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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나?
2013년 05월 01일 10시 29분  조회:6741  추천:32  작성자: 김정룡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나?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나? 이 질문은 100년 전 독일학자 막스 베버가 제기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발전된 이유를 저서《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통해 밝혔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특질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를 설명한 막스 베버의 대표작이다. 프로테스탄트란 개신교이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의식을 청교도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발달한 것은 청교도의 신에 대한 신앙과 책임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시민계급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 개혁을 수용한 사람들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금전 추구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윤리적인 통제를 가함으로써 향락, 방탕, 재산을 낭비하는 일을 절제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금욕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렇게 얻은 자산의 양은 그의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는 재산의 획득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을 돕는다.

이윤추구의 동기에 의해서 작동하는 모험가적 자본주의는 어느 시대에서,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 영리추구를 긍정한 것은 자명한 일이 결코 아니었으며 어느 일정한 시대 이후 성립된 것으로 그것도 서구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이와 같은 사태가 생겨나기 위해서 서양의 시민계급은 어느 특정한 생활태도의 훈련을 받고 합리적이며 방법적인 노동을 도덕적 의무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생활태도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 발생과 발전 원인을 설명한 동시에 ‘중국은 왜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한다. 베버에 따르면 중국은 과거 찬란한 문화역사가 있었지만 중국인은 신앙이 없는 민족이다. 신앙이 없으니 현실생활에 치중하는 리얼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국인의 리얼리즘은 이 현세 밖에 다른 이상사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상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돈이 생기면 서구처럼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을 추구하는 것으로 허무한 세월을 보낸다. 번 돈을 미래 자본 확대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에 탕진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 푼의 돈이 있으면 2할 정도 가계지출에 쓰고 5할 정도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줄 궁리를 하고 나머지 3할은 주색에 써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인이 장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전혀 자본 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재래식의 장사와 근현대 자본주의는 성격상 본질상 다르다.

중국은 1천 년 전 송나라 초기 ‘자본주의맹아’가 있었다고 말한다. 근거가 있다. 첫째 시장발달이었다. 장택단(張澤端)의 그림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을 보면 당시 날씨가 화창한 청명 날 수천 명이 장터에서 붐비는 모습이 담겨 있다. 둘째 지폐(紙幣)의 출현이었다. 세계역사에서 지폐가 가장 먼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중국이다. 즉 송나라 초기에 이미 지폐가 유통되었던 것이다. 지폐가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은 물류교환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만약 중국이 송나라 초기에 출현했던 자본주의맹아가 줄곧 발전해왔다면 역사를 다시 써야 하겠으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송나라 초기 출현했던 ‘자본주의맹아’가 어떻게 시들어지고 사라졌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했다.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지방할거세력에 의해 무너진 전 왕조 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지방군사 세력을 전부 중앙정부에 귀속시키고 병력을 무력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조치는 모든 권력을 황제 일인에게 집중시키는 전제통치에 도움에 되었으나 역대 왕조 가운데서 군사력이 가장 약한 결과를 빚어냈다. 군사가 약하니 외래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찮게 여겼던 말갈족(靺鞨族) 금나라한테 침략 당했고 패배했다. 전쟁에 패배한 송나라는 금나라에게 금을 바치고, 땅을 떼 주고, 비단을 바치고 미녀를 상납하는 조건으로 겨우 조정을 유지하였으나 금나라도 송나라 더러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가는 조건을 걸었다. 결국 송나라는 북방을 포기하고 수도를 건업(建業 : 지금의 남경)에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남송의 역사가 개시되었다.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하게 되자 그 밑에 유능한 한족관리들이 오랑캐 밑에서 일하기 싫어 따라서 남쪽에 가게 되었고 돈 많은 부자와 유명 문인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사 갔는데 역사에서는 이들을 ‘객가(客家)’라고 부른다. 싱가폴 이광요(李光耀 : 한국에서는 영어식으로 이콴유라 함) 총리, 등소평 등 인물들이 ‘객가’출신 후예들이다. ‘객가’에 의해 그때부터 중국은 남방에 인재가 많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객가’들이 돈은 많은데 할 일이 없었다. 사내가 돈은 많은데 할 일이 없으면 뭘 생각할까? 송나라 초기 ‘자본주의맹아’를 살려 역사를 바꿔 볼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빤한 일이다. 식과 색이 아니겠는가? ‘객가’들이 할 일이 없어 일차적으로 먹는 것에 신경 쓰다 보니 요리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늘날 중국요리가 세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데는 남송시기 ‘객가’들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결과이다.

