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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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황제와 소녀》

1. 龍人誕生
2012년 02월 04일 08시 41분  조회:4590  추천:0  작성자: 김정룡


1. 龍人誕生: 용인탄생

용의 아들이 태어나다

황하 하류에서 물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만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천하제일 명산이 나타난다. 이름하여 곤륜산이다.
곤륜산은 서해의 남안, 유사(流砂)의 언저리, 적수(赤水)의 북쪽, 흑수(黑水)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사방이 800리에 달하며, 드넓은 산은 바다보다 만길이 높고 산세가 험악하다. 기이하게도 하늘에 맞닿아 있건만 넓은 산에는 온갖 나무들로 덮여 있다. 신의 힘이 대지에 나타난 듯 울울창창한 수림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시루에 들어찬 콩나물마냥 빼곡히 늘어선 나무들 때문에 이곳에 발을 들이면 숨이 턱, 막혀 오는데다 일조량이 적고 안개가 늘 자욱하여 찌뿌드드하게 습하다. 게다가 해가 지는 산이라 음산한 기운이 가득 차 공포스럽다. 무섭고 답답한 곳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령은 산으로 모습을 바꾸어 자신을 드러낸다. 예로부터 귀신은 음산한 곳을 선호하여 기거하는 법이다. 음산함으로 말하자면 심산계곡으로 가득 찬 곤륜산이 천하 으뜸이다. 그래서일까! 곤륜산은 온갖 잡귀신들의 놀이터요, 신선들의 집거지요, 무당의 잔치마당이요, 옥황상제의 출생지요, 하늘이 내린 천모낭랑(天母娘娘: 왕모)도 이곳에 기거한다. 그뿐이랴, 반신반인의 헌원 황제도 젊은 나이에 이곳에서 살았다. 그야말로 신들의 전당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곤륜산은 신을 인격화하는 신화와 인간을 신격화한 신화적인 전설을 쉼 없이 흐르는 폭포마냥 쏟아냈다. 많고 많은 전설 중 단연 천모낭랑이 으뜸이고 헌원이 그 뒤를 따른다.
헌원이 태어나기 전의 인간세상은 암컷의 천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삶의 터전이 지극히 열악하고 문명이라는 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 동물적인 본능에만 의존해 살다보니 비바람과 폭풍우에 죽고, 굶어 죽고, 질병에 죽고, 싸움에 죽고, 얼어 죽기 바빴다. 사람이 태어나 목숨을 부지하기가 10명 중에 3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 부족을 유지시키려면 어떤 수를 쓰든 후대 번식을 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아이를 낳는 여성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사내는 노예가 되었고, 여자는 그 사내 노예들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다.
천하제일 명산이자 성산인 곤륜산의 여주인은 하늘이 내린 천모낭랑이다. 사람의 얼굴에 호랑이의 이빨, 표범의 털이 온몸에 덮여 있으며, 팔은 쇠다리이고 하반신은 코끼리 다리만큼 굵은 거녀이다. 한번 소리를 지르면 천하가 진동하는 살벌한 여인이다. 그녀는 죽음을 관장하는 제사장이자 다산을 관장하는 왕이다. 불사약을 갖고 있으며 삼천년에 한 번 꽃이 피고 삼천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신실 복숭아를 갖고 있다. 옥을 먹고 산다 하여 옥녀(玉女)라고도 부른다. 민간에서 그녀를 옥녀라 함은 음기가 왕성하여 교합의 달인이라는 소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옥황상제가 천상의 신이라면 옥녀는 땅 위에서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통치자로 수천수만 년을 통치해왔다. 달이 가고 해가 뜨는 것이 자연의 당연한 이치라면 옥녀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로 굳어져온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하는 자가 없었다. 헌데 최근 들어 그녀에게 큰 고민이 생겼다.
“으아악!”
그것은 바로 악몽 때문이었다. 보통 악몽이 아니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어나고, 정신을 차려보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마치 물에 담근 빨래의 몰골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난데없는 용이었다.
