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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영원한 《빨찌산 녀전사》의 충성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7월3일 08시38분    조회: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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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민

흑룡강성 전임 정협부주석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민녀사의 이야기

 

 

2008년 6월, 항일련군 복장차림으로 항일련군 유적지를 찾은 리민녀사(자료사진).

리민 프로필

1924년 11월 5일 흑룡강성 탕원현 오동하촌에서 출생, 조선족

흑룡강성 전임 정협부주석,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해방전쟁시기인 1948년 8월 1일, 당시 동북야전군 사령관이였던 림표로부터 《동북해방기념》 훈장 수여받음

독일의 히틀러가 투항한 후인 1945년 7월, 쏘련지도자 쓰딸린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기념장》 수여받음

쏘련지도자 쥬꼬브로부터 《반파쇼전쟁기념》 훈장 수여받음

1995년 쏘련 예르친대통령으로부터 《(1945-1995) 반파쇼전쟁 승리 50주년 기념》 훈장 수여받음

2005년 로씨야정부로부터 《반파쇼전쟁 승리 60주년 기념》 훈장 수여받음

2005년 중국 호금도주석으로부터 24K 금으로 제작한 《(1945-2005)반파쇼전쟁 승리 60주년 기념》 훈장 수여받음

남편인 흑룡강성 전임 성장 진뢰와 함께 조선 김일성주석 80주년 생신에 초청돼 조선에 가 김일성주석과 함께 축수상을 받음

제1부 항일련군유적지 답사 및 정신 고양

흑룡강성 소흥안령 밀림속 의란현 단청하림장에 위치한 1930년대의 동북항일련군 유적지, 당창건 92돐을 맞아 7월 1일, 흑룡강성 의란현당위에서는 이곳에서 《항일련군의 길 답사 및 항일련군가곡석비 제막식》을 가졌다.

행사에는 의란현 당위와 정부, 인대, 정협 지도부 전체 성원들과 현내 37개 국 당위 책임자들 그리고 전 현적으로 이번 7.1을 맞아 새로 입당한 신입당원 대표 도합 14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흑룡강성 전임 정협 부주석이고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였던 리민녀사가 이끄는 항일정신선전대 대원 17명까지 참가해 의란현 전체 지도부일군들이 항일의 정신을 되새기는 의미를 더욱 깊게 했다.

이날 행사는 항일련군유적지 산길을 답사하면서 진행됐다. 산길에는 항일련군들이 사용했던 우물터가 물이 고즈넉이 고인채 있고 중공북만성위 림시회의실 동굴도 있었다.

산길 정상에 위치한 《월량문》 석벽에는 리민녀사가 30여년전인 1980년에 답사를 왔다가 새긴 《개선문》이라는 글자도 색을 바랜채 어렴풋이 보인다.

답사과정에 답사자 일행은 《항일련군영웅기념비》 앞에 이르러 항일련군영웅들에게 묵도, 화환 증정, 신로당원 입당선서를 했다.

 

 

《항일련군영웅기념비》앞에서 숭엄한 마음으로 항일련군영웅들의 정신을 기리고있는 리민녀사(앞줄 우측 네번째)와 행사참가자들.

항일련군 6군 림시병원 유적지 동굴앞에 이르러서는 《항일련군가곡석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제막한 《항일련군가곡석비》에는 리민녀사가 수집한, 당년 항일련군들이 불렀던 《숙영의 노래》와 《산나물채집가》가 각각 새겨져 있고 그옆에는 리민녀사가 쓴 제사 《홍색4개석산(红色四块石) 항일련군숙영지(抗联军营地)》가 새겨져있다.

 

 

7월 1일 제막한 《항일련군가곡석비》

제막식에서 리민녀사는 1937년 이곳에서 있었던 항일련군의 력사를 회고, 행사 참가자들에게 항일련군의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의 유지를 후세대들에게도 전해줄것을 부탁했다.

