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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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과 고려연방제논고
2013년 05월 09일 09시 17분  조회:7255  추천:27  작성자: 김정룡



남북통일과 고려연방제논고

 

1990년 내가 여행업에 종사할 때 한국관광객을 모시고 백두산관광을 온 한국 00여행사 사장이 “참 세월이 좋아졌습니다. 불과 이삼년 전까지 누가 중국으로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겠어요. 이런 추세라면 남북통일도 10년이면 가능하지 않겠어요.”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때는 절대다수 한국인이 남북통일에 대해 낙관적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현재 그때 상황에 비해 남북관계는 악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남북통일이 언제 실현될 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언제가 되던 남북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통일은 분열보다 더 말할 것 없이 좋으니까. 문제는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동서독일통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동서통일은 흡수통일이었지만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흡수통일이 어렵다는 것이다. 흡수통일이 아니라면 대등한 위치에서 남북이 서로 자기네 수지(이익)가 맞아야 목적이 달성될 것이니 이에 엄청난 어려움이 닥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물론 서로 간에 많은 양보가 없이는 절대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으나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이론보다 실천이 수백 배 수천 배 더 어려울 것이다.

국호부터 문제이다.

남측은 ‘대한민국’을 주장할 것이고 북측은 ‘조선’을 내세울 것이다. 이런 논쟁을 막고자 김일성 주석이 1974년 ‘고려연방제’란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를 영어권에서 ‘KOREA’로 부르는 것은 고려에서 유래된 것이니 문제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연방제(聯邦制)’에 대해선 논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방’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 유래는 어떻게 온 것인지를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고려연방에서의 ‘방(邦)’은 방국(邦國)이다. 방국의 유래는 중국 주나라시기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하나라에도 방국이 있었고 은나라에도 방국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해 고증이 어려운데 비해 주나라 방국은 하나의 정치제도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하였고 고증도 충분히 되고 있기 때문에 주나라 방국을 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3천 년 전 주 무왕은 천하를 얻게 되자 방국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본래 상의 3천여 개에 달하는 부족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방국제도를 실시하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국제도란 도대체 무엇일까?

주왕은 수하 제후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걸쳐 빼앗은 이민족의 땅과 본래 주에 속한 땅을 재분배하게 되었고 분배를 통해 새로운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토지재분배 방식은 다음과 같다. 가까운 형제와 친인척들에게 좋은 땅을 분배하고 전쟁에서 공로의 대소에 따라 차등으로 전국의 토지를 분배하였다. 토지를 분배하는 동시에 그 토지를 경작하고 지켜낼 책임자를 세웠다. 역사에서는 토지를 분배한 것을 ‘봉(封)’이라 하고 책임자를 제후라 부르는데 제후를 세우는 것을 ‘건(建)’이라 하며 봉건이란 이렇게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봉건이란 어휘는 명사가 아니라 ‘봉토건국’의 뜻으로 동사이다.

주왕조는 자신을 천하로 여기고 각 제후국을 통해 천하를 다스리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래서 각 제후국 사이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국제관계였다. 문제는 800여 개에 달하는 제후국을 하나의 온전한 국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국으로 보자면 규모나 범위가 부족하고 부족국가로 보자 하니 하상시대 부족국가보다 범위가 큰 것이 사실이었다. 실질적인 딜레마였다. 국보다 작고 부족국가보다 큰 것이 방(邦)이다. 이로서 800여 개의 제후국을 방국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나라 봉건제도를 방국제도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방국제도는 폐단이 많았다. 제후, 대부, 사가 소유한 재산은 전부 사유재산이었고 천자는 ‘경영’에 개입하지 못한다. 천자의 의무는 세금을 거둬들이고 말썽이 있으면 때로 훈계정도일 뿐이었다. 천자가 직접적인 ‘경영권’이 없으니 제후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고 따라서 대부가 제후를 능가하는 사례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자는 명분만 갖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허수아비였다. 그래서 각 제후국, 즉 각 방국 사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고 천자가 완전히 통제권을 잃어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 그 시기를 역사에서는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각 방국 사이 패권다툼은 점차 서로 너 죽고 나 사는 ‘겸병(兼倂)’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전국시대라 부른다.

800여 개의 방국이 전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진(秦)ㆍ초(楚)ㆍ연(燕)ㆍ제(齐)ㆍ조(赵)ㆍ위(魏)ㆍ한(韩) 등 칠웅이 남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진이 기원전 221년 육국을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룬다.

진은 상앙의 변법(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한다.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한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확대개간을 장려한다.)을 수용한 덕분에 부국강병을 이뤘고 영정시대에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며 중국역사상 봉건으로 이뤄진 방국, 즉 분권시대를 마감하고 중앙통일집권제인 제국시대에 진입한다.

방국이란 개념을 중국역사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젠 한반도역사에서의 방국을 알아볼 차례이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체로부터 가족사회, 가족사회로부터 씨족사회, 씨족사회로부터 부족사회, 부족사회로부터 국에 이르렀다. 한반도 역사도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왔다. 그런데 한반도역사에서는 중국의 서주·동주시기와 같은 봉건으로 이뤄진 방국시대를 찾아보기 어렵다. 4346년 전 단군이 조선을 세웠고 기원전 190년 전후하여 위만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고 북쪽에는 부여, 예, 맥, 저 등 부족국가, 남쪽은 변한, 진한, 마한의 부족국가들이 병립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부족국가들은 중국의 주나라처럼 하나의 왕의 지배하에 귀속되었던 것이 아니라 모래알처럼 흩어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방국’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건립, 기원전 18년 백제의 건립에 의해 삼국시대에 진입하였는데 삼국시대 역시 방국시대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기원 661년 백제의 멸망,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통일신라시대를 열었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반도역사에 방국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있기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 방국이 도대체 어떻게 유래되었고 어떤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을까? 고증이 매우 어렵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같은 대형 서점에 가서 이 잡듯 뒤져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방식대로 터득한 바를 여기서 풀 수밖에 없다는 점 미리 밝혀둔다.

