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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으로 승부한 ‘체육객’― 연변가무단 연극부 부장 원용란을 만나다
2024년 06월 26일 16시 02분  조회:411  추천:0  작성자: 예술세계
연극인으로 승부한 ‘체육객’
― 연변가무단 연극부 부장 원용란을 만나다
□ 신철국
 
 

 
“체육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예술에도 끼가 있답니다.”
헤이,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 그대로 듣다 첫 소리였다. 하지만 이어서 경쾌한 률동에 화려한 몸놀림을 선 보이는 피겨선수들을 떠올리니 어딘가 일리가 있다 싶었다. 허나 첫밗에 체육인과 예술인을 슬며시 갖다 붙이는 ‘의뭉한(?)’ 연극인의 소리 치고는 어딘가 미심쩍었다. 이거 혹시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딱!” 하고 상 우에 경당목(惊堂木)을 내려놓는 중국의 전통이야기군들처럼 이제 막 꺼내놓을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변죽을 울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랬다. 단막극, 장막극은 물론 TV소품, 뮤지컬 등 다양한 쟝르를 넘나들며 40여년간 연극예술의 한우물을 파온 원용란의 빙긋이 웃는 얼굴을 마주하니 말이다.
 

 
‘체육객’이 ‘예술객’으로
1965년 8월, 원용란은 안도현 명월진에서 아버지 원희수, 어머니 김계숙의 3자녀중 차녀로 고고성을 울렸다. 노래도 잘 부르고 손풍금도 제법 잘 다루는 아버지와 춤, 노래에 장기가 있는 어머니를 두어서인지 원용란은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에 싹수를 보였다. 헌데 예술보다 체육에 더 심취했던 그녀는 소학교시절에는 배구선수로, 중학교시절에는 소프트볼(垒球)선수로 맹활약하며 ‘이단’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그녀가 예술에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은 길림성소프트볼팀 선수모집에서의 탈락이였다. 이럴 수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전도유망한 체육객” 소리를 들으며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더니 ‘체육객’ 꿈이 무너졌다고 적잖이 실망한 그녀한테 새로운 무대가 나타났다. 1984년초였다.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죤을 통해 자기 또래의 녀학생들이 예술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본 원용란은 자기의 실력이면 그녀들한테 절대 짝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부모에게 예술 쪽으로 발전해보겠다고 떼를 썼다.
그 때까지 쭉 운동에만 매달려왔던 딸애가 갑작스레 예술로 ‘핸들’을 돌리겠다는 말에 부모는 도리질을 했지만 한번 먹은 마음을 쉽게 꺾지 않는 그녀의 고집에 결국 응낙하고 말았다. 그렇게 별로 준비도 없이 전공과목시험에 참가한 원용란은 예상 밖으로 연변예술학교(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전공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입학이 전부가 아니였다. 수업에 참가한 그녀한테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다. 무엇보다 다년간 안주해왔던 체육에서부터 예술에로의 환경 전환이였다. 그중에서도 표현과목 수업은 마치 어릴 적 소꿉놀이를 방불케 했다. 자기가 생각했던 ‘고상한 예술’과는 차이가 있었다. 연극예술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달포도 안돼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 앞에서 일방적으로 예술에 대한 포기를 선언했다. 그런 그녀를 부모가 엄숙하게 타일렀다. 스포츠도 기초가 우선인 것처럼 예술도 기초부터 튼튼히 다져야 한다는 것, 너는 예술에도 천부가 있으니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것, 포기란 말은 배추나 셀 때 쓰는 거지 꿈이 있는 사람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귀교해 동학들과 어울리며 배움에 전력했다.


