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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을밤의 맥주맛
2012년 03월 29일 23시 55분  조회:2262  추천:0  작성자: 구름바다
 가을밤의 맥주맛
 
림금산
 
어언 8월도 막 저물어 저기 지평선으로부터 가을빛이 서서히 떠오른다. 아침이면 썰렁해지고 정오때에만 여름이 남긴 볕이 마지막 열도를 쏟아내느라 애쓴다.
재글재글 끓던 그 따가운 여름날, 랭장고안에서 들춰내는 얼음덩이같은 빙천맥주 두어병은 게눈감추듯해버려 시원한 맛을 새김질해볼새없이 땀으로 쪽 빠져버렸지만 이 가을날밤에 마시는 맥주맛은 벌써 별다른 멋이 풍긴다.
두어병은 싫다. 친구들이 모여앉았을때 도도하게 마시던 한상자는 더구나 싫다. 딱 한병, 빙천맥주 (그간 맥주를 배우면서부터 입에 맛을 붙인것이 우리 고장의 빙천맥주이니깐.) 한병이면 족하다.
안해도 아이를 끼고 잠에 골아떨어진 밤 10시좌우, 빙천맥주 한병을 꺼내들고 뒤창문에 마주서면 열어젖힌 창가로 은은한 가을달빛이 뛰여들어오고 황소 한마리가 돌아누울만한 뒤울안터밭에선 설렁대는 옥수수잎새들의 설레임소리가 마음에 헌헌하고 선선한 느낌을 던져준다.
맥주잔도 따로 준비가 없이 병나발을 한번 꿀꺽꿀꺽 불어대곤 넌지시 바라보는 달밤의 가을풍경, 때론 맥주병을 추켜들때 병밑으로 새여드는 은빛 달빛을 그대로 맥주에 반죽해마시는 그 재미, 더구나 쏟아지는  불볕, 내리쏘는 무더위를 막느라 연거퍼 부어넣던 여름날의 맥주놀이때완 판판 다르게 한가닥 두가닥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사색쪼각을 안주해서 마실때의 맥주맛은 자별나게 주흥을 살궈준다. 당시 (唐诗) 《진우(陈祐)》에선<<하루저녁 가을바람에 백발이 늘었다.>>고 했어도 어딘가 부글부글 끓던 한여름이 다사중에 어느덧 지나가버렸구나 하고 생각되니 오히려 한시름 놓여지는 마음이 앞선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 가을밤은 사색이 쪼각쪼각 영글어 터지는 차거웁고 깔끔한 한때이다. 하아얀 무서리도 이 가을밤에 아직까지 푸른색을 감추지 못하고있는 잎새들에 내려져선 여름의 흐드러지고 타락된 심사들을 차갑고 깨끗이 씻어내는것이요, 선들선들한 갈바람도 낮에는 신선한 맛을 풍겨준다는 인상뿐이지만 이 저녁엔 누군 열매를 많이 수확했소, 누군 농사를 망쳤소 하는식의 말귀를 나의 창가에 뿌려주지 않는가? 가을은 또 내마음에도 숱한 추억의 불심지를 돋구어주어 나로 하여금 재글재글 끓던 지난 여름의 다사중에 어느것은 옳음이요, 어느것은 틀림이요 하고 명석한 속말을 선명하게 해준다.
여름날의 열뜬 한때 나도 무더위속을 헤치며 여기저기에 발 닳게 뛰여다녔고 이것저것 수첩에다 깨알같이 긁적이기도 했으며 때론 낯을 붉히며 누구와 싸움도 많이 했다. 강물처럼 많은 맥주도 어떻게 다 마셔버렸는지 모르고 속괭이 없는 말도 얼마나 많이 불어제꼈는지 모른다. 허나 모든것의 옳고 그름을 그토록 가차없이 저울판에 올려놓는 이 가을, 가을의 엄격한 판결은 나의 여름철 한때가 영글지 못했던 한때요, 다사중에 허영과 허위 혹은 허위에 가까운 속셈을 배운 한때였음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
아, 그토록 열정에 젖어 부글부글 괴는 징글스런 여름은 종내 지나갔다. 이 가을밤에 창가너머로 터밭이며 울바자며 울바자너머 멀리 보이는 남산과 남산가까이의 거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어딘가 실제적이면서도 마음이 잘 정리되여감을 감득하게 된다.
그래서일가, 이 밤에 마시는 빙천맥주맛은 뿌려지는 가을달빛속에 더더구나 시원하다. 당나라 리하가 가을저녁에 <<물같이 서늘한 층계에 누워서>>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의 위대한 만남을 기도드렸다는 시구도 이 가을밤에 그 어느때보다 귀가에 삼삼하다. 이 시각, 가을밤의 맥주맛은 나의 삶엔 둘도 없는 안주인가 생각된다.
                            (1990년 가을  "연변일보"해란강부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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