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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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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송년소감 댓글:  조회:3437  추천:0  2013-01-04
   [20세기 세계 백가지 대 사건 회고]라는 책을 보면 이 책에는 20세기에 주목할만한 세계 백가지 대 사건을 수록했는데 그 중 전쟁과 그 전쟁과 관련된 력사적인 회의, 그리고 랭전과 관련된 사건 등이 절대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제일 첫 자리를 차지한 것이 8국 련합군이 북경을 함락한 사건이었고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것이 꼬소보 전쟁이였습니다. 그야말로 20세기는 전쟁으로 시작되어 전쟁으로 마감하는 세기였습니다.  세계 전쟁사에 남을 세계대전과 지역전쟁, 국가 간의 전쟁 만해도 백 개 대 사건 중 거의 30개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20세기에 세계가 주목할 전쟁만해도 30번이나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굵직굵직한 전쟁만 해도 일러전쟁, 중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조선전쟁, 윁남 항미전쟁, 중동전쟁, 만 전쟁 등을 례들 수 있습니다. 세계 대전만 해도 두 번이나 일어난 20세기 력사를 잔혹한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입니다.  전쟁은 죽음의 향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전쟁은 문명에 대한 최대 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기원전 5백년에 리디아의 최후의 왕인 크로에수스는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 그것은 평화시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림종을 지켜보지만 전쟁시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매장하기 때문이다.]  크로에수스의 이 비유를 빌어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되새겨봄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가 싶습니다.  유네스코 헌장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전쟁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평화의 방어수단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말하자면 전쟁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것만큼 전쟁을 이겨내고 찾아오려는 평화도 인간의 마음속에 먼저 깃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되겠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는 [평화는 막연한 탐욕에 대항하는 덕성적이고 무언적이며 지속적인 잠재능력의 승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의 량심들이 해마다 하는 기원도 역시 평화일 것입니다. 강권정치와 패권주의, 민족차별, 랭전적인 사고 등에 인한 갈등과 분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없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의 터전에 경제부흥과 즐거운 생활이 펼쳐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유태인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탈무드]란 책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의 종교, 법률, 철학, 도덕에 관한 생활의 지침서인 [탈무드]란 이 책은 1200년 전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마무리가 되지 않고 대대손손 계속 써 내려오는 있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세계가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끊임없는 진보와 발전을 념두에 두고 시대에 따라 지침이 될만한 새로운 견해를 대를 이어 적어 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이 시대에 따라 새로운 내용을 [탈무드]란 책에 적어 넣듯이 우리들이 해마다 적어 넣어야 할 것이라면 역시 사회진보와 발전을 위한 사건이어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해마다 세계 대 사건에 수록될 것이 전쟁이나 랭전으로 인한 사건이라면 우리는 후세에 치욕만 남길 뿐입니다. 후세에 남을 책에 수록될 세계 대 사건들이 가급적이면 인류문명의 끊임없는 진보와 과학의 발전, 대자연과의 융합, 삶의 향상을 위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    선물문화 댓글:  조회:3724  추천:0  2012-12-28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성의가 담긴 선물을 사들고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 스승이나 선배들을 찾아가 인사드리고 덕담을 나눕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전화로 문안하거나 연하장이거나 달력을 보내기도 합니다. 자그마한 선물로 정을 주고받는 연말의 선물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선물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념은 《선물은 아주 간단하게 그러나 정성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서양인들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정도이고 친구에게 보내는 선물은 아주 값이 싸지만 그러나 정성이 담긴 것으로 선택합니다.  