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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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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 이승하
2015년 04월 19일 22시 46분  조회:5201  추천:0  작성자: 죽림

 

 

 

  시간 : 1999년 1월 13일
  장소 : 김춘수 시인 명일동 자택

   이승하 : 안녕하십니까? 한동안 겨울 날씨가 너무 포근해 기상 이변에 따른 이상 난동인가 했는데 최근 들어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겨울이 겨울다워야 하지만 바깥 출입하시기에 불편한 날씨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김춘수 : 몸은 그저 그만한데 기억력이 많이 쇠퇴했어요.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잊어버리는 수가 다 있습니다. 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이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 실례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미당 선생이 자고 일어나면 산 이름을 수백 개씩 외운다는데, 그 심정을 알겠어요.
  

   이승하 : 그래도 선생님 연세가 올해 일흔여덟이 되신 것을 감안하면 아주 건강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김춘수 : 내가 생일이 좀 늦어요. 11월 25일이니까 만으로 치면 일흔여섯 겨우 넘긴 셈인데 우리 나이로 쳐서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할까요. (웃음)
  

   이승하 : 작년 12월, 시와시학상 수상식장에서도 장시간 축사를 하셨고, 문학아카데미 주관 시의 축제 행사 때에도 '시의 두 가지 유형'에 대해 장시간 특강을 하시고 질문도 받으셨다면서요? 저는 시의 축제 행사 때 가보질 못해 특강 내용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춘수 :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서경』에 '詩言志家永言'(시는 뜻한 바를 말로 표현한 것이며 노래는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란 말이 나오죠. 여기서 '뜻'이란 서양의 50년대 신비평 그룹이 말한 'poetry of the will'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will'은 의지가 아니라 관념이나 사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platonic poetry', 즉 관념시도 거의 같은 말입니다. 이 유형은 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 왔을 만큼 긴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근대에 들어서 'physical poetry'(물질시)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사상이나 관념을 배제하는 또 하나의 유형이지요. 관념과 의지는 얕잡아서 말하면 메시지인데, 시에다 어떤 메시지를 담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입니다. 관념이나 메시지는 사물에 대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물질시는 판단을 유보하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지요. 어떤 사물과 사실을 묘사하는 데 그칠 뿐 주의 주장을 배제합니다. 시에는 크게 이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이 그날의 강연 요지였습니다. 
  

   이승하 : 선생님께서 한때 말씀하셨던 무의미시는 물질시의 갈래로 봐야겠군요. 그런데 1991년에 발간하신 시론집 『시의 위상』을 보니까 한국 현대시의 계보를 세 가지로 나누어놓았더군요. 사적인 개인의 감정을 드러낸 서정적인 가닥과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두드러진 현실 참여적인 가닥, 그리고 문화의식이나 예술적 차원에서의 시대감각이 민감한, 모더니즘이라 일컬어지는 가닥이 그것이라는 삼분법을 본 기억이 납니다. 지난번의 구분법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갈래가 하나로 합쳐졌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김춘수 : 아, 그럴 수가 있겠습니다. 
  

   이승하 : 우리 시를 보면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국내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현실 참여적인 가닥은 현저히 줄어든 셈인데, 한때 무의미시론을 주창했던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김춘수 : 사회 문제는 늘 있는 것인데 동구권 몰락으로 현실 참여시의 창작이 줄어든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요즘도 세상이 얼마나 어렵고 어지럽습니까.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의 갑작스런 위축은 그때 그런 시를 활발히 썼던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어떤 기대가 있었다거나 시세에 편승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다른 나라 시를 보더라도 사회 참여의 경향은 있어온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구권은 동구권이고 우리 사회는 우리 사회인데 왜 공산주의의 몰락이 우리 시인들한테 영향을 주었는지 이해가 잘 안 되고 아쉽기도 하고 그래요.
  