곤륜산 아래에 기거하는 우매한 사람들은 수천수만 년 동안 줄곧 늑대, 호랑이, 곰, 뱀 등 동물을 숭배해왔다. 그러나 용은 상상의 동물이었다. 옥녀는 시도때도 없이 꿈에 나타나 괴롭히는 용 때문에 몸과 마음이 피폐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괴롭힘을 당하다가는 도저히 견디어낼 수 없구나. 어떻게 한다?”
이리저리 고민하고 방도를 구하던 그녀는 무릎을 쳤다.
“오, 나의 충신 파랑새를 불러야겠구나.”
곤륜산 서쪽 삼위산(三危山)에 세 마리 파랑새가 산다. 이 새들의 몸통에는 날개가 달렸으나 얼굴은 사람이다. 몸은 선명한 청록색이고 머리는 흑갈색이다. 첫째 날개의 가운데에는 푸른빛이 도는 흰색의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으며 그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 때는 엄청나게 커진다. 부리와 다리는 붉은색을 띤다.
이들은 때로는 새이고 때로는 인간으로 변신하는데 주로 옥녀의 음식 조달을 맡고 때때로 전령사 역할을 한다. 옥녀가 천신들과 옥황상제, 복희씨, 염제와 같은 제신들을 반도(蟠桃) 연회 초대할 때면 파랑새가 멀리 날아가 소식을 전해준다. 또 옥녀가 바깥세상의 궁금한 일이 있으면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소문을 물어와 바친다.

곤륜산에서 가장 청정한 곳은 구곡폭포이다. 아홉 굽이를 꺾어 흐르는 물이기에 구곡폭포라 이름이 붙었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거친 물결소리는 사방 10리에 미친다. 머리가 흐리터분하거나 깨질 듯이 두통이 있거나 몸이 찌뿌드드할 때 이 폭포 아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병도 사라진다.
사람들만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생겨나고 신선이 세상에 나타난 이후로 그들도 구곡폭포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는 어중이떠중이로 모여들었다. 그때 옥황상제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는 살지만 남녀 간에, 상하 간에 질서가 없었고 예의가 없었고 귀천의 구분이 없었다. 옥황상제는 그 혼란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여봐라. 소전을 부르거라.”
잠시 후 소전(小典)이 대령하자 옥황상제는 명을 내렸다.
“내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서로 간에 구분이 없고 예의가 없구나. 네가 가서 이를 바로잡도록 하여라.”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소전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자리를 잡고 산 곳이 곧 구곡폭포였다. 만물이 신의 힘을 받아 태동하는 2월의 어느 날, 소전이 구곡폭포의 한 갈래인 희수(姬水)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반나절 걷고 나니 세상이 확 트인 것처럼 가슴이 상쾌했다. 필시 좋은 일이 생길 거란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희수 상류에서 천 보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물줄기가 떨어지는 낙차가 있다. 낙차를 거친 강물은 유유히 쉼 없이 동으로 흐른다. 그리고 강북 언덕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이 있다. 이곳에서 여인네들은 길흉화복을 점치고 물고기를 잡아 아이를 무럭무럭 낳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낸다. 경건한 제사가 끝나면 푸른 강물에 퐁당 뛰어들어 목욕재계를 펼친다.
그날도 한 여인이 강물에서 자유자재로 헤엄을 치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소전은 그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참을 훔쳐보던 소전은 버드나무 아래에 감춰진 여인의 옷가지를 발견했다.
“오호, 하늘의 선물이로구나.”
소전은 여인의 옷을 품에 안고는 그녀가 멱을 다 감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덧 반나절이 흐르자 여인이 알몸으로 물에서 나왔다. 소전은 그녀를 보는 순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인간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처음으로 백옥 같은 미모의 여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소전이 쿵쿵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무언가 멋진 말을 하려 했으나 막상 입에서 나온 말은 촌스러운 질문이었다.
“여인이여. 그대는 이 근처에 사시나요?”
알몸으로 사내 앞에 선 여인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소전을 바라보고는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러하옵니다. 보아하니 낭군은 인간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군요. 혹시 신선이 아니신지요?”
여인의 예리한 눈썰미에 소전은 화들짝 놀라 마음속으로 ‘아, 범상치 않는 여인이로구나. 이 여인과 연을 맺는다면 필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게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리한 여인은 그 마음을 눈치 채고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녀는 일개 평범한 여자일 따름입니다. 낭군과 인연을 맺기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고도 많습니다.”
