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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설계사 최인호 유머 최인호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월10일 09시24분    조회:7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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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2011-01-08 김학송]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연출, 웃음의 설계사 고 최인호선생이 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3년세월도 넘었다. 하지만 마냥 소품야회공연이나 안방텔레비죤화면에 그이가 연출을 맡았거나 출연한 소품을 볼 때면 이 가슴 허전함 감출수 없다. 그가 남긴 웃음과 연기는 항상 영원한 미소와 유머로 우리 마음속에 살아숨쉰다.

이 글을 쓰려고 하니 또 다시 눈물이 앞을 기리운다. 무슨 말로도 저명한 최인호연출을 그리는 이 마음 표달할수 없을것 같다. 그이와 함께 사업하던 나날은 비록 19년이지만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나온 나날들은 그렇게도 생생히 떠오른다… 다만 추모의 글로나마 이 마음 달래는수밖에 없다.

2007년 10월 16일 새벽 4시 50분, 웃음의 설계사는 인생의 새 일과를 펼치기전 사랑하는 가족을 떠났고 필생의 정력을 몰부었던 예술과 고별하셨다.

아침 출근전 걸려온 전화 한통은 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 굳어지게 하였다. 최연출님의 사망 비보였다. 세상 뜨시기 닷새전 나는 우연히 거리에서 최연출님을 만났다. 당금 점심시간이라 나는 식사하러 가자고 청들었다. 그러자 그이는 낚시협회 동료들이 차에 앉아 기다린다고 하면서 다음날 전화할터이니 그때 자신이 한턱 쏜다고 하시고는 작별을 고했다. 이것이 그이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언제나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열번중 일곱번은 그이가 조용히 결산해버리군 했다. 언제나 찾는 음식점이라면 《우육면판점》이였다. 나와 함께 하는 식사자리에서는 늘 작품선택문제가 아니면 작품구상, 인물성격창조에 열을 올리는 타입이였다.

극단의 업무를 책임지고 편집도 담당하였던 나는 1999년 5월 12일부터 22일까지 조양천 자그마한 려관방에서 희극 《금개구리》작품수개임무를 맡고 그이와 함께 수개와 편집에 달라붙었다. 그 열흘은 말그대로 《전쟁》이였고 그이와의 합작의 나날이였으며 또한 내가 최인호연출님의 성장과정을 료해하는 나날들이였다.



그이가 밤을 패가면서 한막씩 극본수개를 해놓으면 나는 오전 시간을 리용하여 편집하였는데 그 편집해놓은 장막을 두고 그이와 나는 곧바로 업무적인 《대판싸움》을 벌이군 하였다. 그이는 《내가 온 밤을 새우면서 어떻게 키운놈들인데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총살하냐? 해도 너무한다. 자넨 일본놈보다도 더 지독한 놈이야!》라고 유머가 담긴 《욕》을 쏟아낸다. 

아침 식사를 커피 한잔으로 대체하시는 최연출님은 점심식사가 끝나면 나의 제의에 의하여 자신의 과거지사를 들려주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항상 소탈하시고 유머만 쏟아져나오는 그이의 지난날에 그토록 큰 아픔이 묻혀있는줄을 뜻밖으로 느끼면서 함께 눈물을 닦으며 울고 웃었다. 누군가는 웃으며 사는 사람에게 말 못할 치명적인 고통이 있다고 하였다. 바로 최연출님을 두고 나온 말 같다. 지금 이 시각 그이가 나에게 들려준 과거지사가 기억속에 생생하다. 

1946년 4월 22일, 연길현(지금의 룡정시)북신가에 계시던 최정헌과 리영숙 두분의 장남으로 최인호가 태여났다. 그후 녀동생 김옥숙이가 태여나 이 가정엔 웃음꽃이 피였다. 그러나 그 웃음도 얼마 못가고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린 최인호는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면서 사랑하는 동생과 어머님과 생리별하게 되였다. 당시 어머님의 재가는 그에게 크나큰 타격이였고 슬픔이였다.

소학시절 어머니 생각이 나면 혼자서 슬피 울던 어느날 할머니가 동네 아줌마들과 하시는 말씀가운데서 어머니가 연길 어느 곳 어느 가두에 살고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일요일 시간을 리용하여 도보로 연길에 가서 수소문하여 어머니와의 상봉을 이룩하게 되였다. 하지만 재가한 어머니의 새 가정 환경이 그를 받아들일수 없는 형편이라 그날 밤으로 눈물을 날리며 또 다시 도보로 룡정에 돌아오게 되였다.

