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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대학교입시제도회복 30주년을 기념하여
김호웅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대학생활에 있어서는 새로운 친구와 스승들과 만나게 되고 새로운 책과 학문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자신을 부단히 충전하고 새로운 봉우리를 향해 도전을 하는 자만이 삶의 보람을 맛볼 수 있다.
대학교와의 만남
사실 나는 대학과는 인연이 없는 줄로 알았다. 중학교 1학년 때에《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 3년간 홍위병들의 싸움구경이나 하며 실컷 놀다가 소위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가 3년 간 농사를 지었다. 군에 입대했다가 출판사에 용케 취직을 해서 견습편집으로 고참 편집들의 다룬 원고를 베껴 쓰기를 3년, 바로 이 무렵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출판사에는 우리 또래들이 일여덟 명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대학졸업생이 귀한 시절이라 거개가 농촌에서 5-6년씩 일하다가 추천을 받아 왔거나 군복무를 마치고 운수가 좋게 입사한 젊은이들이었다. 설령 4년 후 대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출판사 같은 좋은 직장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그들은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엎어놓은 못 그릇 같은 고참편집들의 원고를 베껴 쓰는 일에 그만 신물이 났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가 없는 세월이라 원고지에 철필로 잉크를 찍어 부지런히 베껴 써야만 했다. 소학교 생도도 아니건만 하루 여덟 시간 또박또박 원고만 베껴야 했으니 재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고참편집들이 수정한 원고를 베끼는 작업을 하노라니 차차 문자에 눈을 뜨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름 석 자를 박은 책임편집으로 되는 길은 묘연하기만 했다.
대학교는 나에게 분명 새로운 세계를 약속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학교도 완전히 졸업하지 못한 주제에 그냥 허울 좋은 출판사 편집으로 눌러앉아있다는 자체가 낯 뜨거운 일이였다. 나는 아예 잠자리를 출판사에 옮겼다. 퇴근 후면 출판사는 나 혼자만의 천하가 되었다. 걸상들을 맞추어놓으면 훌륭한 잠자리가 되었다. 특히 출판사 자료실에는 안성맞춤으로 중학교와 고급중학교 교과서들이 서가에 꽂혀져 있었고 소가죽만한 대형 중국지도와 세계지도도 있었다.
약 반년 간 죽기내기로 공부했다. 하지만 첫해는 낙방거자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다시 몇 달 간 불철주야 공부를 했다. 수학은 내 기초가 너무 낮아 유리수의 가감법 하나를 풀고 고작 5점을 맞았는데, 그 대신《조선어문》,《한어》,《역사》 성적이 좋았고《지리》는 87점으로 연변에서 최고의 성적을 따낼 수 있었다. 밤마다 마치 전성사령관이나 된 것처럼 자료실의 괘도(掛圖)를 빌려다 편집실에 걸어놓고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었다.
나는 총점 319점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했다. 한편 우리 집에는 셋째 관웅이, 다섯째 철웅이, 여섯째 영웅이까지 네 형제가 한꺼번에 대학에 입학해 대경사가 생겼다. 대학입학통지서 4통이 하루아침에 날아들 때 부모님은 “다 등소평 어른의 덕택이야!” 하며 무등 기뻐했다.
친구들과의 만남
대학에 입학한 게 25살 때다. 지금 25살이면 대학 본과가 아니라 대학원과정을 졸업할 나이다. 하지만 내 나이는 학급에서 열 서너 번째밖에 아니 되었다. 《문화대혁명》으로 10년을 묵은 친구들이, 나이도 신분도 다른 친구들이 한 학급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60명 정원에 여학생은 10명밖에 되지 않는지라 아쉽게도 남녀비례는 실조(失調)인데, 아직 면도칼 신세를 져보지 못한 코밑이 감실감실한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침마다 온 얼굴에 시허연 비누거품을 일구고 벅벅 면도질을 하는 아기아빠들도 있었다. 술 냄새만 나도 가재걸음을 치는 풋병아리 같은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술고래들도 있었다.
학급의 좌상은 마흔 고개를 바라보는 태휘(太輝) 형인데, 시골집에 아내와 철없는 아들 둘을 두고 온지라 워낙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아 우리 같은 총각학생들과 어울려 밤낮 술타령을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왕 맛들인 술을 끊을 수가 없어 술병을 이불 밑에 감추어두고 숙소가 비면 한 모금씩 도둑 술을 마셨다. 이렇게 단작스럽게 놀아서 나이는 제일 많이 먹었지만 좌상 구실은 못했다.
하지만 태휘 형은 공부만은 열심히 했다. 시골집에 두고 온 아들놈들이 쓰다 던진 공책을 가져다가 다시 뒷면에 글을 쓰는데, 워낙 농촌소학교 교사 출신이라 참으로 명필이었다. 잘 여문 콩알 같이 일매진 글체인데, 태휘 형은 교수님의 강의를 거의 기침 소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기록했다. 평소 너무 열심히 강의를 듣고 기록을 하는 태휘 형을 융통성이 없는 양반이라고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일단 기말이 되면 그의 공책은 학급의 보물로 되어 너도나도 다투어 돌려보았다.
