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림성호가수의 예술인생을 뒤돌아본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30일 13시12분    조회:767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딸과 함께 부르는 사랑의 메아리

연변TV 뉴스종합채널에서 올해 정월 초하루날 저녁에 방송한 2008년 음력설야회에서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남저음독창가수 림성호선생이 딸 림경진가수와 함께 부른 노래 《하고싶은 말》이 시청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쥐면 부서질가 불면 날아갈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서운한 심정, 사랑하는 님을 따라 시집을 가면서 부모님의 키운 정에 목메여하는 딸의 애잔한 심정을 여실하게 그려낸 가사내용도 그렇지만 실생활에서의 아버지와 딸이 그것도 바다건너 연변과 일본에서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그 자체가 시청자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몰아넣은것이였다.
성장한 딸을 두고있는 부모라면 적어도 한두번쯤은 귀를 기울인적 있는 가요 《하고싶은 말》은  최근년에 새롭게 선을 보인 노래가 아니라 림성호선생이 20년전에 창작하고 연변TV를 통해 여러차나 방송된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지금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는것은 아마도 출국바람으로 실생활에서 리별의 아픔을 겪고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일것이다.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된 과정을 되돌아보며 림성호선생은 《딸자식 둘만 키운 저로서는 딸을 시집보내면서 서운해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알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만들었구요.》라고 이야기한다.

친척, 친우들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서운해하는것을 볼 때마다 림성호선생은 《나도 이제 저렇겠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친정부모의 애잡짤한 심정을 반영한 노래를 창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키워왔다. 그러던 1988년, 림성호선생은 딸 림경진과 함께 록음테프를 만들게 되였는데 취입할 노래를 선정하고보니 각기 부른 노래는 많지만 부녀간이 함께 부른 노래는 한수도 없었다. 《딸애와 둘이서 만드는 테프인만큼 함께 부른 노래가 꼭 있어야겠는데…》 이런 생각을 굴리던 선생은 잔치날 아버지와 딸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노래를 창작하여 딸과 함께 부르면 인기를 끌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사도 적어보고 음악구상도 초보적으로 해보았다. 미구에 절반농사를 마친 선생은 당시 테프의 가사주필을 맡은 연변문련 김경련주석에게 자기의 구상을 털어놓았다. 김경련주석은 림성호선생의 구상을 긍정하고나서 가사를 알심들여 수정해준외 제목도 《하고싶은 말》이라고 달아주었다.

림성호선생이 작곡하고 딸 림경진과 함께 부른 이 노래는 북경영화촬영소에 가서 록음할 때 벌써 주위의 가수와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이 노래를 담은 테프는 발매된지 1개월만에 연변과 동북3성에서 몽땅 팔리였다.

연변TV 뉴스종합채널에서는 1991년 《3.8》부녀절에 이 노래를 매주일가로 방송하게 되였는데 촬영당시 현장에 모신 녀성모범들과 어머니들이 노래가사를 듣고 눈물을 흘리였고 노래가 TV를 통해 방송되자마자 주내각지에서 40∼50통의 편지가 선생한테로 날아들었다. 그후 이 노래는 요청무대에서 요청편지를 자주 받는 노래의 하나로 되여왔으며 어느곳에 가든 선생을 알아보고 《아가야》노래를 부르던 가수라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래와 인연을 맺기까지

1937년, 한국 전라남도 순창에서 림씨가문의 여덟째로 태여난 림성호는 세살때 부모님과 함께 개척단을 따라 《눈물젖은 두만강》을 건너 안도현 량강촌에 정착하였다.

목청이 유달리 웅글져서 소학교시절부터 《양철통》이라는 악의없는 별명을 달고있은 그는 락천적이고 노래를 즐기는 아버지가 축음기를 사놓은 덕분에 어려서부터 레코드판을 돌리면서 노래와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안도현초중에서 바리톤, 트럼베트 등 악기를 다루고 관악대 대장으로 활약한 그는 연변1중에 진학해서도 악대대장, 학생회 문예부장 등 직을 맡고 자신의 흥취를 키워갔다. 그러던 1954년 봄, 중앙교육부에서 연변에 와서 시찰을 하게 되였는데 주에서는 문예써클활동이 잘되는 여러 중소학교에서 문예종목을 추천하여 회보공연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때 연변1중에서 추천한 종목이 남성중창과 림성호의 독창이였다.

공연을 하루 앞두고 연변가무단의 김태희단장과 정진옥, 김성민선생이 연변문화극장에 와서 공연종목을 심의하게 되였다. 림성호의 차례가 되여 《문경고개》를 부르는데 절반가량 불렀을 때 무대아래에서 한분이 《됐어요!》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노래가 심의에 통과하지 못한줄로 착각한 림성호가 돌아서서 퇴장하려는데 얼굴이 동그스름한분이 올라오면서 그를 불러세웠다.