한편 ‘객가’들이 사나이의 본능인 색을 추구하다 못해 미련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전족(纏足)’문화이다.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인은 확실히 먹는 것에 관심이 컸고 신경을 많이 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송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어떤 사람과 식도락을 논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섬서성(陝西省) 대여현(大荔縣)에서 생산한 양고기를 푹 삶은 것에 행낙(杏酪)을 부어넣은 요리는 젓가락이 아닌 손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하남성 남양현(南陽縣)에서 생산한 최고급 보리눈으로 온면을 만든다. 그 조리방법은 먼저 면에 훼나무의 연한 싹을 넣어 삶고 난 뒤 하남성 수현(脽縣)의 말저(抹猪 : 돼지기름)를 넣어 비벼먹는다. 공성(共城)의 특산물인 향기나는 멥쌀로 밥을 짓는데 그것을 다시 새끼 거위의 뱃속에 넣고 쪄서 요리를 만든다. 절강성의 호주(湖州)의 요리사가 송강(松江)에서 잡은 물고기로 회를 쳐서 내놓았다. 나는 이러한 산해진미를 포식하고 난 뒤 다시 여산(廬山) 강왕(康王) 계곡의 염천(廉泉)에서 길러온 물로 복건성의 증갱(曾坑)에서 생산한 명차를 우려내어 마셨다. 이윽고 옷을 벗고 편안히 누워서 사람에게 동파 선생의 <전후적벽부(前後赤壁賦)>를 읊조리게 하였으니 또한 족히 한 번 웃으며 즐길 수 있었다.

문인의 식탐이 이 정도였으니 관리들의 식문화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사치스러웠다. 송나라 나대경(羅大經)의 《계림옥로(鷄林玉路)》에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대부가 경사(京師)에서 돈을 주고 여자 하인 한 명을 샀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가 채태사(蔡太師) 댁의 만두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주방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루는 그녀에게 만두를 만들도록 하자 뜻밖에도 만들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주인이 그녀를 책망하여 말했다. “지난 번 자네가 만두를 만드는 주방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면서 어찌 지금 만두를 못 만든단 말인가?”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주방에서 만두 속에 넣을 파를 가늘게 써는 일만을 담당했으니 어찌 만두를 제대로 만들 수 있겠어요!”

대지주는 식탐이 심한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음식기호 또한 기괴했다. 사천 지방의 유명한 지주였던 유문채(劉文彩)는 오리의 물갈퀴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 요리를 만들려면 백여 마리의 오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송나라 여몽정(呂蒙正)의 음식기호도 특이했다. 그는 닭의 혀로 만든 탕을 좋아했다. 하루는 후원에서 높이 쌓여 있는 한 무더기를 보고 새로 쌓은 토산이라고 생각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토산이 아니라 닭털더미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여몽정은 자기가 닭 요리를 많이 먹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닭털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이 쌓여 있을까라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닭의 혀는 하나뿐인데 공께서는 계설탕 한 그릇을 만드는 데 혀가 얼마나 필요하고 그 요리를 모두 몇 번이나 먹었는지 아십니까?”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중국인은 확실히 돈이 있으면 소망을 갖고 미래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에 탕진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이 현실에 안주하고 충실하여 오늘 아침 술이 생기면 오늘 취해버리는 ‘하루살이’ 인생관이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던 전부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둘째 중국역사는 중농억상 사상이 뿌리 깊었다.

