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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별칭’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 (김정룡)
2008년 02월 14일 12시 09분  조회:4803  추천:54  작성자: 김정룡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공자의 ‘별칭’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
 

-일부 한국민족주의학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20세기 초 소장학자로서 중외(中外)에 명성을 떨쳤던 호적(胡適)은 “대담하게 가설하고 소심하게 증거(증명)를 구하라(大膽假設, 小心求證).”는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겼다. 곽말약(郭沫若)은 “기상천외한 발상을 갖되 실사구시 해야 한다(卽異想天開, 又實事求是).”고 말했다.

 학문이 발전하자면 기상천외한 발상을 갖고 대담하게 가설해야 한다. 하지만 학문은 어디까지나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소심하게 증거를 구하고 실사구시 해야 한다. 허나 한국의 일부 민족주의학자들은 소심하게 증거를 구하지 않고 기상천외하게 가설만 내놓고 마치 그 가설이 정설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 1> 이일봉(李一峰) 씨는 저서 <<환단고기실증>>에서 “동아세아 땅은 한민족의 땅이었고, 아세인은 한민족의 후예이고, 환인이 동아세아를 지배했던 우두머리였고, 도교는 한민족이 지어낸 것을 중국에서 역수입해서 사용했고······” 등등의 증거도 명확치 않은 주장을 어처구니없이 수두룩하게 펴냈다. 너무도 한심한 주장이라 반박해야 할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 그대로 ‘분서처리(焚書處理)’되어야 마땅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례 2> 1980년대 중 후반에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설치다가 무의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례 3> 요즘 한국에서는 증거도 없이 청동기역사 연대를 500년 앞당겨 서술하는 것을 고교국사 교과서에 넣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허나 민족주의학자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중국동북공정에 맞서는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발상이다.

<사례 4> 단군에 대해 대다수 학자들은 신화로 취급하는 데 반해 일부에서는 단군은 실존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단군이 신화인물이냐? 실존인물이냐? 는 논쟁에 끼어들어 어느 ‘입장’에 손을 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군에 대해 신화를 말하던 실존을 운운하던 역사, 종교, 신화 등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을 갖고 논하는 것이 옳은 처사가 아닌가는 소견을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단군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서 강무학(姜武鶴) 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강무학 씨는 <<세시풍속(歲時風俗)>>, <<단군은 실존했다>> 등 많은 저서를 펴낸 학자이다. 그런데 필자는 강무학 씨의 저서들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민족 선사(仙史), 풍류도,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에 대한 이해가 매우 결핍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자와 노자의 ‘별칭’조차 모르고 단군의 실존을 서술하다보니 설득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보아내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강무학 씨가 어떻게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을 잘못 해석했고 또 이로 인해 그가 얼마나 우리민족역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최치원(857~950?)은 통일신라 말기 사람으로서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갔고 당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라 있다가 29세에 귀국하여 저물어 가는 신라를 구해보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저서로는 <<토황소격문(討黃巢激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20여권이 있으며 특히 <난랑비서문>이 후세사람들에게 남긴 영향이 가장 크다.

<난랑비서문>의 원문: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虛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번역문 :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일러 ‘풍류도’라 한다. 그 가르침의 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삼교(유 불 도)가 이미 자체 내에 들어 있어 모든 군생을 감화시킨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공자의 가르침과 같다.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다.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다.

강무학 씨는 이 <난랑비서문>을 완전히 주관억측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현묘’란 낱말은 한나라 초기부터 도가에서 흔히 쓰던 말로서 당나라에 와서는 그 낱말의 뜻이 좁아져 오두미교(五斗米敎)와 방술 등을 현묘한 도라고 했다······. 

 ‘현묘지도’란 한나라 초기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시대부터 있어왔던 말이다. <<장자>>에서 ‘득의망상(得意妄象)’, ‘득의망언(得意妄言)’을 제창하면서 ‘언’은 도구이고 ‘의’는 목표라 보고 ‘의’를 얻으면 ‘언’을 버리라 했다. 여기서 ‘언’은 말을 지칭하고 ‘의’는 현묘한 도의(玄妙之道意)를 뜻한다. 그러므로 현묘지도란 말은 ‘의’를 뜻하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강무학 씨는 계속해서 ‘노사구(魯司寇)’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라서 다음과 같이 엉뚱하게 해석했다.

  이 문사에서 선생(최치원)은 ‘사구’라고 했는데, ‘사구’는 죄인을 다스리는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중간에서 사도의 ‘도(徒)’가 잘못되어 ‘구(寇)’자로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도라면 더욱 좋을 듯싶다······.

 이 해석은 필자가 접해본 중 가장 엉망으로 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중국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자가 노나라에서 잠깐 ‘사구’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무슨 사도가 어쩌고저쩌고 할 것 없이 ‘노사구’란 곧 공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원문을 이해 못해 무엇이 잘못되었다느니 어떻게 하면 좋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왜곡하는 것은 학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무학 씨는 ‘노사구’가 공자를 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주주사(周柱史)’가 곧 노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도 역시 몰라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위’라는 말을 썼을망정 유교적 입장에서 설명한 사상이 짙다. 또 ‘주주사지종(周柱史之宗)이란 주나라의 역사를 꾸미는 기둥과 마루라고 했다. 이 문사는 존주사상이 짙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해석이 너무 한심하다. ‘주(周)’는 주나라를 뜻하고 ‘주(柱)’는 기둥역할이라는 의미이고 ‘사(史)’는 역사가 아니라 곧 사관이다. 옛날에는 관리를 ‘사관(史官)’과 ‘무관(巫官)’으로만 나누었다. 노자는 당시 주나라 ‘중앙도서관’ 관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문에서 ‘주주사’는 주나라 으뜸가는 사관이라는 뜻이며, 이는 곧 노자를 지칭한다. 강무학 씨가 ‘역사를 꾸미고’, ‘존주사상이 짙다’는 등의 해석은 완전히 얼토당토한 억측에 불과하다.

 강무학 씨는 <난랑비서문>의 해석 끝 부분에서 최치원을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이면서 “선사와 풍월은 단군의 선사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나무랐다.

 사실 최치원은 강무학 씨의 견해와 완전히 달리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민족주의자였다.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공자를 ‘노사구’로, 노자를 ‘주주사’로 표현한 것은 공자와 노자가 별로 대단한 것 없이 그저 공자는 노나라의 일개 관리였을 뿐이고, 노자는 일개 도서관 관장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중원문화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벗어나 우리민족이 주체성을 갖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다.

 또한 최치원은 우리민족역사를 타민족역사와 다르게 선사로 규명하고 따라서 선사는 풍류도를 맥으로 흘러왔고, 풍류도에는 삼교의 종지가 다 들어 있으며, 단군으로부터 시작되고 화랑으로 이어졌으며 민족의 ‘얼’을 형성시킨 역사는 독특한 ‘풍류의 멋’의 역사라는 것을 알리려고 <난랑비서문>을 함축성이 강하게 지어놓았던 것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해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역사를 연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단군실존을 확실하게 말하려면 최저한도로 <난랑비서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곤란하다.

 그리고 우리선조들은 역사기재를 별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국고경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국고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역사를 운운할 수 있다. 강무학 씨처럼 ‘노사구’가 공자를, ‘주주사’가 노자를 가르키는 말인 줄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면 아무런 설득력도 얻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부터 조소를 받게 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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