한창 사랑을 받으며 커야 할 나이에 한번 본 어머니가 더더욱 그리워 학교를 간답시고 나와서는 모아산 큰 소나무밑에 책가방을 파묻어두고는 연길에 가서 어머님을 뵙군 하였다.

그후 할아버지가 세상 뜨고 할머니 혼자서 인호를 거둬줄 능력이 없게 되자 또 다시 재가한 어머님을 따라 1955년까지 연길시 하남소학교를 그럭저럭 졸업하였다. 어머니가 조양공사에 자리를 옮기자 1959년에 연길현조양공사 소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에 연길현조향중학을 다니다가 그해부터 1963년까지는 연길현조양공사광영대대 4대에서 어머니를 도와 농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사랑에 갈증을 타는 그였지만 남들앞에서는 항상 웃음천사로, 풍각쟁이 역할로 나날을 보냈다. 사시장철 농사도 지었고 과수원도 맡아보았으며 소물이도 하였다. 일에 들어서 남들의 뒤꽁무니에 섰다면 과외 예써클에서는 주력군, 선줄군이였던 그이는 소방목을 하면서 대본를 외우기도 하고 소들과 큰 소리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고 저녁이면 련습하게 될 작품속 인물을 연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구락부활동실에는 환호소리 터졌다. 1964년, 연길현 과외문예경연대회에서 그가 출연한 촌극 《이 굴재를 어디다 내겠소?》가 공연되면서 하도 연기가 신통하여 우수표현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현문공단 전문가들의 눈에 들어 그는 현문공단 배우로 뽑히게 되었던것이다. 팔도향석산촌골안에서 소방목을 하던중 구락부 동료가 숨가쁘게 달려와 소식을 전하자 그는 온 산이 떠나갈듯 《아버지ㅡ 어머니ㅡ!》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고 불렀다.

그날 밤으로 초막에 펴놓았던 이불짐을 꿍져지고 곧바로 룡정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가난에 쪼들리고 부모사랑에 목이 말랐던 그이는 연극예술을 해보려던 숙망이 이룩되자 문공단 로배우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수업》을 탐독하며 연기기량을 련마하는데 모를 박았다. 그는 처음으로 출연한 단막극 《한근차이》작품에서 돼지 파는 주인역을 맡았다.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속에서는 수시로 웃음이 터졌다. 소박한 농민의 형상을 합리한 과장속에서 생동하고 진실하게 부각하여 또 다시 주 우수표현연기상을 수상했다.

그이가 한창 희극배우로 앞날을 장식해갈 때 문화대혁명이라는 동란은 그에게도 찬서리를 끼얹었다. 파산의 변두리에 선 문공단을 떠나 그는 또다시 이불짐을 둘러메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낮이면 밭에 나가 일하고 밤이면 과외문예선전대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전업단체에서 피땀을 휘뿌리던 그는 밭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여 촌에서는 그에게 리발관일을 맡겼다. 그가 리발사 일을 하는 그곳은 웃음마당으로 변했다. 남편을 찾아나서는 마을 안해들의 첫걸음이 자연 리발관이였다. 여기에서 그는 수많은 생활언어를 익혔고 각양각색의 지방 방언, 격언, 속담들을 머리에 기록해두었다. 그것이 그대로 후날 작품창작에서의 재부로 되였다고 그는 늘 자랑삼아 말하였다.

1978년, 정책락실로 그는 다시 현문공단에 들어가 연극대 대장을 맡았다. 무용창작도 해보고 작곡도 하고 재담재간도 키웠는가 하면 북장고를 울리며 표현창도 부르면서 문공단기질에 걸맞는 재능을 키우기에 땀방울을 흘렸다. 그이는 또 연출을 배워보리라 작심했다. 1979년 극단에서 고전극 《춘향전》을 공연하게 되자 그는 방자역을 하면서 한편 부연출까지 맡아보게 되였다. 방자역을 얼마나 출중히 감당하였는지 가는 곳마다에서 환영받았다. 하면서도 언젠가는 자신이 만든 웃음보따리작품을 연출하여 관객에게 선물하리라 꿈을 꾸었다.

1981년, 그는 김훈이 쓴 경희극 《두부장사》 극본을 손에 쥐게 되였다. 배역이 부족한 문공단에서 그는 배역을 맡아하는 한편 자기의 첫 전업극단 연출을 맡아보게 된다. 그 경희극은 그해 길림성순회콩크루에서 1등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이렇게 그는 연출이라는 또 다른 창조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고 그후로 1981년에는 장막경희극 《시름거리 웃음거리》의 연출을 맡아 대절찬리에 또 한번 길림성 1등상 수상석에 오르게 되였다.