송나라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그에 따라 유통의 수요에 의해 지폐가 등장하였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고 더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바로 뿌리 깊은 중농억상 사상 때문이었다.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는데 역사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은나라는 상업이 발달하여 상(商)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장사를 상업(商業), 장사에 종사하는 자를 상인(商人)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상왕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3천 년 전 주나라가 상나라를 전복시킨 것은 인문문화가 무귀(巫鬼)문화에 대한 승리, 농경문화가 경상(經商)문화에 대한 승리였다. 주나라는 초기부터 분봉제와 정전제의 실시로 농업을 발전시켰다. 진대부터 청대까지 2천년 제국시대는 중앙통일집권제를 굳건하게 하고 황제들이 절대적인 권력 장악으로 전제통치를 위해 더욱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였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불위를 비롯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 만한 거상들의 도움이 컸다.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제통치 권력에 도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싹이 자라기 전에 미연에 잘라버려 우환을 제거해야 한다. 《사기》<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천하의 부자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명분은 수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실질은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 상인들에게 장성을 건설하게 했으며 오령(五嶺)을 지키게 하였다.

한나라는 초기부터 억상정책을 펼쳤다. 장사꾼은 비단옷을 입을 수 없고 수레를 사용할 수 없으며 조세를 무겁게 매겨 그들을 곤혹스럽게 굴었다. 시정(市井)의 자손들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규정까지 반포하였다.

아무리 이런저런 억상정책을 펼치고 조치를 취해도 때론 상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황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오국은 장강 하류에 위치하여 염전도 많고 광산도 적지 않아 풍부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반란의 자금줄이어서 한 무제는 강온 양면책을 동시에 시행하여 법적으로 염철의 사영(私營)을 엄금하는 한편 폐업한 염철 상인들을 염관(鹽官), 철관(鐵官)으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공업이나 상업의 관영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 운영하는 상공업은 지속적인 제국의 약탈과 수탈 속에서 간신히 생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렇게 한나라 초기부터 억상정책을 기본국책사업으로 추진해온 결과 역대제국은 민간자본 발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생겨날 토양이 없었던 것이다. 털은 가죽이 있어야 붙는 법이다. 가죽이 없는 털이 생겨나는 법도 없다. 이 속담이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충분할 것이다.

셋째 옛것을 숭상하고 지난 것에 집착하는 ‘인순수구(因循守舊)’의 전통 때문이다.

요순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인은 요순시대를 그리며 살아왔다. “그때는 자물쇠가 없어도 도둑이 드는 법이 없었고 물건을 줍으면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고 마을 사람끼리 다투는 일이 없었지. 태평성세요, 실로 태평성세였지.” 늘 이와 같이 되풀이를 반복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다음과 같은 격언을 좋아한다. “세상의 기풍이 날로 못해가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으니 오늘이 과거보다 못하구나(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절강성의 어느 어촌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원래 너무 가난하여 장가를 가지 못한 노총각이 수두룩했다. 심지어는 장가를 간 사람도 신부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아 근수에 따라 처가에 돈을 지불하여 데리고 오는 낡은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지역은 크게 발전하여 많은 지역민들이 부자가 되었다. 돈을 빌려주거나 빌린 돈을 갚을 때 아직까지도 돈을 세지 않고 저울에 달아 주거니 받거니 한다. 예를 들어 백 위안을 몇 근, 몇 냥 빌렸고 오십 위안 몇 근 몇 냥 빌렸다는 식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처럼 부유한 곳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생각은 안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서 풍기가 크게 문란하였다. 그래서 스무 살이 넘은 청년 중에서 ‘임칙서(林則徐)’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현대화 중국에 아직도 이렇듯 황당한 일(물론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말이다.)이 있는데 전통사회 중국인은 더 어떠했을까?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전통을 목숨처럼 여기고 변혁을 거부하고 혁명을 거부해왔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봉건 영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구축한 거대한 혁명이었다. 중국인은 1898년 개량을 요구하는 ‘무술변법(戊戌變法)’조차 실패하였는데 어찌 자체적으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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