일전에 어느 한 신문에서 담배 한 보루에  몇 천 원을 고가 하는 초특급 담배가 나왔는데 그 비싼 담배가 잘 팔린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몇 천 원씩 하는 담배를 사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물용으로 사간다고 합니다. 신세진 사람에게나 상사에게 금품을 주면 뇌물로 취급되지만 담배는 그래도 받는 사람이 부담이 없이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값이 50달러에 가까운 선물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로 취급하는 서양인들의 시각에는 몇 천 원이나 되는 담배를 선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통념으로 상식적인 선물에 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정부패사건으로 피고석에 나선 공직자들을 심심찮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피고석에 나선 사람들의 죄를 쭉 일별 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직권남용과 뇌물 수수입니다. 뇌물로 받은 금품에 대해서 그들은 그 금품이 값이 얼마이던 간에 죄다 선물로 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선물이란 값싼 것이지만 정성이 담긴 것을 그 어떤 이해 관계에서보다도 그저 인사로 정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내가 지방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한 공직자가 하루는 생일날에 수하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대부분 직원들이 생일축하 선물로 생화를 들고 왔는데 한 직원만은 생화에 값비싼 금반지를 선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공직자는 그 직원을 조용히 밖으로 불러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화는 고맙게 받을 선물이지만 이 금반지는 마음을 검게 만드는 뇌물이니 도로 가져가게.》  그 직원이 자기의 자그마한 성의라고 굳이 받아달라고 하자 그 공직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걸 받는 순간에 우리 둘 사이엔 우정이 사라지고 적나라한 이해관계만 남게 되네. 난 그래도 우정만은 잃고 싶지 않다네. 제발 내가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게.》  오히려 뇌물을 주는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공직자의 말은 참으로 뜻깊은 말입니다. 뇌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니 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반대로 받는 사람이 없으면 주는 사람이 자연 없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뇌물을 받는 사람에 앞서 주려고 하는 사람이 붙는 불에 키질하듯 뇌물 풍조의 만연에 부채질을 해주는 역할을 놀게됩니다.  정직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긴데 한 농군이 장터에서 소 한 마리를 샀습니다. 소를 집에 끌고 와 보니 소 방울 속에 보석이 들어있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그 농군이 소 값보다 더 비싼 보석을 얻게 되어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행운을 축하해 주었지만 그 농군은 이튿날 소를 판 사람을 찾아가 보석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를 판 사람도 소방울안에 보석이 들어 있은 줄 몰랐다면서 그 보석은 자기 것이 아니니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농군도 자기는 소를 샀지 보석을 사지 않았다고 하면서 굳이 보석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소를 판 사람도 자기는 소를 팔았지 보석은 팔지 않았다고 하면서 보석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소 판 사람과 소를 산 사람은 보석주인을 찾아 돌려주기로 하고 보석을 은행에 보관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나눈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소를 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오늘 자네 때문에 소도 팔고 또 보석보다 더 소중한 정직함에 대해 배웠네.》  그러자 소를 산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 역시 오늘 소도 사고 돈주고도 못사는 정직함도 샀습니다. 감사합니다.》  자기 삶을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그 마음, 그 삶의 자세는 오늘도 우리들의 귀감으로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해가 정직하게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를 미리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3    사막과 오아시스 댓글:  조회:3520  추천:0  2012-11-30
