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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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 (김호웅)
2020년 09월 14일 07시 21분  조회:877  추천:1  작성자: 문학닷컴
칼럼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

김호웅

 
 
   1990년 늦가을, 정판룡 선생께서 학술회의 참가 차 미국을 거쳐 일본에 들렸다가 동경의 어느 호텔에서 재일조선인 거물급 인사들을 상대로 일본어로 강연을 했다. 그 무렵 나는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신분으로 동경에 체류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의 시중도 들겸 며칠 동안 함께 지냈다. 그래서 자연 강연장에 가서 정판룡선생께서 일본어로 강연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경청하게 되었다. 좀 발음이 어색했지만 워낙 배포 유하고 유머러스한 어른이라 당신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유감없이 펼쳤고 무시로 청중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일제시기 소학교 3학년 밖에 다니지 못한 선생께서 반백년이 지난 오늘도 슬슬 유모아까지 써가며 일본어로 강연하는데도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강연 뒤끝에 결론 삼아 남긴 이야기는 지금도 새삼스레 내 뇌리를 친다. 그날 선생께서는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력사와 현실을 이야기하고 나서 조선족과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재외동포들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난 100년 세월을 되돌아보면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 형제들은 재일동포나 재미동포에 비해 한가지를 잘하지 못했고 한가지를 잘했습니다. 잘하지 못한 것이라면 재일, 재미 동포에 비해 볼 때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한 것이라면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을 이겨내고 민족교육을 지켜내고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일, 재미 동포들에 비해 보다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미국과 일본을 두루 돌아보니 재일, 재미 동포들은 2세, 3세에 와서 거의 다 우리말과 글을 잃어버렸습디다. 일단 잃어버린 언어는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잘사는 일은 조만간에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등소평시대를 맞아 가난의 때를 벗고 유족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이미 마련했습니다. 그런즉 21세기에 우리는 재일, 재미 동포들 못지 않게 잘 살수 있을 뿐만아니라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쓰는〈조선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과 글을 잃은 재일, 재미 동포들은 더는〈조선사람〉으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좀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저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박수를 좀 쳐주십시오.》
 
   청중들은 한참 어정쩡해 있다가 역시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우리 조선족형제들이 민족교육을 통해 이민사 100년을 기록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조선사람》으로 살게 된 일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허리에 천금을 두른 재일동포들 앞에서도 떵떵 큰소리를 치면서 자랑했던 것이다.
 
   정판룡선생의 말씀에는 사실 깊은 철리가 깃들어있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세기 독일의 철학가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두고《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언어는 민족의 력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한 민족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로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명한 언어학자인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 역시《우리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던 것이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력사도, 문화도, 정신도 다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이는 청나라 동릉(清东陵)에 가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동릉은 하북성 준화시(遵化市) 경내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북경에서 서쪽으로 250리 떨어져 있어 자가용으로 두어시간이면 족히 가볼 수 있다. 나는 2008년 초겨울 북경포럼 때 주최 측의 배려로 가보았다. 북경에 있는 명황릉(明皇陵)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 않으나 1928년과 1945년 두번이나 도굴(盜掘)을 당해서 빈껍데기만 남은 황릉이라 좀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동릉에는 순치(1638~1661), 강희(1654~1722), 건륭(1711~1799), 함풍(1831~1861), 동치(1856~1874) 등 다섯 황제의 릉묘가 있는데 그들의 비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원에 들어온 첫 황제인 순치의 비석을 보면 그 복판에 꼬불꼬불한 만주어가 커다랗게 새겨져있다. 하지만 그 뒤 황제들의 비석으로 오면서 그 복판에는 중국어와 만주어가 나란히 새겨진다. 이제 함풍황제의 비석을 거쳐 동치황제의 비석에 오면 그 복판에 중국어가 대문짝만하게 자리를 잡고 주인행세를 하고 만주어는 비석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무늬구실을 하고 있다.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언어를 잃으면 민족도, 나라도 다 잃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도 대과(大过)는 없을 것이다.
 
   정판룡선생의 일화를 꺼낸 김에 동릉을 견학했던 일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의 현실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조선족 중, 소학교가 점점 줄어들고 조선족학생들이 한족학교에 몰려가고 있다. 일부 학부모들은 이왕 중국에서 사는 것만큼 중국어만 잘하면 됐지, 조선어는 배워서 뭘 하느냐 하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우리 조선족자치주의 언어생활도 말이 아니다. 특히 간판이 그러하다. 조선어에 대한 무지, 지어는 왜곡과 경멸로 얼룩진 간판들이 버젓하게 거리와 관광명소들을 도배하고 있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고문구, 지어는 외설적인 표현들에 어른들마저 고개를 들기 어려운데 이러한 란잡한 언어문화 속에서 자라나는 후세들이 어떻게 바른 언어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다른 민족과 선의적인 경쟁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우리 언어환경이 무너지면 자치주도 몸담을 곳이 없게 되고 기껏해야 허울 좋은 개살구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속수무책으로 수수방관할 수 있는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애착과 배움의 열정, 그리고 그 면면히 이어지던 전통은 어디로 갔는가? 언어를 잃고 영영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만주족의 전철을 우리가  다시 밟아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삼척동자에서 학발로인까지, 특히 조선어교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이를 관장하는 인사들이 모여앉아 시급히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2018년 8월 19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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