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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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문화신분에 대한 생각
2009년 04월 05일 11시 04분  조회:6585  추천:52  작성자: 김관웅

☆연설문☆  

   여러분, 고대 그리스의 철인(哲人)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알라”는 말을 한적 있습니다.

  철인,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는 전제 혹은 첫 출발점은 바로 자기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모두 철인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고자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상대로 미래의 철인, 지혜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대부분은 가장 전형적인 이민문화의 속성을 갖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후세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의 강연의 키워드 혹은 중심사상은 디아스포라입니다.

  여러분, 그럼 먼저 오늘 강연의 키워드인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이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구약성서》 <신명기(申明記)>에 나오는 말로 고국 팔레스타인의 땅을 쫓겨난 유태인들의 민족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최근 20세기후반에 들어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경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부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입니다. 중국조선족 북방 시단의 원로시인 리삼월선생은 《접목》(1993)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접목의 아픔을 참고

먼 이웃

남의 뿌리에서

모지름을 쓰면서 자랐다

 


이곳 토질에 맞게

이곳 비에 맞춤하게

이곳 바람에 어울리게

 


잎을 돋치고

꽃을 피우고

이제는 접목한 자리에

든든한 테를 둘렀거니

 


큰바람도 두렵지 않고

한 마당 나무들과도 정이 들고

열매도 한 아름 안고…

 


그러나 허리를 잘려

옮겨오던 그날의 칼 소리

 


가끔 메아리로 되돌아오면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을 산 설고 물 설은 타향의 나무에 접목된 접수(椄穂)에 비유합니다. 이 어린 나뭇가지는 타향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해 튼튼하게 자라났고 다른 나무들과 어울려 숲을 이루었으나 “허리를 잘려 / 옮겨오던 그날의 칼 소리”만은 잊을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 조선족의 이민사와 생활사를, 우리민족의 정체성의 갈등을 뛰어난 은유와 상징기법으로 노래한 시라고 하겠다. 다만 우리를 중국조선족을 “남의 뿌리”에 접목한 접수(椄穂)하고 한 것은 어딘가 탐탁치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문화의 뿌리에다 남의 문화의 가지를 가져다 접목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 달포 전 (2006.7.27), 한국 텔레비죤 KBS 1방송에서《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를 눈물을 흘리면서 본적 있습니다.

  스물일곱 살의 한 중성인의 자아동일성(自我同一性)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면서 어지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저도 두 눈언저리가 축축하게 젖어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인(中性人)으로 태여나서 사춘기까지는 여자로 행세를 하였지만 그녀(그)의 《여자》 몸속에는 분명히 남성(男性)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그)는 여자 친구들로부터도, 남자 친구들로부터도 모두 요상한 괴물로 치부되고 왕따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피가 터지도록 물매를 맞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그녀(그)는 남자로 되고자 결심하며 그냥 일생을 치마를 두르고 여자로 살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가출을 단행합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성(性)의 정체성을 상실한 삶은 죽음보다 무섭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남자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그녀(그)의 하루 일과는 불룩한 여자의 가슴을 남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천으로 납작해지도록 감싸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자의 강건한 몸뚱이와 울룩불룩한 근육을 갖고자 그녀(그)는 땀을 철철 흘리면서 거중을 하는가 하면, 남자로 전환하는 성전환수술을 하려고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때로는 끼니도 거르면서 악착 같이 돈을 모으는 한편 간이 다 잘 못 되여 낭종(嚢腫)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남성호르몬주사를 맞아가면서 남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투(死闘)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성적자아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제도 될 수 없는 이다지 평범한 욕구의 실현이 그녀(그)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거는 일이였습니다.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였습니다.

  정상적인 고추나 보리를 갖고 태여나서 이 세상에서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깊이깊이 감사를 드려야함을 어제야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습니다.