   이승하 : 메시지의 시를 배격해오신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뜻밖입니다. 아무튼 참여시론을 외친 김수영의 영향력은 후배 시인들과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여전히 절대적입니다. 김수영 시인과 그의 영향력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김춘수 : 김수영은 나랑 나이도 비슷했고 문단에 나온 것도 비슷했습니다. 나보다 한 살 위였죠. 그런데 선후배와 동년배 시인을 망라해 그처럼 내가 강한 압력을 느낀 사람은 없었습니다. 김수영은 모더니스트로 출발했는데, 그래서 부산 피난 시절 후반기 동인들과 가깝게 지냈지요. 후반기 동인과 그 주변 시인들 가운데 김수영은 내 눈에 그때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습니다. 후반기 동인은 저한테도 가입 의사를 타진해왔는데 저와는 기질이 맞지 않아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어떻든 방법론과 기교에 있어 모더니스트임에 틀림없었던 김수영은 20년대를 풍미한 T.S. 엘리엇보다 30년대 영국 뉴 컨트리파를 이루었던 W.H. 오든과 스티븐 스펜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엘리엇이 내면성이 강한 시인이었던 반면 오든과 스펜더는 사회성 내지는 혁명성이 강했지 않습니까. 혁명성이 강한 시의 탄생은 유럽 지식인 사회의 좌경화와 스페인 내전, 미국 경제공황 등의 영향 때문인데, 4.19를 전후해 김수영도 뉴 컨트리파 시인들을 의식해 시적 전환을 꾀했던 것입니다. 김수영에 대해 의식·무의식적으로 경쟁의식을 갖고 있던 저는 그가 참여시론을 전개하자 그 반대의 경향인 내면세계를 더욱 열심히 파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려고 용을 쓰게 된 데는 김수영이란 존재가 의식되었기 때문이지요.
  

   이승하 : 김수영 시인에게 그렇게 강력하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아까 미당 서정주 선생님 말씀을 잠깐 하셨는데 문단에서 오랜 교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미당 선생님의 시세계는 선생님과 유사한 부분보다는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미당의 시를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김춘수 : 그 무엇보다 그분한테는 니체 사상의 영향이 강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미당 자신도 보들레르보다 니체의 사상에 경도된 적이 있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문둥이」 같은 시를 보면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긍정과 예찬이지요. 도덕이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인데, 도덕을 초월하는 생명사상이 그의 초기 시에는 아주 강했습니다. 모국어의 유려한 구사와 아울러 미당 시의 이런 측면은 무척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승하 : 선생님께서는 90년대에도 정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셨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시론집 『시의 위상』을 비롯하여 시집『처용단장』『비에 젖은 달』『서서 잠자는 숲』『들림, 도스토예프스키』4권을 90년대에 출간하셨습니다. 작품집 출간 계획이 지금 잡혀 있는 것이 있습니까?
  

   김춘수 : 이 달 말경에 문학세계사에서 시집이 한 권 나올 예정으로 있습니다.
  

   이승하 : 칠순에 접어들어 펴낸 다섯 권의 시집, 정말 왕성한 작품 활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춘수 : 작품의 질이 문제지요.
  

   이승하 : 지난 겨울호『세계의 문학』에는 평론가 이태동 선생이 선생님의 문학을 총정리한 글을 실었습니다. 이태동 선생은 선생님의 시를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론적 추구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시적 궤적은 사계의 변천 과정에서 명멸하는 생명체의 그것과 유사함을 지니고 있다고, 즉 생명체의 성장 과정이 주변환경의 영향으로 굴절되는 모습을 보이듯이 외부적인 상황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타령조 기타』의 세계를 지나면서 관념을 멀리하고 실존적인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던데, 여기에 대해 동의하시는지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춘수 : 저도 이태동 씨의 그 글을 유심히 읽었는데 제 창작 의도와는 전혀 다른 진단을 하고 있더군요. 사계의 변천 과정이니 외부적인 상황과의 깊은 관계니 실존적인 현실묘사니 하는 것 등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이지만 여기에 대한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평론가가 제 시를 어떻게 보느냐는 그분의 자유 아닙니까. 상당히 긴 분량으로, 공들여서 쓴 글을 놓고 반박하기가 뭐합니다.

