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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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라통일 예찬론자다
2013년 06월 08일 10시 06분  조회:7256  추천:12  작성자: 김정룡



나는 신라통일 예찬론자다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했다.” “신라가 통일한 것이 다행이다.” 한국학계는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갑론을박 중에 있다. 조선족사회문화인들은 고구려통일예찬론(가설)에 빠져 신라통일을 영 못 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는 중원정권에 맞서 싸웠는데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즉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로 못 간다.’ 이북의 속담이다. 역사를 해부하고 진단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표면상의 어설픈 민족적인 감정을 갖고 역사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문화를 기본바탕으로 연구하고 그때 그 결과가 후예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쳐왔나를 충분히 공부하고 나서 발언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먼저 중국역사를 간단히 짚어보자.

중국은 통일과 분열 반복의 역사였고 그 동안 23개 왕조가 존재해 있었다. 23개 왕조 중에 위진남북조시대 일부이민족통치, 몽고족의 원나라 지배, 만주족의 청국 등 이민족의 천하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민족이 통치했던 아울러 통치기간이 어떻게 길었든 중국은 시종일관하게 한문화(漢文化)를 바탕으로 흘러왔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유명한 도사(道師), 유생(儒生), 법사(法師)를 불러들여 책사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뜻인즉 중국을 다스림에 있어서 몽고문화가 아닌 중국전통문화(한문화)를 통치무기로 삼았다는 의미이다. 만주족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치포나 변발 등이 만주족의 문화였지만 통치무기는 여전히 한문화였다. <강희자전>이 만문(滿文)자전인 것이 아니라 한문자전인 사실이 말해주듯 만족문화는 사라져가고 한문화사회였다. 그래서 중국역사는 문화역사라는 결론이다. 5천년 중국이 중국답게 흘러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튼튼하고 견고한 한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반도가 수차례 모자라는 천 번의 외침을 당해오면서도 오늘날까지 반도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의 삼국시기로 돌아가 보자.

고구려는 중원정권과 인접해 있었기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례로 왕을 제치고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올린다. “전하, 가마솥의 받침대가 세 개이듯이 나라를 받치는 기둥도 마땅히 세 개여야 하옵니다. 우리고구려는 유교와 불교는 그런대로 보급되어 있으나 도교는 영 말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인 줄로 아옵니다. 그렇게 하려면 당나라에 요청하여 도사를 모셔오는 것이 시급하옵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청을 받아들였고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의 요청에 의해 도사를 파견하고 도관까지 지어주었다. 고구려왕이 직접 도사의 강의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외 김일연의 《삼국유사》에 기재되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고구려는 문화적으로 중원정권과 발을 맞추기에 노력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아울러 고구려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국경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압력도 압력이거니와 더욱이 문화적으로 당나라가 많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중원문화에 대한 동경의 발로에서 생겨난 자발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대륙성’이 강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민족문화의 퇴화를 의미한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현해탄을 사이 두고 있는 일본과 가깝게 지냈고 아울러 중국 양자강중하류지역과 교류가 빈번해 문화적으로 많이 성숙되고 세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국제성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자민족문화성격이 점점 퇴화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의 문화특징이 ‘대륙성’이었다면 백제의 문화특징은 ‘국제성’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와는 십만 팔천 리나 다르게 신라는 문화적으로 ‘촌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신라는 위치적으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몹시 편벽했다. 육지를 통해 중원으로 가는 길목은 고구려가 막혀 있었고 해상통로는 백제가 버티고 있어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겨우 중원정권과 교류가 시작되었을 정도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신라는 중원문화의 영향이 아주 미미했다. 일례로 불교가 4세기 초에 고구려에, 4세기 후반에 백제에 전파되었던데 비해 신라는 527년에 이르러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외래종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유교가 유입되자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풍교일 따름이며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라 불렀다. 썩 후에 불교가 유입되자 역시 같은 맥락에 의해 불교를 ‘석씨풍교’라 불렀다.

불교유입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신하들 앞에서 조카 이차돈의 목을 치면서까지 불교를 받아들인 제23대왕은 법흥왕이었다. ‘법’은 불교를 뜻하고 ‘흥’은 흥기를 의미하는데 법흥왕이란 곧 불교를 흥기시키는 왕이라는 뜻에 의해 지어진 호칭이었다. 제24대왕을 진흥왕이라 불렀는데 역시 불교를 진흥시킨다는 뜻에서 얻은 호칭이었다. 그런데 진흥왕은 비록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불교를 진흥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무기는 역시 불교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興邦國, 須先風月道)”고 밀어붙였다. 아울러 본래 원화(源花)를 화랑으로 변모시키고 화랑도를 일으키는 것을 국가 으뜸의 대사로 추진했다.

