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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미화되지 않는 기록
2016년 01월 15일 23시 20분  조회:3267  추천:0  작성자: 죽림
대만 嘉義시에서 (유리구두 교회).

 
한국 다큐사진의 첫 장을 연

                            이경모 선생
격동기 한국현대사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
 
   
 

 사진은 기록이다. 그것도 윤색되고 미화되지 않는 기록이다.

특히 다큐사진은 그 자체가 역사의 재현이자 하나의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다큐의 첫 장을 연 고 이경모 선생은 한국사진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누구보다 역사현장에 근접해 있었고 목숨을 위협 받는 순간에도 쉼 없는 카메라를 눌렀다. 다큐사진작가로써 고 이경모 선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순사건이다. 격동의 해방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기이자 민족의 암흑기였다.

해방이후 좌우익이라는 이념의 악령이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악마적 대치는 수많은 무고한 인명의 살상과 비극을 잉태한 것이었다. 형제도 없고 이웃도, 친구도 없는 비정한 시대가 결국 폭발한 것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그는 바로 그곳에 있었고 그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묵묵히 카메라에 담았다.

이경모는 광양읍 인서리에서 나고 자랐다. 본래 그는 화가 지망생. 1944년 18세의 광주서중 학생 이경모는 제23회 선전(鮮展)에 입선했다. 당시 상당한 화제감이었던 이 행운으로 중학생이던 이경모는 일본 우에노 미술학교 진학을 희망했다. 그러나 전남 광양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지방유지인 부친은 경성법전 진학을 권유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처지의 젊은 이경모는 야외에서 그림 스케치작업을 하거나, 아니면 당시 공개추첨 방식으로 겨우 구입할 수 있었던 값비싼 카메라를 메고 사진촬영을 하면서 해방직전까지 광양에 눌러앉아 소일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해방직후부터 전혀 예기치 못했던 ‘현대사 격동의 현장’을 운명처럼 따라다니게 된다.

“그의 사진이 없었더라면 우리 현대사의 이미지들은 얼마쯤은 황량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듣는 사진작가 이경모. 이경모가 사진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돼 한반도가 소용돌이 치던 1946년 1월 광주일보의 전신인 호남신문사의 사진부장이 되면서 부터다. 이경모의 나이 스무 살 되던 해다.

호남신문은 일제시대 도 단위 신문이었던 전남신보를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건준위가 접수해 문을 연 것으로 사장은 당시 전남 건준위장이었던 박준규가 맡았고 부사장겸 주필은 노산 이은상이었다.

입사한 계기는 노산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1938년 이후 은둔해 온 노산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광양에 내려왔고 여기서 광양지역의 유지였던 부친과 교류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부친의 심부름으로 키도 작고 볼 품 없는 사람에게 쌀 봉지를 갖다 주고는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노산’이었다. 노산은 이후 1945년 5월 경찰서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가 정보가 누설돼 붙잡힌 후 광양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고 호남신문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경모를 사진기자로 불러올렸다.

이 같은 인연으로 이경모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전남 광주와 여수, 순천, 광양 등지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그가 1945년 8월 시점에 찍은 광양의 사진은 해방 직후 벌어졌던 보편적 상황을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한국 사진사에서 바라본 ‘이경모 사진’의 진수는 무엇보다 여순사건의 기록이다. 1946년 1월부터 호남신문의 유일한 사진부 기자로서 부장직을 겸임했던 그는 이 신문사 근무중 여순사건과 맞닥뜨린다. 여순사건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48년 10월19일 밤에 제14연대 1개 대대병력이 일으킨 봉기가 그 시발이다. 이튿날인 20일 출근하면서 이 소식을 접한 그는 ‘현장에 가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판단에 따라 곧바로 시가전이 한창인 순천을 찾는다.

취재장비는 필름을 단 한 장만 장착해 단발승부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일제 오토프레스 미놀타. 순천지검에 설치된 반군토벌사령관 송호성 준장의 22일 기자회견장에 유일한 사진기자로 참석한 것도 그다. 그가 좌우익 충돌의 참상을 담은 중요한 사진을 연속적으로 얻은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신발이 가지런히 비어져 나온 채로 멍석에 둘둘 말려 지게 위에 올려져 대강 수습된 시신, 그 앞에서 석양으로 그림자를 길게 늘인 아낙이 자신의 옷고름을 쥐고 울음을 삼키고 있는 비통한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전시라는 비상상황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학살, 살육, 그것도 동족간 살육현장을 한 걸음 비켜선 채 포착한 이 사진이 전해주는 고발정신과 휴머니즘은 오늘날에도 대단한 것으로 평가된다. 비극의 리얼리티가 생생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시신의 주인공이 이경모의 손아래 친구라는 점이다. 이경모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은 당시 서울대 법대생 김영배다. 당시 현장은 광양과 순천의 경계부근이었고, 이경모는 집안머슴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친구의 어머니를 달래는 한편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영배야,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연방 되뇌었다는 것이 그의 술회다.

이 때 잡은 여순사건의 현장사진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이미지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장면들이다. 여학생들이 죽창을 손에 쥔 채 사열을 받고 있는 대동처녀단 광양지부 결단식 사진 등 그의 사진은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경모 선생이 보도사진 작업을 집중적으로 전개한 기간은 7년7개월에 불과하지만 그가 한국사진사에 남겨놓은 족적은 현장성과 역사성과 더불어 실로 재평가돼야 한다. 53년 국무총리 공보비서관, 55년 국제보도연맹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사진 일선에서 멀어지게 됐던 그는 50년대 중반이후의 사진활동에서는 문화재 사진, 풍경사진 등 ‘한국적 영상미’로 영역을 바꿨다.

그러나 그의 여수·순천반란사건 다큐먼트는 다큐멘터리사진의 시초가 됐다. 이후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사진대 문관으로 활동하며 신탁통치 논란, 좌우익 격돌, 여순사건과 6.25등의 현장을 두루 증언하면서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더나가 선생이 파인더에 올리던 대상은 광양과 순천, 전남 지역의 농촌 스케치에 실린 정겨운 고향의 풍물들, 정통성이 훼손되기 전 우리 문화 유산과 문화재 등 다양했다.

복원되기 직전의 경주 석굴암 본존불, 충남 서산 마애삼존불, 서울 뚝섬과 나주 가마니 공판장 등 전국을 누비면서 찍은 사진들은 전시된 사진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것으로, 다큐사진 작가로써뿐 아니라 예술작가로써의 평가가 수반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해준다.

한편 이경모 선생은 이화여대, 서라벌예술대, 동신대학교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카메라 수집가였다. 그 역사의 편린들은 1996년 동신대 영상박물관이 세워지면서 집대성됐다. 선생은 국내 카메라 제작사인 대그룹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진예술의 후진 양성을 위해서는 대학 내에 카메라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모든 사진 관련 소장품을 기증했다. 만년에는 젊은 시절의 다큐사진들을 모아 두 권의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이경모 사진집’을 펴내 자기정리도 마무리했다.

변변한 사진집 한 권 갖지 못한 작가들이 상당수인데 비해 이런 자기정리는 큰 행운이다. 또 사진집이 나오면서 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92년)을 받았고, 백상출판문화상을 두 차례(90, 96년) 수상했다.

한국 다큐 사진의 시조로 평가 받아온 선생은 일흔 다섯의 나이로 지난 2001년 5월 17일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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