여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소전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그대는 아름답고 또 훌륭한 여인이오. 나의 아버지께서는 평범한 소녀나 아낙일지라도 한번 마주친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 말씀하셨소.”
“아! 그 아버님이 혹시 옥황상제님 아니신지요?”
소전은 또 한번 크게 놀랐다. 평범한 여자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지 않은가! 소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여인을 속이거나 숨기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과연 그대가 말한 바와 똑같소. 아버님께서 이 소자에게 인간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으라는 영을 내리셨소. 그러나 천기(天氣)만을 타고난 내가 지기(地氣)로 가득 찬 인간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리라는 진리를 깨달아가고 있소.”
여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그러하옵니다. 이 인간세상이 복잡다단하여 만만치 않거니와 옥녀라는 여인네가 천하를 한 손에 꽉 움켜쥐고 있어 더욱 어렵나이다.”
소전이 반색을 하며 무릎을 힘 있게 쳤다.
“맞소. 바로 그것이오. 그대의 혜안에 탄복하는 바요.”
“감사하옵니다. 그러하오나 혹시 무슨 묘책이라도 갖고 계시나이까?”
소전의 얼굴에 잠깐 근심이 스쳤으나 이내 심호흡을 하고는 계책을 설파했다.
“그대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떠올린 묘책이 있소. 그대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은 하늘의 뜻이오. 땅의 기를 가진 그대와 하늘의 기를 가진 내가 한몸이 되어 자식을 낳으면 틀림없이 이 세상을 호령할 큰 인물이 될 것이오.”

이제 여인과 소전이 어떻게 그 뜻을 이루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옥 한가운데에 청정의 호수가 있다. 그 호수 밑바닥에는 보물을 만드는 재료가 엄청나게 묻혀 있다. 그러나 음기로 차 있어서 양기가 합쳐지지 않으면 한낱 돌덩이에 불과하다. 양기와 결합해야만 천하제일의 보물을 만들어낸다. 사내는 보물을 만들고자 천기로 가득 찬 양물을 아주 부드럽게 천천히 백옥에 밀어넣었다. 잠시 부드럽게 진행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하면 하늘을 통째로 찢어낼 것 같은 힘을 쏟아 부었다. 천둥이 치고 땅이 갈라지는 분출의 그 순간에 사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가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폭발을 느꼈다.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랑의 합이 이루어졌으니 가히 느낌의 절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여인은 태몽을 꾸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곤륜산에 사는 여인네들의 태몽은 모두 비슷했다. 그녀들이 숭배하는 늑대, 호랑이, 곰, 뱀 등의 꿈을 꾼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유교씨(有蛟氏)의 태몽에는 난데없는 용이 나타났다. 전고에 없던 일이었다. 꿈속의 거대한 용은 땅을 평정하고 하늘을 향해 용트림을 하며 날아올랐다.

하늘을 찌르듯 기고만장하던 옥녀가 그해 늦가을부터 꿈자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매일 밤 무서운 용이 불청객으로 나타나 괴롭히는 것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그녀는 늘 머리가 지끈거렸고 무거웠다. 왜 용이 나타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마음과 몸은 더 피폐해졌다. 그러던 동짓날, 그녀는 밖을 내다보고는 시종들을 불러모았다.
“오늘은 겨울날치고는 무척 온화하구나.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으니 내가 구곡폭포를 찾아가 보겠노라.”
“네이~. 지금 즉시 행차 준비를 하겠습니다.”
옥녀는 울적한 마음을 털어내고 머리를 식히려 시종들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집을 나서 구곡폭포로 향했다. 거대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폭포수는 한겨울에도 결빙을 모른 채 시원하고 하얀 물줄기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그 장관의 모습을 보자 옥녀는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서서히 풀렸다. 그러나 가슴 저 깊은 곳에 맺힌 응어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폭포수 아래에서 이리저리 노닐며 마음을 진정시켰고 어느덧 별이 드는 밤이 되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옵니다.”
시종이 말하자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벌써 밤이 되었으니... 안타깝구나.”
