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고향에 넓은 시장을 안고 온 철의 녀인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4월4일 10시56분    조회:966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농민이 잘 살아야 연변이 산다.》 기자의 인터뷰를 접하며 뗀 첫머리 말이였고 인터뷰전반에 쭉 깔려져있는 대담의 핵이 농민이였다. 량화자, 북경화근과학기술유한회사의 리사장. 등을 돌렸던 고향 연변 땅을 10여년만에 부푼 가슴으로 다시 밟으면서 고향 농민들에게 크나큰 선물을 주겠다는 애향심을 다시 불태우는 철의 녀인이라 하겠다. 《10년간 고향을 떠나서 외지에 가 창업하면서 숱한 우여곡절끝에 성공을 거두면서도 항상 마음구석에 고향 연변이라는 두글자가 깔려있었습니다. 제가 나서 자란 곳이였고 또 어쩌면 저를 타향으로 뿌리친 고향이기도 하지요...》 량화자는 1984년 개혁개방의 첫물결을 타고 하해하여 룡정에서 국영복장공장을 도맡고 창업의 첫걸음을 떼였었다. 30여평방메터가 되나마나한 공장을 초석으로 창업을 시작해 나갔고 후에는 연길로 와서 연변에서 제일 큰 복장공장을 일떠세웠었다. 공장은 일매진 발전마를 탔고 그녀도 연변의 화제인물로 평판이 높았었다. 허나 그후 여러가지 원인으로 량화자의 공장은 도산되였고 량화자는 어쩔수 없이 빈손으로 연변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다. 어쩌면 고향이 그녀를 버렸다고나 할가 그보다 제일 서러운 일은 없었다 한다. 북경에서의 10여년간 새로운 창업을 시작한 량화자녀사는 시장에 대한 뛰여난 관찰력과 판단력을 자본으로 자기의 무역시장을 구축해나갔으며 조선족 녀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넓은 흉금으로 미국, 남미주의 일부 나라와 한국의 상인 및 유지인사들로부터 배포가 있고 흉금이 넓으며 신용이 있는 사업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였다 한다. 이것이 그녀가 빈손으로 북경에서 성공할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하였다. 량화자녀사가 홍경천제품 시장개척과 제품개발에 나선것도 우연한 기회와 그녀의 시장판단력이 접목된 원인이라 하겠다. 중국에 사업차로 나왔다가 망하다싶이 된 한 미국인이 량화자녀사에게서 백골난망이라 할수 있는 도움을 받았다 한다. 그녀의 진심어린 방조에 사례의 길을 찾을 때 량화자가 부탁한것은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도리여 고향 연변의 특산인 홍경천을 건네주었다 한다. 미국에서 홍경천시장을 열어달라는것이 그녀의 간단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부탁이였고 감은을 요구하는 사람한테서 받으려는 바람이였다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연변의 홍경천이 미국에 건너갔고 미국 검증부문으로부터 높은 보건, 약용 가치를 검증받으면서 크나큰 판매가능성 원형시장이 형성되게 되였으며 투자인들도 나서게 되였다 한다. 량화자는 홍경천제품에 앞서 홍경천의 우세로 홍경천시장을 열어놓고 눈길을 다시 홍경천제품개발과 홍경천생산기지에로 돌리였다. 《연변을 보건제품의 고향으로 건강과 관광이 결합될수 있는 이미지를 부여하고싶습니다. 농민과 사업가가 손잡고 생산,가공, 류통이 일체화되여 생태산업을 구축하여 연변의 3농문제 해결에 한몫 하고싶습니다. 》 량화자가 다시 고향에 돌아오고 홍경천의 생산기지구축과 제품개발을 다그친 내심에 있는 얘기였다. 현재 농민들이 밭에 콩을 심기보다 4~6배 되는 수입을 올릴수 있는것이 홍경천재배라 한다. 헥타르당 평균 2.5만원의 수입을 예상한다고 한다. 《연변농민이 잘 살아야 연변이 사는것이 아니겠습니까》 량화자녀사의 진솔한 얘기이다. 그녀에 따르면 연변은 생태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여있고 생태자원이 풍부하며 홍경천재배에 땅과 기후가 구비되였다 한다. 홍경천은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이지만 이미 연변 농가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할수 있는 기술도 이미 개발되였다 한다. 홍경천제품 판로가 해결되면 연변이 홍경천 재배기지로 부상되는것은 시간문제이며 그날을 자신도 고대한다고 량화자는 밝혔다. 미국 S.W회사, 북경화근과학기술유한회사, 연변록색원장백산홍경천개발유한책임회사,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에서는 련합으로 이미 홍경천술, 캡슐, 음료, 사탕, 누룽지, 랭면, 국수, 장류, 무침류, 젖갈류, 김치류 등 계렬제품들을 연구개발해냈다. 특히 홍경천술은 기둥제품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시장에서 흥행을 보이고있으며 한국에서도 인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다. 홍경천의 특성과 무궁한 시장공간은 홍경천제품의 개발사업에 큰 의의를 부여해줄뿐만 아니라 연변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산업화의 기회와 공간을 마련해주었다고 할수 있다. 량화자녀사의 시장개척후의 산업화 구축은 이 공간과 가능성을 더욱 현실화시키고 사업성을 부여했다고 할수 있겠다. 고향에 돌아온 딸로 인해 고향농촌의 자그마한 변화라도 기대하는 마음이다. /기자 박금룡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아침에 일어나면 수술환자가먼저 떠오릅니다놀라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또는 설레일 때 누구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심장속의 마음이 뛰고있기때문에 느껴지는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희로애락과 함께 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기관을 지키기 위해 25년간 한시도 쉬지 않으면서 심혈관외과 전문의로서의 역할을 ...