  한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도 일부 사람들은 이처럼 피눈물 나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거는 모험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인간의 아이덴티티-자아동일성(自我同一性)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광장에서 젊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기를 알라”고 역설했듯이 “자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여 참새처럼 말을 쨀쨀 하기 시작하면 부모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바로 “난 어디서 왔어?”가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철없는 아이들에게 흔히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병원에서 사 왔다” 등의 무책임한 대답을 합니다. 한 고지식한 한 아이는 자기를 “공원다리 밑에서 주어왔다”고 하니 정말로 다리 밑의 더러운 구석구석을 샅샅이 돌아보면서 자기가 누워있었을 만한 곳을 “이곳일까? 저곳일까?” 머릿속으로 거듭거듭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자신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다가 적지 않은 아이들은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처럼 이른바 “성명위기(姓名危機)”에 직면하게 됩니다. 에릭슨은 원래는 독일인이였으며 에릭슨이라고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계부의 성을 따라 헤르버그(Herberger)라고 성을 고쳤답니다. 이 일을 거치면서 그는 자아인식에서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중에 그는 자기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의 공식적인 신분을 확정하게 됩니다. 즉 자기의 계부와의 동일성을 인정하게 되였던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린다면 “위대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며 그에 귀순하게 된 셈이지요. 이는 아동심리발전에서의 필연적인 경력이며 일종 권위에 대한 굴복인 것입니다.

  어디 독일의 에릭슨뿐이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우리대학의 모 교수님의 양자도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에릭슨과 비슷한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네아이들이 자기네 부모들이 뒤에서 쉬쉬하면서 뒷공론하는 말들을 알아듣고는 모 교수의 양자를 업둥이라고 놀려댔던 것입니다. 모 교수님의 양자는 자기의 생부생모가 누구이고 어디서 사는가를 캐묻게 되었습니다. 모 교수님 부부는 할 수 없이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모 교수의 양자가 이 말을 듣고 찾아간 곳은 전기도 안 들어간 두메산골이였고 그곳에서 살고있는 생부생모는 숱한 자식들을 거느려 째지게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거퍼 한 달도 채 안 되여 모교수의 양자는 자기가 외독자로 모 교수부부 슬하에서 얼마나 사랑을 받고 호강을 하면서 자라왔는가를 깨닫게 되여 연길에 다시 돌아와 모 교수부부에게 울면서 사과하고 다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가족성원의 구성이 복잡한 재혼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정도부동하게 이런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갖고 있을 겁니다. 특히 어머니를 따라 계부(継父)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성(姓)이 계부 그리고 계부의 자식들인 이모이부(異父異母)의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계부와 재혼한 뒤에 낳은 이부동모(異父同母)의 동생들과도 다른 데 대해 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되는 겁니다. 즉 가정 내에서의 성(姓)의 동일성을 잃음으로 하여 심각한 “성명위기(姓名危機)”에 빠지게 되는 법이지요. 이처럼 재혼가정에서 자라는 형제자매들은 동일성의 정도가 많고 적음에 따라 각 소 그룹들 간의 친소(親疎)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즉 부부가 재혼한 뒤에 낳은 동부동모(同父同母)의 형제자매 그룹은 이런 재혼가정에서 정체성의 통일을 가지게 가장 쉬우며 따라서 아버지가 전처와 살아서 낳은 자식들인 동부이모(同父異母)의 형님, 누나들보다는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님과 누나들에서 동일성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며 따라서 이들과 더 친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머니가 같은 것이 아버지가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를 뿌리 깊은 모권제의 유습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중요한 지위로부터 인기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인간은 이처럼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이나 가정(家庭)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만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밖에도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됩니다.

