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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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자화상
2006년 02월 06일 00시 00분  조회:3997  추천:60  작성자: 김관웅
♧수필♧
나의 자화상

김 관 웅


요즘 나의 관심사는 리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다. 의사도 아닌 내가 사상의학(四象醫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이것으로 내고 잘 알고 있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개성이나 성격을 분석해보면 십중팔구는 맞아 떨어지니 말이다.

남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비추어 보아도 너무 맞아 떨어진다. 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 분류한 체질이나 성질의 네 류형-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중에서 나의 성격이나 기질은 소양인(少陽人)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시 적부터 성미가 불같이 급했다. 그래서 걸을 때보다는 달음박질을 할 때가 더 많았고 설사 걷는다고 해도 언제나 앞으로 엎어질 듯 걸음걸이가 빨랐다. 그래서 내가 소학교 다니던 시절에 우리 옆집에 살았던, 나보다 네댓살 나이를 더 먹은 허은석이라는 형은 나를 《무대랑(武大郞)》이라고 불렀다. 우리 동네의 골목대장이 내 별명을 이렇게 짓자 내 또래들은 다들 나를 《무대랑》이라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게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내가 무대랑처럼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수호전》 련환화(連環畵) 책에 나오는 무대랑이 자기의 색시 반금련과 서문경이 왕로파의 집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우아(牛兒)가 귀띔하자 천방지축 달려가는 모습이 똑 마치 앞으로 꼬꾸라질 것 같이 그려졌기 때문이였다.

개꼬리 삼년 묵어 황모 못 된다고 어른이 되여서도 이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학교 캠퍼스 안에서 별로 급한 일이 없는데도 언제나 앞만 보고 달음박질하다시피 총총이 걸어 다니는 통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사람에게도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나를 건방지다고 보거나 경망스럽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집사람마저도 나의 걸음걸이를 두고 늘 기분 나쁜 평가를 해오군 한다. 왜 걸어도 좀 점잖게, 품위 있게 걷지를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이것도 천성이여서 마음을 지어 먹는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닌데야.

어린시절 나는 길을 걸을 때도 성미가 급해서 앞만 바라보고 아래를 살피지 않았기에 때문에 신발이나 바짓가랑이에 언제나 흙을 많이 묻히고 다녔다. 비가 온 뒤 길이 질척거리는 날이면 더욱 가관이였다. 집에 들어오면 나는 언제나 어머니로부터 지청구를 제일 많이 들었다.

《이 갱충맞은 놈을 어쩌나, 쩟쩟》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내 이름을 부를 때보다는 다들 어머니의 표현을 본받아《갱충맞은 놈》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사전의 해석을 볼 것 같으면《갱충맞다》는 말은 대략 《조심성이 없고 아둔하다》는 뜻이였다. 《갱충맞은》나의 천성은 변을 볼 때도 유감없이 표현되였다. 성미가 급하다 보니 미리미리 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금 변이 나오려고 해야 뒷간으로 달음박질쳐 가다 보니 사전에 밑구멍을 씻을 수지 같은 것을 마련하지 못할 때가 십중팔구였다. 그래서 내 팬티는 언제나 샛노란 똥 꼬치들이 찍혀 있어 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또 늘 나를 《똥 누고 밑구멍 안 씻는 놈》이라고 놀려주기도 했다. 어디 이뿐이랴. 나는 소시적에 싯누런 콧물을 유난히도 많이 흘렸다.

《그··그 코물 닦아라, 발등 깨겠다!》

동네 아줌마들도 보기가 난처하여 늘 나를 보면 얼굴을 찡그리시군 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말은 듣기 싫어서 제 딴에는 코물 건사를 하느라고 훌쩍 들이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한 손으로 힝 풀어서는 우리 집 울타리 나무판자에 짓 발라 버리곤 하여 거기엔 내 코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나는 성미가 급하고 침착하지 못하여 어릴 때부터 장기, 트럼프 같은 놀이에는 소질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승벽은 강해서 늘 형이나 동생과 맞붙기는 했지만 언제나 졌다. 한번은 큰 형이 재판을 서는 가운데 동생 호웅이와 장기를 두다가 두 판 련속 지고는 다시 한판 붙이자고 야료를 부렸지만 호웅이는 삼판량승이니 승부가 갈렸다고 더는 놀아주려고 하지 않자 호웅이의 멱살을 거머쥐고 싸움판을 벌리기도 한 적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쓰고 까근하게 따져 가면서 놀아야 하는 장기나 트럼프 같은 오락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 내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무슨 일이나 빨리하고 빨리 끝내기 때문에 일이 거칠고 허점과 실수가 많았다. 일을 하다가도 이내 싫증을 느끼고 무슨 일에서나 용두사미 격으로 마무리를 잘 짓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철부지 아이시절의 이런 천성은 소년시절에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초중시절 동창생들과의 집체사진 한 장이 거칠고 실수 많았던 나의 천성을 형상적으로 증언해주고 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워서 목깃이 들쑥날쑥한 웃옷을 입고 찍은 이 사진을 보면서 나도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많다.

