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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2)
2020년 01월 22일 12시 04분  조회:4191  추천:1  작성자: 오기활
                                                 2, 배움의 길에서

일곱살에 사당에 다니다
우리 태양촌 횡도마을에 김재원한문서당(金载源汉文书堂)이라는 작은 글방이 있었다.
이 서당은 70여평방메터 되는 초가집 온돌방으로서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책상도 없이 구들에 앉아 글을 배웠다.
김재원 훈장님은 늘 한복차림에 상투를 쪽지고 상투 아래는 망건으로 동였다. 외출할 때에는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고무신이나 삼으로 삼은 초신을 신고 다니셨다.
어느 날, 장가전이였던 숙부가 일곱살 나는 나를 데리고 서당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은 시험을 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상으로 백로지를 주는 행사가 있었다. 당시에는 시험을 보는 것을 선생님의 강의를 받는다고 하였다. 교과서는 명필이신 재원선생님이 백로지에 친히 붓으로 써서 만든 <천자문교과서(千字文教科书)>였다.
시험내용은 주로 배운 글을 암송하는 것이였는데 평점은 우수(顺通), 급격(通), 락제(不) 세가지로 나누었다. 누가 락제를 맞으면 훈장님이 문푸레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그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그 날 서당에 붙었다는 리유로 백로지를 한장 받았다. 이것이 내가 출생후 훈장님한테서 처음 받은 영광으로서 어린 마음에도 서당이란 참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였다.
나의 상급생들은 ≪계몽편(启蒙篇)≫, ≪동몽선습(童蒙先习)≫, ≪통감(通鉴)≫ 등을 배웠다.
그 때 17세 가량 되여보이는 김재관이란 학생이 중국 고대력사교과서인 ≪통감≫을 배웠는데 한번은 배운 과문을 암송하지 못해 종아리를 걷어올리고는 훈장님께 “훈장님, 잘못했습니다. 되게 때려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훈장님은 그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처벌을 면해주었다.
전체 생도(生徒)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감격해하였다.
휴식시간은 종을 울리는 것으로 알리였다.
서당 뒤에는 깊이 세메터에 달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철따라 달라지는 타래붓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물가를 장식해주어 어린 생도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주었다.
타래붓꽃잎을 입에 물고 빨면 “빼― 빼―” 하는 소리가 났으므로 그 때 이 풀을 ‘뺄꽃풀’이라고도 불렀다. 이 꽃은 잎이 탈리면서 자란다고 하여 타래붓꽃이라고 불리우다가 ≪마란꽃 필 때≫라는 영화가 나오면서부터 마란꽃으로 알려졌다.
90 고개를 넘긴 지금에 와서도 나의 머리 속에는 김재원 훈장님에 대한 기억이 날따라 깊어만 간다. 그이는 나에게 처음으로 책을 안겨주었고 붓글씨를 쓰는 재간을 배워주었으며 군자다운 거룩한 행실을 어떻게 키워야 함을 알려주셨다.
김재원 훈장님은 경상남도에서 오신 학자였으므로 말씨가 경상도의 구수한 사투리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훈장님의 말씨에서 종조의 옛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이는 ≪통감≫을 ≪옥편≫ 한장도 번지지 않고 막힘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치셨다.
훈장님 하면 그가 친필로 쓰신 <천자문교과서>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이는 나의 길고 긴 학습려정에서 첫걸음을 떼주신 잊지 못할 스승이다.
김재원 훈장님은 붓으로 친히 쓴 교과서를 나한테 선물해주셨다. 나는 이 교과서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86년이란 긴 배움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지페에 찍힌 인자하신 세종대왕의 모습이 김재원 훈장님의 모습과 너무 비슷한 데서 훈장님이 더욱 그립다.
훈장님이 나에게 주신 교과서는 중국 량나라의 주흥사(周兴嗣)의 저작인 ≪천자문(千字文)≫인데 이 ≪천자문≫은 “天地玄黄, 宇宙洪黄”으로부터 시작된 4언고시(四言古诗)로서 자연과 사회 현상을 아무런 문자중복도 없이 간결하게 개괄한 대단한 명작이다.
주흥사가 하루밤 사이에 이 대작을 쓰느라고 너무 골몰한 데서 검던 머리가 백발이 되였다고 하여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는 ≪천자문≫을 하루에 두줄씩 배웠다. 그 때 우리가 번마다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책을 번지다보니 책 한쪽 머리가 닳아서 볼모양이 없었다. 그래서 다 배우고 나서는 그 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천자문≫은 지금 배워도 리해하기 어려운 글인데 어린 나이에 배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다.