  
중학교시절 소프트볼선수로 활약한 원용란               연변예술학교 연극반에서 연극기초훈련을 하는 장면(왼쪽 첫번째)

 
원주삼(표현), 리화(리론), 향개명(발레), 한룡길(조선족무용), 정정문(성악) 등 선생님들의 자상한 가르침 아래 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배우고 1986년, 왕청현문공단에 실습을 내려간 원용란은 소품 〈고추며느리〉 출연팀의 성원으로 연변중청년소품콩쿠르에 참가했다. 그번 콩쿠르에 다른 팀을 대표해 참가한 연극계의 선배 오선옥이 50대 아주머니 역을 맡은 원용란(당시 23세)의 옷매무시를 아주머니처럼 고쳐주면서 이렇게 조언했다.
“등수에 연연하지 말자. 자신이 갖고 있는 연기의 장점을 잘 살려서 연기를 하면 등수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렇게 따뜻한 조언을 해준 오선옥과 함께 그번 콩쿠르에서 나란히 3등상을 따낸 그녀는 수상무대에서 격동의 눈물을 쏟았다. 이 소품은 그후 리옥희가 ‘수이러우(水肉)’로 소문을 놓은 소품 〈사촌언니〉와 더불어 연변TV 1987년 음력설문예야회 무대에 올랐다.
이튿날, 그녀가 영예증서를 가지고 금의환향하자 부모님은 너무도 기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체육 대신 예술을 선택한 딸에 대해 늘 아쉬워했던 아버지도 ‘체육객’으로부터 ‘예술객’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그녀를 보면서 “첫발자국을 잘 뗀 것 같구나.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 더 큰 성과를 이룩하기 바란다.”며 격려해주었다.
 
룡정시예술단 시절의 원용란

20대부터 ‘아줌마’전문호로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원용란은 1987년 3월, 룡정시예술단(당시 연길현문공단)에 입단했다. 그녀가 룡정시예술단에 입단한 데는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1987년 3.8국제부녀절이 갓 지나서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있던 그녀한테 웬 낯선 사내가 찾아왔다. 룡정시예술단에서 배우모집을 나왔다고 신분을 밝힌 사내는 현재 예술단에서 장막극을 준비하고 있는 중인데 원용란을 채용할 생각이라며 같이 갈 의향이 없냐고 넌지시 묻는 것이였다. 예술학교 선생님들의 소개로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시물시물 웃는 표정이며 힐끔거리는 눈길이 사기군처럼 느껴졌고 게다가 다 큰 처녀애를 그냥 외간사내한테 딸려보낼 수가 없는지라 그녀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막아버렸다. 그 날 저녁, 퇴근한 원용란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자신의 앞길은 저절로 선택하라.”고 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원짜리 지페 한장(그 때 안도현에서 룡정시까지 기차표가 1원 50전 가량 됐다고 한다.)을 그녀한테 내밀었다. 그녀더러 직접 룡정시예술단에 찾아가 채용 여부를 확인하고 앞길을 선택하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사업 배치에 관한 모든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서의 일반책임자가 아닌 단위의 제1책임자를 찾아 아퀴를 지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이튿날, 아버지의 말을 명기하고 룡정으로 간 원용란은 예술단 제1책임자로부터 전날에 그녀의 집에 다녀온 분이 룡정시예술단 연극대 대장인 황철이였으며 현재 준비중인 장막극 〈파묻은 사랑〉의 주역으로 그녀를 눈독 들이고 있음을 알게 되였다. 당시 연변주내에서는 연변연극단과 룡정시예술단에서 주로 연극을 취급하고 있던 터라 지명도가 높은 연변연극단이 더 욕심났지만 햇병아리 연극인으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산이였다. 원용란이 주저하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소품 〈사촌언니〉를 열연해 조선족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리옥희였다. 이런 대스타도 몸 담고 있는 곳이니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주저없이 입단서류에 싸인했다.

 
  
         장막극 〈해구신〉의 한 장면(오른쪽 두번째)          장막극 〈사랑에 지친 녀인〉의 한 장면(오른쪽 첫번째)