《김태희선생, 내가 연변에 와서 이렇게 좋은 〈베스(남저음)〉는 처음 만났소.》

무대아래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난 그분은 자기가 정진옥이라며 자아소개를 하는것이였다. 당시 《처녀의 노래》 등 가요를 즐겨들으면서 작곡가 정진옥의 이름을 벌써부터 알고있은 림성호는 앞으로 훌륭한 성악가가 될수 있다는 그분의 칭찬에 날듯이 기뻤다.

그후 정진옥선생을 찾아다니며 음악지식과 시창능력을 키운 림성호는 심양에 가서 레코드제작을 위한 록음에 참가할 행운을 얻었고 거기에서 방죽송선생의 계발을 받고 장차 음악대학에 가서 체계적으로 배워 훌륭한 성악가로 자라날 결심을 굳히였다.

1956년 8월에 연변가무단을 이끌고 전국음악주간에 참가하게 된 정진옥선생은 대학시험준비에 한창인 림성호를 불러다 합창대에 가입해줄것을 간곡하게 청들었다. 이리하여 림성호는 전국음악주간 및 그후의 전국순회공연에까지 참가하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야 상해음악학원에 응시, 끝내는 300여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입학통지서를 받아안았다.

보람찬 노래인생

예술의 전당 상해음악학원에서 림성호는 당시 중국성악계의 중견이고 프랑스와 이딸리아에 류학가서 음악을 전공한 거초지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음악지식을 열심히 배우면서 자질향상에 전념하였다. 그 보람으로 3학년부터는 선생님들과 함께 부대위문공연도 다녀오고 정강산, 로산 등지에 나가 음악창작도 하고 공연에도 참가할수 있게 되였다.

대학 5학년에서 공부할 때인 1962년에 상해음악학원 부원장이며 성악학부 학부장인 주소연교수의 추천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정대표단과 예술단을 영접하는 외사문예야회에 참가한 림성호는 조선민요 《청진포배노래》를 불러 환영을 받았고  제3차 《상해의 봄》예술절에서는 《아름다운 연변》을 불러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본과졸업생 36명중 6명만 선발하여 참가시키는 졸업음악회에서는 유일하게 재청을 받으면서 탄탄한 노래실력을 과시하여 중앙악단에 배치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연변가무단 부단장이였던 정진옥선생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주당위 서기인 주덕해동지를 찾아가 연변에 꼭 수요되는 인재인 림성호가 연변가무단에 배치되게끔 해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나중에 림성호는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중앙문화부의 노력으로 연변가무단에 호적을 붙이게 되였다.

연변가무단에서 정식으로 노래인생을 시작한 림성호는 1963년 8월말에 펼쳐진  제1차장춘음악주간에서 합창 《싸우라 흑인형제》중의 독창부분을 열창해 소문을 놓았다. 당시 중앙인민방송국에서는 이 노래를 특별록음했고 국제방송프로에서는 가사내용을 6가지 언어로 번역하여 방송했으며 연변에서는 또 중앙지도자들이나 중요한 외국손님을 영접할 때마다 이 합창을 무대에 올리였다.

그후의 나날에 림성호는 가극에 출연하고 독창을 부르는외 판소리, 서도민요 등 민족음악을 배우기도 하면서 조선민족의 우수한 성악가로 성장할수 있는 기반을 착실하게 닦아나갔다.

동란의 년대에 애착하는 노래도 마음껏 부르지 못하던 림성호는 1978년에 와서야 다시 특유한 남저음독창으로 무대에 나설수 있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그는 새봄을 맞는 기분으로 외국가요, 조선민요며 연변노래들을 실컷 부르면서 노래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해나갔다.

1979년, 연변가무단에서는 공화국창건 30돐을 맞으면서 전국문예콩클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림성호는 그번 공연에서 독창 《연변인민 주총리를 그립니다》를 불러 장내를 눈물의 바다로 만들었고 《까투리타령》 등을 불러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뒤이어 산서성 태원시에 가서 펼친30일간의 공연에서도 림성호의 독창은 거의 번마다 련속 6수까지 불러야 할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태원TV에서는 림성호가 부른 노래 7수를 곁들인 특별프로를 제작방송하기도 했다.
    
1981년에 있은 제2차장춘음악주간에서 림성호는 《볼가의 배노래》 등 노래를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고 1984년 길림성예술단의 성원으로 조선방문공연에 참가했을 때는 《조선은 하나다》 등 조선가요를 불러 조선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1985년 11월,  20여명 중국조선족들로 무어진 예술단의 일원으로 미국방문공연을 떠난 림성호는 그번 공연을 위해 전문 창작된 노래 《반갑구나》를 부르면서 미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과 한마음이 될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크게 환영을 받았다.      

