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4월 2025 >>
  12345
6789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솔숲은 늘 푸른데, 숲에 난 발자국은 모두 다르더라"...
2017년 12월 28일 23시 00분  조회:3457  추천:0  작성자: 죽림
교과서에 실리지 못한 정철 시조
(ZOGLO) 2017년12월27일 

[박종인- 땅의 歷史]
솔숲은 늘 푸른데, 숲에 난 발자국은 모두 다르더라
담양의 두 사내 송강 정철과 제봉 고경명

16세기 士禍의 시대… 가혹하게 정적 죽이던 잔인한 세월… 많은 선비들이 낙향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 아버지가 사화 연루돼 유배지 전전하며 성장
담양에서 스승들 만나 문학과 세상을 배워 조선 최고 문장가이자 냉혹한 정치가로 성장
같은 마을 친구 고경… 명나라 위해 의병 일으켜 두 아들과 함께 순국
구한말 두 후손은 무장투쟁으로 항일… 신교육으로 인재 길러
아흔 살 담양 사내 강일수 "저 들판이 황금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대나무가 많은 담양에는 인물도 많다. 인물이 많으니 사연도 많다. 사연 많은 인물만 추려도 글이 한 바가지이니, 비슷한 무렵 살았던 두 사람만 이야기한다.

정철이 살았다. 16세기 정적(政敵)들에게 공포를 안겨준 냉혹한 정치가요, 21세기 대입 수험생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대문장가다. 정철의 친구 고경명도 담양에 살았다. 환갑 나이에 전쟁이 터지자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죽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산 인물들인데, 누구는 냉혹한 정치가(政治家)가 되었고 누구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의사(義士)가 되었다. 살아간, 죽어간 방법이 그리도 다르다. 같은 곳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 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정철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시조집 '근화악부(槿花樂府)'에 귀양살이 중인 노인과 기생이 주고받는 시조가 나온다. 내용이, 끔찍하다. 현대어로는 민망하다. 그대로 읽고 짐작만 해본다.
 
이미지 크게보기
전남 담양에 있는 송강정. 정계에서 은퇴한 송강 정철이 살던 정자다. 조선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는 빛나는 얼굴 뒤에는 냉정하고 거침없는 정치가의 얼굴이 숨어 있다. /박종인 기자
'玉이 옥이라커늘/반옥(玉)만 너겨떠니/이제야 보아하니/진옥(眞玉)일시 젹실(的實)하다/내게 살송곳 잇던니/뚜러 볼가 하노라' 여자가 화답한다. '철(鐵)이 철(鐵)이라커늘/섭철(鐵·잡철)만 녀겨떠니/이제야 보아하니/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내게 골풀무 잇던니/뇌겨 볼가 하노라'

'살송곳'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시인은 송강 정철이다. '골풀무'로 역공을 하는 시인은 그 송강이 귀양 시절 만난 기생 진옥이다. 이 시조는 당연히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 있지 않다.

그런데 정철에 관해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내용이 또 있다. 문헌을 본다. "선조(宣祖)가 문득 깨닫고 전교했다.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 이 여덟 글자가 간사한 그들의 속마음을 갈파하기 넉넉하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정철더러 악독하다고 평한 기록은 한두 건이 아니다. '선조는 정철을 강계로 유배시키고 간사한 정철(姦澈, 간철) 또는 독한 정철(毒澈, 독철)이라고 칭했다. 그 자손을 독종(毒種)이라고까지 했다.'(윤선도, '고산유고', 국시소(國是疏)) 바야흐로 16세기,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조선의 흑역사, 사화(士禍) 시대

