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해살같은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3월4일 15시09분    조회:698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강혜

딸깍딸깍 의족을 신은 강혜씨,장애인 재활을 돕는 일 하게 된 사연

강혜

1974년생

조선족

장애인

의족을 전문 생산하고 의족착용 장애자들의 재활을 돕는 장춘엔도라이트(恩德莱)재활기기회사 총경리

... ...

이번 취재대상이다.

딸깍딸깍 굽 높은 하이힐의 그녀 알고보니…

2월 27일,  음력 정월 초아흐레날.

오전 9시경, 기자는 장춘시의 한 번화가에 위치한 강혜의 회사를 찾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자리한 회사에 들어서니 해살이 한가득 복도에 차있었고 맑은 공기속에 이름 모를 향기도 풍겼다. 

장애자,  의족, 재활 등 단어들과 련관되는 회사라는 느낌이 없이 그냥 어느 비즈니스회사같았다. 

회사 카운터에 찾아온 용건을 말하니 사장은 회의중이란다. 

10여분 기다리고있는데 딸깍딸깍 하이힐소리가 들리더니 정장차림의 한 녀성이 해살 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사무상에서 환한 웃음을 짓는 강혜씨

《반갑습니다. 강혜입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강혜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 사무실로 안내한다. 

어?  지체장애인이라고 들었는데…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앞에서 걸어가는 그녀를 다시 살펴보았다. 다리를 조금 저는 같기도 했다. 

《오늘은 음력설후 첫 출근이라서 일이 많습니다.》 하며 첫마디를 떼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린다. 회사용건이였다. 전화를 마치고 얼마 안 지나니 직원이 찾아와 결제를 청구한다. 

이렇게 회사사무도 처리하고 인터뷰에도 림하는 그녀와의 줄다리기 취재가 이어졌다.

20세 꽃나이의 비운,그 역시 새로운 시작이였다.

1994년 12월의 마지막날.

길림예술학원 음악학부를 금방 졸업한 그녀는 한차례 교통사고로 왼쪽다리를 잃었다. 그해 그녀의 나이 20세. 학교문을 금방 나와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있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파멸 그자체였다. 

《새벽에 일어나 짠지를 해서 팔고 낮에는 출근하며 단신으로 세 남매를 키웠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그런 비운속에서도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사고후 의족을 착용해야만 했다. 그때 사고차량의 운전기사도 배상할 돈이 없었다. 또한 가정형편도 변변치 않은 그녀는  집안의 어려움도 덜겸 자신의 의족도 수시로 조절할겸 의족장착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1999년, 25살나는 강혜는 북경의 모 대만의족재활기업에 견습공으로 입사했다. 그때로부터 그녀는 이 업종과 끊을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

예술학교시절에 풀류트(长笛)를 불었던 그녀의 가녀린 두손에 이제부터는 전기드릴(电钻), 연삭기(砂输机), 망치 등 작업도구가 쥐여졌다. 

고된 작업으로 그녀의 약한 팔은 늘 벌겋게 부어올라 숟가락도 들수 없었지만 그녀는 결코 인생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다른 건강한 대학생들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세월에 장애인인 내가 자기 두손으로 벌어서 살아갈수 있다는데 만족했습니다.》   

그녀는 의족을 장착하러 온 사람들에게 걸음걸이 시범도 보이며 그들을 도와 재활훈련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자체가 행복한것이였다.

2007년, 8년간의 고된 노력끝에 그녀는 국가급 고시에 통과되여 고급의족기능사 자격증서를 따냈다. 

더 많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돕고싶다며 그녀는 고향에 돌아와 창업을 하려고 결심했다. 

2007년말, 그녀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재활기기제조회사인 엔도라이트재활기기(북경)유한회사 장춘회사를 창립했다. 

몇년사이 그녀는 50여명의 장애인청년들의 취업을 해결해주었으며 늘쌍 자기가 직접 자가용을 몰고 환자들을 모셔왔다.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을 도우며 사는게 그녀의 꿈이였고 락이였다. 2012년 그녀는 장춘시장애인창업선두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재활훈련을 받고 있는 환자와 함께

엄마의 딸 그리고 딸의 엄마

《가정에서나 사업에서나 매번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칠 때마다 저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섯살, 세살,  한살 되는 우리 남매를 당신 혼자 손으로 키워온 어머니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시 분발하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된 그녀의 어머니는 세 자식을 이붓아버지 손에서 키우고싶지 않다며 재가도 하지 않은채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한생을 바쳐왔단다.

여덟살때인가 어느 날 밤, 잠결에서 깨여난 그녀는 어머니가 그토록 슬피 우는것을 보았단다. 자식들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 한번 안하고 눈물 한방울 안 보이시던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단다. 

그뒤로부터 그녀의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공부에도 열중했고 어머니를 도와 짠지도 팔았고 늘 어머니가 세워준 목표와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힘썼다. 

대학교지원을 쓸 때도 예술학교에 가면 조학금이 있으니 가정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두말없이 지원을 썼단다. 