연변라지오TV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더욱 많은 환자들에게 광명을 되찾아주고싶다 우리는 눈을 마음의 창구라고 비유하고 "몸이 천냥이라면 눈이 900냥이다"는 말도 자주 한다. 그만큼 눈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1986년에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연변대학의학원 의학전업을 졸업한뒤 선후 광주중산의과대학 안과, 일본 성마리안나대학...
  • 2009-03-25
  • —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에 대한 이야기화룡시희망복리원 원장 리문철씨는 35년래 근 130명에 달하는 고아, 극빈가정의 어린이와 한때 길에 잘못 들어섰던 애들을 맡아 키우면서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엮어냈다. 성당위 상무위원이며 주당위 서기인 등개는 리문철의 사적을 읽고나서 "리문철의 사적...
  • 2009-03-25
  • 안산시에는 정해룡이라는 조선족 관장이 있다“민족문화예술관은 군중문화활동을 전개해나가는 창구단위로서 공익성봉사를 강화해 민족문화사업을 발전시키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안산시조선족문화예술관 정해룡관장의 일가견이다.   정해룡(38세)씨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여나 어른들의 귀여움을...
  • 2009-03-25
  • 건축구조설계의 떠오르는 별—대련영성컴퓨터설계유한회사 최영철리사장을 만나세계적인 경제불황속에서도 큰 흔들림이 없이 중일건축구조설계시장을 주름잡으며 용맹무진하는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대련영성컴휴터설계유한회사 최영철리사장(45살, 연변사람)이다. 1987년에 대련리공대학  토목건축학부를 졸...
  • 2009-03-24
  • 오상 조선족 벼육종 전문가 전영태,벼 품종개발서 성과 이룩(흑룡강신문=하얼빈) 리홍남 특약기자 = 흑룡강성 오상시조선족 벼육종가 전영태씨(71세)가 2000년도 개발한 상질벼품종 '도화향 2호'가 지난해에 흑룡강성농작물품종심사평정위원회의 론증을 거쳐 '오우도 4호'로 명명 받음과 더불어 전영태씨는 '흑룡강성과학기...
  • 2009-03-22
  • “조선족은 영원한 이방인인가?” 칼럼집 두권 펴낸 김범송 흑룡강신문 논설위원 최근 두 권의 책을 한꺼번에 펴낸 김범송(사진) 흑룡강 신문 논설위원과 지난 5일 서울 대림동에 위치한 연변냉면 식당을 찾았다.시원하면서도 알싸한 게 한 번은 먹어본 것 같은 연변냉면의 맛은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주인...
  • 2009-03-21
  • 통화지구 건축업계의 새로운 별 경쟁이 치렬한 통화지역 건축업계에서 자기의 자리를 매김하면서 건축업계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는조선족사나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통화시은하주택개발유한회사의 최승호(59세)사장이다. 젊은시절 부대에서 자신의 의지와 경쟁력을 키워온 최승호사장은 부대에서 제대되여 은행에 배치되였다...
  • 2009-03-21
  • 다양한 인생체험 창작과 연기의 밑거름 되여—중견연극배우 김문혁씨 50여부의 소품 창작 직접 연기기자가 김문혁씨를 찾았을 때 그는 사업시찰차 연변에 오는 중국희곡가협회당위 서기이며 저명한 재담배우인 강곤을 맞을 준비로 바쁜 모습이였다. 《이번에 강곤은 장춘의 성희곡가협회 먼저 우리 연변을 찾아옵니다....
  • 2009-03-20
  • 《세월은 흘러도》, 《아버지에게 드리는 노래》 등 여러수의 대중애창가요를 작사한 김학송씨는 연변에서도 몇명 안되는 전직작사가의 일원으로 연변가무단창작실에서 꼬박 10년간 근무한 경력도 있고 2007년에 진행된 제3회 연변생태문화예술절에서 가요부분과 시부분의 1등상을 동시에 따내는 영광을 안아오기도 했다. 하...
  • 2009-03-19
  • 한국투자신탁운용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휘씨는 중국 동포 출신 국내 펀드매니저 1호다. 그는 지난해 12월 초 한국운용에 입사한 이후 현재 사회간접자본(SOC)운용본부 자원개발운용팀에서 펀드 운용 보조일을 맡고 있다.중국 지린성 옌지시 출신으로 올해 25살인 그는 한국에 유학온 대학시절부터 펀드매니저가 되기 위해 남...
  • 2009-03-1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