그녀가 아쉬움을 남겨두고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폭포 아래로 내려올 때 문득 저 멀리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멈추거라. 저 소리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아니더냐?”
시종들은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하옵니다. 희수 상류 북쪽에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나는 소리 같사옵니다.”
“오, 이 이슥함 밤에 아기의 울음이라니! 심상치 않은 일이로구나. 이 징조가 길일까 흉일까?”
“제가 가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옥녀 옆에서 시중을 들던 파랑새가 날개를 펼쳐 포르르 동굴로 날아갔다. 파랑새는 동굴에서 벌어진 일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네 발 짐승들은 새끼를 낳을 때 대부분 가로로 눕는 자세를 취한다. 인간만이 똥을 싸듯 아기를 낳는다.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걸터앉아 아기를 낳는 것이다. 인류가 두 발로 걸어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팔이 자유로워지고 민첩해졌다. 앉은 자세로 아기를 생산하는 까닭은 어미가 아기가 빠져나오는 음부를 관찰하면서 필요할 때 두 손으로 아기를 잡아당겨 빼낼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음도가 활짝 열릴 때까지 밀려오는 통증은 견디기 어렵고, 앉은 자세의 두 다리가 받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여자가 아기를 생산하는 고통은 죽기보다 훨씬 더 힘들다.
동굴 속에서 유교씨가 움푹 파인 구덩이 위에 앉았다. 몸의 구멍이 열리는 통증이 하반신에 실려 숨 쉬기가 힘들고 들숨날숨이 고르지 못했다. 구덩이가 그녀를 빨아들이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지 몸이 천근 무게가 되어 그대로 주저앉고 싶다. 비린내로 가득 찬 암흑세상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새 생명은 이제 그 비린내를 벗고 밝은 세상을 보려 발버둥을 쳤다. 새 생명이 태동하여 움찔거릴 때면 주머니의 입구가 악어입이 되어 크게 벌어지고 그럴 때마다 통증이 더해졌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청색과 백색이 교차하고 온몸에 송골송골 땀이 흠뻑 돋았다. 주머니가 열릴 대로 열렸으나 새 생명이 뚫고 나오기엔 턱없이 좁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머니가 확 열리고 구역질나는 혼탁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새 생명이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의 빛 속으로 던져졌다.
아기는 세상의 빛을 보았다는 고고성을 터뜨린 후 어미젖을 파헤쳤다.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밤이었다. 북두칠성은 아기가 태어난 동굴 위에서 멈춘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수만 리 동쪽에 살고 있는 만천(曼倩: 동방삭)이 별의 움직임을 따라 동굴을 찾아왔다.
“아! 하늘의 별들이 드디어 문명을 개척하여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을 위대한 보물이 탄생했음을 알리는구려!”
소전이 동방삭에게 물었다.
“감사하옵지만 무슨 근거로 아기의 미래를 점치는가요?”
“이 아기는 천기를 듬뿍 받은 데다 용의 기운을 가득 지니고 태어났으며 탄생일 또한 길일이라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외다.”
“탄생일이 길일이라니요?”
동방삭이 땅바닥에 6개의 효(爻)를 그리며 들려주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위 5개의 효는 암컷이자 음이고 가장 밑에 쭉 뻗은 작대기는 수컷이며 양이지요. 음으로 가득 찬 동짓날에 양이 치고 올라오는 것인데 지배받던 수컷이 통치하던 암컷을 몰아내고, 광명이 암흑을 물리치고 밝은 세계가 도래할 것을 암시합니다.”
소전이 흥분하여 동방삭을 와락 끌어안았다.
후세 사람들은 땅 위의 꽃들이 만개하고 나비가 꽃을 찾는 시기인 삼짇날(음력 3월 3일)이 길이이라 하면서 용인(龍人)의 탄생일을 삼짇날이라 주장한다. 민간에서는 “2월 2일 용이 머리를 쳐들고/삼짇날에 헌원(黃帝)이 탄생했다네”라는 노래까지 지어 불렀다. 천모낭랑의 생일 또한 삼짇날로 전해진다. 아마 천하 위인의 탄생일을 삼짇날로 맞추는 흐름 때문에 헌원의 탄생일이 삼짇날로 전해왔을 것이다.

