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길림성가무단, 길림성교향악단의 바이올린연주가로 있었던 김숙자(70세)는 퇴직후에도 장춘영화촬영소 교향악단의 초청을 받고 바이올린연주를 하는 한편 장춘시경제개발구조선족로인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고있다.
1944년 4월 연길시에서 태여난 김숙자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의 문예대 골간으로 활약했다. 초중 2학년때에는 바이올린의 서정적이고 은은한 선률에 매료되여 꼭 바이올린을 배워내리라 속다짐했다. 김숙자는 《단식》하면서까지 부모들을 설득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끝내고는 바이올린련습에 달라붙었다. 거치르고 빽빽거리는 소리에 할머니가 잘 휴식하지 못할가봐 헛간에 가 련습하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왼쪽어깨우와 턱아래에는 썩살이 배겼고 신경통까지 걸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바이올린을 접촉한지 일년남짓해 김숙자는 연변예술학교와 중앙민족학원의 입학통지서를 동시에 받았다. 그때 12살밖에 안된 그는 중앙민족학원 예술학부에 가 3년 예과(预科), 5년 본과 도합 8년이란 긴시간 동안 음악공부를 했다. 당시 중앙민족학원에는 바이올린지도선생이 모자랐다. 대부분 과목의 수업은 민족학원에서 받고 바이올린연주만은 중앙음악학원의 덕망높은 교수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 덕에 기반을 튼튼하게 닦았다. 8년동안 김숙자는 중앙민족학원에서 줄곧 악대 수석바이올린수로 있었고 1967년에 바이올린우수생 칭호를 받고 졸업했다.
졸업한 뒤 부대농장에서 근무, 반년도 안돼 길림성가무단에서 김숙자를 초빙했다. 그녀는 길림성가무단의 호름연주자 김철학씨를 만나 1968년에 결혼하고 1남1녀를 낳았다.
그런데 세상에 부럼없는 행복을 누리던 이들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남편이 페암에 걸려 3년간 힘든 치료를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35세 나이에 저세상으로 갔다.
김숙자는 7살 나는 딸 김란이와 5살나는 아들 김천이를 데리고 억척스레 살아나갔다.
아이들을 친구집에 맡겨놓고 김숙자는 중국은 물론 로씨야, 조선 등 나라를 다니며 공연했다. 어느 한번은 상해에 공연하러 갔다가 집에 들어서니 두애가 생배추를 된장에 찍어먹고있더란다. 침대와 방바닥에는 그림책이며 옷과 신발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어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아이들을 계속 친구네 집에 맡길수 없고 돈도 벌어야 하고…김숙자는 돈을 벌기 위해 과외반주하러 다니기로 했다. 이렇게 혼자서 5년간 애들 둘을 키우다 억울한 루명을 쓰고 22년간 감옥살이를 한 김세주를 만나 새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남편 장세주는 말없이 김숙자를 도와 두애를 보살폈고 김숙자는 근심걱정 없이 공연하러 다녔다. 김숙자는 길림성가무단 악대에서 4년간 수석바이올린수로 있었고 길림성교향악단에서는 퇴직할 때까지 12년간 부수석바이올린수로 있었다.
장세주와 김숙자 사이에서 태여난 장운총은 3살때부터 어머니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뉴욕 줄리아음악학원에서 연구생공부를 마치고 세계에서 이름난 보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波士顿交响乐团)에서 바이올린연주가로 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헴이 빨리 든다고 부모들이 운총의 학비를 마련하느라 큰애의 학비를 마련하기 힘들어하자 큰딸 김란은 과외시간에 어린 학생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학비를 모았고 아들 김천은 호텔 등의 공연을 도와주는 등으로 돈을 벌어 학비를 장만했다. 현재 김란은 길림성교향악단 바이올린연주가, 국가1급배우로 있으며 김천은 북경 《중국의 목소리》(中国好声音)의 기타연주를 맡고있다.
김숙자가 거둔 성공은 지난해 저세상으로 간 남편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을뿐만아니라 바이올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바이올린과 함께 한 그의 의력, 열정과 분투정신과 갈라놓을수 없다.
지금 김숙자는 장춘영화촬영소의 공연에 참가는외에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악대, 경제개발구조선족로인협회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고있다. 김숙자는 《바이올린연주가 로인들의 만년생활에 즐거움을 줄수만 있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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