그녀의 그 강직하고 격정적인 목소리는 소흥안령 밀림속에 울려퍼졌고 순간 장내는 90세(우리 나이)로인의 간절한 부탁에 열렬한 박수로 화답, 젊은이들의 눈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이어 리민녀사가 이끄는 항일련군정신선전대의 공연이 있었다.

당년 항일련군이 입었던 복장차림으로 다리에 각반까지 두른 이들은 이날 《동북항일련군 제6군》, 《동북항일련군 제3군》, 《동북항일련군정신선전대》 기발을 휘날리며 합창《숙영의 노래》, 무용 《산나물채집가》, 《대렬훈련》, 동북항일련군 군급장군 10명의 유상을 들고 하는 합창 《전우들을 그리며》 등 여러 가지 종목들을 공연했다.

리민녀사가 공연의 주역이였다.

 

 

공연에서 앞장서 항일련군 《대렬훈련》을 재연하고있는 리민녀사.

 

 

합창 《전우들을 그리며》를 통해 당년의 전우들을 목청껏 불러보는 리민녀사(앞줄 우측 네번째).

공연이 끝난 후 있은 연설에서 의란현당위 부서기 서석성은 의란현은 항일련군영웅들의 유지를 세세대대로 이어갈것이라고 밝히고나서 리민녀사가 흑룡강성의 해방과 사회, 경제 건설에서 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그것은 인구 40만명밖에 안되는 한 산골현당위 부서기의 평가만이 아닌 흑룡강성 전체 인민들이 리민녀사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다.

제2부 공화국창건의 불굴의 녀전사

항일녀전사

어려서부터 가정의 영향으로 항일선전대에 가입했던 리민은 1936년 겨울, 일본관동군과 중국만주군의 추격, 체포로 산에 올라 동북항일련군 제6군 4사에 편입, 산속 밀영의 복장공장에서 군복을 짓고 야전병원에서 간병원으로 근무했다.

1938년 1사에서 선전원, 전방구급원, 기관총반 전사로 되여 쌍압산 칠성봉 전투, 과회산전투, 보청전투, 부금전투, 화남, 화천, 발리 전투 등에 참가했다.

1938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밀림의 이야기

눈보라가 쌩쌩 기승을 부리고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던 1938년 겨울, 일본관동군과 위만군의 토벌에 하루종일 적들과 싸우던 항일련군은 숱한 희생을 내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해산한지 두달밖에 안되는 중공당원 김봉수(조선족)를 비롯한 4명의 녀전사들은 퇴각하다가 뒤로부터 쫓아온 적들 기마병에게 포위되여 끌려갔다.

그날 녀전사들의 앞장에서 퇴각로를 열던 리민은 적들의 포위에서 벗어날수 있었고 이틀밤, 하루낮 동안 산속을 달려서 겨우 부대를 찾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1년, 쏘련 극동(하바롭쓰끼)홍기군 88특별려(항일련군)에서 위만군으로부터 투항해온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3년전 항일녀전사 4명을 체포해간 그 위군이였다.

그에 따르면 4명 녀전사들은 위군 주숙지에서도, 이동과정에도 항일노래를 불러 위군들의 민족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들의 영향으로 결국 위군 71명은 일본관병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켜 항일련군에 투항했다.

70여년이 흐른 오늘도 그 이름, 그 얼굴 생생해 그리운 전우들, 그녀들의 생사는 지금까지 알길이 없다. 그때 그녀들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

아버지 오빠 항일렬사

리민의 아버지는 일본침략후 지하당사업을 하다가 일위군의 토벌에 쫓겨 산에 올라 항일련군에 가입, 6군 1사 후근처 처장을 맡아 부대에 량식을 수송했고 1939년 특무의 밀고로 적에게 체포돼 맞아죽었다.

