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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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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0일 21시 55분  조회:3204  추천:0  작성자: 죽림
유명인사들의 명언과 격언 모음 집 – 89
R.M.릴케 <말테의 수기> 中


* 수염이 텁수룩하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곧 패배한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단순한 비렁뱅이라기보다 패배한 자들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원래 그들은 거지가 아니었다. 확실히 이 두 부류는 구별해야 될 것이다. 그들은 운명이 뱉아 버린 '인간'이란 과실의 껍질이며 찌꺼기라고 할 수 있다. 운명이라는 타액(唾液)에 후줄근히 젖어, 그들은 담벼락이나 가로등 또는 광고탑 같은 데에 늘어붙어 있거나, 또는 느릿느릿 골목을 따라 흘러내리고, 어둡고 지저분한 흔적을 뒤에 남기곤 하는 것이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 도대체 그러한 노파는 나한테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침실용 테이블의 서랍 같은 것에다 얼마 안되는 단추와 실을 담아가지고 굴 속에서라도 기어나온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나와 나란히 걸어가며, 나를 흘끔거리는 것일까? 눈물이 구질구질한 눈으로 나의 정체를 알려고 애쓰고 있었다. 벌겋게 문드러진 눈꺼풀에 싸인 눈알은 병자가 뱉아놓은 시퍼런 가래침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키가 작은 백발의 노파는 무엇 때문에 나와 나란히 진열장 앞에 십오분씩이나 서 있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그녀는 내게 낡아빠진 길다란 연필을 한 자루 내보였다. 연필은, 움켜 쥔 병신 손가락 사이에서 무섭게 애를 쓰면서 천천히 밀려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진열장 속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는 척하며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이미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거기 서서 자기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단지 연필만 사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암호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속을 아는 사람들끼리만의 암호, 그리고 패배한 자들만이 알고 있는 암호 같았다. 그런 데서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어디든지 가서 무엇이든 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내게 가르쳐 주는 듯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암호를 작정한 일종의 약속 같은 것이 되어 있고, 이런 장면은 언제든지 내가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그런 감정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늘 벗어날 수가 없었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베를레에느는 아니다. 빠리에 살고 있는 시인은 아니다. 그런 시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나의 시인은 산 속에 조용한 집을 한 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시인은 맑은 대기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다. 자기 집 창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정답고 외로운 먼 들이 비치는 책장의 유리문에 대해서 이야기한 행복한 시인이다. (譯註- 아마 프란시스 쟘을 말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나는 바로 이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는 처녀들을 그렇게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처녀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많다. 그는 백년 전에 살고 있던 처녀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 처녀가 죽은 것쯤은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그 처녀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볼 것이다. 길게 고풍의 장식적인 문자로 슬쩍 날씬하게 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는 처녀들의 옛 동무들이 시집간 후에 갖게 된 이름도 소리내어 불러볼 것이다. 그런 이름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련히 운명이 깃들어 함께 울리고, 슬픈 환멸과 죽음도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그의 흑단(黑檀)으로 만든 서안(書案) 서랍 속에는, 그런 옛날 처녀들의, 색이 바랜 편지며 뜯어져 나간 일기의 한 장쯤 들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기장에는 이 사람 저 사람들의 생일날 이야기나 여름날에 있었던 모임에 대한 이야기도 남아 있을 것이다. 혹 그의 침실의 뒷벽에 놓인 커다란 장롱에는 서랍이 달렸고, 그 속에 그녀들의 봄차림이 간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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