 국가통계부문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도서 판매 추세는 해마다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민들이 도서 구매에 쓰는 소비가 처음으로 담배소비를 초과했다. 도서구매에 쓰는 소비에서 북경이 전국의 첫 자리를 차지했는데 북경 시민들이 한해에 도서구매에 쓰는 비용은 전국 인당 평균 25원에 비해 몇 배나 된다고 한다.   책은 인류가 문명에로 나아가는 지침서이다. 중국에서 도서구매에 쓰는 소비가 담배소비를 초과했다는 것은 국민들이 인류문명의 지침서를 생활과 사업의 필수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태인들에게는 교육과 생활, 사유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탈무드》라는 지침서가 있다. 《탈무드》라는 말은 《위대한 연구》 또는 《위대한 학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태인들은 5천년의 역사 속에 유태인들이 끈질기게 살아 남을 수 있은 것은 《탈무드》 덕분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전란의 세월에 금은보화는 죄다 버릴지언정 《탈무드》 책만은 꼭 챙겨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유태인의 한 철학자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기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사랑하는 아들아, 책을 너의 벗으로 삼아라.   책장이나 책꽂이를 너의 기쁨의 밭, 기쁨의 정원으로 가꾸어라.   책의 동산에서 훈훈한 체온을 느끼려무나. 지식의 고귀한 열매를 너의 것으로 만들고   지혜의 꽃다운 향기를 맡으려무나.   만일 너의 영혼이 만족을 느끼거나 혹은 피로에 지친다면   책의 정원에서 정원으로, 밭이랑에서 밭이랑으로   또는 이곳저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려무나.   그러면 새로운 희망이 용솟음치고 너의 영혼에 기쁨으로 가득 차리라.》   이 유서의 내용은 지식이야말로 만족을 모르는 영혼과 새로운 희망을 부여해준다는 유태인들의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한 번 사업하는 친구의 집에 초청 받아 갔다가 그 친구의 부인이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들었다.   《애보고 공부 잘하라고만 하지 말고 애 앞에서 몇 번이라도 책 읽는 모습을 보이세요. 정 볼 책이 없으면 신문이라도 좀 뒤적여 보세요.》   사업에 바삐 돌다나니 책을 들 시간에 없다고 변명을 늘여놓는 친구의 집을 둘러보니 값진 가구들이 빠짐없이 갖추어진 방에 유독 책장이 없었다. 이 구석 저 구석에 널려져 있는 책이라 해봤자 심심풀이로 뒤적여보고 그냥 던지는 그런 잡지들 뿐이였다.   또 한 번 다른 한 친구의 사무실에 가보니 방 한 벽을 다 차지한 책장에 세계명작, 중국명작을 망라한 새 책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기막힌 것은 한 단위의 책임자로 있는 그 친구가 공금 몇 만원을 내서 한꺼번에 그 많은 책을 사다놓고는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책을 그저 실내장식품으로 자신의 허영을 과시하는 일종의 전시품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누군가 책이 없는 집은 사막이고 책이 있는 집은 오아시스라고 했다. 그러나 책이 있어도 읽지 않으면 아무리 오아시스라도 그것은 생령의 숨결이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이다.   한 현인은 《당신은 어떻게 되어 현인으로 되었습니까?》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먹는 기름보다 책 읽을 때 켜는 등불기름에 더 많은 돈을 들였을 뿐이오.》   현대인들도 현인의 이 말을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2    력사라는 거울 댓글:  조회:3210  추천:3  2012-11-26
   일전에 한 해당기구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한데 따르면 청소년들 중 력사 지식이 아주 결핍한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에 응한 청소년들 중 역사에 대해 흥취를 가지고 질문에 응한 비례가 27%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70%를 웃도는 부류의 청소년들이 력사에 대해 잘 모르고 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언젠가 한번 북경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연변 룡정시에서 왔다는 젊은이들 몇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때 룡정예술단에서 전속 작가로 있은 적이 있는 필자는 마치 고향 후배들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한창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필자가 윤동주 얘기를 꺼내니 뜻밖에도 고중를 나왔다는 젊은이들이 윤동주가 누군지도 몰랐다. 룡정에서 일어난 세계가 주목했던 3.13 반일시위는 더구나 몰랐다. 룡정에서 나서 자랐고 또 고중까지 나왔다는 젊은이들이 그 정도로 력사에 대해 까막눈이였다는 것이 가슴 아팠고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지난 한 시기 력사에 대한 교육을 홀시한 것도 원인이겠지만 력사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 마음가짐 새가 주되는 원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해 봤다.    력사는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이며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이런 말이 있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모든 미래의 필연적인 원인이다. 미래의 가장 좋은 예언은 과거이다.    