항일련군이였던 리민의 오빠는 1942년 쏘련홍군의 공격에 앞서 항일련군의 파견을 받고 귀국, 중국위만군에 대한 정찰활동을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돼 비밀리에 살해되였다.

쏘련에서의 학습과 훈련

1942년 리민을 포함한 중국 북만(동북)항일련군은 쏘련 하바롭쓰끼에 야영지를 건립하고 쏘련원동홍기군 88특별려로 개편되여 그곳에서 일본침략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태 유격전에만 익숙했던 리민은 그곳에서 정규군의 전략전술을 배우고 현대화무기 사용법을 배우며 전부 무장한채 공정부대 건설과 공중락하훈련, 수영도강훈련, 스키훈련을 받으며 수륙공격 준비를 해나갔다.

뿐만아니라 중공당사와 쏘공당사 등 정치리론도 배우며 리민은 현대군인으로 거듭난다.

제3부 두 전사의 아름답고 영원한 사랑

결혼

리민이 항일련군에서 지식있고 진취적인 진뢰청년(한족)을 만난것은 1938년 봄.

몰락지주가정에서 태여난 진뢰는 1936년 중공당원에 가입, 지하당사업을 하다가 일본관동군의 체포를 피해 항일부대를 찾아 입산, 6군에 가입했다.

6군 군부에서 그는 당위 총지서기, 조직부장 겸 군부 정치교도관으로 전사들에게 강의를 했고 그때 리민은 학생이였다.

제3로군 총지휘인 리조림을 따라 스키를 타고 동북에 갔던 진뢰는 1942년 3월, 항일전선에서 적들의 사격에 손동맥이 끊어나자 피가 콸콸 쏟아지는 팔의 동맥에 나무가지로 솜을 쑤셔넣고 전투를 계속했다.

당시 쏘련에서 간호학을 공부하면서 군부 위생소에 근무하던 리민은 중상입고 돌아온 진뢰를 치료해주었다.

그후 또다시 전선으로 떠나는 진뢰에게 리민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가 직접 코바늘로 떠서 쓰던 세면주머니를 선물했고 감동된 진뢰는 일본군 전리품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숙영지에서 불군 하던 자기의 귀중한 물품―하모니카를 리민에게 선물했다.

오늘까지 지난 71년 세월동안 고이 간직해온 세면주머니와 하모니카, 4년전 기자가 할빈 리민녀사 댁을 찾아 인터뷰했을 때 녀사께서 기자앞에 내놓은 세면주머니는 이미 낡고 삭아서 일부 코가 떨어졌고 하모니카의 빛갈도 부옇게 바래져 있었다.

1943년 또다시 쏘련에 돌아온 진뢰는 88려 정치부 비서로 문서사업을 하게 됐다.

그해 11월 23일, 진뢰와 리민의 관계를 알게 된 조직에서 나무껍질로 벽을 막은 반 지하 작은 단칸방을 그들에게 내주어 신혼방으로 쓰게 했다.

리민이 녀전사들에게 등을 떠밀려 영문도 모른채 신혼방에 들어갔을 때 나무껍질 사이로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벽을 신문지로 바르고있던 진뢰가 리민을 깊이깊이 포옹해주었다. 그때 리민의 나이 19살, 진뢰는 25살이였다.

위생소 가제를 줄줄이 바느실로 이어 창문보로 했던 그 작고 허름한 방.

기자가 4년전인 2009년 9월, 할빈 리민녀사의 댁을 찾아 인터뷰했을 때 리민녀사는 기자에게 당년 신혼때를 회억하며 《내 평생에 그같이 예쁘고 아담한 방은 없었다》고 행복에 겨워했었다.

일제에 대한 반격과 후방건설

한편 쏘련에서 현대군인으로 거듭난 리민은 1945년, 340명의 항일련군 전사들과 함께 세번째패로 파견을 받고 쏘련홍군 제1, 제2, 제3 방면군과 함께 중국의 흑룡강, 우쑤리강, 대흥안령 등지로부터 동일시간대에 진격하여 일본침략자에 대한 총 공격을 개시한다.