희극 《금개구리》는 동북3성연극콩쿠르에서 극본, 연출, 주인공이 각각 《금상》을 받았다.

희극 《금개구리》는 동북3성연극콩쿠르에서 극본, 연출, 주인공이 각각 《금상》을 받았다.

(오른쪽으로부터 최인호, 박흥송단장, 작가 김영, 주인공 한석봉)

1984년, 그는 장막경희극 《울고 웃는 사람들》의 연출을 맡고 연변제1차예술축전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번 경연에서 또 연출 2등상을 받았으며 평론가와 관객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그의 연출작품들은 시도가 대담하였다. 첫 대형극에서는 오토바이를 실물그대로 무대에 올리였고 두번째극에서는 흐름식연극풍격으로 2층무대를 제작함으로써 또 다른 착상을 보여주었으며 기발한 구상을 펼쳤다. 1985년부터 연변문예창편실에 전근하면서부터 그의 연출기량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1986년 연길시구연단의 요청으로 장막희극 《변장련애》를, 1987년에는 연길현문공단의 요청으로 고전희극 《벌거벗은 량반》을, 1989년에는 화룡현문공단의 요청으로 장막경희극 《꿀쥐와 까마귀》등 극의 연출을 맡아보았는데 연변제2차예술절에서 연출상을 수두룩이 수상했다. 이로써 그의 연출자격을 두고 시야비야 하던 여론은 사라지고 그는 연출이라는 자리를 굳게 확보하게 되였다.

1990년 그는 연변연극단의 연출로 초빙되였다. 력사가 긴 중국조선족의 유일한 연극전업단체에 발을 들여놓자니 그는 기쁨보다 우려가 두어깨를 짓누르는 감을 느꼈다. 이곳은 어마어마한 전업연출가들이 계시는 곳이였고 또 유명한 배우진영이 모인 곳이였기때문이다. 그는 초빙되여 첫 연출대본을 받고 락심했다. 자기의 풍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것이였다.

희극이 아니라 비극도 정극도 아닌데다가 원 대본대로 공연하면 3시간에도 다 끝낼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작가와 상론한 뒤 여차여차 수개해줄것을 요구했다. 수일후 수개되여 온 극본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편집과 상론하고 함께 한번만 더 수개해줄것을 권장했다. 수개해온 극본은 그래도 얼마간 좋아졌지만 그의 풍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수개할 의향을 내비치였다. 그는 밤을 패가며 한줄한줄 수개하기 시작했고 한막 한장절씩 수개하여 극본의 풍격을 통속희극으로 바꿔놓았다. 이 작품이 바로 전국을 들썽하게 한 통속희극 《털없는 개》였다.


1991년 희극 《털없는개》 극목이 제2회전국연극회연에 참가하고 중국희곡가협회 리묵란주석(중)과 주인공 리영근선생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1991년 희극 《털없는개》 극목이 제2회전국연극회연에 참가하고 중국희곡가협회 리묵란주석(중)과 주인공 리영근선생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당시 사상이 해방되지 못하였던 부분적인 직원들은 《언어가 상스럽고 조잡하오.》, 《전통이 있는 우리 극단이 어떻게 이런 용속한 극을 할수 있소?》 하면서 배역을 거절하는 현상도 있었다. 당시 당지부에서는 행정적인 명령으로 각색을 분배하기로 결의짓고 련습에 들어갔다. 그렇게 탄생한 통속희극《털없는 개》는 련습이 채 끝나기도전에 9차의 공연표가 만원이였고 공연이 시작되여서부터는 앉은 자리에서 52차로 그 성황을 이루었다.

연길공연이 채 끝나기전에 타지방 표가 열차도 넘어 팔리는통에 연길공연을 마치기 바쁘게 다음 공연장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연극고봉기를 처음 맞이하게 된것이다. 이렇게 되여 이 극목은 근 2년사이 500 회 공연하였으며 총수입 백만원을 돌파하였고 사상 보기드문 연극의 성황을 이루었다. 그로하여 1992년에는 전국제2회연극경연에서 중앙문화부의 최고상인 문화부 《문화신극목상》을 수상했고 따라 동북3성 극목1등상, 길림성극목1등상을 수상했다. 한국 《매일신문사》 요청으로 전원이 출국방문공연도 하였고 상해국제희극연극절 준비위원회의 요청으로 상해에 가서 초청공연까지 하였다.