김일연의 《삼국유사》진흥왕편에 방국이 언급된 대목이 있다. “제24대 진흥왕(재위 534~576)은 천성이 풍미하다. 그는 나라(방국)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먼저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興邦國, 須先風月道)고 호소하였다.” 여기에 등장된 방국이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역사를 살펴보면 방국은 반드시 귀속이 있어야 한다. 진흥왕이 신라를 방국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신라는 어디에 귀속된 방국이란 말인가?

신라는 육로로는 고구려, 해로로는 백제가 버티고 있어 6세기 초까지 중원조정과의 독립적인 외교가 막혀 있었다. 이런 폐쇄적인 국면을 제24대 진흥왕이 타개하였다. 기원 564년 진흥왕이 처음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중국북방왕조인 북제(北齊)에 조공하였다. 이듬해 북제 무성제가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신라는 이렇게 당시 동아세아 국제질서이자 관례로 되는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되었다.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된 주변국들은 중원조정을 중심으로 하나의 방국이 아닌 방국으로 되었던 것이다. 물론 주나라 시기 방국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리고 신라가 방국이었다면 고구려와 백제도 중원정권과 조공책봉의 예의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방국이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 일찍이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되고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원을 쫓았다. 신라는 비록 진흥왕이 동아세아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중원문화를 쫓는 것이 자국의 실제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는 건국하여서부터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정치적으로 대제국인 한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라는 22대까지 왕의 호칭을 중원에 따르지 않았다. 1대 박혁거세는 거서간(세상을 밝게 비춘다), 2대 남해는 차차웅(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사장, 무당), 3대 유리부터 16대 홀해까지 이사금(연장자, 이빨이 드세다 뜻), 17대 내물부터 22대 지증까지 마립간(우두머리 중 우두머리), 23대 법흥부터 56대 경순까지 왕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23대왕은 불교를 흥기시킨다는 뜻으로 법흥왕이라 불렀고 24대왕은 불교를 진흥시킨다는 뜻으로 진흥왕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고 보면 중국식을 따른 것은 576년 등극한 진지왕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는 문화적으로도 고구려와 백제와 크게 달랐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분주했지만 신라는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라 하고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씨풍교’할 만큼 풍교에 심취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라는 자체문화인 풍교를 매우 중시하였고 방국이 된 후 중원문화를 따르자니 머슴이 주인의 비단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맞지를 않아 역시 토착문화인 풍월도를 주체문화로 밀고 나아갈 것을 진흥왕이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비록 형식상 중원정권의 방국으로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방국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그 후 통일시대에 들어서 신라는 당과 여전히 조공책봉관계에 있었으나 삼국시기와 다르게 방국의 의미가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문의 주제에 다시 돌아와 논의해보자.

김일성 주석이 제안한 고려연방은 남측 대한민국과 북측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각각 두 개의 방국으로 보고 하나의 연합정부를 세우자는 것인데 과연 타당한지? 문제가 없는 것인지?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보는 것이 무척 흥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남과 북을 두 개의 방국으로 인정한다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질 소지가 크다. 방국은 정치, 문화, 경제 등 제 분야에서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합정부가 어떤 방법과 방식으로 통제가 가능한지? 혹시 각각 서로 현행체제를 유지하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시하자는 것인지? 물론 이를 바라고 통일을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통일은 흡수통일도 아니고 일국양제도 아니고 고려연방제도 아닌 서로 간의 합의에 의해 하나의 완정한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것이다.

본문은 연방제에 대한 개념논고를 중점으로 전개하였을 뿐 고려연방제의 이와 폐에 대해 치중하여 논고를 전개하지 않았다. 나는 정치에 문외한이므로 연방제논고에 관심이 있는 지자들에게 토론의 참여를 발원한다.

 

후설

앞서 발표한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의 두 편의 글은 필자가 현재 집필하고 있는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의 제목으로 된 중국역사문화를 해부하는 전체 작품 중 두개의 소제목이다.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의 작품은 중국역사문화의 흐름(流)을 짚는 동시에 ‘왜’라는 뿌리(源)를 밝히는 작업이다. 과거 10여 년 동안 꾸준한 준비과정을 거쳐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流’만 짚는 것은 에세이이고 ‘源’을 밝히는 것은 학문이다. 이미 18만 자 썼고 앞으로 5만 자 더 써야하는 시점에 이르러 한두 편을 미리 발표하여 독자들의 테스트를 받고 싶었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다행이다. 필자는 토법연강에 의해 취미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반응이 나에겐 크나큰 용기가 되었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힘을 얻어 기쁘다.

그리고 존경하는 독자께서 저자로서 독자들과 함께 깊이 있는 토론에 참여하기를 바라는데 죄송하지만 필자는 종래로 타인의 글이든 본인의 글이든 댓글을 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소신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독자들과 반드시 토론할 일이 있다면 별도의 문장을 지어 발표하는 것은 좋지만 일일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다만 존경하는 독자께서 필자가 겸허하게 테스트를 받고 있고 이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하기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시기를 바란다.

이 기회를 빌어 저의 졸저를 관심 있게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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