는 애가 질듯싶으면 몸소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나도 원치않게 그런 싸움에 몇번 걸려들어 이기기도 했고 얻어맞기도 했더랬다. 그때는 그저 “편들다, 추긴다”고 말하였지 “선동”이니 “종용”이니 하는 고급문자는 쓸줄 몰랐다. 썩 후에 어떤 일을 하도록 다른 사람을 부추기거나 들쑤셔대는 짓을 선동이라 하고 남을 부추겨 어떤 사상을 갖게 하거나 행동을 하도록 조장하는 성질을 선동성이라 한다는것을 알았다, 농촌에서는 “충둥질”이라고 발음했다.“붉은 선동원” 이라는 조선영화가 있듯이 우리 말에서 “선동” 은 나쁜 의미로 쓰이지 않지만 한어에 서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선동(煽动)은 바로 종용(怂恿)을 가리키는데 나쁜일을 하도록 시킨다(鼓动人做坏事)는 의미라고 해석하고있다. 고대희랍신화에 묘사된 펠로폰네수스전쟁기간 아시피 드 (亚西比德)가 용맹하기는 하지만 무모하고 허영심이 많은 아테네인들을 리용하기 위해 아테네의회에서 씨실리도를 쉽게 점령할수 있거니와 승리하면 관리로 임명하겠다고 약사발먹이면서 비위를 간질러대여 자기의 음흉한 궤계를 체현시켰다.     의미가 조금  다르긴 해도 로신선생의《고사신편》에《하늘을 깁다》에도“녀와씨는 홀연 잠에서 깨여났다.…다만 무엇인가 모자라는것 같기도 하고 또 무엇인가 너무 많은것 같기도 하여 심한 오뇌를 느꼈다. 산들바람은 따스하게 그의 기력을 휘몰아 온누리에 꽉 차게 하였다.”“煽动的和风,暖暾的将伊(她)的气力吹得弥漫在宇宙里”는 구절에(煽动)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성에서 선동질은 고대인들로부터 언녕 터득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되겠다.     자고로 성행되여 내려온 녀자들의 베개머리 송사(枕头风)도 기실은 “선동”혹은 “충동질”의 변종이다. 춘추전국시기 진나라(秦国)의 변설가 장의(张仪)는 정수(南后-郑袖)의 베개머리 송사를 리용하여 초회왕을 자기의 련횡계(连横计)에 끌어들여 초나라를 멸했다. 초나를 멸망시킨것은 “필연성”일세 “베개머리송사”의 “우연성”의 작용도 한몫 한것이다. 굴원도《리소((离骚)》에서 이를 통탄하여 읊은바있다. 고금에 나라대사를 망쳐버린 베개머리송사는 부지기수이다.     걸주를 오도한 상나라왕의 귀비 단기의 베개머리송사도 유명하고 진회가 악비를 모살하게 된것도 베개머리송사ㅡ침대우의 선동을 악용한 덕분이라 할것이다. 이처럼 “선동력”이란 력사가 달리 쓰이게도 한다. “베개머리송사”는 중성적(中性词)단어로서 현대중국에서 베개머리 송사에 솜씨가 뛰여난 녀자로는 강청을 첫손으로 꼽아야 할것이다. 그녀의 베개머리송사로 10년 대동란의 괴풍이 더 혹독하게 불어치게 되였고 본래 시작부터 잘못된것을 멋대로 오도하면서 피바람이 더욱 기승부리게 하였다.     유취만년의 악명높은 히틀러도 게르만족의 민족우월론과 자고자대심리를 꼬드기고 유태인들이 국가경제를 파탄낸다는 음모론으로 독일의 나치스당의 두목으로 올라앉은후 언론, 자신의 개인매력과 삼촌불란지설 (三寸不烂之舌)로 공포통치를 확대, 강화한후 마침내 독일을 전쟁의 진구렁텅이에 몰아갔고 인류사상 최대의 살륙극이 벌어지게 하였다. 이렇듯 “선동력”이 나쁜일에 리용될 때는 악과를 낳는다.   “선동”도 복합어로서 선동고동이 선동질이 되면 흑백이 전도되는바 무릇 선동질의 저의는 움푹하고 야비하고 악착해진다. 그리고 더없이 비속하다. 생물학적관점에서 본다면 도발이고 물리학관점에서 해석하면 사정을 악화시키는 짓거리 (煽情属于升华) 이고 화학적관점에서 투시하면 붙는 불에 키질하는 작동(煽情属于加热)이 된다.     2천여년전 공자는 자기가 하지 못할 일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연변의 농촌에서는 제가 춤추고 싶으니 시누이를 권한다는 말을 잘 썼는데 속담집에 오른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시 어떤 저의를 가지고 남을 충동질하는 짓거리를 비꼬고 타매하는 뜻이다. 선동성, 충동질은 인간성의 근저에 뿌리박고 있는듯싶다.     손자놈이 네댓살때까지는 제할미에게 꾸지람 받고는 이 할아버지더러 큰소리로 욕하지 않으면 때려놓으라고“충둥질”하기 일쑤였다. 성화에 못이겨 집행하는것처럼 하면 진짜가 아니라고 기어이 가해를 “입혀”야 만족하였다. 모종 시점에서 국제유희에도 철부지의 생떼질같은 작태들이 보인다. 또래끼리 쌈박질하고 얻어터지면 힘센 애들에게 달려가 “저 새끼 좀 말려주쇼”하고 선동, 충동질하듯이 말이다.     이런 선동-충동질이 국제유희에 규칙인지? 그만큼 당전 지구촌은 확실히 저저의 리기적인 충동질로 시끌벅쩍한다. 현시대에 “선동, 종용”의 “속물적달인”으로는 아마 미씨들을 으뜸꼴로 잡아야 할것이다. 미씨들의 국제유희 잠규칙은 제게 굴종하지 않는 나라는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주위를 선동, 종용하여 편짜기를 이루니말이다. 하여 도처에서 추종자들을 선동,종용해서 일컬어 민주화, 새질서수립, 재건의 명분을 내걸고 구세군인양 남의 가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무고한 백성들을 도탄속에 빠뜨리기를 기탄없이 거듭하고있다.     개체적으로는 리성사유가 명철하고 자주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남의 선동에 잘 넘어가지 않으며 더구나 종용하는대로 놀아주지 않는다. 국제유희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네 패권주의와 강경하게 맞서는 특정국가에 대해서 속수무책일 경우에는 그냥  “누구”는 더 큰 작용을 발휘여야 한다고 선동하고 돌아다닌다. 본성적기량인 충동질이다. 그래서 “음ㅡ”하면 “오냐!”했다는식으로 확대해석하며 김치국부터 마신다.     세상에는 어떠한 일에도 지망자가 있는 법, 국제헌병의 눈치아래 쩔쩔 맴도는 사대주의자들만이 양씨의 충동질에 북치고 장구치며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지만 국격을 가진 나라들은 그네들의 풍에 놀아댈 리유가 없다. 그래서 충동질이 잘 먹히지 않을라치면 “좀 말려달랑께…”하며 드러내놓고 안달복달한다. 안하무인으로 독단독행하던 미씨네도 같이 고개짓하자고 선동한다. 물론 오리는 오리무리를 따르고 돼지는 돼지를 고와하는 판이니 류류상종하겠지만 공조한다 해도 결국 동상이몽, 아전인수이다.     선동질 잘하는 양키씨들은 그에 동조하면 자기의 음모를 달성하고 동조한 국가의 국격을 우롱하는것으로도 되기에 일석이조를 꾀한다. 제가 춤추고 싶어서 시누이를 권하는 그런 얄팍한 심리를 투시하지 못할 세인들이 없듯이 춤추는데 엉덩이를 따로 흔들어줄 멍청이는 많지 않을줄로 안다. 맹종, 굴종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2013년 2월 2 일  
241    자아,자아감각, 자화자찬 댓글:  조회:8213  추천:1  2013-02-05
                                    자아,자아감각, 자화자찬                                                    최 균 선       자아란 생각, 감정 등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말한다. 심리학에서는 심신은 늘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론술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같은 자신으로 생각하고 타인과 구별한다. 이 동일하다고 의식한 자기를 자아라고 한다. 철학에서는 우리 일상의 모든 경험(감각, 사고, 행동 등)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경험을 통일하여 그것을 바로 그 당사자라고 생각되는 의심할수 없는 자신을 말한다. 칸트는 본능, 욕망에 의해 살고있는 경험적인 자아이외에 도덕적으로 살려는 자신 (량심)을 신적(神的)인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여 “본래적인 자기”라고 명명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있다. 그것을 아견(我见)이라 한다. 자아가 항상 영원하고 독립적이며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로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경험, 즉 앎은 본질적으로 인식의 주체와 대상의 접촉을 통해서 발생하기때문에 인식 의 대상이라고 하는 조건이 바뀌면 인식의 주체 또한 변화한다.      한어에서 자애(自爱)를 우리 말에서는 아애(我爱)라고 한다. 아애란 자아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이고 자아에 대한 집착된 사랑이다. 앎, 경험속에는 항상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함께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식대상은 완전히 망각하고 오직 인식주체 만 내세우면서 그것을 자아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쌍방적인 태도보다는 일방적 태도가 강하게 작용할수밖에 없게 된다.     자아에 몰각하고 자아의 평가가, 객관성을 잃게 되면 교만심리가 생기는데 그것을 아만(我慢)이라 한다.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여 항상 비교하고 우월감을 가지려 하는데 실질은 렬등감(류행어로 콤플렉스?)때문이다. 인식주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 대상이 필수적이다. 즉 자아감각 또는 자아의 존재감을 체감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식대상에 의존해야 한다는 해석이 되겠다.     부당한 공격이나 오해를 받을 때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사람나름이다. 그 다른 정도는 자아의 생명력에 달려있다. 자아의 생명이 강할수록 비판이나 공격을 견디지 못하며 아이러니컬하게 그 생명이 약할수록 그다지 상처나 충격을 받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가볍게 판단하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에게 오는 작은 비난이나 오해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사소한 오해도 아주 힘들어하며 요란한 변호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분노하고 상처를 받거나 지독한 자기련민에 빠진다. 이러한 양상은 자아의 생명이 강할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공통의 증상이다.     이상의 서술은 심리학을 재독한 심득필기로서 내가 말하고저 하는 내용의 전제로 삼는바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에는 남에게 업혀 종점에 이르고도 으쓱거리는 밉상들이 많다. 남들이 업은 사람이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끝까지 달린 결과 라는것을 빤히 보고있는데도 업어준 사람은 배제하고 어찌어찌 하였노라고 동네방네 자기를 고아대며 멀지 않은 장래에는 어떻게 질풍같이 달릴 작정이라고…     어찌하여 차지한 위치덕분에 합저(合著)에 이름이 오르게 되였으면서도 마치 자기가 주도한듯이, 혹은 합저자는 슬쩍 지워버리고 어느 부분이 어떻고 어찌하다고 젠체하다가 남들이 부족점을 지적할라치면 그부분은 내탓이 아니라 합작한 사람의 수준미달이라며 낯한번 붉히지 않는 그런 사람을 더러 보았고 지금도 보이고있다. 성과는 내것이요 결함은 네것이라는 그런 구차한 자랑은 자기 허점의 반증이다.     남의 기술덕에, 그것도 거액을 들이밀고 실속있는 기술이전도 받지 못하고서도 혼자 부르고 쓰며 만천하에 잔치분위기를 띄우려하며 실속없는 자화자찬을 하고있지만 객관에서는 체감상 아무것도 느끼는것이 없다. 얼마나 맹랑한 일인가! 흔히 자화 자찬에 목마르는줄 모르는 사람은 호들갑을 잘떠는 경박한 사람들이다. 연변농촌에서는 이런 현상이나 사람을 두고 “고재(고자) ×자랑한다”고 면박을 주었더랬다.      각설하고, 자아의 생명은 선명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그 감각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것이다. 불안감, 념려, 초조함, 두려움, 자기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분노, 미움, 오판 등 그 모든것들이 자아의 감각에서 시작되는것이다. 이런 자아감각, 특히 스스로 확장한 자아감각은 모든 재앙의 시작이요 모든 불행의 시작이며 심리적인 자승자박이 된다. 그 감각이 자아의 생명으로부터 나오기때문에 자아의 생명이 충만한 사람은 온 세상이 그의 비위를 맞추어주고 높여주어도 잠시만 뜰수 있을뿐 결코 진정한 자호감이나 자긍과 자족의 무게는 제것일수 없다.     자아감각상 아무리 분식하고 과장해도 행복하지 않을것이요 아무리 자아가치를 과장해도 마음의 천평은 평형을 잡지 못하며 아무리 남을 깎아내려도 결코 실감되지 않을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불만족, 자괴감은 제보다 훨씬 더 훌륭한 대방에 인하여 온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에 대한 편견, 편중, 편차에서 오는것인줄 모르기때문이다.     자신이 깎아내린 대방이 잠시 오해받을 때 일시 자호감을 느낄수 있을지 모르나 그러한 자아감각은 자아를 더욱 더 그릇판단하게 할뿐이며 그렇게 외곡된 자아는 더 극심한 렬등감을 느끼게 할뿐이다. 자아의 생명, 자아감각은 문자그대로 인격심리상 장애를 가심화시킨다. 인격(국격)존엄은 결코 허영심이나 자고자대에서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높아진 자아의 생명의 실질에서 온다. 경쟁심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 대방에 대한 폄훼…그 모든것이 편향적인 자아감각에서 생성되니 가긍할뿐이다.    진실한 자아는 자기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진실한 인격력량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에서 현연된다. 자아감각의 과장은 오히려 자아의 생명을 병들게 만들뿐, 비록 제노라 하지만도 자아풍자를 의미한다. 과대망상으로는 결코 자기의 심혼을 결코 만족시킬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아를 부각하기 위하여, 자아감각상 진실된 생명력과 진실한 실체를 보여주기 위하여 타자의 장점으로 자기의 단점을 메우는 길밖에 없다. 허심하면 진보하고 교오하면 락후한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늘 자신을 낮추며 자신의 부족점을 계속 시인하라. 헛된 분식을 거절하며 허접한 영광을 거절하며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오라. 낮음을 승인할수록, 미부족을 자인할수록 당신은 당신의 깊은 속에서 형성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의 진실된 모습 으로 세상과 떳떳이 마주할수 있을것이다. 극대화된 자아를 부정하시라. 자아감각의 편중을 직시하라. 다른 사람의 성과를 허심하게 긍정하라. 편협한 자아감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진실하게 되는것은 자기를 찾는 유일한 정도이고 지름길이다.     리기적인 만족을 위해서 억지감각으로라도 자아위안하며 자아의 력량을 분식하여 과시하면서 자아를 높이려는 흰둥이들은 국제적인 웃음을 살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불안에서 활개치는 용부처럼 그렇듯 유치한 자아감각의 울타리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화자찬에 침이 마르는줄도 모른다. 분장된 자아감각, 그 허무한 자화자찬이 요란할수록 자신의 깊은 안에서는 자괴감이 부글거리고 있을것이다. 력사의 강은 도도히 흐르며 남이 나를 초월할수 있다는것은 객관규률이다. 현실감을 가지고 자화 자찬을 접어야 명지할것이다. 개체생명의 활동에서도, 국가적차원에서도…                                              2013년 2월 4일    
240    랑비는 범죄이다 댓글:  조회:8057  추천:0  2013-02-04
                                           랑비는 범죄이다                                                 최 균 선       랑비는 최대의 범죄라는 말은 낡은 화제이면서도 인류사회의 항구한 주제이기도 하다. 범세계적으로 물질문명이 비할바없이 발전한 현시대, 전세계적으로 랑비현상이 엄중하다는 신문보도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근일 인터넷망에 상해, 광주 등의 술 집들에서 떠벌려랑비하는 사진들이 나돌면서 여론이 끓고있다.     술과 물을 포함하지 않고 한상에 5천ㅡ6천원씩하는 연회상을 차린 연회가 끝나자 거의 다치지도 않은게, 통닭, 물고기가 고스란히 구정물통에 들어갔다. 이런 장면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것은 감숙성에 있는 한 로인의 사진이다. 그의 독백에 의하 면 일년가야 고기반찬이 있는 밥을 열끼를 넘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피로된 수자통계에 의하면 중국에서 매년 랑비해버리는 식물총량이 량식으로 계산할 때 500억키로그람이라고 하는데 전국 량식총생산량으 1/10에 접근한다고 한다. 보수적인 추산에 의하더라도 매년 2억명이 일년먹을 음식 혹은 량식을 내버린다고하니 경악할 일이 아닌가?     중국농업대학의 전문가의 연구과제조에서 대,중,소 도시들에서 도합 2700석의 부동한 차원의 식탁에서 남아서 버린 음식속에 단백질, 지방질에 대해 계통적으로 분석하였는데 보수적인 추산만도 중국에서 2007년부터 2008년 사이에 음식물랑비에서 만도 단백질이 800만돈이나 되는데 2.6억명이 일년의 음식수요에 해당하며 랑비한 지방질이 300만돈인데 1.3억명의 일년간 수요량에 해당한다고 피력했다.     어찌 경악하지 않을수 있으랴, 중국에서 기아문제가 기본상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도 수천만 사람들이 배부르고 따스하게 생활하는 표준선 아래에 처해있고 아직도 10%의 사람들이 영양불량의 상태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더구나 18억무 의 경작지가 붉은선에 이른 상황에서, 성시화와“누가 농사를 지을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립하고있는 준엄한 형세하에서 그냥 먹는것으로 신분을 과시할것인가?     북경대학 사회과학계의 부교수 장강은 잔뜩 차려놓고 떠벌려 랑비하며 먹어대는 방식은 이미 중국사람들이 체면을 내세우는 으뜸가는 방식으로 되였다고 꼬집었다. 사실 와자자하게 연회를 차리는것이 일종의 사회적표달방식이 된것이다. 다먹지도 못하면서도 가득차려놓고 남아서 버리는 연회가 지금까지 풍조로 되는 근원은 한마디로 내주머니에서 나가지 않고 공금이기때문이다.     10전이 남는 장사라도 하는 중국사람들의 전통의식과 소비의식으로는 담배한가 치도 그저 꺾어버릴 그런 심리소질이 아니다. 공금으로 떠벌려 먹고마시는 풍조는 세기말적 풍조이다. 연회를 차려 체면을 세우려는 관념은 한참이나 낡았다. 배고프던 시대가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짐에 따라 많이먹으라고 권하던 시대도 한물지났다. 먹는일이“생존형”으로부터 “발전형”으로 진화되여 술이 없으면 식사자리가 만들어지지않고 연회상이 없으면 호걸스럽게 마실수 없는 상황이니 지금 한다하는 사람들로서 먹지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어디있겠는가?     옛날에는 술한잔 생긴다니 십리길도 뛰여간 사람들이 있었지만 민초들중에서도 웬간한 생활수준의 사람들은 건강음식, 영양음식을 추구하는 리념이 서있다. 배고프던 그 시대, 미식추구는 인간의 본성으로서 당연지사였지만 농촌에서마저 너무 걸탐하면(사투리로 게함쓰는)사람을 보고 굶어죽은 귀신이 붙었는가고 힐난하였다.     농촌에서는 먹은죄 종지굽이라는 말을 잘 썼는데 정규적속담인지는 모르겠으나 먹은죄는 죄가 아니라는 뜻이겠다. 그러나 지금 먹는일이 죄가 될수 있다. 특히 민초들의 피땀으로 축적된 공금으로 랑비하는것은 뛸데없는 범죄이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서“식위천”이던 중국사람들의 관념속에 리성적생활방식이 주류로 되였다. 이것은 미식가의 문제가 아니라 관념문제이고 사상경계의 문제이다. 아껴먹고 아껴쓰는것은 중국사람들의 오랜 전통미덕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돈지갑이 불룩해지게 되니 국민들의 소비관념이 기형적으로 팽창하여 마침내 “혀끝랑비”의 수준에 도달한것이다. 그런데 떠벌려 랑비하는것은 가히 중국식음식문화에서 가경을 이루었다고 말해도 어페는 아닐것이다.     금년 1月25日,중국의 유명한 벼전문가 원륭평(袁隆平)은 정부에 랑비를 범죄행위로 다루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는“랑비는 수치스러운 행위로서 범죄행위로서 범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대성질호하였다.중국의 유일한 풍경은 아니다. 지금 범세계적으로도 음식랑비ㅡ최대의 죄행이 만연되고있다. 어느 신문보도에 의하면 중동 오만의 음식물쓰레기 배출이 심각한 수준인것으로 나타났다. 현지 술탄 카부스대학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오만에서는 1가구가 월평균 70 오만리알(약 21만 원) 상당의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하는것으로 파악됐다.     1가구의 월평균 음식소비량이 월평균 205 오만리알(약 62만원) 상당인 점을 감안하면 음식물 쓰레기가 소비량의1/3을 넘는 셈이라고 중동 현지 일간지 걸프뉴스가 25일 보도했다. 년령별로는 1∼5세 어린이가 음식의 57%를, 6∼18세 어린이와 청소년이 56%를 각각 남기는것으로 조사됐다. 40세이상 성인의 음식소비량 대비한 쓰레기량은 7%에 그쳤다. 이에 따라 부모가 자녀에게 랑비를 피하는 옳바른 식습관을 가르칠 기회가 적어진것으로 보인다고 술탄 카부스대학은 지적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년간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는 13억t에 달한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한쪽에서 이렇게 음식을 내버릴 때 전 지구으로 년평균 1000만의 사람들이 굶어죽고있으며 매6초에 한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죽고있다는 보도가 나와있다.     민간에 백성들의 다다소소한 음식랑비는 도덕문제로 도덕교양으로 다스리면 될것이지만 관원들의 공금랑비는 도덕문제이면서 위정자로서의 자질문제이다. 중국에는 사람마다“탐오와 랑비는 지대한 범죄”라고 말하고있다. 공금으로 먹고마시는것도 변상적인 탐오이다. 그것이 더구나 범조로 되는것은 농민들이 허리띠를 조이며 농사지어서 성시민들에게 공급하고 관원들을 먹여살리는 피땀을 랑비하기때문이다.     한어에“절약은 제비가 흙을 물어들여 둥지를 짓는것과 같고 랑비는 제방뚝이 무너지는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중국이 비록 세계 제2위의 경제체로 부상되였지만 아직도 1억의 보조대상의 농촌빈곤호가 있고 몇천만의 도시저소득인구가 있으며 수많은 곤난군체가 있다는것을 망각한다면 명랑한 미래가 없다. 절약은 몰라도 민생고와 민중의 로력과 민심을 읽을수는 있어야 할것이다.     다행히도 중앙에서“8항규정”,“6항금령”을 내려 공금으로 마구 먹고마시는 풍조가 조금 누그러들고있다. 그러지않아도 절치부심하던 국민들이 손벽을 치며 기뻐할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원래 고질이란 침한두대에 치유되는것이 아니다. 이런 좋은 시책은 지금은 락관적이지만 일진광풍이 될것인가, 추풍락엽의 서리찬 바람이 될것인가는 시간이 결정해줄것이다.     이런 갖잖은 글을 끄적이는 순간에도 세계는 6초에 한명꼴로 어린생명들이 굶어죽고있다는 사실은 늘 식욕이 과다한 사람들에게는 남의 사돈이야 가든지 말든지가 될것이다. 시대는 수많은 신조어를 낳고 옛날 입말처럼 외우고다니던 “간고소박”, “ 근검절약작풍”,“떠버려 랑비하기”등 말들은 관념속에서 락엽으로 되여있어도 “렴결자률정신”이 화해로운 사회건설에 기둥이 될것은 틀림없으리라.                                                   2013년 1월 26일    
239    (대학생 참고용 수필 10편) 댓글:  조회:11002  추천:1  2013-02-02
