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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 전쟁에서의 잊을 수 없었던 나날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0월27일 08시06분    조회: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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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정석숭

 

 

정석숭 프로필

 

1933년 8월 29일 료녕 신빈현에서 출생. 1951년 2월 항미원조전쟁에 참가, 제40군 후근부 경위영 경위련 련락원(통역). 1956년 6월 동창대촌조선족소학교에서 입당. 선후 신빈현위선전부, 공청단신빈현위, 문교당위, 당정돈판공실, 현직속기관당위, 민정국, 남잡목진에서 사업. 1981년 1월-1993년 8월 현문교당위 서기, 문교부 부부장(겸) 현문교위 당위서기 력임. 1993년 정년퇴직. 신빈현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부회장 겸 비서장, 현교육위원회 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상무부주임. 2012년 7월 23-31일 중국인민지원군 로전사 조선방문단 성원으로 ‘조국해방전쟁승리59주년기념행사’에 참가.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을 기념하면서:

    

항미원조전쟁 70주년을 맞는 참전 로전사로선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새중국이 갓 해방해서 나라가 매우 가난할 때 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중국 변경 위협으로 당중앙은 의연히 ‘항미원조 보가위국’ 결정을 내렸습니다. 미국 폭격기의 폭격으로 압록강다리가 끊긴 순간도 목격하였습니다. 미제국주의는 중국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2년 9개월이란 시간에 크고 작은 가렬처절한 전쟁을 거쳐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인민군과 함께 어깨겯고 싸워 미군을 위수로 하는 유엔군을 3.8선 이남까지 물리쳤고 판문점정전담판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이는 중국이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세계 강국과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긴 정의로운 전쟁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성원으로 자호감을 느낍니다.

    

항미원조전쟁은 세계에서 중국의 대국의 지위를 굳히게 하였으며 진일보로 억만 인민대중 속에 중국공산당의 견강한 핵심지도지위를 확립시켰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중국인민은 일어섰고 부유해졌으며 강해지고 있습니다. 항미원조정신은 우리의 보귀한 정신재부로서 세세대대로 전해가야 합니다.     

 

    

아래는 정석숭 로인의 개인회고록 《봄빛과 더불어》에서 발췌한 항미원조전쟁 이야기들이다.

 

 

2012년 7월 23일 조선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앞에서 저자(우2)

 

압록강다리가 폭격에 끊겨

 

1951년 설날이 지나자 촌에서는 청년농민들을 항미원조에 동원했다.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너도나도 호응했다. 그 때 우리 집의 형편으로 나는 군대에 참가하는 주요대상이 아니였다. 부모님은 모두 몸이 편찮으셨고 집에는 8살 밖에 안되는 녀동생이 있었고 아내와 금방 결혼한 독자인 나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로동력이였기 때문이다.

 

남이든 북이든 모두 우리 조선민족의 락토가 아닌가. 이 또한 조선땅에서 중국대륙으로 건너온 조선족 선조들이 생존하던 곳이다. 또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되여 조국을 보호하는 일에 조선족으로서 그냥 집에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니였다. 그래서 나는 의연히 참군하여 보가위국(保家卫国)에 작은 힘을 보태기로 결정했다.

  

조선족이여서인지 단동전선에 도착하자 병참부의 경비영에 편입되여 통역과 길안내를 맡았다.

  

그 해 4월초의 어느날, 나는 선발대원 몇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라는 임무를 받았다. 압록강대교는 미국이 폭격하는 주요목표여서 무시로 포탄이 날아올 위험이 있었다. 우리가 신속히 대교를 건너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상급의 통신원이 말을 타고 와서 되돌아가 령을 기다리라는 바람에 다시 강을 건너 단동으로 갔다.

 

이삼일 후, 미국 B29 대형 폭격기 80여대가 까맣게 남으로부터 날아와 압록강다리를 향해 폭탄을 투하했다. 폭탄 한발이 우리 주둔지의 건물 앞에 있는 방 세칸짜리 초가집 중간에 떨어졌다. 집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는 물구덩이가 되버렸으며 경비영부의 창문도 모조리 깨져버렸다.

 

이날 압록강 다리가 폭격에 끊어졌다.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길안내자  

  

조선전장에서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단합하여 수많은 승리를 취득했다. 그 가운데는 조선인민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공로가 있다. 우리는 행군도중에 길이 낯설어 늘 당지의 주민들에게 길을 부탁했다.

