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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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가 된 조선족 이름
2007년 11월 15일 13시 11분  조회:6498  추천:48  작성자: 김정룡


탱자가 된 조선족 이름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朴光石’이 왜 ‘피아오광스’인가?

150년 지킨 이름 인정 못한다니···

중국에는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가 있다. 현재 조선족 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이상한 ‘탱자’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중국 지명과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서 중국어발음을 따른다. 이 때문에 조선족이고 밀양 박씨인 ‘박광석(朴光石)’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라고 표기한다. 조선족의 중국 신분증은 위에 우리글로 ‘박광석’, 그 아래 한자로 ‘朴光石’이라 적혀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선 ‘박광석’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박광석’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이유는

‘박광석’을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으로 보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박광석’이란 자체 고유이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조선족은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조선족은 먼 옛날 고국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을 애써 지켜 왔지만, 정작 고국에 와선 그‘이름’을 인정받지 못한다니 참 기가 막힌다.

한국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이름만 아니라, 한국에 시집 온 조선족들의 이름도 이상하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 시집오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한국 호적에 오르게 된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李花子는 중국에서 ‘리화자’로 불리고, 한국에선‘이화자’라 부른다. 그런데 호적에는 ‘리후아지’로 기재된다.

한국이 조선족 자체 고유이름을 탱자식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우리글, 우리말을 지켜온 조선족에 대한 무시, 나아가 모독이다. 한국인이 진정 조선족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먼저 조선족이 지켜온 자체 고유이름을 존중하고, 이상하고 엉뚱하게 표기하는 일을 당장 중단하기 바란다.

*아래의 문장은 위 글의 원문입니다.

탱자가 된 조선족이름

중국에는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가 있다. 현재 조선족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이상한 ‘탱자’로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참으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지난 10월 31일 경기도 고양시는 중국 옌지시와 우호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2006년 10월 피아오광스 옌지교육국장이 고양시를 방문하여 고양시장 접견 시 양 도시 우호교류를 제안했다. ······” 이는 수일 전 한국00신문기사의 한 대목이다.

현재 한국은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서 중국어발음을 따르고 있다. 위 문장에서 ‘옌지’는 延吉, ‘피아오광스’는 朴光石의 중국어발음을 따른 것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한국인이 중국지명과 인명 중국어발음표기법에 대해선 논하지 않고 조선족이름표기법에 관해서만 소견을 말하려 한다.

朴光石은 조선족이고 분명히 우리말, 우리글로 ‘박광석’이다. ‘박광석’이란 이름은 한반도의 고유이름을 따른 것이고, 현재 반도사람들이 본을 갖고 있는 것처럼 조선족인 ‘박광석’도 밀양 박이라는 본을 갖고 있다.

‘박광석’과 마찬가지로 중국 내 조선족은 중국에서 미국거주인의 ‘린다 김’ ‘골든 창’ 등 미국식을 따르거나, 러시아의 고려인처럼 ‘안드레’ ‘알렉산드’라 부르거나 혹은 일본국적을 가지려고 ‘야마다’ ‘나카무라’ 등 창씨개명을 하지도 않는다. 조선족은 위에 우리글로 ‘박광석’이고 아래에 한자로 ‘朴光石’라 적힌 신분증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이상하게 우리말, 우리글로 표기할 수 있는 ‘박광석’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한다.

한국인이 ‘박광석’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박광석’을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족이 자체고유이름인 ‘박광석’이란 표현을 갖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이 먼 옛날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아온 자체고유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인 고국에 오면 그 ‘이름’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박광석’이 이상한 ‘피아오광스’로 불리우고 있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한국인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이름만 이상한 표기법을 쓸 뿐

만 아니라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들의 이름도 역시 이상하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 시집오면 한국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한국 호적에 올라 반은 한국인이고 반은 ‘중국인’이 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조선족은 분명히 자체고유이름이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또 한국호적에 오르면 반은 한국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적등본에 이상하게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李花子는 중국에서는 ‘리화자’이고 한국에서는 ‘이화자’라 부른다. 두음법칙에 의해 일부 성 ‘리’가 ‘이’로, 이름자 ‘룡’이 ‘용’으로 발음되는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으나 ‘리화자’도 아니고 ‘이화자’도 아닌 ‘리후아지’로 호적등본에 기재된다.