어른이 되여서도 이런 근성은 도무지 고쳐 지지를 않았다. 나는 일을 만드는 데는 능하고 개척하는 데는 일정한 추진력이 있지만 조직을 하거나 마무리 짓는 데는 흐지부지할 때가 많았다. 90년대 중반에 나는 연변대학과 사회의 소장학자들을 휘동하여 연변조선족문화연구회를 조직하여 연변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의 전반문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민간연구단체를 조직하였지만 약 2년 동안 운영하다가는 뒤를 꼬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2003년에는 첫 연변조선족사이버문학가협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맡고 연변의 첫 문학사이트를 개설하고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의 사이버문학의 형성에 초석을 다져 놓기는 했지만 역시 뒤를 꼬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물로 여기에는 객관적 원인도 크게 작용하기는 했으나 뒤를 꼬지 못하는 내 천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달포
전 몇몇 은사님들과 문단의 선배님들이 같이 또 비평가단체를 결성하자고 하면서 나를 회장으로 추대할 때도 나는 나의 이런 룡두사미의 뒤를 잘 꼬지 못하는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거듭 사양했다.

나는 정서의 기복이 심하고 마음속의 생각을 감출 줄 모르고 몽땅 얼굴에 드러낸다. 그래서 솔직담백하여 마음에 있는 것은 모두 털어놓으며 나쁘면 나쁘다, 좋으면 좋다고 즉석에서 태도를 표시하군 한다. 이것 역시 태여나서부터의 천성인 것 같다. 일곱 살 때인가, 누나가 나를 데리고 《인민영화관》에 가서 《닭털 꽂은 편지》라는 영화를 보다가 일본군대가 해와라는 목동이 몰고 가던 양들을 몽땅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는 《왜 남의 양을 잡아 가는가?》고 엉엉 울음보를 터뜨려 누나가 남우새스러워 나를 잡아끌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누나가 그 후 이 일로 두고두고 지청구를 해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곱 살 배기였던 내가 늘 목을 끌어안고 같이 잠을 자기까지 했던 우리 집 흰둥이 개를 개장수들이 끌어갈 때 결사적으로 대들다가 안 되니 땅바닥에 뒹굴어대면서 행악질을 해 일대 소란을 벌렸던 일도 우리 집에서 나의 괴벽한 성격을 거론할 때 늘 거들곤 하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평소에 나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또 달변이지만, 일단 정서가 흥분상태에 들어가면 논리적이지 못하며 격동될 때에는 더욱 조리가 없다. 심한 말더듬이가 되여 버린다. 그래서 때로는 옳은 시비를 가지고도 대방을 반박하거나 설득시키지 못한다. 한번은 문단에서 큰 시비로 큰 변론이 생겼는데 나는 너무 빨리 흥분되여 자기가 할말도 침착하고 조리 있게 천명하지 못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았던 우리문단의 녀류번역가 김련란 씨는 늘 나만 보면 놀려 준다.

《말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흥분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호호호》

김련란 씨는 녀성의 특유한 섬세한 관찰력으로 나의 화상(畵像)을 그리면서《김관웅 박사 또한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는 성미라서 사람 좋고, 지식 많고, 생김새 또한 단상에 오를만도 하건만 그다지 중요시되지 못하고 한직으로만 떠도는 같다》고 내 천성의 정곡을 찌르기도 했다. 벼슬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언녕 알고 벼슬에 대해 체념한지 오래기에 무슨 한직(閒職)이고 요직(要職)이고는 별로 개의치는 않으나, 나는 확실히 김련란씨의 말마따나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 내여》 최근 몇 년 동안만 해도 다섯 번이나 필화(筆禍)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십에 첫 보선이라고 어쩌다가 생긴 원장 벼슬자리도 《강물은 막아도 백성의 입은 막지 못한다》(2003년 3월 20일 《연변일보》에 발표되였음.)는 손바닥만한 칼럼 한편 때문에 천신하지 못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입덕》을 많이 입은 셈이다.