  

한번은 당지의 주민을 찾아 길안내를 부탁하니 아주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그는 말더듬이여서 언어소통이 무척 어려웠다. 나는 그와 상의하여 수화로 뜻을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틀리면 고개를 저으라고 했다. 부대가 갈림길 앞에 도착했을 때, 내가 우측을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젓고 좌측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 광경에 영장과 전사들은 배를 끌어안았다.

  

우리가 강가에 도착했을 때 다리가 없었다. 내가 물 깊이를 묻자 그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여 말이 없었다.

  

나는 영장께 먼저 건너보고 물이 깊으면 바지를 벗고 건너가자고 했다. 전사들이 이미 강중앙에 도착했는데 길잡이는 그제야 “깊지 않아요”라고 말을 했다.

  

전사들은 더는 참지 못해 박장대소했고 길잡이도 수줍게 웃었다. 나는 “아니 대안에 도착한 다음 알려주죠”라고 한마디 건넸다.

 

또 한번은 길잡이를 ‘오살’할 번 할 일도 있었다.

 

부대에서 간촌동촌이라는 곳으로 이동하게 되였다. 촌민들의 말에 의하면 두갈래의 길이 있는데 큰길은 가기 쉽지만 50여리를 더 걸어야 하고 산길은 험난하지만26리밖에 안된다고 했다. 영장에게 보고하니 길잡이를 찾아 산길로 가자고 했다. .

  

당시 적군의 비행기 소사를 피해 부대는 낮에는 휴식을 취하고 밤에 행군했다. 해가 지자 우리는 주둔지에서 떠나 날이 저문 틈을 타서 산을 넘었다. 도중에 작은 마을을 발견한 나는 통신원 두명을 데리고 당지의 길잡이를 찾으러 나섰다.

 

마을 어귀의 첫 집에 들어가니 집에는 50대의 녀성이 있었는데 남편의 행적을 묻자 집에 없단다. 그런데 구들에 있는 베개 두개를 보니 분명 주위에 숨어있는 것 같아 통신원과 나는 울타리 밑에서 런닝에 반바지만 입은 남자를 찾아냈다. 우리는 그더러 우리를 간촌동촌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마지못해 승낙하고 집안에 들어가 옷을 걸치고 나와 함께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나는 몇번이나 남은 거리를 물어보았지만 계속 “금방 도착한다”고만 했다.

  

예상대로라면 곧 도착할 것 같아 길잡이가 점점 의심스러웠다. 영장도 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제자리에서 쉬자고 명령을 내렸다. 내가 통신원 두 명을 데리고 한 집의 두드리니 백발로인이 나타났다.

 

우리가 중국인민지원군이고 지금 간촌동촌에 임무 수행하러 간다고 하자 그는 이미 목적지를 지나 3리 길을 더 걸었다고 했다. 그에게 길안내를 부탁드리자 그는 쾌히 따라나섰다.

  

돌아가서 영장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영장은 다짜고짜로 길잡이를 향해 총을 꺼내들었다. 흔히 지방특무가 길잡이가 되여 부대를 적들의 매복지에 데려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혹시 판단이 잘못될가봐 영장에게 길잡이를 묶어두고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결정하자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영장이 직접 심문하고 나는 중간에서 통역을 맡았다. 알고 보니, 길잡이는 당지정부의 한 간부였는데 평일에 집에 자주 오지 않아 주위의 지형을 잘 알지 못한 것이였다.

 

이튿날, 우리는 당지 정부에 전화로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그는 지원군이 조선을 위하여 싸우러 왔는데 이런 오유가 발생한 것에 대해 재삼 미안하다고 했다.

 

미군포로를 우대

  

비록 미제국주의가 조선전쟁에서 큰 죄를 저질렀지만 우리는 참전 미군포로병한테는 인도주의로 대하고 우대해주었다.

  

어느날, 부대가 비교적 편벽한 곳으로 이동할 때 저녁무렵에 출발했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 우엔 다리가 하나 밖에 없었고 맞은편에는 미군 포로병을 후방에 압송하는 대오가 건너오고 있었다.