당시 쏘련에 있던 대부분의 조선족 항일전사들은 김일성을 따라 조선으로 갔는데 리민녀사는 남편을 따라 무선전보원으로 중국 동북으로 건너온것이다.

쏘련홍군 수화위수구 부사령원이였던 남편 진뢰는 수화지구를 점령하고 토비까지 숙청하면서 중공수화지구 지위서기로 임명됐고 리민은 선전사업을 맡아했다. 그들 부부는 기타 3명과 함께 수화지구의 건군, 건당 사업을 맡아했고 해방전쟁시기에는 생산을 발전시켜 후방근거지를 건설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속에서 그들은 감격의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맞게 된다.

후에 남편 진뢰는 중공 흑룡강성위 부서기, 흑룡강성정부 성장으로 고위공직에 오른다.

청렴했던 고위관원

리민과 진뢰 부부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그들 부부가 성민위 주임, 성정협 부주석, 성당위 부서기, 성정부 성장이라는 고위공직자임에도 그들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공직과는 거리가 먼 일반 직장생활을 하고있고 출국해본적도 없다.

맏이인 딸은 현재 상해 모 방직품염색공장에서 꽃천설계를 하고있다. 큰아들은 능력이 있어 사람들이 성당위 조직부장 자리에 추천하는것도 그들 부부가 거절했다. 큰아들은 끝내 공직을 버리고 하해했고 현재 심수의 한 회사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고있다. 작은아들도 현재 남의 회사에서 일하고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우리들의 선택은 옳은것 같다. 특히 탐관으로 감옥에 간 자식이 없어 생활이 안정되여 만족한다.》

4년전 있었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리민녀사는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터놓기도 했었다.

제3부 새중국건설의 우수한 민족간부

민족사업에 혼신 바쳐

건국후 리민주임은 선후하여 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성정협 부주석직을 맡았고 그 직무에 충성과 열정을 다했다.

문혁기간 진뢰성장은 물론 리민주임도 억울하게 《쏘련간첩》 모자를 쓰고 5년간 감금되여 모진 고초를 다 겪었다.

리민이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재직시기(80년대 초) 흑룡강성에는 오르쳔족, 다우르족, 허저족, 몽골족, 회족, 바이족, 조선족 등 소수민족 30여만명이 소수민족 촌, 향을 이루고 살고있었다. 특히 오르쳔족, 다우르족, 허저족 등은 문화수준이 낮고 경제가 락후하며 생산할줄도 모르고있었는바 그들은 고기잡이거나 사냥, 양, 소 사육 등으로 겨우 연명하는 상황이였다.

그들을 이러한 상황에서 해탈시키기 위해 리민주임은 전 성내 소수민족 마을마다 지어 십여호밖에 안되는 로씨야국경의 편벽한 산골짜기마을까지 찾아다녔다.

하루빨리 그들의 문화수준을 제고시키고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리민주임은 각 소수민족촌마다에 소학교를 건립하고 향에 중학교를 세웠으며 성민위 산하에 성민족간부학원과 민족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촌의 소수민족간부들을 양성했다.

리민주임은 고기잡이, 사냥으로 겨우 연명하며 농사지을줄 모르는 오르쳔족 등 경제가 락후한 소수민족 촌과 향의 간부들을 이끌고 타촌에 가 농사와 림지경영 등 생산활동경험을 학습하게 함과 아울러 직접 소수민족촌의 촌민들을 이끌고 대흥안령에 들어가 벌목하고 버섯 등을 따 팔아 수입하게 했다.

리민주임은 백방으로 국가투자를 쟁취해 각 소수민족촌마다 새로 벽돌기와집을 짓게 했다.

