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에서 사업할때의 김록송연구원
내가 처음 조남기동지를 만났던때는 1979년 가을이였다. 그때 나는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와 중국과학원 유관 지도국의 동의를 받고 조수 두명을 거느린채 도문에서 석달간의 공동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내용은 초고속원심기 회전자(로터)의 회전폭발실험(초고속원심기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실험)이였는데 중국에서 처음하는 실험이였다. 이 실험의 성과는 공동으로 소유함과 동시에 또 전문적으로 도문시원심기공장에서 생산판매할 중국의 첫 고속원심기를 시험제작하는 일이였다.
나는 연구소로부터 연구에 필요한 특수강철재료를 가지고 도문에 갔고 공장에서는 기계가공만 하면 되는 상황이였다. 기실 우리 연구소측의 요구는 연구성과의 공유일뿐이지 어떤 경제상의 요구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도 공장과 도문시 해당부문 지도일군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다보니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당시 연변의 주요지도일군이였던 조남기동지에게까지 반영되였다. 하루는 조남기동지가 내가 일하는 도문의 원심기공장에 직접 찾아 오시여 조사연구를 진행하시였다.
80년대초 김록송연구원이 도문에서 조수들과 함께
조남기동지는 기름(机油)기 가득한 내 손도 꺼리지 않고 덥썩 잡아주시면서 북경 중국과학원의 최첨단 연구를 위해 고향마을(도문은 나의 출생지)까지 찾아온 나의 노력에 감동하신다면서 무슨 곤난이 있으면 직접 찾으라고까지 말씀하시였다. 조남기동지는 또 연변주에서는 나의 사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후 사업과정에서 도문시에서 곤난이 있으면 주저없이 주정부를 찾아가군 했는데 무슨 일이든 주에서 해결할만한 일은 인차 해결해 주었다. 나의 동창생 여러 명도 연변의 타지방으로부터 도문공장에 조동해 왔다.
조남기동지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변강의 작은 도시인 도문에 중국에서 유명한 원심기공장이 나타나게 되였다. 그때의 성과를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인차 국가 항목으로 비준하고 큰 자금적 지지까지 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중국의 고속원심기 설계제작에서 당시 국제보편수준에 도달하는 전부의 관건적 기술을 해결하게 되였다.
조남기동지의 과학연구사업일군들을 위한 따뜻한 관심과 직접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이런 성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였을것이다.
/김록송
(본문은 중국과학원 김록송연구원이 조남기동지를 추모하면서 자신의 잊지 못할 한단락 추억을 정리한 내용임)
/길림신문 북경특파취재팀 안상근 김성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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