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 청산을 두루 밟아
연벼농학원 농학계식물식생교연실 김수철주임(공산당원)은 20여년간 연변에 있는 식물의 채집, 정리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중대한 성과를 이룩했다.
그는20여년간 채집정리한 식물표본으로 “장백산야생식물지”를 편찬해 한창 출판중에 있는 “장백산야생경제식물지”에중요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 자기가 수집, 정리한 식물로 “연변중초약”을 편찬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지금 연변지구의 버섯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장래에 기꺼운 성과가 알려질 것이다.
김수철선생이 이미 써냈고 또 앞으로 쓰는 책들은 단순한 “식물지”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가 고향의 식물을 연구하여 조국의 사회주의건설에 기여하려는 그의 마음과 리상, 그리고 그 리상을 실현하기 위한 깐지고 드팀없는 의지가 기록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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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선생이 연변농학원농학계식물교원을 담임한 것은 1951년부터다. 그때 학교에 식물교수에 필요한 표본이 하나도 없었다. 당의 민족정책의 따스한 해빛 아래 대학교교원의 자랑을 한가슴에 받아안은 그는 자기가 맡은 사업을 어떻게하나 잘 해보려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크나큰 포부를 품었다.
(우리 연변에는 어떤 식물이 몇가지나 있을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가? 연변은 식물학의 미개발지이다. 이 천지를 개발하여 연변인민들에게 “식물학”을 보급하리라!)
김수철선생은 이런 뜨거운 마음과 탐구의 리상을 품고 산을 찾고 들을 찾아 떠났다. 20여년 동안 두만강하류의 경신수리봉으로부터 장백산 상상봉인 백두산천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연변의 높고 낮은 산들을 하나하나씩 거의다 찾아 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가 겪은 고생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때로는 깊은 산속에서 채찍같이 내리는 작달비를 맞고 때로는 가파른산을 톱다가 허궁미끌어 떨어지기도 하였다. 잠자리는 얼마나 스산했던가! 알맞춤한 데를 가면 인가를 찾을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음산한 숲속에서 홀로 밤을 새워야 했다.
언젠가 김선생은 장백산남석에 천마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식물이라면 언제나 금은 보화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그는 호기심을 못이겨 그 곳을 찾아 갔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판, 인가는 찾을래야 찾을수 없었다. 그는 숲속에 연추장막을 만들어 놓고 산판에서 지냈다. 한번은 훈춘현 까올령꼭대기에서 돌연한 폭우를 만났다. 그때 그는 비를막을 유포를 가지고 다녔지만 채집한 식물이 비에 후질러 질가봐 유포로 채집상자를 꽁꽁싸고 자기는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1959년 그는 장기간을 앓던 신념이 신결핵병으로 이전되여 용신에 있는 자택에서 휴양하게 되였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 산이라고 하면 펄하는 그는 약을 쓰는 몸에 진 병마를 잊은채로 또 산을 찾아 나섰다. 그는 해발 1.000메터나 되는 양목산상상봉까지 오르내리며 식물을 채집하였다. 식물채집에 혼신을 빼앗긴 그는 동무들과의 사귐, 가정식구들과의 단란한 모임도 외면하였다.
김수철선생님의 고명딸인 혜란의 회상이다.
ㅡ이전에는 명절이나 구경이 있을 때 남의 애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구경을 다녔는데 나만은 그런 기회가 없어 매우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식물채집을 떠나자 나도 가겠다고 졸라댔다. 이래서 아버지와 같이 산으로 식물채집을 한번 갔다왔을뿐 구경은 같이 다녀보지 못했다.
고심을 기울이고 지성을 몰부어 채집해 가지고 집에 돌아와도 그는 한시도 쉴사이가 없었다.
채집해 온 식물은 압착을 잘 하고 건기를 잘 들여 표본을 만들어야 하고 게다가 어떤 식물은 원색, 원형을 그려놓아야 하였다. 이러한 뒤일들은 시간을 더 많이 소모하는 로동이였다. 하여 김선생은 한시도 자기의 식물표본실을 떠날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맡은 교수를 끝내고는 표본실에 들어가면 나올줄을 몰랐다. 저녁에도 표본실로 나갔다. 일이 정 딸릴 때는 아예 집에서 이불을 가지고 가서 표본실에서 밤을 지새운 일도 푸술하였다.
김선생에게는 일요일도 없었다. 산처럼 쌓인일, 엄청난 학습임무는 그를 조금도 쉴수 없게 하였다. 특히 학습은 그의 사업을 진척시킴에서 돌파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내용이였다. 정리하는 내용의 과학성을 위해서는 외국의 많은 서적을 참고 하여야 했다. 그래서 짬 시간마저 아껴야만 했다.
그가 로어, 영어, 등 외국어를 학습할 때 일이다. 그는 학교로 오가는 행길에서 한 전선대와 한 전선대사이에 암기해야 할 단어량을 정해 놓았다. 한 전선대사이에서 암송해야 할 단어를 다 암송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서암송을 다 하고서야 다음 전선대사이로 걸어 갔다. 그는 이렇게 금싸락 같이 분초를 아끼며 고심 히학습하여 한어, 영어, 일어, 로어 등 네가지 언어를 능숙하게 장악하였다.
기나긴 나날 그가 이렇듯 긴장히 사업에 몰두하고 연구에 정진한 탓으로 성미마저 변하였다. 그는 말수가 적어지며. 하냥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기집에 쌀, 땔나무와, 애들의 옷 등 가정생활에 뒤전이였다. 남들은 터전에 각 가지 남새를 심었으나 김선생은 그리 많지도 않는 터밭에다 참나리, 함박꽃, 둥글레 등 야생식물 을옮겨다 심었다. 어느날 혜란의 친구가 울타리를 지나다가 식물종류를 헤여 보았더니 50가지도 넘더라고 하였다.