당시 소수민족 마을마다에는 전기가 없어 해가 떨어지기만 하면 온 마을이 칠흙같이 어두었다. 그런 소수민족마을에 리민주임은 전기를 전부 끌어들였다.

그녀는 전 성 20여개 조선족마을을 일일이 찾아가보았고 지어 흑하의 편벽한 산골 10여호밖에 안되는 조선족마을에도 찾아가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특히 리민주임은 흑룡강성 조선족들의 뒤심이 되여 조선족단위의 건설과 자금조달 문제들을 일일이 해결해주었다.

소수민족이 우매하고 락후한 원인은 결국 편벽한 고장에서 사는 환경탓이라 여긴 리민주임은 해마다 여름방학때면 각 소수민족촌 소학교 2학년 이상 학생들을 대도시 할빈시와 외지사람들이 많이 오는 경박호에 불러다 하령영행사를 가지고 여태 기차도 보지 못한 그애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흑룡강성 소수민족들에게 있어 그녀가 성민족종교사무위원회 주임으로 부임돼 있은 기간은 실로 천지개벽의 시기였다.

여생을 항일정신 전수에

67세에 리직한 리민녀사는 리직후 오늘까지 23년간, 항일전쟁 14년의 정신 전수와 고양에 열과 성을 다하고있다.

그녀는 선후하여 항일전쟁시기 널리 불렸던 항일가곡들을 수집하고 항일련군에서 불렸던 노래, 팔로군, 신사군에서 불렸던 노래, 외국가곡 등 도합 205수를 정리하여 동북항일련군가곡집(교재)을 편찬해냈으며 할빈시로인대학에 성악반을 꾸리고 항일가곡들을 배워주기도 했다.

2002년에는 생존해있는 로항일련군전사들과 이미 퇴직한 항일련군렬사들의 아들딸, 손자손녀들로 항일가곡선전대를 설립하고 흑룡강성내 각 대학교들에 가 대학생들에게 항일의 노래와 춤을 공연하며 항일정신을 전파했고 여러 기관과 가두에도 내려가 공연, 성내 60개 현과 시, 대흥안령의 림산작업소와 로북국경지역에까지 찾아가 공연했다.

리민녀사는 대학교, 기관, 가두에 가 항일련군 분투사와 항일정신을 강의하기도 한다.

2004년 10월 27일에도 2008년 6월에도 그는 항일련군 후손들과 항일정신선전대원들을 이끌고 산속 동북항일련군 유적지들을 답사하면서 동북항일련군 14년간의 분투사를 널리 선전했다.

리민녀사는 또 흑룡강성 경박호유람지내에 있는 항일련군유적지에 항일의 노래들을 새긴 석비 10개를 박았고 이번에 의란현 경내에 있는 항일련군유적지에도 항일의 노래들을 새긴 석비를 박아 제막, 항일정신이 세세대대로 전해내려가게 했다.

맺는 말: 녀사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7월 1일에 있은 항일련군유적지답사에서 리민녀사는 90의 고령임에도 길이 1500메터, 해발 980메터의 산길을 젊은이들 못지 않게 씽씽 올라 감탄을 자아냈다. 산 정상에 올라서는 젊은이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수고했다》고 치하했다.

의란현 지도일군들과 함께 항일련군유적지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있는 리민녀사.

4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리민녀사는 아직 젊은 날의 고움과 깨끗함, 전선에서 단련된 탄탄하고 매력적인 몸매, 강직한 성격과 힘찬 목소리, 비상한 기억력과 체력을 과시하고있었다.

《힘드시지 않으셨어요?》

항일련군유적지답사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기자가 물었을 때 리민녀사는 《내가 하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조금도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전쟁년대에는 목숨걸고 싸워 공화국창립에 기여했고 평화시기에는 당과 정부, 인민에 충직했던 리민녀사께 기자는 깊이깊이 머리숙여 인사올리고 장춘으로 향한 차에 올랐다.

녀사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사진 박명견습기자
길림신문 김정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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