훈장님의 가정생활은 아주 어려웠다. 서당과 약 1,000메터 떨어진 곳에 그의 집이 있었는데 훈장님은 서당의 한쪽 방에서 독수공방을 하였다. 때로는 사모님과 동거하기도 했는데 어린 나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나는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1년 반 정도 하다가 신학사숙(新学私塾=阳兴私塾)이 서자 거기로 전학을 하였다.
열살에 소학교에 입학
일제 때 소학교 교수는 일어로 했다.
열살 때인 1934년에 나는 양흥사숙을 다녔다. 그 때 나의 첫 일어선생님은 김진하(金珍河)선생님이였고 1935년에 중흥사숙(中兴私塾)을 다닐 때에는 리명엽(李明烨)선생님이 가르쳤다. 교수방법이 김진하선생님보다 더 우수하였고 지식면도 넓었으며 그림과 야외스케치까지 배워주었다.



리명엽선생님은 숙제를 특별히 많이 냈는데 그 날에 배운 과문을 25번씩 쓰게 하여 일상생활에서 잘 활용하게끔 강조하였으며 이미 배운 지식들을 철두철미하게 리해하도록 가르쳤다.
그 때 김진하선생님은 년세가 많은 로인으로서 술을 즐겨 마셨고 리명엽선생님은 총각으로서 술담배를 멀리하는 뜻이 있는 유망청년이였다.
그 후 중흥촌(仲兴村)에 정규적인 학교가 서게 되자 중흥사숙이 해산되였다. 하여 리선생님은 다른 고장으로 갔다.
나는 일어회화기초를 김선생님한테서 닦았고 리선생한테서 더 능숙하게 배웠다. 나는 지금까지도 리명엽선생님을 숭배한다. 그는 교육구국(教育救国)의 정신으로 조선인의 출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선생님은 교실의 한곳에 일어동화집들을 가져다놓고는 과외독서를 장려하였다. 나는 3학년 때에 일문으로 된 ≪서유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고 일문으로 된 소년잡지도 읽을 수 있었다.
리명엽선생님은 조선의 뜻있는 청년으로서 교육으로 민족의 출로를 찾아야 한다는 사상으로 1934년에 이곳 북방에 온 유지인사인 듯하였다. 그는 산설고 물 선 이역땅에서 친인도 없이 모든 사랑을 학생들에게 몰부은 교육열정가였다.
나는 지금도 유지청년이였던 리명엽선생님을 숭배하고 있다.
17세에 국민고등학교를 다녔다
1942년—1943년에 나는 연길국민고등학교 1학년—2학년을 다녔다. 그 때 일어를 조선인인 최선생님이 가르쳤다.
최선생님은 당시 고등관(高等官)시험 합격자로서 수준이 높았다. 그 때는 교과서가 없어 강판글을 써서 등사해 교과서로 하였는데 최선생님이 나더러 강판글을 쓰라고 하여(학급에서 나는 필체가 좋았다) 나는 학급의 등사판 교과서를 전담하였다.
3학년—4학년에는 왕청국민고등학교에 이관되여 왕청에 가서 축산수의과(畜产兽医科) 공부를 하였다. 그 때도 나는 일어교과서를 강판글로 써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리유 때문에서인지 나의 일본어성적은 비교적 좋았다.
 일어공부
나는 해방전에 소학교부터 국민고등학교까지 일어로 교수를 받은 외에 해방후에 연변대학 농업학과 1학년을 다닐 때에도 일본인선생님한테서 일어로 화학교수를 받았다. 그리하여 나의 일어수준은 일본의 교수들마저도 “김수철 교수는 일어수준만으로도 교수자격이 당당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로어공부
내가 로어공부를 시작한 것은 외조부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외조부는 젊어서 공부를 많이 하여 매우 유식하셨다.
무남8녀를 두었던 외조부는 아들이 없는 것으로 하여 속이 상해 늘 술과 친구하며 류랑생활을 하셨다. 그 때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외조부를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병에 걸렸다고까지 말했겠는가!
외조부는 외손군들이 보고 싶으면 우리 집에 오셨는데 나를 만나 처음 하시는 일이 나의 학습통신부를 보는 것이였다.
외조부는 나의 학습성적을 보고는 대단히 기뻐하며 “을록(乙录, 애명)이가 또 우등을 했구나! 정말 장하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외조부는 나에게 로어단어를 잘 가르쳐주셨다. 로어수준의 여하를 막론하고 어쨌든 나의 로어공부의 첫걸음은 외조부가 떼주신 것이였다.
후일에도 외조부는 나의 로어공부의 지지자였고 감독자였다.
