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박영준- 해방전쟁시기 대공세운 폭파영웅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9월28일 08시52분    조회:825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동북해방전쟁시기 대공을 세운 폭파영웅 박영준

장춘 제1자동차그룹에서 근무하다 리직한 박영준(조선족)이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기자가 그를 찾아간것은 지난 9월 21일.

80세 고령이지만 말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고 잽싼 일거일동에서 그가 칼날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직감할수 있었다.

그는 해방전쟁시기에 받은 공훈상장과 메달, 조국건설에서 받은 영예증서와 메달 등을 수북이 내놓고 기자에게 보여주었는데 조국 해방과 건설에서 많은 피땀을 흘렸음이 력력했다.

동북해방전쟁시기 박영준은 동북민주련군의 《4차 림강보위전》과 《여름, 가을, 겨울 반격전》에 참가하여  폭파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영웅이였다.

1930년 6월 13일 조선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에서 태여난 박영준은 형님 둘, 누님 둘 5남매의 막내로 3살때 어머니에게 업혀 중국에 건너와 당시 료동성 해룡현(지금의 매하구시)에 정착했다.

1946년 여름, 백성들이 팔로군이라고 부르는 장병들이 박영준네 집에 와 머물렀다. 그들이 마당을 쓸어주고 물을 긷고 잠잘 때도 맨 바닥에서 자는것을 본 박영준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7월 15일, 박영준이 집식구들 몰래 부대를 찾아간것이 동북민주련군 3중대 9사 25퇀이였다. 키는 크지만 16세란 말을 듣고 지도자가 나이가 어려 참군하지 못한다고 하자 박영준은 아예 전사들의 방에 들어가 3일동안 같이 먹고 자고 했다.   박영준의 굳은 마음에 흔들린 지도자는 그를 받아주고 보초를 서게 했는데 그때로부터 그의 군생활이 시작됐다. 

1946년 10월, 국민당은 "남공북수, 선남후북(南攻北守,先南后北)"의 방침을  내오고  남만해방구에 대한 대진공을 펼쳐 남만주력을 소멸한 다음 병력을 집중시켜 북만을 치고 전 동북을 점령하려 했다. 

동북의 아군주력부대는 북만에 철거하고 박영준의 소속인 동북민주련군 3중대와 4중대가 남만에 남기로 했다.  국민당의 강한 세력앞에 부대는 한발한발 퇴각했다. 3중대 9사 25퇀이 두도강에 이르렀을 때 상급에서는 국민당의 추격을 막기 위해 두도강 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78메터 되는 키에 힘이 세다는 우월한 조건으로 참군한지 한달만에 사부에 가 폭파기술을 배운 박영준이 두도교 폭파임무를 맡게 되였다.

아군의 기관차가 다리 동쪽에서 박영준을 맞기로 하고 박영준은 다리 서쪽을 폭파해야 했다.

박영준은 25킬로그람이 넘는 폭파약을 끼고 다리서쪽에 이르렀다. 10여메터 되는 도화선에 불을 다는 순간 《씩~》 하는 소리와 함께 박영준은 기관차쪽으로 냅다 뛰였다. 《쿵~쾅~》 조금만 늦어도 목숨을 잃게 될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박영준은 16세 어린나이에 다리폭파에 성공한것이다.

1946년 12월 17일 동북해방의 중요 전환점인 《4차 림강보위전》이 시작되고 박영준은 1947년 4월 1일 《4차 림강보위전》이 끝나는 이틀전에 입당했다.

취재중에 박영준은 《4차 림강보위전》때  우리 군에서 류행했던 노래 《배추속(白菜心)》을 흥겹게 불렀다.

1947년 봄, 동북민주련군의 《3하 강남》, 《4차 림강보위전》승리는 동북 국민당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바 국민당은 진공으로부터 방어에 들어가는수밖에 없었다.

5월, 동북민주련군 총부는 장춘-심양, 심양―길림 철도 량측 국민당에 대한 전략성 반격작전을 실시, 즉 여름공세를 발동했다.

박영준네 부대가 매하구와 청원사이의 산성진을 진공할 때이다.  적의  또치카 두개가 부대의 진공길을 막고있었다. 

또치카를 폭파해야 했다.

또치카와 아군의 거리는 30메터, 15킬로그람 되는 폭파약을 끼고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면서 2, 3분내에 기여서 또치카밑에 닿아야 한다. 박영준이 기관총의 호위하에 또치카와 3, 4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박영준을 발견한 적들은 집중 소사한다. 박영준은 신속히 철거, 1차 폭파가 실패했다.

하극퇀장이 《쑈표, 집은 어데 있고 집에는 누구 있냐?》 하며 박영준을 고무해주는 한편 련장더러  중기관총으로 화력을 집중시켜 국민당의 소사를 막을것을  명령했다.  

박영준은 다시 또치카로 향했다. 《쾅》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또치카가 폭파됐다. 두번째 또치카 폭파소리와 함께 우리 군의 돌격나팔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다.

또치카에 있던 국민당의 한개 퇀이 아군에게 포로됐다. 

《내가 있던 동북민주련군 3중대 9사 25퇀 2영 5련은 주력련으로서 전투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이름 있었다》,  《매하구기차역 전투에서 전우들과 함께 지하실에 들어가 국민당 사장과 그의 부인을 나포한적도 있었다.》 당시의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말하는 박영준.

1947년 8월 동북민주련군의 가을공세가 시작됐다. 박영준은 료동성 서풍 (지금의 료녕성 서풍현)전에서 적들의 포탄에 다리를 맞아 쓰러졌다. 담가에 실려 이틀만에 산성진에 도착했는데 피를 많이 흘려 생명위험이 있었다. 