우리가 력사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은 지나온 옛 자취를 돌이켜보면서 오늘의 자세를 바로잡고 나아가 미래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미래인 청소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력사 결핍 하다는 것은 력사에 대해 흥취가 없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력사라는 이 거울에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자세를 비춰볼 생각마저 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미래 지향성적인 사고가 결핍 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학자이며 평론가인 정판룡 교수님은 생전에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라나 민족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도 조국에 대한 료해가 없이 스스로는 생기지 않는다. 중국은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하며 오랜 력사를 가진 문명고국이라는 그런 료해도 없이 중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제 민족에 대한 사랑도 제 민족의 력사, 풍속, 전통, 문화 등에 대한 깊은 리해의 기초 우에서 산생 된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 뜻을 헤아려보면 력사를 모르는 사람은 민족을 모르는 사람이며 또한 조국마저도 모르는 사람이란 것이다.    한 력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력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보다 나은 력사를 창조하고 보다 아름다운 문화와 삶을 꽃피우기 위한 행위로서 만약 그 어느 민족이나 국가가 위대한 력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력사를 빛내지 못한다면 그 민족의 번영은 기대할 수 없다.》     력사를 알아야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미래를 더 아름답게 설계할 수 있다는 얘기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더군다나 21세기 주역으로 나설 청소년 일대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략사라는 이 거울을 다시한번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오늘 모습에서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필요를 느껴야 하지 않을가.    
1    《세계종말》이 준 삶의 여유 댓글:  조회:3383  추천:2  2012-11-20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말을 골라보라면 아마 세계종말이라는 말일 것 같다. 같은 의미지만 세상이 끝난다는 말보다도 세상 살아가는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지구가 박산난다는 말은 더 무시무시하게 안겨온다. 지구폭발, 과학 환상소설에서나 나오는 훼멸적인 무시무시한 장면을 재난 영화《2012년》이 보여주고 있다.   지구 대폭발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150억년, 태양과 지구의 나이는 각각 약 50억년과 45억년 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이가 45억년을 먹은 지구가 폭발한다고 예언한 사람이 바로 400여 년 전 의술을 호구지책으로 간주해왔던 노스트라다무스다. 그는 생전에 남긴 《여러 세기》라는 시집에서 세기말의 재난은 1999년 7월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에 따라 이 세기 70년대에 일본의 로켓전문가인 五島勉이 전자계산기로 추산한 결과 지구의 폭발이 1999년 8월 18일에 일어난다고 했다. 그의 예언에 따르면 1999년 8월 19일 태양, 달, 지구를 제외한 태양계의 8개 큰 행성들이 십자가식으로 배열되는데 각 행성들의 힘이 태양으로 하여금 평소보다 더 많은 고 에너지 입자를 행성들에게 주는데 이 영향으로 지구에는 이상기후와 큰 재난이 와서 나중에는 지구가 폭발한다고 했다.   예언은 예언이고 망발은 망발로 그친다고 했다. 1999년 8월 18일이 이미 지났다. 태양은 여전히 머리위에서 빛나고 있고 인간을 실은 지구는 그냥 태양을 에돌고 있다.   나로 말하면 이른바 《세계종말》을 두 번 겪었다. 처음에 겪은 《세계종말》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새삼스럽지만 여기서 언급해본다. 그 때가 한국 서울을 방문 중이던 1992년 10월이다.     한국 서울에 있으면 가끔 공공장소에서 설교자들을 만나게 된다. 유람객이 모이는 공원이나 관광지에서 찬송가를 열창하는 설교자가 있는가하면 지하철이나 역전 대합실에서 남이 듣던 말든  열심히 성경을 풀이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그들은 대체로 하느님 가라사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집에까지 찾아온다.   한번은 내가 집에 혼자 있는데 초인종소리가 났다. 장보러 갔던 아내가 왔나싶어 문을 열여 보니 낯모를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누굴 찾으십니까?》  《집주인이세요?》  《전 이집 손님입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아마도 중국의 가두 거민소조 조장 같은 역을 맡은 분인가보다.  《중국에서 왔습니다.》   중년 여인은 먹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두 손을 맞잡으며 야한 반가움을 나타냈다.  《무슨 용건이라도…》  《실례지만 잠간 방에 들어갈 수 없을 가요?》   거절할 수 없었다. 여인은 방안에 들어서자 부터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우린 다 알고 있어요. 주님께서도 죄다 알고 있어요. 주님을 아시죠? 웃으시는걸 보니 알고 계신가보군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들으신 적이 있으세요? 못 들으셨다니 참 유감이네요.》   이렇게 시작한 그녀의 설교는 끝이 없었다. 내가 약속한 분을 만나러 부근 다방에 나가야겠다고 해서야 여인은 설교를 그만두었다.  《꼭 주님을 믿으시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세요.》   