 

   이승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이태동 선생의 평가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패러디를 통해 부조리한 역사와 비극적인 삶의 현실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새로우면서도 허무적인 일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조리한 역사와 비극적인 삶의 현실에 저항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한 시적 형상화는 인정할 수 있지만 선생님 시의 허무적인 일면에 대한 언급은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김춘수 : 허무라는 말이 거두절미하고 갑작스레 나오니 당황하게 되더군요. 허무라는 말이 나왔으니 도스토예프스키 소설과 관련시켜 '허무'에 대해 이런 말은 하고 싶습니다. 그의 소설을 보면 혁명가들이 많이 나오지요. 그런데 상당수가 허무주의자예요. 도스토예프스키는 희랍정교주의자 내지는 슬라브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구에서 들어온 사회주의니 혁명사상이니 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요. 러시아가 공산주의 치하였을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금서였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회주의자를 허무주의자와 같은 맥락에서 봤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혁명가들을 신을 잃어버린 사람들, 즉 니힐리스트라고 본 것을 공산당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승하 : 저는 죽음을 향한 인간의 도정이 결코 허무로만 귀결되지 않음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내재되어 있음을『들림,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신에 의한 인간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오셨는지요? 예수의 다른 이름이 구세주인데, 선생님이 쓰신 시 가운데 예수가 나오는 것도 여러 편 있지 않습니까?
  

   김춘수 : 나는 미션 계통의 유치원에 다닌 탓인지 어릴 때부터 기독교가 정서적으로, 감각적으로 몸에 배었습니다. 청·장년이 된 이후로는 기독교, 특히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꾸준한 관심이랄까, 집요한 관심이랄까. 성경은 지금까지도 내 애독서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책이 나왔는데 상당수를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성서에 기록된 기적(奇蹟)의 대목에만 이르면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에 대해서 지적인 관심으로만 접근하게 되더군요. 기적의 문제는 기독교인이라면 과학자 등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무조건 그대로 믿어버리지 않습니까. 나는 그게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에 대한 관심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에 있어서는 구원의 문제, 인간에 있어서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승하 : 지난번 시집을 보면 원죄, 혹은 선악의 문제로 고민하는 소설 속의 인간들이 다수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 자신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속의 인물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선생님 나름의 종교관을 펼쳐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춘수 : 그럴 수 있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느님을 믿는 희랍 정교주의자였지만 기독교를 일방적으로 찬양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선인과 악인을, 혁명가와 반혁명가(지주·자본가·종교인 등)를 등장시켜 갈등케 했지요.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딱 갈라서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극악무도한 인간과 천진무구한 인간이 나와 다같이 고민하고 갈등하지요. 신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은 확실합니다. 한데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갈등의 양상만 보여줄 뿐입니다. 해결을 줄기차게 모색하되 해결된 세계는 보여주지 않아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아주 공감했던 것입니다. 자기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 것, 갈등만 있고 해결이 없는 것, 그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는 예수에 대한 관심은 갖되 기독교인이 되지 못한 나의 종교관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하 : 선생님은『현대문학』1월호에「계단을 위한 바리에테」를 발표하셨고, 이번 호『시와시학』지에 연작시「의자를 위한 바리에떼」7편과「계단을 위한 바리에떼」3편을 발표하셨습니다. '바리에떼'란 다양성·변화·변용, 뭐 이런 뜻이니 변주곡으로 해석하면 될 듯합니다. 의자와 계단 같은 사물을 제목에 끌어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춘수 : 의자와 계단 연작시가 스무 편 정도 돼 이번에 나올 시집의 제목을 '의자와 계단'으로 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자는 휴식과 기다림을 상징합니다. 사람이 의자에 앉으면 휴식의 상태가, 비어 있으면 기다림의 상태가 되지요. 나는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즉 정신의 안정을 꾀하고 싶은데, 종교적으로 말하면 구원을 얻고 싶은데, 내 의자는 늘 비어 있습니다. 내 의자는 늘 비어 있는 상태이고, 나도 거기 앉고 싶은데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정신적 안정을 줄곧 갈망하는데 한시도 안정이 안 되는 거지요. 계단이란 것은 무한정 올라갈 수가 없죠. 올라가게끔 만들어져 있지만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것이 계단입니다. 인간 본연의 이율배반성이나 자기모순성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계단이 아닌가 합니다. 신학과 연결시키면 안티노미(antinomy)의 상태로 있는 것이 계단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이란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이승하 : 그러니까 의자는 구원의 불가능함을, 계단은 인간 존재의 이율배반성을 의미하는 것이겠군요. 의자에 가서 앉고 싶어도, 즉 기독교인이 되어 내 몸과 영혼을 신께 온전히 의탁하고 싶어도 내 의자는 늘 비어 있으니 휴식과 안정,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또 보통의 인간이 매일 도처에서 만나는 계단은 지혜이건 재산이건 명리이건 쌓아 올라가면 반드시 버리고 내려가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가를 일깨워주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사물을 갖고 사상을 들려준 상징화의 기법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김춘수 :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이승하 :『계단을 위한 바리에테』는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어린 시절이 나오는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시적 화자와 니버가 친구로 등장합니다. 니버란 녀석이 내 호주머니에 밤 몇 톨을 쑤셔넣는데, 집에 가서 꺼내보니 껍질에 설탕가루가 묻어 있고 알은 다 썩어 있더라는 얘기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의적인 표현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하고…….
  