《교통사고가 일어난 뒤 병원에서 처치를 하거나 실을 뽑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습니다.  옆에 어머니가 계셨고 내가 울면 어머니가 더 힘들어할가봐서요.》

사고가 난 뒤에 그녀의 어머니는 더는 딸에게 무슨 목표를 세워주지 않았단다. 아마 딸이 그냥 건강하게 사는게 바람이였을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늘 열심히 살아왔고 자신의 딸한테도 열심히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혜씨가 어머니와 딸과 함께 장춘 남호공원에서

《올해 열살난 우리 딸 눈에는 내가 녀자슈퍼맨(超人)으로 보입니다. 내가 뭐나 다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딸은 엄마가 장애인이라는것을 느끼지 못하고있는것 같습니다. 언젠가 학교에서 <우리 엄마>로 명제작문을 썼다는데 우리 딸의 작문이 모범작문으로 뽑혀 학급에서 랑독되였다고 하네요…얼마나 뿌듯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 말을 잘 못하는 아쉬움때문에 딸은 기어코 조선족학교에 보냈다는 그녀다. 평소에 회사일로 바쁘다보니 많이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것이 안스러워 그녀는 시간만 나면 딸과 함께 공원도 가고 놀이터도 가고 함께 책을 읽기도 한단다.

딸에 대한 그녀의 바람도 앞으로 더 해맑게 더 건강하게 사는것이였다.

취재를 끝내고

취재를 마치고 그녀의 회사를 돌아보았다.

생산구역이나 사무구역, 재활구역이나 지어 환자 병실까지 깔끔하고 조용했으며 문화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장애인들은 많이는 몸과 마음의 이중타격을 받습니다. 장애인들과 장애인가족이 이곳에서 장애를 딛고 희망을 찾을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남을 돕는것 특히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에게 신심을 주고 희망을 주는것이 그녀 생의 목표라고 한다. 

딸깍딸깍 하이일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앞에까지 나와 기자와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해살같이 아름다운 미소가 다시 한번 피여오른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2
  • -10여년간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온 연변애심어머니협회 김화회장 인터뷰   《진정한 란 자선사업을 위해 재물을 기여하는것만으로는 론할수 없다. 사랑을 나누면 그 이상이 된다. 진정한 불우이웃돕기는 그러한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변애심어머니협회 김화회장(67세)이 10여년을 꾸준히 이어온 사랑의 나눔에서...
  • 2013-10-21
  • 中서 자란 그들 한국문화 낯설어 동포애로 안아줘야 진정한 화합 “많은 조선족에게 한국은 애틋한 고향이자, 낯선 타향입니다.” ‘조선족대모임’은 2003년 개설된 국내 최대의 조선족 인터넷 커뮤니티다. 회원 수는 6만여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70% 정도가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이 모임을 운...
  • 2013-08-23
  • 《말레이시아로 류학을 떠날 때에는 해외에 정착하여 취직하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류학하는 과정에서 고향에서 뭔가를 해보려는 꿈을 갖게 되였고 류학후 결연히 고향행을 택하였습니다.》기자를 만나 고향 연변에서 창업하게 된 계기를 밝히는 최성숙﹙26세﹚양이다.   최성숙양은 류학후 창업에 갓 발을 ...
  • 2013-08-11
  • ㅡ단동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김택룡회장 인터뷰 김택룡 프로필 1955년 단동시 출생 1972년 단동실크학교 입학 1974년 봉성시실크공장 1976년 참군 1979년 단동시인쇄공장 과장, 부총경리 1986년 단동시인쇄공장 총경리 1995년 일본합작 인쇄회사 설립 2005년부터 현재까지 단동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 민간단체로...
  • 2013-07-30
  • "결혼이주여성들은 늘 도움을 받고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주민들도 주인의식을 갖고 제 몫을 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남편을 만나 정착한 중국 국적의 조선족 박경희(40) 씨는 2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주민...
  • 2013-07-23
  • 손수 흙을 이개여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들, 우리 연변에서도 “흙으로 그릇 만드는 사람”이라고 당차게 밝히는 20대 젊은이가 현재 잔잔한 인기를 구가하고있다. 현재 연길 공원가두 발전 항달1품에서 “와이도자기공방”가게를 운영중인 박룡칠(29)씨, 곱사란 외모와는 달리 그의 손은 도자기를 빚느...
  • 2013-06-20
  •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류선화(30·여) 씨는 최근 재외동포재단의 ‘재외동포 초청장학생’에 선발됐다. 이미 석사과정 장학생인 류 씨는 박사과정까지 장학금을 받게 됐다. 재외동포 초청장학생은 한국영사관이 1차 추천을 하고, 재외동포재단이 최종 선발하며 올해 선발 인원은 전 세계 재외동포...
  • 2013-05-30
  • ■ 대졸생 박문영씨   3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농민들이 마냥 믿어주는 당당한 수의사로 성장   “소들이 먼저 초보 수의사를 알아 본거죠.” 농민들로부터 "애송이수의사"로 불리는 박문영(27살)이 수의사일을 시작하면서 겪은 일들이다. 박문영은 2010년 길림농업대학을 나와 대졸생 사업단위초빙시험...
  • 2013-05-28
  •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게 강산이 바뀌는 세월을 길에서 보내고있는 사람, 때론 지치고 고달프고 지겹고 외롭긴 했어도 희망이라는 목적지가 있었기에 마음만은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있는 사나이가 있다. “‘배운것이 도둑질’이라는 우스개처럼 다른데 가면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 2013-05-15
  • 출국과 도시진출 등으로 인한 탈농으로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의 전통마을 그리고 초가삼간들, 이를 마냥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허름한 자전거 하나에 몸을 맡긴채 민속문화, 이주력사, 유적 심지어 일상까지 조용히 렌즈에 담으며 두만강 천리길을 누비고있는 사진작가 류재학(59살)씨. “노래에서 나오는 초가삼간을 ...
  • 2013-04-24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