                                           (대학생 참고용 수필 10편)                                                               최 균 선                                               1. 아름다운 대학생활     우리는 대부분 고등학교의 힘든 과정을 거쳐서 대학이라는 대문에 들어섰다. 잘 모르긴 해도 저마다 크나큰 기대감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부담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대학생활에 대해 많이 생각하였고 아름다운 동경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느 신입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생활의 첫날부터 우리는 자유분방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저마다의 추억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의 전공은 한국어이다. 한글자 한글자 배우면서 차차 한국 문화를 알 수 있게 되었고 한국사람의 사고 방식도 깊이 알 수 있었다. 때로는 기숙사에서 친구와 같이 한국영화를 보았고 KTV에서 선배님들과 동기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우정을 맺었다.     원래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가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사람처럼 한국말을 잘하고 싶어서 친구들끼리 한국말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한국에서 내 적성에 맞는 직장을 선택하여 나의 소질을 개발하면서 보람차게 살고 싶다.     대학생활은 많은 면에서 고등학교 생활과 다르다. 대학생활은 다양하고 풍부하다면 고등학교의 생활은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학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시간이 많기에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수시로 운동도 할 수 있다.     대학생들은 모두 저마의 포부와 희망을 갖고 있다. 쉽게 이룰 수 있는 희망도 있고 쉽게 이룰 수 없는 희망도 있다. 나에게도 남모르는 희망이 있고 그 희망을 이루고 싶어서 매일 열심히 공부한다. 최대한 시간을 활용하여 뭐든지 많이 배우면서 충실하게 보내는 것이 나의 대학생활의 목표이다.    무슨 일에서든지 노력하고 바삐 보내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기간 여러가지 알바를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협력하고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 한 팀으로 업무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배웠고 항상 최상의 서비스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민하게 되었으며 우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그렇게 이 빈해대학에서 3년 동안 우수한 대학생으로 성장되었다.    뭐니뭐니해도 대학 시절에 중요한 것은 기숙사 친구들과의 우정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대학 기숙사 생활을 할 때 며칠 동안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신정이 구정이라고 새로운 친구들과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가까워졌다. 그들은 모두 아주 상냥하고 친절한 친구들이다.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생활에 지칠 때마다 나는 기숙사 친구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에는 적응하기 힘들고 받아내기 어려운 일들도 있다. 자고 싶거나 공부할 때 사람들이 시끄럽게 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면 참기가 힘들었다. 몸이 안 좋을 때면 우리 집의 편안한 분위기가 못내 그리워지면서 기숙사 생활이 지겨워나기도 했다.   “세월이 쏜 살같이 흘러간다”는 말이 있다. 이제 일년 후 졸업하고 모교를 떠나갈 것이다. 선생님들하고 친구를 헤어질 생각을 하면 벌써 섭섭하다. 삼년의 대학생활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이 추억은 나의 인생서에 귀중한 한 페지를 기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생활 다시 한번 했으면 좋겠다. 잘 있으라! 나의 모교여, 너는 내 마음속에 빛나는 기념탑으로 솟아있으리라. 잘가라. 나의 미더운 친구들아!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                                                      2. 은혜에 대한 생각      은혜란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 베풀어 준 혜택을 말한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스스로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혜를 베풀기 위해 베푼다면 그것은 벌써 은혜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 마련이다. 그만한 사람에게는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 많다. 다만 당신이 발견하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는 고고성을 울리며 이 세상에 태어나 강보에 쌓여 엄마의 젖을 빨고 말을 번지면서부터 제일 처음 불러보는 이름은 엄마,아빠이다. 그리고 걺음마를 타면서 이 대지위에 자기 인생의 첫 발자국을 찍으며 아장아장 걸어서 유년기를 넘기고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고 첫 번 째 받은 점수를 가지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보이고… 아마 이루다 셀 수 없는 성장과정의 그 모든 일들에 주의를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우리의 매 한걸음의 성장의 길에 우리 부모님들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르고 자란다. 당신이 무심히 지은 미소에, 성공과  실패의 희열과 실망 등을 부모님은 다 마음에 새겨두며 우리와 함께 웃고 울면서 자신의 다함없는 사랑을 쏟아부으셨다,     봄에 움트고 여름에 무성하던 나뭇잎도 항상 어머니 대지를 잊지 않고 마지막 한 잎마저 그 품에 안긴다. 우리는 그것을 낙엽귀근이라 부른다. 낙엽은 조용히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땅을 걸구는 비료가 되는 것으로 어머니 대지가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한다. 대자연 속에서 흥망성쇠의 섭리를 체현하고 있는 낙엽귀근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뭇잎조차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줄 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다 크도록 보은사상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인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자기가 걸어온 인생행로를 되돌아 보면서 그 은혜가 태산같은 부모님께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자문해 보곤 한다. 우리는 항상 애인한테 “사랑한다”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그렇게 자주 반복한다, 그런데 부모님 한테 가슴 에서 우러나온 사랑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입버릇처럼 바다보다 더 깊은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말고 효도해야 한다. 한평생 다 갚을 수 없는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부모님들의 만년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한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그 은혜에  백분의  일이라 도 보답하는 실천의 길은 멀다. 그래서 장자는 부모를 공경하는 효행은 쉬우나 부모를 사랑하는 효행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한테 뭘 해드릴 수 있을까? 부모님이 땅이라면 나는 그 품에서 자란 한그루 작은 나무이다. 부모님이 바다라면 나는 그 깊은 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이다, 부모님이 하늘이라면 나는 그 하늘을 마음껏 날아예는 새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신데 감사드린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보다 더 깊다, 아버지의 사랑은 산보다 무겁다.     천지는 넓지만 인생길은 걷기가 어렵거늘 인생길은 파란만장하기만 하더라. 이제 나에게 사랑은 얼마나 남아있으며 나에게 눈물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어늘 나는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나는 열 번이고 스므 번이고 을 외친다. “고맙습니다. 나의 위대한 아버지, 어머니시여!! ”                                                             3.  아름다운 추억      추억은 커피를 마실 때처럼 처음엔 씁쓸하지만 뒷맛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지속시키면 순수하고 향기로워진다. 이처럼 청춘의 책 한권에도 추억이 내용으로 되면 풍요로워 질 것이며 그 단순하고 아름답던 좋은 기억들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영원히 굳어져 있고 많은 것을 잊게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많은 것들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는다. 나는 또 한번 내가 걸어온 인생행로를 뒤돌아 본다. 시간의 흐름 위에 나는 나의 꿈을 그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많은 꿈들을 이룩할 수 없다. 내 마음 속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겪었던 체험들이 모든 옛추억과 함께 떠나버렸다.    고등학교 교정과 대학의 캠퍼스와 풍경은 변한것 없지만 우리는 뒤바뀌는 계절에서 자신이 천천히 성장하였음을 보게 된다. 어느 봄날, 나는 오솔길을 걸었다. 고등학교의 봄, 봄의 꽃,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이 생생히 기억된다.     지금은 청춘의 봄, 고등학생이 가장 매력적인, 그러나 바베큐 (통째로 불에 구운고기) 요리를 배우는 것이 더 유혹적이다. 게임을 하면 기분이 한층 더 돋구어 진다. 우리는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은 푸른 하늘이고 버드나무는 해마다 성장하고 우리는 봄 햇살에 목욕하면서 번화한 도시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평소 대자연과 접촉할 시간이 없고 기회가 적은 우리들을 환희에 넘치게 하였고 청춘의 활기를 되찾아 주는듯 싶었다.     나는 새 봄의 신록이 무르녹는 계절(시즌)을 거쳐 여름에 록음이 짙은 고등학교 캠퍼스를 연상해 본다. 우리 학교 캠퍼스의 곳곳에서 화려하게 핀 꽃과 잔디의 키돋움을 볼 수 있다. 여린 녹색잔디는 꽃보다 더 화려한 꽃침대에 흩어져 있는 꽃, 그것들은 비록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란이 되지 않으며  향기가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매우 사랑스러운 점이 있다.    어떤 날에 오후 방과후 우리는 남자들의 놀이인 농구를 치기도 하고 함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다. 시계, 여자, 캠퍼스는 활력으로 가득 넘치고 우리는 피로하고 몸과 마음이 긴장해지게 하는 학습생활에서 해탈된듯 하다. 고등학교때의 내가 그립다. 동창들과 그때 한반 친구들 사이는 그야 말로 무공해라고 비유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같이 공부하고 함께 놀았으며 함께 아침에 달리기를 하였다. 때때로 작은 갈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인차 화해하고 다시 친해졌다. 그래서 그 시절의 친구들이 더 그리운가보다.                                                 4.  친구에 대한 생각       이 세상에서 친구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친구가 없는 생활은 마치 사막을 홀로 걷는 사람처럼 외롭고 슬플 것이다. 우리는 친구란 말을 쉽게 하지만 친구란 말에 담긴 함의는 다양하고 미묘하다.     사탕알 같이 달콩한 친구가 있고 바람 같은 명랑한 친구가 있고 새같은 순진한 친구도 있다. 달빛 속에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있고 다정한 친구도 있다. 그런 친구는 그저 미소를 띨 뿐 말이 없다. 이심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같은 친구는 달같은 친구와 달리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잡이 친구다. 바람같은 친구는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 올 뿐 아니라. 어떤때는 알랑대고 어떤 때는 이유없이 앵돌아지고 또 어떤때는 공연히 심사가 뒤틀 려 남의 마음에 그늘을 지어놓고 달아난다.    새같은 친구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역시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말고 제풀에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제멋에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또 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좋은 친구는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는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은 유달리 후대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을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우리 인생도 나무와 너무 비슷해서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 하는 법이 없다. 우리는 대방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행복한 일이다. 우리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 친구중 제일 소중한 친구가 있기 때문에 혼자 불러오는 고독도 즐거운 일이다. 사실 친구를 사귀는 일도 마음 졸이는 고생스러운 일이다. 연기나 구름같이 사라져 없어진다. 나무같이 노력하여 수분을 섭취하고 햇빛 마음대로 받으며 행복하기 위해서 하늘을 향해 뻗는다.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자기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더 힘을 싣는다. 이것도 생활속에서의 매일 다 새로운 시작이다.    혼자일 때 신비하고 의미롭고 나름대로 즐거운 때가 홀로일 때이다. 그럴 때마다 험한 바위 위에 홀로서서 밤이슬을 맞고 가을 찬서리를 맞으며, 겨울에는 찬바람 속에서도 꿈을 식히지 않으면서 달과 별과 새들과 친구하는 외로운 나무를 흔상하게 되는 내 마음이 이상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혼자이고 싶고 그런 자기 모습대로 인생에 대해 사색하고 청춘의 의미와 내일의 자기 모습을 그려보는게 더없이 좋기도 하다. 어느 책에서 보았는 데 고독을 잘 다룰줄 안다는 것은 일종 성숙의 표지라고도 하였다. 함께 웃고 떠들 때 는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시골의 고향집 뜨락에서 하늘의 별을 세여보며 명상에 잠기어 보라, 그때면 마음도 냉정해지고 명상도 고요히 흐르게 된다. 그 고요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때가 바로 진정하 자기 모습을 읽는 때이다. 그래서는 나는 고독도 마다하지 않는다.                                                    5.  새 봄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오는 소리는 봄의 정취를 가진 사람만이 먼저 듣기 마련이다. 봄이 넘어오는 산언덕에 서면 꽃샘철 찬바람의 예리한 톱날도 점점 무디여 간다는것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한껏 멀어져버린 하늘가에서 싸늘한 미소를 던지던 해님의 미소가 한결 온기를 머금었다.    계절의 달력장은 어김없이 절로 번져진다. 겨울의 절정 속에서도 봄은 만물의 소생을 위한 축제를 차곡차곡 준비해 온것이다. 남녘으로부터 겨울과 교대식을 하기 위해 봄이 입나팔을 불며 척척 걸어온다. 병색이 깊어가는 겨울이 계절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늙어진 마음에 싱숭생숭이야 가당하랴만 어떤 즐거움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귀기울이면 겨우내 꿈을 키우던 백양나무의 속살깊은 줄기에서 가지들더러 움을 틔우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방불히 들리는듯 싶다. 이제 빈가지의 끝자락에서 꽃눈이 새록새록 솟아나오는 것을 볼수 있을 것이다. 젊은 여인들의 옷차림도 얇아지는 것이 눈에 띄인다.    개울이나 강에서는 얼음이 쩍쩍 갈라지며 해빙기의 성에장을 준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서 진달래꽃불이 타오 르면 들녘에 민들레도 몰래몰래 봄단장을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봄이 오는 대지에 춘색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메말랐고 유난히 추웠다. 해변가 도시에 나무가지에 눈을 틔우는 바람이 올해는 자별나다. 그렇다. 새 봄이 달려오고 있거늘 겨울인들 물러서지 않고 될소냐? 꽃바람 끝자락에서 뒤늦게 피여난 개나리가 아지랑이를 불러낼 때면 수양버들도 머리를 풀어 내린다. 봄날의 꽃비가 내리어 묵은 대지의 먼지를 말끔히 걸레질하는 멋이 좋고 손끝에 옮아든 풀향기에 저절로 신이 난다.    봄은 노랗게 꽃을 피우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남산에는 아롱아롱 아물아물 아지랑이 춤추고 두견화, ××화, 나리꽃, 백화가 만발하는 봄날의 풍경선에 들판에서 풍년씨앗 뿌리는 농민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한폭의 풍경화를 이루는 고향, 그래서 나는 타향에 살아도 고향의 봄을 잊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작은 이름 모를 새들이 작은 나무숲 사이를 날며 소리를 내면 겨울이 가는 것이다 비둘기가 제짝을 찿으면 겨울이 가는 것이다. 봄이 오면 무언가가 꼭 이루어 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겨울 동안 내내 봄을 기다린다.     꿈과 희망이 새 봄과 함께 오길 기다리듯...봄이 오면 가슴이 설레인다. 봄은 청춘의 계절. 청춘은 인생의 봄. 봄날의 꽃들은 길가에, 언덕에서 유혹하는데, 내 가슴 속에는 그보다 더 화려한 희망의 꽃이 핀다. 희망은 가슴에서 샘처럼 흘러내리고 꿈은 종달새처럼 하늘을 난다.환한 햇살과 초록이 솟구쳐 점점히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하는 그 원천 속에 겨울이 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만물이 새로 피어나고 태어나는 듯 잎은 아주 서서히 푸르러가 듯 엄마의 체온처럼 서서히 가슴을 파고드는 봄은 얼마나 좋은 계절인가. 우리 모두 그 꿈과 희망이 새 봄과 함께 오길 기다리 듯 자연의 이치도 사람이 사는 삶과  많이도 비슷하다. 그러나 어김없는 것은 세월이다. 땅속 깊이에 힘찬 생명력은 잘 참고 새로운 삶 속에 꿈을 잃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나는 대자연의 봄을 좋아하는 마음만큼 내 인생의 봄도 아끼며 이 봄날에 내 이상의 꽃도 피우고 행복의 꽃도 마음껏 피웠으면 좋겠다. 봄은 청춘, 봄은 꿈나라, 봄날의 꿈이 일장춘몽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새봄을 새롭게 장식하려고 벼른다.                                                        6.  미 소       누가 말했던지 유일하게 표정을 바꿀줄 아는 동물인 인간의 표정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표정은 바로 미소라고 했다. 쉘리는 미소는 인간애의 상징이고 어느 철인은 미소는 세계의 공동어라고 했다. 세계 어디에 가든 성실하고 밝은 미소를 짓는다면 손짓 발짓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맹수에게도 미소 짓고 다가서면 적대 감을 해소시킨다고 한다.    미소는 상대방에게 우의적이고 친절한 감정을 전하고 싶을 때 얼굴에 피여나는 웃음꽃이다. 인간사회에서 웃음꽃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싱그럽게 해주는 꽃이 있으랴!그래서 쉐익스피어도 만약 당신이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하루를 헛산셈이라고 하였다.손해볼 것도 밑질 것도 없는 미소로 행복과 건강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웃음은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힘들다고 찡그린 얼굴로 세상과 마주한다고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가? 성난 얼굴, 미소 띤 얼굴…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듯이 행동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사람은 웃을 수 없다. 웃음을 선택했을 때 왜 행복해질 수 있고 삶이 재미있게 되는 것일까?    웃음을 선택했을 때 왜 행복해질 수 있고 삶이 재미있게 되는 것일까? 그 해답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이츠하크 프리드박사가 해답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두뇌에서 웃음보를 발견하고 이 웃음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일반적으로 재미 있는 생각을 하면 웃게 된다고 알고 있지만 실험결과 일단 웃고나면 신바람 나고 재미 있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더 많다고 피력하고 있다.    웃음을 선택하는 순간 머리 속이 긍정적이고 재미 있는 생각으로 넘쳐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노상 웃음과 등질 때 부정적인 울화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웃음은 이렇게 부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3~4만가지 생각을 긍정적면으로 변화시키며 기쁜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웃음은 선택의 문제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고 일종 의무이기도 하다.   희로애락으로 반죽된 인생마당에서 그냥 미소만 짓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고 한번도 밝게 미소짓지 못할만큼 불행하게 한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아미소는 심령의 정화제이다. 인간관계에서 최적의 투자가 미소이지만 돈이 들지 않는다. 미소가 일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미소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발산할 수 있는 마음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현대 도시인들은 점점 미소에 인색하게 되었을가?    웃는 표정이란 보통 표정이다. 그러나 날로 풍요로와지는 도시사회에 점점 더 결핍한 것은 서로 미소로 대하자고 선전을 해야 할만큼 결여되어 있다. 미소로써 비애의 구름을 쫓아버리라. 그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지 말게 하라. 울고 웃는 인간, 결코 즐거운 한평생도 슬픈 한평생도 있을 수 없다. 날마다 자고 깨면 밝게 웃으며 반겨주는 저 아침해처럼 늘 웃으며 살면 좋은줄 누가 모르랴!     하지만 어째서 우리들의 얼굴엔 늘 웃음이 흘러넘치지 못할가? 생활의 구석구석에 근심과 걱정이 도사리고 있어 그것을 피할궁리에 골몰한 것인가? 괴로운 기억의 보따리를 그냥 가슴에 안고 인생길을 걷는 사람은 언제나 인간세상이 슬프게 보일 것이다.                                                  7.   바다가에서      여기 청도에 오기전 나는 푸른 바다를 많이 동경하였다. 그래서 바다가 도시 청도를 먼저 선택했다. 때때로 금사탄에 달려가 마음껏 바다를 흔상하며 생각의 모래 탑을 많이도 쌓았다.     파도치는 바다의 물결을 바라보노라면 도시생활에서 먼지가 들어 앉은 내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는 듯 싶은 바다, 시원한 바다바람이 어서 뛰여들라고 꼬드기 듯 옷자락 끄는데 파도마냥 내 정서도 설레인다. 해빛 속으로 헤엄치는 파도의 격정에서 어쩌면 인생의 도리를 배워우 듯도 하다.     참으로 바다는 격정만큼 짙은 정서를 안겨준다. 역시 바다는 위대하다. 바다의 해돋이는 더구나 가관이다. 그 창창함에 받들려 솟는 일출의 위용은 장엄함의 상징이런가. 푸른 아침, 새 하루가 열리는 희망적인 예시 앞에서 다시 한 번 솟구치는 격정 을 안는다. 숨결 높은 바다의 가슴, 태양빛 물결의 출렁거림은 내가 본 멋진 경관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지적인 풍경이다.     바다가에서는 무조건 즐겁고 행복하다. 바다의 장쾌함에 감탄하며 꽁꽁 닫아 두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본다, 욕망도, 허영심도, 고달픔도, 그리움도 다 꺼내놓고 바다물에 씻어본다. 썰물이 미련없이 기슭을 비우듯이 종종 자기를 내주며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도 하게 된다.    푸른 물빛은 바다의 생명의 빛이고 파도는 바다의 격렬한 정서이다. 부드럽고 따스한 모래위에 누워 잠간 눈을 감으면 아침해 두둥실 솟는 바다의 아침이 그려진다. 나의 미래세계를 설계하는 동경을 격려하 듯이 진정할 줄 모르는 바다의 정서처럼 청춘의 내 가슴도 끝없이 설레인다.     어느새 저녁 노을이 파도위에 부서진다. 석양은 제가 해야 할 하루 일을 두고 말없이 마지막 축복을 보내는 데 나는 발길을 돌릴 수 없다. 찬란했던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서서히, 그러나 화려하게 스러지는 노을빛이 흰 파도위에 부서지는 장관이 나를 사로잡아서만도 아니다.     프랑스의 대문호인 유고는 하늘은 바다보다 넓지만 인간의 흉금은 하늘보다 더 넓다고 했다, 거짓을 모르는 바다가 주는 계시를 다 받아 안기에는 내 흉금이 너무 좁다. 환희로운 바다가에서 자신의 정서대로 바다의 신비를 다 해석하기도 어렵다. …해변도시의 향락은 밤과 더불어 시작되는가 싶다. 사람들이 밀려들어 아득한 백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밤바다는 검은 장막을 들쓰며 고요를 잃는것이 불만인지 술렁대며 철썩이며 기슭을 친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바다는 오염에 몸부림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친다. 