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특징적인 외모나 차림새로 타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타입과 그 인격의 매력이나 신사적인 행위로 인해 오래도록 관심을 끄는 타입이 있다. 내가 만난 리호원(1966년 출생)은 너무나 선명하고도 전형적인 토종모습을 갖추었기에 구태여 지루한 묘사가 필요없을듯한, 아무데서나 만날수 있는 옆집아저씨 같은 사람이다. 본인 또한 자신은 지구흡인력에 가장 민감하기에 신장을 높낮이 대신 너비로 자랐다고 “변명”을 하니 더이상 꾸며줄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리호원은 우리 문단에서 원로작가들처럼 이미 확고한 리정표를 세워놓은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심심할 때면 가끔씩 나타난다고 할가, 아니면 잊을라면 불쑥 괴여오른다고 할가. 하여튼 그의 행적을 일관적으로 추적하기에는 애로가 있는듯하다. 지금쯤이면 시집 한권쯤이야 어렵지 않게 출판하겠는데 취재문선 한권 달랑 출판해놓고는 좀처럼 시집 묶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전에 촬영작품집을 먼저 출판하겠다는 심사다.
1999년 슬럼프에 빠져있던 시기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문단을 공식 노크한 리호원은 시작때부터 고 한춘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점을 미루어보면문학관념과 사유의 바탕은 그 줄기의 파생이라고 여겨도 무방할것이였다.
“호원이 시를 너무 어렵게 쓰는것 같은데…” 어느날 《송화강》잡지 전임주필이였던 고 리삼월선생의 이 한마디 때문에 “시를 그만둬야지”라는 오래동안의 고민도 해보았다고 자백하며 시 터득이란 공명(共鸣)도 되여야지만 공생(共生),공존(共存,) 공멸(共灭)의 의식이 없다면 그냥 글읽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2010년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공모에 응한 모든 작가들은 이미 출간된 묵직한 작품집을 제출했지만 공교롭게도 유독 조시로 올라온 리호원의 시 다섯편이 책자들을 누루고 수석을 차지해 주변을 놀래운적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자신조차 자신의 행방을 몰랐던 암울함을 다소나마 인정을 받은 셈이였다.
주로 생명의식을 터치하는 리호원의 시에는 아픔이 늘어져있고 절망도 부풀어져있다. 집요하게 외로움과 적막에 매달리며 넉두리하듯 고독을 꼬집고 또 그 적막의 향을 탐닉하는 의식의 기로에서 생명을 남다르게 해부하고 재조합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례하면 그의 시구에 있는 “생명은 죽어서야만 완제품이 된다”는 조금은 섬찍하지만 곧 그가 주장하는 “진리”에 매료되게 되며 이어서 철리로 생각하게 된다.
리호원은 아버지가 유물로 남겨준 구쏘련제 이안렌즈카메라와 씨름하며 촬영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한지도 어언 40년이 훨씬 넘는다. 그는 시가 나오지 않으면 차라리 카메라장비들을 챙겨 들고 촬영작품 창작에 몰두한다. 그는 촬영과 시는 꼭 무언가 통하는게 있다고 생각하며 렌즈로 보아내는 시나 시에서 보아낼수 있는 풍경은 꼭 같은 생명을 공유하고있기에 그 기대는 더욱 긴장하고도 큰것이라고 한다. 작년 북경에서 로신문학원12기 소수민족작가반을 수료하고 돌아온후 창작의 착안점을 생명의 더 깊이에 넣을수 있을것 같아 기분 좋다고 한다.
리호원의 본업은 정확히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소속 문학지 《송화강》잡지 문학편집 겸 부주필이며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촬영부 주임이다. 이안리플랙스 사진기로 보는 아름다운 풍경마냥 아름다운 시들이 계속 쏟아지기를 원하며 시인에게 갈채를 보낸다.
연변일보 김인덕 기자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