이 역시 성미가 너무 급하여 참을 인(忍)자의 진수(眞髓)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야마는 성격을 가졌다. 설사 상대가 부모이든, 선생이든, 어른이든, 친구이든, 리해관계가 얽혀 있는 요긴한 인물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사전에는 《거짓》이나 《아첨》같은 단어는 없다. 그래서 나는 조화보다는 쟁투가 더 많은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 쟁투가 번번이 나의 옳음과 대방의 그름으로 인해 벌어진 것만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옳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자부하면서 제 잘난 멋에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잘잘못을 떠나서 쟁투는 언제나 적을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와 같
은 나의 저돌적인 천성으로 인해 나에게는 친구도 많지만 적도 친구만큼 많다. 한마디로 나는 애증이 분명하다.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물 타기를 하거나 줄타기를 하거나 중용적 립장을 취하지 않는다. 미우면 밉고 고우면 곱다. 에누리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객관의 평가도 아주 량극적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웅이는 겉보기에는 터프해도 사귀여 보면 다정다감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와 함께 《잘난 체 하는 놈》이요,《뜨개소》요,《괴짜》요 하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나는 스스로 내가 남을 헐뜯고, 암해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런 악바리나 독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과를 해오거나 혹은 병고나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는 즉시 용서를 해주고 증오심은 삽시에 동정심으로 바뀐다. 나는 나를 《반역자 유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XXX가 림종에 가까웠을 때는 여러 번이나 그분의 병실에 가서 간호를 하면서 전신 목욕을 시키고 머리부터 발까지 더운 물로 깨끗이 닦아 주군 했다.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일부러 꾸며서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동정과 련민의 마음이 일어서 그리했던 것이다.

몇 년 전 나와 한 학과에서 근무하는 전학석 교수는 이상 분답게 나를 보고 이렇게 충언(忠言)을 해준 적 있다.

《관웅인 사람은 좋은데 말이야, 때로는 오버를 해. 그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

전학석 교수의 이 말에 나는 진심으로 승복을 했다.

나는 자신이 결함투성이, 허점투성이다 보니 어느 모로 보나 결함이 없는 완벽한 성격을 가진 전학석 교수를 진심으로 탄복하여왔다. 전학석 교수는 우리 연변대학의 전형적인 젠틀맨이다. 단 한 점의 허점도 없이, 단 한마디의 실언도 없이,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의 륙십 평생을 살아왔다. 옷차림새도 언제보도 깔끔하고 걸음걸이마저도 품위가 있고 점잖았다. 전학석 교수는 대체적으로 태음인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늘 전학석 교수를 나의 귀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이 분처럼 완벽한 남자로 돼보자고 한 동안은 결심을 내리고 자기를 다잡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죄다 허사였다. 범을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동시효빈(東施效嬪), 추녀 동시(東施)가 미녀 서시(西施)의 얼굴 찡그리는 모양을 흉내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꼬리를 사타구니에 끼우고 점잖게 군자처럼 처신해 보려고 하지만 리성이 조금만 왼 눈을 팔아도 내 천성의 개꼬리는 다시 빳빳이 쳐들군 한다. 아마도 내 천성의 관성(慣性)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리라.

리제마는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이라는 이 네 류형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태양인은 절대로 태음인으로 바뀔 수 없고, 소양인은 영원히 소음인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소양인이 태음인으로는 더욱 바뀔 수 는 더욱 없다는 것이다. 서쪽에 해가 뜬다고 해도 곰 같이 미욱하고 저돌적인 천성을 가진 내가 전학석 교수 같은 젠틀맨으로 변할 수는 없다는 론리다. 한마디로 천성은 하늘이 낸 것이니 변할 수 없다는 론리다. 아마도 나는 좋으나 궂으나 어쩔 수 없이 리제마의 말처럼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하늘이 낸, 결함투성이인 이 소양인의 천성을 가지고 갈 것 같다.

사람은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갖고 나오는 천성이 있다. 성별이나 체격이나 체질은 두말할 것 없고 성격이나 기질도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정해진 천성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후천적인 수련이나 수양에 의해 더러 개변되기도 하겠지만 그 기본적인 골격은 크게 개변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江山易改, 本性難移)》라는 고훈(古訓)은 바로 이런 인간의 천성을 념두에 둔 말이 아닌가한다.

다만 전학석 교수의 말처럼 가급적이면 나의 소양인의 천성으로 인해 거듭 생겨나는 너무 큰 《오버》는 피할 수 있도록 시시각각 자신을 경계하고 가다듬고 수련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한다고 하여 하늘이 낸 내 천성은 고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설사 내 천성을 고치려고 하거나 컨트롤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균의 말처럼 나는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낸 본성은 감히 어길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자신에 대해 생각 할 때면 윤동주 님의 《자화상》을 떠올리군 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
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2006년 1월 16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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