조선 건국 초기부터 권력을 잡은 개국공신들을 훈구파라 한다. 훈구파는 왕권과 타협과 견제를 주고받으며 국가 체제를 만들어간다. 9대 임금 성종 대에 종합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국가 체제가 확립됐다. 이제, 비대해진 훈구파를 성종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성종은 조선 개국을 반대하며 은둔했던 지방 학자들을 대거 중용했다. 속칭 사림파다. 이 신흥 권력집단을 또 기성 권력자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성종이 죽고 4년 뒤인 연산군 4년 무오사화(1498년)를 시작으로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년)가 잇달아 터졌다. 기득권 집단인 훈구파가 갖은 핑계를 걸어 사림파를 숙청한 암흑시대다.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이 같은 일이 터지자, 많은 이들이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태가 심각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 고정주가 살던 고택. 담양 창평 삼지내마을에 있다.
충청도 공주 주학제독관(州學提督官, 감영 학교 교장)에 임명된 조헌(趙憲)이 상소를 올렸다. '(사화로 말미암아) 성수침은 성시에 은거했고 성운은 보은에 은거했고 이황은 예안으로 물러났고, 서경덕은 화담에 은둔했고 조식과 이항은 바닷가에 정착했고 성제원은 해학으로 일생을 보전했고 이지함은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했다. 모두 세상을 구제할 재목들이었으나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었다.'(1586년 선조수정실록 19년 10월 1일)

50년 권력투쟁에 연패한 사림파는 집단으로 처형되고 유배당했다. 그 가운데 정철 아버지 정유침이 있었다. 왕실과 사돈 관계라 잘나가던 정씨 집안이었다. 그런데 을사사화에 연루돼 가족이 함경도로 전라도로 경상도로 유배를 당했다. 큰아들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1551년 유배가 풀렸다. 정유첨은 전남 담양 창평으로 은둔했다. 정유침의 넷째 아들 정철 나이는 열다섯 살. 철들기 전부터 정철 인생은 꼬여 있었다.

창평에서 완성된 모순된 인격체

누이들이 왕실로 시집간 덕에 궁궐을 맘대로 드나들던 아이였다. 영민했으되, 어른들 권력투쟁으로 그 모든 걸 빼앗긴 정철이었다. 전(前) 나주 목사 김윤제가 정철을 알아보고 자기 정자 환벽당에서 글을 가르쳤다. 김윤제의 학문적 동지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양응정, 김인후가 환벽당에 모여 아이를 함께 가르쳤다. 당대 최고 지성이 총동원돼 지혜와 지식을 쥐어짰다. 정철은 당대 지성의 완전체였다. 11년 뒤 정철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당당하게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 완전체의 한 얼굴이 문학가 정철이다. 정철은 한학은 물론 16세기 유행한 언문 문학, 가사(歌辭)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또 다른 얼굴은 무자비한 정치가 정철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정철과 동향인 고경명의 후손, 고정주가 구한말 인재를 기른 학교 상월정.
수험생을 괴롭히는 명작,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본다. '이 한 몸 생겨날 제 임 좇아 생겨나니/한평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나 하나 젊어 있고 임 하나 날 괴시니/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다시 없다/평생에 원하기를 함께 가자 하였더니/늙어서 무슨 일로 홀로 두고 그리는고/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임 좇으려 하노라.'

21세기 민주공화정 언어로 옮겨본다. '날 때부터 각하를 따른 동지애는 하늘도 압니다. 청년 시절 각하께서 저를 총애하셨으니 그 마음 비할 데가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동지로 여기겠다 하셨거늘, 제가 연로하다고 하여 저를 은퇴시키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모르셔도 저는 끝까지 각하와 함께하렵니다.' 낯 간지럽지 않은가.

1589년 임진왜란 직전 동인(東人)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터졌다. 서인(西人) 영수였던 정철은 수사반장을 자임하며 동인 당원을 대거 숙청했다. 기축옥사라 한다. '임금이 정철에게 옥사를 다스리게 했다. 정철이 과격했던 동인은 죽이거나 귀양 보내니, 조정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이중환, 택리지 '복거총론-인심'편) 1000명 넘는 동인 선비들이 죽었다.