화랑도는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부른다. 화랑도 명부를 ‘풍류황권’이라 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화랑도는 신라고유풍교에서 유래되었고 아울러 신라풍교발전을 절정에로 이끌어 신라인의 정신지주가 되었고 신라인의 혼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화랑도에 대해 할 말이 태산 같이 많지만 생략하고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의 의미 깊은 지적을 빌어 마무리 하겠다. “화랑을 모르고 조선을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과 같이 우둔하다.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것은 화랑이다. 유감스런 것은 화랑의 유풍이 미연하게나마 남아 있었는데 국풍파인 묘청집단을 숭송파(崇宋派)인 김부식 집단이 소탕해버림에 따라 조선은 한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필자는 단재·신채호의 지적을 동의하면서 약간 견해를 달리하고 싶다. 즉 단재·신채호의 말에 따르면 고려 중기부터 조선의 혼이었던 화랑유풍이 자취를 감추고 한문화일변도로 흘러왔기 때문에 조선다운문화가 소실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임어당은 그의 저서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했지만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들어왔다.”고 지적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문화라 하지만 인간은 문화보다 본능에 의해 세상을 살아가는 비중이 더 크다. 한 례로 유교는 강력한 사회질서를 구축하기를 강조해왔으나 중국인은 아직도 공공질서의식이 매우 빈약한 이유가 바로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을 주창하는 도교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반도에서 비록 고려 중기부터 한문화에 빠져 왔고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를 뼈가 절도록 받아들였으나 반도인의 인간타입은 반도고유문화에서 형성된 ‘멋’ ‘맛’ ‘판’이다.

대저 ‘멋’ ‘맛’ ‘판’이란 무엇인가?

‘멋’ ‘맛’ ‘판’은 풍류도의 정수이며 쉽게 말하자면 신라풍교에서 유래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말하자면 신라풍교는 중국과 일본 및 중국동북쪽의 많은 민족과 다른 인간타입의 문화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멋’ ‘맛’ ‘판’이다. 아울러 ‘멋’ ‘맛’ ‘판’은 중국과 일본 및 동북쪽의 많은 민족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반도인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아왔다.

필자는 이 세상에 없는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문화’이다. ‘바람문화’의 뿌리는 신라풍교이며 화랑을 거쳐 반도인만의 소유하고 있는 문화, 즉 ‘멋’ ‘맛’ ‘판’의 문화로 승화되었고 배달민족은 ‘선사(仙史)’를 창조해왔다.

전체우리민족은 세상에서 가장 ‘멋’을 좋아하고 아울러 체면문화를 비롯해 우리민족성격 90%이상이 ‘멋’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맛’은 단순히 음식 맛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삶 자체가 ‘맛’이다. ‘판’은 춤판, 노래판, 도박판, 술판 심지어 개판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은 일상생활의 다수 행위가 ‘판’과 관련이 있다.

‘멋’ ‘맛’ ‘판’은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는 중국어나 일본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우리민족만이 창조해낸 문화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류의 문화뿌리를 ‘멋’ ‘맛’ ‘판’으로 풀어낸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화제를 돌려서 신라문화가 어떻게 우리전체 민족의 문화로 되었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답할 차례가 왔다.

답에 앞서 이런 가설을 해보자. 삼국 후기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가장 강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통일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오늘날 반도의 민족문화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 한때 절반중국을 통치했던 거란족은 자취를 감췄고 268년이나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자체문자와 언어 및 풍속, 민속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이 고구려도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서 당시 고구려는 중원에 문화적으로 동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풍교를 비롯해 자체문화를 강력하게 지켜왔던 신라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구려유민과 백제유민에 이르기까지 ‘바람문화’를 전파시키고 하나의 민족문화로 자리매김 시켜왔다. 중국문화가 이미 선진시대에 완성되었다면 반도문화는 통일신라를 거쳐 완성되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밝힐 것은 필자가 지난 10년 동안 한반도문화를 연구해온 결과 고구려 문화는 부분적으로 민속으로 남아 내려온 것은 있으나 전체반도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는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라문화는 현재까지도 반도인의 주체문화로 골격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유력한 증거를 더 제시하자면 현재 반도인이든 해외동포든 우리전체민족이 ‘멋’ ‘맛’ ‘판’의 문화가 강하고 남과 북 해외동포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문화차이는 존재하고 있으나 총체적인 인간타입은 거기서 그것으로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언어가 그 민족의 역사를 말해주듯 광복 후 한국가요에 ‘바람’이란 어휘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고 우리전체 민족은 아직도 일상생활에서 ‘바람’이란 어휘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실이 유력한 증거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역사흐름을 무시하고 다만 신라가 당이라는 강대한 외세를 끌어들인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옳은 역사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삼국 시기는 서로 자기네 이익을 위해 타국과 손을 잡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특히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거의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거란에는 한족이 재상을 맡은 시기도 있었고 발해 백성은 말갈과 거란족이 절대다수였는데 고구려 출신 대조영이 왕을 해먹었지 않았는가! 민족이란 개념은 10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고 오늘과 같은 민족의식은 반세기역사로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시기를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의 시각으로 보면 절대 안 된다.

신라가 당과의 연합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당은 대동강을 경계로 그 이북을 당에 귀속시키고 계림(오늘의 경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설인귀가 도독을 맡았다. 이렇게 되어 신라는 전쟁의 대가를 보상받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을 신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유민과 백제유민과 손잡고 당과 맞서 싸웠다. 근 20년의 ‘독립운동’을 거쳐 끝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통일신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도 국제관계는 서로간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빈번하다.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이익만 있다(沒有永遠的朋友, 只有永恒的利益)’는 처칠의 말이 만고의 진리이다. 누구와 손잡던 그것은 당시 그 나라의 이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오늘날의 민족의식으로 그때 그 시절에 발생했던 사건을 재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누가 통일의 주역이 되었든 간에 우리가 연구해야 과제는 민족문화의 연속성과 지속성이고 아울러 그 문화의 명맥으로 민족이 민족다운 인간타입을 유지해왔고 앞으로도 유지해 나아가는 것이 생존의 길이다.

동포문학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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