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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모”, “팽팽이춤”, “돌모”을 알고 계셨나요? 원시사회 말기에 춤노래와 더불어 농악이 형성되고, 고려시기에 추형이 갖춰지기 시작해 리조에 제대로 된 귀틀이 잡히고, 삼국시기의 발전을 거치며, 변화무쌍한 발전을 거듭하다가 오늘날에는 “상모(象帽 형태모자)”라는 이름으로 조선족 민속무용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고있는 조선민족 고유의 풍속이다.
크고작은 공연무대에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며 조선민속 고유의 전통과 맥락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상모춤, 일전 필자는 상모춤의 전승과 발전의 선두에서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상모춤의 일인자, 국가급 무형문화재 제4대 상모춤 전승인, 왕청현 무형무화재 보호센터 주임 겸 왕청현 상모춤 예술단 단장인 김명춘을 만나 상모춤과 그의 러브스토리를 엿들었다.
19살 총각의 “열아홉 순정”
1958년 12월, 왕청현 배초구진 길상촌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한 김명춘은 노래잘하고, 춤잘추고, 모든 방면에서 또래들보다 두각을 보이던 아이였다. 그런 그가 상모와 끊을수 없는 인연을 시작하게 된건 1977년, 19살 무렵이였다고 한다.
왕청현 과외선전대 공연을 관람하던 중, 공연의 막바지 무대에 등장해 경쾌한 음악과 함께 화려한 기교로 한꺼번에 분위기를 고조에로 끌어올리는 상모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김명춘, 공연이 끝난후에도 상모춤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채 한달음에 무대뒤편으로 “침입”해 배우들이 벗어둔 상모를 들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피끓는 젊은 청춘의 가슴에 상모에 대한 애모가 그들먹이 고여들었던 첫 만남이였단다.
그날 이후 돈주고도 살수 없는 “상모”를 향한 애착에 결국 엄마 몰래 찬장에서 알루미늄 그릇을 꺼내다가 만지고 두드려, 조잡하지만 제접 그럴듯한 상모의 벙거지를 만들었다. 종이곽을 오리고 썰어 둥근 모양의 “채양”까지 만들어 벙거지에 덮씌우고, 버려진 낡은 자전거 바퀴에서 “살”을 빼다가 물채를 만드는가 하면 주판을 부숴 주판알을 빼내 알록달록 색실에 알알이 꿰여 상모의 꽃단장인 “꼭지”까지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창호지를 길게 오려 상모줄까지 만든 김명춘, 직접 제작하는 열정까지 불사르며 상모와의 찐한 사랑의 여정을 시작했다.
상모와 함께 한 40년, 훈장으로 빛나
그렇게 시작된 상모와의 여정이 장장 40년…견마지로의 열정을 쏟아부어 상모춤에 올인했던 지난 40여년의 세월이 오늘날 그에게 “국가급 상모춤 전승인”이라는 아름찬 훈장을 안겨주었다.
2008년 2월, 국가문화부로부터 “국가급 비물질 문화유산 중국조선족 농악무 제4대 상모춤 전승인”으로 명명되였고, 2012년 8월에는 “천인상모돌리기” 대형 프로젝트로 기네스세계기록에 등재, 2013년 2월에는 CCTV “기네스 중국의 밤” 프로그램에서 41차의 줄넘기에 성공, 2014년에는 기네스 본부의 요청을 받고 이탈리아 밀란에서 30초내에 32메터 2갈래 상모를 돌려 44차의 줄넘기에 성공하면서 41차의 기록을 경신했다. 2014년 9월에는 요청에 의해 미국 로스안젤스, 시카코 등 지역에서 정채로운 상모춤 공연을 선보였고 2011, 2013, 2015, 3년 연속 농민춘절야회서 농악무를 선보여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2010년 중앙tv 채널7 농민 음력설야회 “풍수의 기쁨” 공연장면
시대를 거스른 “보라빛 추억”
