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박영준- 해방전쟁시기 대공세운 폭파영웅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9월28일 08시52분    조회:826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동북해방전쟁시기 대공을 세운 폭파영웅 박영준

장춘 제1자동차그룹에서 근무하다 리직한 박영준(조선족)이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기자가 그를 찾아간것은 지난 9월 21일.

80세 고령이지만 말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고 잽싼 일거일동에서 그가 칼날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직감할수 있었다.

그는 해방전쟁시기에 받은 공훈상장과 메달, 조국건설에서 받은 영예증서와 메달 등을 수북이 내놓고 기자에게 보여주었는데 조국 해방과 건설에서 많은 피땀을 흘렸음이 력력했다.

동북해방전쟁시기 박영준은 동북민주련군의 《4차 림강보위전》과 《여름, 가을, 겨울 반격전》에 참가하여  폭파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영웅이였다.

1930년 6월 13일 조선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에서 태여난 박영준은 형님 둘, 누님 둘 5남매의 막내로 3살때 어머니에게 업혀 중국에 건너와 당시 료동성 해룡현(지금의 매하구시)에 정착했다.

1946년 여름, 백성들이 팔로군이라고 부르는 장병들이 박영준네 집에 와 머물렀다. 그들이 마당을 쓸어주고 물을 긷고 잠잘 때도 맨 바닥에서 자는것을 본 박영준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7월 15일, 박영준이 집식구들 몰래 부대를 찾아간것이 동북민주련군 3중대 9사 25퇀이였다. 키는 크지만 16세란 말을 듣고 지도자가 나이가 어려 참군하지 못한다고 하자 박영준은 아예 전사들의 방에 들어가 3일동안 같이 먹고 자고 했다.   박영준의 굳은 마음에 흔들린 지도자는 그를 받아주고 보초를 서게 했는데 그때로부터 그의 군생활이 시작됐다. 

1946년 10월, 국민당은 "남공북수, 선남후북(南攻北守,先南后北)"의 방침을  내오고  남만해방구에 대한 대진공을 펼쳐 남만주력을 소멸한 다음 병력을 집중시켜 북만을 치고 전 동북을 점령하려 했다. 

동북의 아군주력부대는 북만에 철거하고 박영준의 소속인 동북민주련군 3중대와 4중대가 남만에 남기로 했다.  국민당의 강한 세력앞에 부대는 한발한발 퇴각했다. 3중대 9사 25퇀이 두도강에 이르렀을 때 상급에서는 국민당의 추격을 막기 위해 두도강 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78메터 되는 키에 힘이 세다는 우월한 조건으로 참군한지 한달만에 사부에 가 폭파기술을 배운 박영준이 두도교 폭파임무를 맡게 되였다.

아군의 기관차가 다리 동쪽에서 박영준을 맞기로 하고 박영준은 다리 서쪽을 폭파해야 했다.

박영준은 25킬로그람이 넘는 폭파약을 끼고 다리서쪽에 이르렀다. 10여메터 되는 도화선에 불을 다는 순간 《씩~》 하는 소리와 함께 박영준은 기관차쪽으로 냅다 뛰였다. 《쿵~쾅~》 조금만 늦어도 목숨을 잃게 될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박영준은 16세 어린나이에 다리폭파에 성공한것이다.

1946년 12월 17일 동북해방의 중요 전환점인 《4차 림강보위전》이 시작되고 박영준은 1947년 4월 1일 《4차 림강보위전》이 끝나는 이틀전에 입당했다.

취재중에 박영준은 《4차 림강보위전》때  우리 군에서 류행했던 노래 《배추속(白菜心)》을 흥겹게 불렀다.

1947년 봄, 동북민주련군의 《3하 강남》, 《4차 림강보위전》승리는 동북 국민당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바 국민당은 진공으로부터 방어에 들어가는수밖에 없었다.

5월, 동북민주련군 총부는 장춘-심양, 심양―길림 철도 량측 국민당에 대한 전략성 반격작전을 실시, 즉 여름공세를 발동했다.

박영준네 부대가 매하구와 청원사이의 산성진을 진공할 때이다.  적의  또치카 두개가 부대의 진공길을 막고있었다. 

또치카를 폭파해야 했다.

또치카와 아군의 거리는 30메터, 15킬로그람 되는 폭파약을 끼고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면서 2, 3분내에 기여서 또치카밑에 닿아야 한다. 박영준이 기관총의 호위하에 또치카와 3, 4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박영준을 발견한 적들은 집중 소사한다. 박영준은 신속히 철거, 1차 폭파가 실패했다.

하극퇀장이 《쑈표, 집은 어데 있고 집에는 누구 있냐?》 하며 박영준을 고무해주는 한편 련장더러  중기관총으로 화력을 집중시켜 국민당의 소사를 막을것을  명령했다.  

박영준은 다시 또치카로 향했다. 《쾅》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또치카가 폭파됐다. 두번째 또치카 폭파소리와 함께 우리 군의 돌격나팔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다.

또치카에 있던 국민당의 한개 퇀이 아군에게 포로됐다. 

《내가 있던 동북민주련군 3중대 9사 25퇀 2영 5련은 주력련으로서 전투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이름 있었다》,  《매하구기차역 전투에서 전우들과 함께 지하실에 들어가 국민당 사장과 그의 부인을 나포한적도 있었다.》 당시의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말하는 박영준.