  쉐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오셀로》의 동명주인공의 그 무서운 질투는 그의 내심속의 극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리해하지 않고서는 그 생성 원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니스 원로원의 원로인 브라반쇼우는 백전백승의 명장인 흑인장군 오셀로의 용감성과 지혜로운 용병술에 대해서는 탄복하지만 자기의 딸 데스니모나가 흑인인 오셀로를 사모하여 동거까지 하는 것은 결사 반대합니다. 리간쟁이 이아고가 데스디모나와 오셀로장군 그리고 오셀로장군의 부관이며 미남인 캐시오 사이에서 리간을 붙이고 나중에 오셀로가 데스디모나의 목을 조여 죽이도록 종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흑인장군 오셀로의 깊은 마음속의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분명하게 보아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으로 증언하고 리론적으로 승화시키려고 한 첫 사람은 프란츠 파농(1925~1961)입니다. 파농은 북아프리카 알제리아인의 후예로서 중부 아메리카의 마르티니섬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국이였던 알제리를 지배했던 종주국-프랑스를 자기의 "조국"이라고 착각을 하고 프랑스가 독일 파쇼에 의해 강점당하자 비분을 못 이겨 친구들과 함께 의용군을 무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들어가 참전합니다. 그는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았지만 해방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승전경축파티에서 오히려 프랑스 녀인들의 질시와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프랑스 여인들은 포로가 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병정들과는 춤을 추지 못해 발광하지만 아무리 자기들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라도 "깜둥이"들과는 춤을 추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여기서 파농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자문하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1997년부터 프랑스 축구국가대표팀의 붙박이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면서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지단과 함께 프랑스에 우승의 월계관을 안겨주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역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서부 인디안출신의 축구명장 티에리 앙리도 "내 조국 프랑스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았습니까. 프랑스 축구국가대표팀의 주장 지네딘 지단이 2006년 7월 10일 이탈리아와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박치기를 한 이유도 그가 알제리아계 이민출신의 디아스포라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마르코 마테리치가 경기도중에 여러 번이나 지단을 보고 "비렬한 테러리스트", "네 어미, 녀동생은 매춘부"등 험악한 언사로 모욕했다는  것은 그가 알제리아계 이민출신이라는 점이 타겟(target)이 되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은 지단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어 박치기를 하게 했고 그로 인해 지단은 레드카드를 받고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면서 자신의 축구생애를 마무리했고 프랑스는 억울하게 이탈리아에게 무릎을 꿇고 말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백인종의 문화권속에서 살아가는 재구미 동포들은 오늘도 겪고 있습니다. 바나나처럼 속은 흰색으로 동화되었더라도 겉만은 여전히 노란색으로 남아 있는게 바로 재구미 동양인출신 디아스포라(Diaspora) 2세, 3세들입니다. 스톡홀름대학동양학연구소 소장인 조승복교수의 따님은 프랑스인인 어머니를 닮지 않고 동양인인 아버지를 꼭 빼어 닮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과년한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그렇게 기뻐한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구미문명권속에서 섞여 사는 우리 백의민족 디아스포라들의 고충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피부색이 노랗고 키가 작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전형적인 몽골인종의 얼굴을 가진 자기의 딸에게 오리지널 스웨덴 백인 남자친구가 생겼으니 어찌 부모로서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디아스포라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혼혈과 혼종과 인종적 아이덴티티 및 주체의 확립문제입니다. 서울말 “튀기” 그리고  연변사투리 “짜구배”가 환기시키듯이 혼혈인들은 “사이에 있는 것, 모호한 것, 합성된 것”이란 점에서 순혈주의에 기초한 배제의 정치학에 의해 인종적, 민족적 편견과 멸시를 받게 됩니다. 동시에 “나”이면서 “나”가 아니고, “너”이면서 “너”가 아닌 “튀기”의 이중성과 양가성은  인종적 아이덴티티 및 주체의 확립에 있어서 혼혈아들을 혼란에 빠트립니다. 몇 년 전, 스페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세서 태어난 “튀기”임을 고백하면서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며 눈물을 훔치던 여성 탤런트 이유진의 모습은 그런 푸닥거리의 힘이 얼마나 강고하며 뿌리 깊은가를 예증(龋証)하고도 남습니다. 이 비극적 코미디는 그녀가 경험하는 “굴욕”의 시작과 끝이 “국민 되기” 문제, 구체적으로 국민에서의 배제와 국민에로의 편입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선족 아버지와 한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의 한 은사님의 딸은 연변 밖의 외지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언제나 자기가 조선족임을 숨기고 우리말이 아닌 한어만 하면서 한족으로 행세하였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우리 문학을 가르치는 대단한 교수이고 조선족의 최고의 엘리트에 속했지만, 그 아버지가 속해있는 조선족공동체가 영위하고 있는 문화는 중국에서는 약세문화에 속하고 어머니가 속해있는 한족공동체가 영위하고 있는 문화는 중국에서 강세문화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속으로 자기 딸도 우리민족으로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민족에 대한 사랑을 운운하는가 하면서 은사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은사님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충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혼혈인들의 인생은 비극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가난과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미식축구계의 최우수선수로 우뚝 부상하여 한국인 어머니를 모시고 금년 4월에 금의환향한 자랑스러운 혼혈청년 하인즈 워드를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동양인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혼혈청년 하인즈 워드가 미국사회에서 이만한 인생의 성공을 이룩하는데 얼마만큼 피 나는 노력을 했겠는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체질인류학적으로 똑같은 몽골인종에 속하는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집단인 우리 중국조선족이나 재일동포들은 이런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겪지 않게 된다고 해도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한 세기 가까이 일본에 살아오면서도 일본국적을 얻지 못하고 나그네 신세로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은 해마다 한 번씩 날인-손도장을 찍어야만 일본에서의 체류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니 이런 민족적인 수모가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재일동포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본문화권에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 즉 국외자(局外者), 방외인(方外人)으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우리 중국의 조선족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재일동포들과는 달리 중국의 국적을 갖고 있기에 헌법상으로는 중국경내의 모든 민족들과 동등한 평등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주체가 살고 있는 연변은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 주류문화에 상대해 변두리적인 위치에 처해있으며 따라서 우리도 중국에서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10대 관계를 논함”이란 글에서 모택동이 지적한 것처럼 실질적인 불평등은 아직도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역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입니다. 설사 우리가 중국에서 “인사이더”, 즉 당국자(当局者), 방내인(方内人)으로 처신을 하더라도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개가 쥐를 잡으러 나서듯이 싱거울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도를 넘는 과분한 정치참여의식을 자조적으로 말할 때 “중국의 정치는 북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연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속에는 정치의 중심인 북경에서나 해야 할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정치의 변두리에 처해 있는 연변조선족들이 너무 설친다는 뜻이 숨겨져 있는 말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중국에서의 자기의 정치적 위상에 대해 착각을 하고 싱거운 짓을 한 적이 많습니다.