   김춘수 : 라인홀드 니버란 이름은 독일식이지만 미국 국적이었지요.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의 저작 『인간의 운명』은 내가 대학에 다니면서 탐독했던 작품이지요. 사실에 있어 그 시의 니버는 어린 날의 나고, 니버의 친구는 이웃집에 살던 일본인 아이였습니다. 그 얘기는 자전소설 『꽃과 여우』에도 나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였을 겁니다. 이웃집에 사는 일본인 아이가 꼭 그런 식으로 짓궂은 장난을 하기에 나도 그렇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놈이 겁이 나 내 앞에 영 안 나타나는 겁니다. 그 일을 생각해보니까 니버 같은 유명한 신학자도 어릴 때는 그렇게 짓궂은 개구쟁이였는데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는 수양을 통해 유명한 신학자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그런 시를 지어본 것입니다.
  

   이승하 : 그럼 계단을 올라가는 수행을 통해 인간적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노력을 나도 한번 해볼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가져본 것이 이 시의 숨은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김춘수 :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이승하 :「의자를 위한 바리에떼」는 그 넷부터 시작하여 그 열까지 7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에 의자가 있어 '자리'나 '지위'를 생각했습니다만 읽어보니 그런 뜻은 들어 있지 않은 듯합니다. 의자에 얽힌 추억담으로 읽혀지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고,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그 넷'에는 헤르몬산, 갈릴리의 호수, 요단강이 나와 선생님의 종교적인 명상 같은 것을 엿보게 됩니다. 독자를 위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해주시는 것이 가능할는지요?
  

   김춘수 : 예수에 대한 관심이 하나의 갈망으로 굳어진 내용입니다.
  

   이승하 : 아, 그렇습니까. '그 다섯'에는 죽어서 나비가 된 어릴 적 소꿉질 친구 '옥수나'가 나옵니다. 왜 옥수나가 대낮인데 공지초롱을 들리고 연못가 수련꽃 그늘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구요, "슬픔은 키가 작아/바람 부는 날 더욱 작게 몸을 웅그린다"는 것도 저로서는 제목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파악되지 않습니다.
  