그후로 장춘연극원에서 한어로 번역하여 공연하였고 하남성에서는 극본을 영화대본으로 개작하여 영화로 찍어 전국에 방영하였다. 하여 연변연극단은 물론 최인호연출의 명성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큰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노력의 열매는 주렁지게 무르익었다. 하지만 이 극의 성공을 위해 바친 그의 로고를 누구든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 수개대본이 그대로 보존되여 있어 그 대본만이 그의 로고를 기록하고있을뿐이다. . 붉은색 원주필로 깨알같이 수개해놓은 그 극본엔 최인호연출님의 최고의 착상이 깃들어있다는것을 이 내 편집만은 알고있다.

그뒤를 이어 최연출님은 1993년에 희비극 《총각별동대》를 창작하고 연출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비극 《사랑에 지친 녀인》을, 1997년에는 연극 《헤톨부대》를, 1998 년에는 연극《과부골목》등 극목들을 련속 연출했으며, 1999년에는 희극《 금개구리》를 창작(합작), 연출을 맡으시여 심양에서 열린 제3차동북3성연극콩쿠르에 참가하여 또 한번 동3성 연극계와 무대를 들성케하였다.

그번 콩쿠르에서 최연출님은 창작금상, 연출금상, 극목금상 등 13매의 상들을 푸짐히 수확하였으며 연변희극의 매력을 과시하였고 또 한번 연변희극의 돌풍을 일으킴으로써 주목받는 초점의 대상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당시 연극전문가와 평론가들이 최연출님에 대한 평을 들어본다.《이 연극을 만들어낸 극조성원들은 물론 무엇보다도 연출의 풍격에서의 재치있는 예술처리는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이다. 연출가의 구성특점으로 볼 때 흐름은 아주 유창하며 대사처리는 똑마치 노래를 부르는것 같고 내외적인 행동의 무대적인 표현은 똑 마치 무용수가 춤을 추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이는 이 극에서만 볼수 있는 하나의 특징이다.》그렇다. 전국 어디서도 못하는 희극들을 조선족희극연출 최인호 그만이 줄줄이 펼쳐내여 높은 절찬을 받았다.

또 그이가 연출을 맡은 소품은 더 헤아릴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직접 출연까지 한 소품《첫날이불》에서 그는《정치아바이》로 부각되여 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첫날이불》에서의 한장면.

《첫날이불》에서의 한장면.

그이는 생활의 재현자이자 가공자였으며 잃어져가는 민족의 생활언어의 전파자였고 방언의 보존자였다. 그이가 연출을 맡아본 소품마다 생활언어가 풍부하고 방언과 격언이 많이 사용된것이 특징이다.례하면 소품 《참외막》, 《집문제》, 《장과부》, 《장마당 미꾸라지》, 《당원아버지》, 《당아매》, 《 시대연애》, 《계약서》, 《가두주임》, 《분수없는 사람들》, 《국제전화》, 《침묵전쟁》 등등의 많은 연출작품을 회고해보면 작가들이 쓴 문학적언어를 생활화, 대중화하였고 방언, 격언을 도입시켜 작품마다 생활미가 다분히 풍기게 하였으며 유머적 표현,해학으로 작품의 주제를 살려낸다. 하여 관객들은 폭소와 해학을 만끽하면서 그속에서 작품의 주제를 깊이있게 음미하게 되는것이 최연출님의 또 다른 연출특징으로 되였다.

1965년부터 2007년 음력설까지 40여년사이 최연출님이 배우로 등장한 연극, 소품은 50여부이고 연출을 맡고 창작한 작품은 20여부이며 소품연출을 맡은 작품은 도합 80여부나 된다(텔리비죤에 출연한 소품은 제외).

수상한 작품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다. 그 대표적인 상들만 보더라도 1992년 중앙문화부 《문화신극목상》, 중국연극계의 최고상인 《금사자컵연출상》, 동북3성 《창작금상》,《연출금상》, 《극목 금상》 등...1997 년에는 주문화계통민족단결진보표창대회에서 《모범개인》칭호를, 연변텔레비죤방송국과 연변텔레비죤신문사 공동주최한 대중평의에서 《최우수연출상》을, 길림성과 연변주 경연에서 받은 상들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2003년에는 국무원 수당금을 받는 영광을 지녔으며 2007년 9월 12일에는 길림성문화청, 길림성문련, 길림성희곡가협회로부터 탁월한 천재적 예술재능이 긍정받아《중국연극백년영예증서》평의활동에서 《특수공헌상》영예와 증서를 받아안게 되였다.

한 소몰이군총각이 저명한 국가1급연출로, 예술가로 성장된 인생길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묻혀있었다. 어린 시절로부터 자강자립하고 농민으로부터 배우로, 다시 농민으로부터 또 배우로, 연출가로, 웃음의 천사로 향상하는 그 걸음 걸음마다엔 탐색과 창조로 정열을 불태우며 조선족문화예술사업을 위해 바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누군들 말하지 않을수 없다.