깊은 바다 속에 모든 생명들을 바다는 소중하게 품어주고 있는데 우리는 바다를 오염시키고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천 수백년을 해양 생물들을 잡아먹었다는 생각을 하다가 저절로 싱거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문득 바다구경을 했으면 좋겠다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마을에서 떨어진 거리만큼 산나물의 향기가 진하다고 하더니 고향을 떠난 그 거리만큼 본능적인 향수가 때따라 그리움을 부른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 청도 앞바다에 찾아오리라 마음을 다지면서 바다가의 사색을 일기장에 옮기었다.                                            8.  고향의 산에서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던 소년시절에 나는 부모님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사람이면 못잊을것 고향이던가? 나의  태줄이 묻히고 잔뼈를 굳혀준 고향은 긴긴 세월 내내 애틋한 그리움이었다. 내 동년의 꿈이 그대로 그렇게 새겨진 탓이던가? 그러다가 지난해 봄 오래간만에 옛고향을 찾아갔는데 감구지회가 가슴에 가득 차올랐지만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었다. 강산에 찾아온 새봄, 5월의 동화가 아기자기하게 엮어지는 고향산은 왜 이리도 정다운지. 겨울이 물러간 자리에 봄아가씨가 따스한 입김으로 산꽃의 수집은 꿈을 깨워놓고 아지랑이를 불러내느라 이 산 저 산에서 나울거린다.    창공에서 지저귀는 종달새가 내 마음을 꼬드기며 아득히 흘러가버린 동년의 파란 언덕에서 나를 세워준다. 나는 한소리 웨쳐본다. 못잊을 고향의 산아, 내가 다시 왔노라. 너는 높이만큼 뿌리도 깊어 세상을 겉으로만 보지 말고 속깊은 소망을 키우며 살라고 가르쳐준 내 마음의 성산, 너를 찾아왔다.    너는 나무들이 잎을 더디게 피운다고 풀벌레들이 늦게 눈 뜬다고 조바심치지 않았지? 안개가 휘휘 제몸을 감싸 멋진 모습을 가리워도 불평이 한 번 없었고 모진 설한풍 바위를 떵떵 얼구어도 가슴 깊은 곳 푸른 꿈 흐트러뜨린 적이 한 번 없었지.돌이켜 보면 고향에 심어두고 떠난 그 꿈을 약처럼 먹으며 살아온 나이다. 산정에서 동네 개구장이들과 딩굴던 그젯날이 생생하게 안겨온다. 그들도 고향의 산을 잊지 않고 있는지…《야호─야아아─》 하고 외쳐보고는 랑랑한 메아리에 귀기울이고 섰던 짜개바지 친구들의 모습이 쪼르르 물매듭진 아침이슬에 잠방이 적시며 숨이 턱에닿아 산에 오르다가도 싱싱한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바다같은 푸름 속에 풍덩 뛰여들어 헤엄이라도 쳐보고 싶던 철없던 시절이 봄물이 오르는 산버들 가지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꿈자락이 정처없이 떠돌던 쪽빛 하늘아래 봄볕처럼 쏟아지는 추억이 흐드러지고 산의 묵은 가슴을 어루쓰다듬는 진초록 산바람은 어서 산정에 오르라고 내 옷자락을 잡아끈다. 오구구 바위에 뛰여올라 구름이라도 잡을 듯 두팔을 뻗치고 만세를 불렀던 산아, 너를 딛고 발도움 하며 푸른 하늘에 날아오르고 싶어 퍼덕이던 동심의 날개 짓을 너는 기억하고 있겠지?    하늘처럼 맑은 나의 작은 가슴에 꿈을 키워주었던 고향의 대지, 산과 물과 숲과 전야가 이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참으로 고향은 영원한 사랑의 품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비록 지금은 고향을 떠난 몸이지만 마음은 하냥 고향의 품을 잊지 못하는 데 지금은 조국의 방방곡곡에서 공부하거나 직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을 고향 친구들도 나처럼 나서 자란 어머니 품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인생은 어찌보면 등산과도 같다고 할 수 있으리라. 오늘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향산의 정상에 올라있지만 아직 인생의 높은 봉에 오르지 못한 나이다. 한창 꿈이 무르익는 청춘시절, 장차 내가 고향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만약 성공의 높은 봉에 올라있다면 나는 꼭 고향을 위해서 한두가지 좋은 일을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다시 한번 고향산천을 둘러보았다. 향토애의 정이 가슴에 넘친다!                                                                9.  민들레찬가       꽃피는 봄 화사하던 그 웃음도 여름의 따끈한 입김에 속절없이 녹아버리고 진초록 바람이 산야를 애무하는 계절, 자기 생명의 권리를 찾아 어김없이 돋아나는 민들레, 어느새 여린 노란꽃을  피우고 깃털을 단 여린 씨앗을 맺았을가? 새 봄에 잠시 잠간 피였다가 금방 시들어버리는 속절없는 작은 꽃이지만 끈덕진 그 모습 사랑스럽다.     민들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깊이 뿌리내리어 일단 꿈을 틔우면 다른데로 옮겨앉을 궁리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움트고 줄기를 뻗고 잎을 펼지고 제나름의 꽃을 피우는 봄의 어붓딸이라 할까? 민들레는 보잘것 없어도 한국어로는 정다운 애명들이 많다. 몀들레, 뫼음들레, 문들레무, 둘레, 씀바귀, 안질뱅이꽃…그리고 약재로 명명될때는 금잠초, 지정, 포공영, 포공초…등 이름이야 어찌 불리든간에 이 땅에 모든 생물이 자기의 생명권과 존재의 리유가 있듯 민들레도 자기 씨앗의 힘을 과시한다.     민들레는 연한 목숨이지만 연한 자태로 비바람을 이겨내며 이 세상과 대화할줄 아는 착하디 착한 꽃이다. 그래도 봄이면 봄마다 자기의 권리를 찾아 이 땅 한 구석을 수놓아가는 민들레도 강자가 아니랴! 꽃으로서는 볼품 없는 앉을뱅이꽃이여도 우리들의 식탁에 올라 입맛을 돋구고 병든 몸에 약재로도 쓰이는 대지의 효녀로서 제구실을 착실하게 하거니 제멋에 자라서 제멋에 지는 무명초보다 더 돋보인다.     민들레는 말없이 자기 꽃을 피웠다가 때가 되면 한오리 미풍에도 아기들을 포르르 날린다. 고이 키운 자기의 아들딸을 먼곳에 보내놓고 속을 태우는 수많은 엄마같은 민들레! 민들레의 그런 마음을 읽으며 나는 이 딸을 멀리 보내놓고 마음을 썪이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몰래 눈물을 머금는다.     민들레꽃씨는 농촌의 수많은 처녀애들로 연상해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도 농촌에 태줄을 묻고 잔뼈가 굳었지만 늘 도시를 동경하였다. 나처럼 지금은 아무도 민들레꽃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도시의 화분통에 꽂힌 호화로운 꽃이고 싶어서 미련 없이 도시로, 도시로 날아든다. 그러면서도 저 민들레처럼 날아가버린 딸을 그리는 시골의 엄마생각에 나처럼 눈물을 지을 때 있을까?      민들레꽃의 외로움을 읽노라니 내 마음도 민들레씨처럼 바람따라 정처없이 날려간다. 민들레야 너는 지금 무엇을 속삭이느냐? 나도 입속말로 시구를 더듬는다.                                  봄이면 봄마다 소문없이                     노란 꽃잎 곱게 펼쳐들고                       해님을 우러르는 민들레                         내 고향의 사랑이여                                                                   민들레 꽃 미소를 보낼 때……                                 간절한 그리움의 씨앗 하나                                      당신의 따스한 품 속에 움트면                                                         엄마, 이 딸의 미소인양 아세요.        민들레는 분명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나도 민들레와 눈물젖은 속삼임을 나눈다.        ※ 민들레(蒲公英)                                           10.   만남과 이별       인생이란 만남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나면 먼저 엄마를 만나고 아버지,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차차 사회마당에서 딩구노라면 본의가 아닌 이런 저런 만남과 헤여짐이 무시로 엇갈리니 말이다. 상봉의 언덕에는 웃음이요 이별의 정거장은 눈물인데 인생려정에서 참으로 에돌아갈 수 없는 중간역인가.    이별은 만남과 더불어 동일선상에 하나의 점이다. 어쩌면 이별은 삶의 삽곡이고 삶은 또 이별의 서곡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만나고 헤여짐이 반복무상한 인생길에서 이별의 아픔을 새기지 않고 끝까지 갈수 있는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의 정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일상의 하루에도 참기 어려운 슬픔이 스며드는 것은 가슴 속에 알게 모르게 차지하고 있는 이별의 아픔이 고질이 되어서인가? 만나지 않으면 헤여짐도 없을 것이요 오지 않으면 갈 일도 없을테지만 이별은 왜 우리네 인생에 얽히기만 하는 것인가?     느닷없는 이별은 껍질을 벗는 뱀의 아픔처럼 그렇게도 처절한 것이다. 누구나 가슴을 몹시 앓고나면 이별의 의미가 새롭게 새겨 질게다. 가슴을 어루만지며 애달프게 헤어지면 석별이요 다시 만나자고 손잡고 약속하면 작별이요 떠난다고 알리면 고별인이요.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면 영별이고 죽어서 갈라지면 사별이라 한다.    그 어떤 이별이든 가슴이 쓰리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살아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은 가슴을 오리오리 찢는 아픔이요 고통의 극한이다. 이별을 견뎌내지 못하는 몸짓과 이별의 아픔이 쏟아내는 눈물이 없다면 그저 무정한 정도가 아니라 차디찬 돌심장을 가졌기때문이리라.    추억이 더욱 추억되게 하는 것은 이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별은 대전제이기 때문에 갖가지 형태의 이별의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번도 이별의 고통을 체험하지 못했거나 이별의 시각에 미처 할말을 챙기지 못했다면 마음 속으로라도 눈물 젖은 이별가를 불러보라.    이별이 가슴 아픈 사실로만 기억된다면 사람에겐 처음부터 그리움이란 없었을 것이다. 이별은 바람에 실려가는 하늘가에 뜬구름같이 허무하다고도 하지만 결코 허무가 아니고 망각은 더구나 아닌 것이다. 잊는 고통이 없다면 생명없는 사물처럼 될 것이고 기다림이란 슬프도록 아름다운 마음의 언덕이 없을 것이라고 가볍게 말하지 말라.    어쩌면 삶 자체가 이별의 마디마디로 이어져서 그 순간을 느끼고 있을 틈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이별을 연습하며 산다. 이별은 사랑하는 남녀간에 더 유난하겠지만 연인들의 언저리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딸을 둔 산골의 어머니에게만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이별의 아픔을 새길줄 알아야 한다.                        2008년 8월 ㅡ2011년 5월                         (청도 빈해학원 동방언어학원 사작지도용 보기 글)  
238    잡담 1,2,3 ( 완정고) 댓글:  조회:7506  추천:0  2013-01-31
                                      잡담 1,2,3                                    1. 남의 등에 업혀달리기       어느 학교의 운동대회에서였다. 엄마와 손잡고 달리기를 할 차례였다.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나가는 한 아이를 바라보며 구시렁거렸다.   “저것봐, 저애 어머니가 뛸수나 있을까 ”     영준이 엄마는 어릴적 소아마비로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달리기가 시작되였다. 난처해진 영준이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에 한을 남길까봐 말했다   “영준아, 엄마는 안하는게 나을것같아, 네가…”     영준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엄마, 그럼 내등에 빨리 업혀!! ” 아들의 마음을 잘 아는 엄마는 어린아들의 등에 업혀달렸다. 그 장면에 가슴이 뜨거워난 아이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두손을 내흔들며 웨쳤다    “영준이, 제일이다ㅡ!달려라!! 달려라 !!! ”     엄마를 업고 힘겹게 달린 영준이는 땀벌창이 되였지만 얼굴엔 행복의 웃음이 피여있었다. 영준이의 기특한 정신에 모두 눈굽을 찍으며 영준이 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입들을 모았다. 영준이는 비록 맨 꼴찌였지만 특별히 마련한 “풍격상” 을 받았다. 영준이 엄마는 아들의 등을 어루쓸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아이때 누구나 엄마의 등에 업혀 자랐고 커가면서도 그냥 업히기를 좋아했을것이다. 그러다가 자기가 엄마를 업어야 할 경우도 종종 있을수 있지만 늘 있는 일은 아니다. 아들의 등에 업힌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가? 결코 행복하지만 않았을것이다. 업은 아들은 행복했을지 몰라도 엄마는 너무너무 민망했을것이다. 그러나 이런 업혀달리기는 더없이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업히움이 아닐수 없다.     남에게 업힌다는것은 경우가 어찌되였든 대방에 육체적으로만이 아닌 일종 부담을 주는 일이다. 어느 늦가을 뼈저린 강물을 남의 등에 업혀 건넌다고 생각해보라. 그저 편안하기만 할것인가? 사람은 한평생 남의 등에 업혀살수는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란 자립자강해야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나갈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어떤 사연에서이든 남에게 너무 오래 업혀있으면 다리가 저려들것이고 그렇게 커간 아이는 희망이 없다. 돌밭길에서 발굽을 굳힌 짐승은 어떠한 길에서도 질주할수 있다는 리언과는 별개이다. 남에게 업혀가는것은 업은자가 아무리 거인이라 도 업힌자는 영원히 구루병에 걸린 아이로 남을것이다.     인생일사도 마찬가지이다. 업히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 못하는 병신아이처럼 매사에 남의 등을 믿으려는 그런 사람들이 많고 많다. 든든한 등허리에 업혀가는 동안은 호사스럽겠지만 그렇게 굳어지면 인생길은 더 복잡해질수밖에 없으리라. 남에게 오래 엎히면 관념도 경화된다. 그런데 사람은 다 크고 나서도 남의 등에 “업히기”를 바라는 심리가 죽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는 성가하여 자식을 키우면서도 늙은 부모의 등을 쳐먹고사는 사람들이 푸술한데 정신미숙아라고 하면 조금 덜 비난 받을가? 아무튼 업혀가는 돼지눈을 련상해 보게 된다.     소학교시절, 힘세고 사나운 애의 힘을 믿고 우줄대던 애가 보호신이 전학하고나서 그동안 잔뜩 미움을 벼리던 애들에게 개몰리듯 하던 한 밉상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진다. 개체사이에 유희도 이렇거니와 국제유희도 그런것같다. 가령 국격(国格)마저 강자의 등에 업히는 처지라면 그 이상 꼴불견이 없을게다. 그럼에도 젠체 한다면 준마의 잔등에 앉아 기고만장해 하는것과도 틀리는 거동이다.                                                           2009년. 6월 18일                                                                       2.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뭇짐승들을 혼비백산시켰다는 호가호위 (狐假虎威) 라는 성구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남의 권세를 빌려 허세를 부림을 비유한 고사를 새삼스레 다시 옮겨본다. 전한 시대 류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초책 (楚策)〉에 나오는 얘기다. 초(楚)나라 선왕 (宣王)이 하루는 신하들에게 "듣자 하니, 위나라를 비롯하여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고?" 하고 물었다.     이때, 위나라 출신인 강을(江乙)이란 변사가 초나라 선왕밑에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왕족이자 명재상 소해휼이 눈에 가시였다. 강을은 이야말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북방 여러 나라들이 어찌 한갖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나이다. 한번은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교활한 여우가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자(使者) 이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나를 백수의 왕으로 정하신 천제의 명을 어기는것이니 천벌을 받게 될거다. 만약 내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내가 앞장설테니 내뒤를 따라와 봐라.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하나도 없을테니'라고 했나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모두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기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것은 여우뒤에 호랑이였습니다. 그런데도 호랑이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나이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워하는것은 일개 재상에 소해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초나라의 병력, 곧 임금님의 강한 군사이옵나이다."     이 고사의 주요 의의는 여우의 총명을 표현한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의 교활성을 까밝힌데 있다. 우리 주위에도 부모의 권세에 등대고 공연히 어깨힘 살리고 다니는 현대판고아내들의 밉상이 희소하지 않거니와 아부와 굴종으로 권력자의 환심을 사서 득세한 자들이 “장비야 내 배 다칠라!” 하며 아닌보살하기가 비일비재이라 자연히 쓴웃음을 뱉지 아니할수 없다. 비속한 넋을 가진자들이 호가호위하기 마련이라고 좋게 보아주면 되는데…     강자의 등에 업혀 세상을 호령질 해볼가 하는 자들은 여우에 비해 나을것이 없으니 말이다. 여우는 생존본능에서 낸 자구지책일수도 있으나 인간의 행위는 따지고 보면 교활보다 너절함이 된다. 자기의 실력으로는 자신을 내세울수 없으니 타자의 힘을 빌어서라도 거센체 해보려는 비속한 관념에서 나오는 야비한 자기중심주의 작동이다. 이런 자들은 사자가 죽으면 발길질하며 혼자 거센체 할 자들이다.     력사는 우리에게 종종 웃지도 울지도 못할 롱담을 잘한다. 력사는 라선형식으로 발전하기에 상사한 번복현상들을 피할수 없게 된다. 한국의 력사학자인 함석헌선생이 통일신라는 수치의 력사, 고려의 력사는 간신의 력사, 리조의 력사는 똥물의 역사라 했다던가? 기독교로 본 한국의 력사에서 신라와 조선조의 력사를 질타했다고 해석하고있다 즉 민족의 얼과 자유를 짓밟은 괴수들이 지배한 력사라는것이다…….     력사는 승자가 쓰게 되여있다. 그러나 반드시 영광의 력사를 쓸수 있다는것은 아니다. 패필사는 상관할바가 아니지만 그 손으로 민족의 비극사를 쓴다면 돌이킬수 없게 되고 천추의 죄인으로 저주의 기둥에 매달릴것이다.                                                       2009.6 월 18 일                                              3. 우산을 쓰다.       하늘이 비구름 기우뚱 비껴쓰고 낮추 달려오고 어디선가 천둥이 우는데 당장 장대비가 쏟아지려하는도다. 다행히 낡기는 했으나 큼직한 우산을 들었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올테면 오라. 어차피 갈길도 급하거늘…” 씻은듯 개인 하늘아래 우산을 들고 다니는것만큼 남새스러운 일이 없지만 마치 이맘때에 비가 내릴것을 점치기나 한듯이 우산을 든만큼 다행스러운 일도 없을것이다.     그렇다고 날마다 우산을 들고 장대비가 쏟아지기를 바랄수는 없는 일이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면 우산이 날려갈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갑작비에 준비없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제좋을 궁리만 하는것도 야비하고…암튼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우산이 없는 행객들이 갈팡질팡인데 무작정 냅다뛰던 아이 하나가 씩 웃으며 잡담제하고 내우산아래 뛰여들었다.     “어쭈, 요놈 봐라, 제법인데 ”     “아저씨, 내쫓지 않을거죠? ”     “아저씬 참 좋은 사람같아요,”     “우산을 씌워주면 아무 사람도 좋다고 할거지?”     “히히히! 아참, 이러면 아저씨도 저쪽 어깨가 젖을텐데 안그래도…”     “괜찮아, 그런데 넌 흐린 날엔 우산가지고 나서야지,”     “맨날 뻥치는 천기예보 믿고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건 좀 그렇잖아요?”     “하긴, 아이들이 늘 우산가지고 다니면 짐도 되고 또 위험도 하지”     “우산이 왜 위험한데요?”     “우산끝이 뾰족하지 않아? 친구끼리 싸움나서 성나는대로 내찌르면 어쩔라구? 우산도 무기가 되거든, 이 우산은 특제품이여서 무기로도 쓴단다. 너 못보았니? 중국 무술영화에 부채도 무기가 되고 트럼프장도 비수가 되고 에또, 우산을 쓰고 씽씽 날아다니는 협객도 있은것 같은데…”     “그렇게 위험한 우산을 아저씨는 늘 들고 다녀요?”     “난 힘센 어른이구 참을성도 있어서 우산을 무기로 삼을 필요는 없는거구, 그래서 내겐 그저 비를 말리는 수단이거든, 그리고 너처럼 비에 쫓기는 사람도 불러들일 경우도 대비해서, 허허허…”     “어른들은 참 별라요,”     “음, 그게 어른들의 론리다. 식칼도 엄마의 손에 잡히면 식도이지만  강도의 손에서는 흉기거든, 내가 하는 일은 다 좋고 남하는 일은 안된다는거지,”     “난 아저씨가 뭔 말하는지 통모르겠어요. 그러나 토끼를 잡아먹으려다가 우물에 빠진 도리없는 사자처럼 엉터리를 쓴 사자님은 알것같아요,”     “네 말이 맞긴 하는데 원래 세상일이란 그렇고 그런거다. 너도 이제 크면 알게 될거다. 참, 넌 소학생같은데 뭘 많이 알고있는것 같구나……”     힘의 론리시대, 제리익이 진리의 잣대가 되는 웃기는 현실이다. 아무튼 남의 우산믿고 비오는 날 길을 떠난다면 마치 이웃의 배부른 장독을 보고 장을 안담그는 아낙네처럼 미욱하다고 해야 하리라, 세상에 그렇게 새빠진년이 있으랴만 남의집 술독에 향기를 맞고 벌써 취해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은 드문히 있다. 국제무대에는 이런 미욱한 자가 없는지…                                                              2009년 6월 18 일                  묵은 얘기지만 지금해도 얼추 맞는 얘기 같아서...
237    (학생논문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예술성과” 댓글:  조회:8938  추천:0  2013-01-31