  우리는 거주국인 중국에서만 아니라 모국인 조선반도의 남과 북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입니다. 마찬가지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1989년, 저는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란 평양에 가서 반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연구학자로 체류한 적 있습니다. 비록 조상의 땅이고 아버지의 고향에 갔지만 그때 나의 신분은 중국학자였습니다. 조선 측에서도 나를 그렇게 대접해 주었습니다. 친척이나 친지를 만나보자고 해도 외국인에 대한 규정에 좇아 김일성종합대학 외사부에서 허락하고 배치해야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대접을 받아 평양에서는 고위급관원들이나 타고 다니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금강산도 다녀오고 친척방문도 다니고, 외국인 전용상점에 가서 쇼핑을 하거나 평양의 서민들은 엄두도 못내는 창광원의 수영장이나 사우나탕, 이발소에 가도 외국인 전용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도저히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 반년 동안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평양에서 생뚱 같이 외국인의 대접을 받아 호사를 하면서도 “나는 대관절 누구인가?”를 거듭거듭 묻게 되였습니다. 오히려 평양의 서민들처럼 초만원의 기차, 지하철, 버스나 공공목욕탕, 이발소 같은 공중교통이나 공중서비스시설에서 곡경을 치렀다면 아마도 이런 의문이 덜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광주 김씨의 원조(遠祖)는 신라의 천년사직을 세우고 지켜왔던 김알지 왕이고 족보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이 우리 광주김씨의 직계조상입니다. 경순왕이 천년 사직(社稷)을 통째로 신흥 왕조인 고려에 들어 바치고 그 다섯째 아들이 왕건으로부터 지금의 광주군에 지방관원으로 책봉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남한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근교의 광주군(広州郡)은 우리 광주 김씨의 발원지입니다. 하기에 서울은 말 그대로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고장이지요. 1945년 8.15광복 후, 평양에서 살던 나의 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삼촌은 1952년 겨울 강원도 양구 최전방에서 조선인민군과의 대치전(対峙戦)에서 전사하여 지금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19호 묘역에 누워 계십니다. 그래서 서울 역시 저에게는 아주 친근한 고장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저는 역시 외국인으로 치부됩니다.

  1993년 3.1절을 하루 앞둔 날,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공항안의 대기실에서 입국하는 줄에 서서 입국검사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날따라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좋이 반시간을 기다려서 려권을 검사원한테 들이밀었더니

  “외국인은 저쪽으로 가세요.”

라고 간단히 대답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 사람을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저도 모르게 입국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의 줄에 끼여 들었음을 깨닫게 되였지요.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외국인들의 줄에 선다는 자체가 김포공항에서는 본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동물적인 귀소본능이 이렇게 시켰어도 제가 찾아온 조상의 땅은 분명히 나를 외국인으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나는 멋 적게 벽안자염(碧眼紫髯)의 외국인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친 제일 뒤꼬리에 다시 뒤돌아가 서서 다시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나는 대관절 누구인가?”를 묻게 되였습니다.

