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득 있으니 하겠지, 몰라줄때 제일 안타깝고》 《 돈 꾸어달라 할때 제일 딱합니다》
1, <<…달라>>는 줄전화에도 짜증을 모르는 오기철
지난 9월 27일, 기자는 작년 10월에는 전국소수민족참관단에, 올해 9월에는 중국장애자련합협회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 유일한 조선족대표로 참가한 왕청현배초구진봉림촌 촌민위원회주임(촌당지부서기 겸)오기철을 인터뷰를 했다.
이번 인터뷰를 기자는 그를 찾는 련속부절한 전화로 짜증을 겨우 누르며 참으며 요행 마무리를 지었다.
<<이는 처음 하는 속심말입니다>>
<<오주임, 또 3500원을 빌려 주세요…>>
아무튼 모든 전화는 오기철의 정상적인 사업전화외 거의 모두가 병자,고아, 약세군체들이 <<…달라>>는 전화였다.
<<사업을 해보니 농촌사업처럼 바쁜사업이 없습니다…>>
<<나는 대상의 마음을 아는데 대상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것이 너무도 안탑깝습니다.>>
<<심지어 일부 간부들마저 (그 사람이 호추(好处)가 없다면 그렇게 하겠는가? )며 후론을 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찾아 다니며 내 속을 뒤집어 보이겠습니까?>>
기자에게 처음 한다는 말의 계속이다.
-나한테는 봉림촌에서 나서 자란 20년 인정 밖에 아무도 없다. 봉림촌에 집이 있나 밭이 있나… 촌에서 일군을 하루 쓰면 120원을 주는데 내 일은 국가에서 발급하는 6000원 년금 외 모두 무상이다. 때론 일꾼들이 힘들게 했다고 내 몫을 품값으로 계산해 일꾼들을 더 주지만.
- 돈을 빌려 달라는것이 정말 딱하다. 나는 저금통장이 없다. 양돈수입은 거의 모두 약자부축사업에 돌렸다. 내가 빈곤부축을 하면서 빌려준 돈을 달라고 못한다. 줄돈은 있어도 빌려줄 돈이 없는것이 참 난처하다.
- 나도 바람은 있다. 나의 바람은 부거나 권력에 대한 바람이 아닌 내가 보통인간으로 세상에 태여 나서 사회에 필요가치를 얼마나 창조할수 있는가를 검증하려는 내인생가치에 대한 평가바람이다.
… … …
2012년 7월, 길림성농촌장애자사업대회에서 오기철의 발언을 들은 중공중앙위원이며 중국장애인련합회당조서기, 리사장인 왕신헌(王新宪)이 길림성성위서기 손정재가 그를 접견할 때 오기철의 사적을 특별히 곁드니 손정재는 그 자리에서 <<오기철은 진정한(实实在在的)도덕모범입니다.오기철사적선전을 잘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아무튼 봉림촌의 200여 가가호호 모두가 오기철의 덕을 봤다며 자랑한단다
2, 잊지 못할 그 시각
<<이 사업은 선두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번 대표대회분조(길림성과 흑룡강성이 한조였음)회의에서 한 오기철의 발언이다.
- 장애자부축사업은 선두자가 있어야 한다. 정부에만 의거하면 안된다. 전 사회의 힘을 빌어야한다.
- 농촌에 돌아와서 약세군체라고 잡고 보니 모두가 장애자들이였다. 나의 10여 년간 감수라면 이들을 <<수혈>>(补助)이 아닌 <<조혈>>을 할수 있도록 부축하는 것이다. 장애인들에게 몇 만원을 보조한다고 해도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부어 넣는 격으로 된다. 그들을 부축하여 자립의 길로 가게해야 한다.
오기철은 온 가정이 산속에서 17년간 오막살이 생활을 하다가 마을에 내려와 17살에 소학교1학년에 입학하여 25살까지 소학공부를 한 <<원시인>>, 지체장애자, 사회의 애물로 불리며 사람들의 기시를 받던 예민익(倪民益)을 <<보조→부축→자립>>으로 이끌어 <<무>>로부터 <<유>>로 이끌어 준 생동한 실례로 발언하였다.