입단후 그녀는 데뷔작인 장막극 〈파묻은 사랑〉에서의 주역에 이어 〈사랑은 했는데 젠장〉, 〈사랑과 야심〉 등에서 40~50대 아줌마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 동료와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20세기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는 조선족연극의 전성기였다. 따라서 무대에 올리는 연극의 스케일도 방대했고 배우들 사이의 경쟁도 심했다. 그리고 농촌순회공연도 많았다. 한 마을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른 마을에 당도하면 마을주민들이 강냉이튀김이며 사과배며 지어는 큼직하게 썬 무우까지 갖춰놓고 이제나저제나 공연단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 때면 그녀는 소품, 독창 출연에 이어 사회도 보면서 부지런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녀가 처음 선 보인 1인극 〈퍼렁녀와 고분녀〉는 그녀의 출중한 연기에 힘 입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모자를 비뚤게 쓸 때는 쩍하면 손님들과 걸고들고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수양 없는 복무원인 ‘퍼렁녀’로, 모자를 똑바로 쓸 때는 언제나 손님들을 반겨 맞고 봉사를 잘하는 훌륭한 복무원인 ‘고분녀’로 변신하는 완전히 판이한 두 식당복무원의 모습을 혼자서 그려낸 작품이였다.
특히 그녀는 20대 처녀시절부터 수많은 작품들에서 아주머니, 할머니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 관객은 물론 업계의 인정을 받았는데 이는 연변예술학교시절 담임이였던 원주삼선생의 가르침과 갈라놓을 수가 없다. 젊은 녀인보다 중로년 역을 자주 맡기는 게 야속해 잔뜩 풀이 죽어있는 그녀한테 “젊은이의 배역은 생명력이 짧으니 그 대신 오래오래 써먹을 수 있는 어머니나 할머니의 배역을 잘 배워두는 것이 갑절 더 실용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격려해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늘 명기하고 세밀한 캐릭터 분석으로 안정적인 연기력 향상에 왼심을 썼고 결과 20대 처녀시절부터 ‘아줌마전문호’로 무대를 누비며 조선족연극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였다.

 
 
        소품 〈파마점에서〉의 한 장면(가운데)                     장막극 〈하얀 꽃〉의 한 장면(왼쪽 두번째)

재간둥이 연극배우로
1994년 3월, 원용란은 더 큰 꿈을 안고 연변연극단으로 향했다. 조선족연극계의 명망 있는 연출이였던 최인호 감독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접시험을 대기하고 있는 그녀한테 최감독은 이왕의 복잡한 시험절차들은 아예 삭제한 채 그냥 몇몇 간단한 동작들만 시켜보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너는 원래 크게 연극을 할 재목이로구나!” 하고 충분히 긍정하면서 그처럼 넘기 힘들다는 연변연극단 문턱을 단숨에 통과시켜주었다.
최감독의 인정을 받고 신심 가득히 연변연극단에 발을 들인 원용란은 초심으로 돌아가 최고보다는 최선이란 마음으로 관객들을 위해 연기하는 전방위 연극인이 되고저 노력을 기울였다. 남들이 힘들어 못하겠다고 나눕는 ‘아짜아짜한’ 배역들도 서슴없이 맡으며 극중 인물을 소화해내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장막극 〈사랑에 지친 녀인〉에서는 술집 접대부로, 〈헤톨부대〉에서는 바보스러운 로처녀로, 〈하얀 꽃〉에서는 순박한 농촌녀성으로 조연들을 맡아가면서 몰입도 높은 ‘깨소금맛’ 연기로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중소학교시절 내내 운동을 하면서 모름지기 키워왔던 ‘체육객’의 용감성이 크게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방미선연출가의 가르침과 영향하에 연변의 첫 뮤지컬인 〈샘〉에서 사기군의 안해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여 연극배우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약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게 되였다.
당시 중국 조선족연극계의 원로였던 저명한 연극인 리영근선생은 배역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맡아나서는 원용란의 용기를 연극인한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부하면서 그녀야말로 동료들과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전반 작품을 살려주는 아주 대담하고 특이한 배우라며 그녀의 연기력을 충분히 긍정해주었다.
이 무렵 연극인 김동현과 합작출연한 소품 〈갑속에 든 사람〉(리광수 작, 최인호 연출)에서 원용란은 동창모임에 나가기 위해 남편을 사우나통에 가두어놓고 내빼는 40대 아줌마의 형상을 진실하게 창조해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 소품은 길림성 제15차 소품평의와 제4차 연변소품콩쿠르에서 우수작품으로 평의되고 녀주역을 맡은 원용란은 각기 표현 2등상을 탔다. 한석봉과 합작출연한 소품 〈계약서〉(김정권 작, 최인호 연출)에서는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어렵게 돼지고기장사를 하면서도 생활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부지런한 과부 형상을 성공적으로 표현해 관객들의 우렁찬 갈채를 받았다.
성공의 비결이라면 생활에 대한 그녀의 세심한 관찰과 직접적, 간접적인 체험을 통한 경험이였다. 연극 〈림송숙〉에서 주인공 ‘림송숙’ 역을 맡은 그녀는 인물을 보다 형상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15일간 연길시 공원가두 광휘사회구역에 내려가 직접 현장체험을 했다. 이 연극은 2014년 12월에 막을 올렸는데 그녀는 뛰여난 연기력을 펼쳐 맡은 바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재간둥이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연변연극단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녀는 그동안 일반인으로부터 공산당원으로, 일반 연극배우로부터 연극부 부장으로 거듭나면서 〈사랑의 샘〉, 〈사랑의 품〉, 〈심청전〉, 〈둥지〉, 〈고향역〉, 〈주덕해〉, 〈림송숙〉, 〈사회구역 서기〉 등 수많은 극작품들을 열연했다. 그 노력의 성과로 제8회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길림성 제6회 덕예쌍형(德艺双馨)문예사업자 등 수십여차의 묵직한 상과 영예를 받아안았다. 또한 중국연극가협회 회원, 길림성연극가협회 리사, 연변연극가협회 부주석으로 활약하면서 현시대 연극이 봉착한 문제를 분석하고 개혁 및 발전에 대해 모색하면서 그에 맞는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장막극 〈고향역〉의 한 장면(앞줄 왼쪽 첫번째)