 

처음엔 우리가 다리로 지나가고 나서 그들이 강을 건너라고 했는데 미군 포로병들은 내려가려 하지 않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서로 양보가 없자 영장, 지도원과 련장은 그들을 다리로 가게 하고 우리가 강을 건느기로 했다. 이 광경에 그들도 감동되였는지 엄지를 내밀며 “OK! OK! 중국지원군!”이라고 했다.

  

또 한번은 야행군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후, 영장과 함께 순찰하다가 포로병 두명을 만난적이 있었다.

 

그들이 큰소리로 뭐라 하였는데 영장은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나한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지만 나도 미국말을 통역할 능력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문득 어릴 때 배운 일어가 생각나 일어로 의사소통을 하자 예상밖에 그중 한 명이 일어를 알았다. 그는 일본에 3년 동안 의무병으로 있었다며 그들도 전쟁이 싫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포로된 후, 그들은 지원군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갈 증명을 받았지만 조선인민군이 그들을 억류하고 그들의 통행증, 이불, 지갑과 사진을 모두 압수했다고 했다. 우리는 인민군과 상의하고 그들의 물건을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두 미국군인은 감동되여 지원군의 관대함에 감사를 표하며 맥아더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했다.

 

또 어느 한번은 미군 비행사를 포로했을 때의 일이다.

 

1952년 새해, 조국에서 지원군위문예술공연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우리는 주둔지가 있는 한 산비탈에 공연장소를 지정했다. 공연이 시작할 무렵,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공중에서 꼬리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미공군기가 공중으로 치솟다가 폭발했다. 그뒤로 락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미공군 한명이 보였다.

  

알고보니 이 비행사는 우리에게 격추되자 부랴부랴 락하산을 탄 것이다. 사람들은 공연을 볼 겨를이 없이 모두 산우로 올라가 그 비행사를 공연장소로 잡아왔다.

 

비행사는 신장이 1.7미터 이상에 서른이 넘어보였는데 아주 잘 생겼다. 영장은 상황를 군부에 보고하고 상급에서는 인차 비행원을 데려갔다. 갈 때, 통역관이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묻자 그는 두팔을 량쪽으로 펼치며 “아무래도 죽는 판인데 여기서 통쾌하게 죽이는게 낫지 않는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통역관이 “우리는 포로병을 죽이지 않는다. 우리 지원군은 언제나 포로병을 우대한다”고 웃으며 말하였지만 비행사는 듣는둥 마는둥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어댔다. 군부의 차가 비행사를 데려간 후 우리의 공연이 막을 올렸다.

  

미군비행사를 생포한 우리는 공연을 보며 희망찬 새해를 맞이했다.

 

아내의 편지 덕에 목숨 건져

  

조선전장에서의 나날들은 환경이 렬악하고 조건이 험난해서 많은 전사들이 병에 걸렸는데 다행히도 부대병원이 있어 전시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는 거의 밤에 행군하고 낮에는 휴식하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통역과 길안내 임무를 맡은 나는 전사들이 낮에 휴식하고 있을 때 당지 주민들한테 길을 탐문하고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때문에 다른 전사들보다 더 많은 길을 걸어야 했고 힘들면 길가의 습기찬 풀밭에 앉아 휴식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치질에 걸렸고 통증에 시달려 걸음조차 걷기 힘들었다. 부대가 니연리촌에 주둔하고 있는 짬에 수장은 내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40군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도록 배려해주었고 그래서 치질병이 많이 나아지긴 했다.

 

어느날, 폭격기가 없는 시간을 타 밖에 나가 길 옆에 앉아있는데 마을에서 편지를 전달하는 현지의 두 처녀를 만났다. 그들은 나의 완쾌를 축하한다며 집에서 편지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어디 갔는지 몰라 편지를 갖고 오지 못했으니 마을사람들한테 인사도 할겸 익은 밤도 먹어볼 겸 마을을 다녀가라고 했다.

 

이튿날 그녀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으려고 나는 한 병실의 부상자와 함께 니연리촌으로 갔다. 촌민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편지를 들고 병원으로 돌아온 나는 눈앞의 광경에 기가 막혔다. 병원건물은 폭격기의 포탄에 무너졌고 나의 침대는 적들의 기관포에 두번이나 맞아 이불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만약 내가 이 편지를 가지러 마을로 가지 않았다면 그 당시 목숨을 잃었을 게 뻔했다.