  2004년, 저는 한국대전에 있는 배재대학에 객원교수로 나가게 되여 그쪽에 서류를 보낼 때, 제가 10여 년 전에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반년 동안 체류했던 경력을 솔직히 이력서에 써넣었더니 한국으로부터 사증발급인증서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저의 솔직함이 오히려 자신을 불편스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국 안기부 쪽에서 저의 신원을 다시 조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반 학기가 다 지나 가서야 한국에서 겨우 서류가 도착하여 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이런 고충은 아마도 저희들 같은 디아스포라들만이 겪게 되는 고충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저 같은 디아스포라들의 처지를 생각할 때 마다 박쥐 우화를 련상하군 합니다.

  조선에는 이런 박쥐 우화가 있습니다. 새들끼리 봉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를 마련했는데, 박쥐만이 불참했습니다. 봉황이 박쥐를 불러놓고 꾸짖자, 자기는 네발을 가진 길짐승이므로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기린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는데, 박쥐가 또 불참했습니다. 그래서 기린이 꾸짖으니, 자기는 날개가 있어서 길짐승과는 관계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후로 박쥐는 길짐승과 날짐승 모두에게 미움을 사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활동하게 되였다고 합니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박쥐처럼 길짐승과 날짐승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1930년대 초반 연변의 항일유격근거지들에서 발생했던 “민생단사건”에서 천명도 넘는 조선족혁명자들이 같은 항일대오 내의 동지들의 손에 무참하게 학살당했는데, 그 궁극적인 원인을 보면 역시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위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항일유격대의 유능한 지휘관이였던 박두남이 억울하게 “민생단”으로 몰려 “왜놈도 죽일 것이고 공산당도 죽일 것”이라고 고민하면서 추운 산속에서 두 달 이상이나 헤매다가 발이 동상을 입어 썩어 들어가게 되여 어쩔 수 없이 일제에게 투항한 것이나, 역시 “민생단”으로 몰려 혁명대오를 이탈했지만 왜놈에게는 차마 투항할 수 없어 1년 동안이나 잠복해 있다가 산속에서 방황하다가 어쩔 수 없이 왜놈에게 투항한 중국공산당 동만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의 비참한 인생경력을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고민과 마음속의 깊은 상처를 우리는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문화혁명 중 연변의 수많은 조선족들에게 “반국폭란(叛国暴乱)”이라는 감투를 억지로 뒤집어씌우고 무력으로 탄압한 이른바 1967년의 “8.2, 8.4사건”과 그 후의 연변 각지에서 만연된 “조선특무색출사건”(연변지역에서만 해도 조선족들 속에서 천명을 훨씬 웃도는 이른바 “조선특무”들이 색출되였음) 역시 그 궁극적인원인은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위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날짐승과 길짐승의 요소를 두루 겸비하고 박쥐는 림기응변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박쥐와 족제비”라는 이솝우화에서 박쥐는 새를 미워하는 족제비에 붙잡혔을 때는 자기는 새가 아닌 쥐라고 말해서 목숨을 구하고 쥐를 미워하는 족제비한테 붙잡혔을 때 자기는 쥐가 아니라 새라고 해서 목숨을 구합니다. 이처럼 박쥐는 포유류이면서 날아다니기 때문에 설화문학에서는 길짐승과 날짐승 사이에서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하는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띤 동물로 등장합니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띤 중국조선족의 특성은 중국조선족출신의 신 친일파 김문학 같은 인간들에게서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되였습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구성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량난의 난감한 처지에 빠지거나 안팎으로부터, 량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거나 박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신앙과 기회주의가 뒤섞이고 방황과 추구가 부단히 교체되는 겁니다.

  아무튼 박쥐같은 처지와 처신술은 중국조선족 만이 아닌 모국 밖의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우리 백의민족 디아스포라들의 숙명인지도 모르며 또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많은 비극이 빚어지는 지도 모릅니다.