    (학생논문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예술성과”                                          초 록   이효석은 1930년대 순수문학을 빛낸 작가다. 초기의 이효석의 소설은 경향문학의 동반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미의식과 새로운 기법으로 소설을 창작했으며 이왕의 소설과는 달리 작품의 질적 내용을 지탱하는 기교, 수법을 모색하는 데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주의적 기교면과 순수문학적인 소설로 금자탑을 쌓았는데, 이러한 가치성과 독자성에서 그의 소설을 조명해야 할 것 이다. 이효석 문학은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해 오면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정한모의「현대 작가 연구」는 이효석과 김동인의 문체에 대해 주로 다루고 있는데 이효석의 문체를 순수성을 느끼게 한다고 하고 그 인상에 있어서 생의 고요한 관조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서정적 뉘앙스가 이효석 문학의 전체적 분위기가 되고 있다고 하여 이효석 문학에 있어서 문체가 이룩해 낸 순수문학적 가치를 평가하였다. 정명환은「위장된 순응주의」에서 이효석은 서양을 통해 제나름으 로 발견한 미의 관념을 계기로 지성의 고행을 송두리째 내던진 가면을 쓴 순응주의자란 비판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키워드: 이효석, 메밀꽃, 동이, 나귀                                  차례 초록 ………………………………………………………………………1 一、서론………………………………………………………………… 4 1.연구목적및 의의………………………………………………………4 2.연구방법 ………………………………………………………………6 二、본론 …………………………………………………………………7 三、결론………………………………………………………………… 12 四、감사의 말……………………………………………………………13 五、참고문헌…………………………………………………………… 14                                                               서론 이효석은 1930년대 순수문학을 빛낸 작가다. 초기의 이효석의 소설은 경향문학의 동반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미의식과 새로운 기법으로 소설을 창작했으며 이왕의 소설과는 달리 작품의 질적 내용을 지탱하는 기교, 수법을 모색하는 데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주의적 기교면과 순수문학적인 소설로 금자탑을 쌓았는데, 이러한 가치성과 독자성에서 그의 소설을 조명해야 할 것 이다. 이효석 문학은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해 오면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정한모의 「현대 작가 연구」는 이효석과 김동인의 문체에 대해 주로 다루고 있는데 “이효석의 문체를 순수성을 느끼게 한다고 하고 그 인상에 있어서 생의 고요한 관조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서정적 뉘앙스가 효석 문학의 전체적 분위기가 되고 있다.”①고 하여 이효석 문학에 있어서 문체가 이룩해 낸 순수문학적 가치를 평가하였다. 정명환은「위장된 순응주의」에서 이효석은 서양을 통해 제나름으 로 발견한 미의 관념을 계기로 지성의 고행을 송두리째 내던진 가면을 쓴 순응주의자란 비판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1.연구목적 및  의의 1930년대는 일제의 조선에 대한 수탈이 가심화되고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 혹심해 지던 시기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조선문학을 주도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속에 프로문학은 좌절되고 뒤이어 순수문학이 대두하였다. 프로문학은 현실적 공리성을 추구한 문학이고 순수문학은 현실적 공리성은 예술의 순수본질이 아니라고 간주하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배격한 문학이다. 순수문학은 예술의 순수본질 이외의 모든것을 배제 한다는 의미에서의 순수문학이다. 그래서 순수문학을 주장한 작가들은 인성의 아름다움만을 문학의 본령으로 삼은 것이다. 바로 이효석의 문학은 순수문학이었다. 그 작품속에는 선악이 대립 되는 인간 사회의 신음소리와 그 분노, 좌절과 윤리적 감정 따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 민족의 슬픔이 처절한 오열을 자아내던 시기이건만 효석의 문학 은 화려하기만 했다.   물론 그도 프로문학의 동반작가로서 1930년에 을 발표했을때는 그렇지 않았다. 1931년에 [카프]의 핵심 작가들이 약 70명이 검거되고 다시 1934년에 80 여명이 검거되고 다음해 임화가 카프의 해산계를 내게 되는 과정 속에서 그의 문학은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효석의 문학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프로문학 자체 가 창작이 불가능해진 외부적 상황 속에서 대부분 의 작가들이 방법론 을 바꿀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순수문학이었다. 그러나 그후 등장한 순수문학은 프로문학이 지니지 못했던 예술적 표현기교를 가지고 오히려 문학의 전체 산을 이루어 나갔다. 이데올로기는 없어 도 표현의 기교는 능숙한 솜씨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시기 여러 작가들 중에서 이효석은 이태준 다음 가는 순수문학의 대표적인 소설가였다. 그런데 효석의 문학에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고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 속에 모든 인간들은 환상세계 처럼 인간적 마찰도 없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의미 에서 부정적인 측면도 엿보이는 극단적인 순수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바 바로 그때문에 이효석은 순수문학의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순수문학의 작가 이효석에 대하여 많은 작가들이 고도로 평가하였다. 《이효석씨의 은 아마 조선 언어 예술이 도달 할 수 있는 한 정점일 것입니다. 이효석의《메밀꽃 필 무렵》은 1936년 〈조광〉 10월호에 발표되었고, 1975년 삼중당에서 같은 제목의 단편 집을 펴낸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단편집을 펴냈다.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시적인 정서가 흐르고 애틋한 느낌을 준다.-[문장]-김종한의《시문학의 정도>에서》,《이 효석씨의 단편은 우리 문단에서 단편소설을 의식하고 쓰는 희귀한 작가의 작품이다. -임화-》《한국 현대 문학의 한 지점에 서서 진정한 서구적 현대성을 문학으로써 구상화하여 보였고 단편소설이 가져야 할 예술성과 그 기법면에 새로운 개척의 공헌은 귀중한 것이었다고 생각 한다.              ㅡ정한모ㅡ 2. 연구방법: 본 논문은 사회역사주의비평방법과 문본비평의 방법으로 이효석의 소설창작 특히 그의 대표작 을 현대 시점에서 투시 하여 그의 소설문학이 한국문학사에서 가지는 의의와 지위를 재 천명 하려 한다.                                      본 론 이효석은 1907년2일에 태어나 1942년5월25 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짭은 일생 동안에 그는 2편의 장편소설을 포함하여 70여 편의 중,단편소설 및 120여편의 비소설산문을 썼고 오늘날 이 작품 들은 일곱 권으로 된 전집으로 묶여 있다. 이효석의 문학은 순수 문학이었다. 그 작품 속에는 선악이 대립되는 인간 사회의 신음소리 와 그 분노, 좌절과 윤리적 감정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효석이 자연에서 찾고 있는 최고의 가치는 이간과 자연과의 합일 상태 )[1] 를 이를때 얻어진다. 이 합일사태가 달성된 예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옷을 완전히 벗어 버린 인간들이 바닷물 속이나 정원 속에서 노니는 원시적 광경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그가 참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이상적 상태는 인간이 자연과 이루는 조화이다. 이 조화 의 비전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은 산이며 별다른 사건이 없이 주인공이 자기의 생각을 전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인간 자연 속에서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유토피아를 아낌없이 구가하고 있다.    이효석 문학의 특성을 해명하는 한 방도삼아 철저한 스타일 분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석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단 문학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음을 주기 때문만이 아니고 작가의 인력이나 정신의 구조를 밝히는 데까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효석은 현란하고 매혹적이면서도 대체로 설득력을 잃지 않은 산문을 씀으로 해서 주목을 끈 작가이다.                             이효석의 대표작은 이다. 작품의 기법이나 작가의 정신 세계를 말해주는 점에서나 이것은 가장 두드러진 이효석 문학의 특징을 나타내고 [2]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작품은 종래의 일반 소설 일반이 지니고 있던 혁명적 서술 형식을 벗어나고 있다. 여기는 허생 원, 조선달, 충주집, 동이 같은 인물 이외에 나귀가 등장하며, 그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학에선 환성적 수법도 훌륭한 예술적 효과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환상이 작품 기법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동문학에 있어서도 그것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환상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은 거부되어야 할 문명 사회조차도 없는 마당에서 그것이 거부되고 있듯이, 환상을 낳는 현실도 없이 환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리석은 미몽 속의 환상이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문학이 지녔던 대부분의 경향으로 본다면 이 같은 효석의 문학은 의식적으로 현실 도피에서 나타난 것이며 그 같은 현실 도피의 온상 속에서 안일한 환상의 미학에만 빠져있던 나머지, 사물을 보는 시력 자체가 너무 지나치게 악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수만년 동안 어둠속에 사는 벌레들의 눈이 완전히 퇴화해서 결국 은 밝은 세계에 나와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을 갖게 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효석의 문학은 순수문학이 지닌 내용의 공백이라는 약점을 누구보다도 두드러지게 지닌 문학이며 한편 언어 예술로서의 기법으 로서도 역시 대표적으로 장점을 지닌 문학이다. 효석의 문학이 지니는 문학사적 가치는 프로문학 이후의 순수문학이 지녔던 가장 큰 장점과 단점을 이렇게 다 같이 두드러지게 구비하고 있어서 그 문학의 정체를 대료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찬사는 문학사적인 면에서 새로운 작가적 존재가 확인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순수문학이라는 것 자체 만으로라도 새로 운 문학사적 가치가 있는 것인데 그는 그 작가군 속에서도 가장 많은 찬사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중에서도 이 받고 있는 찬사나 임화가 그의 단편을 가리켜서 너무나 탁마된 형식이라고 추켜세운 것은 특히 효석의 문학이 지닌 문학사적 가치의 큰 비중을 설명한 것이 되겠다. 그의 문학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가장 큰 구멍은 그의 문학 에 역사와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어떤 시대의 어떤 사회가 나타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문학은 바로 인간 학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 속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충돌하고 또는 진실과 진실이 충돌하며 고민을 낳는다. 그 고민이 바로 인간학으로서의 문학이 출발하는 기점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 속에는 그 같은 사회가 없고 사회가 없으니 그 사회가 존재하는 위치로서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 은 환상의 문학일 뿐이다. 소설은 주로 세 사람의 인물로 스토리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지만 허생원의 생애나 동이의 기구한 운명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나면 등장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남는다. 중심 인물인 허생원은 숫기가 없이 외곬으로 살아 온 소박한 자연인 이란 점에서 전통적 토속적인 한국사회의 인물이라고 자리매김 한 평론가도 있는데 세 사람 모두 하나같이 세상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고독한 떠돌이 약자들이고 생활의 소용돌이 속에서 밀려나 있는 변연 인들이다. 어찌보면 소설의 중심 사상은 작품의 배경 속에 녹아 있는바 궁극적 으로는  “혈육 찾기” 에 귀결된다. 봉평장터와 봉평에서 대화 로 가는 길에 달빛과 메밀꽃 그리고 개울은 하나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런 자연환경은 자연과 인간의 친화 또는 조화를 의미하는 낭만적 공간이다. 이런 낭만적이면서도 가슴이 쓰리게 하는 배경은 작품의 애수에 찬 그리움으로 이끌어 간다.   소설에 나귀가 가지는 상징성의 부여도 특색있다. 나귀에 대한 외모 묘사와 행동묘사에서 나귀는 허생원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진 존재 로서 본질적인 허생원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허생원과 함께 운명 적으로, 정감적으로 융합된 나귀가 가지는 상징성은 소설의 예술성을 특이하게 살리는 구실을 하고 있다. 즉 주인공 허생원의 성격 창조나 예술상의 효과를 위해서 나귀의 내력이나 인간적인 운명과 함께 그 외모나 행동의 양상까지도 유사하게 묘사된 것이 바로 목적, 의도 적임을 시사한다. 허생원과 나귀의 관계가 단순한 소설 장치에 머물지 않고 대등관계 로 주제와 결합시킨 것은 확실히 이효석 작가만의 창작 기교이다. 즉 원초적인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노린 듯한 작가의 주제 의식에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는 작가의 기본관념이 이 이채로운 소설을 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소설 의 알심들인 정서적 분위기의 조성과 더불어 이 점이 소설의 가장 주요 한 성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메밀꽃이 피였던 달밤. 한 녀인과 맺은 단 한 번의 인연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그러나 다시 만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여기저기 떠도 는 한 장돌뱅이 애환을 통해 삶의 한 단면을 시사하면서 만남과 헤어 짐의 구도를 갖춘 이 소설은 유랑인의 정처없는 길이 곧 삶의 현장으 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가는 자연주의 기법으로 은근슬쩍 문명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산과 들과 풀 한 포기, 나무 한 줄기까지도 찬양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자연은 인간이 그저 바라보고 감상하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서로 피가 통하고 호흡이 통하며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서 한 덩어리가 된 자연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라보고 감상하는 자연이 아니라 서로 한몸이 된 자연인 이상 그 자리를 벗어난 인간은 그 순간부터 생명의 참된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효석의 문학에 있어서 인간이 나무와 마찬가지로 말 밑에서 부리가 돋고 파란 물이 우러나오는 것처럼 표현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효석의 문학은 로렌스의 문학 사상을 도입해서 그의 토착적인 언어와 순수문학의 기법으로 가공한 문학이다 에서 보자면 허생원과 조선달과 동이는 좁은 길에 들어서자 모두 나귀등에 올라탄다. 외줄로 늘어서서 골짜기를 지나 간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이 나귀등에 올라 탈 수 있었을까, 나귀등에 는 짐이 실려있다. 이 장에서 저 장으로 떠돌아 다니는 그들은 장 바닥에서 풀어놓을 필목과 그 밖의 일상 생활 도구 일체를 나귀등에 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는 짐을 모두 싣고 또 사람이 올라타 있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남들이 봤다면 지탄 받을 노릇이다. 물론 억지로 탈수야 있었겠지만 대관령을 넘어 대화로 가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나귀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이다. 과연 그들이 나귀를 그토록 무리하게 탈 수 있는 사람들일까. 도무 지 현실적으로는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지극히 아름다운 풍경의 한 토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현실적 감각을 잃고 다만 환상적인 미몽 속에서 사건을 서술해 나갔기 때문이다.                                       결론 상술한 바와 같이 효석 문학의 성격과 그 문학사적 가치는 어느 정도 밝혀진 셈이다. 그러나 몇가지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의 문학을 좀 더 비판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의 자연주의 사상에는 문제점이 있다. 외국 문학의 방법이나 사상 을 도입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물론 시비를 가릴바가 아니다. 그러나 어떠한 외국문학이라도 그것이 우리 문학에 들어왔을 때에는 새로운 문학 풍토와의 마찰을 통해서 진통을 겪고 한국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독자적인 것으로서, 토착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효석의 문학은, 외국상품을 구입해서 한국의 포장지로 다시 꾸려 놓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극히 순수한 한국말을, 더구나 토착적인 언어를 가졌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것인가, 적어도 그 작품에 나타난 사상적인 면에서만 보자 면 그의 문학은 로렌스 문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사상은 한국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인 은 비판하고 거부할 만큼 근대 문명을 갖고 있지고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효석의 문학은 순수문학이 지닌 내용의 공백이라는 약점을 누구보다도 두드러 지게 지닌 문학이며 한편 언어 예술로서의 기법 으로서도 역시 대표적으로 장점을 지닌 문학이다. 효석의 문학이 지니는 문학사적 가치는 프로문학 이후의 순수 문학이 지녔던 가장 큰 장점과 단점을 이렇게 다 같이 두드러지게 구비하고 있어서 그 문학의 정체를 대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효석에게 있어서 인간, 산 그리고 자연 사이의 혼연 일체상태가 참으로 하나의 극치를 이루는것은 모밀꽃 필 무렵이다 특히 플롯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을 여러편 써서 독자들을 불만스럽게 한 이효석의 조화가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문헌 (략) [1] 이효석 문학 심포지움 자료집, 효석문화제위원회), 1999  第89页 [2] 이상옥 ,『 이효석 - 참여에서 순수로 』, 건국대학교 출판부 , 1997. 第7页
236    “잘코사니”를 론함 댓글:  조회:9599  추천:3  2013-01-31
                                    “잘코사니”를 론함                                                 최 균 선      “잘코사니” 는 명사로서 사전식으로 “미운 사람이 당한 불행한 일을 고소하게 여김”이라 해석된다. “잘코사니”의 심리는 동서방, 피부색을 막론하고 인류전반의 공통한 심리인것 같다. 일어에는 감탄사로 쓰이여 “ざまを見みろ, いい気味きみだㅡ 그래 싸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영어에도 “잘코사니가 ‘laugh at other's troubles”로 번역되고있다.     한어에서 잘코사니와 맞먹는것은 “幸灾乐祸”라는 성구이다. 이 성구의 유래는 고서《좌전.희공14년(左传·僖公十四年)》에서 찾고있다. “배시무친,행재불인(背施无亲,幸灾不仁)”이라 하였고 또《장공20년(庄公二十年)》에“금왕자퇴가무불권, 락화야 (今王子颓歌舞不倦,乐祸也)”라 하였다.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춘추전국시기 진(晋)나라에 재황이 발생했는데 진(秦) 나라에 량식을 팔라고 청을 들었다. 당시 대신이였던 백리계(百里奚)는 량식을 파는데 찬성하였다. 진나라 (秦)에서는 진(晋)라에 대량적으로 량식을 지원해주었다. 그리하여 진(晋)나라에서는 기황을 넘기게 되였다. 이듬해 진(秦)에 재황이 발생하였다. 하여 진(晋)에 구원을 청하였다. 그런데 진(晋)나라에서는 지원해 주려하지 않았다. 이에 진(晋) 의 대신 경정권(庆郑劝)이 왕에게 간하기를 “배시무친, 행재불인,탐애불상, 노린불의,사덕해실,하이수국 (背施无亲,幸灾不仁, 贪爱不祥,怒邻不义 四德皆失 何以守国)”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수 있듯이 원래는 국가지간의 관계를 두고 한 말인데 후세사람들이 줄곧 개인과 개인사이에서 늘 인용하여 온것이다. 현대어로는 선의적이 아니라는 뜻에서 다른 사람이 재화를 당했을 때 기쁘게 생각하는것을 가리킨다. 이와 비슷한 단어 로서 “落井下石、乐祸幸灾 ”가 있는데 우리 말로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는 속담과 맥을 같이 한다. 반대어로는 “토끼가 죽으니 여우가 슬퍼한다(兔死狐悲)가 있 고 동병상린(同病相怜) ”이 있다.      화란의 학자(戴克)는 만약 어떤 사람이 잘코사니를 부른다면 그 재난이 그에게 리익이 있기때문이라고 하였다. 잘코사니를 잘 부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 당하는 재난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농촌아이들의 말로 “쌍통, 맹통” 인데 그로부터 자신의 흠모 혹은 투기정서를 풀면서 자아평가를 적극 높이려한다. 일상생활에, 주변 사람들속에는 이런 얄미운 심통의 주인이 비일비재이다.     만약 후자의 심보라면 바로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희열을 찾아 자기 마음속에 악마를 기쁘게 한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 다른 사람의 존재에서 위기감, 혹은 위협감을 느낄 때 생기는 일종 자아긍정심리이다. 잘코사니를 부르면 자아감각이 좋아질수 있고 자아긍정심이 가강될수는 있되 인간으로서는 더할나위 없는 말째요 망석중이라 할것이다. 이런 자들은 동정심이 결핍하고 랭혹무정하다.     잘코사니를 부르는 심리는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심리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덕의 각도에서는 그러한 심리기제에 대하여 명확한 분석과 정의가 아직까지 없다. 심리학자들은 잘코사니가 절로 나오는 과정에서의 작용을 정경반응성 잘코사 니와 투사성(投射性)잘코사니로 나누어 분석하있다.     정경성잘코사니란 이외의 돌발성적인 정경에서 당사자가 조우하게 된 불행한 사건속에 내재한 골계(滑稽)성으로 하여 관찰자에게 희열성적인 정감반응이 생기는것이다. 태도투사성 잘코사니란 관찰자가 불행한 사건과 유관된 인소, 례컨대 당사자의 신분 및 불행의 원인, 후과에 대하여 알고있는던차 발생된 불행한 사건이 자기가 기대심리에 부합되여서 즉흥적으로 산생되는 희열감 즉 잘코사니를 가리킨다.     그 결과는 후자의 잘코사니가 산생되는 과정에 관건적인 작용을 논다. 그리하여 대방에 대하여 음으로 양으로 반감을 가지고있던 사람은 대방이 부딪친 재화가 참담할수록 희열감이 정비례로 높아지고 잘코사니도 “그러면 그렇지! 쌍통이다”라는 고성으로 터져나와서 저도 억제할길 없이 무릎을 치며 쾌재를 부른다.     여기서 “잘코사니”에는 두가지 층차의 함의가 있음을 알수 있다. 첫층차는 다른 사람이 재화를 당한것을 지각한것이고 두번째층차는 다른 사람이 당한 불행에서 기쁨을 찾는것이다. 그런데 두개 층차에서 가리키는 다른 사람이란 모호개념이 된다. 말하자면 “타인”의 범주에는 대부분 익숙한 사람인지 아니면 생면부지의 사람인지? 타민족인지, 동족인지, 국내인인지, 외국인인지, 대방의 재난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재난이 어찌하여 다른 사람의 희열감을 산생시키는지 등 모호상태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남의 재난에서 얻는 “희열감”과 평시에 사람들이 느끼는 희열감을 놓고 말할 때 그 심리감각은 질적으로 다르다는것이다. 보통 인간대 인간사이에서 산생되는 쾌재ㅡ잘코사니는 렬세에 처한 군체 혹은 개인이 우세에 처해있던 개인 혹은 군체가 불행하게 재난에 처하게 되면 “지화자쟈!”하고 잘코사니를 부르게 된다.     잘코사니가 나오게 되는 정감반응은 남녀구별,년령구별이 없는 인류공통의 심리병이지만 민족성으로 말하면 우리 단군족들이 이 면에서도 뛰여나다고 말할수 있다. 속담에 있듯이 사촌이 기와집을 지어도 배아파하는 그런 사람들이 무시로 잘코사니를 부를 심리준비를 하고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심보대목에 사람마다 오장육보로되 놀보는 오장칠보인것이 심사부(心思腑)하나가 왼쪽 갈비속에 장기 궁짝만헌것이 붙어가지고 병부 줌치찬듯 딱 이놈이 앵겨가지고 남한테 심술을 부리는듸 놀보심사 볼작시면 술잘 먹고 쌈 잘하기, 남의 노적에 불지르고, 불붙는듸 부채질, 글 씨는듸 옆쑤시고, 사집병에 비상넣고, 제주병에다 가래춤 뱉고, 옹구진놈 가래뜨고, 사그짐은 작대기차고, 우는 애기는 발구락 빨리고, 똥누는놈 주저앉히기, 새암가상이 허방을 놓고, 호박에다가 말뚝 박고, 곱사동이는 되집아놓고, 앉은뱅이는 태껸하고, 이런 육시를 헐 놈이 심술이 이래노니,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이런 난장을 맞을 놈이!    이런 인물형상은 정채로운 과장법의 전형이로되 현대사람들속에 이따위 심술보가 있다면 “모든개 매”에 맞아 제명을 못살것이다. 그누가 만약 놀부처럼 남의 재화에 잘코사니를 부르는 심통이라면 인간성이 제로이고 그것이 옹근 민족의것이 된다면 민족렬근성이라 할것이요 국민적이라면 국민성이 되는것이고 그것이 국가대 국가의 처사라면 국격의 저질을 말해주는것이 되리라.    개체간에 비정한 심술은 인간성에서 비롯된것이고 국제외교에것은 비록 그 규모가 크고 차원이 높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인간성의 문제에도 소급된다고 해야 할진대 요즘 나오는 기사문을 보면 이웃이 당한 재난에 잘코사니만 부르는게 아니라 붙는 불에 부채질까지 하여서 왼고개가 탈린다. 내리익을 따져 검은것을 희다하고 흰것을 검다하며 시비도리가 강권의 메가폰이 되는판에 작정하고 지어내는 “다음” 의 어떤 기사문들은 참으로 기특하면서도 야비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2013년 1월 24일      
235    어떵꿍이가... 댓글:  조회:9645  추천:1  2013-01-29