만약 ‘리후아지’로 등록된 사람이 한국 내 서류에 ‘리화자’나 ‘이화자’로 하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李花子가 이혼소송을 제기할 때 원고의 이름을 ‘리화자’나 ‘이화자’로 쓰면 안 되고 반드시 ‘리후아지’로 써야 한다. 왜냐하면 호적등본에 등록된 이름과 일치해야 되기 때문이다.

‘리후아지’는 ‘李花子’를 중국어발음에 따라 옮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국어발음을 따르겠으면 ‘리후아지’가 아니라 ‘리화즈’로 옮겨야 하는데 중국어발음을 모르고 멍청하게 나름대로 옮겨 엉뚱한 발음으로 표기되고 있으니 참으로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조선족들의 이름이 귤이 아닌 탱자가 되어버리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朴光石’도 ‘피아오광스’가 아니라 ‘퍄오꽝스’로 옮겨야 한다.

한국인은 이런 엉뚱한 식으로 중국지명과 인명을 나름대로 옮겨놓아 누가 보아도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이런 엉뚱한 발음으로 중국인과 대화하면 아예 알아듣지 못한다.

중국의 지명과 인명 그리고 조선족자체고유이름마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옮김 법으로 나름대로 표기하고 있어 읽기도 불편하고 듣기도 거북스럽고 적잖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대체 이런 엉뚱한 발상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또 누구를 위해 만들어냈는지? 李花子의 한국남편이 자기 아내를 부를 때 ‘리후아지’라 할까? 천만에! 한국인은 조선족이 갖고 있는 고유이름을 부르지 절대 이상하고 보기에도 그렇고 듣기에도 메스꺼운 ‘탱자 식’ 발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호적등본에 ‘피아오광스’, ‘리후아지’로 표기하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는 것이다.

한국인이 조선족자체고유이름을 탱자 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우리글, 우리말을 지켜온 조선족에 대한 무시 내지 모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진정 조선족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려면 말로만 하지 말고 우선 먼저 조선족이 지켜온 자체고유이름을 존중하고 이상하고 엉뚱한 표기법을 버리기를 바란다.

* 본문은 조선일보 2007년 11월 15일 A33면에 '조선족 이름 표기'제하에 요약되여 발표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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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0 ]

