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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독립군
2008년 05월 11일 21시 41분  조회:6817  추천:115  작성자: 우상렬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독립군


우상렬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나는 독립군하면 총이나 들고 싸운 홍범도나 김좌진 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홍범도나 김좌진을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 우러러 마지않았다. 그런데 퍼그나 오래 전의 얘기로 한국 양반의 고장-안동의 안동대학교의 양반 선비 안병렬 교수가 우리 과에 교환교수로 와서 한 얘기에 눈에 번쩍 띄었다, 우리 조선족의 글 쓰는 양반들이야말로 진짜 독립군-문화독립군이란다. 그래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말로 창작을 하며 우리 얼을 지키는 일이 독립군이 아니란 말인가? 제2독립군, 문화독립군... 그럴 듯 했다. 나도 몰래 어깨가 올라가는 일이련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기라성 같은 문화독립군들이 있다. 나도 몰래 숙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자, 그럼 문화독립군들의 행방을 좀 찾아가봅시다. 우리 같이 그들과 부둥켜 안아보고 그들의 체취를 느끼며 울고 웃어봅시다. 

  그런데 누구부터 만나보지요? 워낙 기라성 같은 많은 존재들이라! 아무래도 중국 조선족 문학의 정초자로서 쌍벽을 이루는 김창걸과 이욱부터 만나보는 것이 예의인줄로 압니다.   

  김창걸(1911―1991)은 일찍 위만주국시기부터 용정 장재촌, 명동촌을 무대로 문학창작을 진행했다. 그의 작품은 조선이주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깃들어있다. 땅 없고 힘없고 돈 없고, 모든 것이 없는 서러움뿐이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성실하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단편소설「암야」를 보면 바로 가난이 청춘남녀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짓밟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명손이는 결국 사랑하는 처녀 고분이를 데리고 ‘암야’를 헤치며 ‘광명’을 찾아 나아간다. 이 작품의 낭만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중국 조선족 이주先人들의 삶의 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스트라이크」등은 당시 용정 시내 학교들에서의 학생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잘 반영되어 있다. 김창걸의 이런 소설들은 그 자신의 삶의 체험의 문학이었다. 그래서 그 작품의 배경도 그가 실제로 살았던 장재촌이나 공부하고 활동했던 용정시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재촌은 윤동주의 고향으로 많이 알려진 명동촌과는 삼합으로 가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비스듬히 동쪽으로 한 2리 상거해 있다. 장재촌은 스님의 신비한 위력에 결국 큰물에 ‘못 된 부자’ 집은 큰물에 잠기고 금기를 어긴 ‘착한 며느리’는 돌로 굳어지고 마는 비극적 색채가 없지 않아 있는 조선에서부터 지니고 내려온 ‘장자못 전설’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마을은 당시 북간도 이주민들 사이 민간대통령으로 떠받들리기도 한 김약연이 조선반도 모양을 본 따 터를 잡았다 한다. 그만큼 민족적 정서가 강했던 곳이다. 당시 명동촌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김창걸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인 올곧은 정신을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 신사참배, 국책창작 등 여러 방면으로 압박을 가해오자 단연히「절필사」를 쓰고 붓을 꺾는다. 그에게는 워낙 게발라 맞추기 하고는 거리가 먼 민족적 자존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추호도 일제에 영합하거나 아부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윤동주와 더불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이 면에서 실로 그는 정도부동하게 다다소소 ‘친일’의 냄새가 나는 글을 쓴 많은 동시기 다른 작가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히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장재촌 북녘에 우뚝 솟아 있는 선바위임에 틀림없다. 그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우리 연변의 누구나 다 아는 선바위-이 세상 둘도 없는 하늘이 내린 가장 훌륭한 김창걸기념비다. 그러나 이 하늘이 내린 기념비에만 내맡기는 것으로 우리는 성 차지 않는다. 그래서 별도로 우리 후배들의 예의를 차리는 차원에서 이 선바위 기슭에 다시 ‘김창걸선생문학비’를 세웠다. 광복 후 김창걸은 연변대학교가 서자 우리 조문학부의 교수로 부임한다. ‘글짓기’로부터 ‘문학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종 ‘通才’적인 재간을 발휘한다. 그러면서 절필했던 붓을 갈고 닦는다. 그의 문학창작도 이제야 마음껏 꽃피는가 싶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부터 터진 반우파투쟁 된서리가 이 꽃을 미처 피지도 못하게 덮쳤다. 무슨 민족주의분자. 그러나 선생은 함경도 사나이의 뚝 밸 하나로 그 모진 정치풍파를 이겨냈다. 그러나 창작의 아까운 좋은 시절은 그만 속절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인생 무상과 허무로만 취급하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못해 억울하다.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영광스럽게도 김창걸 선생의 존안을 우러러 한두 번 보았다. 그때 선생은 이미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고 지팡이에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선생은 인생말년, 세상을 뜰 때까지 내내 병환에 계셨다.