   김춘수 : 옥수나란 이름은 지어낸 것입니다. 이름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유치원생쯤 되는 대여섯 살 때도 이성을 느낄 수 있거든요. 내가 좋아했던 계집아이가 죽고 없는 세상은 쓸쓸합니다. 슬플 때는 사람이 움츠러드는데 바람까지 부는 날엔 더욱 추워 웅크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가 나비가 되어 환생하기를 꿈꾸는 것이지요. 이 시에는 평생 갈망이 충족되지 않는 데서 오는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근원적인 갈망을 평생 지고 가는 존재가 아닙니까. 존재 그 자체가 슬픈 것이지요.
  

   이승하 : 유년시절에 느낀 이성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을 그려 인간의 유한성, 그것의 슬픔을 노래해본 시로군요. 의자는 기다림과 갈망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제목과 잘 들어맞습니다. 루오는 현대 화가 중에서도 기독교적 색채가 특히 강한 사람입니다. 루오가 「교외의 예수」를 그린 일에 상당한 상징을 부여한 듯합니다. 이 작품에 대한 선생님의 창작 의도는 무엇입니까?
  

   김춘수 : 루오는 나이가 많이 들어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해 세계적인 화가가 된 사람이지요. 그의 작품「교외의 예수」에는 예수의 얼굴이 없고 윤곽만 있지 않습니까. 그 옆의 두 사람도 마찬가지고. 루오도 예수의 이목구비를 그려낼 수 없어 좌절감을 겪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수는 참 걷잡을 수 없는 인물이에요. (웃음)
  

   이승하 :「그 일곱」과 「그 여덟」은 쉽고도 어려운데 어둠과의 대결 및 시간에 대한 은유적 처리로 느껴졌고, 「그 아홉」은 고향에서의 기억을 더듬은 시로 읽혀지던데요.
  

   김춘수 :「그 일곱」은 기다리는 자를 그린 일종의 스케치입니다. 쓸쓸한 풍경화지요.「그 여덟」은 인간의 고독감을 그린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갈망하는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객관세상이어서 아무 감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객체는 다 냉랭하다는 것이죠. 그 다음 시는 끝부분 "허리가 물렁물렁해진다"는 표현에 주목해주기 바랍니다. 앞서 말한 의자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는 일이 허전하기도 하고 뭔가 충족되지 않는 델리킷한 감정을 담은 것입니다.

   이승하 :「그 열」에는 요한 바오로 2세와 한국의 예술가들이 나오는데, 일종의 풍자시로 읽혀집니다. 풍자시로 읽어도 괜찮은 작품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춘수 : 아닙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왔을 때 저도 초청을 받아 갔었는데 그분의 인상이 써놓은 그대로였습니다. 그가 풍겨주는 분위기와 그가 읽는 글(메시지)에 흡수·동화되어 흡족함을 느낀 상태를 그대로 그린 것입니다. 
  

   이승하 :「계단을 위한 바리에떼」는 계단에 얽힌 어린 날의 추억입니까? 「그 하나」와 「그 둘」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그 셋」은 제 안목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잼이 자메이카의 약어라는 것과 계단과의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가 시를 보는 눈이 이렇게 미욱하여 영 부끄럽습니다. 
  

   김춘수 : 앞의 두 편은 성장의 한 과정을 그린 것이지요. 잼이 자메이카의 약어라는 것을 어디서 우연히 봤어요. 잼은 빵에 발라서 먹는 것인데 자메이카의 약어이기도 하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라 이름조차 확 줄여서 사용하듯이 우리가 무엇에 도달하려면 제대로 순서를 밟아야 하는데 성급하게 하려 듭니다. 그런 것에 대한 경구적인 의미를 담아봤습니다. 
  

   이승하 :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지 않고 성급하게 이루고자 하는 젊은 사람들의 조급함에 대한 교훈적인 의미를 담은 시로군요. 이제까지 여러 시편에 대한 세심한 설명을 듣고 보니 선생님의 최근작들이 대체로 신 없는 세계에서의 인간 구원과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 작품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내시는 시집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선생님의 시집은 해외 소개도 활발합니다. 시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영역되고 『꽃을 위한 서시』가 불역된 바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번역된 시집이 있습니까?
  