20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21:27:18
먼산님/ 45년 8월 15일까지는 조선인 45년 8월 16일부터는 조선족 되었습니까? 그래도 조선족 역사는 60년입니다.
19   작성자 : 먼산
날자:2007-11-16 20:10:08
샤먼동지가 지적하시다싶이 저는 엔간히도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 무지를 깨치기 위해 한국어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인이란 사람을 직업, 국적, 인종 등으로 분류하여 일컬을때 쓰이고 족이란 겨레, 일가, 집안을 가리키는데 인종의 류별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중국은 미국, 구쏘련처럼 다민족국가입니다. 주지하다싶이 조선족의 형성과정은 복잡한 여러가지 력사적원인이 있습니다. 중국의 조선족은 샤먼동지의 말씀하신것처럼 토착민이 아니고 이주민입니다. 시간적, 공간적 각도로 봐도 중국에 온 모든 조선인들이 모두 항일하러 온것이 아닙니다. 일본인들처럼 조직적인 개척과 령토확장을 위해서 월경한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하기에 조상들은 이 땅을 밟을때부터 자의던 비자의던 그 인종의 번식과 생존의 밑거름이 되였습니다. 기나긴 한세기반의 피와 땀의 대가로 조선족은 조선력대정부의 직접적 도움을 한번도 받지않고 처음 가련한 한포기 야생풀로부터 인제 이 척박한 땅에서 깊이 뿌리를 내려 어엿한 수림을 이루어 자기의 생존공간을 확립하였습니다. 명기해야할것은 중국의 어느 당국도 조선족을 조선반도에서 랍치해오지 않았습니다. 하기에 조선족의 력사를 1957년부터 시작으로 보는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18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17:07:17
먼산님/'先代'의 아픔의 역사도 님이나 제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리고 지금 님은 논점을 흐리고 있습니다. '조선족 역사는 몇 년이냐'를 말씀하시면 되는데, 한중 '간도' 논쟁을 끄집어 내시면서, 엉뚱한 말씀만 하십니까. 먼저, '조선족'이란 호칭과 '조선인'이란 호칭부터 개념을 잡고 이야기 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글이란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글을 똑바로 정독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17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17:17:47
먼산님/ 45년, 해방 전까지는 제 친 할아버지도 현재의 연길(간도)에서 살았습니다. 그럼 우리 '祖夫' 도 '조선족입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마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모두 '조선인'만 존재했습니다. 연변의 제 '祖夫' 무덤 앞에 서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조부' 무덤 앞에 서서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합니다. '해방 전에도 '조선족'이란 호칭이 있었습니까?'
16   작성자 : 먼산
날자:2007-11-16 16:57:13
샤먼, 저 시대에 조선인은 있어도 조선족은 없다? 왜놈들은 우리를 죠센징이라 했는데. 이 이름이 조선족이라고 부르는것보다 더 듣기 좋아요? 어째 일제시대때의 뭐가 황홀해보이는가요?
15   작성자 : 먼산
날자:2007-11-16 16:45:08
샤먼, 아닌게 아니라 한숨이 나옵니다. 력사는 어느 개개인의 관점이나 편집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닙니다. 우에서 례를 든 사례에서 보다싶이 의지가지 없는 조선족은 백년전부터 당시의 무능한 조선정부와 악착한 일제놈들의 희생품이 되였습니다. 샤먼, 그 이름에 걸맞게 안경을 내리시고 력사를 한번 더 정독해보십시요!
14   작성자 : 다노
날자:2007-11-16 16:39:08
ㅋㅋ 무슨 도마뱀꼬리 끊듯이 토막을 자꾸 냅니까~ 외래어표기법에 문제있다 고치자 이러면 끝이지유... 부부간에도 살다보면 질끈 한쪽눈 감아야할때 많은데 하물며... 좌우간 샤먼님의 견해도 좋습니다^^ 좋은 밤 되소서~
13   작성자 : 먼산
날자:2007-11-16 16:32:52
중국조선족문제는 중국공산당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야기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샤먼동지의 말씀처럼 그렇게 일방적인 리론을 펼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샤먼동지의 관점으로 보면 일제시기에 창씨개명을 강요당해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식이름을 가졌는데 그럼 이 력사를 우리가 그대로 접수해야 합니까? 1957년이전의 조선족력사가 그렇게 일매지게 지나온것입니까? 한세기전 우리 조선족선조들이 이 간도땅에 들어올때부터 이 문제는 그 복선을 깔아놓은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해 이것을 몽땅 공산당이나 조선족의 잘못인것처럼 한마디로 평가하는것은 너무 편면적입니다. 적어도 구쏘련보다는 낫지않았나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 한국인터넷에 올라가보면 간도는 구경 우리 땅이 옳은가 하는 시비도 있고 또 당시 발행된 지도도 있는데 한국내 학자들도 서로 상반되는 견해가 많더군요. 물론 샤먼동지의 눈에 제가 무지하다는 평가는 접수합니다. 워낙 저는 학문을 닦는 학자가 아니니깐요. 하지만 한 평범한 조선족으로서 자기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조금 고민해 보았을뿐입니다.
12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16:18:54
먼산/ 휴, 한숨만 나옵니다. 글을 '정독'하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150년 역사를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저 시대에는 '조선인'은 있으되 '조선족'은 없습니다.
11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16:04:03