  • 2008-07-25
  • 《인류령혼의 공정사》로서 교원의 넋은 언제나 학생들을 위한  한길로 향하고있다.  길림성 룡정시룡정중학교의 리정남교원은 농촌교육봉사 지원의 일환으로 지난학기부터 지신진 명동련합학교에 파견되여 1년간 산골학교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명동련합학교에 몸을 담은지 얼마 안되여 그는 교수설비가 비교적 ...
  • 2008-07-22
  •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연변촬영가협회의 직원으로부터 부비서장,부주석,주석을 거쳐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직을 련임한 촬영가 남룡해씨가 연해지구인 청도시에 진출한후 우리 민족을 위한 사업에 적극 투신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룩하고있다.지난 주일에 휴가차로 청도에 잠간 다녀온 기자는 남룡해씨와 대화...
  • 2008-07-20
  • 중국의 소수민족 춤들을 정통한 조선족무용가 장미나(28세)씨, 그는 올해 한국류학 5년만에 성균관대에서 무용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무용실력에 리론까지 겸비한, 중국에서 도합 9명밖에 안되는 무용박사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일찍 1988년 연변조선족아동예술단 가입을 시작으로 이듬해 북경인민대회당 공연, 구쏘련에서...
  • 2008-07-13
  • 농민육종가 리수철씨가 20여년간 육성한‘룡도7호',‘중국 1등쌀’로 자리매김 조선족 농민육종가 리수철(44세)가 다년간 실험전을 꾸려 육성해낸 ‘룡도7호’ 입쌀이 전국입쌀평의에서 1등 쌀로 선정됐다. 리수철씨는 80년대 중반부터 벼육종에 전념했다. “벼육종에 큰 흥취를 갖게 된것은...
  • 2008-07-11
  • 일 막을 내린 제2회 대구국제 뮤지컬페스티벌(DIMF) 폐막작 '버터플라이즈'를 본 관객들은 뮤지컬 공연에는 이례적인 '오케스트라'를 보며 즐거워했다.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는 늘 함께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음반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국 뮤지컬 작품으로는 처음 한국에 진출한 '버터플라이즈'는 오케스트...
  • 2008-07-11
  • 문학예술인으로의 변신을 실현하기까지 -연변가무단 부단장 박춘선에 대한 이야기박춘선이라는 본명보다는 주룡이라는 필명으로 더 알려진 문학예술인, 《사랑의 푸른 하늘》 등 인기가요의 가사를 써서 소문을 놓은 우수한 작사자   현재 연변가무단 업무부단장의 중임을 떠메고 실무지도,공연조직,창작평론 등으로 팽이...
  • 2008-07-09
  • 어린이들의 심령에 동심을 심어온 45년—조선족 동요동시에 한획을 그은 김득만 시인     동요동시 다산작가로 불리우는 김득만씨라 하게 되면 아마 연변은 물론 중국내 조선족 소년아독자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다. 하기야 김득만 시인은 45년이라는 기나긴 창작생애에서 또 23년간이나 연변...
  • 2008-07-06
  • 모든이들의 아낌없는 로고로“장백의 진달래”를 창조해냈다—“장백의 진달래”의 기획 창작 련습에 얽힌 이야기6월 28일, 2008년 중국북방관광교역회 및 중국연변조선족민속문화관광박람회개막식에 이어 펼쳐진 대형집단무용 “장백의 진달래”, 그 하나하나의 화려한 장면들은 우리...
  • 2008-07-04
  • 2002년 목단강시리과장원, 2003년 목단강시문과장원, 2004년 흑룡강성문과장원에 이어 해림시조선족중학교는 또 경사가 났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고중 3학년 2반의 남홍옥학생이 659점으로 목단강시문과장원을 따낸것이다.  홍옥이는 자신의 성공비결중 하나로 자립을 꼽았다. 초중 2학년때부터 부모님들이 한국나들이...
  • 2008-07-0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