  이욱(1907-1984), 김창걸이 단편소설로 중국 조선족 문학을 정초지었다면 이욱은 시로 그런 작업을 했다. 이욱은 정초자답게 중국 조선족 문학에 있어서 ‘최초’의 몇 개를 독점한다. 일찍 1924년에 처녀작「생명의 례물」을『간도일보』에 발표하였으며 1947년 광복직후 최초로 개인시집『북두성』을 출판하였고 1956년에 북경에서 최초로 중국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되었으며 1957년에 최초로 북경 작가출판사에서 중문시집『장백산하』를 출판하였고 최초로『중국현대문학사』의 한 폐지를 장식하였다.「님 찾는 마음」(1930),「송년사」(1935),「금붕어」(1938) 등 광복 전 이욱의 서정시는 민족적 특성이 짙고 낭만주의색채가 진한 것으로 평가된다. 새 중국 성립 후 이욱은 연변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많은 시를 쓴다.『고향사람들』(민족출판사 1957),『연변의 노래』(작가출판사 1957),『장백산하』(작가출판사 1959) 등 시집들을 출판했는데 사회주의 사실주의 경향으로 흘렀다.『고향사람들』은 중국 조선족 문학의 장르상의 특색을 나타내는 최초로 서사시로 된다. 이는 이욱 시창작의 고봉을 이루며 건국 후 중국 조선족시문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이정표로 되는 성과적으로 꼽히고 있다. 이욱은 높은 수준의 한시도 능란하게 써서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그는 일찍 어릴 때 조부의 슬하에서 ‘사서오경’과 절구를 배웠던 것이다. 이욱은 해방 전에 주로 절구를 썼으나 간혹 율시를 쓰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대체로 詞를 썼다. 유고로 남긴 한시집『협중시사』에는 108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한시에 대해 중국 연변대 김동훈 교수는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로, 한국 숭실대 조규익 교수는 ‘그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의 시비는 두만강가 화룡현 로과향 호곡령 정상의 애나무숲속에 우뚝 세워져있다. 아마 이 시비는 중국 조선족 문인들 가운데 최초로 세워진 줄로 안다. 이 시비는 호곡령 아래로 흐르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 무산시를 마주보고 있다. 시비에 새겨진「할아버지 마음」, 그것은 ‘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은 그런 편안한 자연의 마음이다. 돌고 도는, 그러면서도 항상 새 희망이 넘치는 그런 자연의 순리대로 가는 마음은 초탈 경지의 할아버지의 편안한 마음이다. 1957년 무자비하고 삭막한 좌경바람이 부는 세월에 이렇게 편안한 시를 써냈다는 것이 참 기적처럼 생각된다.

  김창걸과 이욱-두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초자, 이들은 연변대학교의 성립과 더불어 우리 조문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에게는 일단 다른 것을 다 떠나 선배교수님이고 원로교수님이 시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내 손은 떨린다. 사실 나뿐이 아니고 우리 과의 모든 교수님들은 이들로 하여 더 없는 영광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듬뿍 담아 두 분의 초상화를 학과 회의실 바른 벽에 정중히 모셔 놓았다. 오늘도 김창걸 선생은  바른 자세에 사나이 일언중천금의 꾹 다문 입을 한 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이욱 선생은 오른 쪽 팔을 오른 쪽 턱 가장 자리에 고인 채 정답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사실 우리 학과 회의실에는 몸을 좀 비스듬히 튼 채 우리를 보고 환한 웃음을 하고 있는 또 한 분의 중국 조선족 문화독립군이 있다. 그 이름은 정판룡이렸다. 말을 꺼낸 김에 정판룡 프로필로 들어가자. 내 은사님이니깐 먼저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찌하랴.  

