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족원로시인 김철의 문학인생
중국조선족원로시인 김철
중국조선족원로시인이며 중국계관시인(1991년 수상)인 김철은 중국조선족문학사에 굵직한 한획을 그은 저명한 시인이다. 청춘시절부터 시(詩)의 녀신과 백년가약을 맺고 올해까지 60년 시농사를 해온 시인은 우리 조선족문단의 자랑이며 조선민족의 자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기천과의 만남 시인의 꿈 부풀려
학창시절부터 소설과 시를 좋아했던 시인 김철(1932년~)이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게 된것은 전화의 나날 조선의 유명한 시인 조기천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1950년 11월말, 제2차전역 장진호전투때의 일이였다.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폭격에 불탄 페허에서 책을 찾느라 뒤적거리고있던 그는 무너진 집터 벽체밑에서 불에 그을린 책 한권을 발견했다. 조기천의 시집 《백두산》이였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숙영의 길에서 적기의 공습을 피해 외투를 쓰고 전지불로 비춰가며 《백두산》을 탐독했다. 엄동설한의 추위도 잊은채 하루밤사이 그 책을 모두 읽은 그는 잠들수가 없었다. 조기천처럼 시인이 되는것이 그의 꿈이였다.
당시 통역으로 부대를 따라 이동하던 시인은 며칠후 함흥에서 멀지 않은 한 산골 외톨막집에서 조선인민군 어느 한 군단사령부와 함께 묵게 되였다. 그때 밤하늘에는 눈이 내리고있었는데 조선인민군 군단장이 문화지도원을 보고 시 한수 읊으라는것이였다. 그러자 그 문화지도원은 문을 열어젖히고 눈 내리는 밤하늘을 이윽히 내다보더니 즉흥시를 읊기 시작했다.
산에도 들에도 신작로에도
함박눈이 무너지듯 내리는 밤
어둠속에 어둑하니 서있는
기어코 뉘를 맞이하여
한많은 사연을 아뢸듯 고대하는
외로 남은 굴뚝에도
함박눈은 끊임없이 내리네…
-《죽음을 원쑤에게》
뒤늦게야 이 시를 읊고있는 문화지도원이 바로 자기가 그렇게도 동경해마지 않던 시인 조기천이라는것을 알게 된 김철은 솟구치는 흥분을 누를길 없었다. 그날 그는 자기가 존경해마지 않던 시인과 밤새는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얻을수 있는 시집은 모조리 보았고 짬만 있으면 시를 썼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영향으로 싹트기 시작한 문학에 대한 동경과 사랑은 이때로부터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적》을 창조한 김학철선생과의 만남
전쟁의 나날에 쓴 수백수의 시들로 2권의 자작시집으로 만들어 들고 그가 연변을 찾았을 때는 1953년, 스물한살 애숭이총각이였다.
그가 부대에서 제대할 때 동북군구 간부부 부장이 받는 곳만 있으면 곧 그리로 배치해주겠다고 약속하기에 순간적으로 짚이는 곳이 신문사였고 그래서 무작정 연길에 있는 《동북조선인민보》를 찾았다. 일면식 있는 사람이라곤 한분도 없는 신문사에 문뜩 뛰여들어 다짜고짜 취직하러 왔으니 받아달라고 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황당한 일인데 뜻밖에도 기적이 일어났다. 사장님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 알고있다는듯 어서 오라는것였다. 그통에 데꾼해진건 오히려 김철시인이였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뭘 믿고 받겠다고 하는지 전혀 알수가 없었던것이다. 뒤이어 그 비밀이 밝혀졌다. 저명한 소설가 김학철(1916년-2001년)선생의 《도움》이였다.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있는 김철, 방채봉 부부
시인 김철이 소설가 김학철선생을 알게 된것은 1952년 그가 지원군 문예대표단으로 북경에서 열린 중국인민해방군 제1차 전군문예경연대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그가 창작한 무용 《공병무》가 1등상을 탔는데 중앙문화부에서 보고회를 한다고 하여 전체 문예일군들이 어느 대회장에 모였었다. 바로 그때 김학철선생이 중국의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丁玲 1904년~1986년)과 함께 주석단에 앉아있는걸 보았던것이였다.
신문사 취직차로 연길행을 단행했던 시인은 김학철선생이 연변에 와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따라서 도착한 첫날 순수한 문학도의 심정으로 우선 김학철선생부터 찾았던것이다. 그를 통해 직장을 소개해달라거나 문단데뷔의 지름길이나 뒤문치기 같은걸 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냥 자기가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있는 작가님을 만나 조언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싶은 생각뿐이였다. 당시 연길시 신풍촌에 있는 전국로력모범 최죽송(1915년-1973년)농업사에서 생활체험을 하고있던 김학철선생은 그런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또 그가 내민 전선시초 두권을 자세히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며 진심으로 치하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틀후 신문사에 쫙 퍼질줄이야. 김학철선생이 장차 문화사업에 큰일을 할 젊은이가 시집을 가지고 자기를 찾아왔더라고 소문을 냈는데 그 말이 당시 신문사 사장으로 계셨던 리희일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갔던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원인이였다.
