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가는대로 공원 숲속으로 걸어간다. 휘청휘청…걸음마다 집요하게 매달리는 비애와 고통과 공허감을 털어버리려고 모지름을 쓴다.
찌푸린 하늘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한숨이 나온다. 말없이 서있는 우울한 소나무들도 하나같이 짙은 한숨으로 칠해놓은듯하다.
며칠전 맏형님이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둘째형님이 인사불성이 되여 자리에 누운지 여러해 되는데 맏형님마저 떠나가니 나홀로 무인고도에 버려진 기분이다.
소나무우둠지를 스치는 바람도 처량한 애가런듯 내 가슴을 후빈다. 발밑에서 바스락대는 마른 잔디풀의 속삭임은 세월의 묵은 덤불을 헤치고 나를 잊지 못할 동년의 언덕으로 데려간다.
개구쟁이시절, 내가11년 이상인 맏형님의 이름을 부르니 어머니는 형님을 그렇게 부르면 못쓴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맏형님이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맏형님”이라고 외운다는것이 자꾸 “마당형님”으로 번져졌다. 그바람에 집안을 들었다놓던 웃음폭탄…
어버지, 어머니, 형님,누나들 모두 허리건사를못하고 웃었고 나도 덩달아 웃고…가난하지만 화목한 우리 가정에 큰 웃음을 선물했던 그때의 일이 어제런듯 기억에 새롭다.
그런데 맏형님은 그뒤 정말 “마당형님”이 되였다.
맏형님은 초중때 “소년아동”신문에 작문 “소조학습의 저녁”을 발표하였다. 그때엔 아이들이 볼 신문, 잡지라고는 “소년아동”신문 하나뿐이였는데 산골학생이 거기에 글을 발표했다는것은 하늘의 별을 딴것만큼 대단한 일이였다.
첫작품을 발표하고 형님은 더 본격적으로 습작을 했고 둘째형님과 나도 숫눈길에 찍힌 발자국을 저겨딛듯 맏형님의 발자국을 콕콕 넘겨밟으며 글쓰기에 나섰다. 뒤에 둘째형님은 작문 “눈내리는 아침”을, 나는 “생일날”을 “소년아동”에 발표했다.
나를 우화창작에로 이끈 사람도 맏형님이다. 형님은 스무살이 금방 지나면서 3년간 풍담으로 앉음뱅이신세가 되여 고생한적이 있는데 투병중에 우화시를 많이 습작했 다. 우화시 “메돼지”는 버덩이를 드러낸 박색의 초상과 함께 “소년아동” 지면에서 해빛을 보기도 했다. 그때 소학생이였던 나는 형님이 보는 끄릴로브우화집을 따라 읽었고 형님을 본받아 우화시를 쓰느라고 긁적거렸다. 그것이 내 우화인생에서 걸음마전의 엎치기연습이였을것이다. 그 엎치기연습이 뒤에 첫걸음마로, 우화시창작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려 고행을 거듭한 수십년의 려정으로 이어졌다.
맏형님의 영향은 우리 동생들에게만 미친것이 아니였다.
형님의 고향인 산 좋고 공기 좋고 정서 좋은 남평이라는 이색의 땅에서는 문학의 새싹들이 곳곳에서 푸른 하늘을 향해 손을 저으며 파란 꿈을 펼치였다. 그 될성부른 함함한 새싹들은 비바람의 세례를 거쳐 최룡관, 김응룡, 박장길, 김영건(注; 이 시지기-죽림이도 허씨네 3형제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문학도였음, 그리고 남평고중을 다닐 때와 덕화농촌신용사에 출근할 때에도 자주 만났던 문학선배님이기도 하였으며, 제가 남평지역 "두만강문우회"를 결성하고 활동할 때 고문으로 모시기도 한 박식한 도사이기도 했음. 그때 김영건시인께서 연변TV문예부에 있을 때 "남평문우들 시특집"을 편집방영해주기도... 허충남선배님의 그 소탈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지금 이시각 주마등마냥 스쳐지나가고... 고인의 명복을 늦게나마 빌고 빕니다...)이라는 가지 창창하고 잎새 무성한 시나무로 자라났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였던 최룡관은 맏형님때문에 문학에 발을 들여놓아 “고생을 사서 한다”고 맏형님과 부르튼 소리를 곧잘 했다.
맏형님때문에 “고생을 사서 한” 사람들은 문학(文鹤)의 날개를 쫙 펼치고 훨훨 날아 로임 많고 살기 편한 국자가에 모였다. 그러나 선구자이고 스승인 맏형님만은 여전히 고향에 남아 제집마당을 지키였다. 진짜 “마당형님”이 된것이다.