                                      어떨궁이가…                                           최 균 선       농촌에서는 “어떨궁이가 사람잡는다”는 말을 잘 쓰는데 사전에는 물론 검색창에서도 찾을수 없으니 아마도 연변특유의 방언인듯싶다. 나름대로 해석해보면 무엇을 은근히 바라거나 욕심낸다는 뜻같은데 기대심리의 변종일가? 기대란 보다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과 기다림으로서 소망, 소원, 바램, 념원, 갈구, 추구, 희망, 갈망 등 단어들과 통한다. 희망은 인간의 삶의 기둥으로서 특히 가난한 자에게는 빵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대에는 적중하지 않는 인소도 고유한바 기대불확실성이라 이른다.     기대심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 파란만장한 생활의 바다에 순풍만 불어오지 않으므로 기대의 쪽배에 희망을 싣고 보다 좋을 래일의 대안을 향해 노저어가는것은 바람직하다. 우리는 기대심리 덕분에 자기를 가다듬고 또한 다른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분발하기때문이다. 한편 기대는 매양 우리를 만족시키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버겁고 고달프게 하며 헛갈리고 허황할 때에는 지치고 자기모순에 방황하게도 된다. 많은 경우, 잘못되고 비실제적인 기대에 허벌나게(굉장하게) 매달리때문이다.     희망이 너무 크면 실망하는바도 크다는 말이 있다. 기대만큼 이루어지리라 맹신하지 말아야 하고 기대심에 일체를 걸지도 말아야 한다. 기대심으로 앞날을 환상하면 억지추정이 나오기십상이다. 기대는 대상성이 있고 상호관계에서 나타나므로 보상의 역효과를 예상하면서 현실에 바탕을 둔 기대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왕왕 과정과 결과에 대해 오산한다. 곁에서는 빤히 보이는데 본인만 자아감각이 좋아있다.     기대심리의 전제 혹은 바탕은 추정과 추리이다. 편견, 독선, 추리, 추정이 불러온 빗나간 결과, 편견의 바다에서 스스로 정보의 진주를 건져낸것이라고 추단하는것은 어리석다.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상은 우리에게 다른것을 요구하는데 기대만 고무풍선처럼 불구며 자족할것이 아니라 기대를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대비의식도 미리 챙겨두어야 명지하다. 준엄한 현실과 기대사이에 등호가 성립되지 않고  잘못된 판단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많은게 기대심리이기때문이다     우리가 그 어렵던 나날을 넘어 오늘까지 온것은 바램-기대감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늘 고기랑 먹고 잘 입고 기와집에서 살았으면 하고 소망했지 개혁개방이 되여 벼락부자가 되고 별장짓고 채색텔레비를 갖추어서 위성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키보드 두드리고 자가용 굴리고 유흥업소에서 아가씨를 고를수 있다는 엄청난 어떨궁이는 누구도 가지지 않았다. 어떨꿍이가 사람을 잡을수 있으니까.     농촌에서는 오뉴월 쇠불알 떨어지면 구워먹겠다는 속담도 잘 쓴다. 허황한 기대심리를 토속적으로 따끔하게 질타하는것이다. 무더위에 축 늘어져 건들거리는 쇠불알은 담방 떨어질같다. 그렇다고 숯불을 안고 따라다니며 삶아먹으면 질길가? 구워먹으면 바삭바삭할가? 고소할가? 쇠오줌내 날가? 온갖 어떨꿍이를 삼킬 바보가 있는지는 모르되 쇠불알은 수천년을 흔들거렸고 지금도 위태위태하게 흔들거리고있다. 《송나라사람이 나무밑에서 토끼를 기다리다(守株待兔)》라는 우화는 협애한 경험으로 변통할줄 모르며 혹은 요행심리를 가지고 공짜로 무엇을 얻으려는 사람을 비유한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면 정지된 안광으로 부단히 변화하는 사물을 바라 보기에 필연적으로 실제를 탈리하는 주관유심주의 착오를 범하게 된다는 도리도 깨우쳐주는 한편 허황한 기대심리(어떨궁이)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것도 비웃고있다.     인생에서 어떨꿍이만큼 역향적인것은 더 없다. 실현불가능한 기대심리도 접을줄 알아야 인생이 덜고달프다.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잘되면 쓰려고 미리부터 준비함을 웃거나 너무 성급하게 서두는것을 경계하는 속담이 많다. 이를테면 아이낳기전에 기저귀 장만한다. 오동나무 보고 춤춘다. 오동씨만 보아도 춤춘다, 시집가기전에 강아지 장만한다, 세벽달 보고 초저녁부터 나앉으랴, 시집도 아니가서 포대기 장만한다. 씨보고 춤춘다…아무튼 우리 선조님네들이 지혜롭기 그지없다.     기대는 갸륵하지만 어떨꿍이 많은 사람은 되우 불쌍하다. 뜻대로 되여주지 않는것이 세상사요 한치앞도 모를것이 인생이요 아무도 추정할수 없는 력사의 발걸음인데《썅디메이(想的美)》만 앞세워서야 되겠는가? 다 지어놓은 기장밥도 먹어야 먹은줄 알라는 말도 있다. 어떨꿍이도 너무 요란스러우면 남새스럽다. 이웃집 떡메소리에 김치국부터 퍼나르는 그런 경박함도 세인을 웃기고도 퍼그나 많이 남을 일이다,    여기까지 쓰고나서 더 횡설수설할 건데기가 없어서 근 2년을 묵여두고 있는데 오늘 우연히 인터넷에서 의론거리가 생겨 먼저 여기에 그것을 옮겨본다.    〖세계일보 〗2013.01.29 18:54     北체제 불안정성 예측 가능해졌다     통일부 ‘북한정세지수’ 개발     통일부는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 등을 추정하기 위한 북한정세지수 개발을 완료했다고 29일 밝혔다. (본문 략)     2010년 착수한 정세지수 개발은 완료됐으나 정보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북한의 정세 변화를 예측해 지수화하는 작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민서기자}      우선 부제가 어수선하다. 개발(开发)이란 무어냐? 새로운것을 연구하여 만들어냄이나 무엇인가를 보다 쓸모있거나 향상된 상태로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례컨대는 토지, 천연자원 따위를 개척하여 유용하게 만든다. 지식, 재능, 산업, 경제 따위를 발달하게 한다. 등. 개발이 아무리 좋은들 정세마저 개발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정세란 무어냐? 정세란 (情势)일이 되여가는 사정이나 형편, 현재 세계가 움직여 나가고있는 정치적인 형편 등이 아니던가?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사회, 시대발전의 객관규률에 의해 형성되는 정세를 만들어낸다니 어불성설이다. 력사는 쓴다고 하지만 돌아가는 정세를 누가 생각나는대로 주물럭거려서 빚는단말인가? 참으로 대견한 발상이요 기특한 언어구사라 하겠다. “정세 변화를 예측해 지수화하는 작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고 쓰고있다. 왜? 근원은 탁상공론에 불과하기때문이다. 보통 어떨꿍이가 많은 사람들이 탁상공론을 벌리기 좋아하는 법이다.    탁상공론이란 현실성이 없는 허황한 리론이나 론의를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탁상공론이라면 조괄의 지상담병을 떠올리게 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이나 싹이 보이는 리론이라도 실험, 검증을 통해 실현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괄의 돌이킬수 없는 실책은 바로 그런것의 부재에서 잉태된것이다. 탁상공론, 지상담병은 공리공담을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풍자적의미로 확대하여 쓰기도 한다. 탁상공론은 위학자들의 특장인것으로 사료된다.     설계도는 건축물이 아니다. 이는 소학생도 다 아는 상식이 옳던가? 그냥 욕망대로 어떨꿍이(기대심?)를 앞세우고 세미나도 열고 통계표도 내보고 무슨 비용인지도 마련한다고 수선을 떨었지만 어떨궁이를 동네방네 고아대면 빈축을 사게 된다. 세상 만사가 알쏭달쏭인데 혼자 부르고 쓰는 어떨꿍이가 공유될건가? 어떨꿍이가 깨지면 닭쫓던 개 울쳐다보는격이 되는데 가로보나 세로보나 우스운 랑패상일게다.                          2011년 5월 4일ㅡ2013년 1월 29일
234    사랑 명상록 댓글:  조회:11501  추천:0  2013-01-28
                                 사랑명상록                                     진 언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성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건만 사람들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라는 아름다운 말로 개괄한다. 사랑이 예술의 주제로 되는것은 생명발로 의 아름다운 형태인 예술에 앞서 사랑이 인생의 영원한 주제로 되였기때문이리라.       사랑을 딱히 이름지을수는 없으되 사랑과 인생을 동의어라고 말할수 있다. 따라 서 사랑의 비밀은 인생의 비밀이 되는것이요 인생길에서 엮은 사랑의 편장은 곧 그의 인생의 편장이 되는것이다. 젊은 시절엔 무지개같은 꿈을 주고 늙어서는 인생의 저문 언덕에 추억으로 되새겨지는 사랑에 대한 자성은 자기 인생에 대한 자성이 된다.       사랑을 한권의 책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미완성작으로 남기마련이다. 젊은이들의 사랑책은 랑만파의 시집으로서 작열하는 격정으로 충만되여있으며  아름 다운 상상과 우아한 비유로 차있다. 중년의 사랑은 한부의 황당파의 희극으로서 극속 에 인물관계는 애매하며 복잡한 모순충돌은 언제나 당사자도 망연자실과 곤혹에 빠지 게 한다. 로년인의 애정은 한부의 담담하고 평온한 산문집으로서 가을하늘처럼 맑고 쓸쓸하고 고요하다. 때때로 멀고 분방한 회포가 쪼각구름처럼 떠오르도 한다.       사랑책은 알뜰하게 간직하고 애호할 필요가 있는 소중한 책이기에 읽을때이든 아니 읽을 때이든 아름다운 뚜껑을 씌워두어야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어둔 사랑은 망망대해속에 빙산과 같고 창망한 하늘에 비를 머금은 비구름과 같으며 깊은 산속에 묻힌 백만년전 광맥과 같고 깊은 우물속에 고요한 물과 같기도 하다. 이런 말없이 집착하는 사랑은 소홀히 번질수 없는 밀서와 같아서 평생 유일한 해독자를 기다려야 한다.       랑만으로 넘친 활발한 애정은 재미있는 련환화이고 장중하고 자중하는 애정은 두터운 정장본이며 파란곡절속에서 동고동락한 사랑은 심혈로 쓴 초사본이지만 글줄 곳곳에서 옥처럼 밝은 빛이 반짝인다. 헤여졌다가 다시 맺은 사랑은 수정보충한 재판 본이고 생사불변의 애정은 절판서이며 총서처럼 엮어진 애정은 틀림없이 이다.       사랑책은 한생을 진실된 심장으로 엮는 소중한 인생편장으로서 아무도 대신해 쓸수 없다. 정장본이든 초사본이든 그리고 수정재판 본이든 옹근 인격이 시사되는 인생의 화랑에 전시되는것으로서 연습이 없이 쓰는 초고이자 완성고가 되기에 실패작이 많게 된다.                                   1.사랑의 이미지                           ㅡ 사랑이여, 너의 이름은?ㅡ   №ㅡ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진실로 발견할수 있는 복지는 사랑의 품이다. №ㅡ한녀인과 평생토록 사랑을 나눈 남자가 사랑의 이미지를 빛나게 새긴 남자이다. №ㅡ사랑을 려행이라 한다면 떠나기전에는 마음이 서두르고 종착역에 가까워질수록 몸이 서둔다. №ㅡ사랑이 체념에 정착할 때 그것은 완성된 사랑이다. №ㅡ죽음으로 담보하는 사랑이래서 다 고상한 사랑인것은 아니다. №ㅡ애정에서 시간은 시금석이고 리별은 고험의 척도이다. №ㅡ사랑의 전서에는 별책이 필요없다. №ㅡ수집음은 사랑의 나무에 피는 첫꽃송이. №ㅡ참된 사랑, 그것은 어쩌면 인류의 공동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ㅡ사랑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ㅡ머나먼 인생항로에는 사랑외에는 딴 길이 없다. 사랑의 길밖 에는 엉겅퀴만 무성하리라. №ㅡ고독병에는 사랑이 밀방이다. №ㅡ사랑의 책에는 눈물자국이 없도록 하라. 사랑의 실패사가 곧 전반생의 실패 사일가? №ㅡ가장 저급적인 애정은 조건부적인 사랑임에 틀림없다. №ㅡ사랑이란 승화된 배려이고 증오란 나머지 찌꺼기이다. №ㅡ사랑의 꽃대문은 지성의 열쇠로만 열린다. №ㅡ사랑의 수사학은 영원히 미완성작품일것이다. №ㅡ사랑의 동산에 무지개를 걸어주는것은 신비성이다. №ㅡ사랑학에는 질량의 구분이 없다. 량자는 언제나 융화되여있다. №ㅡ세상에 멋지고 아름다운 말은 많지만 사랑보더       매혹적이고 황홀한 말은 없으리라. №ㅡ사랑은 누구에게서나 풀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그리워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그속에 원망이여있고 점유한 뒤에는 한결같지 못하고 헤여지면 그 귀중함을 절감하고 사소함으로부터 붕괴에 이르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구하려드니 사랑이 지어낸 인생일사 이면서도 참으로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이다. №ㅡ현대인의 토템은 공방형, 현대사랑신은 재물신이여라. №ㅡ사랑병은 세계적인 불치병, 누구나 한번씩 앓게 되고 한번 병들면 한생에 명약이 없느니라. №ㅡ사랑은 결전이 아니기에 승부가 따로 없다. №ㅡ사랑에는 간선이 있어서는 안된다. 언제나 숨찬 언덕길에 가파로운 언덕길이 있을뿐이다. №ㅡ오래 헤여져있어도 마냥 불타오를 때 참사랑의 순금이 제련되 여 나온다. №ㅡ사랑을 따내는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사랑의 장구성을 보장하는 기교가 중요한 것이다. 사랑의 팽이는 팽이채가 세찰수   록 신나하는것이다. №ㅡ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천사의 말이고 그 후에 두고두고 하는 말은 타협. №ㅡ  사랑의 순수성은 진실과 도피로 해석되여야 할것이다. №ㅡ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의 차수에 따라 색바랜다. №ㅡ  첫사랑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첫사랑이 되는것이다. №ㅡ  권태라는 단어는 사랑사전에서 사라지지 않을것이다. №ㅡ  모든 사랑의 고백에는 언제나 정당한 리유가 있다. №ㅡ  사랑은 생명의 불꽃이다. №ㅡ  잃어버린 사랑은 놓쳐버린 물고기처럼 아쉽기만 한것이다. №ㅡ  사랑은 아름다운 오해, 착각의 미학이다. №ㅡ  한 녀인을 죽도록 사랑한다는것은 그녀의 품에서의 재생을 의미한다. №ㅡ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세가지를 잊는다. 시침을 잊는다. 하나의 감정외엔 죄다 심드렁해진다. 님을 위해서는 불가능한것이란 없다. 갑자기 인생이 귀중해진다. №ㅡ 사랑의 계산식: 외로움 + 기대 + 괴로움 + 그리움 + 서글픔 + 즐거움 + 흐느 낌 + 아픔 №ㅡ  사랑의 색채가 짙을수록 변색한 색갈이 창백하다. №ㅡ  참사랑은 무언속에서 익는다. №ㅡ  모든 사랑은 담보를 전제로 한다. №ㅡ  현대적사랑일지라도 얼마간의 신화가 있다. №ㅡ  무지개, 노을, 미인은 대자연의 걸작이다. 그러나 다같이 순간적이다. №ㅡ  가장 열렬한 사랑일수록 사랑의 과정이 거꾸로 짜진다. №ㅡ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받는 고통은 늘《즐거움》이라는 외투를 걸친다. №ㅡ  권태를 모르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짝사랑일것이다. №ㅡ  사랑의 미립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충격력은 지진처럼 마음을 뒤흔다. №ㅡ  가장 허무한 정열의 과소비는 생명을 내건 사랑놀음이다. №ㅡ  《사랑합니다.》라는 맹세가 이구동성인 경우라도 똑같이 지켜지는 일은 드믈다. №ㅡ  사랑에 대한 쾌락정도는 현실에 대한 망각정도에 비례된다. №ㅡ 사랑의 감정은 충전되여야 하지만 질투의 감정은 충전되지 말아야 한다. №ㅡ  첫사랑은 심장에 보금자리를 틀고 그후의 사랑은 머리속에서 맴돈다. 첫사랑은 생명의 첫연소. №ㅡ사랑은 인생의 예술극장이다. 정신의 시와 육체의 무도, 남자는 리드하고 녀자 는 연주한다. 남자는 시를 짓고 녀자는 노래부른다. №ㅡ  사랑병에 걸린 사람에겐 문병이 소용없다. №ㅡ  인생의 반려가 령혼의 안내자가 될 때 사랑은 곧 진문(眞門) ㅡ(불교의 말 ㅡ진실한 교)에 들어 선다. №ㅡ  시는 언어의 유희, 사랑은 감정의 술래잡이. №ㅡ  사랑이란 일종의 종교와 같다. 사랑이야말로 마음의 눈부신 빛 이다. 사랑은 지혜의 일부라고 솔로몬왕은 말했다. №ㅡ  사랑의  실책은 인생의 실책이 된다. №ㅡ  사랑이란 두사람의 가슴속에 핀 순결한 감정의 향화이다. №ㅡ  사랑의 넓이는 욕정의 심도와 반비례된다. №ㅡ  생달걀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맹세도 쉽게 깨여질수 있다는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ㅡ  결혼사는 길수 있어도 사랑의 력사는 꼭 그런것이 아니다. №ㅡ 사랑의 바다에는 일렁이는 꽃물결도 있거니와 사나운 폭풍우도 있다. 누구는 바다속에서 산호진주를 캘수 있고 누군가는 수수한 해초를 딸수 있다. 사랑의 바다길에서 호화로운 요트를 탈 수도 있고 위태로운 쪽배를 탈수도 있다. 어느 배에 오르든 대안에 이르기만 하면 매 한가지이다. №ㅡ 사랑은 인생교향곡의 아름다운 선률이다. 하지만 인생의 전체 악장을 이루 는것은 아니다. №ㅡ  사랑이란 젊은이들의 특권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나이에 이를때까지 고집한다. №ㅡ  훔쳐낸 사랑은 달콤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벌써 기로에 들어선것이다. №ㅡ  인간세상은 사랑이 있기에 제우스의 알프스산정에 비길수 있다 №ㅡ  련정은 바보를 시인으로 만든다.                               2.    사랑의 열도   №ㅡ  진정한 사랑의 희열은 정화된 령혼의 분출이다. №ㅡ  사랑의 열도는 떨어져있는 거리와 시간에 비례된다. №ㅡ  련인들의 언쟁은 사랑에 대한 재확인일때가 있다. №ㅡ  사랑의 정열을 리성으로 다스리는것을 우리는 흔히 위선이라 부른다. №ㅡ 사랑은 점유로써 완성된것같지만 바로 그때로부터 격정의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ㅡ  정욕은 눈에서 타오르고 녀자의 허벅지사이에서 꺼져버린다. №ㅡ  인간의 정감사전에 허위와 황당이 오름으로써 사랑에 비애가 시작되였다. №ㅡ  눈에서 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애욕이다. №ㅡ  불타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항상 불타고있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다. №ㅡ  섹스는 언제나 사랑이란 꽃너울속에서 진행된다. №ㅡ  너무 여러번 련애에 실패하면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할수 없다. №ㅡ  사랑의 불길이 제일 먼저 증발시키는것은 지혜의 물이다. №ㅡ  사랑의 불길을 끄는데 가장 좋은 물은 사랑의 불길이다. №ㅡ  열번찍어 않넘어가는 녀자는 있어도 한번 찍어 않넘어가는 남자는 없을것이다. №ㅡ  사랑한다는 말을 껌을 씹듯이 하는 남자는 사랑의 고통도 껌을 씹듯할것이다. №ㅡ  시작과 끝이 그렇게 다를수 없는것은 전쟁과 사랑이다. №ㅡ  녀자는 남자를 착각의 챔피언(투사, 우승자)으로 만들고 남자는 녀자를 불만의 녀왕으로 만든다. №ㅡ  고독하고 외로운자가 뜨거운 사랑독에 잘 빠진다. №ㅡ  사랑했던 사람은 기억속 굳혀버리고 사랑하고있는 사람은 심장 속에 세우라. №ㅡ  사랑편지놀음이 끝나면 사랑일기로 번진다. №ㅡ 고뇌의 레루우로 사랑의 렬차가 달린다. №ㅡ  사랑의 폭포에 겁없이 뛰여드는 남자(녀자)는 인생의 장님, №ㅡ 인간은 그렇듯 사랑을 찬미하지만 침대가 알고있는 사랑은 그렇게 광채로운것이 아니다. №ㅡ  사랑의 유적지에는 이끼가 덮히지 않는다 №ㅡ  사랑할수록 등을 돌려댈줄 아는 사나이이야말로 사랑의 능수! №ㅡ  남자는 숨이 찰 일에 골몰하고 녀자는 얼굴 붉힐 일을 기다린다. №ㅡ  사랑에는 진공전만 가능하다. №ㅡ  사랑이란 전시품이 아니거늘 다정함이 남을 위한것이 아니다. №ㅡ 사랑의 맹세문에 첫줄에는 그를 위해 모든것을 바치겠다고 씌여있지만 마지막 페지에는 나를 위해 모든것을 바치라는 계약서가 씌여있다. №ㅡ  사랑에 나이를 불문하고 열중하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면 정신병자이다. №ㅡ  영원한 사랑을 꿈꾸려면 령혼이 항상 수면상태에 있어야 한다. №ㅡ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세상만물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ㅡ  사랑의 못에 빠지면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법이다. №ㅡ  사랑의 늪이 더 좋은가? 사랑의 폭포가 더 좋은가? №ㅡ  사랑에 미쳐돌아간다고 해서 사랑의 본질을 알고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ㅡ 사랑의 열정은 맹목에서 시작되고 사랑의 지속은 신비감에 의거하고 사랑의 본질은 비극성에서 표현된다. №ㅡ  녀자의 사랑은 받는것에 비례하고 남자의 사랑은 주는것에 비례한다. №ㅡ  더 열렬히 사랑하는 쪽이 사랑의 전쟁에서 더 참패한다. №ㅡ  녀자는 나이에 신경을 쓰는 동안은 사랑을 할수 있다. №ㅡ  사랑에 경험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질상에서 사랑의 도락 자이다. №ㅡ  사랑산에 오르는 지름길을 찾지 말라. №ㅡ  녀자는 감정문제에서 예감의 특이공능자이다. №ㅡ  사랑, 그것은 인간들의 기특한 광기이다. №ㅡ  녀자의 첫변화는 머리꾸밈새에서 시작되고 남자의 처변화는 술에서 시작된다. №ㅡ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은 사랑의 강심제이다. №ㅡ 가장 황홀한 불행은 사랑에 미친것이고 가장 불행한 황홀은 학문에 미친것이다. №ㅡ  사랑의 렬차에는 희생이라는 레루가 깔려야 한다. №ㅡ  노력해서 얻을수 없는것이 사랑이다. №ㅡ 척박한 마음에는 사랑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끈질긴 추구가 없이는 사랑의 줄기 가 뻗지 못하고 불타는 정열이 없이는 사랑의 꽃을 피울수 없으며 지극한 정성이 없이는 사랑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픔이 전혀없는 사랑에 추억의 책 이 씌여지지 못한다. №ㅡ  사랑이 깊이로 파고 들때 질투는 높이로 상승한다. №ㅡ  이불속에 녀자(남자)는 바뀔수 있어도 마음속에 남자(녀자)는 꼭 하나이다. №ㅡ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주고싶은 마음뒤에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고싶다는 생각 이 숨어있다. №ㅡ  사랑하다 죽은 님의 묘비는 떠나보낸 님의 가슴속에 새겨진다. №ㅡ  미모의 정부는 시간을 잊게 하고 현숙한 안해는 세월을 잊게 한다. №ㅡ  사랑의 못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하지 말라. №ㅡ  열에 달뜬 련인들에게는 마음의 시계만이 존재한다. №ㅡ  마음의 불꽃은 먼저 마음의 눈에 비낀다. №ㅡ  사랑의 랑자한 만찬은 침대우에서 열린다. №ㅡ  풀숲에서의 비정한 섹스는 수욕의 만족뿐이다. №ㅡ  늙어가는 부부간에 입맞춤은 강장제이다. №ㅡ  남자는 진공자인것 같지만 실상은 포로병이다. №ㅡ 사랑의 상품화시대에 산다는것은 련인들로 말하면 슬픈 일이다. №ㅡ  인류의 사랑의 시작은 원시인의 불의 사용시기와 같다. №ㅡ 사람들은 밝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어둠속에서 더 매혹적인것이다. №ㅡ  련애행각의 높은 수완은 마무리에 있다. №ㅡ  육신을 태우면 령혼이 그을리기 마련이다. №ㅡ  쾌락은 육신의 마취이다. 그래서 깨여나면 령혼이 더 아프다. №ㅡ  아무리 말이 많은 녀자라 해도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앞에서는 벙어리가 되여 버린다. №ㅡ  모든 인류가 사랑이라는 종교의 충실한 신도이다. №ㅡ  가장 아껴써야 할 말은 “사랑”이란 말이다. №ㅡ  늦어 타오른 사랑의 불길이 강렬한것은 땔감이 많이 축적되였기때문이다. №ㅡ  인간에제 제1전제는 산다는것이고 제1주제는 사랑한다는것, №ㅡ  사랑을 고아대는것은 사랑의 음치이다. №ㅡ  일생에 사랑밖에 남은것이 없는 사람은《령혼의 재벌》이라 할수 있다. №ㅡ  멀리 떨어져서 그리워하느니 날마다 싸우며 함께 살고픈 마음들이다. №ㅡ  인간을 사랑에 눈뜨게 한것은 조물주의 최대의 선물이다. №ㅡ  남편의 로임이 안해의 로임보다 1배 더 많을 때 결혼이 가장 온정할 때이다. №ㅡ  사랑의 승패는 감정의 자아통제에 달렸다. №ㅡ  녀자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남자라도 정작 돌아서 떠나버리면 서운해 한다. 그게 녀자들의 심리이다. №ㅡ  사랑이란 실제상 자극의 대명사이다. №ㅡ 한 녀자에 대한 찬사는 사랑의 수사학, 녀자에게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마취제 는 칭찬이라는것이다. №ㅡ  사랑에 빠졌을 때는 눈을 뜨지 말라. 현실이 너를 서운하게 할 것이니까. №ㅡ  깨고싶지 않는 꿈이 있다면 사랑꿈일게다. №ㅡ  사랑행위에는 딱 한번이란게 없다. №ㅡ 근래의 젊은이들은 흔히 봄에 만나 여름에 사랑하고 가을에 결혼하고 겨울에 헤여진다. №ㅡ  봄에 꽃피고 여름에 무성하고 가을에 결실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사랑의 사계절 №ㅡ 육체적결합에서 남자는 어린애로 녀자는 어머니로 된다는것을 당신은 믿지 않는가? №ㅡ  집에 불이 나면 어머니들은 아이를 찾고 처녀들은 련애편지를 찾는다. №ㅡ  유방으로 긍지를 느끼는 녀자는 정복당하고 싶다는 자아표백이 요 수치심으로 베일을 쓴 녀자는 끝내 정복당하지 않는다는 표징이다. №ㅡ  첫사랑을 떠올리는 녀자를 안고있는것은 따스한 고기덩이를 안은데 불과하다. №ㅡ  사랑이 곧 점유가 아니다. 마음의 끈으로 동이지 못한이상 그것은 욕망뿐이다.                                      3.    사랑의 안팎     №ㅡ  사랑의 허락은 곧 한번이 무한정이다. №ㅡ  녀자들의 제일 훌륭한 거울은 뭇남자들의 눈길이다. №ㅡ  녀자들이 곱게 보이려는것이 기실 남편 한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을 남자들은 알아야 한다. №ㅡ  몸은 창녀이지만 마음은 시인인 녀자는 사랑할만한 녀자이다. №ㅡ  질투없는 사랑은 소금을 치지않은 닭알. №ㅡ 나중에 갈라져도 첫감정이 거짓이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ㅡ 사랑의 이률배반은 의식의 범주일뿐만아니라 사랑의 실제《파산》에서도 표현된다. №ㅡ  천박한 녀자라도 일단 순수한 사랑을 느끼면 누구보다 더 희생적일수 있다. №ㅡ  녀인에게 애인이 생기면 그녀는 하인도 겸하여 얻은셈이다. №ㅡ  꽃의 비밀을 누구도 알수없듯이 녀자도 마찬가지다. №ㅡ  가장 참기 어려운것이 다섯가지이니 곧 설사, 가려움, 재채기, 졸음, 성욕이다. №ㅡ  사랑의 나무는 싹을 틔우기보다 무성하게 키워가는것이 더 어렵다. №ㅡ  악처를 만나면 철학이 필요없고 현처를 만나면 주치의사가 필요없다. №ㅡ  녀자는 때때로 자기 련애사에서도 관객이 되여보고 싶어한다. №ㅡ  운명적인 사랑에는 운명적인 리별이 있다, №ㅡ  철학가가 쓴 사랑책보다 한 소녀의 까만 눈동자가 더 많은 사랑을 깨우쳐준다. №ㅡ  현대아가씨들은 가리우기 위해서라기보다 드러내기 위해 옷을 고른다. №ㅡ  키스, 애무, 섹스가 아무리 되풀이되여도 사랑의 확증이 못된다 №ㅡ  사랑편지의 감동은 미사려구에 있지 않고 사랑편지의 무게는 페지수에 있지 않다. №ㅡ 자기부모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안해를 사랑할수 없다. 