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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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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詩人 = 詩
2018년 02월 25일 03시 15분  조회:2456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들이 이야기하는 시인>  


+ 시인 

제 상처를 핥으며 핥으며 
살아가는 사람 
한번이 아니라 
연거푸 여러 번 
연거푸 여러 번이 아니라 
생애를 두고 
제 상처를 아끼며 아끼며 
죽어가는 사람, 시인. 
(나태주·1945-) 


+ 시인 

배 고플 때 지던 짐 배 부르니 못 지겠네 
(김용택·1948-) 


+ 시인 

시가 직업이길 나는 원했지만 
나의 직업은 허가받지 못한 철부지 공상이었다 
시인이 되기엔 
시보다 사람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산봉우리에 걸리는 저녁놀처럼 
아름답게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호반새 삭정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가듯 
사람 사는 거리와 집들 
세상과 골목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될 
비밀한 이름 
그때 나의 직업은 시인이 된다 
잎새 뒤에 숨어서 명주실 뽑아내는 은빛 누에처럼 
(이기철·1943-) 


+ 김삿갓  

시란 
시인에게 굴레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씌워진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떠나는 괴로움과 
떠도는 외로움 
시인은 출발부터가 외로움이다 

불행하게도 
벼랑을 맴돌며 노래함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기꺼이 그 숙명에 동참하겠다고 
맹세하마 
(이생진·1929-) 


+ 시인 K의 두꺼운 노트 

그는 읽고 또 읽었다 
풀잎들의 잎맥을 

그는 보고 또 보았다 
폭포에서 뛰어내리는 물방울들을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새끼 고양이의 눈물은 왜 따스한가 

그리고 썼다 

자신을 뺀 
온 우주에 관해 
(이성미·1967-) 


+ 시인이 되려면  

시인이 되려면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같이 
1kg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 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천양희·1942-) 


+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솥발산 산자락에 살면서부터 
마당에 놓아둔 나무 책상에 앉아 
시(詩)를 쓴다, 공책을 펼쳐놓고 
몽당연필로 시를 쓴다 
옛 동료들이 직장에서 일할 시간 
나는 산골 마당이 새 직장이고 
시가 유일한 직업이다 
월급도 나오지 않고 
의료보험 혜택도 없지만 
나는 이 직장이 천직(天職)인 양 즐겁다 
나의 새로운 직장 동료들은 꽃들과 바람과 
구름, 내가 중얼거리는 시를 
풀꽃이 키를 세우고 엿듣고 있다 
점심시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람이 공책을 몰래 넘기고 
구름이 내 시를 훔쳐 읽고 달아난다 
내일이면 그들은 더 멋진 시 보여주며 
나에게 약을 올릴 것이다 
이 직장에서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마당으로 출근한다 
(정일근·1958-) 


+ 시인 

시를 청탁하는 전화가 왔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링거병을 달아준 것같이 
가슴이 마구 뛰놀았다. 

시침을 떼고, 
고료부터 물었다. 
죽은 나무가 꽃이라도 피울 기세로! 
아직 살아 있다는 듯이! 

한때 시를 쓴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 후로 몇 년간 
청탁을 물리치는 게 
진통제가 필요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나저나, 
십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무대포로 살고 있군. 

아니, 
고료가 한 푼도 안 올랐다니 
나는 십칠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현역이었군. 
(장정일·1962-) 


+ 시인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소리 
풀잎 위로 뛰어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끌려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려가던 
맑은 귀를 가진 시인 잃어버리고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소리에 묻혀 사는가 
바알갛게 물든 감잎 하나를 못 버리고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두던 고운 사람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 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 
지팡이로 세상을 짚어가는 눈먼 이의 
언 손 위에 가만히 제 장갑을 벗어놓고 와도 
손이 따뜻하던 착한 시인 외면하고 
나는 어떤 이를 내 가슴속에 데려다놓은 것일까 
(도종환·1954-) 


+ 길 위에서 16 - 무명시인에게 

이 땅의 시를 채록하면서 
이름 없는 시인의 혼이 
더 고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도 권력이 있는가, 
현란한 언어의 유희에 
나는 식상했다 

이름 없는 시인을 사랑한다 
야생화를 사랑하였듯이 꽃에 
삼류가 있었던가 

허공에 매달린 거미줄 같은 
당신의 시 한 편을 찾아 나선다 
(최병무·시인,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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