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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중철-《연변의 조본산》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15일 09시42분    조회:9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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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시예술단 업무부단장
《연변의 조본산》최중철


《평생 연기하는것이 제일 행복합니다》

표정만으로도 사람들의 폭소를 이끌어내여 《연변의 조본산》으로 친근하게 불리우는 최중철, 소품에 빠져 굽이굽이 걸어온 힘든 인생고개, 고개마다 정절이 많고많았지만 오로지 《힘이 닿을 때까지 무대에서 대중한테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그는 오늘날까지 연기외길을 걸어왔다.

  2008음력설야회를 본 시청자들은 많은 우수한 프로중에서도 화룡예술단에서 내놓은 삼로인 《고향오빠》(최중철, 허상권, 홍미옥 출연)에 단연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특히 극중에서 홍미옥을 좋아하는 최중철이 홍미옥의 사촌오빠 허상권을 련적으로 여기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과 더불어 그에 따른 표정연기가 제일 큰 폭소를 안겨주었다.          최중철에 대해서 전국 각 지방의 조선족들은 익숙히 알고있다. 그것은 1989년에 화룡시예술단에 들어가서부터 지금까지 동북 3성의 크고작은 무대는 물론 농한기마다 다니는 온돌공연으로 특유한 희극적진수를 선보였기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독특하고 남다른 연기는 이미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기질을 갖추었다고 말할수 있다.

흙에 묻힌 보석
1960년 5월 29일 화룡현(지금의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7남매중 여섯째 아들로 태여난 최중철은 어려서부터 남들을 곧잘 웃겼다. 고중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한 최중철은 농촌에서 농사를 짓게 되였다. 구연예술에 특별한 흥미를 가졌던 그는 볼수 있는 공연은 한번도 빠뜨린적이 없었다. 공연을 관람한후에는 또 구연배우들의 본을 따서 련습을 했는데 심지어는 밭고랑 타고 김을 매면서도 좋아하는 대사들을 되뇌이군 하였다.  당시 최중철은 촌에서 인기인물이였다. 결혼집, 환갑집, 생일집 마을총화모임 등의 사회는 언제나 그의 몫이였다. 어떤 때는 십여리도 넘는 이웃동네에서까지도 요청을 해왔다. 화룡현에서 조직한 문예공연에서는 촌을 대표하여 재담, 대창 등 절목으로 희극적연기를 선보여 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군 하였다.

보석은 언젠가는 빛을 낸다고 그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89년 《3.8부녀절》을 계기로 현에서 문예콩클을 조직하였다. 최중철은 상남촌을 대표하여 소품 《소장사》에 출연하였는데 마침 화룡현 문교현장과 화룡현문화국 국장의 눈에 띄였다. 그분들의 추천으로 최중철은 그해 화룡현예술단에서 내려가는 온돌공연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소품 《누구탓인가》로 소문을 놓았다. 온돌공연이 끝난후 그는 화룡시예술단의 림시구연배우로 되였다.

혼신을 불태워 연기
오매불망 바라던 꿈을 실현하게 될 기회를 얻은 최중철은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지만 《혹시 되지 않으면 어쩔가》하는 조마조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그가 다른 사람의 따뜻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할 때 제일 믿었던 안해가 반기를 들고 나설줄이야. 결혼한지 몇달 안되는 안해는 《예술을 하면 사람의 마음이 쉽게 변한다면서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평온한 생활을 하자》고 졸랐다. 하지만 어쩌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수 없었던 최중철이 자신의 뜻을 접으려고 하지 않자 안해는 《배우의 길을 고집한다면 리혼하는수밖에 없다》고 마지막선고를 하였다.
안해를 설복하려고 안깐힘을 다 썼지만 안해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차피 예술인을 리해하지 못하는 안해가 너무 부담스럽고 또 오손도손 살지 못할바에는 일찍 갈라지는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최중철은 차라리 리혼하고 모든 정력을 사업에 몰두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혼한지 6개월만에 안해와 리혼하였다.
리혼한후 단연히 짐을 꾸리고 예술단 숙사에 올라온 최종철한테 힘들지만 꿈이였던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모든 잡생각들을 물리치고 오로지 공연련습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대중들로부터 《알이 터졌다》는 류행어를 탄생시킨 《소품배우 고 김상옥의 아들이 아닌가》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고향사람들을 만나면 《어려서부터 웃기더니 이제야 자신이 갈길을 가는구만》, 《하고싶었던 일이니 훨훨 날아보게나》하고 칭찬과 축복을 기분좋게 받기도 했다. 

최중철은 더는 불안해하지 않고 공연에 신심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이 걷고있는 구연예술의 길이 바로 자신을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단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끄떡없는 신념으로 하여 그가 앞으로 걸어갈 구연예술의 길은 드팀이 없었던것이다.

꿈의 활무대 온돌공연
온돌공연은 기성세대들에게는 아주 친숙하다. 그만큼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온돌공연은 농촌문화생활의 일대 아름다운 풍경이였다. 현의 예술단이 마을에 온돌공연 狗?오는 날이면 그 마을의 큰 경사날이였다. 하지만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출국열로 농촌이 점차 활기를 잃어감과 동시에 문화의 시장화가 투입되면서 연변 각 현, 시의 문공단, 예술단이 해체되고 합병하는 과정에 온돌공연도 점차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50년을 하루와 같이 줄곧 농민들과 환락을 같이하면서 온돌공연을 견지해온 예술단이 있었으니 바로 화룡시예술단이다.  