이것은 녀자 들이 대상을 고를 때 기본상식이다. №ㅡ  가장 불행한 결혼은 장가들기 위해 한 결혼이다. №ㅡ  《안해, 마님, 부인》ㅡ   사랑을 받자고 장가가는 사람은 안해를 얻고 장가드는법인가 하고 장가드는 사람은 마님을 얻고 리득을 보자고 장가드는 사람은 부인을 얻는다. 안해는 남편을 사랑 하고 마님은 남편을 편들어주고 부인은 다정할때도 있고 기승을 부릴때도 있다. 자기를 위해서는 안해가 수요되고 손님접대에는 마님이 수요되고 낯을 내는데는 부인이 수요된다. 불행이 생기면 안해는 마음을 풀어주고 마님은 덩달아 걱정하고 부인은 갈라지자고 한다. 안해는 고난의 길을 같이 오를수 있고 부인은 즐거울 때 팔을 낄수 있다. 우리가 나중에 세상을 하직하면 안해는 대성통곡하고 마님은 애석해 하고 부인은 상복차림을 한다. 잡지 (모스크바사람)에서 №ㅡ  녀자와 목도리는 부드러운게 가장 좋다. №ㅡ  남편과 젓가락은 강한게 좋고 안해와 행주는 깨끗한게 좋다. №ㅡ  남편은 드레박, 안해는 항아리. №ㅡ  동정의 닭알에서 여러번 사랑의 암탉이 기여나왔다. №ㅡ  녀자의 입으로 하는 부정은 부정이 아니다. №ㅡ  헤여지면 남이라는 말은 육채적관계의 발상법이다. №ㅡ  무관심은 결렬의 심부름꾼이고 질투는 사랑의 척후병이다. №ㅡ 련애는 장님, 결혼은 거기에다 귀머거리, 련애, 결혼은 또 거기에다 벙어리, №ㅡ  백마왕자의 첫애인이 되기보다 가장 사랑받는 농부의 안해가 되라. №ㅡ 섹스는 절대가인도 보통녀자로 만들고 하잘것없는 남자를 소중한 존재로 바꿔 버린다. №ㅡ 제일 그럴듯하게 하는 말이 사랑의 맹세이고 제일 흐지부지한것이 그 약속이다. №ㅡ  부부간에 금계명은 사랑을 자꾸 확인하지 말라는것이다. №ㅡ  가장 달콤한 환상은 짝사랑을 하는 소년의 가슴속에 있다. №ㅡ 만나려해도 만날수 없는것이 사랑이고 피하려 애써도 피할수 없는것이 사랑이다. №ㅡ  나이든 사람이 소녀를 사랑하는것은 범인들의 현장재현본능과 흡사하다. №ㅡ  정열적인 사랑일수록 밤의 장막속에 숨는다. №ㅡ  녀자들의 변덕은 감정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거개 허영심의 충동때문이다. №ㅡ  사랑의 불길이 아무리 세차도 다른 사람들에겐 강건너 불구경. №ㅡ  가까이 보아도 불에 데지 않는 불은 다른 사람의 사랑의 열화이다. №ㅡ  사랑의 행운아는 흔히 이성에 덤덤한 사람이다. №ㅡ  어떤 위인도, 권력자도 미인앞에서는 보통남자가 되여버린다. №ㅡ  치정에 빠졌을 때 조금 바보스러워 보이는법이다. №ㅡ  아담에게 이브가 없었더라면 원죄는 자위행위로 불리울것이다. №ㅡ  새소리가 노래인지 울음인지는 련인들만 판단할수 있다. №ㅡ  말괄량이가 성적인면에서는 얌전이보다 더 안전도가 높은법. №ㅡ  모든 남자들을 무릎꿇게 하는것은 한줌도 안되는 헝겊속에 그것이다. №ㅡ  사랑에 가장 재치있는 웅변술은 키스이다. №ㅡ  사랑의 착위는 일생의 착위(錯位)가 될수 있다. №ㅡ  남자의 《사랑해》는 《현재는》이라는 단어에 국한되고 녀자의 《사랑해요》는 《당신이 사랑하는 한》이라는 조건부가 첨가되여있다. №ㅡ  녀자의 사랑을 알기 위해 수많은 녀자와 련애할 필요는 없다. №ㅡ 녀자들은 시집가는 색시는 선망하면서도 자기의 결혼은 속박이라고 상심한다. №ㅡ 녀자의 굴욕은 남자의 기개를 세워주고 녀자의 방자함은 남자를 망석중이로 만든다. №ㅡ  남자는 깊은 사랑에 빠지면 친구를 잃게 되고 녀자가 그러하면 공중의 인기를 잃는다. №ㅡ  남자들속에 “개”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게 된것은 녀자들속에 “똥이 묻은 녀자”가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피장파장인것, №ㅡ  녀자는 인류의 정감사전, 남자는 누구나 서투른 해석자이다. №ㅡ  녀자들은 사랑의 꿀보다 질투라는 쓴 약을 더 먹기 좋아한다. №ㅡ  녀자는 거짓말의 작자, 남자는 그 말의 충실한 청중, №ㅡ  녀자에게서는 교양에 앞서 본능이 발휘된다. 리성보다 감각을 더 믿는것이다. №ㅡ  혼자서 술을 마시는 남자는 녀자를 필요로 하는것이고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녀자는 남자에게 지친것이다. №ㅡ  녀자는 흐느끼고 남자는 전률한다. 녀자에게는 감동이 있고 남자에게는 감화가 있다. №ㅡ 녀자는 더 다정한 남자에게, 남자는 더 잘 순종하는 녀자에게 매료되는 법이다. №ㅡ 돈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면 꼭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것은 녀자들이 흔히 가지는 치명의 오해이다. №ㅡ  녀자에게서 천사같은 모습을, 남자에게서는 신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면 사랑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만다. №ㅡ  남자의 사랑은 진공형이고 녀자의 사랑은 방어형이다, №ㅡ  남자는 녀자에 의해 순화되고 녀자는 남자에 의해 완성된다. №ㅡ  남자들이 멀리할것은 돈과 녀자, 특히 조심할것은 돈을 좋아하는 녀자이다.                                4.    남자의 사랑, 녀자의 사랑   №ㅡ 모든 녀자들이 화장을 하지 않으면 남자들이 아름다움의 진실을 더잘 알것이다. №ㅡ  녀자들은 뭇사람들의 눈길에 관심을 모으고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녀자에게 관심을 모은다. №ㅡ  남자는 경험으로, 녀자는 본능으로 서로를 안다. №ㅡ  녀자들은 모든 녀자들의 사랑을 받는 남자를 제것으로 만들려 한다. №ㅡ  녀자란 한권의 책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봐도 여전히 알수 없는 대목이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제목만 보아도 그 내용을 환히 꿰뚫어볼수 있는 책이 있다. №ㅡ  녀자가 혼자 살때에는 줄지어 찾아오던 남자들이 그녀의 결혼식에는 머리도 내밀지 않는다. 꿩구워먹은 자리를 아니까, №ㅡ  녀자의 말에서 《사랑해요》보다 《사랑하지 않으니까요.》가 더 거짓스럽다. №ㅡ 녀자의 순결을 눈에 비하지 말것, 눈은 내릴때에는 그렇게 아름답지만 녹을 때에는 그처럼 지저분하니까. №ㅡ  녀자의 눈을 호수라고 느낀 남자는 언젠가는 그 호수에서 익사할것이다. 그러나 거개 자살과 같은 성질의것이다. №ㅡ  녀자의 창조력이 화장술과 거짓에서 빛난다는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ㅡ  녀자들은 남자들의 무례함을 욕하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야성을 선망한다. №ㅡ 녀자들의 사랑은 해면과 같아서 남자가 쏟아붓는 사랑의 단즙을 죄다 빨아 들인다. №ㅡ  부끄러움이 전혀 없으면 녀자의 신비성은 곧 바닥이 드러나고 만다. 녀자들의 진짜 매력은 수집음에 있기때문이다. №ㅡ  녀자애는 인형에서 모성애를 키우고 남자를 사랑하면서 녀성을 깨우친다. №ㅡ  녀자들도 내심으로는 멋진 남자들을 한데꿰여 목걸이처럼 걸고 싶어한다. №ㅡ  사랑하는 남자를 팔찌에 보석처럼 여기는 녀자는 흔히 보석이 아니라 썩박돌을 얻는다. №ㅡ  남자의 그늘을 좋아하는 녀자는 절반 사는 녀자이다. №ㅡ  녀자들은 모든 녀자들이 선망하는 남자를 독차지하려 하고 남자들은 아무도 사랑한적 없는 녀자에게서 사랑받고 싶어한다 №ㅡ  사랑에 계산을 곁들어함으로써 그 녀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ㅡ  녀자를 천사에 비유한것은 미경험자의 아름다운 환상이다. №ㅡ  남자들은 거개 전부의 사랑이 침대우에서 체현되는것처럼 생각하지만 녀자들은 거개 부엌간과 상점에서 표현되기를 바란다. №ㅡ  녀자가 삼가할것은 돈과 남자. 특별히는 돈이 많아진 남자다. №ㅡ  남자는 량심으로 지키고 녀자는 무릎으로 버틴다. №ㅡ  남자들에게도 정조가 있다는것을 모든 사람들이 잊고있다. №ㅡ  녀자들은 정조라는 아름다운 쇠사슬을 차고 태여났다. №ㅡ  남자의 사랑은 이성애, 녀자의 사랑은 부부애. №ㅡ  녀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야 하고 남자는 망원경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ㅡ  녀자는 꿰뚫어볼수록 끌려들게 되고 남자는 파헤쳐볼수록 소원해진다. №ㅡ 남자는 감각, 녀자는 느낌을, 녀자는 환상가, 남자는 공상가, №ㅡ  남자들의 인내심이란 고작해야 녀자들보다 오줌을 좀 더 참는데 있을뿐이다. №ㅡ  남자는 자존심때문에 질투심을 외면하고 녀자는 녀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질투심을 꺼리지 않는다. №ㅡ  유모아가 없는 남자는 녀자에게 삽화가 없는 소설책과 같다. №ㅡ  지금은 돈이 없는 남자는 녀자에게 다 파먹은 김치독과 같다. №ㅡ 자기보다 월등한 녀자를 추구하던 남자는 막상 그런 녀자를 얻으면 주눅이 들고 만다. №ㅡ  헤여진다는것은 남자에겐 추억의 시발점, 녀자에게는 추억의 종점을 의미한다. №ㅡ  남자의 사랑은 자아실현에, 녀자의 사랑은 자아희생에 있다. №ㅡ  자주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녀자는 곧 거만해진다. №ㅡ  뭇사람들앞에서 남자가 애인에게 영웅으로 보이려고 할수록 바보가 되는 경우 가 많다. №ㅡ  녀자는 외로움속에서 성숙하고 남자는 고독속에서 인격화된다. №ㅡ  남자는 기계적으로 배반하고 녀자는 동물적으로 배반한다. №ㅡ  결혼후의 잦은 비교는 헤여지자는 예비종소리이다. №ㅡ  남자의 배반은 애욕에 있고 녀자의 배반은 물욕에 있다. №ㅡ  남자는 주는 본성, 녀자는 받는 본성이 있다. 천성적으로. №ㅡ  녀자가 먼저 애인의 팔을 끼는것은 신뢰가 아니라 과시의 발로이다. №ㅡ  남자는 진실에 놀라고 녀자는 환상에 취한다. 남자는 진실에 눈뜨고 녀자는 환상에 눈감는다. №ㅡ  아담의 갈비뼈로 녀자를 만들었다고 성경에 씌여진 그 시각부터 녀자는 그것이 자기에 대한 속박임을 알아야 하였다. №ㅡ  진짜 좋아하게 되면 녀자의 버릇없는 행동도 애교로 받아들이는게 남자들이다. №ㅡ  미녀를 정복했다는 득의양양보다 미녀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자부심을 지닌 그런 남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어야 하리라. №ㅡ  남자는 포옹하고 녀자는 포용한다. №ㅡ  녀자는 부드러운 사랑을 바라고 남자는 거칠은 사랑을 준다. №ㅡ  련애중에는 남자가 녀자를 뒤쫓고 결혼후에는 녀자가 남자를 따른다. 이것이 애정사의 프로그램이다. №ㅡ  그 남자에게 알맞는 녀자는 있어도 그 녀자에게 리상적인 남자란 없다. №ㅡ  달콤한 사랑을 받지 못한 녀자와 불같은 사랑이 꺼져버린 남자가 정감세계에서 가장 빈곤자이다. №ㅡ 사랑에서 실패하면 녀자의 입에서는 말이 줄어들고 남자의 입에서는 술이 늘어 난다.  №ㅡ  녀자는 결국 필연이 아니라 우연으로 그 남자를 만난다. №ㅡ  녀자들은 확답이 아닌줄 알면서도 남자가 자기만을 사랑한다는 《확답》에 눈물 을 글썽인다. №ㅡ  사랑쟁탈에서 남자의 정직은 녀자의 환심을 못사는 우점이다. №ㅡ  남자는 사랑의 결과에 신경쓰고 녀자는 사랑의 과정에 매력을 느낀다. 섹스에 서도 매 한가지이다. №ㅡ  녀자들이 자기를 못잊어 하는 남자를 못본체 하는게 상례이다. №ㅡ  녀자는 자기를 버리고 간 남자라도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병집이 있다. №ㅡ  녀자의 용서는 참는것이고 남자의 용서는 잊는것이다. №ㅡ  녀자의 외도는 복수심의 표현이고 남자의 외도는 동물적본능, №ㅡ  녀자는 감정의 배에 잘 오르고 남자는 명예의 배에 잘 오른다. №ㅡ  결국 녀자는 남자를 다스림으로써 피정복의 보상을 받는다. №ㅡ  남자는 쉽게 애인을 찾지만 녀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남자는 얼굴을, 녀자 는 마음을 기준으로 하기때문이다. №ㅡ  공개된 녀자의 비밀은 추문, 남자의 공개된 비밀은 랑만. №ㅡ 미래가 없는 남자는 과거가 볼것없고 과거가 많은 녀자는 미래가 하찮다. №ㅡ  남자가 젊어서 준것을 녀자는 늙어서 갚는다. №ㅡ 녀자들이 거짓말을 잘하게 된것은 남자들이 그렇게 만든것이고 남자가 단순한 것은 녀자가 리용하기때문이다. №ㅡ  미모의 녀자 ㅡ하면 값이 오르지만 미모의 남자 ㅡ하면 값이 내려간다. №ㅡ  아무리 수다쟁이라도 녀자는 자기의 탈선엔 침묵하고 아무리 과묵해도 남자는 자기의 은사를 잘 털어놓는다. №ㅡ 녀자는 자기가 깨뜨린 사랑일지라도 절대로 소문내지 않는다. 한 남자에게 일시적이지만 건네준 사랑은 녀자의 마음이다. №ㅡ  남자의 인격은 녀자가 금을 잘 긋는다. №ㅡ  녀자는 마음에 떠오르는 말을 하고 남자는 생각으로 지어먹은 말을 한다. №ㅡ  예나제나 녀자는 먼저 남자의 돈주머니를, 남자는 녀자의 가슴을 본다. №ㅡ  동양의 결혼은 의무의 확인, 서양의 결혼은 감정의 확보. №ㅡ  아이를 낳기 위해 하는 섹스는 거의 교배에 가까운 행위이다. №ㅡ 녀자는 상사병에 걸리면 사진첩을 찾고 남자는 상사병에 걸리면 술병을 찾는다. №ㅡ  녀자때문에 한번도 마음이 설레여본적이 없다는 남자의 말은 녀자들만이 곧이 듣는다. №ㅡ 성경이 남자에 의해 쓰여졌기에 녀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한것이다. №ㅡ  사랑을 아름다운 꿈이라 하지만 아무나 다 그런 꿈을 꾸는것이 아니다. №ㅡ  애정의 용량은 역시 한 사람의 심령의 용량이다. №ㅡ  련애의 차수는 애정문제상에서 아무 문제도 설명하지 못한다. 여러차례의 애정시는 결국 물거품과 같으니까. №ㅡ  그 녀자에게 반했다는것은 그 녀자를 아낀다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ㅡ  내가 불행에 처했을 때 정부는 옷자락을 붙잡고 우는체 하지만 안해는 마음을 붙잡고 눈물을 삼킨다. №ㅡ  녀자가 화장대앞에서 솜씨를 보일수록 창조력은 내려간다. №ㅡ  현대녀인들에겐 육체의 로출증이, 남자들에겐 마음의 로출증이 생겼다. №ㅡ  꽃의 무심한 웃음이 당신에게 상사병을 안겨줄수 있다. №ㅡ  부나비와 불의 정사는 시작이자 끝이다. №ㅡ  길섶에 작은 꽃들은 파리를 꿀벌로 잘못 볼수 있다. №ㅡ  결혼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후에는 한눈을 뜨고 한눈을 감아라. №ㅡ  남자는 밤에 미숙한 일면이 쉽게 드러난다.                                   5. 사랑의 철학   №ㅡ 사랑은 결코 지위의 함수가 아니며 지위역시 사랑의 자변량이 아니다. 그러므 로 지위의 변화에 따라 사랑도 변할수 없다. №ㅡ  녀성은 밤을 시작이라 하고 남자는 밤을 끝이라고 한다. №ㅡ  당신의 사랑이 치렬하다고 자긍하지 말라. 못보았는가? 눈꽃은 너의 손바닥 에서 이미 녹아버린것을, №ㅡ  사랑은 원래 대방의 관용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ㅡ  애정이란 마실수 없고 또 마시지 않아도 곧 잘 취해버리는 미주라 할것이다. №ㅡ 인생의 의미는 사랑의 슬픔에서 깨우쳐지고 사랑의 의미는 인생의 실패를 통해 서 심화된다. №ㅡ  사랑은 희열의 입구를 거쳐서 마침내 고뇌의 방에 이른다. №ㅡ  사랑은 거절당할 때보다 빼앗기는게 더 충격적이다. 전자는 손수건을, 후자는 칼을 찾게 한다. №ㅡ  사랑을 인수분해하면 괄호밖에는 언제나 눈물이다. №ㅡ  고뇌가 사랑의 진주일가? 사랑의 죄는 추억의 별이다. №ㅡ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한다기보다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ㅡ  사랑싸움은 정열의 과소비, №ㅡ  현대애정은 미모와 금전을 더한 합이다. №ㅡ  첫사랑은 총각과 처녀의 한차례 가속운동, 결혼은 감정과 감정의 화합반응. №ㅡ  남편은 결혼전에는 당신의 환심을 사는 남자, 결혼후에는 당신을  속상하게 하는 남자일수 있다. №ㅡ  녀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결혼전에 있었던 모든 고뇌를 포옹한다. №ㅡ  체면을 내동댕이쳤을 때 사랑은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ㅡ  언제나 사랑은 그렇게 떠나고 언제나 사람은 그렇게 남는다. №ㅡ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망각ㅡ그것은 대방에 있어서 죽음보다 더 슬픈 일이다. №ㅡ  사랑산이 미리메터로 높아질 때 고뇌의 산은 메터단위로 높아진다. №ㅡ 사랑의 쪽배가 랭대의 밀물에 밀려나면 사랑의 해변가엔 망각이 소라껍질처럼 남을것이다. №ㅡ  제때에 외착없이 도착하는 사랑의 렬차는 아직 누구도 타보지 못했더라. №ㅡ  일단 사랑의 렬차에 몸을 실었다면 다음 역도, 종착역도 묻지 말라. №ㅡ  일기장에 남은 사랑은 거개 편지질로 시작된것이고 숙박부에 남은 사랑은 전화 질로 시작된것이고 추억에만 남은 사랑은 처음부터 번뇌를 업고 온 사랑이다. №ㅡ  섹스의 유혹을 던지지 않은 녀자는 많아도 섹스의 유혹을 물리친 남자는 별로 없었다. №ㅡ  사랑이 없는 입맞춤에는 돈이 필요하고 입맞춤이 없는 사랑은 인내가 기다린다. №ㅡ  돈주고 산 섹스에 정애란게 있을수 없다. №ㅡ 《운명에 순응》한다는것은 사랑의 고뇌에 빠진자의 가련한 지혜이다. №ㅡ 고달프게 느껴지면 너무 온것이고 되돌아가야겠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 다. 그래서 녀자들은 《에라, 모르겠다.》하고 내처 달린다. №ㅡ  실련자에게서 폭음은 가슴터지는 위안이고 흡연은 참지못해 하는 달래임이다. №ㅡ  녀자에게는 오해가 고질병, 엄마에게는 사랑이 고질병. №ㅡ  사랑의 광증에는 악이 없다. 그리고 위문자는 더구나 없다. №ㅡ  녀자의 실련은 정조와 함께 잃은 아픔이고 남자의 실련은 마음속에 남아있고 몸은 떠나버린 슬픔이다. №ㅡ  사랑의 길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는 권태라는 고비이다. №ㅡ  희열이 공유되고 고통이 동참할 때 사랑은 참된것이다. №ㅡ  사랑의 필독본에는 꼭 부록에 고뇌에 대한 주해가 씌여있다. №ㅡ  사랑의 눈물이 홍수라해도 익사자는 그 한사람뿐이다. №ㅡ  남자의 변심은 리성에서 시작되고 녀자의 변심은 정감에서 시작된다. №ㅡ  불치의 사랑병을 위해서 인간은 망각이란것을 고안해냈다. №ㅡ  친구간의 싸움엔 정전협정이 없고 부부간의 싸움엔 “3.8”선 이 없다. №ㅡ 거의 맹목에 가까운 정열과 신비성의 소실은 현대인의 사랑의 비애이다. 사랑에도 시대의 색채가 짙어간다. 상품경제시대에 사랑도 전매품이 된것이다. №ㅡ  사랑은 누구에게도 찾아오지만 또 누구에게서나 떠나버린다. №ㅡ  녀자들은 눈물로 사랑을 끓이려 하지만 오히려 사랑의 본질을 꺼버릴때가 더 많다. №ㅡ  녀자의 사랑의 쪽문이 스스로 열리기를 기다리는 남자의 매력은 눈부신것이다. №ㅡ  누구나 리혼의 언덕에 올랐을 때에야 자기가 스스로를 배반했음을 느낀다. №ㅡ 류행되는 사랑가는 눈물로 부르지만 진정한 고뇌가 없기에 뇌까림에 불과하다. №ㅡ  사랑의 쪽배가 파선될 때에는 등으로 받쳐올려도 소용없다. №ㅡ  녀자가 금은재보에 눈뜨기 시작하면 남편의 사랑만으로 살아갈수 없는때이다. №ㅡ  사랑때문에 고통을 겪은 사람은 남의 실패한 사랑을 비웃지 않는법이다. №ㅡ  사랑에서 배반이 쓰라린것은 쏟아준 마음을 되돌려올수 없기때문이다. №ㅡ  녀자는 삭이고 남자는 잊는다. №ㅡ  남자는 녀자에 의해 원시인이 되고 녀자는 남자에 의해 마녀가 된다. №ㅡ  술에 만취하면 하루를 허송하고 색에 빠져버리면 일생을 망친다. №ㅡ  사랑이니 성이니 하는 그런것들은 한낱 얼음과자에 불과하다. 그런것은 핥아 버리고 잊어야 한다. 이것이 현대적인 애정철학이다. №ㅡ  사랑이란 바로 사람이 되는 일이다. №ㅡ 우리들은 정때문에 깨여나지 못하고 무지로 인하여 표상적인 것에 대해 추구 하게 된다. 스스로 총명하고 다정하다고 여기기에 티끌속에서 딩굴게 되는것이다. №ㅡ 사랑의 편지란 무엇을 썼으면 좋을지 모르는 서두와 무엇을 썼는지 모르는 결말 로 된 편지이다. №ㅡ  남자와 녀자의 행복에서 남자는 《나는 좋아한다》이고 녀자는 《그가 좋아한다.》이다. №ㅡ  진정한 사랑은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이고 가치있는 사랑은 오직 한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헌신적인 사랑은 되돌려받으려는 생각이 없이 하는 사랑이다. 포근한 사랑은 정으로 나누는 사랑이고 아름다운 사랑은 두령혼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며 황홀한 사랑은 두육체가 하나로 되는 사랑이다. 건전한 사랑은 부부끼리 나누는 사랑이고 용기있는 사랑은 사랑하고싶은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며 끈끈한 사랑은 자기 혈육에 대한 사랑이다. №ㅡ  련애중에 사람은 신선이고 결혼생활중에 있는 사람은 초인이다 №ㅡ 남자들은 녀자를 바라볼 때 가슴이 뛰는 울렁임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 은 자연스러운 느낌인것이다. №ㅡ 사랑이라는 환상을 사랑하는 소녀가 있다. 사랑은 키워내는것이 아니라 상대방 에 대한 리해심이다. №ㅡ  맹목적일 때 가장 순수한 사랑이고 합리적일 때 가장 무미건조한것, 사랑은 이렇게 이률배반적이다. №ㅡ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은 그리움을 남긴 사람이고 눈을 뜨고도 생각되는 사람은 아픔을 남긴 사람이다. №ㅡ  남자들은 녀자앞에서 다른 녀자가 전혀 없었던듯이 한다. 녀자들은 애인앞에서 다른 남자가 많은척 재세를 부린다. №ㅡ  사랑은 끝없는 포옹이 아니라 함께 가는 어려운 길이다. №ㅡ  사랑은 수은과 같아서 꽉 그러쥐려하면 곧 새여나간다. №ㅡ 녀자도 결혼해서 반세기가 지나가기까지는 완벽한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수 없다. №ㅡ  녀자가 옷을 입었을 때 성을 자극하고 로출시킬 때 오히려 성을 압살한다.                                   6.사랑의 변증법   №ㅡ 사랑은 그대를 초라하게 만들수도 있고 사랑은 그대를 눈부시게 만들수도 있다. №ㅡ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무정한 세월은 이기지 못한다. №ㅡ 사랑은 생육의 수단이 되기는 하지만 생육은 사랑이 수요되지 않는다. №ㅡ 사랑의 가장 기본의의는 성적요구로서 이는 추호도 의심할바 없는 진실이다. №ㅡ 머리속에 성유희의 흔적이 남아있고 마음속에는 사랑의 자국이 새겨진다. №ㅡ 남녀간의 성애와 생육의 본능은 사랑의 생명력과 내재적본질. №ㅡ 오직 성의 비밀을 밝혀야만 비로소 남녀간의 애정의 고급적인 정신령역에 들어 갈수 있다. №ㅡ 천사도 사랑에 빠지면 천국을 잊고만다. 하믈며 보통인간들임에랴, №ㅡ 섹스는 인류정감의 최고점을 체현하고있다.  №ㅡ 사람의 창조적활동은 왕왕 그의 정욕과 정신과 육체적추구의 강렬정도와 갈라 놓을수 없다. №ㅡ 사람의 성공능의 연속시간과 생물체계는 일치한 법이다. 성욕과 정욕지간에는 변증관계가 있다. №ㅡ 사람은 늙어지면 자연히 플라톤식의 애정으로 전화하는바 회억과 동정을 바탕 으로 한 순결한 우의가 세워진다. №ㅡ 사랑은 근근히 생육본능과 남녀간의 사회교제의 형식이기도한바 생리, 심리, 미와 도덕의 종합적감수인것이다. №ㅡ 완전히, 그리고 처음부터 도덕적색채를 잃고 하는 섹스는 한낱 동물의 발정 행위 와 같다. 수치심, 그것은 남녀간이 성결합에 필요한 장식이며 조절수단으로 되고있 는바 이것은 동물계에는 없다. 수치심은 천성적인것이 아닌것으로서 문명 ㅡ특히는 성문명의 산물이다. №ㅡ 대자연은 강개하게 인간에게 쾌락과 잉태를 부여하였다. 한편 력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대자연을 기편하였는바 성결합을 영원한 쾌락으로 삼고 더는 번식직능을 수행하지 않고있다. 인체는 장래 하나의 완미한 생리향락의 기계로 될것이다. №ㅡ사랑은 본능만이 아니며 플라톤식의 기적도 아니다. 그리고 음욕도 아니며 번뇌 와 공허도 아니다. 치정의 좋은점은 그 시작을 모르고 결말을 모르는데 있다. №ㅡ 진정한 사랑은 안개가 자오록하고 아늑한 리성과 비리성이란 전야의 둔덕길에 랑만적이고 신화같은 만유이다. №ㅡ 사랑이란  감미로운 술은 리성과 비리성의 누룩으로 빚어내야 한다. 도취되였을 때 사랑은 시작되는것이다. №ㅡ 사랑은 언제나 그리움에 주려있고 그리움을 먹고 커간다. №ㅡ 질투는 사랑이 온다는 징조이기도,확실한 사랑의 보증이기도 하다.      №ㅡ  쥬피터의 화살은 언제나 조용히 날아갔다. №ㅡ 녀자는 자석, 남자는 쇠덩이. 녀성은 바이올린, 남자는 활, №ㅡ  첫눈에 정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쉽게 노하는 다혈질에 속한다. 추파의 력사는 곧 녀인들의 예술적재능발전의 력사이다. №ㅡ  침대는 사랑의 요람이면서도 또한 사랑의 무덤이기도 했다. №ㅡ  섹스가 사랑이라는 잠옷을 입었을 때는 아름다운 행위로 착각되였다. 사랑이 생육의 본능을 미적해위로 변화시키는것이다. №ㅡ  부유는 남자의 마음을 헝크러뜨리고 가난은 녀자의 마음을 다듬어준다. №ㅡ  감정에는 결론이 없고 리성에는 결론만 있다. 사랑한다는것은 곧 완성한다 는것을 의미한다. №ㅡ 사랑에는 중간단계란 없다. 사랑은 요람으로 되지 않을경우엔 관으로 되고만다. №ㅡ  누가 사랑을 하게 되면 생활을 사랑하게 되고 생활을 사랑하게 되면 로동을 사랑하게 된다. 거리의 시정배가 되지 않으려면 참된 사랑을 하라. №ㅡ  현대인들도 고대인들처럼 부단히 정감비극을 연출하고있다. №ㅡ  사랑은 인생마당의 가장 주요한 풍경이다. 그 풍경은 시적이여서 수많은 시인 들을 불러온다. 그러나 왕왕 결말없는 서정시로 씌여지기가 십상이다. №ㅡ  사랑은 천국이기도 하고 지옥이기도 하다. №ㅡ 오, 사랑이여, 그대는 바로 악의 신이로다. 하긴 우리는 그대를  악마라고 부르 지 못하니까. №ㅡ  사랑은 인간의 진실이요 혁명적사랑이란 말은 거짓말이다.    №ㅡ 사랑의 눈은 사랑의 마음을 리해한다.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ㅡ 사랑받지 못하는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사랑할수 없다는것은 훨씬 슬픈 일,   №ㅡ  련애와 질투는 영원히 대화를 나누지 않을것이다. №ㅡ  사랑은 불길같은것, 기름을 치지 않으면 꺼져버릴것이다. №.ㅡ 사랑은 오래 숨길수 없으며 또 오래동안 가장할수도 없다. №ㅡ  련인들은 치정이 결속될때에라야 대방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ㅡ  사랑하면서 바보가 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면서 현명해질수도 없다. №ㅡ  사랑하며 가난한것은 사랑이 없는 부유함보다 낫다. №ㅡ  키스는 사랑의 열쇠이다. 키스는 입가에서의 두령혼의 만남이며 입가에 토로 하는 마음속 비밀이며 심장으로 쓰는 사랑의 계약서이다 №ㅡ  순종하는 녀자는 소리없이 울고 복수를 다지는 녀자는 몰래 운다. №ㅡ  사랑의 고뇌가 없이 한생을 보낸 사람은 인생의 반쪽만 쳐다본 사람이다. №ㅡ  눈물젖은 애정과 동정의 물결은 도덕이란 이 방파제를 사정없이 무너뜨린다. №ㅡ  애정의 언어는 어휘로만 구성된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미묘한 전달방식이 많다. 사랑에 도취된 사람의 마음속에 비밀은 조물주밖에 모른다. 