여인은 떠나면서 책 한권을 주었다. 그날 저녁에 찾아온 한국친구한테 그 책을 내놓으면서 성경공부 한 번 잘했다고 했더니 그 친구는 책 제목을 일별하곤 대뜸《사이비종교군.》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이비종교란 대체 무엇입니까?》  《무신론자인 김형에게 구구히 설명했댔자 더 어리벙벙하겠으니 간단히 말하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종교라고만 알아두면 돼요.》   가짜면 사이비종교, 그럼 진짜는 …  《참 종교라 하지.》   주님에게도 가짜 신도와 진짜 신도가 있는 모양. 그 뒤로 며칠 후 나는 지하철에서 입에 거품까지 물고 설교해대는 설교자를 대하게 됐다. 나이가 40대로 보이는 설교자는 여느 설교자들처럼 말끝마다 주님의 사랑을 거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한테 어서 가자고 호소했다.  《이제 곧 큰 환란이 옵니다. 어떤 환란인가 우선 큰 지진이 일어나 사람 사는 육지가 바다 속으로 꺼져 내리고 도처에서 용암이 분출해서 사람들은 타죽고 숨 막혀 죽고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또 다른 환란은 기근인데 그 기근이 어떤 기근인가하면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기근입니다.》   여느 설교와는 달리 죽음을 거들며 듣는 이들에게 겁부터 주더니 나중엔 아예 사람이 사람을 먹는 식인사회로 몰고 간다.  《마지막 환란은 핵전쟁입니다. 인종은 멸하고 지구는 박산 나고…》   설교자는 아예 지구까지 우주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환자가 아닙니까?》   서울에서 사시는 외삼촌이 나의 물음에 나직이 답을 주었다.  《보다시피 양복입고 넥타이매고 다니는 멀쩡한 녀석인데 사이비종교에 미쳐버려서 저러는 거야.》  《가짜 종교?》   종교를 믿을 려면 믿되 미치지는 말라는 종교격언이 있다고 한다.  《저 녀석은 보통 미친 게 아니라 아주 환장했어.》   환장한 광신도는 그냥 지껄여댔다.  《세계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이 망할 때면 미리 알려 줍니다. 노아시대에 노아에게 미리 알려서 방주를 만들게 하시듯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환란에서 구해주시고 저 주님이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재림합니다. 그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천국에 가서 만복을 누립시다.》   알고 보니 광신도는 종말론자였다. 내가 종말교 신도를 처음 대한 것은 1991년 8월 중국의 하문시 어느 호텔 로비에서였다. 그날 저녁식사를 일식으로 하자고 한국에서 온 친구와 함께 호텔에 들어가니 호털 로비 한쪽에 놓여 있는 피아노주위에 숱한 외국인들이 모여서 있었다. 우리가 커피 한잔을 들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피아노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호텔 대청에서 노래를 뽑는다는 것은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스물대여섯이 합창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그 어떤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지은 채 노래를 부르는 외국인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매 술에 취한 주정뱅이들은 아니었다. 영어로 부르는 노래여서 가사 뜻을 알 수 없었다.  《저 분들이 지금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나로선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주님께서 데려가 달라고 애원 애원하고 있어요.》   영어에 능한 내 친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저 분들은 종말교 신도들인데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주님의 재림을 맞아 천국으로 가자고 저러고 있어요.》   그날 나는 친구한테서 종말교에 대해 대충 얻어 들었다. 종말교를 일명 말세교라고도 한다. 말세란 예수가 탄생해서부터 다시 재림할 때까지의 세상을 뜻하는데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세상은 끝난다고 믿는 것이 종말교라고 한다. 예수의 재림이 언제인가, 다시 말하면 세계의 종말이 언제 어느 때인가에 대해 3세기쯤부터 서방세계 종말교 신도들은 오늘까지 셀 수도 없이 세계 종말을 예언해왔지만 지구는 그냥 생령들을 싣고 돌아가고 있다.   종말교 광신도의 말대로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주님이 재림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세계의 종말을 보게 된다. 주님만 믿으면 재림한 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간다는데 나처럼 주님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은 어디에 갈 거냐.  《지옥으로 갑니다. 주님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은 무서운 지옥에서 죽을 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수도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네 지옥 한 번 가봤어?》   외삼촌이 듣다못해 한마디 던졌다.  《가보았습니다. 너무너무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흉악하게 생긴 마귀가 채찍을 들고 무섭게 매질하면서 그냥 뛰라고 채찍을 들고 무섭게 매질하면서 그냥 뛰라고 고함치기에 바닥을 보니 바늘을 꼿꼿이 세운 바늘길이였습니다. 마귀의 채찍이 무서워 뛰면 발은 바늘에 수없이 찔려 피가 샘솟듯 하고 쓰러지면 마귀가 휘두른 채찍이 살점을 뜯어내고 아- 그 고통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광신도는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남이 못 가본 지옥까지 가봤으니 자넨 세상 한 번 잘 살았군.》   