최균선 님/ '문학'을 하시는 분이라 그래도 님이 제일 점잖게 답글을 달아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님이나 다른 분들이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민족적인 정서로 충분히 수긍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분명히 글에 남겼는데, 몇 분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김정룡 님과 님의 말처럼 현재 표기되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개정 되어야 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서 누차 이야기를 하는데도, '재중동포(조선족)' 분들을 '무시'나 '모독'이라고 하는 것을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현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이 재중동포를 '무시'하거나 '모독'해서 만들었겠습니까. 정말로 많은 분들이 답답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현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은 현지(중국) 원음주의 표기에 따라 부르는 의미일 뿐이지,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모택동'과 '마오쩌둥'을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재중동포(조선족)' 분들을 '무시'나 '모독'을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 은 현지(중국이라고 한다면) 원음에 따라 '人名', '地名'을 표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모르시고 무조건 감정적으로 '재중동포'를 '무시'하거나 '모독'한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국적이 한국인이 아닌 사람은 현지(중국이라면)의 원음 표기주의에 입각하여 표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례를 들자면, '모택동' 한국 국적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한국에서는 외국인(한국국적이 아니므로)이므로 표기를 '마오쩌둥'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필요이상의 상상은 오해를 가져올 뿐입니다. 다만, '재중동포'와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를 감안하여 '재중동포'의 성명 표기는 분명 검토해봐야 할 여지는 있습니다.
10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15:24:23
다노/ 님, 같은 조선글인데 리해를 못하십니까. 재중동포분들과 상관없고 한중수교 이전에 이미 정해진 '한국 외래어 표기법'대해서 알아보시는 것이 더 빠를 듯 합니다. 분노는 제가 치밉니다. 같은 조선 글인데 리해를 못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억지를 쓰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것일 뿐이지, 무슨 한국정부가 나오고, '반성', '가련', '분노'라는 어휘가 나오는지 스스로 반성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9   작성자 : 먼산
날자:2007-11-16 15:57:42
샤먼동지, 참고하세요. 하지만 아래의 내용이 저의 견해는 아닙니다. 1881~1909년에 걸쳐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동남부지역 땅인 간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청나라와 조선정부 간의 분쟁. 이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여 각종 자원도 풍부하였으나 청나라 정부에서는 이곳을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선포하여 입주를 엄금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간도를 개척하여 농경지를 만든 것은 철종말에서 고종초 사이에 이주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간도문제에 대한 양국간의 최초의 교섭은 1712년(숙종 38)에 있었으며, 이때 양국의 대표들은 백두산에 올라 현지조사를 통해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했다. 비문에는 동으로 압록강, 서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세운 것으로 명기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뒷날 간도귀속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양국 대표가 합의한 토문강이 실상 두만강의 상류가 아니라 만주 내륙의 쑹화 강[松花江] 상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계비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비석이었으며, 토문강과 쑹화 강의 동쪽지역인 간도지방은 이미 우리 영토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년 간은 간도귀속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왔으나,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 농민의 두만강 월경농사가 시작되고 또 1881년부터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여 청나라 사람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면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문제가 발생했다. 1882년초 청나라는 우리 정부에 대하여 월경을 엄금하도록 요구해왔고, 1883년에는 간도의 조선 농민을 모두 소환하도록 요구하며 정치적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조선정부는 답사 결과와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쑹화 강 상류이며, 간도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통해 국경을 확정할 것을 제기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의 제의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1885년 간도 일부지방의 조선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자, 우리 정부는 다시금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요청함으로써 간도귀속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간도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제1차 회담인 을유감계회담은 우리측의 제안으로 1885년 11월 회령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1888년까지 3차례의 회담이 있었으나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 청나라는 두만강 상류를 투먼 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투먼 강을 가리킨다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후 대한제국은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함에 따라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이후 2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까지 우리 국토임을 확신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에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토록 조처하였다. 