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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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부패 험난한 길
2013년 07월 06일 20시 54분  조회:6610  추천:5  작성자: 김정룡


중국 반부패 험난한 길

 

인민폐 수억 원 들여 만든 영화 <경국대전>에 장개석이 아들 장경국과 나눈 대화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부패, 잡으면 당이 망하고 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腐敗, 反就亡黨, 不反就亡國.).” 그런데 ‘장개석전집’을 연구한 홍콩 00학자에 의하면 장개석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작가가 지어냈다는 것이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왜 작가가 영화에 이와 같은 말을 집어넣었을까? 해답은 독자들한테 맡기기로 하겠다.

중국부패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매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릴 때마다 건의 사항 중 첫 번째로 제기되는 것이 바로 부패문제이다.

요즘 시진핑 주석이 반부패운동을 벌여 인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고 국제사회도 희망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중국 반부패의 길은 험난하다고 보고 있다. 왜? 나는 역사문화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시각으로 현대를 조명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보인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중국부패역사는 그 뿌리가 너무 깊어 뽑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중국부패역사는 대략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혹자는 2천 년 전 중국에 부패가 없었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답부터 말하자면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 부패가 싹 텄고, 대진제국시기부터 부패가 만연되기 시작하였고, 진·한대부터 매관매직이 생겨나면서 부패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청대말기까지 제국시대는 부패가 줄곧 성행하고 있었다. 그 후 중화민국정부도 오늘날 중국도 부패가 치명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후기 전에는 왜 부패가 없었을까?

중국부패역사는 관료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전국시대 후기 전까지 官은 대체로 사관(史官)과 무관(巫官) 두 가지였다. 사관은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직업이고 무관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관장하는 직업이다. 그 당시 사관과 무관은 제국시대 관료들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또 주나라 때 사회지도층인 대부와 사(士)를 관으로 취급할 수 있겠으나 역시 제국시대 관료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대부는 자신의 영지와 채읍이 있었기 때문에 ‘직업관료’신분이 아니었고 사는 귀족으로서 영지는 없었으나 대부를 보조해 영지를 가꾸기 때문에 먹고 사는데 지장에 없었다. 더욱이 대부는 자신의 영지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타락은 있었어도 부패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와 사는 모두 귀족신분으로서 대대로 세습되어 생계가 보장되기 때문에 부패할 이유가 없었고 정치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대부와 사의 정치참여 의미는 권력 확장이었다.

그러던 데로부터 전국시기 후기에 이르러 진나라가 상앙변법을 도입하면서 봉건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고 따라서 대부와 사 계급의 세습을 폐지하고 대신 관원임명제를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역사에 부패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진제국이 건립됨에 따라 천하는 하나의 중앙집권통치권력 밑에 귀속되고 제국의 모든 것, 일초일목까지 공공의 재산으로 등장한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 부른다. 이때부터 나라의 길은 공로(公路), 관청에서 사무를 보는 직원을 공무원(공무원),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의 서류는 공문서(公文書)로 등장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公’은 백성의 몫까지 있는 진정한 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하위공’은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백성을 기만하는 허울 좋은 가면극이었고 실제로는 천하의 모든 것이 황제 일개인의 소유였다는 것이다(普天之下, 莫非皇土). 황제가 어떻게 천하를 소유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황제는 천자요, 하늘이 내린 수권(授權)을 부여받아 천도를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천하가 황제의 것이지만 황제 일인이 직접 경영할 수 없다. 그래서 황제를 대신해 경영을 맡을 자들이 필요했고 그들을 역사에서는 관료집단이라 부른다. 기업을 말하자면 회장님이 직접 경영에 나설 수 없어 사장을 두고 그 밑에 부사장, 이사, 전무, 부장, 과장, 팀장, 대리 등 수많은 간부를 채용하여 경영을 맡기는 것과 같다. 일면 제국의 구조와 현대기업구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이지만 현대기업은 주주제와 주식제로 서로 관리감독이 실시되고 있고 층층의 간부들은 모두 자신의 몫이 있기 때문에 회사의 흥망성쇠가 자신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에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제국의 관원은 자신의 몫이 없고 황제를 대신해 대리관원을 맡을 뿐이어서 제국의 흥망성쇠에 관심이 없다. 제국이 흥성하여도 개인의 주머니가 두툼해지는 것도 아니고 제국이 망해도 나 개인과는 무관하다. 더욱이 제국의 관원은 세습제가 아니므로 언제 어떻게 잘릴지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자리에 있을 때 해먹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나면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극구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機不可失, 時不再來, 過期無效).

제국은 군현제(때로는 성·부·현제, 도·부·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제국초기부터 멸망까지 현의 행정단위는 줄곧 존재해왔다. 지금은 말단 행정단위가 향진이지만 제국시대 말단 관원이 바로 현령(縣令:현장, 현관)이었다. 현령은 비록 말단 관원이었으나 백성과 부딪치는 現場의 관원으로서 목민지관(牧民之官)이었기에 비리를 저지를 기회가 가장 많은 자리였다.

왜 역대 현령들이 비리를 많이 저질렀을까? 우선 제국은 농경문화 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 한계가 있어 재정이 충족하지 못했다. 넉넉지 못한 재정수입으로 황족일가의 사치를 보장해야 하고 제국의 권력보장을 위해 군대도 양성해야 하고 황제를 대신해 대리관원을 맡은 방대한 관료집단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래서 말단 관원인 현령의 봉급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현관의 봉급은 한 대의 경우 조 20휘(280키로그램)에 돈 2천 냥이었다. 명대에 인민폐로 환산하면 1,130원 정도였다. 현관뿐 아니라 전체 관료들의 봉급이 매우 낮았다. 명대 정이품에 해당하는 육부상서가 1년에 받는 돈이 은 152냥이었고 청대 일품 관원은 겨우 180냥을 받았을 뿐이다.