  

내가 왜 부대에서도 지방에서 온 편지를 받을 수 있었는가고? 나는 집이 너무나 그리웠다. 내가 집으로 가기 전에 장병에 시달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예상치 않은 일이 생길가봐 걱정되였고 집에 소, 말 같은 농기구 하나 없이 혼자서 파종, 김매기, 모내기, 가을걷이를 해야 하는 아내가 걱정되였다.

 

그래서 편지를 자주 쓰게 됐는데 매번 두통씩 썼다. 하나는 부대에서 부쳐 보내고 또 하나는 조선의 지방 우편국에서 보냈고 집에서 오는 편지도 부대와 지방 두 곳으로 각각 보내오게 했다. 이렇게 하면 전쟁의 혼란상태에서도 부대를 거쳐오는 편지를 받지 못하면 지방우편국을 거쳐 온 편지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덕분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날은 마을의 집들도 많이 불탔고 촌민들이 먼 곳에서 운송해온 식량도 탔을 뿐만 아니라 많은 촌민들과 전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국제관례에 의하면 전쟁시기 쌍방이 교전할 때 병원 등 인도주의시설을 폭격하면 안된다. 하지만 미제국주의는 비인도적으로 병원과 백성들의 집을 무차별 폭격했다. 미군비행기는 폭격시 아주 낮게 뜨며 행인이든 가축이든 모두 소사했다.

 

한번은 미군비행기가 사격을 끝내고 너무 낮게 나는 바람에 앞에 있는 산비탈에 박힌 것을 보게 되였다. 비행기는 꼬리에 연기를 뿜고 날개도 여기저기 흩어졌는데 비행사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이는 그들이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되였다.

 

세월은 무정해도 인간은 유정

  

어느날 아내는 편지에서 아버지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눈감기 전에 아들을 만나고 싶다는 절절한 내용을 전해왔다. 또 집에 소도 말도 농기구도 없어 래년에 어떻게 땅을 갈고 파종하고 탈곡할 지를 걱정한다고 했다.

 

우로는 로인이 계시고 아래로는 아이들이 딸린 형편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아내에게 너무나도 벅찬 것이였다. 전선에 있는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고 언제 전쟁이 끝나 집으로 갈 수 있는지 모두가 미지수였다.

  

1952년1월말, 일부 부상자를 귀국 치료하는 기회에 경비영 수장은 아쉬워하면서도 우리 집 사정과 나의 치질 상황을 고려해 귀국하는 게 어떤가고 나의 의사를 물었다.

  

비록 전쟁은 위험하고 힘겨운 과정이였지만 그동안의 기억은 아직 미련으로 남아있다.

 

당시 경비영 영장은 국내에서 휴양하고 있었고 부영장 주진화와 부교도원은 나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나는 늘 길잡이를 찾아다녀야 하는 통에 발에는 항상 물집이 터져 피가 나군 했다. 부영장도 보기 애처러워 자기의 말을 나에게 늘 양보하고 전사들과 함께 보행했다.

  

내가 치질에 걸려 걷지 못할 때, 부영장과 교도원은 병참부에 소개신을 써주어 병원에서 수술받도록 배려해 주었다. 또 부대에서는 산언덕에 방공호를 뚫고 구들을 앉혔는데 부영장은 굴 밖의 습한 환경에 치질이 더해질가봐 나더러 안으로 들어와 수장들과 함께 먹고 자게 했다.

  

나는 진취심이 강한 사람이다. 조선에 남아 계속 단련하고 싶었지만 집에서 로쇄한 아버지가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고 로동능력을 잃은 어머니와 아내, 동생등이 있는 취약한 가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게 마음에 걸려 할수없이 귀국을 선택했다.

 

1952년 귀국후

   

전쟁은 만악의 구렁창이다. 전화는 수많은 가정의 행복을 송두리채 뽑아버리고 청년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전쟁, 또한 사람을 육성하는 대학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전쟁을 배우고 전쟁에서 다시 인간도리를 터득한다. 항미원조전쟁에서의 1년, 나는 책에서, 지금의 평화년대에서 절대 배울 수 없는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되였다. 이는 귀국후 나의 사업과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였다.

 

정석숭/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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