20여성상, 김수철선생은 가정도, 건강도, 행복도 모두 식물채집과 정리에 바쳤다.
20여년간 그가 만든 압착식물표본은 1만여 점이나 되였다. 식물종류는 (초보적인감정을 통과) 1,290여 종이다. 이런 식물중에는 연변지구의 식물종류로 기록되지 않았던 “신기록식물”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채집을시작하여 9년만에 훈춘현 큰 따발령동남부에서 발견한 참개별꽃(太子參))과 훈춘현 이도포자대대에서 발견한 중대가리풀과 갈근(칡)이 있다. 이런 기초로 문화대혁명전에 이미 “장백산야생경제식물지”의 초고를 다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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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선생이 이제 그 순박한 연구의 마음, 소박한 라상을 힘차게 이룩해 나갈 때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일어 났다. 김수철선생은 “走白专主义道路分子”라는 모자를 쓰고 비판을 받았다.
실로 터무니가 없었다. 청춘도 가정도 다 바치며 고심을 기울인 것이 그래 죄란말인가?
그는 자기사업의 정당성을 믿었기 때문에 절대로 굽어들지 않았다.학교에서 일하기 불편하니 “연변중초약”을 편집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다 볼품없는 사무실을 꾸렸다. 부엌자리를 방으로 고쳤다는 좁은 방에다 애들이 공부할 때 쓰던 앉은뱅이 네모상 하나를 갖추어 놓고 그 우에다 탁상전등 하나를 갖추어 놓았다. 탁상등은 갓이 없어 종이고깔을 만들어 씌웠다. 그리고 손으로 들고보는 확대경을 준비하였다. 책들은 방이 너무 좁아서 허덕간에 “서재”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사무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공구서적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연변중초약”을 편찬하자면 다른 공구서적을 많이 보아야하는데 도서관에도 없고 또 마련해 줄 사람도 없었다. 집일에 뒤전인 그는 또 자기의 로임에서 돈을 잘라 내여 각종 공구서적을 샀다. “중약대사전”, “전국중초약휘편”, “간명중의학”, “중약식별수책”, “중국고 등 식물도감”…30책…60책….
자력갱생으로 꾸린 초라한 “사무실”에서 그는 편찬사업에 달라 붙었다.
그에게는 실로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하늘의 별은 졸아도 김선생의이 “사무실”불빛은 졸줄을 몰랐다.
초저녁을 푹자고 소변보려 나왔던 이웃집할아버지는 그 불빛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허허, 저선생이 또 장밤을 하는군!”
1973년, 김선생이 꼬박 3년동안 간난신고를 겪으며 편찬한 “연변중초약”이 출간되였다. 이는 연변식물채집정리사업에서 김수철선생이 쌓아올린 또 하나의 성과로 연변조선족의학위생사업에 매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3
“4인방”을 몰아내고 신주의 땅에 새봄이 왔다.
주, 성우수교원대회에 참가했던 김수철선생은 무등 기뻤다.
(한껏 날아보자! 영명한 수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과학의 고봉을 향하여!)
어느덧 52세였지만 그는 매양 장백산고산대의 왕사스레나무와도 같이 검질기고 열정이 비등 했다. 하여 오늘은 모아산, 래일은 삼합령, 다음은 베개봉, 그 다음은 하발령으로 드나 들었다.
이 새로운 장정의 길에서 김수철선생에게는 자기행동을 지도하는 하나의 좌우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루 밀림은 일년 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오 직앞당겨야 할뿐 한순간도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김선생이 버섯을 채집하려 해발1.700메타 되는 화룡청산베개봉으로 갔을 때다. 이른 아침에 베개봉마루로 휘적휘적걸어올라가다가 깊숙한 산속의 아담한 곳에 자리잡은 양봉장을 먼발치로 지나가다가 앞마당에 널어 말리는 호함진 버섯이 눈에 띄였다.
“아? 소버섯이 아닌가?”
그는 이 산에 소버섯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내려올 때 들려서 하나 얻어 가야지…)
그도 그럴것이 버섯이란 쉽게 상하므로 그때 가지고 가면 헛수고를 할수 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방정맞게도 이날 그는 산에서 길을 오껴 온 저녁 산속에서 헤매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청산골로 온다는 것이 왕청같이 허가장골에 가 버렸던 것이다.
그가 청산려관에 왔을 때는 밤이 이미 깊었다. 이?z날 꼭 청산을 떠나야 교수에 지장이 없는 것이였다.
(어떻게 하는가? 후날로 미루는가?... 아니다. 기어코 얻어 가야 한다…)
그 이?z날 아침이 였다. 그는 4시에 일어나 끝내 양봉장에 가 그 버섯을 얻어 왔다. 이리하여 버섯 하나를 위하여 새벽부터 세시간이나 급한 길을 걸었던 것이다.
올해 김수철선생은 버섯채집과 연구에서 이미 적지 않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가 이미 그려놓은 버섯그림만해도 150장인데 종류는 적어도 100여 종이나 된다.
연변에는 어떤 버섯이 있을가? 얼마나 있을가? 어떤 용도가 있을가?
김수철선생은 새로운 장정의 길에서 멀지 않는 장래에 우리에게 연변버섯의 실정을 알려 줄 것이다. 윤효식기자 “연변일보” 1978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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