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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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시 <기억이 나를 본다>
2019년 05월 17일 14시 06분  조회:2260  추천:0  작성자: 박문희

맛있는 시 <기억이 나를 본다> 
 
                                                         박문희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에서 <기억이 나를 본다>란 시를 뽑아 여러번 읽어보았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것이 신기했다. 아래 독후의 감상을 적어본다.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기억이 나를 본다> 전문            
 
짧은 시에 시간과 공간, 시각과 청각, 색깔과 소리,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을 동반한 여러 가지 이미지와 감각이 빈틈없이 짜여 녹음으로 새소리 숨소리로 흐른 흐름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제1련: 초여름 아침의 빛. 잠과 깨어남의 경계.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어찌 보면 일상에 평범하게 쓰일수도 있는 언어인듯 싶지만 그러나 시 전체의 연계속에서 보나 첫련의 시맛으로 보나 잠과 깨어남의 경계에 대한 사색의 실머리를 던져주는 범상치 않은 시어로서 그속에는 철학적인 의미도 다분히 깔려있다. 
 
제2련: 중심이미지의 하나에 속하는 “녹음(綠陰)”이 등장한다. “기억”은 관념어지만 여기서는 녹음을 무성하게 만들며 눈뜨고 따라오는 이미지로 체화되어있다. 말하자면 기억은 “나”의 머릿속에 묻혀있는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밖에서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지켜보는 행위의 주체로 되어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제3련: “녹음”에 이어 “카멜레온”이란 또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여기서 녹음은 배경으로 되며 눈뜨고 따라오던 기억은 배경속에 녹아들어 완벽하게 변신을 한 카멜레온으로 탈바꿈한다. 
 
이상의 제2련과 3련은 시각적 감각을 표현하고있다. 그중 2련에서 무성한 녹음으로 피어나 “눈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역시 시각적 이미지로 장치가 돼있다. 시각적 이미지에는 물론 녹음과 카멜레온을 통한 색깔의 감각도 포함된다. 
 
제4련: 두가지 소리가 등장한다. 새소리와 기억의 숨소리. 의인화된 기억에 숨소리를 부여하고 그것을 귀로 듣게 한다. 새 우짖는 소리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요란하게 울리지만 숨 쉬는 소리를 들을수 있을만큼 기억이 내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이 련은 청각적 감각을 그려내고 있다.  
 
요컨대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숨기면서까지 시간과 상관없이 계속 고집스레 따라다니며 “나”를 지켜본다. 이렇게 되어 자연스레 튀어나온 시제목이 <기억이 나를 본다>인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시 전체의 시간과 공간, 시각과 청각, 정적(靜的)인 것과 동적(動的)인 것, 색깔과 소리가 어울어진 풍만한 입체적 광경을 통해 기억(추억이나 그리움 등을 포함해서)이란 사람의 일생에 관통되는 생명현상을 관념이나 추상어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속에서 항상 접하는 사물과 직접 살아가는 삶 자체의 세부로 보여준다. 잠, 깨어남, 바깥출입, 녹음, 눈뜨고 따라오는 무성한 기억, 보임과 보이지 않음, 녹음속에 녹아드는 무성한 기억, 카멜레온, 귀먹게 할 지경의 새소리,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그 속에서도 들리는 기억의 숨소리. 아주 짧은 시속에 이 모든 생생한 이미지와 감각이 녹아든 풍성한 심상(心象)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무지 놀랍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의 영문본을 한국어로 옮긴 이경수선생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한 시적 공간에 있어서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으며 “그런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群小)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면서 이런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트란스트뢰메르가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경수선생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이 간다. 시 <기억이 나를 본다>를 통해서도 우리는 트란스트뢰메르가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확실하게, 그리고 충분히 보아낼수 있지 않는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문고 (4)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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