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예쁘다]박혜자 “중국농민가요대회” 내 꿈에 대해 확신 열어준 곳, 탄탄한 가수가 될거에요!”
오디션에 참가했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는 혜자양
설명절 연휴기간이였던 정월 초닷새날, 길림성 연길시공안국신고쎈터 골목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혜자양을 만났다. 설명절 기간에도 혜자양은 변함없이 무대에 올라 “TOP ENTERTAINMENT”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멋진 노래를 선물하느라 바삐 보냈다. “중국농민가요대회”에 참가해 얼굴을 널리 알린 혜자양이였지만 전과 다를바없는 평범한 무대생활에 충실하고 있었다.
1년전 이맘때도 그랬다. 밤무대에서 노래를 하고있는 혜자양에게 생각지도 않게 기회가 찾아들었다.
설명절기간 “TOP ENTERTAINMENT”에서 손님들에게 멋진 노래를 선물하고 있는 혜자양
[박혜자] “같이 일하는 선배분께서 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안휘 위성텔레비죤방송국 프로듀서가 농민가요대회 참가자를 찾으러 연길에 왔다는 것이였습니다. 어느날 그 프로듀서님께서 정말로 저를 찾아와서 출전할 의향이 없냐고 물으시더군요. 처음엔 거절했죠, 그러다가 그분의 권고대로 록음을 하고 동영상도 찍고 하다보니 점차 마음이 동하더라고요. 그렇게 영상물과 록음자료들을 제작해서 보냈어요, 그쪽 총감독님이 마음에 들어한다는 소식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어요” #
제5차 중국농민가요대회 대기실에서 출연진과 함께
혹여 시간랑비가 아닐가, 위험하진 않을가 많이 망설였지만 이런 큰 대회에 한번쯤 참가해서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혜자양은 과감히 안휘행을 택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 안휘 위성텔레비죤 공개방송홀에는 혜자양의 상상속 그 화려한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로 조선족 청중들을 대상으로 노래를 불러왔던 혜자양이 한어말 노래를 단시일내에 소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워낙에 아는 노래가 몇곡 없었던터라 출전을 위해서는 담당 지도원의 추천곡을 그때그때 받아서 짧은 연습시간동안 바로바로 흡수해야 했기 때문이였다.
[박혜자]
아는 한어말 노래가 없다보니 담당 지도원에게서 추천받은 노래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그때 받아서 배우다보니 가사를 외우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저의 지도원은 손에 땀을 쥐였었죠. 저도 자신이 없어하고 그 분도 연습 무대에서 자꾸 실수하는 저를 보면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였습니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이였습니다. 현장 감독님들이 저에게 ‘모두 너의 편이다’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힘이되던지…” #
리허설 무대가 아닌 정식 무대에 올라 전주곡이 흐르던 그때 혜자양은 어떤 생각을 했을가?
1라운드 대결에서 “꿈처럼 자유롭게”를 열창하고 있는 혜자양
[박혜자] “일단 가사를 틀리게 부르지 말아야지 생각했습니다, 가사가 틀려서 주위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눈을 감고 지도원이 가르쳐준 사항들을 념두에 두고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꿈처럼 자유롭게’라는 노래였는데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해서 부르게 되였어요, 그 부분에 이르니 시름이 확 놓이더군요. 그래서 눈을 떴는데 관중들의 큰 환호성을 받았어요, 심사위원들의 밝은 표정도 눈에 들어왔고요. 긴장이 완전히 풀렸습니다. 2차 대결 때는 400명 가까이되는 관중들이 저의 이름을 불러주더군요, 탈락했지만 참 감동적인 순간이였습니다. 눈물이 절로 나더라구요. (웃음)” #
꽃파는 혜자양 ^^
오디션기간에 대결과 연습에 치이다 보니 고향의 분위기도 잘 몰랐다는 혜자양, 자신을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았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했다. 혜자양은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운적이 없었다. 주위 선배님이나 동료들의 노래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거기에 자기만의 색갈을 넣어 따라부르는 게 전부였다.
[박혜자] “정말 노래를 잘 하고 싶은 데 목이 자꾸 쉬고 아프고 하니까 심할 때는 혼자서 운적도 있습니다. 그런 저를 보면서 주위 선배님들께서 조언해주셨고 저도 자주 그분들께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한때는 근처 선배님을 찾아서 록음을 해보기도 했죠.” #
저의 유년기는요~
중학교시절부터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갈등끝에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교육학과에 진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았지만 혜자양은 음악교육 역시 자신의 진로가 아님을 깨달았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담량이 나왔을가. 대학시절 혜자양은 학업을 접고 무작정 중국음악학원을 찾아갔다. 단순히 자신의 노래 기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1차 중국농민가요대회 전국 순회탤런트쇼에서 유명 기타리스트랑
[박혜자] “아무 사람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중국음악학원에 도착해서 보안일군의 안내를 받아 교무처로 갔습니다. 목소리를 검증받고 싶어서 왔다고 저의 의사를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저를 음성 정밀검사실로 데리고 가는거에요. 저처럼 저음을 내는 사람은 리론상 키가 아주 크거나 목이 길어야 하는데 저는 정반대였거든요. 검사결과 다행히 이상은 없었습니다. 일단 목소리는 인정받았으니 다시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돌아와서 음악표현 학과에 재입학하려는 희망을 안고 말이죠.”
그렇게 다시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현실은 또 그게 아니였다. 음악교육학과에서 음악표현학과로 바꾸기엔 여러가지 제한 사항들이 많았고, 그래서 혜자양은 다시 음악교육학과에 재입학해 어머니의 당부대로 음악교육 학위를 수여받았다.
예쁘게 봐주세요!
얼핏 보기에는 달라진 게 없는듯 보였지만 오디션에 참가한 6개월간 혜자양은 많이 참 성장했고 28년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득” 뒤에는 늘 “실”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혜자양은 말한다. “몰라도 되는데 알아지는 것”이 많았다면서 혜자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혜자] “대회에 참가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제가 많이 소심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분들이 저를 알아봐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는 건 너무 고마운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도 돌더라구요. ‘대회에 한번 출전하더니 이러쿵 저러쿵 …’ 너무 평범한 삶을 살아온 저에겐 너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그렇게 크게 뜬 것도 아니고 ㅋㅋㅋ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지겠죠, 그래도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더 많다는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
저의 아빠에요!
힘겹게 지켜온 꿈에 날개를 달아준 “중국 농민가요대회”의 잊지못할 추억들을 회상하며 혜자양은 꿈너머에 자리한 아름다운 날들을 이야기했다.
[박혜자] “ ‘중국농민가요대회’ 같은 큰 무대에 기회가 된다면 또 한번 참가하고 싶습니다. 요즘따라 왠지 자꾸 그때의 그 감동과 짜릿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습니다. 엄마, 아빠가 한국에 계세요, 음악으로 어떻게든 성공을 해서 하루 빨리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2015년 저의 노래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또 저를 많이 응원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릴테니까요 기대해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글/구서림 사진/ 리향화
중앙인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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