  정판룡(1931-2001), 나는 일단 그분의 총기에 꺼벅 죽고 만다. 중학교를 졸업할까 말까하고 고등학교를 훌쭉 뛰어넘어 16세의 최연소 나이에 연변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다. 어린 나이에 공부도 쟁쟁하게 잘 했단다. 그리고 수석으로 졸업해서 학교에 교수로 남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중국 정부에서 조직한 구소련 국비유학시험에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합격하여 모스크바대학에 유학을 간다. 중국의 전 총리를 맡았던 李鵬하고 동창생이 되었다. 사실 생긴 거는 '별로' 같은데 얼마나 공부를 잘 하고 똑똑했으면 문학 준박사 학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같은 중국 유학생으로 전형적인 중국남방미인 타입인 王愈 사모님까지 턱 차고 금의환향한다. 이런 젊은이를 두고 앞날이 탁 트인 전도유망한 젊은이라고 하리라! 중국 사회과학원 등등 북경의 일류의 모모한 기관에서 프러포즈를 한다. 그러나 그분이 선택한 곳은 결국 연변대학교였다. 그분 문학비 정면에 우리말로 새겨진『고향 떠나 50년』에서 절록한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초 연길에 살구꽃, 배꼿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리 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렬차에 앉았다'를 보라. 나는 그분의 진정이 어린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코마루가 찡해나고 가슴이 아련히 젖어난다. 연변대학교는 내꺼, 누가 뭐라도 나는 연변대학교를 지킬꺼야 하는 사명감이 절로 살아난다. 그분은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만큼 일단 학자로서 문학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외국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문학, 나아가서는 남북한 문학을 아울러 종횡무진으로 연구를 하고 평론을 하셨다. 사실 문학창작은 만년에 분망한 대학교 총장 보직을 그만두고 좀 한가해진 후 늦깍기로 시작했다. 그 주요 결실의 하나가『고향 떠나 50년』, 가장 자연스럽게 씌여진 글. 고향 떠나 50년의 숨 가쁜 인생살이가 가식 없이 소박하고 텁텁하게 엮어져 그 사람 그 식으로 감동을 준다. 우리가 이 감동에 흠뻑 젖어 있을 때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잃은 허탈감을 조금이나 달래고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그분이 한평생 몸 바쳐 온 연변대학교의 뒤 산으로 불리는 와룡산 양지바른 언덕에 2004년 서거 3주기에 기해 장방형 모양의 아담한 문학비를 세웠다. 

  채택룡(1913-1998년), 중국 조선족 아동문학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일찍 카프시기, 위만주국시기부터 주옥같은 동요동시를 창작해왔다. 세상은 암흑했어도 그의 마음은 항상 갓난 아기들처럼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그의 동요동시는 바로 그의 이 깨끗한 마음의 발로였으리라. 그런데 그의 이 깨끗한 마음으로 이 풍진세상을 살기에는 방어기제가 없어 너무 갸날펐다. 그래서 1950년 말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이 벌어질 때 연변에서 김학철과 같이 최초의 우파동지가 되기도 했으리라. 바로 이 우파가 되면서 우리의 천재적인 아동문학가는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그의 작품도 우파되기 전까지로 한하고 만다. 이 안타까움을 달래고자 연변아동문학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에서 중의를 모아 2004년 연길시인민공원 동쪽가녘에 펼친 책모양의 '채택룡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에 새겨진「병아리」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기념을 가름하려 한다.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
아장아장 걸음 익히나
요리조리 조약돌 넘어
깡충깡충 재주피우나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
땅을 쪼아 아빠 흉내내나
엄마등에 갸우뚱 올라
포득포득 재주를 넘나

'병아리'를 상징체로 귀여운 아이들의 커 가는 모습 그 자체를 감칠맛이 나게 잘도 그려냈다. 그것도 동심의 시각에 비쳐 하나로 녹아들게 함으로써 동요동시로는 일단 성공을 하고 있다. 

  김학철(1916~2001), 중국 조선족문학의 확립자, 정신적 대부-‘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그의 임종 유언.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답게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이 풍진세상과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다. 일본제국주의, 독재, 사회의 부정부패... 이런 것들와의 가차 없는 투쟁과 비판이 그의 문학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했다.『격정시대』, 일본제국주의와 총 들고 싸운 조선의 건아들-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번한 조선의용군의 영원한 기념탑을 세웠다.『20세기신화』, 감히 ‘임금님은 옷을 벗었다’고 말한 어린이 같은 희대의 사나이. 관본위, 관료주의 행태를 여지없이 풍자한 ‘인육병풍’을 비롯한 일련의 ‘투창과 비수’ 같은 잡문들... 적어도 우리 연변은 그의 잡문들로 해서 많이 정화된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하여 얼마나 허전한 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김학철문학연구회’가 발족되고 그의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김학철에 관한 것은 ‘김학철문학연구회’의 사이트 에 들어가 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다 약하도록 하고 그의 기념비 두 개만 소개하는 것으로 가름하도록 하자. ‘김학철문학비’, 도문시 장안진 경내 생태문화관광구로 유명한 龙佳美苑에 삼각형 모양으로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우리 연변의 유명한 민족적 화백 필충국 선생이 전적으로 사재를 털어 세운 것이다. 

