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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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과 반작용
2005년 04월 26일 00시 00분  조회:4201  추천:68  작성자: 우상렬
작용과 반작용

작용과 반작용, 관성, 질량(에너지)보존-대물리학자 뉴턴이 발견한 운동의 3가지 기본법칙, 이것은 우주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들임. 그것이 우주보편적인 법칙일진대 보편적용의 가치를 갖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여기서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만을 풀이해 보도록 한다.

뽈을 벽에 냅다 뿌렸다. 튕겨서 도로 나온다. 눈에 확연히 띄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머리를 솜뭉치에 들이박았다. 그대로 들이박힌다. 머리의 작용이 돋보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머리를 벽에 냅다 부딪쳤다. 퍽 머리가 터졌다. 벽의 반작용이 돋보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사실 작용이 돋보이든지 반작용이 돋보이든지 작용과 반작용의 힘은 대등하게 작동한다.

인간은 바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이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한다. 집채 같은 윤선, 바다에 깔아 앉지 않고 잘만 뜬다. 물론 배는 부력의 원리를 이용했다. 아르키메데스가 모욕하다가 발견했다는 그 부력 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이 부력을 발견하고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져 발가벗은 채로 거리로 뛰어 나가 나는 발견했어, 나는 발견했어 하며 웨쳤다니 좀 우습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서 보면 그렇게 ‘간단’한 원린데 말이다. 부력의 원리라는 것이 물은 밀어내는 만큼 떠받치는 힘을 생성한다는 것일진대 그것은 작용과 반작용법칙의 구체적인 한 양상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수영도 마찬가지다. 몸이 풍덩 물에 작용하는 순간 물은 같은 힘으로 풍덩에 반작용하며 몸을 물 밖으로 밀어낸다. 그래서 사람 몸은 물 위에 뜨도록 되어 먹었다. 모택동이 잘 하는 손발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仰泳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팔로는 물을 걷어내고 발로는 물을 냅다 차는 일반 수영의 원리는 사람의 손발과 물의 작용과 반작용법칙을 본능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구사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것을 믿는다. 그럴진대 우리 인간에게도 언젠가는 꼬리가 있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 인간의 조상-類人猿이 꼬리가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현대 우리 인간에게는 분명 꼬리가 없다. 그럼 왜서 꼬리가 없어졌는가? 그것은 꼬리가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됨으로 인간으로 되었다. 네발 가진 동물에게 있어서 꼬리는 뒤로부터 오는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 그리고 몸의 간지러운 곳을 쳐서 시원하게 하는데 주된 존재가치가 있다. 그런데 사람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몸놀림이 빨라져 몸을 획 돌리는 것으로 뒤로부터 오는 공격에 대적할 수 있고 앞발이 다양한 용도의 팔로 승화됨으로써 손으로 등을 비롯한 간지러운 데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정말 꼬리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적의 공격이나 몸의 간지러움 같은 외계의 작용을 받아 반작용을 계속 했어야 그 꼬리는 꼬리로서 재구실을 하면서 계속 존재하게 되는데 그런 반작용의 계기를 상실했으니 그것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이 앉는 자세의 생활방식을 취하니 꼬리는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우리의 ‘몽고반점’이라는 것이 그 꼬리의 흔적은 아닌지? 나는 종종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니 사실 꼬리에 한해서 인간의 진화 운운은 좀 어불성설이다. 꼬리는 분명 도태되었다. 쓸모없어 안 쓰게 되니 도태되었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서 벗어났으니 그것은 도태되었다. 우주만물은 다 이렇다. 오래 동안 캄캄한 속에 있다가 갑자기 햇빛 밝은 곳으로 나와 보라. 눈이 보이지 않는다. 빛의 작용을 받으며 눈이 보는 반작용을 오래 동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잠시 ‘도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눈은 빛의 작용에 차츰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무리하게 반작용을 하게 할 때 거기에는 고부하가 가해지면서 정말 도태가 생겨난다. 그래서 구조대원들이 오래 동안 햇빛을 못 보는 캄캄한 곳에서 사람을 구조할 때는 그 사람의 눈부터 가리워주는 것이 기본상식으로 되어 있다.