시인의 처녀작은 시가 아닌 소설
1953년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문필생활을 시작한 시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문기사와 문학창작에 정진했다. 실화문학, 소설, 시, 기행문, 수필, 펠레톤 그리고 평론에 이르기까지 문학예술쟝르와 신문론설문체에서 그가 손을 대지 않은 글이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중국조선족시화선집 출판기념식에 참가한 시인 김철(가운데)
신문사에 문예조가 선지 얼마 안돼 정부로부터 조선의 복구건설을 지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문예조에 있던 선배 두분이 자원해나가고 그가 혼자 1주일에 문예면을 한기씩 꾸려야만 했다. 이외에도 중요행사에는 통신문을 써서 주요지면에 공급해야 했고 따로 론설도 써야 했다. 시인은 그때가 가장 바빴지만 일할 멋이 났다고 말한다. 일요일이면 남몰래 일찍 공원의 조용한 곳을 찾아 열심히 시를 쓰기도 했는데 어느날 공원놀이를 나온 연변대학의 정판룡, 권철, 서일권, 림휘 등 친구들의 눈에 띄여 강제로 술을 마시고 대취한적도 있었다며 즐겁게 추억을 다독인다.
뜻밖에도 시인의 처녀작은 시가 아닌 《낟가리》란 제목의 단편소설이라고 한다. 당시 원고료로 60원이 나왔는데 월급이 40원 50전이였던 그한테 있어서는 그야말로 거금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그 《거금》은 본인이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문예조 조장에 의해 《한턱》을 쏘는데 《투입》되고 나머지는 전부 그한테 빌려주는것으로 《털려버리고》말았다고 한다.
이해 시 《지경돌》이 《동북조선인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며 시인은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이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농사에 구슬땀을 휘뿌려온 시인은 무려 38권의 저작을 내놓으며 장장 60년의 문단생애를 빛내기에 이른다.
시인의 본명은 김룡섭, 출생지는 일본
본명이 김룡섭인 시인은 1932년 8월 6일, 일본 시모노 세끼에서 태여났다. 4살까지 부모를 따라 일본, 대만에서 살던 그는 부모님의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에 돌아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중퇴했다. 1942년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한 그는 8.15 광복후 길림, 오상, 목단강, 룡정 등지를 피난다니다가 흑룡강성 해림현 신안진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시인은 교편을 잡던 도중 다시 고중에 입학했다. 고중시절 운동을 즐겼던 시인은 1949년 마라손선수로 연변과 흑룡강성에서 1등을 따낸데 이어 전 동북구에서 2등까지 따내며 전국대회 선수권자격을 얻었지만 조선전쟁 발발로 무산됐다.
단란한 한가족
1950년 그는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 군예술단에서 무용배우와 안무가로 활약했다. 1952년 그가 창작한 무용 《공병춤》은 중국인민해방군, 중국인민지원군 제1차 예술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전국순회공연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모택동주석, 주은래총리 등 당과 정부 지도자들은 중남해 회인당에서 그가 창작하고 출연한 《공병춤》을 관람하기도 했다.
1953년에 제대한 그는 《동북조선인민보》 기자로 취직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 시 《지경돌》이 《동북조선인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1956년에 그가 창작한 대합창 《장백의 노래(정진옥 작곡)》는 제6차 세계청년예술축전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때 그의 나이 24살이였다. 이후 많은 시집과 작품들을 창작해냈으며 길림성청년련합회 부주석, 연변청년련합회 주석도 맡아보았다. 허나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은 그한테 《반동권위》, 《조선수정주의특무》, 《반당반사회주의분자》라는 억울한 죄명들을 들씌웠고 그는 가지가지 죄명으로 투쟁을 받으며 5년이란 옥고를 치른다. 옥중에 갇혀있는 기간 장편서사시 《동틀무렵》을 구상했고 출옥해서는 《연변문예(<연변문학> 전신)》잡지사에 출근하면서 창작에 몰두, 련속 장편서사시와 서정시집들을 쏟아냈다. 이후 그는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비서장으로 발탁됐고 후에는 또 연변작가협회 주석과 연변문련 주석을 담임했다. 1983년에 중국작가협회로 전근하면서 중국 4대 문학간행물의 하나인 《민족문학》월간지 주필을 맡았다. 이 기간 또 중국민족작가협회 상임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전국 소수민족 문과대학을 꾸리는 등 문학인재 양성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사업의 수요로 중국작가협회에 전근한지도 어언 30년, 그동안 수도권에서 세계문화교류협회 중국본부 사무총장, 중국기업가문화촉진회 북경고려경제문화연구회 회장,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아시아문화교류협회 총고문, 국제GCS 중국본부 총재, 해외무역협회(OKTA) 부회장, 중국본부 회장 등 사회직무를 어깨에 메고 민족을 위해 한점 부끄럼 없이 많은 일들을 해온 시인은 지금도 《시》라는 말만 나오면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처럼 터지는 흥분을 눅잦힐줄 모른다.
[참고문헌]
《김철과 그의 시》-흑룡강인민출판사 최응구 저 (1981년)
《문학평론집》-민족출판사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1982년)
《김철시선집(1950~1987년)》-민족출판사 (1989년)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제2권《문학사》-민족출판사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1998년)
《끝나지 않은 인생드라마》-연변인민출판사 김철 저 (2000년)
길림신문 김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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