1학년 때《습작학》을 배우는데 담임은 최상철 교수였다. 그는 강의도 잘했지만 그 무렵 연변을 찾은 스톡홀름대학 조승복 교수에 대한 방문기를 발표한바 있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강의가 절반 쯤 나갔을 때 최교수가 인물과 사건을 다룬 산문을 써보라고 하기에 나는 이 궁리 저 궁리하던 끝에《산속에 핀 진달래》란 제목의 글을 써서 바쳤다. 태휘 형을 모델로 하였는데, 산속에 핀 진달래라는 메타포를 구사해 눈먼 시아버님을 공양하고 어린 자식을 키우면서 일편단심 대학생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시골 여성을 노래한 작품이었다. 헌데 이 작품이 최상철 교수의 추천으로《연변문학》 1979년 제4기에 실리게 될 줄이야! 나는 마치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었다.
내 소설의 첫 주인공 테휘 형은 공들여 닦은 지식과 재간을 다 펴지 못하고 일찍이 타계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어학에 반해 복수토 “들”만 연구해 “들박사”로 불렸던 전병선씨, 가끔 술주정을 부려 손아래 학우들의 빈축을 샀던 학급장 엄영준씨, 물 첨벙 불 첨벙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민담을 쓰고 인물전을 쓰던 박문봉. 유연산, 이민덕, 이광인씨 모두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대학원 입시제도와의 만남
그 무렵 조문학부에는 기라성 같은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세계문학강좌에 정판룡, 허호일, 서일권, 임휘 교수가 있었고 조선문학강좌에 허문섭, 이해산 교수가 있었으며 중국문학강좌에 권철, 김영덕, 김병수, 허룡구, 김제봉, 김종수, 최건 교수가 있었고 습작학강좌에 박상봉, 전국권, 최상철, 김만석 교수가 있었다. 또한 문예이론강좌에 설인, 현룡순, 임윤덕, 김해룡 교수가 있었고 언어학강좌에 최윤갑, 김상원, 김기종, 김해수, 이득춘, 유은종 교수가 있었다.
학부생시절 아쉽게도 정판룡 교수의 강의는 듣지 못했다. 허호일, 서일권, 임휘 교수가 호머로부터 세익스피어, 발자크를 거쳐 고리키까지 세계문학사 강의를 했다. 허호일 교수의 강의는 논리성과 분석력이 뛰어났고 서일권 교수의 강의는 격정이 넘치고 제스처가 멋있었으며 임휘 교수의 강의는 마치 유명한 연극배우의 명대사를 연상케 했다. 언변보다는 글재간이 뛰어난 현룡순 교수의 강의는 좀 답답한 대로 실속이 있었고 글재간보다는 언변이 좋은 임윤덕 교수의 강의는 부드럽고 조리가 있었다. 말씀은 어눌하지만 판서(板書)는 일품인 최윤갑 교수의 강의, 무미건조한 언어학을 거의 예술에 가까운 표현력으로 이야기하는 김기종 교수의 강의 또한 얼마나 좋았던가.
학부생시절 술을 즐기고 친구가 많은데다가 2학년 제2학기 결혼까지 했지만 내 성적은 줄곧 학급의 상류에 속했다. 여기에 무슨 비방이라도 있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강의를 듣고 독서를 하되 그 내용에 대해 갈래를 나누고 체계를 세워 지식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채워둔다.
둘째, 문학은 최종적으로 많이 읽은 자가 이기는 법이니 될수록 문학사에 나오는 명작을 독파한다. 시간이 딸리면 영화로라도 대리 보충한다.
셋째, 문학과 더불어 역사, 철학 서적도 읽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추고자 노력한다.
넷째, 보고 듣고 느낀 바가 있으면 글을 쓴다. 특히 학부생 시절 8번 주어지는 방학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습작을 한다.
학부생시절 성적은 좋았지만 대학원과정에 진학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출판사에 복직할 수도 있었거니와 《연변문학》과 같은 잡지사에서도 채용하겠다고 했다. 황차 그 무렵 조선문학 관련 대학원생을 받을 수 있는 분은 허문섭 교수뿐인데 전교에서 2명만을 받는다고 했다. 지원자는 20여 명이니 10대 1의 비례도 되지 않았다. 적어도 출판사에 복직할 수 있는 내가 대학원생 입학시험을 보면 다른 동창생들에게 손해를 줄 것 같아 나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 허허롭게 지냈다.
그런데 대학원 입학원서 제출기한을 이틀 앞둔 어느 날, 허문섭 교수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왜 호웅이는 연구생 시험을 보지 않는 거야?”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 아닙니까?”
“아무튼 호웅이는 연구생시험을 보라구.”
거의 명령조로 말씀하는지라 나는 한 마디 버릇없이 쇄기를 박았다.
“시험은 잘 볼 자신이 있습니다만 꼭 받아주셔야 합니다.”