아이가 세 살이 되자 소전은 숲속에 놓아 키웠다. 먹을 것을 스스로 찾게 했으며 벌레에 물리거나 나뭇가지에 찢겨 상처를 입어도 개의치 않았다. 소전은 아이가 사내답게 거칠게 크기를 바랐으나 어미 유교씨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어미로서의 마음으로 아들을 돌보려 했으나 소전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다. 숲에서 산짐승을 만나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사냥을 했으며 아비가 도와주지 않고도 스스로 싸워 이기는 법을 터득했다. 여덟 살이 되면서부터는 홀로 곤륜산 구석구석을 누볐다.
아이가 열 살이 되자 평화롭던 곤륜산에 불길한 징조가 서서히 찾아왔다. 지난 10년 동안 옥녀의 꿈에서 용이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괴롭혀왔기에 참다못한 옥녀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파랑새를 불러 명을 내렸다.
“동굴에서 태어난 아이의 동태를 감시해 보고하거라.”
“즉시 시행하겠나이다.”
파랑새는 소년의 집으로 날아가 그날 이후부터 소년을 따라다니며 모든 행동을 감시했으며 저녁에는 옥녀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아이는 아주 영리하고 민첩해 장차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되리라 짐작되옵나이다. 또 천성이 두려움을 모릅니다.”
옥녀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흠. 그런 아이라면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구나.”
다음날 그녀는 시종과 부하들을 이끌고 구곡폭포를 찾았다. 구곡폭포는 격류가 어찌나 센지 거북, 악어조차 헤엄치기 힘들다. 그런데 옥녀가 폭포에 막 도착했을 때 소년이 바위 위에 올라 폭포 속으로 뛰어들려던 참이었다.
“통재라, 아이가 무모하구나. 어찌 일찍이 삶을 포기하고 자결하려 드는고?”
옥녀는 범상치 않을 인물이 될 아이가 폭포에서 뛰어내려 죽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혀를 쯧쯧 찰 때 소년은 폭포를 향해 뛰어들었다. 옥녀는 너무 놀랐지만 잠시 후 소년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는 유유자적하게 헤엄을 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옥녀는 또 한번 깜짝 놀랐다.
“보통 아이가 아닌 것은 분명하구나. 내가 저 아이를 보고 싶으니 데려오너라.”
시종이 쪼르르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옥녀 앞에 섰다. 옥녀는 아이의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정말 사람인지 아닌지 궁금해서였다.
“네가 그토록 능수능란하게 헤엄치는 데는 무슨 도가 있느냐?”
소년은 두 손으로 젖은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소인은 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물과 하나가 되어 들어가고 용솟음치는 파도와 함께 나오고 물의 길을 따를 뿐입니다. 내가 물속에 있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에 억지로 허우적거리지 않을 뿐이지요.”
“과연 그렇구나.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네가 하고 있으니 그 재주를 어떻게 터득했는지 궁금하구나. 더욱이 너는 어른도 아닌데.”
“비록 어른은 아니지만 소인에겐 고(故), 성(性), 명(命)이 있사옵니다.”
옥녀는 소년의 대답에 흥미를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고?”
“소인이 이렇게 거센 폭포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 이 환경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故요, 물에 익숙해져 물이라면 아무 두려움 없이 친근하게 느끼는 것이 性이요, 헤엄치는 방법을 모르면서도 헤엄치는 것이 命이옵니다.”
옥녀는 늠름하게 대답하는 소년의 기상에 감탄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내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가누나. 그렇다면 네가 타고난 것이 무엇이더냐?”
소년은 옥녀의 질문을 받자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굳이 더 말씀드리자면 소인은 용의 기운을 듬뿍 타고난 덕분에 물을 자유자재로 노닐 수 있으며 세상만사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옥녀의 귀가 솔깃해졌다.“네가 용의 기운이라 했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궁궐로 돌아온 옥녀는 가슴에 돌멩이가 들어찼다. 걷어내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줄곧 꿈에 나타나 괴롭히는 용이 그 소년의 현현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 소년이 지난 세월 동안 나의 마음을 짓눌러온 어둠인 것 같아.”