사랑의 언어는 마음속에 새겨져있는것이다. №ㅡ  정욕은 웃음로부터 시작되여 무덤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ㅡ  리지로 감정을 억제하고 도덕으로 정욕을 이겨나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정욕은 넋에 뿌리내렸으나 도덕은 책에만 씌여져있으니 그것은 책장사의 허무한 표정과 다를바없다. №ㅡ  사랑은 마음의 명령에서 시작되지만 마음의 명령으로 물리쳐지지 않는다. №ㅡ  훔친 사랑은 남자에게나 만찬가지로 녀자에도 기분좋은 일이다 №ㅡ  인간으 모든 결함들을 참을수 없다면 숫제 사랑을 하지 말라. №ㅡ 사랑의 최초의 탄식은 지혜의 종말을 의미한다. №ㅡ 사랑이 더 달콤해지려면 귀속말로 말하라.                                     7. 사랑의 번뇌   №ㅡ  녀자들이란 대개 순결한 일생과 비밀스러운 탈       선을 꿈꾼다.    №ㅡ  사랑의 철저한 복수는 더 훌륭한 녀자(남자)를       얻는데 있지 않다. №ㅡ  혼외련에서 녀자가 받는 선물은 사생아이다. №ㅡ  사랑과 미움은 늘 과장되기마련이다. №ㅡ  밀월은 한달이면 끝나지만 인생은 한달에 끝나지 않는다. №ㅡ  녀자의 사랑은 파괴로 시작되여 아픔으로 영근다. 하나의 진솔한 의미를… №ㅡ  사람들은 흔히 사랑에 실패하면 운명의 작간이라고 자기를 위안한다. №ㅡ  사랑에 위협을 주는 상대자에 대한 분노만큼   지대한 분노는 없다. №ㅡ  고뇌는 사랑의 악센트이다. №ㅡ  정부는 돈지갑을 엿보고 안해는 마음속을 파고든다. №ㅡ  첫사랑의 꽃이 허위의 타격에 스러진것처럼 처참한 인생비극은 없다. №ㅡ  흔히들 사랑의 배반을 말하지만 정녕 배반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일뿐이다. №ㅡ  사랑이 잉태될 때 고뇌라는 태반이 필요하다. №ㅡ  사랑에는 휴일이 있지만 질투에는 휴일이 없다. №ㅡ  사랑병의 초기증세는 자아상실, 사랑병에 최후 증세는 타아상실 №ㅡ 괴로워할수록 순수하다는 증거이고 순수하면 할수록 참사랑의 표징이다. 순수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자가 뒤골목의 녀인들에게 쉽게 말려든다. №ㅡ  련인으로 다야몬드였지만 안해로서는 유리밖에 안되는 녀자가 있다. №ㅡ  정열의 불길이 잘못 타번지면 두사람을 다 훼멸시키고만다. №ㅡ   갑작사랑, 영리별이란다. №ㅡ  로미오와 쥴리오는 련인들의 전범이 되였지만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바보로 새겨지였다. №ㅡ  사랑에는 이르지 못할것이 있느니 곧 영원함과 완성이다. №ㅡ  가장 불행한 녀인이란 예전엔 따르는 남자가 많았다는 추억을 안고있는 녀자. №ㅡ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부터 참인생은 시작된다. 그리고 고뇌의 걸음마를 타게 된다. №ㅡ  사랑의 의미는 고통속에서 깨닫고 행복은 늘 회상속에서 커진다. №ㅡ  사랑의 제단우에는 순결의 포장이 쳐지기마련이다. №ㅡ  진정한 사랑은 과거에 뿌리박고 미래에로 푸른 가지를 뻗친다. №ㅡ 사랑놀음에 빠져버린 녀자는 쾌락을 다양하게 하는 기교만큼 만사에 의혹을 붙이는 솜씨가 늘어간다. №ㅡ  참으로 사랑을 하려면 먼저 인격수련을 하시라. №ㅡ  제3자가 등장했다면 벌써 물이 새는 배에 오른 사람이다. №ㅡ  사랑의 꽃동산에 단숨에 오르려 하지 말라. №ㅡ  불치의 사랑병도 세월속에서는 숙어드는법이다. №ㅡ  녀자에게 가까이 갈 때 걱정거리가 등에 업힌다. №ㅡ  에덴동산에 뱀의 출현은 남녀사이에 첫싸움의 징조였다. №ㅡ  열렬할수록 잃는것이 많은것은 미친듯한 육체적박투이다. №ㅡ  열일곱살, 구체적대상자가 없기에 사랑에 앓는 시기이다. №ㅡ  녀자의 신비스러움이 두허벅지사이에만 있다면 슬픈 녀자이다. №ㅡ  열렬한 사랑일수록 이루어지지 않아야 렵기적인 사랑의 전형이 될수 있다. №ㅡ  세상살이에서 모든 쓰라림은 배반의 쓰라림에 비기지 못하리. №ㅡ  참으로 완미한 님은 환상속에, 그리고 세상에 아직 태여나지 않은 그 누구에게 있을것이다. №ㅡ  미모의 녀인을 얻은 남자는 최대의 승리자인것 같지만 궁극에는 질투의 화신이 될수 있다. №ㅡ  사랑이란 명사는 돈때문에 더럽혀지고 명성, 지위때문에 미가 외곡되여버린다. №ㅡ  사랑에 철저히 실패한 녀자가 생활의 강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ㅡ  슬픈 비극의 연출자에게 사랑의 대역자가 없다. №ㅡ  사랑싸움에서 먼저 휴전을 선포한 쪽이 승자가 되여진다. 사랑 싸움엔 실제상 승자란 없다. №ㅡ  사랑의 고뇌를 모르는 사람은 실제상 불행아이다. №ㅡ  사랑하기에 헤여질수밖에 없다고 말하는것은 용기의 결핍증에 덮씌우는 감언 리설이다. №ㅡ  남들의 혼외련은 불륜관계가 되고 자기의 훔친 사랑은 기사의 사랑이 된다. 이것이 인간들이 잘 빠지는 감정의 오류이다. №ㅡ  동거가 사랑의 확증이 못된다는것은 자타가 알고있다. №ㅡ  항상 젊어서 사는 비결은 사랑의 꽃나무를 가꾸기. №ㅡ  새를 놓쳐버린 사람은 더는 새장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다. №ㅡ 쉽게 결혼하면 금과를 딴듯이 기쁘겠지만 추억에는 백지라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ㅡ  진실속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사랑속에는 진실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다. №ㅡ  꽃이 있기에 자연은 아름답고 사랑이 있기에 인생은 풍요롭다. №ㅡ  사랑의 꽃편지를 쓸 때 누구나 다 서정시인이 된다. №ㅡ  현대청소년들은 사랑편지대신에 처녀의 입술부터 그린다. 그러니 진정한 서정 시인이 나오기 힘든것이다. №ㅡ  눈물은 마음의 글줄이다. 그것을 읽는 눈이 마음의 눈이다. №ㅡ  20대전의 젊은이들은 성에 대한 동경속에서 진화된다. №ㅡ  진실한 사랑에는 마음속에 리별이란게 없다. №ㅡ  후회가 끼이지 않는 추억은 사랑의 추억으로는  2류에 속한다. №ㅡ  헤여지고 나서야 더 감미로운 사람, 그것이야말로 감정의 자아도취이다. №ㅡ  두눈에는 얼굴을, 마음에는 이름을, 가슴속에는 아쉬움을, 이것이 사랑의   추억의 마지막 페지이다. №ㅡ  진정한 령혼의 반려자는 심사숙고나 알심들인 선택에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이다. №ㅡ  현대인의 비애는 사랑과 결혼이 동의어로 되여진것이다. №ㅡ  성서저자가 남자였기에 뱀이 이브를 유혹했다고 썼을것이다. №ㅡ 《사랑》이란 말자체도 매력이 있지만 가슴속에 일어서는 무지개야말로 더 황홀한것이다. №ㅡ《사랑합니다》를 《안녕하십니까?》하는 말처럼 자주 쓰는 남자는 역겨운 인간이다. №ㅡ사랑에 풍요로운 산소가 있기에 련인은 늘 신선감을 느낀다. №ㅡ 이 세상에서 진정 현숙한 녀자는 사랑에 실패하고서도 자기를 버리지 않는 녀자 이리라. №ㅡ 사랑때문에 자살하는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부류이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대지 못하는 자는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부류이다. №ㅡ적군속에 애인이 있는 녀자는 망국도 기뻐한다. №ㅡ실패한 첫사랑은 그후의 사랑에 척도로 된다. №ㅡ사랑은 녹고 미움은 삭는다던가? 진지한 사랑은 미움도 돌려세 운다고 한다. №ㅡ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 마음을 절이는것은 작은 웃음이다. №ㅡ사랑은 인생의 소금이다. 그러나 수요될때마다 찾는 그런 소금 단지가 되여서는 안된다.                                    8. 사랑에 대한 보충해석   №ㅡ사랑이 눈이 현미경이면 리상적인 상대란 없을게다. №ㅡ사랑이 시작되면서 그 사람의 참된 인생이 시작된다. №ㅡ사랑은 황제나 호걸이나 군자나 본능적인 웅성을 만든다. №ㅡ사랑은 가르쳐 되는것이 아니요 배워서 되는것도 아니고 자습이다. №ㅡ사랑은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천하령약이다. №ㅡ사랑은 홍역과 같아서 앓아본적이 없는 사람은 그정 살아갈뿐이다. №ㅡ사랑은 눈에서 싹트지만 가슴에서 자라고 세월속에 열매를 맺는다. №ㅡ사랑은 론점도 팔요없거니와  론증은 더구나 필요없다. №ㅡ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섭리이며 인생의 절대적 진리이다. №ㅡ사랑은 남자의 인격을, 녀자의 품성의 척도이다. №ㅡ사랑은 인생의 영원한 주제이지만 주재자는 아니다. №ㅡ사랑은 가렴증과 같아서 긁을수록 더 가렵다. №ㅡ사랑은 하자해서 되는것도 아니고 말자해서 끝나는것이 아니다. №ㅡ사랑은 인류의 진화와 함께 동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ㅡ사랑은 온다고 선포하고 오는법이 없이 슬며시 찾아든다. №ㅡ사랑은 지혜를 죽이고 지혜는 사랑을 죽인다. №ㅡ사랑은 우자를 총명하게 만들고 현자를 우자로 만들기도 한다. №ㅡ사랑은 몰래 하는것이지 드러내놓고 하는것이 아니였다. №ㅡ사랑은 올때는 슬그머니 오지만 갈때는 소란을 피우며 떠나간다. №ㅡ사람은 기실 늙어서 죽게 되여서야 사랑의 진미를 조금 알게 되는것이다. №ㅡ사랑은 뜨겁기만한것이 아니다. 뜨뜨미지근한 사랑도 기본사랑이다 №ㅡ사랑은 진정 남자, 녀자의 위치를 확정해주는 계기이다. №ㅡ사랑은 남녀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눈금자이다. №ㅡ사랑은 원초적으로 맹목적이다.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벌써 사랑이 아니다. №ㅡ사랑은 사람의 분별력을 상실하게 한다. 너무 분별력이 있으면 그게 사랑인가? №ㅡ사랑은 이성에 대한 매력에서 시작되지만 결혼은 의지와 관용의 고험기이다. №ㅡ사랑은 젊은이 특권이지 독점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ㅡ사랑은 아낌없이 내주고 만족없이 받아들이는것이다. №ㅡ사랑은 불길처럼 타오르면 좋지만 세상에 꺼지지 않는 불길이 있던가? №ㅡ사랑은 눈에서 들어오면 눈으로 다시 나가게 된다. №ㅡ사랑의 격류는 장쾌하나 깊지 못하고 사랑의 호수는 잔잔하나 깊을수 있다. №ㅡ사랑의 만찬에서 만포식이란 없고 체하는법도 없다. №ㅡ사랑의 가원은 천국과 련옥사이에 위치해 있다. №ㅡ사랑의 기본내용은 환희와 비애, 행복과 고통, 애석함과 후회이다. №ㅡ사랑의 고뇌는 빠져들수록 의미롭고 사랑의 슬픔은 사치한 슬픔이다. №ㅡ사랑의 감정은 리성의 판단보다 언제나 정확하다 №ㅡ사랑의 법정엔 도덕이 재판관이다. №ㅡ사랑의 도가니가 끓지 않을때는 권태의 불을 지폈기때문이다. №ㅡ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잊고 헌신하는것이다. №ㅡ사랑의 신비함이 첫날밤으로 끝나면 만성자살이 시작된다. №ㅡ사랑의 신 아모르는 한손에 행복을, 한손에 고통을 들고있다 №ㅡ사랑의 비밀은 련애시절뿐이고 결혼하면 은사이지 더는 비밀이 아니다. №ㅡ사랑의 계산식은 1+1=2가 아니라 2×2=5이다. 종래로 그랬다. №ㅡ사랑의 즐거움은 순간순간이고 사랑의 고통은 시시각각 갈마든다. №ㅡ사랑을 속삭이면서 얼굴을 붉히지 않는 처녀란 없다. №ㅡ사랑을 위해 죽는 사람은 가장 숭고한 희생을 한 사람이다. №ㅡ사랑을 하는 사람이 질투심이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은 감각이 도끼등이다. №ㅡ사랑을 영원하다고 믿지 말라, 사랑도 주어진 수명이 있으니까, №ㅡ사랑을 하는 녀자는 입으로 속삭이는것이 아니라 눈으로 전파를 보낸다. №ㅡ사랑을 손바닥위에 놓은 수은으로 생각하라, 그러쥐노라면 곧 새여나가니까, №ㅡ사랑을 포기하겠다고 다지는 결심만큼 허황한것은 없다. №ㅡ사랑을 가르쳐달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녕 천하 바보일것이다. №ㅡ사랑을 늦게 시작한 사람만큼 강렬하게 하는 사람은 없다. №ㅡ사랑을 속삭이는 녀자의 말이 아무리 낮아도 남자들은 다 알아듣는다. №ㅡ사랑을 준다고 말하지 말라, 응당 바친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ㅡ사랑을 시작하기전까지는 자여인이고 사랑을 하면서부터 사회인이 된다. №ㅡ사랑을 한데 대해 후회할수는 있어도 뉘우침은 없다. 사랑한것은 무죄이니까, №ㅡ사랑이 없는 인생마당은 풀한포기 자라지 않은 사막과 같다. №ㅡ사랑이 미움의 문을 나서면 증오가 어서오라 마중한다. №ㅡ사랑이 시내물처럼 돌돌돌 소리내며 흐르면 좋은 징조가 아니다. №ㅡ사랑이 있다는것은 행복의 렬차가 시발점을 떠났다는것을 의미한다. №ㅡ사랑과 증오는 인생마차에 두바퀴와 같고 동전의 앞뒤면과 같다. №ㅡ사랑에 강한 남자란 없고 정조가 금성철벽인 녀자란 없다. №ㅡ사랑에 목적의도적이 선행했다면 그것은 음모이고 교역이다. №ㅡ사랑에 령리한 남자가 반드시 인생에서도 총명한것은 아니다. №ㅡ사랑에 질투심은 정상적이지만 정당한것은 아니다. №ㅡ사랑에 보답하는데는 오직 더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 №ㅡ사랑만 있다면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말을 지금 젊은이들은 코웃음친다. №ㅡ사랑과 증오는 선후관계에 있다. 시작되지 않은 사랑에 질투란 없다. №ㅡ사랑도 권력처럼 삼자와 나눌수 없는 특성이 있다. №ㅡ사랑이란 호상 희생이 없이는 감정유희에 그칠것이다. №ㅡ사랑하지 않는 녀인과 사느니 차라리 홀애비로 살아감이 편안할것이다. №ㅡ사랑시도 정열로만 살수 없다, 밥도 먹을수 있고 잘자리도 있어야 한다. №ㅡ사랑의 눈물겨운 비극은 사랑할수 없다는데서 더욱 처절한것이다. №ㅡ사랑외에 더 바라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현시대의 진정한 사랑이다. №ㅡ사랑한다고 대방의 결점마저 우점으로 생각한다면 진실성은 물러난다. №ㅡ사랑하는데 조건이 붙은것은 현대인들의 걸작이다. №ㅡ사랑만큼 효과적인 교화는 없다. 미워하는데서 감화란 생기는법이 없다. №ㅡ사랑하라, 지치는 한이 있더라도, 인생에 사랑만큼 더 좋은것은 없다. №ㅡ사랑한다는 다른 표현은 관심이고 성스러운 의무이고 책임이다. №ㅡ사랑하는 리유를 묻지 마라, 그 시각 사랑에 회의가 생기니까, №ㅡ사랑하게 된 리유를 기어이 말하라면 대답은 “그저 좋아서”일것이다. №ㅡ남성과 녀성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인류의 진화와 문명을 낳았다. №ㅡ남자는 즐기자고 사랑을 찾고 녀자는 행복하자고 사랑을 받아들인다. №ㅡ남자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면 사랑도 꼭지떨어진 가을호박이 된다. №ㅡ남자의 마음을 틀어잡는것은 성이 아니라 녀자의 따스한 가슴이다. №ㅡ남자는 정유에서 사랑에 감탄표를 찍고 녀자는 헌신에서 사랑의 이음표를 단다. №ㅡ남자여, 열렬하라, 그러나 광란하지 말라, 녀자여, 요염하라, 그러나 순결하라. №ㅡ남자를 사로잡고 지배하는 비상무기가 있으므로 녀자는 위대하다. №ㅡ남자가 사랑하는 동안만은 책임지겠다는것은 기실 무책임이다. №ㅡ남자는 애욕에 지치는법이 없고 녀자에게는 지나친 사랑이란게 없다. №ㅡ남자의 사랑은 녀자를 점유하는것을 절정을 이루고 녀자의 사랑은 점유당한후    시작된다. 남녀의 사랑의 출발점이 다름이 여기서 확증되다. №ㅡ남자는 사랑을 하면서 마음에 구멍이 펑뚫린다. 그리고 아물지 않는다. №ㅡ남자는 즐겁자고 사랑을 추구하고 녀자는 행복하자고 사랑을 갈구한다. №ㅡ남자의 사랑은 인생의 일부이지만 녀자의 사랑은 옹근 인생이다. №ㅡ깨지 않는 꿈이 없듯이 식지 않는 열광적사랑도 없다. №ㅡ김이 안나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 부부간 사랑에도 적용되는 속담이다. №ㅡ질투는 사랑과 함께 태여나고 사랑이 죽으면 따라서 죽는다. №ㅡ한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말은 감동적이나 실천성은 불확실하다. №ㅡ련정은 몰리해 할때 생기지 속속들이 꿰뚫어본후에 생기는것이 아니다. №ㅡ련애시절엔 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나 천하일미로 느껴진다. №ㅡ련애란 남자가 한녀자를 사랑하기 위한 탐색과정이다. №ㅡ련애는 금광탐사이고 결혼은 채광이며 리혼은 페광이다. №ㅡ련애에서는 졸업했지만 사랑에 졸업식이 있다면 인생패필이다. №ㅡ옛날엔 애인이란 말이 성결했지만 지금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칭호이다. №ㅡ대방의 분명한 결함도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을 치정에 빠진때이다. №ㅡ실련은 고통스럽지만 한차례 사랑시험을 치른 경험자로 되기도 한다. №ㅡ열련은 훼방을 놀거나 반대할수록 더욱 치렬해지는 법이다. №ㅡ한남자를 사랑하는 두녀자는 영원히 화해할수 없는 원쑤이다. №ㅡ첫키스는 사랑한다는, 사랑받겠다는 장엄하고 성스러운 묵결이다. №ㅡ육체의 결합은 쾌락을 주고 마음의 결합은 환희를 안겨준다. №ㅡ녀자만 헌신하는게 아니라 남자도 헌신한다고 생각하라. №ㅡ대방을 사랑하거든 자기의 의지대로 개변시키려 하지 말라 №ㅡ바람이 세차게 불면 촛불은 꺼진다. 사랑의 등불도 마찬가지이다. №ㅡ인간의 생명ㅡ번식은 남녀의 증흑적인 쾌락의 만끽에서 연장된다. №ㅡ만약 세상에 녀자들이 일매지게 아름답워도 남자의 외도가 줄어들가? №ㅡ인간에게는 성욕보다 식욕이 급선무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ㅡ평생 잊혀지지 않는 녀자(남자)가 있다면 참으로 사랑했다는 증거물이다. №ㅡ현대인의 사랑은 달콤한 사탕일수도 있고 껌일수도 있다. №ㅡ강압으로 정욕을 만족시키고 사랑도 그러려니 하는 바보스러운 남자가 많다. №ㅡ돈으로, 권력으로 점유하고도 사랑이라고 말하는것은 너무 뻔뻔스럽다. №ㅡ실련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래도 사랑의 흔적을 남기여 추억으로는 소중하다. №ㅡ평등감이 존속하면 이성친구일뿐이고 거리감이 련정을 싹틔운다. №ㅡ안해(남편)에게 늘 빚을 진듯이 느끼며 사는 부부야말로 찰떡부부이다. №ㅡ화내고 풀어주고 비평하고 보듬어주며 동그릴줄 아는것이 정상적부부이다. №ㅡ진정한 사랑은 건너지 못할 강을 날아넘고 오르지 못할 절벽을 기어오른다                       9. 사랑의 고개길에 풍경선         옛날 우리 민요에서 매 년령단계의 결혼생활을 개괄하고있다. 10대의 부부는 멋모르고 살고 20대의 부부는 서로 좋아서 살고 30대의 부부는 눈코뜰새 없어서 살고 40대의 부부는 서로 못버려서 살고 50대의 부부는 서로 가엾어서 살고 60대의 부부는 서로 고마워서 살고 70대의 부부는 서로 등긁어줄 사람이 없어 산다고 하였다. 고대희랍의 아리스토파네스는 이와 다르게 결혼생활의 맛을 개괄하였다. 40대의 부부생활은 오렌지맛이고 30대는 떨떠름한 올리브맛이며 20대는 달콤한 무화과 맛이라고.                                     사랑의 세대론   №ㅡ20대의 사랑은 환상으로 신비하고 30대의 사랑은 정열로 달콤하고 40대 이후에 사랑의 안팎을 읽고나서 사랑의 쪽배를 열심히 저어갈수 있다.   10대는 아지랑이같은 동경, 20대는 불같은 정열 30대는 끝없는 향수, 40대는 교묘한 조화 50대는 너그러운 동행, 60대는 추억의 동무 70대는 슬픈 재생, 80대는  허물어진 꿈터…   교원들의 사랑편지 물리교원: 당신은 음극, 나는 양극이지요. 우리 서로 의지한다면 사랑의 전기가 산생될것입니다. 화학교원: 친애하는이여, 당신은 수소 H,  나는 산소O, 우리가 결합한다면 물 Η2 O가 될게 아닙니까? 수학교원: 사랑하는이여, 당신은 정수, 나는 부수, 우리 모두 유리수이기에 천생배필이지요. 정치교원: 친애하는이여, 당신은 존재, 나는 의식, 유물론의 원리에 근거하면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지요. 나는 영원히 당신의 충실한 노복입니다. 어문교원: 사랑하는이여, 당신은 여름날 밤하늘의 별, 봄하늘의 꽃구름, 졸졸 흐르는 시내물, 시내가 버들가지에 오동통한 버들개지, 당신은 귀맛좋은 노래소리… 당신은 가볍고 경쾌한 춤의 법보… 사랑의 십계명   1.     계산하지 말것. 2.     후회하지 말것, 3.     되돌려 받으려하지 말것, 4.     조건을 달지말것. 5.     다짐받지 말것, 6.     너무 기대하지 말것. 7.     의심하지 말것, 8.     자꾸 비교하지 말것, 9.     확인하지 말것, 10.    운명에 맡길것,                             녀자를 보는 시각차이   정치가:   녀인은 기둥, 부녀는 절반 하늘을 떠인다. 문학가:   녀인은 꽃, 녀인은 물로 된 골육. 생물학가: 녀인은 자성의 고급동물, 잉태후 새 생명을 번식해낸다. 농민    : 녀인은 일종 식물, 알뜰히 가꾸어야 꽃피고 열매 맺는다. 관상학가: 녀인은 음에 속하며 녀자는 달이다. 남자: 녀인은 차, 매일 수많은 물건을 싣고 또  수많은 물건을 부리우느라 끝이 없다. 유가학설: 녀인은 남자의 다른 절반, 남자는 바깥주인, 녀자는 안주인, 그러기 녀자는 현처량모가 되여야 한다. 늙은 화상: 녀인은 늙은 범 젊은이   : 녀인은 소금, 생활에 녀인이 없다면 생활은 무미하다. 남편  : 녀인은 가장 진솔한 말을 할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련인  : 녀인은 다 먹을수 없는 사탕덩어리, 달고 단 그 맛은 끝이 없다. 일을 잘 저지르는 사람 : 녀인은 식초병, 일단 번져놓으면 야단이다. 치정에 잘 빠지는 사람 : 녀인은 술, 마시지 않아도 취한다. 사회학가: 녀인은 불길,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할수 있고 모든것을 훼멸시킬수 있다. 례빈사일군 : 녀인은 정교한 꽃병 건강미전문가: 녀인은 건강과 미의 정체, 심리학가: 녀인은 유리제품, 자칫하면 깨지기에 조심조심 다루어야 한다.                                 10. 나오는 말   사람은 자기가 보는 만큼 세상을 리해하고 자기가 아는만큼 해석한다. 어찌되였 든 오직 위생실에서만 자기를 찾을수 있다는것은 본세기 인류의 가장 통속적이면 서도 심각한 비극이다.     녀인들에 대한 남자들의 인식은 심각할수 있으나 녀자에게 취하는 행동은 영원히 천박할수밖에 없다. 로신선생은 중국의 남자들은 모두 성인이 될수 있었는데 녀자 들이 망쳐놓았다고 하였지만 기실 이 세상의 모든 녀자들은 원래 괜찮다고 할수 있다. 문제는 어떤 남자를 파견하여 그 녀자를 정복하는가에 달렸다.  녀자들은 몽롱시, 가장 난해한 몽롱시라고도 한다. 기실 녀자는 한권의 책이다. 난해하기도 하고 통속적이기도 하다. 녀자라는 이 아름다운 책을 남자는 시종 서투르 게 해석하여 왔고 지금도 그렇다. 항간에서 흔히 남녀사이에 전기가 통하니 안통하니 하는 말이 있는데 확실히 사랑은 음전기, 양전기두극의 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조작에 주의하여 전기에 붙거나 선이 끊기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대저 사랑의 감정은 호감으로부터 발효하기에 그것을 단술로 빚는가 고배로 빚 는가는 자신에게 달린일이다. 사랑은 한차례 남몰래 한 비밀투고인데 사랑책에 녀편 집의 편집방향과 의도를 잘 알아낸후 투고해야 하되 알맞게 서정을 토로하면서 중점을 또렷하게 내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퇴고당하기 십상인바 재투고의 성공 률은 낮다 모종 경우 애정행위는 한차례 모험적인 투자로서 크게《벌수》도 있고 본전도 찾지 못할수 있다. 감상주의적으로 표현한다면 사랑은 아름다운 이중주로서 조화로 워야 감동적인 악장을 연주할수 있다. 아니면 주선률이 외곡되고 소음으로 될것이다. 인생을 려로라면 사랑도 인생행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선으로 되여 당신을 떠나기 아쉽게 할도 있고 역증나고 피로해져서 영영 떠나게 할수도 있다. 처음 사랑 의 꽃마차를 달릴때 거리보존법칙과 급정거경우를 념두에 두고 초속으로 달리지 말아야 한다. 우정선과 애정선을 잘 분별하면서 전후좌우를 잘 살피며 제때에 정지, 통과 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사랑을 아름다운 선률에 비유할 때 풋사랑은 경음악, 열렬한 사랑은 쟈즈곡이고 결혼은 통속음악인데 리혼이 류행곡이 된것은 현대인의 비극이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면 비상한 사랑이 되고 사랑에서 사랑을 덜면 사랑의 기점이 되며 사랑에 사랑을 곱하면 무한한 사랑이 되며 사랑에 사랑을 나누면 유일한 사랑이 된다.    정이 고기와 물처럼 되는것은 모든 부부들의 최고의 추구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쉽게 하나의 잘못을 범하고있다. 바로 자기는 늘 물이고 대방은 고기라고 생각 하는것이다. 사랑은 모호성과 림기응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식이 없지만도 기술은 수요 된다. 사랑을 얻기전의 기다림은 곧 사랑의 대명사이고 사랑을 얻은후의 연분이 곧 결론이다. 확실히 그대 앞에 서있고 또 그대가 심장이 뛰는 리유를 말할수 없을 때 곧 사랑의 꽃대문이 열리는 때이므로 나름껏 사랑을 하라. 그러나 신근한 육종가의 자태로 사랑의 꽃나무를 가꾸어가시라.                                             2007년 11 월 3 일    
233    대학생 습작 참고용 명구들 (2 ) 댓글:  조회:8838  추천:0  2013-01-28