금년에 《온돌공연 50돐》을 맞은 화룡시예술단의 온돌공연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최중철은 온돌공연을 통해 보귀한 경험을 쌓았고 수많은 촌민들에게 웃음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10여년 농촌생활을 해온 그는 촌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의 공연은 대중들의 심금에 와닿았다. 특히 소박한 농촌제재를 다룬 소품이나 삼로인은 농촌문화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가는 곳마다 절찬속에서 공연되였다.
당시 그들은 소품과 삼로인을 직접 창작하고 연기를 하였는데 많은 이름있는 작품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장마당로맨스》, 《병원에서 맺은 인연》, 《순대장사》, 《누구탓인가》 등 삼로인과 《회의통지》, 《내꺼 삽소》, 《초하루》 등 소품이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대부분 작품들이 농촌생활을 진실히 반영하고 농촌로인들의 황혼사랑을 희극적으로 다루어 촌민들에게 더없는 친근감과 폭소를 안겨주었다.

당시 예술단의 경제형편이 어려워 로임을 제때에 주지 못한 까닭에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중철은 한번도 예술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기력의 제고와 많은 공연생활을 통해 최중철은 전국 각 조선족들이 널리 알고있는 이름있는 희극배우로 자기매김하게 되였다.

금상첨화
1998년은 최중철한테 운이 좋은 해라고 해야 할것이다. 어느날 그는 친구생일잔치에 초대되여갔는데 우연하게도 한자리에 앉은 리선자녀성과 면목을 익히게 되였다. 이말저말 주고받으면서 구면이 된 그들 둘은 사업에서부터 나중에는 생활에 이르기까지 담론하게 되였다. 특별히 최중철의 소품연기에 흥미를 가지고있는 리선자는 최중철의 열렬한 팬이였다. 말을 나누는 가운데서 최중철은 리선자가 아이 하나를 키우면서 홀로 살아가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외기러기신세의 최중철로 말하면 이것은 하느님이 선사한 인연이였다. 더구나 구연예술에 대해 많은것을 알고있는 그녀라면 자신의 사업을 지지해줄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후 최중철은 그 녀자와의 련계를 끊지 않고 자주 만나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의 정은 깊어졌고 마침내는 오붓한 가정을 이루었다. 

사업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고 기틀이 잡힌 최중철로 말하면 새로운 혼인은 마치 금상첨화와도 같은 경사가 아닐수 없었다. 새 안해가 자기를 믿어주고 뒤심이 되여주니 그는 마치 날개라도 돋힌듯 사업에서 성수가 났다.

사실 안해한테는 딸린 아들 최삼이가 있었다. 6개월만에 리혼한 최중철로 말하면 자식이라는 존재는 아주 희박한 이미지같기도 한것이였다. 여직껏 나이들도록 자식을 보지 못했던 그는 안해의 아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거두어주기로 맘먹었다. 안해를 맞아들였으면 그녀의 자식도 내 자식과 마찬가지인것이다. 천성이 순박한 최중철은 아버지역을 곧잘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그는 아들의 학급에서 조직하는 학부형회의나 모임에 꼭꼭 참가했고 최삼이 또한 최중철을 친아버지로 따랐다. 어찌나 지극정성으로 아들한테 사랑을 몰부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친아버지로 믿어의심치 않았다.

몇년후 안해와 최중철한테는 새 생명이 태여나 또한번 그한테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첫결혼의 실패로 여직껏 친자식을 모르고 살아온 최중철로 말하면 새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몰랐다. 이제 겨우 4살인 둘째아들 최민호는 아빠를 닮았는지 눈을 굴리거나 입을 실룩거리면서 장끼를 곧잘 피운다. 날마다 퇴근해서 온 가족이 모여앉아 민호의 재롱을 보면서 웃음꽃을 피우는것이 지금은 제일 큰 행복이다. 최중철은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업과 가정 모두 지금에 만족하고 행복하다》면서 입버릇처럼 외운다.

인기희극배우로 부상

공연무대와 연변TV에 자주 얼굴을 보이면서부터 최중철의 연기실력은 점점 인기도을 높여가고있었고 연변화극단을 비롯한 예술단들에서 그한테 유혹의 빛을 보냈지만 그는 자기를 키워주고 끈끈히 뒤심이 되여준 고향예술단을 떠날수 없었다. 가을새는 따뜻한 강남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떠나건만 최중철만은 시골의 땅을 뚜지는 황소마냥 드팀없이 자신을 키워준 화룡시예술단을 지켜갔다.

일정한 연기력을 쌓은 최중철은 또 소품, 삼로인의 창작, 감독에도 정력을 몰부었다. 그는 소품 《내꺼 삽소》(최중철, 홍미옥 출연)로 성문화부로부터 창작 1등상을 수상하였고 소품 《초하루》(최중철, 홍미옥, 황은희 출연)와 《회의통지》(허상권, 최중철 출연)도 2등상을 수여받았다. 

최중철은 《화룡예술단의 50년 온돌공연력사를 이어나가면서 새로운 창작도 하고 화룡뿐만아니라 전국각지의 예술무대에서 대중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하겠다》며 앞으로의 타산을 밝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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