이에 따라 청나라 측과 잦은 충돌이 일어나게 되자 조선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했다. 그러면서 양국은 선후장정이라는 잠정적 문서를 통해 정확한 감계가 있을 때까지 종래와 같이 투먼 강을 경계로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하지 않을 것을 약정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청나라에 대하여 전쟁기간에 감계문제의 재개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감계문제는 중단되었다. 이후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1909. 9. 7)을 맺음으로써 간도의 영유권을 청국측에 양도하고 말았다1712년(숙종 38)에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이래 160여 년 간 간도의 귀속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1881년 청나라가 봉금(封禁)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 문제가 발생되었다(→ 간도문제). 그후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7년 간도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무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을 얻기 위해 1909년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 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신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간도의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률 관할하에 두어 납세와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청국에 넘겨버렸다. 당사자인 우리 정부는 협약에 간여하지도 못한 채 불법적으로 영토를 빼앗겼으며, 1881년부터 야기되었던 간도문제는 이로써 끝나게 되었다.→
8   작성자 : 명상
날자:2007-11-16 14:53:26
싸움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지 못함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일시적인 충동에 기분나뿐 말이 나오기 십상이니 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쉬운일이지요~ 그러니 쟁론(토론)은 있어야되되 싸움은 필요없다고 봅니다. 특히 쌍방이 제법 두 나라를 대신하여 싸우는듯, 같은 민족이 아닙니까... 도리를 놓고 대화가 필요합니다~ 샤먼님, 김정룡선생님이 쓰신 이 글은 연변조선족들이 한국의 이름표기에 관한 불만족을 대표적으로 담은 글인만큼 우리들의 진실한 감수를 이해해주셔야 하지 않을가요.... 한국의 행정절차가 어떠하던간에 관계없이.... 그리고 제가 한국이 중국에 대한 숭배란 야유적인 의미로 쓴것입니다. 사실 저도 절대 그렇게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옛날에 외국이것이면 다 좋은 듯 왜서 이름자마저 중국식으로 표기하는가 하는, 그것도 맞지도 않는 발음으로... 도무지 이해못할 표기법때문에 그런 표현을 한것입니다. 우리가 예로부터 써오던 그런 발음이 없다면 몰라도... 그리고 설사 한국호적의 표기는 그만치더라도 현재 한국매체서 보편적으로 그렇게 쓰고 있잖습니까... 중국어발음을 제대로 아는이라면 한국의 그런 표기법이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한국인이 중국어를 제일 못한것이 아니냐 생각합니다.... 한국인이 그런 식으로 우리와 대화를 한다면 의사가 전혀 통할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말을 잘? 하는데 왜서 한국인은 우리식발음으로 말을 못합니까? 한국에 우리식의 발음이 없는것도 아닌데.... 한국도 서울을 漢城이 아니라 首尔로 불러달라고 중국에 청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우리식으로 불러달라고 의견을 제출할 권리가 있는게 아니닙까! 정확한 발음으로....
7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15:33:54
먼산/ 왜 1957년이라고 하는지 모르십니까? 휴. 읽어보시고 앞으로 저에게 시시비비를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無知'는 자랑이 아닙니다. * 조선족이란 호칭과 조선인의 중화민족 편입에 대하여 첫번 째,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의 편입 (1945-1957) 두번 째, 중화민족으로의 동화과정(1957-1992) 세번 째, 제 3 아이덴티티(동질성)의 형성과정 (1992- 현재) 첫번 째와 세번 째는 조선족 문제가 단순한 국내문제가 아닌 국제문제의 시기이며, 그 파트너는 첫번 째는 조선, 세번 째는 조선과 한국일 것이다. 우리의 주 관심은 세번 째이나 이 세번 째에 나타나는 문제는 이미 첫번 째, 두번 째에 배태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의 편입 (1945-1957) 이 시기는 조선족에 대한 개념 규정이 나타나는 시기이자 법률적으로 국적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는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韓인의 국적 변동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법령이나 지침이 정해졌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고 적용 범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이 기본적으로 종식되는 것은 1957년임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중국의 韓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인 간도지역(현 연변)과 그 주변의 목단강 연선의 경우 이미 1946년 초에는 공산당이 실제적으로 장악한 지역이었습니다. 공산당은 3차례에 걸친 토지개혁을 통해 이 지역의 행정권을 장악했고 그 결과 韓인의 호구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파악된 韓인들 중 6만 5천명 정도의 장정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행정-징세-군 동원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기의 중국 공산당은 연변에서 실제적인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사문제도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일부 협의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1948년 북한정권이 성립하고 1949년 중국이 성립하기까지 양측의 업무처리는 지침에 의존하되 많은 예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韓인들은 거의 자유롭게 양국을 왕래하였습니다. 