오랜 시간의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상모는 그 옛날 밭머리에서, 탈곡장에서, 저가락과 그릇을 두드리며 막간의 즐거움을 누리던 단순한 “오락”에서 부단히 업그레이드 되고 변화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전승인으로서 김명춘씨는 새로운 발굴보다는 선조들이 막걸리 한잔에 저가락으로 두드리며 즐겼던 그날의 그 정서와 맥락의 보존이야말로 십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빠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민속문화의 발전 템포에, 상모춤의 리듬변화도 기존의 단조로운 6가지 장단에서 현재는 수천가지의 리듬과 장단이 발굴돼 보다 풍성한 리듬감을 느낄수 있게 됐다. 물론 변화와 발전은 좋은 현상이고 필연적인 추세라고는 하지만 전통을 무시하는 변화와 발전은 용납할수 없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복장만 봐도 그래요. 전통의 상모춤 복장은 ‘천시지리인화’를 상징하는 빨강, 노랑, 파랑 3원색이 기본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시각적 효과와 편의에 따라 알록달록 예쁜 색상을 고집하느라 전통을 무시하는듯 보이거든요. 걱정스러워요…”
전승인 찾기-행복한 고민
요즘 상모를 배우고 있는 후대들중에 조선족의 비례가 한족보다 훨씬 적다며 막연한 한숨을 토해내는 김명춘 씨, 왕청현이 상모춤의 고향으로 명성을 떨쳤고 현재 상모춤을 구사할수 있는 인원들도 허다하지만 아직 정식 전승인 자리가 비여있는게 내심 걱정스럽다며 우려를 드러낸다.
전승인에 대한 좀 더 나은 대우와 보상이 따르기만 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좀 더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후계자 발굴과 전승에 힘다할수 있을거라는 김명춘 씨, 비록 왕청현에서 상모춤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상모춤을 표연할수 있는 인원이 기하습수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지만, 정작 낮은 대우와 인지도가 걸림돌이 되여 상모춤에 도전하는 후계자가 없는게 가장 큰 문제라며 깊은 한숨을 몰아쉰다.
2004년 9월, 중미 건교 35주년 “태평양 건너-중국예술절 개막식”서
비물질문화유산, 변화와 기적
비물질 문화유산에 등재된 전과 후의 변화에 대해 물었다.
2005년 연변주 문예경연대회 당시에 만도 광장무에 필요한 상모춤 배우 32명을 동원하는 일이 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버거웠지만 비물질 문화유산에 등재되고 관련부문과 정부측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이 이어지면서부터는 왕청현에 전례없는 상모춤 보급열풍이 불어닥쳤다.
요즘에는 유치원 꼬마들에서부터 로년층까지, 너나할것없이 상모춤을 숙명처럼 간주하고 있는 현실, 전문적인 양성센터도 하나, 둘 증가되는 추세이며 1년에 한번꼴로 현소재지 규모의 상모춤 경연도 활발히 진행중에 있다. 32명이 아니라 3200명을 동원하는 일도 식은죽 먹기일 정도로, 놀라운 파급력을 과시하고 있다며 내심 자호감을 비치는 김명춘 씨.
40년을 변함없이 상모와 함께 해온 일생, 부모님은 이름 석자를 남겨주셨지만 국가에서는 “전승인”이라는 아름찬 두번째 이름을 하사해주었다며 감격을 금치 못한다. 상모의 유래와 상모춤에 관한 모든 지식, 자료들을 집대성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자를 내는게 소박한 꿈이라는 김명춘 씨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들을 일일이 기록해 후대양성 교본으로 제공해주고 싶다며 내심 자호감을 비추었다.
유럽사회에서 성행했던 길거리 댄스문화가 세계적인 유행으로 번지며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접촉하고 느낄수 있듯이, 언젠가는 흑인들도 상모를 쓰고 전문 무대에서 활약하는 날이 있길 희망한다고…
“비물질 문화유산의 보호사업은 전승인 한명에 얽매워서는 안됩니다. 사회적인 애호가들이나 전업일군들 모두 전승인이죠. 모두 애착심을 가지면 보호사업이나 보급이 더 활발히 전개될것입니다”
상모춤 전승인으로서의 사명감 하나로 죽는 날까지 상모와 함께 할거라는 김명춘씨의 돌고 도는 인생, 상모춤의 세계화에 화려한 명함장으로 기록될 김명춘씨의 눈부신 활약에 박수를 보낸다.
글/박홍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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