사실 인간의 오관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진화와 도태의 과정을 거쳐 왔다. 인간이 아직 진짜 인간으로 되기 전, 그러니 네발로 걸어 다닐 때 코가 고도로 발달하는 대신 눈은 맹점 투성이다. 흑흑~ 코로 냄새의 작용에 끊임없이 반작용하다보니 코는 발달할 수밖에. 지금의 개코들처럼 말이다. 대신 눈은 땅에 처박은 말 그대로 ‘한 치 보기’니 상하좌우, 그리고 저 멀리 바라보기에는 그야말로 땡이다. 그러다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이런 상황은 역전된다. 직립보행은 그야말로 시야를 탁 틔웠다. 거창한 빛의 작용을 통해 세상만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로부터 눈의 본격적인 반작용이 작동된다. 그래서 눈은 점점 더 커지고 동공은 점점 더 확장되며 눈빛은 점점 더 빛난다. 그래서 결국 현재 오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했다. 대신 우리의 코는 냄새의 작용에서 많이 벗어나고 냄새와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니 자연 코의 반작용도 뜸해졌다. 우리의 코는 이렇게 도태되었다. 그래서 결국 개보다 발달하지 못한 사람 코가 되었다. 귀도 마찬가지. 우리가 네발로 기어 다닐 때는 귀바퀴를 쫑긋하며 외계의 소리작용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귀까지 가세해야 생존이 그만큼 수월하게 되는 단계다. 그러다가 직립보행하면서 삶이 그만큼 수월하게 되면서 귀는 그리 신경을 안 써도 되니 그 쫑긋하는 기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우리의 두뇌도 마찬가지다. 왜서 똑똑한 사람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아둔한 사람은 점점 더 아둔해지는가? 두뇌의 쓰고 안 쓰고에 달렸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논할라치면 오관의 사령탑으로서의 두뇌가 오관을 통한 외계의 많은 작용에 쉬임없이 반작용을 하며 작동할 때 그 두뇌는 발달하고 똑똑해진다. 책은 두뇌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외계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니 책을 많이 보고 적게 보고가 두뇌의 반작용을 결정한다. 그러니 책을 많이 보는 것이 두뇌개발의 기본 한개 도경이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두뇌가 외계의 작용을 거부하거나 외계의 작용에 대해 이렇다 할 반작용을 못할 때 그것은 식물인간으로 되거나 식물인간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분명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 육체와 영혼의 조화로운 발전,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이상이다. 우리의 교육방침에 덕, 지, 체, 노, 미 여러 방면에서 전면적인 발전을 가져온 인간을 키운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상의 구체적인 실천형태로 보아 무방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조화는 항상 깨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의 실존적 비극의 하나. 보라, 노지심과 무송 아바이를 좀 보라. 이들은 무지무지 완력의 장사다. 노지심 술 한 잔 하고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도 말 그대로 송두리째 뽑아 버린다. 무송 술 한 잔 하고는 맨주먹으로 호랑이 때려잡는다. 육체적 힘의 논리가 통하는 하드시대, 육체적 힘의 작용과 반작용에 놀아난 그들은 육체적 힘의 강자들임에 틀림없다. 아, 무섭지만 부러운 존재들! 그대들 앞에만 서면 작아지기만 하고 초라해지기만 하는 우리. 맨주먹으로 나무를 뽑기는커녕 파리조차도 못 때려잡는 우리가 아닌가? 그런데 잠간, 노지심, 무송은 우둔하고 미욱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영혼, 정신적 개발이 많이 뒤떨어져 있다. 그러니 그만큼 머리가 아둔하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에 비해서. 우리가 사는 세월은 육체적 힘의 논리보다는 영혼, 정신적 힘이 더 통하는 소프트시대다. 영혼, 정신적 작용과 반작용에 많이 놀아나는 세월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 정신적으로 더 없이 풍부하고 다양한 세계에 살고 있다. 노지심, 무송은 분명 이 면에서 우리를 따르지 못한다. 이들 컴퓨터키보드 치내나 말이다. 보다시피 시대의 작용과 반작용의 흥분중심이 다름에 따라 우리의 모습, 삶의 양상도 달라진다. 현재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따로 노는 작용과 반작용을 갈무리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나는 더 없이 미욱스러운 놈이다. 엄마, 아버지한테도, 아내한테도 이런 소리를 밥처럼 먹으며 살아왔다. 좀처럼 약을 안 먹으니 말이다. 아무리 아파도 약을 안 먹으니 말이다. 약을 비상으로 여기니 말이다. 사실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신조가 있다. 내 몸에 병이 났다고 하자. 그것은 내부로부터의 바이러스 침입이나 외부로부터의 바이러스 생성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이런 바이러스를 죽일 킬러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면역력이다. 