                       대학생 습작 참고용 명언들 (2) 교육                                 №. 교육의 목적은 새 일대들에게 생명의 가치실현을 키워주는데 있다. №.   모든 훌륭한 어머니들은 천부적인 위대한 교육자들이다. №. 귀한자식 매로 키워라. 그러나 부디 피나게는 때리지마라. №. 한창 배워야 할 때 게으름피웠다면 추억의 과거도 없거니와 동경의 미래도 없다. №. 모든 학문중에서 가장 배워내기 어려운 학문은 바로 인생학이다. №. 학자를 만드는것은 학교 교육이지만 사람을 만드는 것은 가정교육이다.   №. 홰불은 앞길만 비추지만 지식의 봉화는 온 천하를 비춘다. №. 누에는 단지 뽕잎만 먹었지만 찬란한 비단의 길을 열어놓았다. №. 총명한 머리를 가졌음에도 배움에 힘쓰지 않는것은 옥토를 묵이는것과 같다. №. 학생을 믿어주는 스승이 훌륭한 스승이다. 가정 №. 가정이 있는 남자는 가정이 없는 백명의 남자에게 없는 인간락을 향수한다. №. 가정이 운행되는 것을 보면 남녀주인의 인간상을 읽을수 있다. №. 부유한 가정은 남편을 나돌게 하고 가난한 가정은 남편을 붙들어 둔다. №. 매 가정의 평화가 온 나라의 평화를 쌓는다. №. 정상인이 아버지가 되는것은 어렵지 않으나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기는 어렵다. №. 효도는 자신이 우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서 자연스럽게 키워지는 법이다. №. 아이들을 존중하라. 그들의 오늘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존중이기도 한것이다. №. 아이는 뛰다가 넘어져도 울고나서 또 뛰여다닌다. 생명의 약동하기 때문이다. №. 가난한 집에 넘치는 아이들은 값매길 수 없는 재부이기도 하다. №. 그 집에 부모를 알려거든 일상적인 아이의 거동을 보라 진리: №. 진리는 영원히 난산이다. 그렇다고 배를 가르고 내오는 것도 아니다. №. 진리는 일자무식의 농부의 가슴속에서는 가장 순수하게 숨쉴 수 있다. №. 진리는 많이는 오유라는 어머니가 난산끝에 낳은 것이다. №. 진리가 상처입고 절뚝거리며 올때 허위는 두 주먹쥐고 내달린다. №. 진실이 장화를 신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 정직 №. 정직은 참된 인간을 이루는 골격이다 №. 정직한 사람의 단 하나의 약점은 남을 자기처럼 믿는 것이다. №. 정직한 사람은 진실에 통곡할지언정 위선에 웃지 않는다. №. 정직을 내버린 사람은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다. №. 성실은 선량한 사람의 명함장이다. 영예: №. 영예는 장미꽃다발을 안기지만 가시가 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영예는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유혹이다. №. 명성은 얻는 것이요 영예는 하사받는 것이다. №. 명성은 명불허전과 허명무실이라는 두 가지 내함을 가지고 있다. №. 명성과 겸양이 자매로 되는 경우는 드믈다. №. 너무 유명해진 이름은 매우 무거운 보짐이다. №. 꽃은 아름다움으로 찬양받지만 그 향기로 더 유명해진다. №, 명예는 정직한 사람도 허위를 배우게 하고 겸손한 사람도 건방지게 한다, №. 명예는 저녁노을 같고 부귀공명은 한오리 저녁연기와 같다. №. 찬눈길로 세상을 투시하고 따스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라. 거짓말 №. 거짓말에 꿀을 발라도 거짓말은 여전히 거짓말이다. №. 진실인듯 교묘하게 꾸며서 하는 거짓말은 가장 야비한 거짓말이다. №. 먹으로 쓴 거짓말은 피로써 엮어진 력사를 덮어감출수 없다. №, 거짓말로 득세할 수 있는 시대는 병든 시대이다.                                            №. 거짓은 거짓과 친구하고 성심은 성심과 친구한다. 허영심 №. 허영심은 명예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량심은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 아름다운 꽃은 향기가 없고 아름다운 구름은 흩어지기 쉽다. №. 력사에 남으려는 사람이 되지 말고 력사가 남기려는 사람이 되라. №. 허위는 흙으로 빚은 미륵보살처럼 진실의 강을 건너지 못한다. №. 허위는 위선자의 통행증. 진실은 허위의 묘지명. 행복 №. 행복은 보수가 아니라 귀결이요 불행은 처벌이 아니라 결과이다. №. 행복의 대문이 닫겼다해서 쪽문마저 닫겼으려니 실망하지 말라 №. 행복은 시작이 따로 없지만 언제건 끝은  있다. №. 남을 주고나면 조금은 아쉬워도 행복감이 그 자리를 메울 것이다. №.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은 곧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 행복의 큰 길은 고난의 비탈길끝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 인간고의 사막을 지나온 사람만이 행복의 오아시스를 찾을수 있다. №. 행복을 완제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을 볼수 없다. №. 일하라. 사랑하라. 희망을 가지라. 그것이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 상상하는만큼의 행복한 동산도 없고 느끼는만큼의 불행한 가시밭도 없다. №. 행복의 창문은 자기의 눈으로 봐야 들여다보인다. 책 №. 책은 정이 없지만 사람들을 웃기고 울린다. №. 책은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더 넓은 세상을 펼쳐준다. №. 책은 지식의 대안에로 건늬여주는 쾌속정이다.              №. 책은 읽으라고 낸 것이 아니라 알라고 내는 것이다. №  책은 무지를 치료해 주는 가장 좋은 묘약이다. №. 책은 지식의 나무이지만 지혜의 열매가 달려있다. №. 책을 읽기싫어하는 사람은 장님이 길걷기처럼 인생길을 가는 사람이다. №. 책이란 주기만하고 받을줄 모르는 충직한 벗이다. №. 서재는 인생의 화원이요 지성인의 낙원이다. №. 매일 읽지는 못하더라도 머리맡에 책을 놓아두라. 지식 №. 지식은 미지의 대안이고 지혜는 꽃피는 과원이다. №. 지식은 인류력량의 집합이고 진보의 원동력이다. №. 지식은 빛이 없지만 그것을 장악한 사람에게 후광을 씌워준다. №. 지식은 꽃씨다. 청춘의 언덕에 뿌려야만 활성률이 높다. 봄에 파종하듯이, №. 지식이 없는 사람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충실한 삶을 살 수는 없다. №. 많이 알면 많이 걱정하고 적게 알면 적게 근심하게 된다. №. 소경은 눈앞만 어둡지만 무지자에게는 온 세계가 암흑이다 №. 꽃도 한철 지식도 한철이다. 만사에 때가 있다. 젊어서 배우라. №. 배움의 길에서 체면이란 쓸데없는 보짐이다.  №. 세상에는 쓸모없는 지식이 없다. 인간의 됨됨이 №. 인격이란 어둠속에 사람이다. 인격은 글자로 된 수수께끼, 즉 앞으로, 뒤로 가로 읽어도 그 철자가 똑 같은 그런 것과 같다. №. 아주 사소한 일에서 그 사람의 위인됨을 알수 있다.    ㅡ또스또옙쓰끼 №. 옳바른 사람은 약속을 적게 하고 실행을 많이 한다. №. 남을 알 수 있으면 지자요, 스스로를 알면 현자이니라. №. 양심은 인격의 내핵이라면 도덕은 인격의 간판이다. №. 양심은 령혼의 안내자이며 도덕의 횃불이다. №. 양심에 부끄러운 점이 없으면 어떠한 변명도 필요없다. №. 양심에 병들면 죽지 않지만 령혼은 이미 죽은것과 같다. №. 누구든 자신의 성격의 한계 이상으로 인생을 설계할 수 없다. №. 몸에 병든자는 동정을 받을수 있지만 심령에 병든자는 동정할 필요가 없다. 삶의 기술 №. 배애를 느껴본 자가 가장 훌륭하게 동정할 수 있다. №. 눈물도 웃음처럼 전염될 수 있다. №. 유순하면 벗을 얻고 직언하면 미움을 산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ㅡ 스마일스 №.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ㅡ 스피노자 №. 나를 최후까지 정복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자기 뿐이다. №. 자신을 믿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긍정이다. №. 사람들에게 이해 받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이해받지 못한 다해서  꼭 불행한것은 아니다. №.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멀지 않아 당신은 사는대로 생각할 것입니다. №. 네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을 결코 남에게 부탁하지 말라. №.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절로 자기를 아는 것이다.   ㅡ트래이스 №. 제갈길을 가라. 남들이 웃을테면 웃으라지.                ㅡ 단떼 №. 나는 하루에 자신을 세번씩 반성해 보군 한다.               ㅡ 증자 №. 타인에게는 온순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하라. №. 자애를 모르면 반대로 자기를 해친다. 자애는 인생의 기나긴 낭만사의 시작이다. №. 우리의 제일 처음의 사랑과 마지막 사랑은 자애이다. №. 당신의 모습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ㅡ 콩도르세 №. 가장 힘든 예술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ㅡ 속담 №. 너는 너의 이미의 땀으로 너의 빵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      ㅡ 레브 똘쓰또이 №. 네자신의 마음 속에서 최선을 다해 찾아보라. №. 자기는 생활의 강자라는 것을 꼭 믿으라.                      ㅡ 유고 №. 사람의 존엄은 필요한 거절에 있다. №. 견인성은 독립성을 낳는 일종 정신자질이다.      ㅡ갈드윈 №. 세상에 백락이 있고 연후에 천리마가 있다. №.하늘을 겨냥하는자는 나무를 맞히려하는 자보다 더 높이 쏜다.                №. 목표가 없는 생활은 키가 없는 배와 같다. №. 위대한 포부가 위대한 사람을 만든다.   ㅡ폴러 №. 자기가 어느 항구로 가고있는지 모를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못된다. ㅡ세네카 №. 스스로 만족을 얻은 사람은 이미 보수를 얻은것이다.     ㅡ 쉐익스피어 ㅡ №. 가장 좋은 만족은 다른 사람에게 준 만족이다. №.   모든 약에는 두 개의 약이 있다. 즉 시간과 침묵 그것이다. №. 기억은 일종의 만남이고 망각은 일종의 해탈이다. №.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라.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새기라.  ㅡ B. 프랭클린 №. 당신이 지금 서고 있는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는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 가 중요하다. №.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정으로 알때에만이 타인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 언덕위에서는 평지의 진실감을 체험할수 없다. №. 황금은 땅에 묻어두어서는 안되지만 벗의 충고는 마음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 사람의 심심건강을 가장 잘 보호할수 있는 예방약은 벗의 충고이다.  ㅡ 베이컨 희망 №. 희망은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의 꿈이다.                ㅡ뿌쉬낀 №. 희망은 만사가 쉽다고 가르치며 실망은 만사가 어렵다고 가르친다. №. 희망은 우수를 달래는 가장 좋은 음악이다. №. 희망은 생명의 령혼이고 마음의 등대이고 성공의 향도자이다.    ㅡ 괴테 №. 목숨이 붙어있으면 곧 희망이 있게 된다.                       ㅡ 쎄르반떼스 №. 희망에만 의거해 사는 사람은 기어코 실망하게 될 것이다.        ㅡ 이딸리아  №. 꿈이 있는 사람은 모두 희망의 협곡에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 절망하지 말라. 설혹 너의 형편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절망은 하지 말라. №. 행운은 항상 달에 걸려있다. №. 행운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미소짓는다.  ㅡ 파스테크 №. 행운이란 하얀 까마귀보다 더 드물다. №. 행운은 매달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여있지 않으면 거의다 놓치고 만다. 이번 달에는 이 행운을 놓치지 말라.            ㅡ 데일 카네기 №. 요행 이루어진 것은 자기 것이 아니다. №. 운명은 용기있는자 앞에서는 약하고 비겁한자 앞에서는 강하다. ㅡ 세계명언 №. 당신의 가슴 속에 당신의 운명의 별이 떠있다. №. 운명앞에 머리숙이면 운명도 당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 숙명론은 의지가 나약한 자들의 핑게이다.           ㅡ 로망 롤랑 ㅡ  №.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대하지 않다. №. 웃음소리에서 그 인간을 읽는다. №. 당신의 웃음은 당신의 호의의 사신이다.  ㅡ카네키 №. 미소를 보여서 손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다.     ㅡ쎄르반떼스 №.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미소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입니다. №.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것이 아니고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 ㅡ윌리암 제임스 №. 환락이란 추구가 만족된 시각에 느껴지는 순간의 감각일뿐이다. №. 만족될수 없는 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 네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조심하라 살찌는 돼지는 운이 나쁘다. ㅡ 헤리스 №. 이 산에 오르면 저 산이 높아보인다. №. 가난한 자에게는 부족한 것이 많지만 탐욕자에게는 무엇이나 다 부족하다. №. 유한한 목숨으로써 어찌 무한한 욕심을 따르려 하는가.              ㅡ 장자 №.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을 수 있는 벌레는 탐욕이란 벌레이다. №. 돈이 말할 때에는 진리는 침묵한다.                           ㅡ로씨야 격언 №.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더 잘 웃는다. 그리고 마음이 편하다.  ㅡ에머슨 №, 의심은 모든 철학의 근본이다.           ㅡ 퐁텐 №. 종래로 질문할 줄 모른는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ㅡ영국속담 №. 질투 그것은 심령의 혹이다.                     №. 시기는 자신의 화살로 자신을 죽인다.                        ㅡ 그리이스  №. 재능과 의지가 결핍한 곳에서 가장 쉽사리 질투가 생긴다.     ㅡ 쉴더 №. 마음 속에 신념이 살아 있는 한 누구도 당신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 스스로를 믿으면 곧 사는 방법을 알게 된다.                 ㅡ괴테 №. 숨쉬는 자는 고통이 있고 생각하는 자는 비통이 있고 오직 태여나지 않는 자만이 복하다. №. 고통은 일체를 위대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ㅡ발자끄 №. 고통은 인간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고는 인간을 현명하게 만든다. 지혜는 인생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다.  J.패터릭                                      №.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ㅡ 지스레지 예절 №. 바른 예절은 한사람의 많은 약점을 미봉해준다. №. 예의는 참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것같다.  ㅡ쉐익스피어                №. 예절과 지식이 인간을 만든다. 례절과의 접촉이 교육이다. №. 돼지우리 앞에서 모자를 벗을 필요는 없다. №. 사람은 아름답기때문에 사랑스러운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기때문에 아름답다.     ㅡ 레브 똘쓰또이 №. 당신의 결함을 지적해준 사람에게 감사할줄 알라. №. 감사는 마음의 기억이다. 심태 №. 충동으로 시작된 분노가 받아안게 되는 것은 자기 무안과 치욕이다. №. 일은 왕왕 분노로 시작되어 치욕으로 결속된다. №. 분노는 영원히 나쁜 참모이다. ㅡ졸라                            №. 나는 나 홀로 있을 때가 가장 고독하지 않은 때이다.   ㅡ시쎌로 №.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다. №.   주전자가 작으면 쉽게 더워지고 도량이 작으면 쉽게 노여워한다. №. 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용할 때 다른 사람도 당신에게 관용을 할 것이다. №. 용기, 그것은 미덕의 색갈이다.                  №. 젊은이의 가장 큰 매력은 용기와 분투이다.                      №. 모든 미덕의 절정에 달한 이름이 용기이다.  №. 희망이 도망치더라도 용기를 놓쳐서는 안된다.   №. 재능의 열매는 많은 경우 용기라는 나무에서 주렁졌다. №. 운명과 도전하는 용기는 인생렬차의 최대동력이다. №. 높은것만 칭찬하지 말라. 평야도 언덕과 마찬가지로 영구적이다. №. 바보를 칭찬하는 것은 그의 어리석음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  찬미는 성실한 사람에게 달아주면 어울리지 않는다. №.   아첨이란 위대한 넋에서 생겨날 수 없다. №.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일은 비밀을 지키는 것이다, №. 모든 사람에게 너의 마음을 열지 말라. 인내심 №. 인내는 운명을 좌우한다. №. 인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빨리 걸으면서도 말이 없는 나귀의 미덕이다. №.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희망이 깨지면 인내를 지속시키라. №. 진정 강한자는 끈질기고 초조함으로 기다림을 달랠줄 아는 자이다. №. 인내심은 미덕일 뿐만아니라 인격력량의 승화이다. №. 가장 수요될 때 도와주는 것은 가장 진실한 예물이다. 생활의 진리 №. 심장으로 하는 말은 오로지 심장으로만 알아들을 수 있다. №. 생활의 본질은 보는것이 아니라 느낀다고 하는것이 맞을것이다.   №.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안다는 것은 곧 분별력 문제이다. №. 준 것은 일기장에 쓰고 받은것은 종이쪼각에 쓴다. №. 자기가 베푼 은혜를 자랑하면 매력이 없어진다. №. 엄격한 절제는 불행의 입구를 막은 철제문이다. №. 근검절약이 바로 버는 일이다. №. 절약과 소박이 사회미덕으로 될때에 만이 발전과 번영이 기약된다. №. 직업은 그 사람의 품성도 고쳐놓을 수 있다. №. 담너머에 사과가 가장 맛있어 보인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   나무막대기는 지팡이로는 되지만 집은 짓지 못한다. №. 한 가지 장작개비로 화토불을 지필 수 없다. №. 서로 양보하면 조개떡하나로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성공 №. 습관은 본성 다음에 형성되는 천성으로서 본성보다 더 힘이 있다. №. 습관을 버리기란 돈지갑을 버리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 천하일미는 진수성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허기진 배에 있다. №.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고 실망이 있기에 락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 낙관과 비관은 쌍궤도우에 동일한 방향으로 달리는 정감의 열차이다. №. 영원한 낙관주의자가 없고 영원한 비관주의자가 없다. №. 성공의 어머니가 노력이고 인내성은 성공의 아버지이다.                                      №. 성공은 불행이라는 유모의 품에서 성장하였다. №. 승자는 이기게 된 원인을 곧잘 잊지만 패자는 실패한 과정을 잊지 않는다. №. 큰 성공은 작은 것을 배워주지만 작은 실패는 많은 큰 것을 배워준다.   역경 №. 역경은 인생이란 교과서의 한단락으로서 어느 장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 순풍에 돛단배를 탓을 때 항해의 웅심을 논하기는 쉽다. №. 역경은 의지박약 자에게는 무덤이고 강의한 자에게는 용광로의 불길이다. №. 역경은 인생대학에서 가장 설복력 있는 스승이다. №. 역경속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생활이란 무엇인가를 터득할수 있다. №. 한번도 넘어지지 않고 걸음발을 익힌 아이는 이 세상에 없었다. №. 역경은 현상태로서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더욱 의의가 있다. 상상력 №. 상상이란 창조력의 속성이다. №. 상상력은 작가의 생명이다. 상상력이 없는 작가는 세상에 한 명도 없다. №. 상상의 자유말로 가장 완전하고 확실한 자유이다. №. 상상력은 문학을 낳는 요람이다. №. 상상에서 한걸음만 더 나가면 환상이 되고 더 나가면 망상이 되고 만다. 후회 №. 후회는 인생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이 된다. №. 후회에는 약이 없지만 잘못을 고치는데는 지각생이 없다. №. 두번째 후회를 예방하려면 소잃고도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 젊어서 후회를 심으면 늙어서 괴로움으로 주렁질것이다. №. 후회없는 인생을 다 살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후회의 참뜻은 인생을 거의 살고나서야 잘 아는 법이다. №. 일은 잠간사이에 저질러지지만 후회는 평생을 두고 펄럭인다. №. 후회가 동반하지 않는 추억이란 있을수 없다. №. 솔직한 고백은 고치겠다는 선언이다. 사치 №. 사치는 수요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허영에서 온다. №. 사치는 사람을 도취시킬수는 있어도 인격가치를 빛내주지는 못한다. №. 사치는 유혹의 상용무기이다. 입에는 산해진미, 몸에는 비단옷을, №. 사치는 자기 훼멸의 시작이요 패가망신의 근원이다. №. 사치를 좋아하면 검박은 뒤에서 비웃는다. №. 사치는 진실과 어울리는 법이 없다, 진실한것은 언제나 소박함에 있을뿐이다. 도덕 №. 도덕은 참된 인간성을 검험하는 시금석이다.   №. 도덕은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나 똑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 미덕은 사향과도 같아 아무리 싸고 싸도 향기가 새여나오는 법이요 №. 미덕은 눈으로 보는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것이다. №.   도덕이 있다는 첫표징은 어디서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데서 나타난다. №. 도덕의 핵은 착함에서 오는 량심이다. №. 성실은 도덕의 주추돌이고 량심은 도덕의 대들보이다. 결단성 №. 우유부단은 선택의 어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격에 근원을 두고있다.  №. 우유부단한 성격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 유예미결은 기회를 놓치는 가장 큰 실수이다. №. 결단을 내리기전에 후회하지 않을것을 다짐하라. №. 유예미결의 뒤에는 언제나 후회가 따라서고 있다. 23. 씨앗은 작디 작지만 꿈은 대지를 푸르게 수놓아 간다. №. 선택은 모두가 가는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갈림길에 있다. №. 선택의 향도자는 이성이 아니라 흔히 직각이다. №. 인생에서 선택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 선택의 갈림길은 운명의 갈림길이기도 한것이다. 기회 №. 기회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곁을 스쳐지난다.                                 №. 기회란 어떤 경우에든 사람을 기다릴줄 모른다. №. 자기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는 그것이 기회를 불러오는 使者이다. №. 기회령감은 결단성과 용기를 가진 사람의 손을 잡기 좋아한다. №. 청춘을 인생의 황금시절이라고 하는것은 기회가 많기에 하는 말이다. №. 기회란 결코 일차성인것은 아니다. 다시 올수도 있으니 주저앉지 말라. №. 인생에는 확실한것이란 없고 오로지 기회만 있을뿐이다. №. 고개길엔 굽인돌이가 있고 인생길에는 기회가 있다.   총명 №. 총명한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 총명한 사람은 시대의 풍향에 따라 돛을 올린다. №. 총명한 사람은 기회도 잘 만들거니와 잘 만나기도 한다.          №. 총명한 사람은 이룩하지 못할 일은 입에 내지 않는다. №. 총명한 사람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히 여긴다. 지혜 №. 지혜는 인류에게 제일 처음 거짓말을 배워준 스승이였다. №. 지혜는 두뇌에 속하고 재능은 두손에 속한다. №. 지혜가 없는 지식인은 열매가 없는 나무와 같다. №. 지혜의 거울은 언제나 과거에로 향해있다. №. 지식의 산은 영원히 지혜의 바다를 메우지 못한다. №. 지식이 꼭 지혜를 낳는것은 아니지만 지혜의 모체인 것만은 확실하다. 경험 №. 경험은 어디까지나 원인이였지 결과는 아니였다. №. 경험은 늘 후회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한다. №. 경험에 의해 얻어진것은 값진 지혜이다. №. 경험의 교과서는 내용은 좋지만 언제나 시험이 끝난 후에 펼쳐진다. №. 경험의 가장 상용적인 표현방식은 검토하는 것이다. №. 속담은 거리의 지혜이며 격언은 일상 경험의 딸이다. 청춘 №. 청춘은 창졸한 마음으로 써내려가는 인생의 제2막이다. №. 청춘은 원인을 만들것이고 중년은 결과를 낳을것이며 로년은 해석을 할것이다. №. 청춘은 파종. 중년은 영농. 로년은 수확 №. 청춘은 인생의 한상태이지 지속상태가 아니다. №. 청춘기의 자본은 혈기와 자신심이다 №. 청춘기의 통행증은 용기이다. №. 청춘은 생명의 봄, 인생의 전성기이다 №. 청춘기에 미덕은 례의와 근면이다. №. 희망에 살지 않는 청년은 야만이요 인생을 반추하지 않는 늙은 이는 바보이다. №. 꿀은 질그릇에 담으나 수정병에 담으나 맛이 변하지 않는다. 노동 №. 바람은 맞서면 역풍이고 돌아서면 순풍이다. 선택은 자유이다. №. 확실한 수입은 절약에 있고 절약하는 손이 금고를 채운다. №. 괴로울 때, 고통스러울 때 가장 좋은 량책은 일손을 잡는 것이다. №. 당신의 집에 행복을 실어다주는 것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로동이다. №. 즐거운 인생이란 사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기쁨을 캐내며 사는 인생이다. 인생도리 №. 티끌보다 더 가벼운 것은 공기이다. 공기보다 더 가벼운 것은 바람이다. 바람보다 더 가벼운 것은 허영심이다. 허영시보다 더 가벼운것은 아무것도 없다. №. 옳바른 사람은 약속을 적게 하고 실행을 많이 한다. №. 약속은 엎지른 물과 같은 언약으로서 지키지 않으면 신의도 못줏는다.   №. 약속은 두마음을 한데 묶는 일이다. 묶는 끈은 신의이다. №. 약속은 명주실처럼 하고 실행은 닻줄(锚绳)처럼 굵게, №. 약속은 입으로 맺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마음이다. №. 약속을 단마디로 맺었다면 행동도 단번으로 보여주라. №. 내 나라라고 자랑차게 말할 수 없는 민족은 가장 불행한 민족이다 №. 유모아는 지혜의 명함장이요 사상의 불꽃이다. №. 유모아가 없는 생활은 기름이 떨어진 등잔과 같다. №. 행동은 그 사람에 대해 선전하는 가장 좋은 웅변고이다. №. 말은 행동을 예시하고 행동은 자기의 말을 확인해준다. №. 각자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밝은 거울은 각자가 취하는 행동이다. №. 말하고 하지 않는 것은 허장성세이고 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것은 실속이다. №. 세상만사는 좋고 나쁨이 상대적이다. 그래서 화복이 무상하다 하는 것이다. №. 당신이 장군은 될 수 없어도 전사는 될 수 있다. №. 선량한 한 마음은 황금보다 더 귀중한 마음이다. №. 당신이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될 때 “미래”가 남아있다는 걸 기억하라. №. 노력한 사람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모두 노력한 사람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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