옥녀는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가 충신 아신(阿辛)을 불렀다. 아신은 요사하고 간사해 때로는 옥녀를 화나게 하지만 머리가 좋고 사태 파악에 능수능란한 신하였다. 또 눈치가 구단이라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래서 옥녀가 사내 생각이 날 때면 그를 불러 하룻밤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간사한 사내가 대부분 그러하듯 그의 양물은 함량미달이었다. 그럼에도 옥녀는 단지 배가 고플 때 잠깐 허기를 채우는 간식이라 생각하고 그를 침대로 끌어들이곤 했다. 옥녀가 아신의 양물을 떠올리며 빙긋 웃을 때 그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나. 내가 긴히 상의할 게 있어 불렀네. 호랑이와 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세지?”
“당연히 용이 더 세지요. 하온데 그건 왜 물으시나이까?”
“지금은 새끼 용이라 걱정할 것 없지만 장차 언젠가 덩치가 커지면 싸우려들겠지.”
“아닙니다. 용은 물에서 살고 호랑이는 땅에서 살기에 서로 싸울 일은 없다고 사료되옵나이다.”
그럼에도 옥녀는 여전히 이마의 주름을 펴지 못했다.
“그렇긴 하지만 용의 기운이 세상에 가득 차면 호랑이는 설 자리를 잃을까 걱정이라네.”
아신은 그제야 주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굳은 얼굴에 슬며시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요사스런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토록 걱정이 되오면 날개가 커지기 전에 미리 처치하는 것이....”
“방금 처치라 했느냐?”
“아직 싹일 때 잘라버려야 후환이 없습니다.”
옥녀는 그 말에 따라 개명수(開明獸)와 우돌(愚乭)을 호출했다. 개명수는 호랑이 몸에 머리가 9개 달린 괴수이고 우돌은 가장 인간답게 진화된 괴물이었다. 둘의 힘은 막상막하이자 하늘 아래 대적할 자가 없는 천하장사였다.
“너희들이 힘을 쓸 일이 있노라.”
“명령만 내려주시옵소서.”
“구곡폭포에 새끼 용이 나타나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구나.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거라.”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주인의 명을 받은 두 괴물은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희수 강가의 동굴을 찾아갔다. 때는 해시(밤 9~11시)여서 대자연은 달빛만 빛날 뿐 나돌아다니는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흐르는 강물 소리와 바람 소리뿐이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사방은 적막했다. 두 괴물이 발소리를 죽이며 슬금슬금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은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그런데 한 가지 유감이 있어요.”
두 괴물이 안으로 들어서자 동굴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행복에 겨운 넋두리였다.
“유감이라니? 그게 대체 무엇이요?”
사내의 부드러운 질문이 이어졌다.
“당신의 천기가 너무 센 것이 문제예요. 천기가 세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녀석이 도통 내 곁에 붙어 있지를 않아요. 늘 밖으로 나도니 친구가 되지 못해 섭섭해요. 계집애를 낳으면 말동무도 되고 좋겠는데... 딸이 없는 게 저는 서운해요.”
여인의 투정이 끝나자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난 또 무슨 걱정이라고.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원한다면 오늘밤에 계집애를 하나 만들어주겠소.”
두 괴물은 숨을 죽이고 남녀가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으며 새끼 용의 동정을 살폈다. 동굴 속의 횃불이 꺼지자 남녀의 대화는 멎었고 곧 여인의 요란한 교태소리와 신음소리가 온 동굴을 채웠다. 그 소리는 동굴 밖으로까지 퍼져나가 온 대지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곧 신음소리가 잦아들고 여인의 교태스런 투정이 들려왔다.
“아! 아~ 당신은 너무 세요. 언제나 이렇게 드세게 밀어붙이니 계집애가 안 생기는 거예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의 모습은 돌연 사라지고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여인의 몸 위에서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두 괴물은 너무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쩍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혹여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으나 분명 용 한 마리가 여인의 몸 위에 있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느닷없는 호통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누구냐?”
두 괴물은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새끼 용 한 마리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깊은 밤에 이곳에 웬일로 나타났느냐?”
괴물들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거대한 용의 꼬리가 목을 감았다. 새끼 용의 호통을 들은 아비 용이 교미를 멈추고 그 거대한 꼬리로 괴물들의 목을 바짝 감은 것이었다.