물론 허가증이 필요하여 당국이 발행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북한으로 돌아가는데는 제약이 없었습니다. 1948년 12월에 열린 '조선민족문제에 대한 간담회' 는 과도기적인 이 시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소위 연안파라 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주 덕해를 비롯한 미래의 조선족 지도자들은 민족구역자치내에서 중국소수민족으로의 조선족을 위치시키고, 당시 행정전원(총책임)이었던 임춘추를 비롯한 김일성 계열은 해방전의 약속대로 간도를 조선(북한)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조선족에 대한 문제를 확정하려는 공산당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스런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은 특수사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국공내전에 동원된 6만5천명의 조선족이 1949년 12월 어느날 갑자기 정주에 모여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3개 사단으로 편제된 것이나, 한국전쟁(항미원조) 기간과 그 후에 북한의 복구사업에 많은 조선족이 참여한 사실 등은 그 당시의 특수사항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북한에 잔류하여 북한 정부나 당에서 일하였고, 또한 일부는 원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중국 정부도 이를 용인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의 이중국적의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적 형제애라고 하기에는 특수한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57년 중국정부가 지역적 개념을 사용하여, 산해관 이북의 한인을 조선족으로, 산해관 이남의 한인과 이후 중국에 들어온자를 조교(조선교포)로 분류하기까지 특수한 상황은 유지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중화민족 개념에 의한 조선족으로의 논리적 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소위 중국의 토착민족이 아닌 韓인을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민족이론이 발전하였고 민족정책의 시행에 있어서 모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전국적 범위에서 형성된 개념과 정책이 조선족 지역에서 시행되는데는 위의 경우에서 보듯이 특수한 사정이 고려되었으나, 조선족 정책이 중국 민족정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45-49년 사이의 공산당의 선언과 문건에는 중국의 韓인을 표현하는 여러 용어가 혼재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는 최종적으로 '조선족'이란 호칭으로 정리되어 버린 것입니다.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민족구역 자치에 의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탄생도 이와 행적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몽고가 형식적으로 먼저 자치구가 되었으나 연변이 자치구 설정이 늦어진 것은 순전히 한국전쟁(항미원조)의 영향이었습니다. 1952년 성립한 자치구(주)는 중국의 통일적인 입장이 강조된 것으로 역사적인 간도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한 해결로써 성격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중화민족으로의 동화과정 (1957-1978) - 韓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정치적으로 중화민족에 포함되는 과정 영토와 정치적 형태에 대한 문제가 일단락 되자 중국 정부가 취한 행동은 중화민족주의에서 중요한 국민적 통합과정의 실천이었습니다. 1957년 이후 즉, 1954년 중국의 헌법이 반포되고 짧은 2년간의 황금기가 지난 후, 중국은 정치적 동원이 특징인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조선족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정치적 동원을 통해서 중국의 韓인이 실제적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북한과의 관계는 중소분쟁의 여파나 북한의 8월 종파사건의 영향과 중국내의 반우파 투쟁으로 인하여 이제는 하나의 외국으로 북한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선족이 중국에서 소수민족의 비애를 갖으며 살아가는 운명이 여기에서 기인하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국내의 韓인은 북한과 구별되는 중국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강요받게된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조선족 그들이 스스로 결정한 의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우파 투쟁과 지방민족주의(조선족의 민족주의) 투쟁에서 나타난 다중 조국관은 이런 고민을 잘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다중 조국관이란 중국내의 韓인에게 여러 조국 혹은 모국이 있다는 것으로, 사회주의모국인 소련과, 이민자로써의 모국인 고국(故國) 한반도와 지금의 조국 중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모국은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심지어는 고국이라는 표현도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문화혁명(1966-76)의 초기에 더욱 심하였는데, 일체의 민족적 특색이 나타나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계급대오 정리운동기간(1968-9)에는 많은 조선족들이 이러한 민족문제로 인하여 희생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민족주의가 봉쇄된 시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민족학교의 구성이나 수업내용, 교과과정 등에 대해서도 제약이 나타났고 이러한 소위 정치화할 소지가 큰 문화적 요소에 대한 통제는 민족언어순결론 논쟁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족언어 순결론 논쟁은 중국어의 어휘와 구조가 조선어에 침투하는 상황에서 민족어를 지키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으나, 반우파 투쟁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많은 참여자들이 숙청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조선족은 이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정치-행정-사회-문화적으로 존재할 것을 강요받은 것이며, 이러한 실제적 강요는 30여년간 지속되면서 중국의 韓인을 한반도의 韓인과 많이 구별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03:59:57