비겁한 권력자, 선조

동인 학살극인 기축옥사가 끝났다. 선조는 정철을 앞세워 비대한 집권여당을 정리했다. 옥사가 마무리될 무렵, '정철이 뜻이 다른 사람들을 없애고자 하였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선조는 그날로 공식문서 없이 비망록 한 장으로 정철을 강계로 유배시켰다.(1591년 선조수정실록 24년 5월 1일) 그가 한 말이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毒澈殺我良臣)"였으니, 아주 비겁한 토사구팽이다. 이러구러 한 여정 끝에 정철은 강화도 농가에서 굶어 죽었다.

정철의 친구, 고경명과 그 후손

정철과 같은 마을 창평에는 고경명이 살았다. 정철과 함께 식영정에서 스승 임억령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고경명은 정철보다 세 살 위다. 1591년 동래부사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 창평으로 은둔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가 중국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담양까지 날아왔다. 각지에서 도주한 관군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혼자가 아니었다. 큰아들 종후와 둘째아들 인후가 선봉장이었다. 담양에 육천 의병이 일어났다. 7월 10일 충청도 금산에서 의병-관군 연합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관군을 먼저 공격했다. 관군이 패배했다. 이에 의병군 또한 전의를 상실했으나 고경명은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다. 그날 고경명이 전사했다. 둘째아들 인후도 함께 죽었다. 첫째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위해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복수의병장이라 불린 고종후는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전해 전사했다. 세 사람은 훗날 불천위(不遷位),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는 지위를 나라로부터 받았다.
 
이미지 크게보기
정철이 어린 시절 최고 지성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환벽당.
세월이 흘렀다. 300년 뒤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1895년 고종 왕비 민씨가 일본 외교관과 깡패 집단에 살해됐다. 고경명의 후손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켰다. 고광순은 1907년 구례 연곡사에서 의병 훈련 도중 일본군 포격에 전사했다.

역시 창평에 살던 만석지기 후손 고정주는 학교를 세웠다. 영어를 가르치고 일본어를 가르치고 수학을 가르쳤다. 고씨 문중 산속 상월정(上月亭)에 영학숙을 세웠다. 학생이 불어나자 창흥의숙으로 확대했다. 그 후신이 창평초등학교다.

군량미가 떨어지면 고광순은 한 마을에 사는 고정주 집 마당에서 쌀을 훔치곤 했다. 무장투쟁과 신교육으로 노선은 달랐지만, 고정주는 고광순을 존경했고 고광순은 고정주를 존경했다.

도사 전우치와 황금리

기록에 따르면, 사화의 시대를 살았던 도사 전우치는 실존 인물이다. 실학자 이덕무는 전우치를 담양사람이라고 했다.(청장관전서) 담양 어딘가에 황금대들보를 묻었다고 했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금을 묻은 들판을 사람들은 황금리라 불렀다.

황금리 노인 강일수(91)는 오른손 세 손가락이 없다. "경운기가 먹어버렸다"고 했다. 백 년에서 10년 빠지는 세월, 함경북도 청진 일본제철소에서도 일했고 중국에서도 일했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게 잡혔다가 풀려나 "오해받기 싫어서" 국군에 자원입대도 했다. 인민군 포로 시절 배웠던 이발 기술로 국군들 머리 깎아주며 지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벼락을 네 번이나 맞은 팽나무가 서 있다. 한눈에 봐도 다 산 듯 보이는 팽나무 아래에 전우치가 황금대들보를 묻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땅을 파헤치는 대신 경운기에 손가락 먹여가며 농사를 짓는다. 손가락 몇 개 부족한 강일수가 말했다. "하우스 농사로 수확하는 방울토마토가 우리한테 황금이다." 정철의 황금, 고경명과 그 후손의 황금, 그리고 백 년을 살아온 노인의 황금. 무엇을 택할 것인가.

