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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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수인물 점수 매기기
2007년 11월 26일 21시 59분  조회:5992  추천:108  작성자: 김관웅

령수인물 점수 매기기

김관웅


  지난 11월 13일, 서울에서 경희대학 경영학과 겸임교수로 있는 이승래교수의 안내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리승만박사의 저택 리화장(梨花莊)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화장은 리승만 대통령이 1945년 10월에 미국에서 환국(還國)한 후 서울의 한 독지가가 마련해준 저택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리승만 대통령은  줄곧 리화장에서 살았고,  1960년 4.19이후 하야한 후에도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다가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1970년으로부터 리승만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녀사가 양아들, 양며느리와 줄곧 이 곳에서 살다가 타계했다고 한다.

  그날 우리를 맞아준 이는 다름 아닌 22년 동안이나 리승만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녀사를 리화장에서 모시면서 살아왔다는 리승만 대통령의 자부(子婦) 조혜자 녀사였다.

  조혜자 녀사는 칠십을 넘기신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젊어서 이화녀대 불문과를 졸업했고 한때는 신문사의 재외기자로 활약했었고, 유엔 사회고문관으로 임직한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지식녀성이였다.

  1988년 이래 리화장을 개방하였다고는 하나 우리가 찾아간 그날 리화장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하였다. 리승만 대통령은 지금 전람관마저 갖고있지 못하고 그의 일생의 파란만장한 경력은 리화장안에 간소하게 전시되여 있었다. 나는 리화장을 둘러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만리장성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으나 그 만리장성을 쌓게 했던 지고무상한 권력을 가졌던 진시황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조혜자 녀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전시장과 리화장 내부의 처처소소를 자세히 돌아보고 나서 리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이였다는 아늑한 방안에서 우리 일행은 조혜자와 녀사와 마주앉았다.

  조혜자녀사의 동기를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리승만 대통령이 권좌에 앉아있을 때에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니라 리승만 대통령이 권자에서 물러난 후에 인연을 맺고 남편과 함께 리승만 대통령 부부를 오래 동안 모셔온 분이였다. 조혜자 녀사의 말속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한 한국사회의 홀대(忽待)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948년 5월부터 1960년 4월까지 만 12년 동안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다음 5년 2개월간의 하와이 망명생활로 생을 마감한 이승만에 대해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 “독재자”란 딱지가 붙어 다녔고 “부정선거”와 “친일파의 비호자”란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새로운 언어로 평하되여 왔다. “친미주의자” 혹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 “미군정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권력욕의 화신”으로, “분단을 획책한 주범”에서 “김구암살의 배후 조종자” 등으로 한국사회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적대적이였다.

  그러나 그가 73살의 고령에 대통령의 보좌에 오르기까지 적어도 거의 반세가 가까이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제국의와 용감하게 싸워온 항일지사임을 부정할 사람은 또 크게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를 재건한 초대 대통령인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장장 반세기에 달하는 항일지사의 경력과 만년의 실정, 리승만은 분명히 공(功)과 과(過)를 다 갖고 있는 령수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개관론정(盖棺論定)이라고 하지만 1965년 리승만 대통령이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후로 이미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리승만에 대한 공정한 점수매기기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리화장을 떠나면서 나는 차안에서 이런 생각을 굴렸다.

  령수인물들을 10점제로 점수를 매긴다면 워싱톤 같은 정치령수는 권좌에 연연하지 않고 격류용퇴(激流勇退)를 했기에 공(功)만 살아있고 과(過)는 별로 없으니 정치령수로서는 최우수생이라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한 불후의 공을 세웠지만 문화혁명 등 만년의 실정(失政)으로 만점 10점은 맞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적잖은 사람들은 모택동은 공(功) 7, 과(過) 3라고 점수를 매기고 있다. 중국어로는 “삼칠개(三七開)”라고 한다. 100점제로 한다면 70점이라는 말이다.

  공(功)과 과(過)가 각각 반이라면 정치수령으로서는 낙제생이다. 공(功) 6, 과(過) 4라면 급제생이다. 리승만의 공(功)과 과(過)중에서 공(功)은 얼마를 차지하고 과(過)는 얼마를 차지할까? 그러면 리승만은 몇 점을 맞을 수 있을까? 급제생일까? 락제생일까?

  나 같은 방외인이 언감생심 리승만 같은 령수인물에게 점수를 매길 수 없지만, 또 매겼다고 해서 어느 누가 수긍할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앞으로는 누군가가 나서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점수를 매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 11월 18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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