“캑캑!”
괴물들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처럼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용의 꼬리는 너무 크고 힘이 세서 괴물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이 발버둥을 쳤으나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거대한 용은 그 모습을 보면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은 처음이라 내가 용서하노라. 그러나 또다시 이런 무모한 짓거리를 저지르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처신하라.”

두 괴물의 보고를 접한 옥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껏 두 괴물이 싸워 진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생각했다. 옥녀가 어리둥절하면서도 분노가 치솟아 어찌할 줄 모를 때 약삭빠른 아신이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보아하니 새끼 용이 애비 용의 기운을 듬뿍 타고나 힘이 넘치고 또 뒤에서 큰 용이 보호신이 되어주어 그렇게 용맹할 것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냐?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방법을 말하거라.”
옥녀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호통에 겁을 집어먹은 아신은 움찔 뒤로 물러나며 두 괴물을 내보내라는 눈짓을 했다. 옥녀가 괴물들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하자 두 괴물은 행여 그 자리에 더 있다가는 된통 혼이라도 날까봐 후다닥 빠져나갔다. 아신은 목소리를 낮춰 옥녀의 귀에 소곤거렸다.
“저, 저, 이런 말씀... 드리기가...”
“도대체 뭘 망설이는 게냐. 어서 빨리 속시원히 말을 하거라!”
“우리가 이기지 못할 상대라면 역이용하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아신의 말이 끝나자 옥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이용이라?”
“네, 그것이 묘책 중의 묘책이라 사료되옵나이다.”
“그 묘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고?”
“두 괴물이 이기지 못하는 상대라면 그 힘이 천하장사일 것입니다. 그와 대적하지 않고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호! 그거 나쁘지 않은 방법이로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시간을 더 주시면 소신이 처리하겠습니다.”

소년은 훌쩍 자라 이제 열두 살이 되었다. 그해 겨울,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함박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눈은 내리고 또 내렸다. 눈은 어른들의 가슴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음에도 파랑새는 부지런히 마을로 날아가 소년의 동정을 살폈다.
“지금 산야에는 온통 눈이 쌓여 어른들도 돌아다니기 힘듭니다. 그러나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과 들을 자유자재로 쏘다닙니다. 실로 경이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그 모습을 봐야겠구나. 행차를 준비하거라.”
눈이 많이 내렸음에도 옥녀는 소년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나들이를 했다. 성대한 가전별초(駕前別抄: 왕이 행차할 때 앞장서는 군대)를 앞에 세우고 그녀는 눈길을 파헤치며 희수를 찾았다. 병사들이 허리까지 차오른 눈을 치우며 길을 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힘겹게 당도한 희수의 들판은 온통 하얀 눈이었다. 그 눈벌판 위에 종횡으로 움직이는 까만 점이 하나 보였다. 바로 소년이었다.
그 점은 빠르게 다가와 옥녀 앞에 멈추었다. 소년은 백마가 끄는 달구지 위에 앉아 옥녀를 태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옥녀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그녀의 눈길을 끈 것은 세상에 드문 백마도 아니고 귀여운 소년도 아니었다. 오로지 처음 보는 달구지에 눈길이 갔다. 박달나무로 만든 달구지는 어른 키의 두 배 높이였고 넓이도 아주 넓어 어른이 가로 세로로 누워도 충분했다. 그 한가운데에 소년이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이 달구지는 누가 발명한 것인고?”
“소년이 만든 것이옵니다.”
옥녀는 믿기지 않아 머리를 흔들었다.
“정녕 네가 만든 것인가?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소년이 입가에 슬며시 비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소년은 거짓이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옵나이다.”
옥녀는 소년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 달구지에 놀라움과 호기심, 부러움을 나타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들이를 할 때면 늘 말을 타고 다니지만 말 잔등에 부대껴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나마 날씨가 화창해 괜찮지만 한겨울에는 얼굴을 저미는 바람 때문에 고통이 심했다. 더구나 소년의 달구지는 바람을 막을 수 있으면서도 앞을 볼 수 있어 매우 편리해 보였다. 옥녀는 달구지의 바람막이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물었다.