제국시대 官과 僚는 간부, 吏는 관청의 직원이었다. 관료와 관리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정무관 관료인 주목과 현관은 그나마 낮은 액수이나 정해진 봉급이 있었지만 사무관인 이원(吏員)과 아역(衙役)들은 정해진 봉급도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목민지관인 주목(州牧)과 현관 및 이원과 아역들이 비리를 저지른 데는 단순히 개인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제국의 관원체제는 임명제(한대에는 察擧, 위진남북조시대는 薦擧, 수당 이후로는 科擧制에 의해 관료를 등용시켰으나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임명제였음)이기 때문에 아래 관원은 윗선에 잘 보여야 자리를 보존할 수 있고 승진도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 역시 금품을 바치는 것이다(上貢). 이것을 역사에서는 ‘효경(孝敬)’이라 한다. ‘효경’의 내원은 백성을 상대로 수탈하는 것이다. 백성을 수탈하여 효경을 바치는 것은 제국시대에 있어서 하나의 룰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관장누규(官場陋規)’라 부른다. 제국시대 관원들은 거의 다 ‘관장누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해서(海瑞) 같은 청관이 가끔 있었지만 부하들의 사무용 용지조차 직접 챙기는 해서와 같은 ‘각박한’ 청관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해서가 파면된 것이 그가 세상이 혼탁한데 홀로 깨끗한 각박한 청관이었던 것이 숨은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국시대 ‘효경’과 ‘관장누규’는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부간부들에 해당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간부들의 부패가 ‘효경’이 전부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일부 간부들의 과도한 사리사욕이 부패의 주요 이유이다. 일부 공공기관에서 간부 선거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비리가 여전한 것은 부패가 단순히 ‘효경’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패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제국은 소유권이 불분명했다. ‘천하위공’이 문제였다. 천하의 것이 모두 공이니 관리들은 황제의 대리인 역할만 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고 자리에 있을 때 해먹는 것이 관례로 흘러왔다. 또 ‘천하위공’은 황제 일인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황제는 방대한 관료집단을 두게 되었고 황제 자신은 자기 황족의 세습만 보존된다면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황제가 맘먹고 부패 척결에 팔을 걷고 나선다면 그 방대한 관료무리가 반기를 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제국은 무너지게 된다. 실제로 제국시대에 할거세력 무리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사례는 있었어도 관료집단이 반기를 들어 봉기를 일으켜 제국을 전복시킨 사례는 없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황제가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배만 불리면 반항이 없었다는 증거이리라.

관료들의 부패의 원인 가운데 덕치가 문제였다. 덕치를 강요하기 때문에 관료들의 봉급을 낮게 책정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그러나 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덕이 밥그릇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제국시대에 덕치를 주장하였기에 청관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청관은 극소수였다. 임칙서 같은 아무리 청백한 관리라 하더라도 ‘관장누규’에 자유롭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간부들이 덕을 강요받기 때문에 청관이 있기는 하나 실제생활에 있어서 간부도 경제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인만큼 집도 마련하고 자녀를 공부시키고 사회 인간관계 처리도 해야 하는데 덕이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패를 저지른다. 북경의 유명한 왕산 작가는 “당정간부들이 노임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관장에 있는 그들이 지출도 많을 것이니 일정한 회색수입은 눈감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당정간부를 하려 하겠느냐?”고 주장한다.

제국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중국도 마찬가지, 중국은 전통적으로 ‘가족본위’의 문화이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부패를 저지르는 요소도 있다. 한국이 민주화사회라 하지만 아직도 간부들의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통유교문화 영향에 의해 ‘가족본위’가 뿌리 깊기 때문이다.

제국시대 황제가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감아 주었다고 해서 제국시대에 반부패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세계역사에서 중국에 감찰기구가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고 한다. 진한시대에 이미 감찰부가 있었다. 서한 때는 ‘어사부(御史부)’, 동한 이후에는 ‘어사대(御史臺)’, 명·청 시대에는 ‘도찰원(都察院)’이라 불렀다. 그러나 고양이가 있다고 해서 쥐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제국시대 ‘고양이’는 ‘쥐’를 잡을 의지가 약했고 오히려 쥐가 마련한 먹거리를 나눠 먹으려는데 신경을 쓰고 있는 판에 부패를 잡는다는 것은 어쩌다 닭을 잡아 족제비한테 보이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기률검사위원회가 있고 반탐국이 있어도 부패가 만연한데 하물며 제국시대에 오죽했겠는가!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는 명언을 남겼다. 즉 오늘날의 사회 제현상은 역사의 관성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부패는 제국시대 2천여 년의 부패의 관성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택동이 건국 초기 ‘삼반오반’운동을 일으켜 부패척결에 나서 효과를 거뒀으나 개혁개방 이후 경제시대에 들어 제국시대 부패가 다시 재현되고 있다.

2천여 년의 제국역사, 중화민족에게 휘황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동시에 사회를 좀 먹는 바이러스도 너무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 부패도 하나의 심각한 바이러스로 꼽을 수 있다. 장개석의 중화민국정부도 제국의 부패바이러스 영향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 오늘날 부패바이러스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뿌리 깊은 부패바이러스를 제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그 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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