누구보다도 재능이 처지지 않았지만 산골에서 한생을 다한 형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롭다. 하지만 형님은 도시의 유혹에 몸이 달아하지 않았고 산골에 정을 두고 만족했다. 고향에 정을 묻었기에 화룡3중에서 작문교원으로 초빙할때도 외면했다. 고향을 떠나기 아쉬워 현성길을 밟지 않았다면 남평중학교에서 교장을 하라는 청탁은 왜 밀막아버렸는지? 산골에서도 알짜 백성으로 사는것이 편했던 모양이다.
산골백성이 달갑게 된 형님의 시작품들에는 고향의 정서가 청초한 산꽃향기처럼 묻어났다.
오불꼬불 길을 따라
멀리 떨어진 우리 시골
내물도 길을 흉내 내듯
오불꼬불 흐르는 곳
하늘도 좁은 산들사이에
오불꼬불 펼쳐졌다.
형님의 동시 “시골”이다.
형님은 다산작가는 아니였지만 자기 작품에 아주 책임졌다. “나는 남이 어떻게 썼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안썼는지 알고싶다”고 했다.
2002년봄, 나는 남평에 가서 형님과 같이 사흘동안 고향산천을 돌아다녔다.
형님이 태를 묻은 조선 무산군 량영리의 오리장마을이 두만강 건너 먼 꿈처럼 바라보이는 고향의 뒤산마루 “가마후렁”에 올랐을때였다. 오래만에 고향산 정상에 오른 우리는 푸른 하늘에 얼굴을 묻고 덧없는 인생에 대해 주고받았다. 형님은 젊어서는 시를 쓰고 늙으막엔 아동문학작품을 쓰라는 말이 백번 옳다면서 누구도 써본적 없는 독특한 형식의 장편동화를 쓰고싶다고 했다.
우리는 발아래 펼쳐진 고향의 다정한 모습을 눈에 담다가 군데군데 가랑잎이 가슴까지 쌓인 오봉바위골에 발자국을 남기며 산을 내렸다. 나는 형님이 뒤에서 돌이라도 굴릴가봐 골짜기 중간이 아닌 한옆에 치우쳐서 걸었다.
“너 내가 돌을 굴릴가봐 한켠에 붙는게지?”
“그걸 아는걸 보니 아직 멀었구만! 치매걱정은 안해도 되겠소.”
내 말에 형님은 허허 웃었다.
“너 나를 아주 귀신취급하는구나!”
그때만 해도 가파른 산길을 별 불편이 없이 걷던 형님이 불과 7년만에 하려던 일을 다 접어두고 불귀의 객이 되여 떠나간것이다.
고생속에서 한생을 보내면서도 작은 행복에 만족했던 형님, 뼈를 깎아 살을 깎아 한편한편의 글을 빚어내며 자신만의 보람을 찾고 늘 락천적인 웃음을 잃지 않았던 형님, 형님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담요 하나를 깔고 옆에 책 하나를 놓고 누워있던 형님의 자리는 비여있다. 형님에 대한 그리움만 그물그물 피여나는 휑뎅그렁한 빈 자리…
솔방울이 보인다. 허리를 굽혀 집어들었다. 잣알이 다 빠져버린 묵은 솔방울, 정성껏 키운 기름진 씨앗을 공원의 귀동자가이드 다람쥐에게 내주고 빈몸으로 누워있는 솔방울,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는 미련없이 생명의 근원에서 뛰여내린 이 자연의 뜻을 읽노라니 인생도 이와 같구나 하는 느낌이다. 하다면 맏형님도 심혈을 몰부어 키워온 알맹이를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갈때가 되여 훌쩍 떠나간것일가?. 아니,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나 애석하다. 형님은 아직 가서는 안된다. 형님은 하려던 일을 채 하지 못했다. 우리 3형제를 위해서라도 남아서 재능을 더 빛내야 한다. 하지만 이미 길을 달리한 형님, 무엇이 급하여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발길을 내디뎠을을가? 내 한숨의 안개속으로 멀어져가는 형님의 뒤모습…
자연은 새봄을 선사했건만 기다려오던 이 봄은 형님과의 영별을 통보하는 슬픈 봄이 되였다. 누구나 한번 가야 하는 길이언만 좀 더 앉았다 가도 될것을 총망히 떠나가니 더 슬프다. 평생 남에게 페를 끼치기 싫어하는 분이라 조문객들을 위해 날씨가 풀리자 서둘러 떠나갔으리라!
이제 한달남짓 지나면 청명이다. 묵은 풀덤불을 뚫고 연두빛 새싹이 눈을 뜰 때 형님을 찾아 술잔을 부어올리며 가슴저미는 아픔을 딛고 형님을 영영 바래련다.
2009.2.
허충남(许忠男)
(1)일반략력
성명: 허충남,
성별: 남,
1939년 9월 12일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출생.
2009년 병으로 사망.
한평생 교원사업에 종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2)창작성과
동화집 《거꾸로나라 려행기》 (1992. 연변인민출판사).
(3)수상정황
1992년 동화집 《거꾸로나라 려행기>>가 <<리영식아동문학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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