1947년 8월 동북민주련군의 가을공세가 시작됐다. 박영준은 료동성 서풍 (지금의 료녕성 서풍현)전에서 적들의 포탄에 다리를 맞아 쓰러졌다. 담가에 실려 이틀만에 산성진에 도착했는데 피를 많이 흘려 생명위험이 있었다. 

박영준은 《파편 6개가 다리에 들어갔는데 병원에서는 절단할것을 제의했으나 나는 그냥 수술하겠다고 우겼다. 당시 마취약이 없고 약도 부족한터라 고통은 더 말할것도 없다. 해방후에도 여러번 수술을 했으나 지금도 파편 하나가 다리에 묻힌대로 있다》고 말한다.

박영준에 따르면 원래 그는 2등 을급 잔페군인이였는데 항미원조에 가려고 3등 갑급 잔페군인으로 고쳤으나 비준을 받지 못해 가지 못했다고 한다.

1949년 1월 박영준은 해룡현(지금의 매하구시)인민정부 민족과에 배치 받았다.

1954년 4월에 제1자동차공장에 전근, 그때부터 박영준은 불구의 몸을 끌면서 어디에서 수요하면 어디로 가고 어느 곳에 곤난이 있으면 그 곳에 가 혼신을 다하여 조국건설에 바쳐왔다. 그는 선후 장춘시 신립성저수지 건설, 제1자동차공장 농장건설, 지식청년 공장 책임자로 있으면서 많은 일을 했는바 수두룩한 영예를 안았다.

1990년에 리직한 박영준은 지금도 제1자동차그룹 리퇴직 로간부들의 지부서기로 여생을 빛내고있다.


길림신문 홍옥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배우로부터 문화사업인으로 되기까지1990년대중반에 텔레비죤련속극 《사랑의 품》에서 어질기만 했던 백설이 친엄마배역을 맡은것을 계기로 여러부의 텔레비죤련속극과 연극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오향옥이 인제는 어엿한 문화사업인으로 변신하여 보람찬 사업을 펼쳐가고있다.최근에 연길에 온 그녀는 중앙...
  • 2009-07-20
  • 할빈 안중근사적전시관 장영철관장의 이야기◆ 전시관 관람객들에게 전부 무료 개방◆ 안해의 노래방 운영수입으로 운영◆ 의거 100주년 행사 일조해주길 할빈시 조선족사회에는 너나없이 새시대의 《민족영웅》이라 일컫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민족의 영웅이고 세계의 영웅인 안중근의사의 얼을 기리여 순수 개인의 힘으...
  • 2009-07-20
  • 연기생활에 몸담그어 26년 ―연변가무단 국가1급배우 리만수의 이야기 1983년에 연극 《우리 학교 철남이》에서 주요인물인 아버지역을 성공적으로 창조하면서 연기생활의 첫발자국을 멋지게 내디딘 국가1급배우 리만수 26년간의 피타는 노력을 거쳐 연변연극단 중견배우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 2009-07-17
  •    밥상과 맺은 인연     전통적으로 구들문화를 고수하며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의 밥상 또한 독특한 특징이 있다. 테이블형이 아닌 구들에 앉아 식사하기 편하도록 앉은뱅이형이다. 다년간 우리 민족 전통밥상생산에 종사해오며 회사를 탄탄하게 꾸려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심양신홍목업...
  • 2009-07-16
  • 연변주정부 리룡희주장이 공청단길림성위원회 서기로 재직시인 2003년 “중국조선족어린이들과 함께 한 20성상-한석윤”기념모임에 보낸 축하문에서 “…중국조선족어린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탁월한 공헌을 했고 …특히 소수민족어린이들의 신문사업발전을 위해 걸출한 공헌을 하여 공청단중앙의...
  • 2009-07-10
  • 북경에서 맹활약하는 부부방송원독자들은 1990년대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활약하던 부부아나운서 리철용과 김홍화를 기억하고있는지? 조선족이지만 한어말방송을 너무도 멋지게 하여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던 리철용(辛文)과 조선말 《요청한마당》사회를 많이 맡고 단아한 모습을 자랑하던 김홍화―10년전에 북경에 진...
  • 2009-07-08
  • ‘윤동주 시비, 생가, 기념비 건립에 앞장선 이윤기 소장창립 20주년 맞은 해외한민족연구소국제화 시대에 국경은 ‘국토’보다 ‘문화’와 ‘경제’를 토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현재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 동포는 800만이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용정에 ‘윤동주 시비&rsq...
  • 2009-07-06
  • 언제나 민족문화사업의 선두자가 되여 상지시조선족문화관 관장 리미영의 사업에서   (흑룡강신문=하얼빈)김동규 기자= 상지시에 가면 20여년을 조선족문화사업에 자신의 심혈을 고스란히 기울여 온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상지시조선족문화관...
  • 2009-07-06
  • 최보금씨 아나운서에서 인기프로의 프로듀서로—물 오른 《라디오소설》프로 인기브랜드로 부상요즘 개설 2주째를 맞은 연변인민방송국 “라지오소설”프로가 청취자들속에서  큰 인기를 얻고있다. 독서에 게으른 사람도 “라지오소설”프로를 통하여 음향, 효과, 해설, 배음 등으로 립...
  • 2009-07-03
  • 조선족걸립무 보급에 여생을 바치는 사람 일전에 있은 료녕성무형문화유산전시활동에서 본계시조선족걸립무 대표전승인인 김명환씨는 현장에서 조선족걸립무의 유래를 관중들에게 소개하면서 “조선족걸립무의 보급계승사업은 힘들지만 잘되고있다”고 표시했다.    올해 62세인 김명환씨는 1967년...
  • 2009-07-0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