예술인생 40여년, 그이의 일생은 예술의 꽃을 피운 화려한 무대인생이였다. 그이는 예술사업을 위해 분투해오면서 타고난 천재적 기질로 중국조선족문화예술사업과 중국연극발전사업에 일체를 이바지하였다. 그이의 피타는 노력으로 이뤄진 작품마다 관객들에게 희로애락의 참뜻을 선물하였으며 생활에 깊이 심입하여 인물에 대한 관찰과 탐구로 진정한 웃음의 한마당을 장식하였다. 그는 생활과 예술을 물과 고기로 비유하며 생활속에서 예술작품을 구상하고 작품속에서 인물의 개성에 맞는 독특한 언어와 행동을 구사하여 우리 시대의 《웃음의 천사》로 《 웃음의 설계사》로 손색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며 정직하게 예술의 한길을 걸어오셨다.


그는 또한 생활을 사랑하는 인간이였다. 가정에 대한 관심과 동사자들에 대한 사랑 역시 인간 최인호연출의 진모습이다. 세상 뜨시기 전 어느날 점심식사시간에 그이는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그는 또한 생활을 사랑하는 인간이였다. 가정에 대한 관심과 동사자들에 대한 사랑 역시 인간 최인호연출의 진모습이다. 세상 뜨시기 전 어느날 점심식사시간에 그이는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어떻게 하면 아직 락이라는것을 모르고 나의 뒤바라지만 하여온 안해를 즐겁게 행복하게 해줄수 있을까? 자네들의 조언을 듣고 싶네...》

감동을 받은 우리들은 이구동성으로 《부부 려행하세요!》, 《인젠 자가용차도 샀으니 사모님과 함께 전국유람을 하세요!》 라고 권장하였더니 그이는 손벽을 치면서 《그래그래 맞다. 명년봄 추위가 떨어지면 인젠 퇴직을 했겠다 그렇게 하는것이 좋겠다. 꼭 그렇게 할거야...》라고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당금이라도 려행길에 오른 기분으로 맥주 한컵 쭉 내시는것이였다. 우리는 박수로 찬사를 보냈다. 그이와 또 이렇듯 즐거움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가정을 사랑하는 한 인간 최인호의 참 모습을 볼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이는 안해에 대한 보답으로 벼르던 려행을 실현하지 못하시고 돌연 뇌출혈로 사랑하는 안해와 자식, 손군들의 곁을 영영 떠나셨다. 지금도 그 감격스럽던 장면을 돌이키면 또 한번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필림마냥 스쳐가는 그이와의 지난날 합작에서 나는 《미치광이》 최연출님의 진지한 사업작풍을 감지하였으며 동료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는 참인간의 진모습을 느껴보았던것이다.

그의 별세로 하여 조선족문학예술계는 하나의 진정한 웃음의 설계사를 잃었다. 존경하는 최인호연출님이여! 천국의 그 어디에 계실지라도 오늘도《웃음폭탄》을 설계하면서 유머를 선사하는 영원한 영혼으로 살아계시리라 믿어마지 않는다.그이의 웃음의 큰 별자리는 비였어도 저 하늘가의 반짝이는 새로운 웃음의 별자리에 서계시여 영원히 우리를 고무, 격려할것이다!

작자: 김학송(연변가무단 국가1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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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림신문 2011-01-08 김학송]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연출, 웃음의 설계사 고 최인호선생이 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3년세월도 넘었다. 하지만 마냥 소품야회공연이나 안방텔레비죤화면에 그이가 연출을 맡았거나 출연한 소품을 볼 때면 이 가슴 허전함 감출수 없다. 그가 남긴 웃음과 연기는 항상 영원한 미소와 유머로 우...
  • 2011-01-10
  • [연변일보 2011-01-10 허국화 기자]역경속에서 음악은 정신적기둥이 였다—김창호선생 음악인생 편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창호선생은 한창 컴퓨터앞에 앉아있었다. 회원들의 작품을 편집하는중이였다. 김창호선생은 기자에게 《음악과 문학》라고 적혀진 잡지를 건네줬다. 김창호선생이 회장을 맡고있는 중국민족예술...
  • 2011-01-10
  • 허영인국장은 당면 민족사업의 도시화경향을 주목하고 민족간부의 양성에서 도시화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했다./본사기자  정책연구로 민족경제발전 특혜 '유치'목단강시민족종교사무국 허영인국장의 사업 진로 더듬어   (흑룡강신문=하얼빈) 박백림기자 = 최근 몇년간 민족사업에서 큰 실적을 쌓고 있는 흑룡강성 ...
  • 201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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