나는 연변대학 농업전과 수의축산전업 1학년 때에도 로어공부를 하였다. 해방후에도 처음엔 류경룡선생님의 사모님인 리나선생님한테서 배웠고 하학기부터는 백계로인인 다위 또브로선생님한테서 배웠다.
당시 나는 매부네 집에 류숙했는데 여름이면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연길공원다리 부근의 강기슭에서 로어교과서를 랑독하였다. 소리를 내여 읽을 때면 곁에 사람이 있고 없고를 관계치 않았다. 이런 학습방법으로 나는 교과서의 모든 내용들을 암송하였다.
일년간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그 때 매부의 집으로 옷을 사러 오는 쏘련홍군들과도 능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1950년대는 중국에서 한창 ‘쏘련을 따라배우’는 시기였다.
1953년 겨울방학에 농학원에서 로어수준이 상당한 일본교사 오바라겐지를 모시고 50일간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로어학습반을 조직하였다. 그 학습반에 나도 참가하였다.
로어학습반이 끝난 후 연변대학 림민호(林民镐) 교장이 시험관을 파견하여 25명 교사들의 로어실력검정시험을 엄하게 진행하였다. 그 때 25명 교사들중에서 단 두명인 나와 김병진선생만이 합격되여 교내에서 큰 화제로 되였다. 그로부터 나는 학교에서 달마다 5원씩 발급하는 로어수당금을 받아 가난한 집살림에 보태군 하였다.
당시에 나는 교수를 할 때면 늘 쏘련참고서를 리용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내의 문헌에도 없는 ‘가시상추(Lactuca seriola Torner)’란 식물을 채집하고 이 식물이 동북에서 처음 발견되였음을 ≪연변농학원학보≫에 발표하였다.
≪쏘련식물지(苏联植物志)≫는 나의 식물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길잡이로 되였다.
영어공부
1) 연길국민고등학교를 다닐 때인 1941년에 영어교과서 한권을 공부하였다.
2) ‘문화대혁명’ 때 연변농학원 농학과에서 조직한 교사단기영어강습반에 참가하였다.
3) ‘문화대혁명’ 때 농학과의 7명 교사들이 룡정에서 룡정3중의 영어교원을 초청하여 10여일간 영어강연을 수강하게 되였는데 나도 참가하였다.
4) 식물채집을 하는 과정에서 계획적으로 여러가지 형식의 영어공부를 견지하였다.
5) 영문필기장을 준비하고 필기련습을 부지런히 하였다. 이는 내가 식물학명(学名)을 배우며 필기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6) 1980년부터 록음기로 영어 발음, 회화를 열심히 공부했다.
7) VCD와 텔레비죤화면으로 영어학습을 견지하였다.
8) 평소의 영어학습(력사기초, 공구서적 준비 및 재정돈, ≪中医学≫ 영문서적, ≪中医学汉英对译本≫, ≪중영사전≫, ≪영한중사전≫ 등)을 바탕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 영문론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2002년부터는 국제심포지엄에서 세편의 영문론문을 발표하였다.
총적으로 나의 외국어수준은 일어는 ‘通’이고 로어는 문헌을 볼 수 있는 정도이며 영어는 론문을 발표할 수 있는 정도이다. 라틴어는 식물명을 떠올리면 우선 라틴어로 그 명칭이 떠오르고 사전과 씨름하면서 식물의 새 종류 쯤을 발표할 수 있는 정도이다.
나에게 있어 외국어공부의 노하우라면 “길을 걸으면서 읽고 암송하는 ‘길공부’를 부지런히 견지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다니기를 즐긴다. 부득이한 경우 누구와 같이 가더라도 먼 목적지까지는 동행을 하지 않는다. 리유라면 ‘길공부’를 하는 데 동행자가 있으면 지장이 되기 때문이였다.
한국의 법정스님도 홀로 있기를 즐기였다. 도가들이 도를 닦는 산중수양도 아마 보제수나무 아래서 고행을 하면서 홀로 도를 닦는 것일 것이다.
‘길공부’ 역시 조용해야 한다. 나는 늘 혼자서 길을 걸을 때 외국어단어카드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미친 사람’이다.
조용한 곳에서는 소리를 내여 읽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묵독을 한다. 길을 걸으면서 공부를 하면 정신집중이 정말 잘된다. 나는 로어, 영어, 라틴어 공부를 길을 걸으면서 견지해왔다.
길은 나의 학교이다. 특히 식물채집은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데 이런 시간을 나는 외국어공부를 하는 데 돌리였다. 내가 길에서 얻은 공짜배기 외국어학습시간은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한입으로 말할 수 없이 많다.
내가 평생 해온 ‘길공부’는 등록금도 없고 학비도 없는 “꿩 먹고 알 먹기”식의 공부로서 부지런하다면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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