허무섭 교수가 귀띔을 해주는 바람에 나는 부랴부랴 연구생시험을 보았고 한어학부의 관웅형과 나란히 2등 안에 들게 되었다. 형제 둘이 1등과 2등을 하게 되자 허문섭 교수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교수들도 “연구생 둘을 받는데 관웅, 호웅 형제가 다 차지하면 어떡합니까?” 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시비를 갈라준 분이 정판룡 교수다.
스승과의 만남
정판룡 교수를 처음 뵌 것은 1964년 겨울 우리 집에서였다.
큰형 봉웅 역시 조문학부를 다녔는데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닐 생각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에 갔었다.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는지라 우리 어머니가 큰아들을 잃어버렸다고 대성통곡을 했고 평소 우리 집에 잘 놀러왔던 김창락, 한석윤, 유은종 등 학급친구들이 정판룡 교수를 모시고 득달 같이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때 정판룡 교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였는데, 그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허허 웃으며
“이 집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젊은이가 아닙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사람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사나흘 지나면 반드시 자기를 참회하고 어머니 곁에 돌아올 겁니다. 제가 봉웅이 어머니 앞에서 장담을 할게요.”
하더니 김창락 등 학급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봉웅이는 이삼일 후 분명 돌아오는 거야. 내가 알았으면 됐어. 호들갑을 떨며 학교에 보고할 건 없어. 봉웅이가 돌아온 후에도 내색을 내지 말고 이전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야 해. 알겠어?” 하고 다짐을 따고 나서
“봉웅이 어머니, 애들이 정심도 먹지 않고 헐레벌떡 쫓아왔으니 정심이나 차려주십시오. 저도 이 친구들에게 잡혀오다 보니 정심을 걸렀거든요.”
하고 비위 좋게 껄껄껄 웃었다.
정판룡 교수의 말대로 큰형은 이틀 만에 돌아왔고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 때 우리 동생들은 토끼처럼 귀를 강구고 문틈으로 정주방의 동정을 살폈는데, 그 때 뵌 정판룡 교수의 준수한 얼굴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다. 큰형의 일이 있은 후 우리 형제의 눈에 정판룡 교수는 일개 교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비쳤고 우리 형제들은 정판룡 교수의 말씀을 성자(聖者)의 예언처럼 믿게 되었다…
각설하고 관웅 형과 나의 대학원 진학문제를 두고 교수들 사이에 의논이 분분한데, 나중에 형제 둘을 다 입학시키기는 어려우니 동생인 호웅이가 양보는 게 좋겠다는 의견으로 가닥이 잡혔다. 최후로 정판룡 교수의 의견을 물었는데, 유머에 능하고 메타포를 잘 구사하는 정판룡 교수는 서둘러 의견을 내놓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란다.
“<영원히 대오를 따라서>라는 소련소설을 본 생각이 납니다그려. 독소전쟁 때 사령관을 지냈던 한 장군이 전쟁을 끝내고 마흔에 첫 보선으로 대학 문에 들어섰지요. 헌데 새처럼 날렵하게 교단에 올라서는 젊은 교수를 보니까 전쟁할 때 통신병으로 지냈던 친구란 말입니다.
한편 젊은 교수도 교수안을 펼쳐놓고 휙 좌중을 들러보다가 하마터면 기절초풍을 할 뻔 했지요. 조석으로 모시던 사령관께서 학생복 차림으로 교실 뒤쪽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통신병 출신의 젊은 교수는 무슨 정신으로 강의를 마쳤는지 모릅니다. 강의를 마치자 다른 학생들은 우르르 문밖으로 나가는데, 젊은 교수는 허둥지둥 뒤쪽으로 달려와 장군에게 꾸벅 인사를 드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지요. 그러자 장군이 일어서면서 하는 말씀이 뭐겠어요.
‘전쟁터에서는 내가 사령관이고 자네가 통신병이었지만 평화시대에는 자네가 교수고 나는 학생인 거야. 영원히 대오를 따라가자면 각자의 위치가 바뀔 수 있는 거야. 다음 시간부터는 분명 교수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강의하라구!’
학문에는 선후의 차별이 없고 성적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법이요. 공부하는 데 형제간이면 어떻고 부자간이면 어떻단 말이요? 다 자기 몫이란 말이요. 성적 순위대로 합시다.”
쾌도난마(快刀亂麻)란 말을 바로 이런 때 쓰는 게 아닐까? 정판룡 교수의 메타포 한 마디에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교수들 모두가 수긍했고 관웅 형과 나는 나란히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생이 될 수 있었다.
1982년 초봄의 일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어느덧 대학 문에 들어선 지도 30년이 된다. 우리에게 인생과 학문의 길을 가르쳤던 허문섭, 정판룡, 권철 등 교수님들도 하늘나라에 갔다. 그 대신 우리들이 가 그분들이 물려준 교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여러 스승들을 본보기로 늘 옷깃을 여미고 연구와 강의에 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만남들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리라 생각한다.
2007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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