연극은 삶의 비타민
2017년 5월, 중국연극 탄생 110돐을 맞으면서 제1회 동북지역 우수극작품전시공연이 료녕성 심양시에서 있었다. 동북3성 15개 극단의 25개 작품중 유일한 조선어작품인 연변가무단의 〈사회구역 서기〉가 심양의 중화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그 연극에서 주인공 림송숙 서기 배역을 맡았던 원용란은 공연 뒤끝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번 공연이 끝나자 심양시 서탑지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아줌마가 애를 셋이나 거느리고 무대 뒤로 그녀를 찾아왔다. 연변의 맛이 살아있는 연극을 정말 보고 싶었다면서 앞으로도 자주 산재지역 조선족들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는 말에 그는 연변의 연극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페부로 느꼈다.
특히 직접성, 동시성, 현장성을 구비하고 있는 연극은 스크린 매체와 달리 관객이 직접 연극 현장에 참여해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을 잘하려면 춤, 노래와 같은 것도 잘해야 하겠지만 언어적인 면의 질도 중시해야 한다. 생활을 떠나 겉치레만 잔뜩 부린 허황한 대사는 관객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며 또 그렇다고 해서 너무 생활적인 언어를 강조하면 평범하기 때문에 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잘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관객을 웃고 울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연극이야말로 이 사회의 비타민이라고 말한다. 힘들 때가 더 많지만 연극에 몰입해서 모든 것을 발산하고 나면 그렇게 후련하고 보람찰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극이 오늘날에는 그전날의 관객이 북적거리던 풍경을 뒤로 하고 저조기를 겪고 있다. 지난날, 그녀와 함께 연변예술학교에서 공부했던 동창들도 지금은 모두 연극무대를 떠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현재 연변가무단과 합병해 연극부로 존재하고 있는 연변연극단에는 전성기에 배우가 200여명 있었지만 현재에는 십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조선족인구의 류실 때문에 관객이 적어진 까닭도 있지만 연극의 매력이 다매체문화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데도 있다고 그녀는 분석한다.
세월이 변했으니 연극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품이 있어야 무대가 생기고 관객도 생길 것이라며 요즘 같이 뉴미디어가 발전한 시대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어느덧 다음해면 퇴직하게 되는 그녀는 그동안 좋은 감독, 씨나리오 작가, 상대배우를 만난 덕에 탄탄대로를 걸어왔다며 이제 퇴직을 해도 불러만 주면, 그리고 암기능력만 따라간다면 한달음에 무대로 달려올 것이라고 한다.
“감독은 영화감독이 최고요. 배우는 NG 없이 한방에 끝내는 우리 연극배우가 한수 우랍니다.”
헤이, 나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야기 말미에 다음 회를 예고하며 “딱!” 하고 내려놓는 중국전통이야기군의 은은한 경당목 여운이 살아나 두말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사진 제공 │ 연변가무단
《예술세계》 2024년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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