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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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庶民)과 인민(人民)의 뜻 차이
2017년 04월 05일 10시 57분  조회:3723  추천:0  작성자: 김정룡


                                             서민(庶民)과 인민(人民)의 뜻 차이

교육부 고위간부였던 나향욱 씨가 지난해 ‘99% 개돼지’ 발언으로 곤혹을 치르다 결국 공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다른 부처의 관료도 아니고 하필 대한민국 교육을 관장하는 주무부처의 고위 관료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 나라 전체가 충격에 빠질 정도로 시끌벅적하게 이슈로 떠올랐었다.

00일보 00논설위원은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지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위관료들이 나향욱 씨와 같이 ‘99% 개돼지’ 의식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계급사회가 사라진 지도 반세기가 넘었건만 아직도 1%엘리트가 나머지 99%를 ‘개돼지’로 보는 데는 99%를 부르는 잘못된 호칭이 부채질 한 것 아닌지? 필자는 의심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99%를 공식적으로 서민(庶民)이라 부른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서민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비슷한 말로 서인(庶人)ㆍ인서(人庶)ㆍ하민(下民)등이 있다. 둘째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 비슷한 말로 범민이 있다.

그런데 서민이란 어휘의 글자 뜻과 그 유래를 살펴보면 폄하의 의미가 다분하다.

서민이란 ‘庶’는 적서(嫡庶)관계에서 첩의 자식을 뜻하는 글이고 ‘民’도 역시 폄하의 뜻이 짙은 글자이다. 그 유래는 중국 주나라 때부터 신분을 나타내는 5계급, 즉 천자(天子), 제후(諸侯), 대부(大夫), 사인(士人), 서민(庶民) 중 가장 낮은 계급이다.

계급사회에서 서민은 천대받는 천민이었다. 조선시대를 말하자면 신분을 크게 양민(양반, 중인, 상인)과 천민으로 나눴는데 천민이 바로 서민이었다.

역사적으로 서민은 역사무대에 주인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농민봉기로 황제가 된 명태조 주원장 같은 인물은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를 수 있었지 계속 서민신분을 유지한 사람이 주인이 되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마천은『사기』를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 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나눠 구성하여 지었다. 여기서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 8편과 연표를 집대성한 표 10편을 제외하고 본기, 세가, 열전은 모두 인물을 다뤘는데 본기는 천자(제왕), 세가는 제후 왕, 열전은 무왕의 은주(殷紂) 토벌을 반대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이념과 원칙에 순사한 백이와 숙제를 시작하여 마지막에 이(利)를 좇는 상인의 열전 화식열전(貨殖列傳)까지 위대한 성현뿐 아니라 시정잡배가 도덕적 당위의 실천과 탐욕적 본능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생생한 모습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 다수의 인물은 바로 대부와 사인(士人)이었다. 말단 계급인 서민은 ‘명함’이 없었다.『사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서가 다 그러하다.

유교의 이념인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도 서민이 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즉 사인은 수신하고 대부는 제가하며 제후는 치국하고 천자는 평천하의 의무가 각각 주어졌던 것이다. 이것을 수학공식처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수양을 쌓아 수신이 잘되면 제가가 따라서 잘 되고, 제가가 잘 되면 따라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천하가 자연스레 태평해진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 계급분할이 아니었다. 사인이 공부를 통해 출세하여 권력을 잡으면 사대부가 되는 것이고, 대부가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실력이 향상되면 제후의 자리를 빼앗고 제환공처럼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에 들어 새로운 신흥지주계급이 탄생되어 사회신분판도를 바꿔놓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전국시대에 들어 제후국들의 공왕(共王)이었던 천자가 유명무실해지다가 결국 진 영정에 의해 역사무대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춘추시대의 서민은 전쟁에 참전할 자격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군대를 하나? 사인이 했다. 병사란 사(士)가 사인의 사(士)인 것이 바로 이렇게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사인이 병사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춘추시대 전쟁은 진짜 ‘문명’했다. 왜냐? 병사인 사인들은 모두 배운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춘추시대 사인이 병사로 주축이 된 전쟁은 네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 시간을 엄격히 지켰다.

보통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집합하여 싸우고 아침밥을 먹기 전에 끝냈다.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초과하지 않으며 해가 지면 그만두었다.

둘째 지정된 장소에서만 싸웠다.

두 나라 국경선 변강(封疆이라고도 함)에서 싸웠다.

셋째 예의를 엄격하게 지켰다.

쌍방의 군대는 변강에 도착하면 일단 합숙에 들어간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포진을 시작한다. 포진이 끝나면 각기 장군이나 사절을 파견해 대화를 시작한다.

넷째 유희규칙을 중시했다.

