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첩첩산중의 농사꾼 아들이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길은 공부가 유일했죠. 고향에서 수재란 소리를 들었는데 베이징과 서울에 와보니 똑똑한 사람 천지더군요. 이를 악물고 공부에만 매달렸죠."
재외동포 관련 각종 학술행사에서 단골 발표자나 토론자로 등장하는 예동근(41) 부산 국립부경대 교수의 고향은 중국 지린성 융지현의 대흑산이라는 두메산골이다. 200호 남짓한 규모의 이 동네에서 그는 이제 가장 성공한 인사로 꼽힌다.
7년 전 34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국립대 전임교원이 돼 부교수까지 오른 그는 1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학교 입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18년간 중국 옌지·베이징과 서울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며 "어려서부터 부모 품을 떠나 타향살이를 했지만 목표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고교 시절 지린성에서 품성·인성·지성이 뛰어난 학생 100명에게 수여하는 '성3호'(省三好)로 선정돼 난생처음 베이징을 견학하고는 꿈을 바꿨다. 그때까지는 비행기를 타보거나 바다를 구경하는 게 소원이었고 나이 들면 '촌장'이 되겠다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고향과 천지 차이인 베이징을 둘러보며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느끼고는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해 우뚝 서보겠다고 목표를 수정했다.
연변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예 씨는 2000년 중국 내 민족 연구 분야에서 가장 앞서있는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원에 입학했다. 조선족으로 소수민족 연구에 관심이 많아 민족이론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중남미, 유럽, CIS(독립국가연합) 등 세계 각국의 주류사회에서 활약하는 차세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회였죠.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외연이 넓고 다양하다는 것에 새삼 놀랬고, 글로벌마인드를 갖추려면 중국에서만 공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재단 초청 장학생에 응모해 뽑힌 예 씨는 2004년 고려대학원 사회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한국 유학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중국과 달리 서구 중심의 지식체계인 데다 사고방식도 달랐기 때문이다. 기초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매 학기 학부 수업도 서너 개씩 들었고, 원서를 보느라 날밤을 새우는 날도 많았다.
학교 도서관 기숙사를 오가는 생활의 반복 덕분에 그는 빠르게 수업을 따라잡았고 보통 6년 이상이 걸린다는 박사학위를 4년 반 만에 취득했다.
대학에만 있다 보니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조선족처럼 직접적인 차별은 받지 않았지만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불법체류자로 오인돼 경찰로부터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는 일을 종종 당했다. 그 덕분에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과 영등포구 대림동 등의 조선족타운을 틈나는 대로 드나들며 조선족의 처우 개선을 위한 연구를 별도로 진행했다.
예 씨는 베이징 대학원 시절인 2001년에 "조선족 학생끼리 서로 돕자"며 '조선족대학생센터'를 만들었다. 상부상조하면서 학업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며 30명으로 출발한 이 센터는 이제 회원이 1천 명이 넘어 학술대회를 열 정도로 성장했다.
그는 2003년 9월 박사과정 준비를 위해 한국에 오자마자 중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KCN)'를 만들었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석·박사과정 학생이 중심인 KCN은 설립 초기부터 정부기관 공청회, 대학·연구소의 학술대회 등에 단체 이름으로 참석해 조선족을 대변하며 부정적인 인식개선에 앞장섰다.
"당시 국내에는 재한 조선족을 연구하는 학술 단체가 적어서 각종 행사에 KCN이 곧잘 초청됐죠. 다들 자기 학업으로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참가했고, 공동 연구도 진행해 KCN 이름으로 조선족 처우 개선을 위한 보고서나 성명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박사학위 취득 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예 씨는 2010년 부경대 교수로 부임했다. 국제지역학부에서 강의하면서 대학의 국제교류 업무에도 발 벗고 나서 부임 초기 40개였던 중국 자매결연 대학을 80개로 늘렸다.
2011년에는 늘어나는 국내 체류 조선족 차세대를 격려하고 변화한 조선족의 위상을 널리 알리려고 전문분야에서 활약하는 12명의 재한 조선족의 이야기를 모아 '조선족 3세들의 서울 이야기'를 펴냈다.
중국어·영어·일본어에도 능통한 그는 2004년에 중국어로 '중국소수민족자치주 연구'를 저술했고, 2007년에는 일본어로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를 일본 현지에서 출간했다. 국내에서는 2013년에 중국의 사회·문화 등을 소개하는 '차이나핸드북'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조선족 3세들의 서울 이야기'의 속편을 내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조선족들을 섭외해 원고를 집필하고 있다. 성공한 조선족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영역을 구축한 이들의 성과를 1권에 1명씩 집중적으로 담아 2018년부터 시리즈로 낼 계획이다.
그는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이 2000년대 중반까지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 중국으로 금의환향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교수, 법조인, 대기업사원 등 엘리트가 돼 주류사회에서 활약하거나 기업을 일궈 한국에 정착하는 '신(新) 코리안 드림'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조선족인 아내 김향란 씨는 부산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다. 중학교 동창으로 베이징 유학 시절 만나 결혼 후 한국에 동반 유학을 온 김 씨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예 씨 부부는 조선족 유학생 출신으로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임용된 첫 케이스다.
대학에서 전공 외에도 교양강좌로 '재외동포의 이해'를 꾸준히 개설하고 있고, 매넌 10회 이상 동포 관련 학술행사에 참여하는 그의 목표는 '글로벌 재외동포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다.
"홍콩의 화교 갑부가 중국 광둥성의 고향에 화교 명문대인 산두대학를 설립한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도 한상(韓商)과 동포 교육자들이 모여 차세대에 글로벌마인드를 심어줄 수 있는 '글로벌 재외동포 대학'을 만들어야 합니다. 형태는 온·오프 상관없습니. 재외동포 연구를 학문의 한 분야로 정립하고 인재 양성 등을 추진해 동포사회의 축적된 지식이 모국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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