  객관에서 우리들을 보는 시각이 복잡하고 미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마음 역시 복잡하고 미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는 아주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중국의 한족이나 기타민족의 문화를 “타자화(他者化)”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중국 국가대표팀과 조선이나 한국국가대표팀이 맞붙어 축구경기를 펼치게 되는 경우에 나는 에누리 없이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조선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군 합니다. 축구에 한해서만 내 마음속에서 중국국민으로서의 국민의식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백의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축구는 정치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필경 저는 중국에서 태여나서 중국에서 자라면서 교육을 받고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기에 내 마음속의 중국콤플렉스는 대단하다. 내 마음속의 이런 “중국 콤플렉스”는 조선,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유감없이 표현됩니다. 즉 중국의 국문만 벗어나오면 저는 엄연한 중국 조선족이 되여 중국의 립장에서 서서 다른 문화를 타자화(他者化) 합니다. 심지어 조선반도의 남과 북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문화에 대한 부정이나 폄하는 더욱 저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저는 진심으로 내가 살아가는 나라 중국의 번영창성을 바라고 중국이 세계 민족과 국가의 수림 속에서 우뚝 선 한 그루의 거목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는 량가감정(兩家感情)을 가지고 모국과 중국을 경우에 따라서 부동하게 타자화(他者化) 하기도 하고 지극히 사랑하기도 합니다. 저는 마치도 남성과 녀성을 공유한 중성인(中性人)처럼 모국과 중국에 대한 진한 애정(愛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친일파 김문학이 연변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조선족들을 갈대나 박쥐같은 속성을 지녔다고 지적한 것은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다만 김문학이네 형제들처럼 조상의 나라 모국도, 태여 나서 자란 중국도 모두 타자화(他者化) 하면서 일본극우세력에 편승하여 일제가 만들어낸 황국사관의 잣대로 이 량자의 문화를 재고 나아가서는 이 량자의 얼굴에 모두 똥칠을 하는 매국배족의 짓거리는 설사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해도 우리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문학처럼 자신은 그 어떤 민족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은 국제인이라고 표방하고 자기는 민족문화의 뿌리와는 완전히 단절된 존재라고 표명하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새로운 거주국 일본의 주류문화에 편승하여 일본극우세력의 대변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때로는 양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고 의심을 받고 또 그래서 곤혹스럽고 방황은 하더러도 언제나 이러한 양가감정을 지니고 내가 태어나서 자라났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며 앞으로 내 뼈가 묻힐 것이고 또 저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살아 갈 중국 땅과 내 고향 연변 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모범적인 중국 국민으로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울러 우리민족의 문화를 사랑하고 지키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무궁화 삼천리의 나라에 대해서도 다함없는 사랑과 향수를 안고 진지한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을 간직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입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기처럼 만연되어 있는 강세문화인  중국의 주류문화와 약세문화인 우리민족문화 중에서 저만이 아니라 저의 딸까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저의 작은 딸은 이 번 학기부터 북경민족대학교에서 한국 언어학 석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선택하라고 권고했고 본인도 이 제의를 달갑게 받아들였습니다. 중국에 살면서 한국언어학을 전공해서 뭘 하는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작은 딸은 절대 이 선택을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가 정년이 되어 대학교단에서 물러나더라도  저의 딸이 중국 대학의 교단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교수로 성장하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자승부업(子承父業)이라는 성구가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업을 계승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하다가 채 못 하면 저의 딸이 이어서 중국에서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지키면서 살아갈 겁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한국 마광수 교수의 《어느 외로운 날》이라는 시 한수가 떠오릅니다.

 


아, 

꽃들은 

얼마나 

좋을까 

 


자기 몸

안에 

암술과 

수술을 

함께 

갖고 

있으니 

 


  저는 절대 한국의 하리수 같은 이들처럼 남성(男性)이나 녀성(女性) 한 쪽만을 살리기 위해 어느 쪽은 거세해버리는 그런 잔혹한 성전환수술 같은 량자택일(両者択一)의 의식전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달갑게 의식(意識)과 감정(感情)의 중성인(中性人)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마치도 한 그루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는 자웅동주(雌雄同株)의 꽃나무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는 중국 땅에서 살아가는 중국 공민이면서 또한 백의민족의 후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중적인 문화신분을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 날로 세계화가 되여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자신의 강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단적인 사례는 미국의 신임대통령 버락 ․ 오바마입니다. 그의 몸에는 흑인의 피와 흑인의 피가 섞여서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는 두 가지 이상의 문화와 그런 문화을 갖고 있는 부동한 인간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리해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누구보다도 강인한 의지력과 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바마는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로서의 강세를 갖가지고 수억 미국인민들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바마의 승리는 어쩌면 디아스포라들의 승리이고, 세계의 방방곡곡의 디아스포라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겨주는 확기적인 사건이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힘 내세오!

  빨래줄 같은 긴 연설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년 2월 22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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