우선 적진에서 온 사자를 절대 죽이는 법이 없었다. 다음 상대가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그다음 거듭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친 사람을 더 가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머리가 흰 사람은 포로로 삼지 않는다. 다섯 번째 오십 보 후퇴하는 자를 쫓지 않는다. 오십 보만 후퇴하면 되는데 굳이 백 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맹자의 '오십 보 백 보' 이야기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재미나는 전쟁이 가능했을까? 전쟁목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전쟁목적은 ‘겸병(兼竝:상대국을 멸망시켜 삼킨다는 뜻)’이 아니라 ‘쟁패(爭覇)’였기 때문이다. ‘쟁패’는 천자의 이름을 빌어 천하를 정치적으로 제패하는 것이지 영토 뺏기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춘추오패’는 기타 제후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패주가 되었을 뿐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다.

‘겸병’전쟁은 전국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겸병’의 수요에 따라 오기, 손빈 등 군사가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류의 전쟁은 냉정하고 야비하고 야만스러웠고 참혹했다.

춘추시기 일선에서 싸움하는 자가 ‘사’였고 서민은 기껏해야 후방지원군 노릇을 하였다면 전국시기부터 서민이 싸움의 주력이었다. 그렇지만 서민출신군인을 ‘전민(戰民)’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춘추시기 관습에 의해 그냥 ‘전사’라고 불렀고 현대사회도 여전히 이 호칭이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를 돌이켜보면 23개 왕조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에 있어서 개국황제들은 하나 같이 서민을 병사로 이용해서 승리하여 옥좌에 오르면 바로 돌아서서 서민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사례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의 새 중국이 창립됨에 따라 서민, 신민(臣民), 백성, 평민 등등의 호칭 대신 인민이란 어휘를 주로 사용해왔다. 북한도 중국처럼 인민이란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인민이란 호칭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먼저 民이란 글자에 대해 살펴보자. 民은 본래 좋은 어휘가 아니었다. 적어도 존칭은 아니었다. 옛날에 이 글자는 보통 어둡다는 뜻의 ‘명(冥)’과 ‘명(暝)’ 그리고 맹인을 뜻하는 ‘맹(盲)’과 서민을 뜻하는 ‘맹(氓)’으로 해석되었다. 아마도 최초의 민은 모두 전쟁포로와 노예였기 때문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여민(黎民)은 전쟁에서 패한 구려족(九黎族)이었고, 축민(畜民)은 상인이 다스리던 늙은 노예들이었으며 완민(頑民)은 주나라인에게 패하고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던 은상(殷商)의 귀족이었다. 이미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자연히 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노예는 평민으로 변했지만 역시 피통치자였다. 이른바 의민(蟻民), 초민(草民), 소민(小民), 천민(賤民), 조민(刁民), 비민(屁民), 순민(順民), 신민(臣民)과 마찬가지로 모두 명확하게 경멸과 차별의 뜻을 띄고 있었다.

臣民이란 전통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던 어휘로서 서양에서 말하는 시민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臣이란 본래 노예였다. 전쟁포로와 죄수도 포함되었다. 전쟁포로가 최초에는 살해되었고 나중에는 남자는 노예, 여자는 첩이 되었다. 그들은 목에 밧줄이 걸려 주인에게 가죽처럼 끌려 다녔다. 개별적으로 재주가 있으면 조금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춤을 추는 무신(舞臣)처럼, 또 드물게나마 간수나 중간 보스 격으로 주인을 도와 다른 노예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농업 노예들을 관리하던 적신(籍臣), 목축 노예들을 관리하던 목신(牧臣) 등이 그것이다.

시민은 최초 그리스에서 생겨난 것이고 공자가 말한 소인에 해당될 것이며 주나라의 국인(國人)과 흡사한 개념이다. 국인은 도성의 주민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민은 여자와 외국인은 제외되어 있었고 그리스적 성인 남자에게만 주어진 권리였으며 그들의 권리는 투표권이 있었고 자유를 의미하였다. 

한편 人은 승리자와 통치자를 뜻했다. 상고시대에 인과 민은 평등하지 않았다. 가장 높은 등급의 사람은 大人, 그 다음은 小人, 가장 낮은 등급의 사람은 만민(萬民)이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인과 민을 합쳐 인민이라 부르는 것은 서민이라 부르는 호칭보다 훨씬 낫다. 적어도 폄하의 뜻이 없다는 것이다.

인민이란 호칭은 폄하의 뜻이 없는 일반 개념이지만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고 폄하의 뜻이 다분한 서민이란 호칭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북에서 인민이란 호칭을 쓰고 있어 매우 꺼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99%를 폄하의 뜻이 다분한 서민이란 호칭을 쓰는 한 평등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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