///조선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7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30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어릴 때부터 바른 글씨체를... 2017-01-22 0 2984
129 [시문학소사전] - "오마주"란?... 2017-01-22 0 4975
128 현대시는 외형률보다 내재률을 통해 음악성을 강조해야... 2017-01-21 0 3351
127 시인은 "버려진 집"에서 살며 시작해야... 2017-01-20 0 2740
126 시는 목적없이 그 무엇을 "찾는" 행동이다... 2017-01-20 0 2777
125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 외래어도 알고 쓰자... 2017-01-20 0 2741
124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 한글과 일본어 대조표 2017-01-20 0 3071
123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 순수 우리말로 하면 촌스러운가... 2017-01-20 0 3979
122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순수 우리말 있을 땐 외래어 쓰지 말기... 2017-01-20 0 3911
121 시작에 공부 좀 하이쏘.. 2017-01-18 0 5431
120 시작의 길잡이는 오로지 "나도 시를 쓸수 있다" 이다... 2017-01-18 0 3125
119 시는 시시한 물건짝이 옳다?... 아니다!... 2017-01-18 0 2760
118 [시문학소사전] - "벽화"와 "그래피티" 차이점?... 2017-01-16 0 4013
117 시작(詩作)의 비법 = 다독(多讀), 다사(多思), 다작(多作)... 2017-01-16 0 3146
116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딸님"과 "따님" 2017-01-15 0 2875
115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부딪히다"와 "부딪치다" 2017-01-15 0 3235
114 [쉼터] - 사랑의 노래는 학습되지 않는 막무가내의 모든 것... 2017-01-15 0 3276
113 [쉼터] - 그림자 이끌고 떠나가야겠네... 2017-01-15 0 2678
112 살맛나는 세상과 무서운 세상, 그리고 "거짓 글" 2017-01-14 0 3609
111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글쓰기, 토론식 례찬 2017-01-14 0 3090
110 문학은 "퇴고, 다시 퇴고"의 련마작업을 거치는 고된 작업... 2017-01-14 0 2941
109 詩作에서의 퇴고, 퇴고, 퇴고 끝에 탈고와 등고의 희렬!~~~ 2017-01-14 0 3101
108 시작할 때 늘 시어(詩語)의 생사존망(生死存亡)문제를 따져야... 2017-01-13 0 2695
107 섬은 늘 거기에 있지만 사람들은 그 섬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2017-01-11 0 2678
106 시적언어가 탄생과정을 거치지 않은 언어는 독자의 마음을 파고들수 없다... 2017-01-11 0 3109
105 시조라는 정형틀을 지키면서 동시에 시적 심상의 확장과 응축 등으로 새로운 시조의 미학을 창조해야... 2017-01-11 0 2805
104 "선생님은 퇴고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2017-01-08 0 2644
103 시는 희, 로, 애, 락, 욕, 지, 의, 정 등의 복합적 예술품이다... 2017-01-08 0 2756
102 문학예술가와 病, 그리고 창작 2017-01-07 0 2674
101 2017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모음 2017-01-06 0 2790
100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 위하여" 건배!... 2017-01-06 0 2891
99 금서, 70, 베스트셀러 그리고 독재자... 2017-01-06 0 2721
98 시는 늘 육화(肉化)된 언어를 찾아 써야... 2017-01-05 0 2880
97 무지하고 께제제한 눔들 하곤 할 말이 있다?... 없다!... 2017-01-04 0 3944
96 시는 불필요한 관념성, 난해성, 상투성, 피상적, 추상적인식에서 머물지 말아야... 2017-01-04 0 3161
95 [시문학소사전] - "판도라의 상자"란?... 2017-01-03 0 3830
94 [시문학소사전] - "판도라"란?... 2017-01-03 0 3975
93 시문학이 이땅에서의 생존의 길, 그것은 곧 "사랑"과 "고뇌". 2017-01-02 0 3214
92 5천권의 책을 읽고 만장의 글을 써라... 2017-01-02 0 3198
91 글쓰기 비법 아닌 비법 12 2017-01-02 0 3719
‹처음  이전 32 33 34 35 36 37 38 39 4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