“이런 바람막이를 만들 궁리를 어떻게 했더냐?”“동굴이 사람을 보호해주지 않습니까, 이 바람막이를 동굴로 생각하면 되옵니다.”
“참, 영리하고 기발한 아이로구나! 네 이름이 무엇인고?”
“소년은 이름이 없사옵니다.”
“너 같이 재주가 뛰어난 아이가 아직까지 이름이 없다니... 기이하도다.”
“아버지께서 제가 무언가 특출난 것을 발명해내면 그때 이름을 지어주겠다 하셨습니다.”
옥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너는 이미 특출난 것을 발명했느니라. 이 멋진 달구지를 발명했으니 네 이름을 헌원(軒轅)이라 하여라.”
소년은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무척 감사하옵니다. 하오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 여쭙고 대답을 올리겠사옵니다.”
옥녀는 소년이 너무 기특해 두 팔을 벌려 힘껏 껴안았다. 소년의 몸이 닿는 순간 부드러운 느낌에 뼛속까지 녹아들었다. 옥녀는 움찔 놀라 물었다.
“네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소년이 몸 아래를 가린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도리라 하옵니다.”
“도리라!”
옥녀가 수천수만 년 동안 천하를 통치해왔으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둥벌거숭이였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여인네들은 사내의 몸 한가운데 있는 양물과 자신들의 몸에 있는 동굴이 무척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양물과 동굴이 있음으로써 삶의 기쁨이 있었고 또 새끼를 낳을 수 있었다. 여인네들은 양물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소중한 만큼 사나운 자연으로부터 또 다른 여인들로부터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누군가 처음에 나뭇잎으로 양물을 가리자 너도나도 따라 했다. 또 누군가 호랑이 가죽으로 양물을 가리자 차차 따라하면서 모두가 양물과 동굴을 가리고 다녔다. 호랑이 가죽을 구할 수 없는 사람은 토끼나 늑대 가죽도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옷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이 몸에 걸친 도리라는 것은 아주 훌륭했다. 몸 전체를 가렸을 뿐만 아니라 모양도 멋있었다. 도리에 반한 옥녀는 옷을 만져보다가 물었다.
“너의 이 도리는 무엇으로 만든 것이냐?”
“제 도리는 무척 특별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높디높은 곤륜산 주위에는 약수(弱水)라는 강이 흐른다. 이 강은 가벼운 새털조차도 가라앉을 정도여서 그 누구도 쉽게 건널 수 없다. 약수의 바깥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염화산(炎火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염화산의 불길은 너무 강렬해 세상만물 무엇이든 닿기만 해도 타버린다. 신기하게도 이 모진 불길 속에 무게가 천 근이나 나가는 큰 쥐가 살고 있었다.
소년이 어느 날 이곳을 유람하다가 그 쥐를 보았다. 쥐를 보는 순간 옷감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쥐는 온몸이 붉고 명주실처럼 가늘고 긴 털이 나 있다. 그 쥐는 뜨거운 불 속에서는 잘 살지만 불 밖으로 나올 때 물을 뿌리면 곧 죽는다. 소년은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쥐를 잡자고 말했다. 아들의 말에 솔깃해진 아버지는 함께 염화산으로 와 쥐에게 물을 뿌려 잡았다.
두 사람이 쥐를 잡아오자 어머니가 밤새 정성 들여 아들의 옷을 만들었다.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옷을 입고 다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러워졌다. 하지만 옷감은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화완포(火浣布)였기에 물에 빨 수가 없었다. 소년은 새 옷을 만들리라 생각하고는 그 옷을 불길 속에 던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옷이 깨끗하게 빨아졌다.
소년의 이야기가 끝나자 옥녀는 소년이 입고 있는 도리가 욕심났다.
“나에게도 근사한 도리를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
소년은 담담하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옥녀 곁에 있던 개명수와 우돌 두 괴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 팔을 걷고는 소년을 당장 잡아먹을 태세를 취했다.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들먹 거리느냐?”
옥녀가 두 괴물을 향해 멈추라는 손짓을 한 뒤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너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노라. 천하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떠는데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담대한 것인고?”
“사람이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짐승이 사람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역시 사람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나를 해치지 않는데 굳이 두려워할 이유가 있사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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