   김춘수 : 강상구 씨 번역으로 일역 중인 것이 한 권 있고요, 서울대 서반아어과 교수가 번역하고 있는 것이 한 권 있습니다.
  

   이승하 : 선생님은 시인이시지만 『한국현대시형태론』『시론』『의미와 무의미』『시의 위상』 등의 시론집을 내신 이론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평단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되시면 한두 가지만 지적해주십시오.
  

   김춘수 : 월평 등 실제비평을 보면 영 엇나가는 평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론적으로 모르지만 맛을 잘 구별하는 감식가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시의 맛을 아는 사람이 실천비평을 하는 것이 좋을 텐데 외국 이론을 도식적으로 갖다 붙이려는 사람이 쓴 글을 보면 영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가 본시 조금은 어려운 것이지만 그 시를 현학적으로 해석, 더 어렵고 난삽하게 만드는 데 평론가가 일조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지요. 시에 대한 억지스런 해석, 그리고 도식적 해석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시를 보는 시야가 우리 세대보다 훨씬 넓어진 것은 다행스런 현상입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 시를 날카롭게 보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가 있구나 하고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승하 : 우리 시의 현주소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불만 사항이나 평소에 조언하고 싶었던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김춘수 : 우리 시가 타성화되어 있는 면은 정말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1910년대와 20년대의 시풍과 경향이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답습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많은 서정시가 씌어지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대 감각이 그렇게 둔하다는 것이지요. 이 시대는 서정시의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낡은 서정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고, 중견이든 신예든 그런 시를 쓰는 사람이 각광받고 있습니다. 1세기 전의 시풍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이른바 순수서정시풍이 한 세기를 이어가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사례일 겁니다. 지금은 다들 손을 놓고 있는 해체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IMF 시대라 재벌도 구조 해체를 하지 않습니까. 타성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작금의 서정시풍은 타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하 :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1993년에 사진과 그림을 응용한 시를 여러 편 실은 시집을 내놓았는데 시인이 활자에 도전하고 있다고 도처에서 욕을 듣고는 작업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새로운 용기가 생겨납니다.
  

   김춘수 : 또 하나 우려할 만한 것은 몇몇 시인들의 선(禪)에 대한 경도입니다. 선에 관심을 기울이면 양생(養生)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불가의 선사처럼 뭘 깨달은 것도 같고, 화두 같은 시를 써놓으니 기분전환도 되고 마음이 평안하게도 됩니다. 하지만 사회성과는 아주 멀어지고, 내면세계 혹은 존재론과도 멀어지게 되죠. 깨달은 척한다는 것은 사실 희극적인 현상 아닙니까. 선을 받아들인다면 하이꾸를 쓴 바쇼의 경지에 이른다면 또 모를까. 바쇼는 선사상에 입각해 시를 썼지만 관념성을 배제하고 즉물적인 시를 썼던 사람입니다.
  

   이승하 : 어떤 시인들을 겨냥한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문단 활동이 어언 50년을 넘어섰습니다. 유치환·윤이상·김상옥 선생님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신 것을 기점으로 삼으면 55년이 된 셈입니다. 문학인의 길이란 어느 한때의 수확에 우쭐할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해 나가야 할 언어의 밭갈이여야 함을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됩니다. 선생님은 이제껏 전집이며 시선집을 제외하고 개인시집만 14권을 내셨습니다. 이제 곧 15권째의 시집이 나올 예정이고요. 작년의 인촌상 수상이나 재작년의 대산문학상 수상은 선생님의 뛰어난 작품에 대한 평가일 뿐 아니라 노년에 들어서서도 줄기차게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것을 기리기 위해서일 거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김춘수 : 늘그막에 무슨 상복인지 모르겠습니다. 2년 연속 큰 상을 받아 내가 시상식장에서도 후배들한테 미안하다고 얘기를 했었지요.
  

   이승하 : 55년이란 긴 세월 동안 긴장감을 잃지 않고 계신 선생님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긴 시간 대담에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시 작품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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