이로부터 우리 몸은 생리평형, 생태평형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이런 면역력은 바이러스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이른바 작용과 반작용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커간다. 그래서 잔병을 많이 하는 사람, 오래 하는 사람이 오래 살고 병 하나 없이 건강하고 펀펀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잔병을 많이 하는 사람, 오래 하는 사람의 몸에는 그만큼 면역력도 많이,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 되겠다. 반면에 병 하나 없이 건강하고 펀펀하던 사람의 몸에는 면역력이 바이러스의 작용을 받아 반작용을 할 소지가 없기 때문에 안 쓰면 도태되는 원리로 면역력이 그만큼 떨어져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일단 바이러스가 침입하거나 생겨날 때 면역력이 제대로 반응이나 작동을 못하게 되며 ‘죽을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무슨무슨 예방주사나 백신을 맞는 것은 외부로부터 특정 바이러스를 주입하여 이런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약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별란 것이 아니고 몸에 침입했거나 생긴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몰아내는 킬러나 면역력에 다름 아니다. 그럴진대 이런 약을 많이, 자꾸 복용할 때는 우리 몸에 고유한 상응한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몰아내는 킬러나 면역력이 작동할 사이가 없어지면서 도태되고 마는데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에이즈라는 것이 우리 몸에 면역력이 쏵 떨어진 극단적인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 몸에 이런 킬러나 면역력이 도태될 때 우리는 점점 더 약물 면역력에 의지하게 되고 어느 때부턴가는 약물 없이는 못 사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이런 약물에 바이러스들이 면역이 생기거나 보다 강한 신종 바이러스들이 생겨날 때 우리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공포의 암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약물복용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는 인간의 약물개발과 바이러스 사이에 작용과 반작용 법칙을 기본으로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듯하다. 인간이 무슨무슨 신종 약물개발-무슨무슨 바이러스박멸하고 개선가를 부르게 바쁘게 신종 바이러스들이 기를 쓰고 생겨난다.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지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던 사스, 아직도 미스테리인 사스는 그 전형적인 보기다. 그렇다 해서 인간은 약물을 나처럼 전적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 약물이 우리 몸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고 건강하게 해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이 약물의 덕택에 그 어느 동물보다도 강하다. 그러나 절대 ‘亂投葯’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몸에 고유한 면역력까지 사장시키면서 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몸에 고유한 면역력의 주체성을 살리고 그것을 보다 원활히 작동시키거나 보강하는 차원에서 약물을 투입시켜야 한다. 이른바 의사들의 분부나 사용설명서에 따라 복용하라는 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사실 우리 先人들은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을 소박한 의미에서나마 잘 알았던 거 같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그렇쟈? 밟히는 거 하고 꿈틀거리는 거-작용과 반작용.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은 거창한 혁명의 논리에도 그대로 통한다. 어디에 압박이 있으면 어디에 반항이 있다, 잘 아시지요? 위대한 수령 모택동동지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압박 대 반항, 뛸 데 없는 작용과 반작용의 작동원리. 그렇게 잘 이해되지 않던 혁명의 도리도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 풀이하니 그렇게 간단한 걸 내내 학습회니 저작학습이니 뭐요 하며 사람을 달달 볶았으니 기가 차기도 했지. 그런데 요새는 시장경제요 뭐요 하면서 아리숭한 말을 많이 풀이하든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수요와 공급이라는 아담 • 스미스의 ‘안 보이는 손’의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에 다름 아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으로 세상을 보면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200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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