박영준은 《파편 6개가 다리에 들어갔는데 병원에서는 절단할것을 제의했으나 나는 그냥 수술하겠다고 우겼다. 당시 마취약이 없고 약도 부족한터라 고통은 더 말할것도 없다. 해방후에도 여러번 수술을 했으나 지금도 파편 하나가 다리에 묻힌대로 있다》고 말한다.

박영준에 따르면 원래 그는 2등 을급 잔페군인이였는데 항미원조에 가려고 3등 갑급 잔페군인으로 고쳤으나 비준을 받지 못해 가지 못했다고 한다.

1949년 1월 박영준은 해룡현(지금의 매하구시)인민정부 민족과에 배치 받았다.

1954년 4월에 제1자동차공장에 전근, 그때부터 박영준은 불구의 몸을 끌면서 어디에서 수요하면 어디로 가고 어느 곳에 곤난이 있으면 그 곳에 가 혼신을 다하여 조국건설에 바쳐왔다. 그는 선후 장춘시 신립성저수지 건설, 제1자동차공장 농장건설, 지식청년 공장 책임자로 있으면서 많은 일을 했는바 수두룩한 영예를 안았다.

1990년에 리직한 박영준은 지금도 제1자동차그룹 리퇴직 로간부들의 지부서기로 여생을 빛내고있다.


길림신문 홍옥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조국의 창공을 날아예는 매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비행사 리정규대좌를 찾아서8월 24일,연길시 북산가두 연북소구역 한 아빠트에서 기자는 “고향이 낳은 공군비행사”-리정규(44세)대좌를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두 어깨가 떡 벌어지고 검실검실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번듯한 리정규씨는 퍼그나 친절하고 소탈하였...
  • 2009-09-09
  • 민족전통예술사업에 몰붓는 심혈  ―전통음악리론연구원(교수) 김남호선생의 이야기 “지나온 한생을 돌이켜보노라니 만족스럽게 생각되는 일은 별로 없고 그저 후회만 가득 쌓인듯한 느낌이다. 남이 하는 일은 다 하고싶었고 맡은 일이거나 맡겨진 일도 다 잘해보려고 불철주야 바삐 돌아쳤지만 어느 하나 그렇다...
  • 2009-09-09
  • 최건, 조선족, 1961년 8월 2일 출생, 중국에서 처음 록을 선보인 인물로서 "중국 록큰롤의 대부"로 불리운다. 데뷔곡은 1986년의 <아무것도 가진것 없네>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최건의 중국의 음악계에서 점차 퇴출했다. 하지만 2005년 "스크림 레코드(SCREAM-RECORDS)"는 최건에게 경의를 표하...
  • 2009-09-08
  • 한손에 필을, 한손에 총을 든 작가 김학철,그가 력사의 현장에서 만난 슈퍼인물들 김학철은 장개석과 그의 측근실세들인 하응흠(何应钦), 장군(张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특무두목 대립(戴笠), 주은래와 곽말약(郭沫若), 팽덕회와 라서경(罗瑞卿), 김원봉과 김구, 유자명과 석정, 김두봉과 최창익...
  • 2009-09-07
  • ○ 금년 중국경제성장률을 8.4%로 예측○ 연구생 60명 배출 그중 조선족 5명중국경제성장률 목표치 달성할것 해마다 국가에서는 춘계와 추계에 중국경제성장률예측회의를 소집하여 당해와 그 다음해의 중국경제성장률을 예측한다. 길림대학 수량경제연구중심 경제수량분석연구실 주임이며 학술인솔자인 석주선교수는 2002년...
  • 2009-09-04
  • 연변에도 “조본산”이 있다? 구연배우 화룡시문화예술관 최중철부관장의 꿈구연배우 최중철 하면 연변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난 20년간 동북3성의 크고작은 무대는 물론 농한기마다 시골에 다니는 온돌공연으로 특이한 캐릭터를 연출했기때문이다. 최근에는 방송과 TV에 빈번하게 출연하면서 독특...
  • 2009-09-04
  • 민족언어예술을 전파하는 한길에서“말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며 품위입니다”고 입버릇처럼 외우는이가 있다. 바로 조선족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익숙한 원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실 실장이며 화술전문가인 서방흥선생이다.근 36년의 아나운서경력에 아나운서실장으로도 1...
  • 2009-09-04
  • 안국민프로필 1931년 흑룡강성 밀산시 출생. 중국음악가협회 리사. 제3기 연변음악가협회주석단 주석.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1, 2, 3,4기 명예회장 력임. 제2기연변정협위원. 제4, 5기 연변주인대 대표 력임. 독창곡 《연변목가》,《어머니》 무용곡 《물동이춤》,《양돈장의 처녀》 등 음악작품 200여곡 창작, 도합3천여차...
  • 2009-09-02
  • 사법분야서 활약하는 조선족법관ㅡ심양시 10대 우수법관 심양시중급법원 집행국 림창환국장 체구는 크지 않아도 말을 할라치면 쇠소리가 나고 행동거지 또한 록록치 않은 인상을 주는 심양시중급인민법원 집행국 국장 림창환(56)씨, 심양시중급법원의 심판위원회 위원, 당조성원으로 부원장대우를 향수하는 그는 이 법원력사...
  • 2009-08-31
  • 틈새시장을 공략하라 ㅡ단동동패컴퓨터과학기술유한회사 국창욱사장자신의 창업과정을 돌이켜보며 국창욱사장은 조선족대졸생후배들에게 인내력과 끈기를 키우고 창업에서 틈새시장을 공략하라고 권고하고 싶다고 심중을 밝힌다.  1974년생인 단동동패컴퓨터과학기술유한회사 국창욱사장은 1996년 단동시료동학원...
  • 2009-08-3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