<<새로운 형세하에서 장애자사업은 영광스럽고 책임이 중하다. 장애자사업은 인류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강불굴하는 내재적가치의 체현이며 사회적인 인도적관심과 문명진보발전의 수치가 담겨있는 사업이다. 우리는 마땅히 모든 장애자형제자매들과 손잡고 함께 분투하고 함께 발전하며 중국꿈을 실현하고 인류문명진보의 새로운 한 페지를 써내야 한다.>>
이는 오기철이 돌아와서 쓴 <<중국장애인련합회제6차대표대회출석유감(有感)(거대한 고무 영광스러운 사명)>>의 마지막 단락이다.
<<이제 3년이면…>>
오기철은 지난 15년에 해낸 일들을 회고하며 <<하도 하고 싶은일이니 해냈지 재교육을 받기 위함이나 농촌하방(下放)간부라는 신분이라면 당초부터 아름 차서 못했을것이다>>며 해낸 일을 반추했다.
오기철은 교회, 외국세력의 파견, <<머저리>>라는 등등 의심과 불신, 후론을 참고 이겨내며 <<나를 좋다고는 하면서도 비웃는 얼굴>>들과 웃음으로 참으며 지냈다고 한다. 자기가 귀향한후 진당위서기가 6번이나 바뀌였다며.
<<이제 3년이 남았습니다. 3년이면 제가 정년퇴직을 하는데다가 신통히도 촌민위원회주임 임기(6년)도 마감이 됩니다.>>
<<원래는 빈곤호만 대상하고 시작한 사업이 지금은 새농촌을 건설하는 중책에로 옮겨 졌으니 꼭 잘 해내야지요.>>
<<나는 1등밖에 모릅니다. 왕청현제1촌을 건설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이제 3년후면 검증됩니다. 꼭 감탄할겁니다.>>
정년퇴직후 또 하고픈 일이 있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우리 민족민속박물관을 꾸려보겠다는 꿈이 언녕부터 있었는데…>>라는 혼자말로 보기 좋은 웃음을 지어보일뿐 확답을 안했다.
3, 영예로운 사명을 지니고.…
<<이만하면 내가 세계기네스북에 오를수 있을가요?>>
오기철은 귀향후 남을 돕는데 쓴 사재(私財)가 얼핏계산해도 100만원은 될것이라고 하는데 수혜자들의 실제 조사에 따르면 140만원도 더 되였다. 그러나 독자들이 오기철이 생활에서 얼마만한 짠돌인줄은 아마도 모를것이다.
그는 술은 원래부터 못마셨고 귀향전까지는 고급담배만 피우는 <<담배지골>>이였는데 귀향후 (그 비싼 담뱃값이면 남을 돕는데 쓰겠다)며 금연을 했고 귀향하여 생일을 쇠지 않고 노래방과 다방을 멀리했다. 그가 부인의 용돈을 너무 밝히는 데서 종종 부부언쟁을 한단다.
오기철이 <<짠돌>>임을 이번 북경행차가 증명한다.
<<이번 출장에 집에서 준비를 잘 한 덕에 돈을 1전도 안 팔았습니다. 모든 교통비와 북경활동은 나라에서 부담했고 왕복기차내의 화식은 집에서 갖고 간 반찬, 면식, 광천수, 음료, 소시지를 먹다보니…>>
<<부인님, 이만하면 내가 세계기네스북에 오를수 없을가요?>>
이는 오기철이 북경에서 돌아와서 부인과 하는 롱조였다.
X x x x
7년전 필자는 유일석기자의 소개로 오기철을 알게된후 몇번 그를 인터뷰를했지만 그의 속심말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차려진 중책과 거물급명예는 그에 대한 편책이고 압력이다.
<<명심보감>>에 <<은혜를 베풀거든 그 보답을 구하지 말고 남에게 주었거든 후회하지 말라(施恩勿求報 輿人 勿追悔)>>는 명구가 있다.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기에 오기철에게는 아무런 바람과 후회가 없다.
오기철은 은혜를 베풀고 남에게 주는 일에서 생사사생(生事事生)하는 사람으로 성사사성(省事事省)를 모른다.
기자는 왕청현의 제1촌을 건설한 다음에 60을 시작으로 우리 민족의 민속박물관을 꾸려보겠다는 그의 꿈 너머 꿈이 실현되는 그날을 기대한다
길림신문 오기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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