최균선/님, 님도 '한국 외래어 표기법'을 한번 살펴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변과 동북 3성도 '漢語'와 '朝鮮語'가 섞여져서 잡탕을 뛰어 넘어 완전히 동지 섵달 '팥죽'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5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03:55:36
명상/님,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대한 숭배?'라는 글에 시선이 멈추면서 이 새벽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한국 외래어 표기법'을 한번 살펴보시는 지혜를.
4   작성자 : 먼산
날자:2007-11-16 14:32:54
샤먼동지, 예서 또 만났구만요! 헌데 조선족의 력사가 1945년 혹은 1957년부터 시작이다? 샤먼동지는 력사공부를 한분이 맞아요? 당신의 견해대로 하면 조선의 력사도 고구려, 발해와 상관없는것으로 되여 리씨조선부터 헴을 헤야되겠네요? 왜냐하면 훈민정음부터 우리민족은 자체의 문자가 있었느니깐. 글쎄 그쪽 샤먼동지분들의 정서를 헤아려 광복후부터 조선족의 력사를 시작으로쳐도 모르겠는데 어찌하여 1952년(연변조선족자치구성립)도 아니고 1957년인가요? 중국으로 와보셨는지요?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을 들어보신적 있어요? 세상은 워낙 모순투성이입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했습니다. 학자라면 최저로 객관사실을 존중할줄 알아야지요. 닉네임이 샤먼의 호수이니깐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한분이 돼서 여러가지 부동한 관념들을 포섭할줄 아는걸로 기대하였댔는데 알고보니 정반대군요.
3   작성자 : 샤먼의湖水
날자:2007-11-16 03:52:56
김정룡/님, 지구상의 어떤 사람이든 간에 한국의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 ‘한국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행정적인 기재에 불과합니다. 글에도 '文法'이 있듯, 한 나라에도 외국인 이름까지도 표기하는 '法'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박광석’이란 분을 예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국적이 ‘중국 국적’이므로 한국에서는 행정상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기재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행정적인 절차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재중동포(조선족)'이 갖고 있는 ‘박광석’이란 자체 고유이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라고 쓰시며 단정을 하시는데 어이가 없습니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재중동포’나 한국으로 시집을 온 ‘재중동포’ 여성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행정상 ‘외국인’으로 분류하여 표기 하는 것이지, 그것을 ‘재중동포’에 대한 무시나 모독이라고 하는 글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국적이 있느냐, 없느냐’의 현 한국의 행정적 절차를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며 ‘재중동포’를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아서, 라고 운운 하시는데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엄연히 국적에 따른󰡐행정적인 절차󰡑에 불과하며 그것은 한국 '외래어 표기법' 따르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님의 글은 같은 민족적인 정서로는 생각해 볼 여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족으로 ‘재중동포’의 역사는 ‘1945년’, 혹은 ‘1957년’부터 출발을 한다고 봐야하므로 ‘재중동포’역사는 반세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2   작성자 : 최균선
날자:2007-11-15 16:13:09
참으로 엉터리가 많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지명을 좀 근사하게 음역하였으면 좋을텐데 대충 그러려니 하고 마구 음역해서 중국에 소들이 웃다가 꾸레미터질 일이 많고도 많지요, 도대체 왜 펀펀한 조선족, 단군의 후손의 이름을 중국정부에서도 고치지 않는데 제민족끼리 비틀어놓고 그러는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입니다. 이건 그저 붓쟁이들의 무식한 짓거리리로만 여길게 아니라 국가적차원에서 제기되여야 할 문제입니다. 잘 지적했습니다. 잡탕말이 되고있는 한국어에서 중국사람의 이름이 외곡된것은 그저 서사문제가 아닙니다.
1   작성자 : 명상
날자:2007-11-21 22:58:07
아래 꼬리글은 독고혁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본 글에 대한 꼬리글입니다..... 야촌 야촌 http://blog.daum.net/009448 Y 2007.11.20 12:34 | 답글 지적하신 말씀,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나를 비롯한 한국인 참 문제 많아요. 앙드레 퀸 앙드레 퀸 http://blog.daum.net/jhy9999 Y 2007.11.20 17:29 | 답글 꼭 시정이 되여야 하는데~언젠가 어느 방송국에서 우리민족의 발자취를 탐방하는 과정에 우리말은 모르지만 이름이 박명남임에서 고구려의 후손임을 밝히는 프로그램인데 방송에서까지 박명남이라고 신분증에 우리말로 찍혀있는걸 굳이 표우밍난으로 표기하는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그렇게 우리민족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뭘 하며 고구려의 역사를 되찾아서는 어찌하시려구요~참 답답합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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