   ‘金學鐵抗日文學碑’,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최초로 한국의 실천문학사 김영현 사장의 구상과 발의 하에 중국과 한국의 여러 기관이나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추진되었다. 문학비제막식은 2005년 8월 5일 오전, 하북성 원씨현 흑수하향 호가장촌에서 국내외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그럼 왜서 이 호가장이냐하면 이 호가장은 바로 김학철을 비롯한 조선의용군 한개 분대가  1941년 12월 12일 새벽 일본군들과 격전을 벌이던 곳이다. 김학철은 이 격전에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는다.『격정시대』도 바로 여기서 끝난다. 그럴진대 이 태항산마루 역사적 현장에 金學鐵抗日文學碑를 세우는 것은 더 없이 뜻 깊은 일이다. 金學鐵抗日文學碑는 龙佳美苑의 김학철문학기념비와 마찬가지로 모를 많이 살려 김학철의 그 날카로운 작가적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여 좋았다. 金學鐵抗日文學碑와 나란히 역시 조선의용군 출신이고 이 태항산마루 항일전적지와 인연이 깊은 장편기행문『노마만리』를 쓴 김사량의 ‘金史良抗日文學碑’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사실 김창걸, 이욱은 광복 전부터 줄곧 이 땅에서 창작을 하며 중국 조선족의 문학전통뿐만 아니라 광복 후에는 한국과도 다르고 조선과도 다른 중국 조선족 문학의 ‘향토’적 특색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중국 조선족 문학전통을 논의할진대 우리는 두 젊은이-윤동주와 심련수(이들은 안타깝게도 광복 착 전 20대의 꽃 같은 나이에 희생되었다)를 잊을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다. 그래 윤동주 하면 우리 민족의 구성원치고 누가 모른단 말인가? 용정 명동의 윤동주생가, 용정 동산중앙묘지의 윤동주묘소... 그런데 심련수에 대해서는 ‘아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잘 모르는 분들이 있으리라. 워낙 심련수는 새 천년 벽두에야 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말이다. 심련수의 유고가 오지단지에 넣어져 세월의 풍파를 피해 장장 50여년이나 땅 밑에 파묻혀 보관되어 오다가 그의 동생 심호수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심련수는 또 다른 하나의 혜성으로 떠올랐다. 가히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며 우리 중국 조선족 문단 내지는 세계 한민족문학사에서 한 폐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한국의 문학평론가 임헌영을 비롯한 뜻 있는 분들의 노력 하에 용정 실험소학교 캠퍼스에 심련수시비가 세워지기도 한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현재진행형이다. 문화독립군들은 오늘도 붓을 갈고 닦는다. 이 땅에 이 겨레가 있는 한 영원한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 그럼 아직도 청춘의 정열로 주옥같은 시편을 토해내고 있는 원로시인 조용남의 기념비적 작품「반디불」과「비암산의 진달래」를 감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 치면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한들한들 온다야

     반짝반짝 반디불
     오다가도 간다야 
     얼른 쫓아 잡아라
     불이 깜박 꺼졌네

     반짝반짝 반디불 
     다시 전등 켰고나
     살금살금 기여라
     옳다 하나 잡혔다

                      -「반디불」전문

  이 동요는 2002년 8월에 연변대학 사범분원 캠퍼스에 건립된 ‘반디불비’ 정면에 새겨져 있다. ‘《반디불》은 지난 半世紀동안 우리 민족 어린이들속에 널리 愛唱되여 오면서 여러 世代어린이들의 童心世界에 밝고 따뜻한 꿈이 되어주었다.’-‘《반디불》碑建碑委員會’의 더 없이 높은 평가다. ‘반디불비’는 중국 조선족의 첫 동요비이다.    

「비암산 진달래」(일명「봄이 오는 산」)를 감상해보자.  

산, 산, 비암산 봄이 오는 산
봄눈 녹는 길목마다 피는 진달래
꽃가지 부는 바람 연분홍 바람
네 마음 내 마음에 꽃물이 드네

꽃술을 세여보자, 꽃말을 읽자
세저니벌 오십리에 밭갈이노래
산, 산, 비암산 꽃이 피는 산
꽃눈 트는 굽이마다 우는 솔쫑새
―님아, 님아, 오시리 오시리잇고
일송정 추녀아래 꽃꿈이 곱네

꽃잎 따서 그리운 편지에 접어
룡정의 봄소식을 전하여주자 

  용정시정부에서는 2004년 봄에 한국 사람들에게「선구자의 노래」로 잘 알려진 용정 비암산 일송정의 관광지 조성 차원에서 이 시를 ‘일송정비’ 바로 옆에 자연석에 새겨놓았다. 진달래는 우리 연변의 ‘州花’로 중국 조선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암산 일송정 주위에는 워낙 진달래가 곱게 피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비암산 진달래를 통하여 력사와 자연을 아우르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노래했고 꽃피는 봄으로 희망찬 새 력사시기의 도래를 노래했습니다.’-조용남 스스로의 고백.

  이외에도 우리 중국 조서족의 문화독립군들은 많다. 이 짧은 한 편의 글로 다 엮기에는 너무 아름차다. 어떤 분들은 기념비 하나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소중한 한분 한분은 우리 민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리 마음속의 금자탑으로 빛나리라!


2008.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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