외삼촌은 쓰게 한 번 웃어보였다. 그 뒤 며칠 지나지 않아 광신도가 말한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날이 왔다.   1992년 10월 28일, 한국은 《세계의 종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당 부분의 집계에 따르면 150여개 교회의 종말교 신도 8천여 명이 속세와 모든 인연을 끊고 주님을 맞는 예배에 들어갔다. 미친 듯이 손뼉을 치거나 방바닥을 두드리거나 소리소리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담겨지기도 했다. 신도들 중 수억 되는 재산을 교회에 바친 신도가 있는가 하면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한 신도도 있었고 아예 탈가한 신도들도 적지 않았다. 부산에서는 신도 20여명이 27일부터 행방을 감춰 검찰과 경찰이 동원되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은 으슥한 산골짜기에서나 혹은 그 어느 동굴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집단 자살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경찰은 수사에 나섰다.   그날 나와 아내는 종일 집안에 들어앉아 텔레비전 화면만 주시했다. 광신도들의 말대로 세계의 종말이 어떻게 오는가를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밤 12시,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시각이 가까워옴에 따라 텔레비전 화면에는 열광하는 종말교 신도들의 모습이 자주 비치였다.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광적으로 《충성무》를 췄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 시절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문화대혁명》 광란이 한창이던 어느 하루 한 정신병환자가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연길시 중심가인 복무대루 앞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을 막고 《충성무》를 췄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점심밥곽이 든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그 정신병환자를 따라 열심히 《충성무》를 췄다. 환자 찾으러 나온 간호원이 사람들에게 앞장서 춤을 추는 사람이 정신병환자라고 하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 간호원을 반혁명분자라고 그 자리에서 투쟁대회를 열었다. 한쪽에서는 정신병환자를 따라 열심히 춤을 추고 다른 한쪽에서는 간호원에게 개패를 메워 성토하는 그 광경이 지금도 가끔가다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사실 그 시절 사람들은 정치광란증에 허덕였다. 정치광란증도 일종 정신병에 속한다. 정신병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 영원한 욕망의 만족과 환각의 경험을 체험한다고 한다. 지금도 광란증에 걸린 사람들이 어떤 욕망과 환각을 체험하고 있을 가가 궁금스럽다.   재림하는 예수님을 맞는다고 법석을 떨어대는 광신도들이 그 날 광란 끝에 맞은 것은 어떤 결말이었는지 아래에 계속 소개한다.   정각 12시. 《휴거》, 말하자면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았다. 12시에 예수님이 공중에 나타나면 날아 올라가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간다던 광신도들은 허탈한 모습으로 탄식만 내뿜었다.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버린 광란, 그 광란이 남긴 것은 허탈뿐이다. 그것을 달래려고 일부 교회에서는 《연기론》을 내걸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짜를 연기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일찍 1844년  종말론교회의 예수재림예언에 이어 1914년과 1930년에 종말계시, 예수재림예언이 있었는데 번마다 예언이나 계시가 빗나갔다. 그러자 교회 측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예수님》이 재림을 뒤로 미루었다고 했다.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재림을 연기하신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세계종말이 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실 난 그들의 말대로 세상이 망해 지옥에라도 한번 가볼 가 했는데 하하하…》   사람 사는 곳의 기분을 험악하게 만들던 소동이 끝나니 농말이라도 던져볼 여유도 생긴다.  《전 그래도 광신도들의 덕분에 천국구경이라도 한번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내도 안도의 숨을 내쉰다. 우리에겐 지옥이나 천국이나 다 그 어떤 관광지처럼 한 번 가볼만한 곳같이 여겨진다. 전생에 덕을 쌓으면 간다는 천국과 악을 남기면 굴러 떨어진다는 지옥을 거리낌 없이 농말에 담아보는 것 또한 우리만이 가진 삶의 여유가 아닌가 싶다.   속담에 꿈에 죽으면 장수한다는 말이 있다. 그 속담대로라면 이른바 《세계종말》을 두 번씩이나 당해본 우리 내외는 장수할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일명 재난 영화라고 하는 《2012》은 그래도 성경에서 나오는 《노아의 방주》까지 등장시키면서 세계 종말은 선고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어쩌면 방금 막을 내린 유엔 기후변화대회가 취지로 삼고 있는 지구 살리기를 위한 인류에 대한 경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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